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안에 웅얼거리는 소리가 아우성친다면 ----------------------------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어라
많이 쓰기 전에, 많이 생각하기 전에, 제발 많이 읽어라. 시집을 백 권 읽은 사람, 열 권 읽은 사람,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 중에 시를 가장 잘 쓸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 나는 시 창작 강의 첫 시간에 반드시 읽어야 할 시집 목록을 프린트해서 학생들에게 나눠준다. 모두 200권쯤 된다. 내가 강의하는 건물에는 국악과가 있어 가야금이나 거문고 따위를 들고 오르내리는 학생들이 자주 보인다.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시집이 악기다. (13~15쪽)
시는 ‘대변’을 ‘똥’이라고 말하는 양식이다
‘똥’이라는 말은 얼마나 향기로운가! ‘똥’이 삶의 실체적 진실이라면 ‘대변’은 가식의 언어일 뿐이다. 시는 ‘대변’을 ‘똥’이라고 말하는 양식이다. 그리하여 시는 ‘똥’이라는 말에 녹아 있는 부끄러움까지 독자에게 되돌려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즐거워 슬그머니 미소를 띤다.
모름지기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은 ‘똥’에 유의해야 한다. 절대로 ‘똥’을 무시하거나 멀리해서는 안 되며, ‘똥’이라는 말만 듣고 코를 싸쥐어서도 안 된다. 똥을 눌 시간을 겸허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똥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하며, 똥하고 친해져야 한다. 똥을 사랑하지 않고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사랑할 수 없다. (32쪽)
시마와 동숙할 준비를 하라
시인이란, 우주가 불러주는 노래를 받아쓰는 사람이다. 언제, 어디서든 메모지와 펜을 챙기고 받아쓸 준비를 하라. 잠들기 5분전쯤 기발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 ‘아, 내일 아침에 꼭 그것을 써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잠들어버리지 말라. 영감은 받아 적어두지 않으면 아침까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시와 시인과의 대결은 서로 잡고 잡히는 어린애들의 놀이와 다르지 않다. 옛 시인들은 시마詩魔가 있다고 믿었다. 시에 사로잡힌 상태를 말한다. 이 귀신이 몸에 붙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고, 몸과 마음이 온통 시에 쏠려 있게 된다. 시를 쓰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시를 한창 쓰고 있을 때 당신도 이 귀신을 만나야 한다. 이 귀신과 친해져서 이 귀신이 옮긴 병을 앓아야 한다. 당신도 시마와 동숙할 준비를 하라. (36~37쪽)
무엇을 쓰느냐보다 ‘어떻게’ 바라보는냐가 더 중요하다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소재를 택해 쓰느냐는 게 아니다. 그 어떤 소재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적 경험은 나의 경험의 일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 나의 경험 중에 나만의 시각으로 바라본 적이 있는 것을 우리는 시적 경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시인은 경험한 것에 대하여 쓴다. 하지만 경험한 것을 곧이곧대로 쓰지는 않는다. 이것저것 여러 가지 일을 해 본다고 많은 시적 경험이 쌓이는 것은 아니다. 바쁘게 한 세상을 살아왔다고 그 수많은 경험들이 글쓰기로 이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엇’을 쓰려고 집착하지 말라. ‘무엇’을 쓰려고 1시간을 끙끙댈 게 아니라 단 10분이라도 ‘어떻게’ 풍경과 사물을 바라볼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59쪽)
지독히 짝사랑하는 시인을 만나라
백석의 시를 처음 읽은 것은 1980년, 대학 1학년 때였다. 백석이라는 낯선 시인의 이 시 한 편은 스무 살 문학청년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나는 캄캄해졌다. 그만 눈이 멀어버린 것이다. …… 나는 백석의 새로운 시를 만날 때마다 노트에 한 편 두 편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럴 때면 묘한 흥분과 감격에 휩싸여 손끝은 떨리고 이마는 뜨거워졌다. 나는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필사했다. …… 그가 내게 왔을 때, 나는 그의 시를 필사하면서 그를 붙잡았다. 그건 짝사랑이었지만 행복했다. (65쪽)
소월도 3년을 고쳤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1922년 7월 『개벽』에 처음 발표되었다.
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진달래꽃」하고 상당히 다르다. 1925년 12월에 출간한 시집 『진달래꽃』을 준비하면서 소월은 3년 동안 시를 퇴고한 것이다. 시행을 바꿔 전체적으로 리듬을 유려하게 살렸고, ‘고히고히’는 ‘고이’로 줄였으며(‘한아름’은 ‘아름’으로), ‘그’라는 불필요한 관형사를 지웠다. 특히 3연은 대폭 손질한 흔적이 뚜렷하다.
가시는 걸음걸음 / 놓인 그 꽃을 /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앞서 등장한 ‘길’과 ‘뿌리다’ ‘고히’라는 말이 3연에 다시 반복되어 있는 것을 보고 언어의 장인인 소월은 못 견뎠을 것이다. ‘마다’라는 조사는 얼마나 가시처럼 그의 눈에 거슬렸을까? 이러한 퇴고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걸음걸음’이라는 생동감 넘치는 한국적 언어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신도 시를 고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라. 밥 먹듯이 고치고, 그렇게 고치는 일을 즐겨라. 다만 서둘지는 마라.
바깥으로 뱉아 내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것이 / 몸 속에 있기 때문에 /꽃은 핀다 /솔직히 꽃나무는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게 괴로운 것이다 //내가 너를 그리워하는 것 /이것은 터뜨리지 않으면 곪아 썩는 못난 상처를 /바로 너에게 보내는 일이다 /꽃이 허공으로 꽃대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다 꽃대는 꽃을 피우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자기 몸을 세차게 흔든다 /사랑이여, 나는 왜 이렇게 아프지도 않는 것이냐 //몸 속의 아픔이 다 말라버리고 나면 /내 그리움도 향기나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 //살아 남으려고 밤새 발버둥을 치다가 /입 안에 가득 고인 /피 뱉을 수도 없고 뱉지 않을 수도 없을 때 /꽃은 핀다
- 안도현의 <꽃> 전문
좋은 시는 어떻게 쓰는가?
시인 안도현이 자신의 ‘시 창작 강의노트’라 할 수 있는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를 출간했다. 안도현이 “고등학교 문단을 들락거리며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 까까머리 문학소년”이 된 계기는 1978년 학원문학상을 받으면서부터이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황동규 시인과 고故 김현은 “앞으로 한국의 좋은 시인 하나를 가지게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덕담을 남겼는데, 시인은 지난 30년 동안 그들의 격려를 녹록치 않은 시적 성취로 화답했고, 이제는 이 책과 더불어 ‘좋은 시인’을 넘어선 ‘좋은 시 선생’이라는 호칭을 얻게 될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의 시인으로 살아가는 꿈”을 꾼 지 꼭 30년이 되던 지난 2008년, ‘시와 연애하는 법’이라는 타이틀로 6개월 동안 <한겨레>에 연재했던 원고를 대폭 손질하고, 내용을 보강해 묶은 이 책은 ‘좋은 시는 어떻게 태어나는지’, ‘좋은 시는 어떻게 쓰는지’를 고민하게 하는 시작법 책인 동시에 오랜 세월 시마詩魔와 동숙해온 시인 자신의 시적 사유의 고갱이들이 담겨 있다.
이 책에 ‘좋은 시를 어떻게 쓸 수 있는지’에 대한 비법이 수능시험 답안지처럼 나와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시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신 없다고 하며, 자신은 그저 ‘시적인 것’을 탐색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시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과정은 곧잘 ‘시적인 것’이 아닌 것들을 보여주는 방식을 취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제발 시를 쓸 때만 그리운 척하지 마라. 혼자서 외로운 척하지 마라. 당신만 아름다운 것을 다 본 척하지 마라. 모든 것을 낭만으로 색칠하지 마라. 이 세상의 모든 슬픔을 혼자 짊어진 척하지 마라. 아프지도 않은데 아픈 척하지 마라. 눈물 흘릴 일 하나 없는데 질질 짜지 마라. 무엇이든 다 아는 척, 유식한 척하지 마라. 철학과 종교와 사상을 들먹이지 마라. 기이한 시어를 주워와 자랑하지 마라. 시에다 제발 각주 좀 달지 마라. 자신에게 감정을 고백하고 싶으면 일기에 쓰면 된다. 특정한 상대에게 감정을 고백하고 싶으면 편지에 쓰면 그만이다.(94쪽)
또한 안도현은 시가 가장 피해야 할 것으로 ‘상투성’을 꼽는데, 그의 시에 대해 “쉽게 읽히면서도 상투적이지 않고 오랜 감동을 준다”는 세간의 평가가 많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는 시뿐만 아니라 시작론인 이 책에서도 상투성과 난해함이라는 두 장애물을 세련되게 피해가며 시의 내용과 형식이 취해야 할 것의 핵심을 짚어준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자신이 ‘문학소년’ 시절부터 오랜 세월 시를 쓰고자 하는 열병을 겪어왔고, 중고등학교 교사 시절과 지금의 시 창작 수업을 통해 수많은 문청들이 시의 세계에 발 딛는 데 징검돌을 놓아준 경험을 통해, 그들의 눈높이를 맞춰왔기 때문일 것이다.
시가 탄생하는 현장을 바라보다
그리하여‘시가 탄생하는 순간’에 대한 시인의 경험은 자연스럽게 시작법을 설명하는 중요한 방식으로 책 속에 녹아 있고, 시인 자신의 시 창작에 얽힌 사연과 경험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은 이 책의 큰 장점이 된다. 시인은 고등학교 시절에 쓴 시를 부끄러이 공개하면서, 자신이 골랐던 시어 하나하나에 얽힌 사연을 소개하기도 하고, 급기야 화장실에서 떠오른 시상 메모가 어떻게 한 편의 시로 탄생하는지 그 과정과 흔적을 소상히 서술한다. 안도현의 시 중에 가장 널린 알려진 것 중 하나가 - ‘연탄재’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진 -「너에게 묻는다」라는 짧은 시인데, 이 시에 얽힌 뒷얘기도 재밌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 전문
나는 연탄을 내세워 ‘가을’에 대해 쓰고 싶었다. 아니, ‘가을’을 쓰려고(‘가을’을 내 방식으로 인식하려고) 연탄을 끌어들였다는 말이 맞겠다. 연탄을 실은 트럭과 리어카가 거리와 골목을 누비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가을이었다. 어릴 적에 내 자취방 부엌에는 늘 연탄이 있었다. 언덕 위에 있던 그 자취방을 나와 학교로 가려면 가파른 길을 내려가야 했다. 겨울이면 눈 녹은 물이 비탈길을 빙판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런 아침에는 누군가 어김없이 비탈길에 연탄재를 잘게 부수어 뿌려놓곤 했다. 그 고마운 분이 누구인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이 세상에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일찍 일어나는 분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연탄은 내게 두 가지의 의미를 한꺼번에 선물했다. 하나는 가을이라는 계절을 인식하는 소재로, 또 하나는 타인과의 관계를 성찰하는 상징으로 나에게 온 것이다. (41~42쪽)
쉽게 읽혀지면서도 ‘관계의 본질과 방향’에 대한 묵직한 통찰을 담고 있는 단 세 줄의 이 시는 어느 한 순간 쉽사리 씌어진 듯 오해할 수 있지만, “나의 경험 중에 나만의 시각으로 바라본”시적 경험을 바탕으로 수없는 ‘행갈이’의 시행착오와 마침표를 찍을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쩨쩨하고 치사한” 고민 끝에 한 편의 시로 세상에 탄생한 것이다. 시인은 어느 시집 후기에선가 “시가 나를 끌고 다녔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렇듯 이 책 곳곳에는 ‘시가 그를 어떻게 끌고 다녔는지‘에 대한 흔적이 담겨 있고, 그렇게 자신의 시 창작 경험을 드러내며 ‘시적인 것’에 다다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좋은 시를 읽는 기쁨을 통해 시와 친해지는 법
이 책이 염두에 두고 있는 첫 번째 독자는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와 더불어 이 책은 시와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 시와 연애하고 싶은 사람들 모두가 기꺼이 읽을 수 있는 시 입문서로서의 노릇도 적절해 보인다. 그 동안에도 한국 시인들의 좋은 시를 소개하는 작업을 통해 시의 대중화에 고민해온 안도현 시인은 책의 서문에 “독자들께 시작법과 더불어 한국어로 쓴 시의 정수를 맛보는 즐거움을 과외로 선사하고 싶었다”라며 책 속에 좋은 시의 증표로 삼을 만한 100여 편의 시를 소개한다. 또한 이 시들이 왜 좋은 시인지에 대한 시인의 도움말은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대한 ‘시독법’과 유기적으로 연결 되어 있어 독자들이 시와 친해질 수 있는 계기를 자연스럽게 마련할 것이다. 좋은 시를 쓰고 싶은 사람은 물론이고 시와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시라는 세계에 어떻게 다가갈 수 있는지 답답해했던 사람들,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에 대한 안목을 기르고 싶었던 사람들, 어떤 시인, 어떤 시집을 읽으면 좋을지 막막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이 맞춤한 시 안내서로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 이 책의 출간 계기는?
시작 활동과 창작 강의를 하면서 습작기에 있는 사람들이 ‘시작법’에 목말라 하고 있는 것을 종종 보았다. 이 책은 나의 경험을 풀어 정리한 것이다. 「한겨레」에 매주 한 차례씩 6개월 동안 연재한 글을 대폭 수정했고, 전체 분량의 30%는 지난겨울에 새로 보완했다.
* 이 책을 읽으면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나?
적어도 기본적인 품격을 갖춘 시는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허접스러운 시를 버릴 줄 아는 안목을 키울 수 있다면, 시와 시 아닌 것을 구별할 줄만 안다면 그것도 다행이 아닐까?
* 이 책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근대적 한국문학은 서구 문학이론과 미학적 관점을 적극 수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다 보니 시창작 방법에 관한 이론이나 서적들도 서구 이론의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어로 쓰는 시는 어떠해야 하는가, 시를 대하는 동아시아적 태도는 서구의 시작법과 무엇이 다른가, 시쓰기가 단순한 기술적 차원을 넘어서려면 어떠한 자세로 거기에 임해야 하는가 따위를 탐색해보고자 했다. 우리의 전통적 미학사상가들, 즉 허균, 박지원, 정약용, 이덕무 등의 산문이 거기에 작은 힌트와 해답을 보여주었다. 시인이 시를 만드는 게 아니라 시인의 태도가 시의 방향을 정한다.
*시 공부를 하는 사람들만 읽는 책인가?
시를 창작하는 일과 시를 감상하는 일이 별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일반적인 글쓰기와 시쓰기가 또 별개가 아니다. 좋은 글은 세상을 보는 눈과 글 쓰는 사람의 기술이 합쳐질 때 나온다.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라는 제목이 바로 그런 뜻이다.
* 책에 인용한 시들은 어떤 기준?
여기 인용한 시들은 몇몇 작품을 빼고 거의 90년대 이후에 발표된 시들이다. 현 단계 한국시의 한 흐름과 맥을 짚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작법도 시작법이지만 시를 읽는 기쁨을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다면 다행일 것이다.
행과 연을 매우 특별하게 모셔라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김소월, <가는 길> 일부) 이렇듯 절묘하게 우리의 전통적 율격인 3음보를 활용하던 시절은 차라리 행복했다.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박목월, <윤사월> 전문). 간략한 7·5조에 기대어 봄날의 애틋한 정취를 짧게 노래하던 시절도 먼 옛날이 되었다.
시를 쓰게 되면 누구나 행과 연을 구분하게 되고, 그에 따른 리듬의 변화에 민감해진다. 문학수업 시간에 귀가 닳도록 듣게 되는 그놈의 내재율이 항상 문제인 것이다. 내재율은 정형시의 율격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시의 내부에 숨어 있는 리듬을 말한다. 이 보이지 않는 리듬은 시와 시 아닌 것을 구별하는 중요한 형식적 잣대가 되기도 한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다만 모든 자유시가 내재율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창작자의 입장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김우창은 “어느 시대에서나 진정 잘 된 시에서 적절한 음악의 형식은 발견되어야 한다”고 했고, 이형기는 “일상에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소리를 예술적으로 조직한 구조물이 시”라면서 시의 음악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의미(내용)와 소리(형식)의 유기적 결합이 운율의 핵심”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모두 의미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렇지만 근대 이후 대부분의 창작자는 음악성보다는 회화성을 확보하는 일에 우선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그래서 주제나 소재와 같은 내용의 형상화를 고심하는 동안 리듬에 대한 배려는 뒤로 밀쳐두는 일이 빈번해진다. 시인들은 형식을 낯설게 변화시키는 일을 내심 두려워하는 것도 사실이다. 설혹 과감하게 기존의 형식으로부터 탈출을 감행한다 하더라도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한다. 그렇게 현재의 형식에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과 탈출하고자 하는 마음 사이에 낀 존재, 그가 시인이다.
시의 리듬이 발생하는 지점은 행갈이, 연의 나눔, 음절과 음운의 반복·고저·장단·강약, 문장 부호의 배치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에서 시의 행과 연은 외형적으로 시와 산문을 가장 잘 구별해주는 요소이다. 행과 연을 활용해 무엇을 쓴다는 것은 시인의 특권이자 시인에게 내린 축복이라 할 수 있다. 시에서 이처럼 중요한 행과 연을 매우 특별하게 모시지 않으면 시인으로서 낙제다. 당신이 시를 쓸 때 아무 의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행과 연을 바꾸었다면 지금부터 자중하라. 관습적인 행갈이는 당신이 쓰는 시의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까지 관습화한다. 시의 호흡에 따라 적당히 행을 바꾸면 된다고, 행갈이에 특별한 규칙은 없다고 생각한다면 빨리 그 나쁜 생각을 버려라. 행갈이에 ‘적당히’란 없다.
한 편의 시를 쓰는 일은 한 채의 집을 짓는 일과 같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즉흥적으로 집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계도면이 있어야 하고, 그 일을 수행할 인부와 집을 세우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확보해야 하고, 충분한 공사기간이 있어야 한다. 시가 하나의 유기체적 구조물임을 염두에 둔다면 행을 바꾸거나 연을 나눌 때에도 시인의 의도가 충분히 개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계획과 의도 없이 절대로 행을 당신 마음대로 바꾸지 마라. 시의 리듬을 고려해 행을 바꾸었다고 구차하게 변명 좀 하지 마라.
예컨대 최근에 당신이 10편의 시를 썼다고 치자. 그 시행의 길이가 다 고만고만하고, 각각의 시의 길이가 모두 비슷비슷하다면 당신의 시작 행위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라. 그때 당신의 리듬은 기계적인 리듬이어서 아무도 당신의 리듬에 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리듬뿐만 아니라 시의 내용도 제자리걸음일 것이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말은 백번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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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손으로 우리 식구 먹여 살리고
수출품을 생산해 온
검고 투박한 자랑스런 손을 들어
지문을 찍는다
아
없어, 선명하게
없어,
노동 속에 문드러져
너와 나 사람마다 다르다는
지문이 나오지를 않아
없어, 정형도 이형도 문형도
사라져 버렸어
박노해의 시 <지문을 부른다> 일부이다. 우리는 그동안 박노해가 현장노동자 출신의 시인이라거나 그의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이 노동자의 당파성과 미래를 향한 진보적인 상상력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에만 주목해왔다. 물론 박노해를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다. 나는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여기에 세 번 등장하는 ‘없어’에 사정없이 꽂혀버렸다. 주민등록증 갱신을 위해 지문을 찍다가 노동자로 산 덕분에 문드러지고 사라져버린 지문을 어쩌면 이렇게 선명하게 부조할 수 있는가! 인용 부분의 첫 번째 ‘없어’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충격과 놀라움이 있고, 두 번째 ‘없어’에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의 까무러치는 비명이 있고, 세 번째 ‘없어’에는 절망으로 들끓는 복잡한 심리가 투영되어 있다. 또한 ‘없어’의 뒤에 붙은 쉼표 하나하나는 시의 호흡을 가파르게 하면서 앞에서 터져 나온 ‘아’라는 감탄사를 뒤로 계속 밀어붙이는 구실을 동시에 수행한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 ‘없어’는 지문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 이외에 자본주의 시장에서 노동자의 존재란 없다는 각성까지 환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중 한 부분을 행갈이와 쉼표 없이 적어보자.
아 없어 선명하게 없어
어떤가? 행갈이의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단 한 글자, 혹은 두 글자라도 그게 하나의 시행이 되려면 시의 전체 흐름에 힘을 가하는 무게가 있어야 한다. 만약에 전체 20행의 시가 있다면 한 행은 이십분의 일의 언어 밀도와 생각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고 책임져야 한다. 김춘수는 <시의 이해와 작법>에서 시행 구분의 원리에 대해 심도 있는 의견을 제출한 적 있다. 그는 일본 시인 기다조노 가즈에의 말을 인용하면서 시의 각 행은 ‘사상의 분량’ ‘의미의 분량’ ‘이미지의 분량’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였다. 이것만 봐도 계산된 의도 없는 시행 바꾸기가 시를 얼마나 허약하게 만드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시가 잘 쓰이지 않는다는 것은 써야 할 내용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다. 형식을 변화시킬 만한 에너지를 행 바꾸기에서부터 찾아라. 습관적으로 바꾸고 나눠왔던 행과 연에 변화를 도모하라. 한 행에 들어가는 글자 수를 바꿔보라. 시의 길이를 지금보다 길게 늘이거나 대폭 줄여보라. 모두들 긴바지를 입는 겨울에 시인은 반바지를 입고 뚜벅뚜벅 바깥으로 걸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시행이 산문의 형태를 취한다는 것은 개별적인 리듬이나 이미지보다 전체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오규원 <현대시작법>)고 했다. 행갈이가 애매하고 지겨워지면 아예 행을 무시한 산문시로 건너가 보라. 거꾸로 산문시가 구태의연하다고 느껴지면 다섯 줄 이하의 짧은 시로 건너가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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