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깊이에의 강요 혹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나뭇잎숨결 2009. 1. 19. 01:27

 

  소묘를 뛰어나게 잘 그리는 슈투트가르트 출신의 젊은 여인이 초대 전시회에서 어느 평론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그는 악의적인 의도는 없었고 그녀를 북돋아 줄 생각이었다.

"당신 작품에는 재능이 보이고 마음에도 와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평론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젊은 여인은 그의 논평을 곧 잊어 버렸다. 그러나 이틀 후 바로 그 평론가의 비평이 신문에 실렸다. 

<그 젊은 여류 화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작품들은 첫눈에 많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젊은 여인은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그린 소묘를 들여다보고 낡은 화첩을 뒤적거렸다. 완성된 작품뿐만이 아니라 아직 작업중인 것들까지 전부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물감통 뚜껑을 닫고 붓을 씻은 다음 산책하러 나갔다. 그날 저녁 그녀는 초대를 받았다. 사람들은 비평을 외우고나 있는 듯이 그림들이 첫눈에 일깨우는 호감과 많은 재능에 관해 연신 말을 꺼냈다. 그러나 주의 깊게 귀기울여 들으면 뒤편에서 나지막이 주고받는 소리와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젊은 여인은 들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깊이가 없어요. 사실이예요. 나쁘지는 않은데 애석하게 깊이가 없어요." 그 다음 주 내내 그녀는 전혀 그림에 손을 대지 않았다. 말없이 집 안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깊은 바닷속에 사는 무지막지한 오징어처럼 나머지 생각들에 꼭 달라붙어 삼켜 버렸다.

"왜 나는 깊이가 없을까?"

  두 번째 주, 그녀는 다시 그림을 그리려 시도했다. 그러나 어설픈 구상이 고작이었고 때로는 줄 하나 긋지 못하는 적도 있었다. 마침내는 온몸이 떨려 붓을 물감통에 집어 넣을 수조차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소리질렀다.

"그래 맞아 나는 깊이가 없어."

  세 번째 주 그녀는 미술 서적을 세심히 들여다보며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화랑과 박물관들을 두루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미술 이론 관련 서적들도 읽었다. 그리고는 서점에 가서 점원에게 가장 깊이있는 책을 한 권 달라고 하였다. 그녀는 비트겐슈타인인가하는 사람의 책을 받아 들었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시립 박물관에서 개최된 -유럽 소묘 5백 년-이란 전시회에서 그녀는 어느 미술 교사가 인솔하는 학생들을 따라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앞에서 불쑥 앞으로 나선 그녀는 물었다.

"실례지만 이 그림에 깊이가 있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미술 교사는 그녀를 보고 비죽이 웃으면서 말했다.
"저를 놀리실 생각이라면 그 보다는 더 나은 것을 생각하셔야죠, 부인"

  학생들이 깔깔대며 웃었다. 집으로 돌아온 젊은 여인은 몹시 비통하게 울었다. 젊은 여인은 점점 이상해져 갔다. 화실을 비운 적은 거의 없었지만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 깨어 있기 위해 약을 먹으면서도 자신이 무엇때문에 깨어 있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잠이 깊이 들까 두려워 침대에 눕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밤새도록 불을 켜두었다. 그림은 더 이상 그리지 않았다. 베를린에 있는 어느 미술품 상인이 전화를 걸어 그림 몇 장을 청했을 때 그녀는 전화에 대고 소리쳤다.

"나를 내버려두란 말이에요, 나는 깊이가 없어요."

  그녀는 간혹 점토를 반죽할 때도 있었지만 특별히 무엇을 만들지는 않았다. 그저 손가락 끝으로 후비거나 경단 모양의 작은 덩어리를 빚었을 뿐이다. 그녀의 외모는 피폐해져 갔다. 옷차림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집 역시 손질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여 점차 폐가로 변하였다. 그녀의 친구들이 걱정을 했다. 그들은 말했다.

" 그녀를 돌봐 주어야겠어. 그녀는 위기에 빠져 있어. 인간적인 위기이거나 그녀의 천성이 너무 예술적이어서 그런지도 몰라. 아니면 경제적인 위기일 수도 있어. 첫번째   경우라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고 두 번째 경우는 그녀 자신이 극복할 문제야. 세 번째라면 우리가 그녀를 위한 모임을 개최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것조차 그녀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일지도 몰라."

  그래서 그들은 식사나 파티에 그녀를 초대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러나 그녀는 매번 작업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면서도 그림은 전혀 그리지 않고 방안에 앉아 우두커니 앞을 응시하거나 점토를 주물럭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 번은 자신에게 너무 절망하여 초대를 받아들인 적이 있었다. 그녀를 마음에 들어한 어떤 젊은이가 잠자리를 같이 하기 위해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려 했다. 자신도 그가 마음에 들었으니 원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깊이가 없으니 각오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젊은 남자는 단념했다.

  한때 그렇게 그림을 잘 그렸던 젊은 여인은 순식간에 영락했다. 그녀는 외출도 하지 않고 방문도 받지 않았다. 운동 부족으로 몸은 비대해졌으며 알코올과 약물 복용 때문에 유달리 빠르게 늙어 갔다. 집 안 여기저기 곰팡이가 슬기 시작했고 그녀에게서는 시큼한 냄새가 나기까지 했다.

  그녀는 3만 마르크를 상속받았었는데 그것으로 3년을 살았다. 이 시기에 한번 나폴리로 여행을 갔었다. 그녀에게 말을 건 사람은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이 웅얼거리는 소리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돈이 떨어지자 그 여인은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전부 구멍내고 갈기갈기 찢었다. 그리고는 텔레비젼 방송탑으로 올라가 139미터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이날 바람이 몹시 거세게 불었기 때문에 그녀는 탑아래 타르 포장된 광장에 떨어져 으스러지는 대신에 넓은 귀리밭을 가로질러 숲 가장자리까지 날려가 전나무 숲속으로 떨어졌다. 그런데도 그녀는 즉사했다. 주로 스캔들을 상세하게 보도하는 대중지들이 감지덕지 그 사건에 덤벼 들었다.

  자살 사건. 바람에 날아간 흥미로운 경로. 한때 전도 양양했고 미모도 뛰어난 여류 화가의 이야기라는 사실은 보도할 가치가 아주 높았다. 그녀의 집은 재앙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보였으며 기자들은 환상적인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수없이 많은 빈 병, 곳곳에 얼굴을 내민 파괴의 흔적. 갈기갈기 찢겨나간 그림들. 사방 벽면 곳곳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점토 덩어리..심지어 방구석에는 배설물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 사건을 두 번재 톱기사로 다루는 모험을 감행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3면까지 이어 다루었다.

  앞에서 말한 평론가는 젊은 여인이 그렇게 끔찍하게 삶을 마감한 것에 대해 당혹감을 표현하는 단평을 문예란에 기고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거듭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사람이 상황을 이겨낼 힘을 기르지못한 것을다같이 지켜 보아야 하다니. 이것은 남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또 한번 충격적인 사건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관심과 예술적인 분야에서의 사려 깊은 동반이 문제되는 경우에는 국가 차원의 장려와 개인의 의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결국 비극적 종말의 씨앗은 개인적인 것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인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인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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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독일 문학은 사변적으로 전개되는 난해한 내용 때문에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할 수가 없으며, 따라서 뛰어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많이 읽히지 않는다고들 말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다른 독일 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상업적으로도 커다란 성공을 거둔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독일 작가치고는 예외적인 작가라 할 수 있다. 혹자는 그런 그를 단순한 대중 작가로 폄하하기도 하고, 또 혹자는 조금 후하게 평하여 독일 문학에서 헤세 이후 전세계적으로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작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쥐스킨트를 간단히 대중 작가로 치부해 버릴 수 있을까? 지금까지 발표된 그의 작품들, 『향수』, 『좀머 씨 이야기』, 『콘트라베이스』, 『비둘기』를 읽고 얼핏 그렇게 느끼듯, 그의 작품은 그냥 예쁘고 작은, 가볍게 읽고 덮어두면 그만일 그런 작품들일까?

  세상을 바라보는 쥐스킨트의 눈은 근본적으로 우울하다. 아니, 혐오에 가까운 냉소적인 시선이다. 세상의 수군거림에 상관없이 현실의 언저리를 잰걸음으로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좀머 씨, 향수 하나로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병적인 낭만적 욕망에 사로잡혀 천연덕스럽게 살인을 저지르는 『향수』의 주인공 그르누이, 관습과 인식의 경직된 세계에서 절망하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세상에 대한 불신과 무감각에서 벗어나려는 『비둘기』의 조나단 노엘--이들 쥐스킨트의 인물들이 그들의 현실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우리는 쥐스킨트의 시선을 바라볼 수가 있다.

  그러나 그의 우울한 시선은 단순히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 시선 이면에는 닫혀 있는 경직된 현실과 세상에 대한 혐오와 동시에 그러한 세상에 편입되어 맞서려는 낭만적 반항이 깃들여 있다. 그리고 이 낭만적 반항이라는 감정의 구도 속에는 순수와 경험의 대립이라는 의미 구조가 은근히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이원적인 대립의 구조로 이해하려는 편협된 시각이 올바른 현실 이해로 나아가지 못하듯, 문학 역시 단순한 구도로 현실을 그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대립 속에 보여지는 팽팽한 긴장의 현장이 문학이 보듬어야 할 공간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쥐스킨트의 작품들이 보여 주고 있는 순수와 경험의 갈등 구조는 다시 한번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좀머 씨 이야기』에서 좀머 씨의 기이한 행적을 관찰하며 성장하는 어린아이, 『콘트라베이스』에서 현실과 자아와의 갈등을 고백으로 토로하는 콘트라베이스 주자 등 그가 그리고 있는 인물들의 세상 바라보기에서 우리는 쥐스킨트가 갈등의 구조 속에서 어떤 길찾기를 시도하는지 살짝 엿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순수함의 손으로 늘 세상 문을 두드리려고 애쓰는 그의 인물들은 단순한 순수함에의 동경이 아니라 현실 속에 편입되어 더욱 단련된 또 다른 순수함에의 기대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보다 심각하게 제기할 수 있는 주제를 너무 가볍게 처리한 것이 아니냐는 식의 평보다는 오히려 그런 순수함에의 기대가 보다 더 철저한 현실 인식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냐는 반문도 가능하지 않을까? 문학은 늘 현실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또 슬쩍 비켜 보는 작업이 아닐까?

  그 동안 쥐스킨트가 발표한 주옥 같은 단편 「깊이에의 강요」, 「승부」, 「장인 뮈사르의 유언」과 문학과 삶과의 관계에 관한 짧은 에세이 한 편을 한데 묶은 이번 『깊이에의 강요』는, 그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생각하고 읽으면, 그가 전 작품을 통해 일관되게 보여 주고자 한 메시지가 무엇인지, 그의 세상 보기가 어떤 각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 은밀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쥐스킨트 문학의 묘미와 깊이를 압축해서 보여 주는 이 작품집에서 첫번째로 수록된 「깊이에의 강요」는 한 젊은 여류 화가를 소재로 하여 쥐스킨트가 즐겨 다루는 예술가의 문제를 묘사하고 있다. 자신의 작품에 깊이가 없다는 어느 평론가의 무심한 말을 듣고 고뇌하다가 마침내 죽음을 선택하는 예술가와, 그녀의 죽음 후 관점을 바꾸어 그녀의 그림에는 삶을 파헤치고자 하는 열정, <깊이에의 강요>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그 평론가를 대비시켜 인생의 아이러니를 예리하게 표현한 이 작품은, 그 웃지 못할 인생의 모순과 희극 앞에서 씁쓸함을 느끼게 한다. 쥐스킨트는 현실의 언어가 순수한 예술의 열정과 그 언어를 어떻게 훼손시키는지를 보여 줌으로써 예술과 현실의 관계, 삶과 예술의 문제를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승부」는 두 명의 체스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로, 이 작품은 우리삶의 모습의 축도(縮圖)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의 규칙을 곧이곧대로 준수하여 어느 정도의 자리는 확보했지만, 현재 상태를 고수하기 위해서 늘 전전긍긍하는 늙은 체스의 고수 장과, 인습을 과감하게 무시하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서 정열적으로 용기 있게 돌진하는 젊은 도전자, 그리고 장처럼 이룩한 것도 없고 젊은 도전자처럼 과감하게 뛰어들 배짱도 없지만 도전자와 같은 욕망을 꿈꾸는 구경꾼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여러 유형의 우리들의 모습,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인습의 틀에 박힌 세계와 그 세계를 타파하려는 모험의 정신--관성의 삶의 길과 끊임없는 변화의 모색 사이의 선택은 체스가 끝나자 돌아서 떠나가는 많은 구경꾼들의 그 그림자들만큼이나 우리들을 늘 따라다닐 것이다.

  한편, 18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죽음을 앞둔 성공한 보석 세공업자인 뮈사르가 자신의 일대기와 세상 인식을 유언의 형식을 빌어 함축적으로 토로한 「장인 뮈사르의 유언」은 어떻게 보면 쥐스킨트 자신의 세계관이 명증하게 드러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보석 세공업자인 뮈사르는 어느 날 자신의 정원에서 돌조개를 발견하게 되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세계와 인간이 점점 돌조개로 변하여 석화되어 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 인간의 역사가 유연한 신체구조의 어린아이가 경직되고 단단하여 부러지기 쉬운 어른의 세계로 성장하는 과정의 역사이듯, 또 세계가 유동성의 액체 상태의 세계에서 어쩌면 단단한 돌조개처럼 잘게 부서지기 쉬운 파멸 가능성의 경직성의 세계로 나아가듯, 성장과 진화라는 것이 우리가 도구화된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넘겨 버리듯 반드시 성숙과 보다 나은 세계로의 발전을 의미한다고 묵인만 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뮈사르가 깨달은 것은 이 세상은 살아 숨쉬고 있는 유연하고 부드러운 속살을 드러내지 않고 입을 꽉 다물고 있는 조개와 같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런 세상이나 내면의 아름다움과 감수성을 상실한 채 무감각하고 냉혹한 현실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나 하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이 우리 모두가 죽음에 임박해서야 깨닫게 되는 삶의 비밀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뮈사르가 그러한 자신의 깨달음을 그의 유언을 읽는 독자들과 같이 나누고 싶다고 한 말은, 쥐스킨트가 그의 다른 작품 속에서도 계속 제기하는 모색의 과정, 즉 경직된 세상 속에서 유연함의 길을 찾으려는 그 자신의 길찾기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쥐스킨트의 세상 인식은 문학과 우리 삶과의 관계에 대한 단상인 「문학의 건망증」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난다. 이 에세이는 작가 자신의 독서 체험의 한 단면을 통해, 독서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서서히 우리 내면 속에 작은 변화를 일으키는 체험임을 넌지시 암시한다. 무엇을 읽든 깡그리 잊어버리게 만드는 번잡한 현실의 작용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지만 그 삶의 경험의 은밀한 곳에서 잔잔한 여진을 남기고 있는 독서 체험의 깨달음은 언젠가 우리 삶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줄 큰 파장이 되어 되돌아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른 예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문학은 그 본원의 아름다움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문학의 아름다움이란, 그 주제가 실존의 문제이든 보다 근원적인 존재론적 물음에 관한 것이든, 표현 대상과의 일정한 심미적 거리 속에서 작가가 자신의 상상과 관찰과 체험의 경험을 통해 드러내는 가능성의 공간, 그리고 그것에 대한 독자의 공감 속에 존재한다. 또한 문학은 우리 삶의 여러 문제에 대한 끝없는 물음 제기이지 그 해답을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닐 것이다. 문학이라는 상상의 언어의 역할은 무심코 지나치는 사물에도 관심을 가지고 늘 눈여겨볼 수 있는 열려진 마음과 그 빈 공간의 마련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칫 커다란 이야기 속에 함몰되어 지나치기 쉬운 삶의 작은 이야기들에 따스한 눈길을 돌리고, 현실을 비켜 보는 예술이라는 비유의 언어를 통해 현실 원칙이 지배하는 세상 살이의 모습을 유유하게 표현하는 듯한, 그리 많지도 않고 그리 길지도 않은 쥐스킨트의 글들은 그래서 오히려 더 아름답게 느껴지고, 오히려 더 긴 여운을 남기고, 그 공감의 파장이 길게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짧은 이야기들 뒤에 남겨진 긴 여백은 바로 우리 독자들이 채워야 할 몫이 아닐까…….(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