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에 대한 환상들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더라" 누가 정해놓은 법칙인지 모르지만 첫사랑에 실패하면 나름 이 말로 마음을 다독거려 본다. 열 여섯살 첫사랑의 열병을 앓은 후 이제 마흔살의 희끗희끗한 새치가 있는 중년의 나이가 된 블라디미르가 들려주는 첫사랑을 들어보자. 그는 자신의 첫사랑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는 이웃집 곁채로 이사 온 공작부인의 딸 '지나이다'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린다. 하지만 그녀에게 블라디미르는 어디까지나 어린애로 보일뿐 성숙한 남자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사실 얼마전까지 까마귀를 맞추며 시간을 보낸 소년인 것이다.
아름다고 매력적인 지나이다는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들의 마음을 이용하여 그것을 즐기기까지 하는 모습이란, 솔직히 제목에서 보여지는 "첫사랑"의 풋풋한 모습이 아니기에 불편한 기분이 든다. 어느날부터인가 사랑에 빠진 듯 변해가는 지나이다를 보는 블라디미르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다. 누구일까. 견제도 하고 고민도 해 보지만 누군지 알수가 없다. 그러다 간간이 아버지와 함께 하는 모습을 보이는 지나이다. 그렇다. 애써 외면하고 있었지만 이때부터 블라디미르는 이미 아버지가 그녀의 상대인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유일하게 블라디미르에게 죄책감을 가지는 지나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이기에 그녀를 사랑하는 블라디미르의 마음을 외면해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그녀가 성숙된 사람이었다면 블라디미르에게 거리를 두고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고백해야했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이다. 가정이 있는 남자를 사랑하는 자신을 떳떳하게 밝힐 수 없어 침묵했겠지만 블라디미르에게는 이것이 가장 잔인한 형태의 고문일 것이다. 물론 그녀 자신도 이 사랑에 괴로워 했기에 다른 이의 마음을 살펴 볼 여유같은 것은 없었을 테지만.
그녀와 아버지의 사랑은 아직은 어린 블라디미르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다. 채찍을 휘둘러 그녀의 손에 상처를 내는 아버지의 모습은 이 글을 읽는 나도 블라디미르도 이미 "첫사랑"의 열정, 풋풋함, 순수함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자신의 가정에 위협을 가한 지나이다, 그녀를 사랑하는 아버지. 사랑 없이 결혼한 아버지이지만 아버지에게 찾아온 그 사랑을 용납하기 쉽지 않다. 다만 아버지가 너무 일찍 갑작스럽게 죽었기에 그렇게 짧게 살다 가려고 세상을 떠나기전 사랑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고 이해하려고 애쓸 뿐이다.
지나이다는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했을까. 뭇 남성들에 둘러싸여 있는 그녀의 모습은 그 사랑의 모습에 진실성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사랑의 아픔에 못견뎌하는 그녀를 보며 그 열병에 휩싸인 지나이다를 욕하며 손가락질 하기는 쉽지 않다. 누구에게든 사랑은 사랑이니까. 어떤 모습의 사랑이든 이것으로 블라디미르의 마음도 한층 성숙해졌을 것이다. 한 소년이 어떻게 한 남성으로 변해가는지 그 심리적인 묘사는 탁월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사랑'을 파괴라도 한 듯 별로 유쾌한 기분을 가질 수 없어 아쉽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서만이 비로소 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너무나 큰 형벌이 아닐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버려야 하는 일이므로 늘 견제하며 멀리해야겠지만 오늘도 이 세상의 많은 이들은 사랑 앞에 다가서며 그렇게 현실에 맞서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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