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이별없는 세대>에 부친다

나뭇잎숨결 2008. 12. 4. 07:44

 

 

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 나는 넋을 잃었다. 그대 눈짓 한번에 그대 목걸이 하나에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 그대 사랑 아름다워라.  그대의 사랑 포도주보다 달아라. 그대가 풍기는 향내보다 더 향기로운 향수가 어디 있으랴!

                                                                                                                                              

                                                                                                                                                             - 아가서 4장 9~10절

 

 

 

 

 

  우리는 서로 만남도 없고, 깊이도 없는 세대다. 우리의 깊이는 나락과도 같다. 우리는 행복도 모르고 고향도 잃은, 이별마저도 없는 세대다. 우리의 태양은 희미하고, 우리의 사랑은 비정하고, 우리의 청춘은 젊지 않다. 우리에게 국경이 없고, 아무런 한계도, 어떠한 보호도 없다-어린이 놀이터에서 이쪽으로 쫒겨난 탓인지, 이 세상은 우리에게 우리를 경멸하는 사람들을 건네주고 있다. 

 

  그들은 그러니 우리에게 이 세상의 모진 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우리 마음이 의지할 수 있는 신을 마련해 주지는 읺는다. 우리는 신이 없는 세대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만남도 없고 과거도 없으며, 감사할 아무런 것도 갖고 있지 않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진 바람은 우리의 발, 우리의 가슴을 따가운 길거리, 그리고 한 길이 넘게 눈이 쌓인 길거리에서 헤매게 하였으며, 우리도 하여금 이별을 모르는 세대가 되도록 하였다.

 

  우리는 이별이 없는 세대다. 우리는 이별을 체험할 수도 없고, 또 체험하지 않아도 좋다. 우리가 자칫 발길을 잘못 두면 거리를 헤매는 우리의 가슴에는 영원한 이별이 못박아지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아침에 이별을 보게될 하룻밤을 위해서 우리의 가슴은 조마조마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우리는 이별을 극복할 것인가? 그대들, 우리와는 다른 그대들처럼 이별을 겪으면서, 그때마다 그대들과 같응 이별을 우리가 맛보려 한다면, 우리의 눈물은  어떤 둑도, 그 둑이 설령 우리 조상이 쌓은 것이라 해도 결코 막을 수 없는 홍수로 흘러 넘치게 할 것이다.

 

  그대들 체험한 것처럼, 1킬로미터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이별을 일일이 체험할 힘이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의 가슴이 침묵한다고 해서 우리 가슴이 말할 소리가 없다고 하여 그대들, 말하지 말라. 그럴 것이 우리의 가슴은 서로서로의 만남, 이별과 같은 말을 하지 않를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가슴이 우리가 당하게 될 모든 이별에 다정하게 슬픔을 나누고 위안을 나누면서 다시 힘을 찾을 수 있다면, 그때에 참된 이별은 있을 수 있다. 우리의 이별은 그대들의 그것에 비해 쉴새엇이 일어나는 것으로서 그때마다 우리의 민감한 가슴에서 일어나는 외침이 크게 자라나, 그 결과 그대들을 매일 밤 그대들 침대에서 우리를 위한 신을 기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듯 우리는 이별 없는 세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별을 부인하며, 우리가 떠날 때엔 아침마다 이별을 잠들게 한다. 이별을 막고 이별을 아낀다. -우리들을 위해서, 또한 떠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것을  아낀다.

 

  마치 도둑처럼 이별 앞에서 몸을 숨기며 사랑은 가진 채 이별을 남긴다.

 

  마치 하늘의 별처럼 우리는 무수히 만나지만, 만나도 그것은 짧고, 진정한 이별은 없다. 하늘의 별들은 서로 가까이 와서 잠시 자리를 함께 하지만, 다시 멀어진다. 흔적도, 연결도 되지 않으며, 이별도 모르는 채 멀어진다.

 

  우리는 스몰레스크의 성당에서 만난다. 그리하여 한 쌍의 부부가 된다- 그리고 난 다음 우리는 그로부터 각자 몸을 감춘다.

  우리는 노르만디에서 만나다. 부모와 자식처럼 만나다 - 그리고 난 다음 그로부터 우리는 각자 몸을 감춘다.

  우리는  필란드의 호숫가에서 만나 하룻밤 사랑을 속삭인다 -그리고 난 다음 그보부터 각자 몸을 감춘다.

  우리는 베스트팔렌에 있는 농장에서 만난다. 서로 즐기다가 얘를 낳는다- 그리고 난 다음 우리는 각자 몸을 감춘다.

 

  우리는 거리의 어느 지하실에서 만나 허기와 피로를 느낀다. 별로 하는 일 없이 편하고 충분한 수면을 취한다 -그리고 난 다음 각자 몸을 감춘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만나, 서로 함께 지낸다 - 그리고 난 다음 각자 몸을 감춘다. 우리는 아무 만남도 없고, 오래 머물지도 않고, 이별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별을 모르고, 제 가슴에서 나는 소리를 두려워하며, 도둑처럼 그 자리에서 몸을 숨기는 세대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향이라고 할만한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슴을 어무만져 줄 만한 사람이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는 이별 없는 세대가 되었고 돌아갈 고향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래가 있는 세대다.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생활, 별의 세계로 가는 세대일 것이다. 새로운 태양 아래에서 새로운 가슴을 가지려고 하는 희망의 세대다. 아마도 우리는 새로운 사랑, 새로운 웃음, 새로운 신에 대해서 넘치는 희망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별이 없는 세대, 그러나 우리는 모든 미래가 오리의 것임을 알고 있다.

 

                                                                  - 볼프강 보르헤르트(Borchert, Wolfgang),  문학과 지성사, 2000,  pp. 91~101

 

 

 

 

 

 

 

 

1.

 

  "우리는 이별을 체험할 수도 없고, 또 체험하지 않아도 좋다" <이별없는 세대>는 스물여섯의 나이로 요절한 독일의 천재작가 볼프강 보르헤르트, 그의 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단편들과 대표 시 모음집이다. 러시아 전선에서의 기관총사수의 의식을 묘사한 <적설>, 빨간 입술의 창녀와 의족을 한 남자의 스쳐가는 듯한 만남을 그린 <여기 있어줘요, 기린 아저씨> 등 아주 짧은 분량의 단편 26편과 `함부르크를 위한 시` 15편을 엮었다. "우리는 서로 만남도 없고 깊이도 없는 세대다. 우리의 깊이는 나락과도 같다. 우리의 청춘은 젊지않다." 보르헤르트는 스침과 만남을 구별한다. 이별은 사랑 다음에 넘겨지는 페이지이므로 어떤 사람의 자아까지 도달하지 못한 관계는 스침이지 만남이 아니란 부연이다. 사랑이 없으므로 이별은 더더욱 없다. 우리가 정말 사랑하긴 한 것일까? 라는 스침의 관계속에서는 무슨 이별이 있을 것인가?  그러니 이별은 사랑의 죽음이 아니라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인간사의 장엄한 의식과도 같은 것이리라. 

 

 

2.

 

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 나는 넋을 잃었다. 그대 눈짓 한번에 그대 목걸이 하나에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 그대 사랑 아름다워라.  그대의 사랑 포도주보다 달아라.그대가 풍기는 향내보다 더 향기로운 향수가 어디 있으랴!

                                                                                                                                                     - 아가서 4장 9~10절

 

 

 인구에 널리 회자되는 아가서의 "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는 릴케가 루 살로메에게 준 헌시에도 인용된다. 아가서의 저자 혹은 릴케가 루 살로메 저 헌시를 주었을때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당신은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지만 내가 당신과 만난다는 것은 단지 이 세상에서 당신이 가장 매력적인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신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당신은 내 안에 있는, 내가 궁극에 돌아가야 할 고향의 모습을 알려 주었다. 당신은 나의 상처를 어무만졌고 동시에 찔렀다. 나의 그리움을 알면서 그리움을 부추겼다.  당신은 나의 욕망을 알았고,  나의 열등감을 알았다.  당신은 나의 치기도 알았고, 나의 두려움도 알았다. 당신은 사람들이 말하는 나의 장점, 단점  그 모든 것을 일순간에 꿰뚫고 초월했다. 당신은 처음부터 너무나 익숙했다. 우리 언제 만난적 있었나요? 당신 앞에서만은 나는 부끄럼도 비굴함도 없었다. 당신 앞에서 나는 날로 방만해져 갔다. 무한이라는 개념을 당신에게서 확인했다. 에덴동산의  벌거벗은 아담과 에와였다.  당신은 나에게  하나의 이름이 아니었다.  나의 신부이자,  나의 누이, 나의 어머니이기도 하였다. 연인이기도 하였지만 스승이자 모태, 근원이기도 하였다. 신이었다. 세계였다. 장미였다. 그러니 내가 당신과 이별한다는 것은 나 자신과 이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의 모든 것을 상실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당신과 이별하는 순간 비로서 나는 無로 돌아갈 것이다.  그런데, 누가 無나 有를 선택할 권리가 있는가?  존재했던 것은 결코  無로 환원되거나 상실될 수 없다는 점에서 당신을 만나거나 만나지 않거나 당신은 이미 내 안에 고스란히 스며있고 녹아있다. 당신은 이미 '나'이므로, 나는 '당신'이므로. 당신과 나라는 경계도 사라지고, 형체도 없어졌다. 무엇이 하늘이고 무엇이 땅인가?  당신은 완벽하게 나와 함께 있다. 우리는 운명의 끝까지 가벼렸다. 내가 바라보는 하늘, 들, 산, 거리, 사람들 속에서 당신은 웃고 있다. 아니 내가 웃고 있다.  당신이 말하고 있다. 아니 내가 말하고 있다. 당신은 나이므로. 나는 당신이므로,  늘 당신은 내 안에서 숨쉬고 생각하고 말한다. 우리는 점점 더 이별을 보류한다. 천지에 당신이 충만한데  오감각으로 당신을 확인할 수 없다. 충만의 無는 허무의 無로 바뀐다. 당신은 나의 충만이자, 한없는 결핍이다.  과연 우리는 이 별에서 이별할 수 있을까?   

 

 

                                                                                               3.

 

  스치기는 했으나 만난 적이 없으므로 이별이란 장엄한 의식이 가당치 않거나, 너무 깊이 만나 이별할 수 없거나, 그렇게 우리는 이별없는 세대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