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지막하게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고개를 천천히 들어 발 쪽을 보는 순간 그만 숨이 멎는 것 같다. 소리의 주인공은 거대한 암사자다. 무게가 136킬로그램은 됨직한 놈이 고작 5미터 거리에서 우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발 근처까지 온 암사자가 고개를 한쪽으로 천천히 돌리자 나는 이때다 싶어 델리아를 깨웠다. 고개를 들던 델리아는 사자를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 팔을 잡으며 재빨리 오른쪽으로 고갯짓을 한다. 4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암사자가 또 있다. 그리고 또 한 마리.. 또 한 마리.. 조심스레 주위를 살펴보니 아홉 마리가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지난밤 우리는 말 그대로 칼라하리의 야생 사자 한 떼와 동침을 한 것이다.
- 인간이 살지 않는 야생 속으로, p.20~21
"세상에! 트럭이 가라앉고 있어! 빨리 타! 어서! 여기서 나가야 해!" 염전 표면이 부서지면서 바퀴들이 진흙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금세라도 트럭을 집어삼킬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차에 급히 올라탔지만 시동은 꺼지고 바퀴는 점점 가라앉았다. 미친 듯이 시동을 다시 켜고 기어를 로우-레인지로 옮기자 트럭이 간신히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염전 가장자리를 향해 마구 달렸다. 염전을 벗어나 안전한 풀밭에 도착할 때까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말 아찔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우리는 얼굴을 마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 아프리카의 새벽을 날다, p.40
새벽 3시 30분경 너무 졸려 델리아에게 잠시 보초를 맡기고 차 옆 땅바닥에 침낭을 펴고 조용히 들어갔다. 신발을 옆에 두고 셔츠를 돌돌 말아 베개로 삼았는데,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려는 순간 머리를 땅바닥에 심하게 부딪쳤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급히 손전등을 찾아 비추니 5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자칼이 내 셔츠를 입에 물고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야! 그거 이리 내 놔!" 나는 반쯤은 어이가 없고, 반쯤은 화가 나고, 반쯤 잠이 깬 상태였다. 녀석은 기어이 셔츠를 물고 풀숲으로 도망쳤다. 새벽 무렵 신발 한 짝의 코 부분과 누더기가 된 셔츠를 찾았다.
- 우리만의 에덴동산을 발견하다, p.56
불길이 모래언덕을 다 내려와 야영지에서 900미터 떨어진 강바닥에 닿자 순식간에 거대한 연기 기둥이 사바나에서 분출하듯 하늘로 치솟았다. 높이가 2~3미터에 달하는 불길이 계곡을 따라 질주하기 시작했고, 야영지에서 350미터가량 떨어진 지점에 만든 저지선이 들불의 속도를 늦출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불길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파죽지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 들불이야! 칼라하리가 불타고 있어!, p.75~76
큰 먹잇감을 둘러싸고 어른 자칼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이것은 자칼들 사이에 존재하는 엄격한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가만히 있던 새끼들이 고기를 먹으려고 부모 곁으로 다가가자 부모는 등을 돌리며 험악하게 으르렁거렸다. 지금까지 온갖 장난을 다 받아 주었는데, 갑자기 왜 그러는 거지? 그 순간 부모 자칼은 새끼들을 경쟁자로 간주한 것이다. 암컷 새끼는 꼬리를 말고 앉아 입을 벌린 채 항복의 표시로 앞발을 들었지만 수컷 새끼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비에게 매번 퇴짜를 당했지만 계속 고기에 달려들자 아비가 새끼에게 공격성을 드러냈다. 마침내 부자는 참을 수 없는 순간이 되었다. 두 수컷은 털을 철사처럼 빳빳하게 세운 채 마주서더니 엉겨 붙었다.
- 칼라하리의 울음소리, p.102~103
배를 채운 들개들의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지저분한 털가죽, 너덜너덜한 귀, 빗자루 같은 꼬리를 한 집시 개들이 흥에 들떠 춤을 추었다. 아프리카들개가 걷고 있는 사람을 공격한 사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나는 카메라를 챙겨 차에서 내렸다. 몇 미터를 갔을까? 들개들은 나를 둘러싸고 춤을 추고 요리조리 몸을 움직였다. 내게는 아무 관심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쭈그리고 앉는 순간 분위기는 돌변했다. 녀석들은 나를 처음 봤다는 듯 쳐다보더니 순식간에 반원 대형으로 나를 에워싸고는 어깨를 맞대고 꼬리를 쳐들고 으르렁거리며 점점 나를 압박해 들어왔다. 땀방울이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 들개 대장 '반디트'와 그 일당, p.177~178
건기 동안 칼라하리 사자들은 세렝게티의 사자들과 사뭇 달랐다. 무엇보다 암컷들의 행동이 다르다. 우기에 어떤 무리에 속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듯 암사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만난 새로운 무리에 적응했다. 우리가 관찰한 암사자들은 한 마리도 빠짐없이 다른 무리와 어울렸다. 세렝게티의 무리 개념은 무척 공고하고 탄탄해 다른 무리의 암사자가 접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반면 칼라하리는 그렇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동물들이 극심한 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사회체계를 어떻게 조정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예다.
- 먹이를 찾아 헤매는 떠돌이들, p.297~299
우리는 절대로 새들의 둥지를 건드리지 않았지만, 포식자들이 어미 새들을 공격하는 바람에 버려진 알들은 가져와 먹었다. 하지만 갈색하이에나에게 이 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다면 그마저도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마크는 송곳으로 타조 알의 끝부분에 작은 구멍을 냈다. 그런 다음 알을 무릎 사이에 끼우고 철사를 구멍으로 넣고 마구 휘저어서 흰자와 노른자를 섞었다. 나는 한 끼 분량만 프라이팬에 요리한 후 알에 반창고를 붙여서 그늘진 나무 아래에 묻었다. 내용물이 썩을 때까지 12일 남짓 걸렸는데, 그동안 아침마다 스크램블드에그나 오믈렛을 해 먹었다. 타조 알의 유일한 문제점은 구멍을 내기 전에는 얼마나 신선한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심하게 썩었을 때는 구멍을 뚫는 순간 지독한 냄새와 내용물이 폭발하듯 얼굴 전체로 튀어 마크가 타조 알에 구멍을 낼 때마다 나는 멀찍이 서서 마크의 반응을 살폈다.
- 야영지에서 생긴 일, p.128~129
우리 앞에는 13미터가 넘는 커다란 회색 모래언덕들이 있고, 그곳에 미로 같은 굴들이 펼쳐져 있었다. 거기에다 언덕마다 나이가 다른 새끼들이 서 있는데, 새끼들의 어미가 다 다른 것 같다. 사라진 새끼들도 모여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세계에서 최초로 갈색하이에나 무리의 새끼들이 모여 사는 공동 굴을 발견한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도저히 풀 수 없었던 의문들이 한순간에 해결되는 것 같았다. 갈색하이에나는 청소동물이라 대형 먹잇감을 사냥할 필요가 없는데, 왜 무리 생활을 하는 걸까? 이유는 분명했다. 갈색하이에나들은 칼라하리 같은 험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새끼들을 공동으로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청소동물이면서 굳이 무리를 이뤄 먹이와 영토를 공유했던 것이다.
- 청소동물의 공동육아 학교, p.318
오랜 가뭄을 견디지 못하고 디셉션 밸리 남쪽에 있던 누들이 북쪽의 보테티 강과 오카방고 강, 하우 호수 등을 향해 대이동을 시작했다. 누 떼는 하룻밤에 40~48킬로미터를 이동했는데, 갑자기 누들이 멈춰 섰다. 생전 처음 보는 것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는 구제역을 방지한다며 인간들이 만든 울타리가 세워져 있다. 울타리의 동쪽과 서쪽 끝은 다른 울타리와 연결되어 장장 800킬로미터에 걸쳐 사막을 에워싸고 있다. 누들은 지독한 가뭄이 올 때마다 의지했던 호수와 강 근처의 서식지로 가는 길을 차단당했다. 지금까지 배운 것으로도, 본능으로도 이 장애물을 헤쳐 나갈 수 없다. 당황한 누들은 북쪽을 포기하고 울타리를 따라 동쪽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동쪽으로 향하던 누 떼는 남북을 잇는 또 다른 울타리에 다다랐다. 누들 사이에 대혼란이 일어났다. 두 번째 울타리를 따라가면 남쪽으로 가야 한다. 북쪽을 향해 달려왔건만 목적지와는 정반대 방향이다. 누들은 머리를 흔들며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다. 잠시 후 누들이 비틀거리더니 쓰러지기 시작했다.
- 사막의 검은 진주들, 누 떼!, p.368~371
왜 생태학자들은 목숨을 걸고 오지 속으로 떠나는가?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생명에 우열이란 있을 수 없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라진 종이나 환경에 적응해 지금까지 살아남은 종이나 모두 진화의 산물이며 자연의 생명 현상이다. 환경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 칼라하리의 야생동물도, 인간도 적응하지 못하고 멸종할 수 있다. 혹 모른다. 인간이 야생동물보다 더 빨리 멸종할 수도 있다. 인간을 둘러싼 환경에는 온난화나 물이나 공기만이 아니라,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동식물이 포함된다. 환경을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의 터전이 흔들리지 않도록 환경을 잘 보전하는 것이고,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할 대책을 세우는 것이다.
이 책은 오지에 대한 여행지침서가 아니라 공존과 상생의 의미를 묻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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