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는 이들의 다섯가지 즐거움>으로 '2009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김연수의 또 다른 책, <청춘의 문장>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1997년 무렵, 서울 큰 병원에 오신 어머니를 고향으로 보내 드리느라 서울역에 나갔다가 우연히 할인 판매하는 책들을 봤다. 세상에는 슬픈 낯빛을 한 얼굴들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내겐 재고로 할인 판매되기를 기다리는 책들의 낯빛이 무척 슬프다. 언뜻 훑어보는데 정조 때 사람 이덕무의 책이 보였다. 아무 생각없이 나는 그 책을 사서 들고 관절염으로 고향가시는 어머니를 배웅해드렸다" 문청시절 배고픈 서른다섯의 이야기다. 배가 고핐던 사람은 훗날 배가 고푼 사람을 불러 배불릴 수 있다. 글을 쓰는 작가가 된다는 것은 이름에 대한 욕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글로써 허기진 이들을 배불리는 것이다. 글은 시대를 초월한 밥이다. <청춘의 문장>이란 책을 읽지 않았다면 오늘, 이덕무의 <배고픈 새>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배고픈 시절의 쓰라린 밤샘이 아지못한 이에게 자기도 모르게 이덕무를 소개한 셈이다. 이덕무의 글을 읽다보니 배가 고파야 글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청장 이덕무, 1741년(영조 17) 한성 중부 관인방寬仁坊 대사동大寺洞, 지금의 인사동에서 정종 임금의 후손인 아버지 이성호李聖浩와 어머니 반남潘南 박씨朴氏 사이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덕무의 할아버지 필익必益은 강계부사를 지낸 인물이었는데, 아버지 성호는 필익의 막내아들로 서자였다. 이덕무에게 아버지는 항상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어린 시절 이덕무는 항상 집을 비우는 아버지가 안타까워 먼 길을 떠날까 항상 아버지의 옷깃을 잡고 이리저리 따라 다니곤 했다고 한다.
이덕무의 초년 이름은 종대鐘大로 불리다 명숙明叔, 무관懋官으로 불렸으며 호는 청장관靑莊館, 선귤당蟬橘堂, 형암炯菴, 아정雅亭 등이다. 서자로 태어난 그는 신분적 상황으로 인해 어려서부터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보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은 내성적인 아이로 성장했다.
병인년(1746년) 여섯 살 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십구사략』을 가르치자 채 1편도 끝나기 전에 글을 훤히 깨우쳤다.
열두 살에서 열네 살, 성장기 이덕무는 마호麻湖(지금의 마포대교 부근)에 있던 외숙 박순원朴淳源의 집과 용호龍湖(지금의 한강대교 부근)에 살던 작은 아버지 이성옥李聖沃의 집에서 자주 보내면서 한강변의 아름다움을 시로 옮기기도 했다.
병자년(1756년) 16세, 동지중추부사 백사굉白師宏의 딸 수원 백씨와 결혼했다. 친구 백동수의 누이와 결혼했는데, 이덕무는 백동수, 백동좌 두 손 아래 처남과 아주 친하게 지냈다.
경진년(1760년) 20세, 이덕무는 남산 아래 장흥방長興坊1)에서 살았는데, 이때 백동수․이형상․서사화․윤가기․김홍운 등과 친하게 지냈다. 이들은 이덕무의 인척이거나 중인층 신분의 인물들이었다. 또한 남산을 자주 오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를 많이 지었다. 신사년(1761년) 21세, 북한산성을 유람하였다. 계미년(1763년) 23세, 10월 13일에 세 살 된 딸이 죽었다.
을유년(1765년) 25세, 5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해 6월 아들 광규가 태어났다. 아래 시는 벼를 수확하러 천안에 내려가다가 어머니 묘에 참배하며 지은 시다. 이덕무는 이 농장에서 해마다 벼 10섬씩을 수확하여 생활을 꾸려갔다.
어린놈은 한창 자고 있고, 여윈 아내는 일어났으니, 잘 있어라 당부하고 말을 빌려 탔다. 많은 책들은 아우에게 맡겨 두고, 지붕 이는 일은 친구에게 부탁했다. 성문을 나서니 들국화 짙은 냄새와 단풍이 나에게 아양을 떤다. 나루터에 이르니 잔물결과 흰 자갈이 깨끗하다. 지나는 길에 어머님 묘에서 목매이게 흐느끼며 절하고 눈물이 서리 맞은 풀에 떨어져 흠뻑 옷깃을 적시고 있다.
穉兒方睡瘦妻興 留贈平安借馬乘 管領藏書憑舍弟 句堂葺屋仗隣朋
出城細菊穠楓媚 臨渡文猗素礫澄 歷拜孃阡呑咽咽 淚飛霜草滿裾凝
병술년(1766년) 26세, 이덕무는 대사동으로 이사를 했는데, 이때 박지원을 비롯한 백탑파 친구들과 교류했다. 이때 자신의 문집 『이목구심서』를 지었다. 무자년(1768년) 28세, 이름을 명숙明淑에서 무관懋官으로 고쳤다. 시아버지 상을 당한 사촌누이를 서울로 데려오기 위해 충북 괴산의 장연까지 혼자 길을 떠났는데, 가고 오며 천리가 넘는 길에 마주쳤던 시골 풍경과 풍속 등을 글로 남겼다. 그는 항상 여행을 가기 전 붓을 비롯한 문방사우를 챙겨 떠났는데, 그런 버릇은 나이가 들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광규가 아버지에 대한 회상에서 밝힌 글을 보면 “아버지는 여행을 할 때에도 반드시 책을 소매에 넣어가지고 다니셨고, 심지어 종이와 벼루, 그리고 필묵까지 싸가지고 다니셨다. 그래서 주막에서나 배안에서도 책을 덮은 적이 없었는데, 만일 기이한 말이나 이상한 소리를 들으면 곧바로 기록하였다.”고 적고 있다.
기축년(1769년) 29세, 5월에 청장서옥靑莊書屋을 마련하다. 친구 관헌觀軒 서상수가 집에 있는 책을 팔고 취현醉玄 이응정李應鼎이 나무를 모아 띠를 덮은 집을 지었다. 모두 기둥이 여덟 개였다. 경인년(1770년) 30세, 초부樵夫 남유두南有斗와 조카 광석光錫과 함께 남한산성을 유람하다. 부윤府尹 박도원朴道源이 홍주紅酒를 보내왔는데 그 술병에 이렇게 적었다.
<술 항아리에서 향기가 피어나니 적성赤城의 봄은 노을 같고, 맑은 술을 잔에 쏟으니 구리 쟁반은 가을 이슬 같네. 동림東林의 아름다운 선비의 시, 혹시 남은 게 있다면 남쪽에 있는 나에게도 보내 주게. 甕面香浮起 赤城之春霞 杯心光徹瀉 金莖之秋露 東林佳士詩 或可聞南樓>
신묘년(1771년) 31세, 사촌형 이경무李敬懋가 황해절도사로 있어, 황주와 평양 등 주요 명소를 조카 광석과 연암 박지원 선생과 친구 백동수가 함께 동행同行하였고, 개성 만월대에서 헤어졌다. 그곳에서 많은 시를 지었다. 이덕무는 대동강 남쪽에 황주 월파루月波樓에 머물며 시를 적어 현판에 걸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술은 취해 붉은 적삼 젖고, 젊은 계집 눈짓하며 머물게 하네. 강과 산은 멋진 모습이라 옛날 이곳에 온 풍류객은 누구던가. 깎아지른 절벽에 비껴 서린 성곽과 텅 빈 물가에 우뚝 솟은 누각을 보면 황주는 참 아름다운 곳이라. 갑자기 들리는 피리 소리 고향 시름 늦추는 구나. 酒浪春衫濺 紅我賣眼留 江山眞氣勢 今古誰風流 斷岸橫蟠郭 虛汀待時樓 黃州知信美 急管緩鄕愁>
계사년(1773년) 33세, 박지원 유득공 등과 함께 다시 평양을 유람하면서 시를 지었다. 이때 지은 시가 「계사춘유기癸巳春遊記」이다. 갑오년(1774년) 34세, 증광초시增廣初試에 합격했다. 친구이자 후배인 이서구는 문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이덕무는 관직에 뜻을 두고 있지 않았다. 을미년(1775) 35세, 아이들 예절을 가르치기 위해「사소절士小節」을 완성하다. 병신년(1776년) 3월 25일, 지평砥平을 갔다. 원중거元重擧가 용문산龍門山 아래 집을 짓고 살았는데, 이때 이덕무는 친구들과 함께 배를 타고 용문산에 들어갔다. 이때 지은 글이 「협주기峽舟記」다. 정유년(1777년) 37세, 이만운과 함께 「기년아람紀年兒覽」을 지었으며, 이 책은 역사책이다. 무술년(1778년) 38세, 3월 사신을 따라 연경燕京에 갔다가 그해 7월 초에 귀국했다. 이덕무는 이때 반정균 등 중국의 학자들과 역사 문화에 관한 폭넓은 대화를 나누었고 평생 우정을 나누기로 했다.
기해년(1779년) 39세, 이덕무는 드디어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6월 1일 박제가․유득공․서이수 등과 함께 초대 검서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덕무는 외각外閣 검서관檢書官으로 임명되었다. 임금은 규장각 팔경시八景詩를 짓게 하였는데 이덕무의 시가 제일로 뽑혀 『명의록明義錄』이란 책 1질을 하사받았다. 경자년(1780년) 40세, 아들 광규가 동래東萊 정씨鄭氏에게 장가를 들었다.
신축년(1781년) 41세, 내각 검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임명되었다. 3월에는 사도시 주부에 임명되었고, 그해 12월 이덕무는 경상도 함양에 있는 사근역沙斤驛에서 문서를 기록하는 찰방察訪에 임명되었다. 임인년(1782년) 42세, 국조보감 감인 낭청의 상당직에 제수되었다. 계묘년(1783년) 43세, 사근역에서 오래 전부터 공채로 이익을 늘리던 폐단을 혁파하였다. 6월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대묘동大廟洞(지금의 종묘)으로 이사하였다. 11월, 광흥창 주부에 전임되었다. 갑진년(1784년) 44세, 2월 사옹원 주부에 전임되었고, 그해 6월 적성현감으로 임명되었다.
을사년(1785년) 45세,『대전통편』을 교정하였다. 병오년(1786년) 46세, 역대 임금의 치적에 관한 『갱장록 羹牆錄』을 편교 및 감인하였다.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을 교정하였다. 임금은 “이덕무 유득공은 모두 고을 원으로 자주 입직하여 고을 업무를 보지 못하니 민망하다. 그리고 저들이 왕래하느라 피곤하니 검서의 임무를 줄여 주는 것이 좋겠다.”고 전교하였다.
정미년(1787년) 47세, 『문원보불文苑黼黻』을 편교 감인하였다. 적성현감積城縣監에 계속 유임되었다. 경기감사 서유방은 “전임 적성현감은 글에만 능할 뿐 아니라 백성을 다스리는 재주도 있으니 공무 집행하기를 마치 자기 집안일 보듯 해서 성과를 이루었으니 그를 유임시키소서.”하고 간청하자 임금이 그대로 허락한 것이다. 무신년(1788년) 48세, 4월 2일 부친의 71세 생신잔치를 벌였다. 친척과 벗들이 축하하는 시를 지었다. 8월 5일, 손자 이규경李圭景 태어났다. 기유년(1789년) 49세, 친구 백동수와 함께『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였다. 적성현감에서 물러나와 와서별제瓦署別提에 임명되었다. 경술년(1790년) 50세, 사도시주부로 전임되었다. 왕의 명으로『은애전銀愛傳』과 『김신부부전金申夫婦傳』 등을 지었다.
신해년(1791년) 51세, 2월에 상의원 주부에 전임되었다. 3월에 장원서 별제로 전임, 5월에 다시 사옹원 주부로 전임되었다. 임자년(1792년) 52세, 한양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한 ‘상시전도’라는 그림을 제목으로 시를 지어 임금에게 바쳤는데, 그의 시가 1등을 차지했다. 임금 정조는 ‘이덕무의 시를 읽으면 그림을 보는 듯이 그 정경이 환하다.’고 극찬하였다. 계축년(1793년) 53세, 1월 25일 태묘동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18일부터 갑자기 기침이 심하고 감기가 크게 들어 가래가 끓더니 갑자기 타계하였다. 2월 21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판교의 언덕에 묻혔다.
- 박지원, 이덕무를 추억하며
적성현감積城縣監(지금의 파주시 적성면) 검서관 형암炯庵 이덕무는 정종定宗의 별자別子 무림군茂林君의 후예이다. 강계도호부사 필익必益이 조부가 되고, 통덕랑 성호聖浩가 아버지가 된다. 어머니는 반남 박씨인데 현감 사렴師濂의 딸이요, 금평위錦平尉로서 시호가 효정공인 필성弼成의 손녀다. 신유년(1741년) 6월 11일 태어나 계축년(1793년) 1월 25일에 본가에서 죽었으니 향년 53세다. 달을 넘겨 경기도 광주 판교에 장사지냈다. 3년이 지난 을묘년(1795년) 지금 주상이 내각에 분부하여 “죽은 검서관 이덕무의 재주와 식견을 아쉽게 생각하니 내탕전 5백 냥을 하사하여 그의 책을 간행하게 하라.”는 분부를 내리셨다. 이때 그의 아들 광규光葵가 그의 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행장을 지어 달라 하였다. 아! 내가 이덕무와 노닌 지 30년이라 그의 평소 행동과 언행에 모르는 것이 없어 사양하다 행장을 짓는다.
무관은 일개 가난한 선비로 임금은 그의 생전의 글을 간행하라는 분부 끊이지 않으니, 이는 주상의 총애가 남다른 것이며 그의 온순하고 단아하고 소탈하고 시원한 용모와 말씨와 글이 후세에 전해짐을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잃고 여전히 방황하고 울먹이면서 혹시라도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하였으나 얻을 수 없었다.
무관은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문자文字를 즐겼다. 하루는 집안사람들이 그가 없어져 하루 종일 찾았는데, 저녁이 되어서야 집 담벼락 뒤 풀 더미 속에서 찾았다. 이는 고서古書를 보기 위해 조용한 곳에 있다가 시간 가는 줄 몰라 그렇게 된 것이다. 그는 어른에게 글을 배우면 분명하게 탐구하고, 마음속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항상 묻곤 했다. 또한 벽에다 남몰래 해시계를 그려 독서의 시간을 정해 놓고, 비록 아이들과 정신없이 놀다가도 때만 되면 반드시 일어나 가서 단정히 앉아 책을 읽었다.
그는 성장하여 온갖 서적들을 많이 보았는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빌려주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또한 책을 베끼는 버릇이 있어 늘 하나의 책을 얻게 되면 읽은 다음에 베끼곤 하였으며, 항상 얄팍한 책을 수중에 넣고 다니면서 주막이나 배舟안에서도 책 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평생 동안 읽은 책은 만 권이 넘으며 손수 베낀 책도 수백 권으로, 글씨 또한 방정하며 아무리 바빠도 속자速字로 쓰지 않았다.
지금 주상이 즉위한 지 3년에 규장각을 설치하고 검서 네 사람을 뽑을 때, 무관이 으뜸으로 선출되었으며, 모든 정사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없다. 무관이 이때 지은 책이 10여 종이 된다고 한다. 그는 겸손함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책을 보자 하면 “나의 사고는 귀하지 못한지라, 남에게 보이면 사흘 동안 부끄러워진다. 상자 속에 깊숙이 넣어 두었는데 스스로 나올 날이 있을 것이다.”라고 한사코 사양했다 한다.
그의 처음 문집은 『영처고嬰處稿』라 하였고, 두 번째 문집을 『청장관고靑莊館稿』라 하였으며, 그 안에 언어 행동에 있어 도道에 벗어나지 않고, 귀와 눈․입․마음의 책임을 게을리 아니하여 듣는 대로 쓰고, 보는 대로 쓰고, 말하는 대로 쓰고, 생각하는 대로 썼다 하여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라 하였다. 또한 작은 예절을 중히 여기지 않으면 큰 것을 어찌 하겠는가? 이에 옛 성현들의 여러 좋은 말을 옮겨 「사소절士小節」이라 하였다.
또한 어떤 이가 시詩는 어느 것이 좋으냐고 하자, 그가 대답하길 “꿀벌이 꿀을 만들 때 꽃을 가리지 않는 것처럼 시를 하는 것 역시 이와 같다. 천지의 영명한 기운이 고금에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라, 그 빼어난 글귀를 채택하여 나의 창자를 씻는다.”고 하였다 하여 이를 『청비록淸脾錄』이라 하였다. 연대를 기준으로 사실을 엮었고 중요한 것만 들어 어린 학동들이 알아보게 하였기 때문에 「기년아람紀年兒覽」이라 하였다.
그는 일찍이 말하길, “내 진실로 유사시 섬나라 사신으로 간다면 그들을 살피는 것이 남만 못하지 않으리라. 나는 일찍이 표류되어 돌아온 사람에게 그 지역의 사실을 묻되, 마치 그 땅을 밟아본 것처럼 하니, 그 사람 깜짝 놀라며 공이 언제 섬나라를 갔었느냐고 물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것이 바로 일본의 지도․풍요風謠․토산土産을 기록한 「청정국지蜻蜓國志」요, 옛 사람들이 몸소 밭을 갈면서 항아리盎를 밭 가운데 묻어놓고 감나무 잎을 따 그 항아리에 넣고 한 이랑이 끝나면 하나씩 넣곤 하듯이 하여 그것을 「앙엽기盎葉記」라 하였다. 또한 영남에서 벼슬하며 견문을 널리 기록하여 알뜰히 수록한 그것이 바로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이요, 여러 의심되는 어려운 글자를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 「예기억禮記臆」이요, 임금의 명으로 「송사전宋史筌」을 교열하면서 특별히 몽고와 요遼․금金의 열전列傳을 기술한 것이 바로 「송사보전宋史補傳」이며, 갑신년에 유민들의 생활을 기록한 것이 바로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로 이것은 다 간행하지 못한 것이다.
무관은 일찍이 유자儒者로 자칭하지 않고 작은 실수도 없이, 문장을 이룸에 화려함에 힘쓰지 않고 말과 뜻이 잘 통하게 하였으며, 조리 있고 간결하기로 일가를 이루었다. 지금의 임금이 그를 산림山林의 기상이 있다고 칭찬하였으며, 다방면에 박식하여 모든 초목이나 충어蟲魚에 있어 농부나 촌 노인들이 능히 판별할 수 없는 것도 정확히 판별하였고, 그 섬세하고 은은함이 자못 깊어 묻는 사람에게 매사 메아리처럼 응하여 상대방 요구에 만족시킨 뒤 그치곤 하였다. 세상에서 무관을 평하는 자는 그의 품행을 제 일一로 치고, 지식을 제 이二로 쳤으며, 넓은 견문을 삼三으로, 그리고 문예의 특별함을 제 사四로 쳤다.
아! 무관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단정하여 함부로 교유交遊하지 않으며, 들어앉아 글을 읽은 지 40년 동안 그 이름이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아, 유명한 벼슬아치 하나 아는 이가 없었다. 다 찌그러진 집에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고 끼니를 자주 거르되, 배고프고 춥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아 그 처자들도 그 말을 듣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장중하되 잘난 체 하지 않으며, 화평하게 즐기되 너무 가까워 버릇없게 굴지 않았다.
지극한 효성으로 아버지를 섬겨 얼굴에는 항상 부드러운 빛을 나타내었으며, 어머니 상喪을 치를 때도 수질首絰과 요질腰絰를 벗지 않았으며, 묘소에 오를 때 종자宗子의 집에도 가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울부짖어 이웃 사람들은 귀를 막았다.
무관은 검서 22개월을 거쳐 사도시 주부에 승진되었다가 사근도 찰방에 나갔으며, 광흥창 주부와 사옹원 주부를 거쳐 적성현감에 임명되었다. 어떤 이가 적성현은 “고을이 빈약하고 봉록이 박하다”고 하자 무관은 정색을 하며 “내 본래 서생書生인데 두터운 성상의 은덕으로 고을을 지키며 늙으신 어버이 공양하게 되었으니 이 보다 더한 은총은 없다. 그런데 감히 다른 것을 말할 수 있나?”라고 말하며 사비를 털어 청사를 즉시 새롭게 수리해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작은 정자를 지었는데, 그 운치가 깊고 정경이 아낄 만 했다. 그 정자에 ‘우취옹又醉翁’이란 편액을 걸고 한가로이 홀로 거닐곤 하였다.
집안사람들에게는 “주역에 ‘절제하기를 몸에 익히면 재산을 잃지 않고, 백성을 해치지 않는다.’하였거늘 국가도 그러한데, 하물며 조그마한 고을은 더욱 그러하다.”고 말하며 고을 재산을 꼼꼼하게 관리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서는 말馬도 없이 여종으로 하여금 겨울 두꺼운 옷과 모자를 싸가지고 따르게 하여 이문원摛文院 에 도보로 출퇴근하였다.
무관은 소시부터 과거 시험에는 등한하였고, 늘 사람들에게 “내가 평생 글 읽기를 좋아하는데, 오늘날 고관古觀에 소장한 어서御書를 열람해 보게 되었으니 할 일을 다 했다고 하겠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는 임금을 모시고 임금의 문자를 교정하는 일을 하였는데, 그가 목소리를 낮추어 글을 읽자, 임금은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하고는 “너의 글소리 좋으니 음성을 높이라.”하여 그를 아낌이 남다름을 보여주었다. 하루는 임금이 “나는 늙어간다. 더 늙기 전에 문예부흥에 힘써 은미한 것을 높이어 후대에 길이 남을 일을 하고 싶다.”고 하였으며 그에게 후학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무관이 죽기 1년 전, 임금은 한양의 그림지도「성시전도城市全圖」 대해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하였는데, 무관의 백운시百韻詩를 보고 탄복하여 “그의 시를 보면 그림을 보는 듯하다”고 칭찬하며 그의 시권에 ‘아雅’자를 써 주어 드디어 아정雅亭이란 자호를 얻게 된 것이다.
그의 부인은 수원水原 백씨白氏로 동지중추부사 사굉師宏의 딸이요, 충장공 시구時耈의 증손녀다.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그가 광규光葵요, 두 딸은 유선柳烍과 김사황金思黃에게 시집을 갔다. 아! 무관과 같은 풍류문아風流文雅는 다시 접촉할 수 없으나, 그 평생의 행적을 보건대 청사淸士에 이름 오를 것은 의심이 없다. 삼가 위와 같이 글을 올려 세상에 그를 기리고자 한다.
바야흐로 이경인지 삼경인가 싶은데 대문을 마주한 이웃집에서 떠들썩 웃는 소리가 멀리서 이따금씩 들려왔다.
매운 바람에 눈가루가 날려 창틈에서 곧바로 등불 그림자까지 이르고, 펄럭이며 벼루 위로도 떨어졌다.
나는 이때 옛날을 감상(感傷)하는 마음이 너무도 구슬프고 절실하였기에 다만 손가락 끝으로 뜻 가는 대로 화로의 재에다 글씨를 썼다. 모나고 반듯한 것은 전서(篆書)나 주서와 비슷했고, 얽히고 설킨 것은 행서나 초서에 가까웠다.
나는 넋놓고 바라보며 마침내 그것이 무슨 글자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갑자기 눈썹 언저리가 돌같이 무거워져 왔다. 혼자서 불빛에 비친 얼굴 그림자를 보니 무너질 듯 기우숙하였다.
이에 다시금 엄숙하게 옷깃을 바로 하고 똑바로 앉아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한동안 붙박힌 듯 집의 들보를 우러러 보았다.
그러자 옛 사람의 고결한 행실과 바른 절개가 역력히 떠오르는 것이었다.
나는 개연히 말하였다.
"명절(名節)을 세울 수만 있다면
비록 바람 서리가 휘몰아치고 거센 파도에 휩쓸려 죽게 된다 할지라도 후회하지 않으리라.
또 인간 세상의 쌀과 소금 따위 자질구레하게 사람을 얽어매는 것들은 훌훌 벗어 던져 깨끗이 마음에 두지 않겠다."
어린 동생은 아무 것도 모르고 이불에 누웠는데, 자는 소리가 쌔근쌔근하여 매우 편안하니 상쾌하였다.
내가 이에 번연히 평(平)과 불평(不平) 중 어느 것이 더 나은가를 깨달았다.
그제서야 눈썹을 내리깔고 손을 모으고 《논어》 서너 장을 읽었다.
그 소리가 처음에는 막혀 껄끄럽다가 나중에는 화평하게 되었다.
가슴속에 가득 차오르던 것이 그 소리에 점점 가라앉더니, 답답하던 기운이 비로소 내려앉고, 정신이 맑고도 시원해졌다.
공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온화하고 화평한 말 기운으로 나로 하여금 거친 마음을 떨쳐내어 말끔히 없어지게 하고,
평정한 마음에 이르게 한단 말인가? 공자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거의 발광하여 뛰쳐나갈뻔 하였다.
앞서 한 일을 생각해보니 아마득하기 마치 꿈 속만 같다.
- 이덕무, 을유년(1765년, 25세) 12월 7일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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