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밥 한 그릇의 始原…최수연 글·사진 | 마고북스
'무논, 보리논, 다랑논, 구들장논, 고래논, 두렛논, 샘논, 세골논, 사래논, 고지논, 천둥지기, 텃논, 갯논, 물잡이논, 뙈기논, 묵논.'
'장구배미, 다락배미, 반달배미, 자라배미, 우묵배미, 아랫배미, 진배미, 외배미, 구석배미, 나팔배미, 수렁배미, 소시랑배미, 물배미, 굿배미, 둥그렁배미, 넓적배미, 두멍배미, 마당배미, 큰배미, 벼락배미, 항아리배미, 버선배미.'
열거한 단어의 뜻을 하나라도 제대로 맞출 수 있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어지간해선 알기 힘들다. 논의 종류가 이리 많은지, 논의 생김새를 이르는 말이 이리 다양할 줄은….
사람들에겐 '쌀밥을 배불리 먹는 것'이 소원이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30년도 안된 일이다. 그러나 시절이 좋아져 쌀이 남아돌면서 사람들은 점차 한 그릇의 밥에, 그 근원이 되는 땅에 무심해졌다.
저자 역시 다르지 않았다. 어느날 모 한 춤을 쥔 채 굽은 허리를 펴던 농부의 모습이 뇌리에 박히면서 논과 더불어 그곳을 생명의 터전이자 평생의 일터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생명의 근원에 대한 고민을 사진으로 풀어내는 일을 자신의 주 관심사로 삼아온 그가 오래 묵힌 사진과 글을 책으로 엮었다.
책은 논의 역사에서부터 시작해 한 해 동안 논에서 벌어지는 농사일 풍경을 한 자락씩 늘어놓는 등 문화사적인 고찰을 담은 보고서이면서 한 편의 담박한 에세이이다. 한반도에서 벼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4000여년 전. 그러나 논의 역사는 벼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삼국사기' 중 '백제 본기'에 "다루왕 6년(AD 33년) 2월, 나라의 남쪽에 주군(州君)에 벼농사를 위한 논을 만들게 하였다"는 기사가 논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습한 곳을 좋아하는 벼를 재배하기 위해 선조들은 땅을 평평하게 고르고 가장자리에 흙을 둘러 논두렁을 만들고 물을 채웠다.
그런 논에는 벼만 자라는 것이 아니다. 한 치의 땅이 아까워 농부들은 논두렁에는 콩을 심고, 추수를 하고 나면 논에서 물을 빼 보리나 밀, 호밀, 마늘, 자운영 등을 심는다. 또한 물을 채우면 미나리와 연근을 키울 수 있다.
논은 가장 자연에 가까운 공간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생존력과 적응력이 탄생시킨 인공적인 공간이다. 그러나 산업화, 개발정책에 떼밀려 논이 사라지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서울면적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논이 사라졌고 지금의 속도라면 앞으로 150년 후에는 우리나라에서 논이 완전히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논이 없어지면 지구온난화는 더욱 가중되고 무엇보다 식량수급이 가장 큰 문제로 남는다.
글과 더불어 담백하고 진솔한 사진은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사실 논이란 공간은 그다지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피사체는 아니다. 전봇대며 요란한 색색의 개량지붕을 얹은 시골집 등 인공의 흔적들을 피해보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프레임 안에 들어오고야 마는 것이 요즘 농촌의 풍경이다. 그런데도 저자는 용케 소가 쟁기질 하는 모습이며 자줏빛 꽃이 활짝 핀 자운영을 갈아엎은 초봄의 논 풍경 등 바지런하게 몸을 놀려 찍은 사진들을 담았다. '농사짓는 소설가' 최용탁씨가 붙인 짧은 사진설명글이 사진과 어우러져서 우리의 몸 안에 얼마간 남아있는 농부유전자를 톡 건드린다.
<윤민용기자 vista@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