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연을 사랑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자연이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은신처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제도는 자연을 통제할 수도 없고 자연을 감염시킬 수도 없다. 자연 안에는 인간 세상과는 다른 종류의 권리로 가득 차 있다. 자연 속에서 나는 완전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나에게 인간은 구속인 반면 자연은 자유이다.
내가 숲 속에 산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서 내 집 문간에서 연못까지는 내 발자국으로 길이 생겨났다. 내가 그 길을 사용하지 않은 지 5, 6년이나 되었는데도 그 길은 아직도 뚜렷이 윤곽이 남아 있다. 땅의 표면은 부드러워서 사람의 발에 자국이 나도록 되어 있다. 마음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큰길은 얼마나 닳고 먼지투성이일 것이며, 전통과 타협의 바퀴 자국은 또 얼마나 깊이 패었겠는가!
비록 가장 보잘것없는 곰팡이이라고 할지라도 나처럼 사는 삶을 아마 거부하리라. 균류(菌類)의 삶은 그대로가 성공적인 한 편의 시이다. 입자를 사용하고 정리하는 관념이나 정신에서 어떤 물질의 입자보다도 우수한 어떤 것이 암시되어 있다.
산을 넘어오다 개똥지빠귀가 저녁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는 나를 고양시키는가 하면, 나의 원기를 북돋아주며 나를 고무시킨다. 그 소리는 나의 영혼이 복용하는 약이다. 나의 눈을 맑게 하는 특효약이요, 나의 감각을 젊게 유지시켜 주는 샘물이다. 그 소리는 모든 시간을 영원한 아침으로 바꾸어놓는다.
자연은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 자연의 체계는 일정한 걸음걸이로 진행한다. 꽃봉오리는 마치 짧은 봄날이 영겁의 시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서두르거나 당황하는 빛이 없이 눈에 띄지 않게 부풀어 오른다. 모든 만물은 얼마 동안 이 자연의 활동을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가장 사소한 일에도 영겁보다 못한 시간이 할당된 것처럼 그렇게도 서둘러 대는 것일까? 손톱 깎는 일처럼 비록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잘 해낼 수 있도록 그렇게 많은 영겁의 시간을 소비하지 않도록 하라. 석양에 지는 해가 그에게 해가 남아 있는 동안 하루 일과를 개선하라고 재촉한다면, 귀뚜라미의 노랫소리는 옛날의 규칙적인 박자로 그를 안심시키며 앞으로는 영원히 일을 천천히 하라고 가르쳐 준다.
바람이 잠시 잠잠한 곳에 눈 더미가 쌓인다. 이와 마찬가지로 진리가 잠시 잠잠한 곳에 제도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바로 그 위에 진리의 바람이 불어오면 마침내 그것이 날아가 버린다.
우리는 우리 교육 제도를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교육은 왜 교사(敎師)들이나 학교에서 멈춰 버리는가? 우리 모두가 교사이며 온 우주가 학교이다. 학교가 서 있는 주변 풍경들을 무시한 채 학교 책상에만 앉아 있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짓이다. 밖을 내다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좋은 학교를 목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본문 중에서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움이란 로마나 아테네 그 어디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느끼는 마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라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름다움을 찾지 못하여 다른 곳으로 떠나는 여행은 한낱 부질없는 여행일는지 모른다.
거실보다는 전쟁터가 훨씬 쓸모가 있다. 전쟁터에서는 적어도 위선을 떨거나 격식을 차릴 틈이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의심하면서 서로 만나 손을 흔들고 코를 비빌 그러한 여유가 없는 것이다. 싸움이 격렬하면 격렬할수록 사람들은 더 진실해진다. 적어도 싸움터에서는 거짓 없는 인간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거실의 얼굴은 가면을 쓴 얼굴이다.
5월의 공기를 들이 마신 기억이 떠오른다. 그 기억 때문에 지금의 나와 예전의 내가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숲 속의 개똥지빠귀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 현대적인 철학자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이제 독단이 되었지만 개똥지빠귀는 지금 이 순간의 신념을 가르쳐 준다.
대자연에 살고 있는 인간은 자연을 고마워할 줄 모른다. 아름다운 깃털과 노랫가락을 지닌 새들은 꽃들과 함께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그 어떤 청년, 그 어떤 처녀가 대자연의 야성적이고 풍요로운 아름다움과 호흡을 같이 하는가! 자연은 청년들과 처녀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홀로 활짝 피어난다. 그런데도 천국을 이야기하다니! 그대는 대지를 모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왜 성공하려고 그토록 필사적으로 서두르며 그토록 무모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자기 동료와 발을 맞추지 못한다면 그는 어쩌면 다른 고수(鼓手)의 북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 떄문일지 모른다. 그 북소리의 박자가 어떻든 또한 그 소리가 얼마나 멀리서 들리든 그 사람이 자신이 듣는 음악에 따라 발을 맞추도록 내버려 두라. 그가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처럼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야 할 필요는 없다. 그가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내가 사람들과 멀어진 까닭은 자연과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해와 달, 아침과 저녁에 대한 나의 관심 때문에 나는 고독하게 되었다. 이 세상에 석양 무렵 하늘만큼 숭고한 그림은 없다. 석양을 보기 위하여 누구와 만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마땅히 사람들과 단절될 수밖에 없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명확히 깨닫는 바로 그 순간 정신은 인간 사회로부터 멀어진다. 교제에 대한 내 욕망은 무한히 크지만 실제 사회에 대한 내 적응력은 오히려 감소한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내 계획은 아니다. 다만 생계를 유지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바치면서 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나에게 필요한 생계 수단은 지금 거의 마련되어 있다...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버는 방법에 대하여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은 백만 명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만약 돈을 쓰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돈을 벌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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