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 김훈, '바다의 기별' 중에서
1975년 2월 15일은 낮 최고 기온이 영하 7도였다. 며칠째 퍼붓던 눈이 멈추고, 날은 흐렸다. 흐린 날이 저물자 기온은 영하 12도 아래로 떨어졌다. 얼어붙은 거리에 북서풍이 불었고, 그날 밤 서울 영등포구 고척동 영등포 교도소 앞 거리에는 라면 껍질과 연탄재가 북서풍 속에서 회오리치면서 솟구치고 있었다. 1974년 7월 13일에 군사재판에서 긴급조치 4호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형법상의 내란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던 김지하는 1975년 2월 15일 밤 아홉 시 사십 분께 형집행정지로 영등포 교도소에서 출감했다.
나는 그날 아침 열 시께로부터 서울 영등포교도서 정문 앞에서 김자하의 출감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유신이 선포되던 1974년부터 신문기자의 업을 시작했던 나의 밥벌이였다. 춥고 어두운 겨울이었다. 희망이란 없었다. 사람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포기한 사람과 아직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아마도 포기한 사람 쪽에 속해 있었던 거 같다. 그때 나는 스물일곱의 청춘이었다.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도, 이 세상에 더 이상 희망이라는 것이 부재하다는 것을 현실로 인정하고 있었다.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들을 향해 필사적인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기자들은 스스로의 소망이나 지향성을 외칠수 없었다. 그들은 이미 스스로 폐기처분해버린 소망과 지향성이 타인에 의하여 불붙여지기만을 기다리면서, 그 기약없는 겨울을 통과해나가고 있었다. 그날 영등포교도소 앞에는 대낮부터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교도소 쪽은 김자하의 석방 시간을 예고하지 않았다. 또 예고했다 하더라도 정치법의 석방시간에 관한 약속을 법무 당국은 번번이 지키지 않았고, 기자들을 따돌리기 위하여출소자들을 새벽이나 심야에 교도소 뒷문으로 내보내는 경우가 허다하였음으로, 기자들은 하루 종일 교도소 문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기자들은 교도소 앞 거리에서 나무토막이나 종이상자를 줘 와 모닥불을 때거나 혹은 인근 음식점에서 내다버린 구공탄 재를 아직도 남아 있는 불기 주변에 모여 언발을 녹여가면서 교도소 정문을 주시하고 있었다. 언제 교도소 문이 열리고 김지하가 나타날지 알 수 없었음으로, 기자들은 저녁을 먹으러 갈 수도 없었다. 교도소 정문은 텅 빈 벌판이었고, 그 벌판 가장자리에 매우 더러운 몰골의 중국 음식점이 있었다. 우리는 수습기자 한 명을 그 음식점으로 보내 저녁밥을 배달시켰다. 나는 뜨거운 국물이 먹고 싶어서 짬뽕을 시켜달라고 했다. 기자들 대부분은 짜장면보다는 짬뽕을 주문했다. 그런데 배달되어 온 짬뽕 국물은 차게 식어 있었다. 우리는 내버린 연탄재 주변에 모여 그 차가운 짬뽕을 후루룩 거리며 들이마셨다. 지방판 마감은 대체로 오후 여섯 시였다. 김지하가 다섯시 삼십 분 이전에 출감하지 않는다면, 조간기자들은 지방판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조간기자들은 교도소 안으로 전화를 걸어 "야, 풀어주려면 제발 지방판에 맞춰서 풀어주라. 지방 독자는 사람 아니냐" 라고 욕설을 퍼부어댔다. 교도소 측 답변은 출소자들에 대한 소장의 정신 훈화가 남아 있고 또 교도서 담장 밖 분위기가 너무 과열되어 있어 출감 절차가 지연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하루 종일 추위에 떨고 나서 지방판을 포기해버린 저녁에, 우리들은 연탄재와 쓰레기더미 속에서 살얼음이 잡혀오는 짬뽕 국물을 마시면서 김지하의 출감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때 나는 보았다. 아마도 오후 다섯 시 삼십 분쯤이 아니었을까. 내가 짬뽕 그릇을 입에 대고 국물을 마시고 고개를 쳐드는 순간, 교도소 정문 맞은편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웬 허름한 여인네가 포대기로 아기를 업은 채, 추위 속에서 웅크리고, 저물어 가는 교도소 정문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여인네 옆에는 영업용 포니 투 택시가 한 대 정차해 있었는데, 그 여인네가 출소자를 마중하기 위하여 대절한 택시였다. 아마도 운전기사가 연료를 아끼느라고 택시 안의 히터를 꺼버린 모양이었다.
아이 업은 여인네는 자동차 밖에서 떨고 있었다. 그 여인네는 자꾸만 허리춤을 들어 올려 미끄러져 내리려는 아이를 등의 한복판 쪽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저 여인네가 혹시 박경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미치자, 나는 짬뽕 그릇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기자의 무리를 떠나서 그 여인네 쪽으로 접근했다. 날이 이미 어두워졌으므로 멀리서는 인상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가까이 가보니, 그 여인네는 과연 박경리 선생이었으며, 그 아이는 그 아버지가 수배망을 피하여 다니던 1974년 4월 19일 날 태어난 강(岡)이었음이 틀림없었다. 김지하는 1973년 4월 7일 김영주와 혼인하였고 강은 그로부터 일 년 후인 1974년 4월 19일에 태어났음으로, 강은 그 부모의 신혼 초에 점지된 것이 확실하고 강이 태어난 지 일주일 후에 인혁당사건과 민청학련사건이 발표되고 바로 그날 흑산도에 피신해 있던 그의 아버지 김지하는 검거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박경리 선생님의 등에 업힌 저 아이는 생후 10개월 미만일 터였다.
어쩌자고 생후 10개월 미만의 어린 것을 업고 영하 12도의 강추위 속에 바람 부는 교도소 앞 광장으로 나온 것인지 나는 알 수 가 없었다. 아마도 집 안에 아이를 맡길만한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박경리 선생님 쪽으로 바짝 접근헤서 그분이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할 위치에 쭈그리고 앉아서 그분을 마음 놓고 관찰했다.
"여기 박경리가 왔다"라고, 나는 내 동료기자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나 혼자 그분을 관찰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분은 담요로 만든 방한화에 버선을 신고 있었다. 발이 몹시 시려왔던지 이따금씩 방한화를 벗고 손으로 언 발을 주물렀다. 등에 업은 아이는 머리끝까지 온통 포대기로 감싸고 그 포대기 위를 다시 두꺼운 숄로 덮어서 아이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아이가 칭얼거릴 때마다 그 여인네는 몸을 흔들어서 아이를 얼렸다. 칭얼거리를 아이에게 그 여인네는 고개를 돌려서 무어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그 말은 나에게까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여인네가 그때 아이에게 한 말을 들을 수 없어서 답답했다.
'울지 마라 느 아비 곧 나온다.' 아마 이런 말이었을까. 그 여인네가 아기를 업은 포대기는 매우 낡아 있었다. 포대기는 누빈 포대기였는데 허리 부분을 넓게 접어서 아이의 등에 힘이 걸리게 바싹 조였으며 아이의 엉덩이 밑으로 포대기 끈을 여러겹 둘렀다.
그래도 그 여인네의 야윈 몸으로부터 아이는 자꾸만 흘러내리는 것이어서 여인네는 자꾸만 몸을 추슬러 아이를 끌어올렸다. 아무도 그 여인네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고, 그 여인네는, 교도소 정문 앞에서 들끓는 그 어떤 사람과도 무관해 보였다. 그때 그 여자는 길섶에 풀 한 포기보다도 더 무명해 보였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일 아무런 이유가 없는, 어떤 자연현상처럼 보였다. 그 여자는 다만 사위의 옥바라지를 나온 한 장모였으며, 감옥에 간 사위의 핏덩이 아들을 키우는 모습만으로 그 교도소 앞 언덕에서 북서풍에 시달리며 등에서 칭얼대는 아기를 어르고 있었다. 그런 그 여인네의 모습을 훔쳐보면서, 나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기로 했다. 시대도, 긴급조치도, 국가보안법도, 무슨무슨 혐으도, 성명서들도, 군법회의도, 김지하도, 나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만, 그 여인네의 등에 매달린 아이가 발이 시려우면 안될텐데, 그런 걱정만을 했다. 지방판 마감이고 유신독재고 뭐고 간에 어서 빨리 저 여인네의 용무가 끝나서 그 아기가 할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이 추운 언덕의 바람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만을 했다. 그러자 내 마음속에서, 나에게 없었던 따뜻한 것들, 정체를 알수 없는 어떤 울음에 가까운 따뜻한 것들이 돋아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이던가. 나는 지금 그 20년 전의 따스함의 정체를 겨우 입을 벌려 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것은 나에게 감염된 그 여인네의 모성이었으며 허름하고 남루한, 그 풀포기와도 같은 무력과 무명의 모습이야말로 그 여인네의 힘의 모든 원천이었음을, 가로등 하나 없는 형무소 앞 광장은 어두워졌고, 기온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밤 아홉시께 옥문이 열렸다. 나는 언덕 위의 박경리를 버리고 김지하를 맞이하기 위해 교도서 정문 앞으로 내려가서 기자의 무리들 속에 섞였다. 이제 김지하가 나타나면 기자의 동료들 사이에서는 서로 김지하에게 가까이 접근하려는 난투극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나는 구두끈을 졸라매었다. 그날 영등포 교도서에서 출감한 정치범은 모두 열두 명이었는데 대부분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걸려든 학생들이었고, 김지하와 박형규, 백기완이 이날 석방의 초점이었다. 적어도 기자들에게는 그랬다. 밤 아홉 시부터 학생들이 풀려나기 시작했다. 학생 한 명이 나올때마다, 만세 소리가 터지고 <우리 승리하리라>를 불렀다. 교도소 정문 안쪽에서, 구내 가로등 불빛 속에 머리를 빡빡 깍은 김지하가 정문 쪽으로 걸어오자, 교도소 정문 밖 사진 기자들은 전원이 전투배치되었다. 그들은 교도서 철문 위로 기어올라가거나 교도서 수위실 지붕 위로 몰려 올라갔다. 취재기자들은 제2선에 포진하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팔꿈치로 기자를 찍어서 물리치고 또 딴지를 걸며 쑤시고 들어가는 전법으로 김지하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한 일군의 기지들 속에 낄 수 있었다. 고은, 천승세, 조태일, 김광협 들이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고, 학생들이 김지하를 무등 태워서 캄캄한 교도서 앞 광장을 미친듯이 달리며 고함을 질렀다. 김지하는 그때 무등 위에서 기자들에게 "나는 종신형을 받았다. 이제 풀려나니 세월이 미쳤는지 아니면 둘다 미쳤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말했다. '내가 관련된 민청학련사건은 순수한 민주구국투쟁이며 정정당당한 합법운동이다. 이제 참으로 끔찍스런 사실이 낱낱이 공개될 것이다. 나는 부패한 정권, 무능한 권력과 끝끝내 싸우고 또 싸울 것이다."
나는 김지하에게 바싹 붙어서 취재를 하면서도 교도서 광장 건너 언덕의 어둠 속에 서 있는 그 아이 업은 여인네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김지하가 무등을 타고 아우성을 치며 광장을 휩쓰는 동안에도 그 여인네는 어둠 속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 여인네는 다만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김지하는 출감한 옥문 앞에서 장모를 만나지 않았다. 김지하는 장모의 안부를 물을 겨를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김지하는 무등을 타고 기세를 올린 후 그의 지지자 찬양자들의 무리들이 미리 준비해놓은 승용차에 올라타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그는 그날 밤 명동성당에서 하룻밤을 새웠다. 김지하가 떠나버린 어둠 속에 그 여인네는 혼자 오래오래 서 있었다. 아무도 그 여인네를 알아보지 못했다. 김지하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기자단의 대부분은 김지하의 승용차를 따라 명동성당으로 향했고. 환영 나온 학생들, 기독인들의 무리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교도소 앞 광장은 매서운 추위가 몰아쳤고, 아직도 출감하지 않은 백기완을 기다리는 사람들 몇 명이 남아있었다.
나는 김지하가 출감하던 순간을 기사로 엮어 전화로 본사에 송고하고 다시 백기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백기완은 밤 열한 시께 석방 되었다.
그때까지 남아있던 기자단은 백기완의 석방이 늦어지는 이유를 교도소 당국에 가혹하게 추궁했다. 이미 발이 시려서 마비 지경이 이르렀고 추위와 배고품에 지쳐 기자들은 악에 받쳤다. 기자들은 교도서 당국에 욕설을 퍼부었다. 그런데 교도소 당국의 설명은, 백기완의 긴급조치 위반 부분은 형집행정지가 되었으나. 그로부터 6년전에 국민투표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전과가 또 있어서, 그 벌금 십만원을 납부하지 않으면 석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이 교도소 담 밖에 알려지자 즉각 모금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군중들인, 기자와 학생들 대부분이 김지하를 뒤쫓아서 빠져나간 다음이었다. 사람이 없으니 모금이 될리가 없었다. 기자들은 모금에 참가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나는 내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만 원짜리 몇 장을 다만 만져볼 뿐, 그 돈을 내놓지 못했다. 그때 나는 또 박경리 선생을 쳐다보았다. 그분은 십만원에 얽힌 백기완의 사정을 어떻게 알았던 모양이다. 박경리 선생님은 어느새 언덕에서 내려와 교도소 정문 앞 광장에 있었다. 그분은 아이를 감싼 포대기의 앞섶을 뒤적거리더니 만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냈다. 그러더니 가까이 있던 웬 대학생을 불렀다. "학생, 이 돈을 좀 보태보시오"라고. 다만 그렇게 그분은 말했다. 그리고는 그분은 대절해 온 택시에 몸을 실었다. 택시 안에서 그분은 등에 엊었던 아이를 풀어서 무릎 위에서 재우고 있었다. 시간은 밤 열두시에 임박하고 있었다. 만원 짜리 몇 장을 내놓고 그분은 다만 잠든 어린애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도 그분을 뒤쫓아 가는 사람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신문사에 돌아가 마지막 기사를 작성했다. 나는 박경리에 관해서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 나는 다만 백기완의 출감 모습만을 추가로 썼다. 나는 박경리에 관하여 쓸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쩐지 그것이 말해서는 안 될 일인 것만 같았다. 새벽 두 시께 집으로 돌아와 일어난 아내에게 그날의 박경리에 관해서 말해주었다. 아내는 울었다. 울면서 "아이가 추었겠네요"라고 말했다.
춥고 추운 겨울 밤이었다.
- 김훈, <바다의 기별- 1975년 2월 15일의 박경리>, 생각의 나무, 2008, pp.83~94
아버지를 묻던 겨울은 몹시 추웠다. 맞바람이 치던 야산 언덕이었다. 아버지는 오래 병석에 누워 계셨고, 가난은 가히 설화적이었다. 병장 계급장을 달고 외출 나와서 가끔씩 아래를 살펴드렸다. 죽음은 거역할 수 없는 확실성으로 그 언저리에 와 있었다. 아래를 살필 때, 아버지도 울었고 나도 울었다. -22쪽
“요사스럽다. 곡을 금한다.” 내 아버지한테서 배운 말투였다. 여동생들은 질려서 울지 못했다. 아버지의 관이 내려갈 때 나는 비로소 내 여동생들의 ‘오빠’라는 운명에 두렵고도 버거운 충만감을 느꼈다. - 23쪽
삶은 살아 있는 동안만의 삶일 뿐이다. 죽어서 소멸하는 사랑과 열정이 어째서 살아 있는 동안의 삶을 들볶아 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성 속에 자지러지는 행복이나 기쁨이 없다 하더라도, 이 거듭되는 순환과 반복은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
-32쪽
중모리 문장은 편안하다. 사유는 문장 속에 편안하게 실린다. 휘몰이 문장을 쓸 때는 사유가 문장을 몰고 가지만, 중모리 문장을 쓸 때는 문장이 사유를 이끌고 나가는 것 같다. 그래서 중모리 문장을 쓸 때 내 몸은 아늑하다. 그 아늑함이 한가하고 또 부질없이 느껴질 때, 나는 다시 휘몰이 쪽을 넘보는데 휘몰이 문장을 불러오려면, 사유의 질감을 바꿔야 한다. 이 전환은 쉽지 않다. -59쪽
교도소 정문 맞은편 야트막한 언덕 위에 웬 허름한 여인네가 포대기로 아기를 업은 채, 추위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 김지하가 검거되었던 것이다. 어쩌자고 생후 10개월 미만의 어린것을 업고 영하 12도의 강추위 속에 교도소 앞 광장으로 나온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신문사로 돌아가 마지막 기사를 작성했다. 나는 박경리에 관하여 쓸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쩐지 그것이 말해서는 안 될 일인 것만 같았다. 새벽 두 시께 집으로 돌아와 잠자다 일어나 아내에게 그날의 박경리에 관해서 말해주었다. 아내는 울었다. 울면서 “아기가 추웠겠네요”라고 말했다. 춥고 또 추운 겨울이었다. -94쪽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언어로써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아름다움은 세상의 악과 폭력과 야만성과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다. -137쪽
100만부를 돌파한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 『남한산성』 등 걸출한 장편소설을 펴내며 이 시대 최고의 소설가로 우뚝 선 김훈이 『자전거 여행1?2』,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에 대하여』에 이어 4년 만에 에세이집을 펴냈다.
올해 예순을 맞이한 김훈은 건국 60주년과 맞먹는 생애를 살아온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회상에 잠겼다. 지난날을 떠올리며 그간 털어놓지 않은 내밀한 이야기를 이 책에 담았다. 눈과 발로 쫓아 사실에 입각한 글쓰기의 치열함과 죽음에 대한 사유, 악과 폭력을 바탕으로 한 약육강식의 세계에 대한 날 선 시선, 힘겨웠던 유년시절 등 그간의 삶과 문학과 시대를 눈부신 미문으로 묘파해 놓았다. 한 개인으로, 아버지로, 아들로, 소설가로서 겪은 삶의 비릿한 진실을 풀어놓아 소설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김훈이 처음으로 내면의 풍경과 정신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게 맨살을 드러냈다. 대형 장편소설과 세상을 향해 쏟아낸 말과 사람살이의 풍경을 담은 에세이집을 내긴 했지만 작가 자신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이 책에는 김훈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지난날의 일화들이 삽화처럼 들어가 있다. 김훈을 말할 때 허무주의자, 탐미주의자, 마초 등의 수사들이 따라다닌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고 하지만 작품을 통해 드러난 이런 추상적, 관념적 모습이 아닌 진정성이 담긴 삶과, 시대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김훈은 이 책에 풀어놓았다.
김훈은 그 누구보다 지극히 비루한 일상을 살아가는 낙담한 인간을 눈과 발로 쫓은 디테일로 전달하는 작가다. 그가 온몸으로 써내려간 디테일이 삶의 구체성이 되어 산다는 것의 도저한 본질을 꿰뚫게 한다. 검박하고 담담한 듯 보이는 문장은 오히려 더 절절하게, 치열하게, 웅숭깊게 읽는 이의 마음을 뒤흔든다. 극도로 감정을 절제한 문장은 오히려 심장을 터뜨릴 정도로 강렬함을 남긴다. 선과 악이 혼돈되고 전도되는 시대와 부딪히며 살아온 김훈이 그간의 내면 풍경과 삶, 시대, 가족 이야기를 소설이 아닌 에세이로 펼친 이 책에 더욱 눈길이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훈의 신작 에세이 『바다의 기별』은 읽는 이로 하여금 김훈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힘과 동시에 우리 자신의 기갈난 삶에 깊은 위안과 힘찬 용기를 주는 글들이 담겨 있다.
경제난으로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는 우리들. 각자의 삶에 주름살이 늘어가는 요즘, 영화나 소설이 현실보다 더 심오하고 극적일 수 있을까. 하루하루 견디며 살아가는, 먹고살기 위해 치욕을 견뎌야 하는 나날이 늘어가는 이때 삶을 치열하게 견뎌낸 김훈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 반갑다. 영화나 문학작품과 같은 서사예술의 감동이 극중 인물들의 행위와 감상자 개인의 주관적 체험과 기억이 교차될 때 발생하는 화학작용이라 한다면 ...이 책은 온전히 공감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바다의 기별』에서 김훈은 사적인 차원의 구체적 회억을 처음으로 진술한다. 그가 들려주는, 빈한했던 유년시절과 시대와 불화했던 아버지, 그리고 헌신적이던 어머니의 이야기는 신파적이지 않으면서도 읽는 이로 하여금 애틋함을 자아낸다. 그는 비루한 것을, 그 어떤 감상도 보태지 않고 다만 비루하다고 말하면서 그 비루함이 유도할지도 모르는 동정과 연민을 차단한다. 동정과 연민을 원천봉쇄하는 그의 강직과 직설이 오히려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이것은 김훈의 허무주의의 요체를 이룬다. 참담하고 참혹하지만 마주볼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김훈의 간명한 세계관과 수미의 쌍을 이룬다. ‘꾸역꾸역 이어지는 삶의 일상성’이야말로 경건하고 진지한 것이며, 삶은 단단하고 무참한 생계의 연쇄라는 일관된 생각을 송곳처럼 명료하게 보여준다.
“아버지를 묻던 겨울은 몹시 추웠다. 맞바람이 치던 야산 언덕이었다. 아버지는 오래 병석에 누워 계셨고, 가난은 가히 설화적이었다. 병장 계급장을 달고 외출 나와서 가끔씩 아래를 살펴드렸다. 죽음은 거역할 수 없는 확실성으로 그 언저리에 와 있었다. 아래를 살필 때, 아버지도 울었고 나도 울었다.” -「광야를 달리는 말」중에서
"어머니는 거칠고 사납고 과장된 말을 무척 싫어하셨다. 몇 살 때였던가. 제헌절 날 어머니는 새 옷을 주셨다. 어머니가 주신 새 옷은 새로 산 게 아니라 입던 옷을 빨고 깁고 다려서 주신 옷이었다. "법을 만든 날이다. 새 옷을 입어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신 것으로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어머니에게 헌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눈물겹다." -「고향과 타향」중에서
딸아이가 공부를 마치고 취직해서 첫 월급을 받았다. 딸아이는 나에게 휴대폰을 사 주었고 용돈이라며 15만 원을 주었다. 그 아이는 아마 월급쟁이로서 평생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성 속에 자지러지는 행복이나 기쁨이 없다 하더라도, 이 거듭되는 순환과 반복은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 나는 이 무사한 하루하루의 순환이 죽는 날까지 계속되기를 바랐고, 그것을 내 모든 행복으로 삼기로 했다. - 「무사한 나날들」중에서
3부에 들어간 최근에 행한 강연원고에서 김훈은 최초로 자신의 문학적 자의식과 문학론, 그리고 작가로서의 세계관을 매우 명료하면서도 단호하게 드러내고 있다. 2001년 『칼의 노래』를 상재하면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가로 우뚝 선 김훈은 일급의 좋은 작가임에 분명하지만, 대개의 좋은 작가들이 그런 것처럼 천의무봉의 재능에 기대는 작가의 자리를 스스로 거역한다. 그는 치열한 자기부정의 방식으로 자기합리를 꾀하는 아찔하고 절대적인 모순성으로 가까스로 작가의 길에 서 있을 뿐이다. 그는 그 모순으로 삶이 매순간 만들어내는 애매한 국면의 진상을 꿰뚫는다. 인문성에 매몰된 정신주의자이기보다는 순결한 감각주의자이기를 자처하는 김훈은 다만 자신의 몸이 반응하고 지각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절대적 숙명을 긍정할 뿐이다. 거기에서 독특한 김훈만의 스타일이 만들어진다.
“쓴다는 것은 불완전한 언어로 불완전한 세계에서 사는 불완전한 인간에 대해서 쓴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익히 알려진 것처럼 그의 허무주의는 해명되지 않는 삶의 기저를 투시한다. 그래서 그의 말이 빚어내는 풍경은 참혹하고 쓸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악과 폭력이 이 세상의 근본 바탕이며 그것을 지배하는 형식이 바로 약육강식이라고 말한다. 그가 그렇게 말할 때, 그의 심연에서 지각변동과 삼투압을 일으키는 분노와 사랑은 수사의 문법을 뛰어넘어 그것 자체가 곧 명백한 수사가 된다. 다시 말해, 김훈의 문법은 곧 분노와 사랑인 것이다.
이 에세이집은 13편의 에세이와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동안 김훈이 펴낸 저작물들의 서문을 모두 모아 부록으로 실었다. 특별히 부록을 실은 데는 이유가 있다. 그가 쓴 서문은 당대의 지식인으로, 문장가로, 작가로서 그가 살아낸 시대와 치열한 소통을 보여주는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는 명백한 증물이다. 서문들을 읽다보면 시대와 늘 서늘하게 불화했던 김훈의 복잡하고 아름다운 내면 풍경이 어느덧 질서의 구조를 가지면서 오롯하게 드러난다. 서문 모음과 함께 김훈이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행한 수상소감들도 모았다. 한자리에 모아놓고 읽으면 개별적으로 읽을 때와 달리 김훈의 삼엄한 문학정신, 그 진정성을 더욱 깊이 음미할 수 있게 된다. 서문과 수상소감은 김훈이 쓴 본문의 이야기를 보완하는 2차 텍스트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읽으면 보여지는 김훈과 보여지지 않는 김훈 사이에서 여러 겹을 이루고 있는 미세하고 구체적인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을 생각을 하면 아직은 두렵다. 죽으면 우리들의 사랑이나 열정도 모두 소멸하는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삶은 살아있는 동안 만의 삶일 뿐이다. 죽어서 소멸하는 사랑과 열정이 어째서 살아 있는 동안의 삶을 들볶아 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사랑과 열정으로 더불어 하루가 무사할 수 있다는 것은 복 받은 일이다."
'자전거 레이서'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소설가 김훈이 올해 예순이란다. <칼의 노래>, <남한산성>을 통해 그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의 책을 읽었든, 읽지 않았든, 그가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면서 가슴 속에만 묶어뒀던 내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5년 만에 내는 에세이란다. 김훈은 힘겨웠던 유년시절, 역사를 기록하는 기자로서의 치열했던 삶, 딸 아이의 성장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작은 행복, 자신의 언어관 등을 고요히, 그러나 분명히 말한다. <바다의 기별>은 1948년 건국 60년의 대한민국을 관통해 온 한 남자의 고백이자 아버지로 아들로 그리고 소설가로 살아온 그간의 삶이, 녹아있다. 그는 명석성의 세계, 실물의 구체성과 사실성, 언어의 과학성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정서의 언어가 아니라 과학의 언어, 신념의 언어보다 더 소중한 것은 세계를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태도라고 그는 말한다. 살아보지도 않고 초월하지 말라는 것이리라.
"소설을 쓴다는 것은 불완전한 언어로 불완전한 세계에서 사는 불완전한 인간에 대해서 쓴다는 것입니다. 저의 소설은 대부분 불완전 인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내 소설에는 종교나 내세나 구원이나 피안이나 이런 것들이 나오지 않고, 오직 해탈하지 못한 중셍들만 나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득도하지 못한 중생만 저의 관심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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