시(詩)와 詩魂

그 빵집 우미당 / 심재휘

나뭇잎숨결 2009. 1. 8.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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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빵집 우미당 / 심재휘

나는 왜 어느덧 파리바게트의 푸른 문을 열고 있는가. 봄날의 유리문이여
그러면 언제나 삐이걱하며 대답하는 슬픈 이름이여. 도넛위에 떨어지는 초콜렛 시럽처럼
막 익은 달콤한 저녁이 내 얼굴에 온통 묻어도 나는 이제 더 이상 달지가 않구나

그러니까 그 옛날 강릉 우미당을 나와 곧장 파리바게트로 걸어왔던 것은 아닌데 젊어질 수도 없고
늙어질 수도 없는 나이 마흔 살. 단팥빵을 고르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 이제는 그 빵집 우미당,
세상에서 가장 향긋한 아침의 문은 더 이상 열리지 않네.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것은 이미 이별한 것. 오늘이 나에게 파리바게트 푸른 문을 열어 보이네.
바게트를 고르는 손이 바게트네. 그러면 식탁에서는 오직
마른 바게트, 하지만 씹을수록 입 안에 고이는, 그래도 씹다 보면 봄날 저녁 속의 언뜻 언뜻
서러움 같은, 그 빵집 우미당, 누구에게나 하나씩 불에 덴 자국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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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여관, 그리고 한 평생 / 심재휘

후회는 한 평생 너무나 많은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세월이 더러운 여관방을 전전하는 동안
시장 입구에서는 우체통이 선 채로 낡아갔고
사랑한다는 말들은 시장을 기웃거렸다

새벽이 되어도 비릿한 냄새는 커튼에서 묻어났는데
바람 속에 손을 넣어 보면 단단한 것들은 모두 안으로 잠겨 있었다

편지들은 용케 여관으로 되돌아와 오랫동안 벽을 보며 울고는 하였다

편지를 부치러 가는 오전에는 삐걱거리는 계단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는데 누군가는 짙은 향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슬픈 일이었지만

오후에는 돌아온 편지들을 태우는 일이 많아졌다
내 몸에서 흘러나간 맹세들도 불 속에서는 휘어진다
연기는 바람에 흩어진다
불꽃이 '너에 대한 내 한때의 사랑'을 태우고
'너를 생각하며 창밖을 바라보는 나'에 언제나 머물러 있다

내가 건너온 시장의 저녁이나
편지들의 재가 뒹구는 여관의 뒷마당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향해 있는 것들 중에 만질 수 있는 것은 불꽃밖에 없다
는 것을 안다 한 평생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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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심재휘

 

 

 

 

 

한 그루의 느티나무를,

용서하듯 쳐다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얼마나 행복한 것이냐

 

저녁이 되자 비는 그치고

그 젖은 나무에도 불이 들어온다

내가 마른 의자를 찾아 앉으면

허튼 바람에도 펼쳐진 책이 펄럭이고

몇 개의 문장들은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러면

길 위에 떨어진 활자들 서둘러 주울 때

느닷없이 다가와 말을 거는

수많은 어둠들

 

저 느티나무 밑을 지나는 오래된 귀가도

결국 어느 가지 끝에서 버스를 기다릴 테지

정류장에서 맞이하는 미래처럼

서로 닮은 가지들의 깜박거리는 불빛 속마다

조금씩 다른 내가, 조금씩 다른 표정으로

앉아 있을 테지, 벗겨도 벗겨도 끝내

속내를 보여 주지 않는 오늘들

 

그런 것이다

생의 비밀을 훔쳐본 듯

내게로 온 투명한 하루가, 서서히

그러나 불치병처럼 벗겨지는 풍경을

홀로 지켜보는 일에 대하여, 단지

우리는 조금 쓸쓸해지면 그만이다

 

 

 한국 현대시와 시간

 

 

 

오래된 한옥 / 심재휘


햇살이 몸에서 슬금슬금 빠져나가는 초겨울 오후
미음자(字) 한옥(韓屋)이 순식간에 헐리어 제 속을 드러낸다
푸른빛의 족쇄에서 벗어나
땅으로 갈 것들은 땅으로 가고
먼지로 날아갈 것들은 먼지로 가고
참으로 오랫동안 손잡고 집이었던 것들이
뿔뿔이 거리로 나서는데
집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한 기왓장 몇 개
아직 제 삶인 양 허공에 떠 있다
저들은 원래 하늘에 속한 것이었을까
바람의 몸을 하고
바람소리로 중얼거리는 기둥 없는 집
기둥은 누워도 기둥이고
허공의 기왓장은 여전히 지붕이고
올해 아버지는 잃을 것 없는 일흔이시다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