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핵(ANNUS MIRABILIS)이라고도 불리는 것, 1905년 아인슈타인은 그때까지 물리학계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있던 브라운 운동, 광전 효과, 특수 상대성 효과를 해명하는 논문을 잇달아 발표하여 고전 역학과 전자기학을 하나로 묶고, 고전 역학과 양자역학 사이에 다리를 놓아 '통합 물리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 기틀 위에서 20세기 과학 발전의 원동력이 된 물리학 혁명이 시작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국제 연합(UN)은 올해를 세계 물리의 해로 지정하였고, 국내외에서 다양한 행사가 이뤄지고 있다.
동시에 올해는 또 하나의 통합 과학인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이 탄생된 지 30년 된 해로 기억되어야 한다. 1975년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Edward Osborne Wilson)의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이 출간되어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만물의 영장' 인간을 다른 동식물과 같은 위상으로 끌어내리고 생물학 및 진화적 관점으로 해석해 냈다. 그의 이 개척자적 모험과 도전은 수많은 반발을 야기했고, 생물학, 사회학, 심리학 같은 유관 분야를 논쟁의 폭풍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지난 30년 동안 진행된 사회생물학 논쟁은 학문적 논의 안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기존의 형이상학적 사고를 증발시켜 버렸고, 사회생물학, 진화심리학, 인간행동유전학 등의 '통합 과학'들을 발전시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을 사회적?생물학적 존재로서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에드워드 윌슨은 이후 ?인간 본성에 대하여(On Human Nature)?, ?생명의 다양성(The Diversity of Life)? 등을 출간하여 인간 본성에 대한 '통합 과학'적 이해를 대중적으로 확산시켜 왔다.
이번 (주)사이언스북스에서 ?사이언스 클래식? 6권으로 출간된 ?통섭: 지식의 대통합(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은 ?사회생물학?의 출간 이래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이라는 '두 문화' 사이에 놓인 거대한 틈을 메워 온 에드워드 윌슨의 노력이 집대성되어 있는 책이 출간됐다. 그는 이 책에서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연구자들이 인간의 지식이 본질적으로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망을 바탕으로 협력?연구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20세기의 물리학 혁명이 그랬던 것처럼 통일된 연구 속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진실한 이해와 인간 외부 세계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 근거한 21세기적 지식 혁명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전망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해 서구 학문의 큰 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다양한 가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그 가지들 속에 숨어 있는, 그렇지만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간과했던 지식 통합의 가능성을 찾아내 명확하게 보여 준다. 서구 학문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세계관에서 출발하여 근대 학문과 과학의 모체가 되었던 계몽주의를 거쳐 현대 자연과학, 사회과학, 예술, 종교 이론에까지 이르기까지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전망 속에서 인간의 지적 모험을 통시적?공시적으로 아우르는 에드워드 윌슨의 이 책은 그의 하버드대 동료 교수인 제럴드 홀턴의 말대로 "파편화되어 있는 오늘날 지식 세계의 풍경을 진정 새로운 방식으로 조망하고 이해할 수 있는 높은 고지대로 이끌어 준다."
통섭의 시대, 21세기 지식 혁명은 이 책에서 시작된다! 이 시대의 지적 거인 에드워드 윌슨이 제시하는 현대 학문의 위기와 전망
20세기의 학문의 역사에서 언제나 논쟁의 중심에 섰던 에드워드 윌슨은 이 책에서 자신의 지식의 대통합 전망을 한마디로 응축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어를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통섭(統攝, cosilience)'이다. 이 개념은 20세기 지식의 파편화 시대 이후 잊혀졌던 윌리엄 휴월(William Whewall)의 'consilience'를 부활시킨 것이다. 휴월이 그의 ?귀납적 과학의 철학(The Philosophy Of The Inductive Science)?에서 사용한 이 개념은 '함께 넘나듦(jumping together)'이라는 뜻의 라틴 어 'consiliere'에서 가져온 것으로 "설명의 공통 기반을 만들기 위해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한 이론을 연결함으로써 지식을 '통합'하는 것"을 뜻한다. 지식의 통합 전망을 갖춘 학문의 세계와 지식의 통합 전망을 갖추지 못한 학문 세계를 구별될 학문의 역사에 에드워드 윌슨은 이 개념을 하나의 이정표로 제시한다.
에드워드 윌슨의 제자인 서울 대학교 생명과학부 최재천 교수는 이 책을 옮기면서 윌슨과 휴월의 'consilience' 개념을 '통섭'으로 번역한다. 웬만한 영어사전에 없는 단어를 웬만한 국어사전에 없는 ' 통섭'으로 번역한 이유는 최재천 교수가 ?옮긴이 서문?에서 밝힌 것을 보면 명확하게 이해된다.
통섭은 대만 중화 학술원에서 펴낸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과 일본 학자 모로하시 데쓰지(諸橋轍次)가 편찬한 『한화대사전(漢和大辭典)』에 비교적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 것처럼 '큰 줄기' 또는 '실마리'라 는 뜻의 통(統)과 '잡다' 또는 '쥐다'라는 뜻의 섭(攝)을 합쳐 만든 말로서 '큰 줄기를 잡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삼군(三軍)을 통섭하다."는 경우와 같이 '통리(統理)' 즉 '장관'이라는 뜻을 지닌 정치 제도적 용어이기도 하다. 그럴 경우에도 그 뜻은 "모든 것을 다스린다." 또는 "총괄하여 관할하다."이므로 그런대로 잘 들어맞는 것 같다. 사실 윌슨은 "사물에 널리 통하는 원리로 학문의 큰 줄기를 잡고자" 이 책을 저술한 것이니 그의 consilience에는 전자(通涉)와 후자(統攝)의 개념이 모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말로 '통섭'이라고 할 때에는 구태여 이 둘을 구별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혼동을 줄이기 위해 나는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최재천, 옮긴이 서문에서
그렇다면 에드워드 윌슨과 옮긴이들이 내세우는 지식의 대통합, 통섭(consilience)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뤄질 수 있는가? 이 책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한 지적 모험담이다. 21세기의 학문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으로 양분되고 사회과학은 생물학과 인문학에 흡수될 것이다 그리고 과학과 인문학을 융합하려는 인간 지성의 위대한 도전을 계속될 것이다!
에드워드 윌슨, 『통섭: 지식의 대통합』, 최재천·장대익 옮김 (서울: 사이언스북스, 2005) / Edward O. Wilson,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1998).

생명애로 가득 찬 세계적인 석학 에드워드 윌슨이 인간 본성에 대한 사회생물학적 물음과 해답을 제시
이 책은 인간 본성에 대하여 지난 수천 년간 있어 왔던 모든 형이상학적 논의를 생물학적인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하도록 만들었다. 인간은 다른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엄밀하게 본다면, 인간은 유전자를 담는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유전자는 그릇을 통해 적자생존이 이루어지고, 살아남은 유전자는 더 진화된 그릇을 만들어 자연선택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책 전체의 맥락을 한눈에 파악하는 데는 윌슨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서울대 생물학과 교수 최재천 교수의 「추천의 말」이 도움이 된다.
이 책에서 윌슨은, 종교와 윤리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사회 행동은 결국 생물학적 현상에 불과하며 집단생물학과 진화학적 방법론으로 분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책에 전개되어 있는 윌슨의 논리는 그가 영국의 소설가 버틀러의 말을 새롭게 표현한 '닭은 달걀이 더 많은 달걀을 생산하기 위해 잠시 만들어낸 매개체에 불과하다'는 한마디로 축약할 수 있다. 유전자의 눈높이에서 생명을 바라보는 이 새로운 관점에 따르면, 사랑·윤리·자기희생·종교 등 인간만이 갖고 있을 법한 특성들조차 인류의 진화사를 통해 어떤 방식으로든 번식을 도와 왔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우리 속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번식을 돕는 성향을 조절하는 유전자는 그만큼 더 많은 복제자를 후세에 남겼을 것이고 또 그래서 그 성향이 세대를 거듭할수록 더 많이 발현된다는, 언뜻 생각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듯한 지근히 간단한 논리만 제대로 이해하면 금방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이 책의 1장 「인간 본성의 딜레마」에서는 인간이 생물학적 존재로서 지니는 한계로부터 오는 딜레마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번째 딜레마는 한마디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정해진 곳이란 결코 없다는 것이다. 종은 자신의 생물학적 본성 외에 그 어떠한 목표도 갖고 있지 않다.... 두 번째 딜레마는 우리가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 내재한 윤리적 전재들을 놓고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윌슨은 이러한 문제 제기를 통해 이를 극복하는 과정으로 사회과학과 생물학의 만남을 이야기한다. "생물학이 인간 본성을 푸는 열쇠이기 때문에, 사회과학자들은 급속하게 강화되고 있는 생물학 원리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내용 면에서는 사회과학이 훨씬 더 풍부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2장 「유전적 진화」에서는 인간의 사회적 행동이 유전적으로 얼마나 결정되는가에 대해 논의한다. 이것은 일부 반분야의 학자들이 완곡한 '유전자 결정론'이라고 왜곡하는 저의와는 달리 실제 생물학적, 문화적으로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가에 대한 고찰이다.
3장 「준비된 학습」은 인간 행동을 규정하는 유전자의 형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의 유전자들은 하나의 형질을 규정하기보다는 어떤 형질의 배열을 발달시키는 능력을 규정한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인간은 오른손잡이가 될지 아니면 왼손잡이가 될지 미리 정해져 있다."
4장 「문학적 진화」에서는 유전자가 문화적 진화에 끼치는 영향을 분석한다. "유전자 결정은 더 이상의 문화적 진화가 일어날 수 있는 여지를 좁힌다....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는 그다지 멀리까지 나아갈 수 없다. 문화적 진화로 창조된 사회 환경이 결국에는 생물학적 자연선택의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5장 「공격성」에서는 인간이 지닌 공격성의 생물학적 특성과 문화적 진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윌슨은 인간의 공격 행동이 유전자와 환경 사이의 구조적이고 예측 가능한 상호작용 패턴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공격성의 문화적 진화는 (1)공동체가 지닌 특정한 유형의 공격성을 학습하도록 편향된 유전적 성향, (2)사회와 직접 접촉하고 있는 환경이 부과하는 필연성, (3)특정한 문화적 혁신을 채택하도록 편향된 그 집단의 역사, 이 세 힘이 통합되어 이끄는 것이다."
6장 「성」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성적 차이와 역할이 생물학적·문화적으로 어떠한 특성과 연관성을 가지고 진화해 왔는가에 대해 말한다. "문화는 남성과 여성의 신체 및 성격 차이를 보편적인 남성 지배 체제로 증폭시켜 왔다.... 각 사회는 현재 전세계로 전파되고 있는 여성들의 권리 투쟁을 모두 인정하고 다음 세 가지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1)행동의 성적 차이가 더욱 확대되도록 사회 구성원들을 개량한다. (2)행동의 모든 성적 차이가 제거되도록 사회 구성원들을 교육시킨다. (3)평등한 기회와 참여권만을 제공하고 더 이상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윌슨은 이 장을 통해, 새롭게 발전한 진화론의 도움을 받으면 인간의 성을 훨씬 더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7장 「이타주의」에서는 인간이 지닌 이타주의가 사회생물학적으로 어떠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지 분석한다. 윌슨은 이타주의적 행동을 '맹목성 이타주의'와 '목적성 이타주의'로 크게 나뉘어 인간에서 두 가지가 나타나는 비율과 성향을 보여준다. "목적성 이타주의는 인간에게서 극단까지 정교해져 왔다.... 인간의 이타주의는 가장 가까운 친척에게 향할 때면 사실상 맹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 이타주의의 나머지 부분들을 본질적으로 목적먹이다. 그래서 개인의 마음은 양가감정, 기만, 죄 의식으로 뒤범벅이 되어 언제나 근심에 차 있게 된다."
8장 「종교」은 종교에 대한 사회생물학적 분석을 보여준다. "종교는 인간 사회생물학의 가장 커다란 도전 대상이자, 사회생물학이 전정 독창적인 분야로 발전할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기회이기도 하다.... 유전자 빈도 중에는 성직자 선택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변하는 것도 있다." 윌슨은 '대상화, 의탁, 신화'라는 세 가지의 종교 만들기 요소들이 어떠한 생물학적 연관성을 가지고 종교 체제를 구축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종교적 호소력의 생물학적 근원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 근원으로부터 그것의 현재 형태들을 도출해 내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진화 서사시는 개인의 불멸성과 사회에 대한 신의 특권을 부정하며 인간 종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로서만 제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9장 「희망」에서는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적 지식의 증가와 함께 인간이 창조해 나갈 새로운 시대를 기대한다. 특히, 윌슨은 과학적 발전에 있어 변증법적 특성을 강조하면서 한 분야와 반분야 간의 상호작용과 새로운 종합을 주장한다.
이 책은 비록 학술적인 차원에서 저술되기는 하였으나, 사회생물학이라는 새로운 관점과 구체적이고 문화적인 예들로 가득하여 일반 독자들도 충분히 흥미를 가지고 읽을 수 있다. 또한 이 책에는 인간에게 내재된 가능성을 인식하는 지침이 담겨 있으므로 독자들은 이 책을 거울삼아 각자의 개체적 특성을 비춰볼 수도 있다.

저명한 사회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의 1998년 저작 『통섭: 지식의 대통합』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사회과학 사이에 놓인 두터운 ‘두 문화’의 벽을 허물고 지식의 소통과 통합을 이루자는 매력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은 두 문화의 “양극화”를 우려하는 이들의 눈길을 끌만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원자와 분자 수준의 환원주의와 “극단적 전문화”에 매몰된 현대 과학의 전통에 학제간 지식 통합을 향한 관심과 각성을 촉구하고 자기 관점에만 갇힌 인문학·사회과학자들한테 자연과학의 신선한 피를 수혈하라고 촉구하는 저자의 주장은 의미 있는 자극이 될만하다. 그러나 이 책은 저자 윌슨이 일찌감치 이 책에서 “[철학 진영은] 나에게 혼합주의, 단순주의, 존재론적 환원주의 그리고 과학주의 같은 혐의를 뒤집어씌울 게 분명하다”고 예견한대로(44쪽), 또 자연과학자가 인문학·사회과학을 향해 던지는 야멸찬 비판과 비관적 전망,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신랄한 공격(91-97쪽)의 수위가 어떤 긴장감을 자아낼 정도에 이른 데에서 예견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출간 이후에 여러 곳에서 논란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예컨대 웬델 베리,『삶은 기적이다』(Life Is a Miracle, 2000), 박경미 옮김, 2006). 이 책은 학제간 협동연구의 당위를 주장하는 텍스트의 하나로서 수사학의 분석 대상이 되기도 했다(Leah Ceccarelli, Shaping Science with Rhetoric: The Cases of Dobzhansky, Schrodinger, and Wilson, 2001). 게다가 책이 출간된 1998년은 물리학자 소칼의 엉터리 논문 사건을 계기로 과학자와 과학철학·과학사회학 사이에 ‘과학전쟁’이 한창 뜨겁게 벌어지던 시기였다. 이런 의미에서도 이 책은 화제의 책이 되었다.
무엇보다 독자는 책의 제목에 새삼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핵심 주제어인 ‘통섭(consilience)’은 생소한 말이기도 하거니와 윌슨이 자기주장을 가장 잘 담은 말로서 세심하게 선택해 내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윌슨은 이 말이 영국 과학철학자인 윌리엄 휴월의 『귀납적 과학의 철학』(1840)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전하면서, 그것이 “설명의 공통기반을 만들기 위해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한 이론을 연결함으로써 지식을 ‘통합’하는 것을 뜻한다”고 밝혔다(40쪽). 그래서 다른 비슷한 말들을 물리치고 선택된 통섭은 ‘윌슨 식의 지식 통합 구상’을 함축하는 말로 이해된다(번역자가 신중한 탐색을 거쳐 ‘통섭’을 번역어로 택한 것도 저자의 이런 뜻을 고려했기 때문일 터이다).
지식은 하나로 통한다고 바라보는 “통섭적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에는 윌슨이 통섭의 은유로서 들려주는 ‘크레타 섬의 미로 이야기’ 신화가 도움이 될만하다(134쪽).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는 크레타 섬의 미로 중심부로 걸어 들어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뒤에 미로 안으로 들어갈 때에 풀어놓았던 실타래를 다시 되밟아 구불구불한 미로를 빠져나온다는 게 신화의 줄거리다. 여기에서 윌슨은 “경험 지식의 미로”를 은유에 빗댄다. 그 미로의 입구에는 물리학이 있고 그 다음에는 모든 탐구자들이 따라가야만 하는 몇몇 통로들이 갈라져 있다. 그리고 미로의 깊은 안쪽에는 사회과학, 인문학, 예술 그리고 종교로 통하는 통로가 있다. 그러니까 물리학이 가장 바깥쪽에 놓이며 사회학, 인문학, 예술, 종교가 안쪽에 놓이는 구조를 이루는데, 길을 찾기 힘든 미로일망정 모두 이어져 있는 이런 구조야말로 자연과학과 인문학·사회과학의 통섭을 제안하게 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래서 만일 “인과적 설명들을 이어 주는 실타래”가 끊어지지 않고 잘 풀려 미로에 놓인다면 어떤 통로에서든 사회학, 인문학, 예술, 종교는 자연과학으로, 또는 반대 방향으로 쉽게 통할 수 있다. “지식의 통일성에 대한 믿음”이란 곧 이런 구조를 갖춘 “미로의 실재에 대한 믿음”이다(183쪽).
윌슨은 통섭이 자연과학에서 시작해 다른 영역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7, 18세기 계몽의 시대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과학이 확실한 지식의 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통섭의 방법 덕분이었고, 그래서 통섭은 자연과학에서 객관적 지식의 성공을 보장하는 원리로서 충분히 검증됐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에는 그동안 두 방향의 통섭이 작동했는데, 미로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식의 ‘환원을 통한 통섭’과, 길을 되짚어 미로 밖으로 나오는 식의 ‘종합을 통한 통섭’이 그것들이다. 먼저 ‘환원을 통한 통섭’은 명백히 성공적이었다. 예컨대, 분자생물학은 물리학과 화학의 환원주의적 원리들을 사용해 세포를 소기관으로, 소기관을 분자로 분해하고 분석해 확실한 지식의 체계를 구축했다. 또한 자연과학의 여러 분과들 사이에는 ‘통섭의 가로지르기’가 수행되어 과학 지식의 객관적 진리를 보증한다. 환원을 통한 통섭의 성공 스토리는 이제 종합을 통한 통섭에도 자신감을 발휘한다. “적어도 물질세계에 대해서만큼은 개념적 통일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이 분명”하고, 그리하여 “자연과학 분과 사이의 경계들은 혼성 영역들이 계속 생겨나면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으며 통섭이 그 영역들에서 조용하게 이루어지고 있다”(43쪽). 종합의 통섭은 환원주의를 통해 얻은 지식을 재구성하여 자연현상을 더욱 정밀하게 예측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통섭은 자연과학의 역사를 통하여 객관적 지식 체계를 공고화했으며 진리는 하나뿐임을 확인해주었다는 게 윌슨의 요약이다.
윌슨의 주장은 좀더 진전하며 도전적 제안을 던진다. ‘통섭적 세계관’에서 보자면, 객관적 진리는 하나인데도 어떤 현상에 대해 인문학적 해석, 사회과학적 해석, 자연과학적 해석이 따로 나오고 따로 수용되는 것은 분명한 오류 아닌가? 또 “인간이 물리적 인과관계에 따른 사건들로 인해 행동하는 존재라면 사회과학과 인문학은 자연과학과의 통섭에서 왜 면제되어야 하는가?” 윌슨의 답은 당연히 자연과학적 통섭의 원리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쪽이다. 이 책의 대부분은 ‘최첨단의 지식 전선’에 선 현대 과학과 인문학·사회과학의 여러 내용을 비교 분석하면서(즉 통섭의 가로지르기를 시도하면서), 두 문화의 통섭은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주려는 데 할애됐다. 프로이트의 꿈 해석에 대한 비판과 분자생물학 수준의 꿈 해석(5장), 문화와 유전자의 상호영향과 공진화에 대한 연구성과들(7장), 인간 본성에 대한 유전자 수준의 이해(8장), 경제학의 합리적 선택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9장), 그리고 예술과 윤리·종교에 대한 진화생물학적 이해(10장, 11장)는 그런 사례들이다. 그러니까 꿈, 문화, 인간본성, 합리적 선택, 예술, 윤리, 종교 같은 인문학·사회과학의 주요 주제들이 자연과학의 세례를 받는다면, 또는 그것으로 대체된다면 훨씬 더 합리적 설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윌슨은 단순히 보여주기에 머물지 않고 좀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그는 인문학·사회과학이 자연과학적 증거들을 무시하고는 공허하고 그릇된, 또는 불완전한 해석에 매달린다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윌슨이 보기에, 통섭을 통한 지식 대통합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미래에 서로 신선한 창조성의 원천을 제공하겠지만 사회과학의 미래는 그다지 밝지 않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21세기 학문의 거대한 두 가지가 될 것”이지만 “사회과학은 계속 세분화되면서 그중 어떤 부분은 생물학으로 편입되거나 생물학의 연장선 위에 있게 될 것이며 그 밖의 부분들은 인문학과 융합될 것”이기 때문이다(45쪽). “9장 사회과학”에서 윌슨은 사회 현상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과 예측 능력의 과학성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인간 생물학과 심리학의 물리적 실재 속에 단 한번도 끼워 넣어 보지 못[한]” 사회과학자들의 지적 게으름과 편견을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320쪽).
사회생물학자 윌슨이 인문학·사회과학에 제시하는 통섭의 실질적 내용은 “유전자·문화 공진화(gene-culture coevolution)”라는 개념 안에 압축됐다. 그는 유전자가 문화를 결정한다는 식의 유전자결정론을 반대하지만 문화는 문화로부터 온다는 식의 문화의 자율성 이론도 반대한다. 그의 통섭적 관점은 그 중간쯤에 있다.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공진화’의 개념이 제시된다. 공진화의 개념적 뼈대는 이렇다. ‘유전자는 인지 발달의 신경회로와 규칙적인 후성규칙(後成規則, epigenetic rules)을 만들어내고 개별 마음은 그 규칙을 통해 자기 자신을 조직한다. 주변 문화와 환경에서 더 잘 생존하고 번식하도록 해주는 후성규칙들은 대물림한다. 이런 식으로 문화와 유전자는 상호영향을 끼치며 함께 진화한다(232-233쪽).’ 여기에서 유전자와 문화의 공진화는 예술, 윤리, 종교, 그리고 문화의 현상을 ‘통섭적으로’ 규명하는 핵심적 ‘교량(bridge)’이 된다. 그러므로 윌슨의 논증을 좇다보면, 인간행동유전학·사회생물학·진화생물학·뇌과학을 아우르는 생물학은 이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통섭에서 없어서는 안 될 ‘교량’ 같은 존재로 떠오른다(334쪽).
그러나 윌슨 식의 지식 대통섭 프로그램이 다양한 전통과 개성을 지닌 ‘지식공화국’의 시민들한테 얼마나 큰 설득력을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만일 그가 마음에 둔 독자들이 인문학·사회과학적 지식전통과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나는 몇 가지 점에서 그의 주장에 다소 허점이 노출돼 있으며 그런 허점 때문에 그의 희망은 제대로 관철되기 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첫째 그는 자연과학에서 성공을 검증받은 “통섭적 세계관”이 인문학·사회과학에서도 ‘예측과 설명의 성공’을 보장할 것이기에 그들이 이를 수용하지 않음은 어리석은 일이며 따라서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통섭을 이끌 과학으로 제시하는 지식의 체계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이런 불완전성은 윌슨도 스스로 인정하는 바이다. “인간행동유전학은 학문적으로 아직도 걸음마 수준”이며(275쪽), 유전자·문화의 공진화에 대한 이해는 지금 “불완전한 지식”에 머물러 있다(282쪽). 인간의 본성은 다 이해할 수 없고 “지금 막 그것에 대한 정확한 표현을 찾기 시작했[을]” 뿐이다(291쪽). 뇌과학도 역시 인간의 마음을 해명하기에는 갈 길이 너무도 멀다. 이처럼 불완전한 지식의 상태라면 어떻게 인문학·사회과학 쪽에 자연과학적 통섭을 행하라고 말끔하게 설득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더욱이 자연과 사회 세계의 ‘복잡성’은 이 책 곳곳에서 윌슨도 인정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볼 때에 윌슨이 자연과학적 통섭을 인문학·사회과학의 영역에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금의 ‘현실’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자연과학의 자신감에서 비롯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당위’를 말하는 것으로 들린다.
특히 지식의 대통합을 주장하는 윌슨의 제안은 권유나 청유의 분위기가 아니라 현대 생물학 지식 체계의 우월성을 내세우고 인문학·사회과학을 공격하며 생물학을 뒤좇으라고 주장하는 것이기에 다소 위협적인 분위기마저 느끼게 한다. ‘두 문화’의 “양극 현상은 우리 모두에게 실제적인 손해이고 지적인 손실이며 창조성의 말살이다”라는 C. P. 스노의 『두 문화』(1959)를 인용하면서도 협상과 조화의 태도보다는 양극적 태도는 지속적으로 유지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와 지식상대주의를 강력히 비판하고 자연과학적 방법을 외면하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대해 지식의 각성을 촉구하는 윌슨의 목소리는 18세기 계몽사조 철학자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사실, 그가 “3장 계몽사상”에서 말하듯이 과학 지식의 확실성을 사회, 문화에 확장하여 적용하려 했던 문제의식은 18세기 계몽사조 철학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제시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윌슨은 18세기 이후에 낭만주의에 의해 밀려나버린 계몽의 사명을 그리워하며 다시 지식의 최첨단에서 승승장구해온 자연과학의 방법을 전 학문 분야로 확장하자는 21세기의 계몽을 말하고 있다. 그에게 과학은 “계몽의 문화”이다(100쪽).
윌슨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현대의 지식은 극도로 전문화하고 세분화하여 저마다 자신의 지식 칸막이 안에서 자신만의 언어에 빠져 있는 게 현실이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사회과학의 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은 이런 두 문화의 양극화를 개탄한다. 이런 점에서 문제의 인식은 두 문화의 소통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윌슨이나 모두 같다. 또한 윌슨의 논쟁적 문제제기는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이 제 갈 길만을 좇는 타성에 일격을 가하여 두 문화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하는 효과를 낸다. 그렇지만 쪼개진 지식의 진정한 통합 또는 소통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사회과학의 자유로운 탐구 영역에서 상호이해를 지향하는 설득의 효과와 동의를 이끌어낼 때에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오철우)
'통섭'을 지향했던 역사와 오늘날의 노력들, 그 비판과 전망까지, 여러 학문 분야의 국내 지식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발언한 첫 책!
'통섭'이라는 말은 이제 학문계의 범위를 넘어서 전사회적인 하나의 화두가 되었다(심지어 요즘 정치계에서조차도 이 말을 가져다 쓰고 있을 정도니까 말이다). 그것은 지난 20세기에 들어서서 학문의 범위가 전문성이라는 이름하에 점점 더 쪼개고 쪼개지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에 대한, 임의적인 갈래 따기에 대한 부작용으로서의 성찰과 통찰이 생겨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즉 나무는 보지만 숲은 보지 못하는 것처럼 '전문적 영역'의 땅만 수직으로 깊이 파고들면서, 자기 분야 바깥에 있는 다른 분야에서는 도대체 무슨 진리를 찾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답답함과 동시에 '총체적인 문제'에 대한 갈증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학문의 기본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인데 그 진리라는 것은 코끼리 몸의 부분부분을 발견하는 것보다 코끼리 몸 전체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것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전문가'만 많아지고 '대가'의 등장이 드문 것 역시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러던 중 몇 년 전부터 화제가 된 에드워드 윌슨의 저서 ??통섭??(Consilience)에서 윌슨은 인문학?사회과학?예술 등이 모두 인간에 대한 학문이기 때문에 유전학?진화학?뇌과학을 기반으로 재해석하고 통합하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윌슨의 이러한 주장이 옳던 그르던 윌슨의 통섭론은 우리 (학문) 사회에 큰 파란을 일으켰고 이 시대의 지식인들에게 그렇듯이 이 책의 엮은이와 '이음' 편집동인들에게 '통섭, 즉 학문의 경계를 넘는 문제'를 숙제로 안겼다. 학문 각각의 분야는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 여러 지식과 방법을 모아놓았던 것에서 시작했다는 것, 그런데 이런 다양한 분야들은 앞에 놓인 문제에 따라 각 분야들끼리 헤쳐모여를 반복해야 운명이라는 것,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은 그 운명을 거스르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기획자들에게 학문의 경계를 넘는 문제의 전제가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지식의 경계를 넘기 위해서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를 꼼꼼히 따져본 다음, 결국 이 책의 구성이 그러하듯, 동서고금의 역사 속에서 통섭을 이루려고 했던 대가들을 찾아 나섰다.
즉, 전체 3부로 나눠져 있는 이 책 중에서 제1부 ?통섭을 꿈꿨던 사람들?에서는 모든 학문의 조상 격인 일원론자 아리스토텔레스부터(조대호,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체계?) 근대 초기 영국의 프란시스 베이컨(이종흡, ?근대 형성기의 역사세계와 자연세계?), 그리고 박지원?홍대용(김호, ?조선시대의 學?), 최한기(전용훈, ?과학적 몰이해 위에 쌓은 思想의 누각?) 같은 조선시대 학자들의 학문하는 방법을 자세히 검토하고 있다. 그렇게 지식의 경계를 넘어서려고 했던 사람들의 통섭 지향적 발자취를 살펴본 다음, 제2부 ?통섭을 꿈꾸는 학문들?에서는 과거에 대한 성찰에 더해 현재 한 분야의 경계를 넘어 다른 분야를 아우르면서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는 학문 분야들을 찾아 나서고 있다. 즉 진화론과 경제이론을 접목하고 있는 진화경제학(최정규, ?진화론으로 설명하는 세상?), 여러 분야의 지식과 방법을 흡수해 종합 학문의 면모를 보이는 환경학(강호정, ?환원주의를 극복하려는 생물학?), 수학과 물리학 이론에서 출발해 사회이론까지 적용하는 영역을 크게 넓혀가고 있는 네트워크 과학(정하웅?강병남, 세상을 묶는 끈들의 갈래 따기), 자연과학을 비롯한 다른 학문 분야에 문호를 개방하고 있는 사회과학 분야(김백영, 사회과학의 개방) 등 오늘날의 통섭적 노력을 보이고 있는 다양한 학문 분야를 한자리에 펼쳐놓고 있다. 마지막 부문인 제3부 ?통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에서는 통섭이라는 개념이 자칫 무법칙적 일원론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비판(배식한, ?가능한 통섭과 불가능한 통섭?)과 함께 윌슨의 저서 ??통섭??에 대한 상당히 구체적인 비평을 바탕으로 21세기 한국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위상과 관계의 현실을 살피면서 통섭에 대한 과제와 전망을 밝히는 것(홍성욱, ?21세기 한국의 자연과학과 인문학?)으로 이 책의 결론을 맺고 있다.
그러한 이 책은 '통섭 이전에 해야 할 일은 소통'이라는 이 책의 결론처럼 온전한 책으로 묶이기 전에 먼저 심포지엄의 방식으로 발표자?기획자(엮은이)와 많은 청중이 현장에서 장시간 직접 만나 쌍방향의 소통을 하였고 그 소통을 바탕으로 그후 발표문들을 재정리하여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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