幻에 대한 기억: 갇힌 존재의 미망 벗어나기
( 이만희 희곡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를 중심으로 )
- 이원희
1. 들어올림 그리고 트임의 문학을 찾아서
문학은 들어올림과 트임이다. 닻을 내린 곳에서 어망을 건져 올리듯, 현실에 닻을 내리되 현실에서 들어올려진 형태가 곧 문학이다. ‘있는 세계’를 통해서 무한히 크고 넓은, ‘감추어진 세계’를 건져 올리는 게 문학이다. 그리하여 누구나가 경험할 정신적 상실을 문학이 위로해주고 막혀버린 삶의 출구를 열어 보여야 한다. 수다스럽고 너절한 시장 속 같은 현상에 문학이 발을 딛고 있더라도, 그 배후에 있을 고요와 화통의 근원적인 세계로 눈빛을 열어야 한다. 바로 이점이 문학이 들어올림과 트임이어야 한다는 필연적 이유이다.
문학이 잃어버린 낙원의 회복의지를 표방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문학은 다분히 현실 결핍과 불만에 대한 시선주기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은 본향을 향하는 언어의 숲길이기도 하다. 그 길은 문학이 지향하는 꿈이요 이상적 가치로써 새로운 지평을 열어‘트인 세계’를 독자에게 제시해준다. 독자는 지평 너머에 있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혹은 잃어버린 세계를 동경하면서 자신과 현실을 기억하며 성찰의 시간을 가동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문학의 중요한 주제는 ‘자아’의 탐색에 있다. 이는 호메로스와 소포클레스에서부터 까뮈, 아서 밀러에 이르기까지 서구문학이 끈질기게 추구해온 공통적인 주제였다. 해롤드 블룸이 지적했듯, 어쩌면 자아의 인식에 이르는, 트인 길 찾기 혹은 길트기가 문학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인지도 모른다.
삼성 도의문학상과 서울연극제 희곡상을 수상한 이만희의 희곡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는 불교적 상상력을 통해 자아 혹은 트인 길을 찾아가는 발견의 여정을 다룬 작품이다. 필자가 이 작품에 주목하는 것은 대립과 갈등의 세계상에 기본적으로 투족하고 있지만 ‘트인 길’을 찾으려는 ‘무거운 주제’가 실감 있게 묘파되면서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참된 나’를 찾는 두 방식
엠페이도클레스가 말했듯, 사랑(philia)과 싸움(neikos)의 영원한 패권쟁탈이 우주의 원리인지도 모른다. 이로 보면 이질적인 것, 타자화된 것과의 맞섬과 갈등의 변증법적 대립구도가 세계상이다. 희곡은 이러한 세계상의 반영으로써 대립과 갈등을 글쓰기의 중심원리에 둔 장르이다. 그러나 갈등과 대립으로 복닥대는 세계를 소재 삼아 수다한 번설로 ‘치고 받기’식의 현상만 제시할 뿐 ‘들어올려진’ 희곡을 찾기 어려운 게 작금의 현실이다. 상업성을 등 뒤에 두고 ‘재미’만을 전경화할 뿐 진정한 트임을 모색하지 않는, ‘의미’가 실종된 희곡은 ‘텅빈 카타르시스’만을 관객/독자에게 안겨줄 따름이다.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는 현하 가난한 희곡 현실에서 튼실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이는 불당을 배경으로 승려들의 이야기를 다루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행동하는 인물, 특히 도법이 - 작가의도를 구현한다는 점에서 주인공 -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데가 만다라 즉 깨달음이라는 불교세계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한 마디로 고(苦)이고, 이 고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라는 문제는 불가의 종지이다. 모든 게 고(一切皆苦)이기 때문에 고를 소멸시키고 참된 나를 인식하는 게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된다. 곧 마음의 탐구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삶의 외피를 제시하되, 거기에 머물지 않고 존재의 구경(究竟)으로 향하는, 트임의 세계를 이 작품은 보여준다.
희곡에서 도법과 탄성 두 인물은 보리심을 가지고 깨달음의 길을 찾는다. 봉국사 주지인 탄성과, 불상을 제작하기 위해 봉국사를 찾은 도법. 이 둘은 과거에 수행을 함께 했던 도반이다. 그러나 어릴 적에 입산한 탄성은 30대에 납의를 입은 도법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도법이 불상제작을 하겠다고 봉국사에 찾아왔을 때 탄성은 속세에서 못 이룬 미대 교수로서의 꿈을 푸는 행위로 간주한다. 그래서 탄성은 도법의 불상제작을 ‘엄한 짓거리’요, ‘한눈 파는’ 행위라고 단정을 짓는다. 불제자의 수도는 오로지 용맹정진으로 선정에 들어야지 불상이나 제작하는 것으로는 불법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법의 생각은 다르다. 속인이든 도인이든 원력(願力)만 있다면 ‘참’을 볼 수 있다는 소신이 있기 때문이다. 수도승이든, 화승이든 진정한 구도에 이르는 길은 오직 마음에 있을 뿐 구도방식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뜻 세운 바를 일심원력으로 다하는 마음의 자세, 이것이야말로 참을 찾는 일이고 자신을 발견하는 구도자의 태도임을 도법은 견지하고 있는데 반해 탄성은 오직 참선을 통해 수신견성할 수 있다고 본다.
탄성 : (구조물을 보며 혼잣말로) 화가와 수도승이라… 자넨 어느 쪽인가?
도법 : 기대승과 율곡의 편이지. 이기일원론일세
탄성 : 두 마리를 좇다가 둘 다 놓치고 말 걸?
도법 : 결국 난 한 마리를 좇고 있는 셈이지
탄성 : 그럴까?
도법 : 그럼
이쪽인가 저쪽인가, 구도는 외형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도법은 불상을 만드는 일이나, 올곧게 수행에만 정진하는 행위는 다름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탄성은 볼멘소리로 도법의 애매한 마음의 거처를 빈정대고 있다. 이로써 깨달음을 구하는 보리심의 형태가 각기 다르게 나타남을 알 수 있는 바, 두 인물의 대립적인 설정은 향후 극행동과 작품의미를 발양시키는 극적 장치가 된다. 대립은 긴장을 조성하고 긴장이 발전되면 충돌을 낳는다. 그런데 탄성과 도법의 충돌 빌미는 항상 탄성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희곡은 공격과 방어의 상호관계가 생동하게 이루어지는 인물 설정은 되지 못했다. 공격하는 인물과 방어하는 인물이 일방적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인물관계가 역동적이지 못한 채 도식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시각으로 보면, 이런 인물 설정은 수세적인 입장에 놓인 도법의 말과 행동을 통해 작품의 의도를 끌어내려는 장치로도 보인다. 즉 불도의 수행이 오로지 도량의 좌선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사불심 처처불상이니 어떤 일을 하든 깊은 원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함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탄성은 도법이 용맹정진하지 않고 불상이나 만들려고 한다든가, 그가 제작하고 있는 불상의 모습은 진정한 부처의 모습이 아니라며 불만을 드러낸다. 심지어는 도법이 자신의 눈을 찌르고 서전교 교각 아래로 떨어져 죽은 것은 그가 완벽한 불상을 만들 수 없다는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힐난한다.
여기서 방장스님의 역할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그는 비록 두 번밖에 등장하지 않지만 두 인물의 날선 대립을 매듭짓고 주인공의 행동적 의미를 은유적으로 암시한다는 점에서 돋을새김적인 인물임에 틀림없다. 탄성과 도법을 각각 만난 방장스님은 그때마다 직답을 피하고 공안같은 말을 던진다. 삶의 의미를 적실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듯이 ‘말 아닌 말’로 에둘러 표현하는 그의 말 속에는 이미 주인공의 행동적 의미 즉 주제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방장스님은 트인 세계를 열어보이는 ‘열린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탄성은 방장을 찾아와 도법이 마(魔)가 씌였다며 병원에 입원시키자고 한다. 색계에 사로잡혀 정사(正邪)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탄성이 그러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도법의 주머니에서 아내 사진을 발견한 탄성은 도법이 미색에 사로잡혀 불도 정진에 심한 장애를 겪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장은 엉뚱한 이야기로 답변을 대신한다. 생각을 밀고 나가 방장의 이야기를 살피면, 도법과 탄성의 입산 수행의 연륜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댓번의 대패질로 먹물글씨를 지우는 자는 도법이다. 반면에 삼십번을 밀어도 글씨가 남아있는 자는 당연 탄성이다. 먹물글씨가 마음속에 남아있는 삼독(三毒)의 번뇌라고 한다면, 이를 지우는 일은 정각(正覺)에 다름 아닐 것이다. 방장은 깨달음을 얻는 두 입장을 먹물지우기를 통해 에둘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는 두 방식, 즉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는 댓번과 삼십번의 대패질로 은유화된다. 결국 방장스님의 먹물지우는 대패질 이야기는 돈수와 점수라는 두 방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인물이 도법과 탄성이다. 따라서 도법과 탄성은 돈오방식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작품 내내 심리적 거리를 갖게 됨으로써 희곡은 긴장을 유지할 수 있다. 아울러 이러한 각기 다른 방식이 만들어내는 긴장이 희곡의 원동력이 됨은 말할 나위 없다.
한편, 두 번째 방장의 등장은 도법과의 만남이다. 방장은 도법에게 한약방 노인과 술마신 이야기 등 시정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방장은 중국의 한 거지 이야기를 하고는 할! 하며 득오해탈이라도 한 듯 깨달음의 탄성을 지른다. 방장이 도법에게 해준 이야기는 석가가 아난다에게 설법한 내용을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너희는 이에 자기를 섬으로 삼고, 자기를 의지처로 하여 남을 의지처로 삼지 말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하여 남을 의지처로 삼지 말고 머물러라.
일체는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니 오직 자신의 마음에 의지할 뿐 남을 의지하지 말라는 이 말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선사를 만나면 선사를 죽여야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조주 선사의 법어로 이어지는 불가의 핵심 종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그렇다면, 방장의 말에 도법의 침묵은 무슨 의미인가? 아직 소를 얻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사물의 근원을 어슴푸레 더듬는 견우의 단계에는 이르렀다고 봄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도법이 방장을 만난 직후 무명일각의 심안을 뜨기 때문이다. 이로 보면, 탄성과 도법 두 인물이 수행의 길목에서 만난 방장은 일종의 길안내자로서 언어화할 수 없는 견성의 경지를 역설적으로 언어를 통해 들려주는 인물이다. 불립문자일 수밖에 없는, 깨달음이라는 추상적 경지는 역설적으로 언어를 디딤돌 삼아 도달한다는 의미를 방장은 말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불립문자(不立文字)는 불이문자(不離文字)일 수밖에 없음을 제시하는 방장스님 자체가 불립문자이자 불이문자인 셈이다.
일심원력 대 수신견성…깨달음에 대한 두 생각
도법 수행담 10장 구성, 심우도와 맞닿아 있어
진실과 현실 동시에 보여줘…대중적 공감 형성
3. 심우(尋牛)의 길
주인공이 참된 나를 찾아간다는 점에서 이 희곡은 마음의 탐색담이다. 이 경우 토비야스의 플롯 분류에 따르면 ‘발견 플롯’의 유형에 해당된다. 이 플롯은 인물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써 삶의 근본적인 의미를 탐구하는 인간에 관한 것을 주내용으로 삼는다. 주인공 도법이 자신의 눈을 찔러 눈멂을 기도한다는 점에서 주인공의 결말 행동이 매우 닮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 역시 대표적인 발견 플롯이다. 이러한 플롯은 발견 자체보다는 인물이 발견하는 과정에 초점을 두는 게 일반적이다.
희곡의 전개과정은 분할된 장면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이 희곡이 10장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을 시야의 중심에 두고 ‘발견 플롯’의 일반적 특성과 연결시킬 때, 흥미롭게도 구도에 이르는 길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심우도’(尋牛圖)를 연상시킨다.
범부중생들이 수행해서 부처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가는 과정을 보살도라고 한다. 보살도의 수행과정은 본생(本生)에서는 십지(十地), 반야에서는 십지도가 있다. 그런가 하면 십신(十信)은 보살이 처음 닦아야 할 열 가지 마음이다. 이로 보아 10장의 구성은 마치 동자가 흰소를 찾아가는 심우도의 과정을 보여주듯, 주인공 도법이 참본성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대응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송나라 곽암선사의 심우도는 수신견성을 체현해가는 과정을 제시한 그림이다. 이에 대입해 보면, 도법이 애초에 불상을 제작하기 위해 나선 건 동자가 소를 찾아나서는 것과 동궤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소가 인간의 본성을 상징한다면, 동자는 불도의 수행자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도법이 불상을 제작하기 위해 허비한 삼년은 바로 심우의 시간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룻밤 사이에 불상을 완성시킴으로써 어렴풋이나마 본성의 자취를 보게 된다. 이른바 견적(見跡)이다. 도법이 탄성에게 ‘인간은 원래 완성자’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도 어느 정도 견적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나 아직은 산자산(山自山), 수자수(水自水)의 깨달음은 얻지 못했다. 우주 본래의 모습을 아무런 번뇌없이 그대로 볼 수 있는 반본환원의 참된 지혜의 경지 즉 열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도법은 고통의 시간을 담금질하지만 여의치가 않다. 놓지 못한 인연의 끈자락을 한 가닥 쥐고 있기 때문이다.
김명석(도법)이 미대 교수 시절에 아내가 깡패들로부터 집단 윤간을 당한다. 그는 아내가 겁탈을 당하는 현장에서 그 장면을 고스란히 목격한다. 그후 김명석이 처자를 버리고 가출해 등껍질이 벗겨질 정도로 심한 부두 노역을 한 것도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증오와 미움이라는 때를 씻어내기 위한 심우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부딪쳤던 고통의 근원을 파헤치려는 마음이 없었던들 그는 범부중생과 다를 바가 없다. ‘마누라 일이 동기가 되어 전체를 보았다고. 생노병사에 허덕이는 전체 인생의 백팔번뇌를 보았’기에 인간의 고뇌를 짊어지고 입산한다. 그리고 고통의 근원을 끊기 위해 오대산 토굴에서 삼년 수도를 한다. 깨달음을 얻자면 모든 생각의 길목을 끊어야 한다(妙悟要窮心路絶).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다. 봉국사 대찰 본당의 불상 제작을 맡게 된 도법은 수행견성의 마지막 기회라고 여기고 매진하지만 이 역시 수월치가 않다. 어렵사리 불상제작이 완성되나 불상을 망치로 깨트리고 자신은 두 눈을 찔러 자기죽음을 감행한다. 그리고 도법은 사자(死者)가 되어 다시 탄성 앞에 나타난다.
그러니까 작품의 구조는 죽은 도법이 탄성 앞에 나타나 죽음 이전의 일들에 대한 반추, 즉 현재에서 과거를 들쳐내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현재적 시점에서 과거를 회상하고 다시 현재로 빠져나오는 일반적인 액자구조가 아니라, 결말이 과거의 상태에서 끝나고 있다. 그래서 반쯤 열려진 액자구조 형식이 이 작품의 구조적 특징이다. 몇몇 평자들이 날선 비판을 가하는 대목이기도 한 이 점은 필자가 보기에는 그들 비판의 함성이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도틀어 말하면, 숱한 심리적 갈등을 극복하고 참본성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작품의 의미가 있다. 이런 의미를 통해 관객 또는 독자는 자신의 일상적 삶을 되새겨 보게 된다. 이것이 종국적인 작품의 의도이다. 과거에서 현재로 복귀되는 시간구조는 도법의 현재성을 중요하게 다루기 위한 장치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도법이라는 허구인물이 견성했다는 성공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앞서 이미 말했듯이, ‘발견 플롯’은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한다. 참본성을 찾아가는 과정의 신산스런 고통의 길을 통해 ‘눈뜸’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도법이든, 관객 자신이든 상관없다. 삶의 실재성은 눈뜨는 과정이지 목표도달에 있지 않다. 바로 이 점이 보편성을 띠는 이유다. 허구인물의 특수사례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 의미로 확산될 때 문학은 힘을 발휘하게 된다. 질긴 인연의 고리를 끊고 참본성을 찾아가는 발견의 과정에 의도를 싣기 위해서는 현재, 과거, 다시 현재로 견고하게 매듭질 게 아니라, 과거를 확장된 시간으로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과거는 단순히 흘러가버린, 박제화된 기억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를 간섭하는 살아있는 시간으로 재생된다. 현재적으로 재생된 과거 도법의 수행담은 그러니까 심우의 과정이고, 처음 부분에 죽은 도법이 탄성에게 나타나 이르는 말은 법 그 자체로 입전수수의 그것에 다름 아니다. 이로 볼 때, 10장의 장면단위 구성은 시간적 층위를 달리 하면서 도법의 견성에 이르는 심우의 과정을 틀 지운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4. 幻에 대한 기억 그리고 미망 벗어나기
<반야심경>에 따르면, 삼라만상 일체가 공이다. 세존은 ‘사리자야, 이 모든 법은 공의 모습이며, 따라서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으며, 깨끗하지도 않고, 늘어나는 것도 없으며, 줄어드는 것도 없다’고 설파하고 있다.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니 일체법이 텅빔으로 있는 묘유의 세계다. ‘유식’(唯識)을 빌어 말하면, 식경구경(識境俱空)이라고 할 수 있다. 대상도 공이요, 이를 바라보는 주체도 공이다. 앞서 심우도를 다시 끌어들인다면, 인우구망이다. 자신이나 소나 모두 실체가 없는 공이다. 따라서 소와 동자 즉 객관과 주관이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이 소도 사람도 모두 잊는 인우구망(人牛俱忘)이다. 이런 논리에 서게 되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는 거대한 환(幻)의 덩어리로 규정된다. 이러저러한 다양한 표상들은 사실 하나의 환상이요 허상일 뿐 그 실체가 없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인간사가 영겁 속에 남음이 없는 헛된 그림자요 공(空)임을 부처님은 ‘나는 새가 창공에 발자국을 새기지 못한다’로 비유하고 있다. 일체가 공무묘유의 무(無)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어리석게도 욕심 부리고 분노한다. 그리하여 탐욕과 집착의 끈을 놓지 못한 채 미망에 사로잡혀 고통을 받는다.
도법이 입산하게 된 경위도 사실은 집착의 연장이다. 아내가 강간 당한 사건을 잊고 인간의 고통 문제를 해결해볼 요량으로 납의를 입게 되지만 결국은 아내에 대한 미움을 버리지 못한다. 미추, 선악, 시비에 대한 주장과 분별이 따지고 보면 집착에서 비롯되기에 도법은 여전히 그 미망 속에서 남아 있다. 그러기에 단박에 속세의 인연을 끊지 못해 삼년 기약의 불상은 여전히 미완성으로 남고, 그나마 완성된 불상은 망치로 깨부수고 만다. 인간의 고통에서 벗어나 견성을 위한 불상 제작이었지만 미망의 그림자가 쉽게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니가 만든 불상? 그건 고양이가 호랑이 흉내낸 거야. 그 일 있기 전의 마누라 모습을 생각하며 만들었다고나 할까? 속셈이야 있었겠지. 블상제작도 수행이요 원력이니 이것으로 내 죄값이 솎아지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넌 그 일이 늘 목에 걸린 가시였거든? 허나 니가 만든 건 반쪽짜리였지. 보기 싫은 부분은 뺀. 당한 뒤에도 아름답게 보아야 했단 말이야. 니놈이 진정한 화가요 수도자였다면.
인용문은 망령이 도법에게 하는 말이다. 희곡에서 망령은 두 가지 존재로 암시되고 있다. 첫째는 불에 타서 죽은 사람을 시달림하기 위해 탄성과 초상집에 갔을 때, 도법에게 나타난 시체의 환영이다. 둘째는 도법의 또 다른 자아(alter ego)이다. 이렇게 보는 데는 망령이 불에 탄 흉측한 모습이라는 점과, 도법의 ‘불안의 그림자’가 곧 자신이라는 망령의 대사가 뒷받침한다. 그러나 시체의 환영을 도법의 자의식 현신이라고 보면 망령은 도법의 분신인 또 다른 자아로 보는 게 적절하다. 왜냐하면, 도법이 불상 제작을 이루지 못하고 보낸 허망한 세월은 흉측한 마음이 정화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면 망령의 흉측한 외모는 도법의 심리상태를 시각화한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도법의 내면적인 갈등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두 자아를 ‘지금 여기’에 등장시켜야 하는데 이때 망령은 도법의 또 다른 자아로 도법의 자의식을 괴롭히는 타자 역할을 맡는다. 이렇게 볼 때, 이 작품은 두 자아의 분열과 대립이라는 심리주의 경향을 띠고 있다. 따라서 도법의 죽음은 ‘다른 나’에 의해서 감행된 ‘타아(他我)적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도법을 죽음으로 몰고 간 타아는 바로 환의 고리를 끊지 못해 전전해 하는 ‘불안의 그림자’이다. 이것은 환의 미망 속에서 꿈틀대는 심리적 압박이자 미망의 허상에 대한 집착이다. 도법에게 불상 완성은 미적 실현이 아니라 불성을 보는 참된 눈을 얻는 행위다. 그러나 환의 미망에 사로잡힌 그는 참된 눈빛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육신의 눈멂을 통해 마음의 눈을 뜨는 무명일각(無明一覺)을 이루는 것은 도법의 치열한 내면적 갈등의 결과로써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한편, 환의 세계를 환기시키는 동시에 소멸할 것을 종용하는 망령의 주문은 도법의 억압된 자아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다. 중세 학문을 두루 망라한 파우스트가 우주의 신비와 왜소한 인간존재의 의미를 탐구하기 위해 메피스토펠레스를 불러냈듯이, 미대 교수 출신의 도법은 내면에 깔려 있는 불안한 무의식의 그림자인 망령과의 대화를 통해 참된 자신을 발견한다. 망령은 나 안의 또 다른 나가 나를 바라보는 대타자 시선이자 타자화된 ‘나’의 음성이다. 결국 이런 시선과 음성은 ‘나’를 바로 보기 위한 견성의 도구인 셈이다
불교에서는 현실세계를 거대한 환의 세계로 규정한다. 표상의 무한한 변화상은 실체 아닌 이미지만 존재할 뿐이다. 대나무 그림자가 계단의 먼지를 쓸어내도 움직임이 없고,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竹影掃階塵不動 月色窄潭水無痕), 없음과 있음이 묘하게 공존하는 현상. 존재하는 일체는 언젠가는 없어지는 것이니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없는 것도 아닌 이 역설의 오묘함을 묘유라고 한다. 따라서 묘유는 불변하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현상이다. 삶과 일체의 존재가 바로 이 묘유의 법에 있으니 아내가 겁탈 당한 사건은 한낱 ‘새끼손가락에 난 생채기에 불과’한 것이라며 망령은, 아니 도법의 또 다른 그림자는 자신을 향해 강변한다. 미망 의 속박에서 벗어나라고. 하지만 인간이란 어디 그런 존재던가.
삶의 검은 기억이 머릿속에 남아있는 한 그것을 고스란히 지우고 없었던 것으로 무화시키기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비록 도법이 도량에 앉아 진여를 구하고자 하지만 그를 들쑤시는 검은 기억은 진여의 세계로부터 멀리 달아나게 한다. 그리하여 불상제작도 늦어지고 또 제작된 불상에서도 진여를 발견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불상도 파괴한다.
어떻게 하면 환의 미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이는 다시 심우도를 살펴봄으로써 해법의 열쇠를 찾을 수 있다. 심우도에서 인우구망 단계를 넘어서면 반본환원이다. 사람과 소, 모두를 잊는다는 건 주객분리 이전의 상태를 뜻한다. 그리하여 우주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참된 지혜의 경지가 앞서 말한 반본환원이다. 결국 현실세계를 환이라고 규정할 때, 그 환의 덩어리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현상들은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망을 갖는다. 따라서 환의 인연을 끊고, 있는 그대로의 소이연(所以然)의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식의 주체와 대상을 분리하지 않고 허정한 상태에서 사물의 실상을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결국은 일체유심조이다, 마음은 만물을 만들어내는 근원이다. 마음에 따라 순간은 영원이 되기도 하고, 영원은 순간이 되기도 한다. 미추는 분별지가 만들어내는 마음의 현상일 뿐 본래는 아름다움도 추함도 없는 것이다. 도법 아내가 강간 당한 사건은 순간의 일인데 이를 추함으로 영원히 기억하고 있는 도법의 마음이 그를 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방해자이다. 그러니 도법에게 있어 미망은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붙여잡고 놓지 않는 마음의 집착에 있다. 이것이 원효가 강조한 일심(一心)이다. 한 마음이 일어나면 만 가지 법이 일어나고, 한 마음이 없어지면 만 가지 법이 없어지는 것이다.
망령이 도법에게 일체유심조를 말할 때 녹노(불상제작대)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은 깨달음의 현현으로서 마음 안에 있는 진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진여는 도법이 스스로 눈을 찌른 후에나 볼 수 있다. 그가 눈멂을 선택한 것은 환의 미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존재 소멸이 아닌 발견이기에 일종의 ‘파란 죽음’이다. 오이디푸스가 그랬듯이 도법도 눈멂이라는 실존적인 자기죽음을 통해 참본성을 발견하는 초월적 지평을 얻게 된다. 육안으로 보는 일체의 것들에서 만들어지는 허접한 환의 미망을 끊고 마음의 눈을 얻어 참된 ‘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는 서전교 교각 아래로 떨어져 죽음을 감행한다. 따라서 도법의 죽음은 일종의 파멸에 대한 열망으로써의 죽음이다. 스스로를 제거해 깨달음을 얻으려는 충동. 그러나 이 역시 열반의 세계에 드는 데는 방해가 되는 욕망이기에 인간존재의 한계에서 오는 안타까움이 깔려 있다. 도법은 현실세계가 한낱 헛되고 헛된 환일진대 미망에 사로잡혀 자아를 찾을 수 없었음을 육안 아닌 심안을 통해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미망을 거둬내고 청정세계를 향해서 파란 죽음의 문을 연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종교적 차원을 떠나 대중적인 설득력을 준다.
5. 마무리
희곡은 근본적으로 모순과 분리를 전제로 삼는 장르다. 다시 말해, 신세(身世)모순과 아(我)와 비아(非我)의 분리가 희곡을 잉태한다. 주인공 도법을 통해 어긋난 삶과 현실 일체는 결국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으로 인식된다. 작품에서 보여주는 일련의 행위들은 따라서 주인공이 자아를 인식해가는, 혹은 ‘텅빈 충만’으로 향하는 정신의 발걸음이다. 진실에 이르는 길은 현실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했던가. 이 희곡은 연꽃(진실)만을 제시하지 않고 연꽃을 피워내는 진흙(현실)을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에 종교적 엄숙성을 떠나 대중적 공감대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사바세계의 언어와 다를 바 없이 끊임없이 주절대는 원주나 월명스님의 수다와 희어(戱語)는 희곡세계와 독자의 현실세계를 연결시키려는 언어적 의장들이다. 진속불이(眞俗不二), 참본성을 찾는 일에 어찌 세간과 출세간이 따로 있으리오. 이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불교희곡을 뛰어넘어 대중을 일깨우는 문학적 범종소리로 다가온다. 복닥대는 현실이 한낱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의 환(幻)일진대 이를 보지 못하는 갇힌 존재들에게 도법의 죽비소리가 묵직하게 떨어지는 것만 같다.
평론 당선소감 / 이원희
“생기 넘치는 언어의 숲길 열겠다”
먼저 용렬한 글을 끝까지 읽어주시고 당선작으로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진흙소를 찾는 마음을 더욱 견고하게 세우고 눈빛을 벼려서 생기 넘치는 언어의 숲길을 열어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시를 읽는 일은 숨은 꿈을 찾는 작업이라고 어느 평론가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숨어버린 꿈과 희망 혹은 진실이 어찌 시뿐이겠습니까. 실존의 불안과 저항의 몸짓은 시간의 갈피 속에서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기에, 작가는 감당할 수 없는 삶일지라도 부릅뜬 언어의 집을 장만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글을 읽는다는 건 이 같은 부릅뜬 언어의 집 속에 들어가서 옹골차게 세워진 정신의 뼈마디를 확인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의 글읽기는 와글거리는 남루의 현실과 숨어버린 진실, 이 두 고랑에 파인 샅을 메우는 작업입니다.
불편한 세상, 기우뚱 흔들리는 삶의 풍경 속에서도 은은하게 숨 쉬고 있는 진실의 언어를 캐내는 작업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글 읽기는 ‘참나(眞我)’를 발견하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정신의 경건한 여행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번 당선은 글 읽기의 행복한 길 여행을 본격적으로 나서게 할 동력이 될 것입니다.
당선 소식을 전해 듣고 창문을 열었습니다. 아침 햇살이 우루루 쏟아져 들어옵니다. 반갑고 감사한 마음보다도 쑥스럽고 부끄러움이 앞섰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오십을 넘은 나이까지 희곡 창작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의 초상화를 그렸던 제가 이제는 평론으로 갈마쥐는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글쓰기와 글 읽기로써 이해와 반응이 얼음과 숯처럼 빙탄관계에 있지 않기에 저는 애써 이마를 닦으며 위로를 했습니다. 거친 살점을 드러낸 대지 속에서 새봄이 생기를 밀어내고 있습니다. 이제 부드럽고 화창한 명지바람이 불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기우뚱한 현실을 문학과 예술이 바로 세워 생기발랄한 봄날 세상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평론 심사평 / 오세영 (서울대 명예교수)
‘불교적 세계관’ 통해 문학본질 이해
응모된 평론 중에서 4번의 ‘환(幻)에 대한 기억: 갇힌 존재의 미망 벗어나기’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당선작이 선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이글의 첫 문장이었다. ‘문학은 들어올림과 트임이다.’ 얼마나 당돌하고 신선한 명제인가. 그리하여 비평가는 도입부에서 ‘들어올림’과 ‘트임’에 대해 나름대로 자신의 문학관을 정립해 보인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다소 독단적인 견해가 얼비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이를 ‘무명’과 ‘깨달음’이라는 불교적 세계관에 결부시켜 문학의 본질을 새롭게 이해하고자 한 것은 분명 새로운 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만희의 희곡 ‘그것은 목탁 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다’는 참나(無我)를 발견하는 두 가지 방편에 관한 이야기를 쓴 것이다. 그 하나는 물론 참선 수행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보살행의 길이다. 작자는 각각 이 두 가지 길을 걷는 탄성과 도법이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 시대의 중생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화두를 일찍이 월명사 연기 설화에서 찾아 볼 수 있지만 이를 현대인의 삶에 적용시켜 새롭게 해석해 내고자 하는 것 역시 충분히 의미 있는 일임은 물론이다. 비평가는 이 글에서 이를 노치지 않고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 문학이라 하면 직접적으로 불교 교리를 설파하거나 어설픈 불교 용어들이 나열된 작품을 들기 마련이고 비평가 역시 이를 관념적으로 지적하는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당선작과 같은 본격적 불교문학 비평문이 쓰여졌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다. 당선자가 우리 불교 문학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본다.
당선작은 또한 분석력이 치밀하고 문제 제기에서 결론에 이르는 논리 전개의 일관성도 돋보였다. 비록 신선한 방법론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불교 존재론을 나름대로 손쉽게 풀어 작품 해석에 응용한 부분은 찬사를 받을 만 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다소 미흡한 점이 있다면 이 글의 테마가 된 ‘아’와 ‘무아’에 대한 논의가 부족했고 작품 해독에 지나치게 집작한 나머지 가치평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는 점이다. 참고로 지적해 두자면 비평의 본질은 원래 가치평가에 있는 것이다.
나머지 평론 작품들은 방법론이 없다든지, 혹은 논리전개가 미숙하다든지, 혹은 용어의 선택이 올바르지 않거나 불분명하다든지, 혹은 문제의식이 없다든지 등의 결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적할 것은 나머지 작품 모두 문장력이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평은 곧 문장이니 우선 문장력을 함양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시기를 바란다.
[불교신문 2490호/ 1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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