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논, 밥 한 그릇의 시원

나뭇잎숨결 2008. 10. 11. 07:37

 

 

 

 

 


논은 밥 한 그릇이 비롯되는 곳이며, 밥 한 그릇은 우리의 일상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이 책은 우리의 삶이 비롯되는, 그러나 이미 우리 삶에서 실물감이 엷어진 논을 아름다운 사진과 정감 어린 글로 되살려낸 책이다. 또한 몇몇 어린이책을 제외하면 논을 서정적이며 문화적인 눈으로 풀어낸 첫 번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수천 년 동안 논농사를 중심으로 엮인 농경문화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논두렁을 태우고 쥐불을 놓고 망월을 돌리던 추억, 타작마당에 귀청 터지게 울리던 꽹과리 소리, 날라리 소리는 아주 먼 기억의 끄트머리에나 존재할 뿐이다.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우리의 유전자 속에 각인되었을 논의 문화가 이제 10~20년이면 노인들의 기억과 함께 스러져버릴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 마지막이 오기 전에 우리 삶의 시원인 논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사라져가는 것을 기록하고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기
이 책에는 푸르른 벼가 자라는 괴산 어느 산골의 삿갓배미가 매우 인상적인 모습으로 잡혀 있다. 한 배미씩 늘어나는 논이 기꺼워 논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마다 논배미의 숫자를 세어보는 게 낙이었던 농부가 어느 날 한 배미가 모자라는 논을 세다 세다 지쳐 그만 돌아가려고 삿갓을 집어들었더니 간 곳 없던 한 배미가 들어 있었다던 그 삿갓배미.
돌밭 천지인 섬에서 방에 구들을 놓듯 바닥에 구들을 놓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든 청산도의 구들장논. 그 논에서 '겁나게 농사를 많이 지어' 육지로 쌀을 실어 보냈던 섬사람들의 억척이 쓸쓸한 묵논으로 무화(無化)된 현장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이대로 몇 년이 더 흘러가면 그곳이 논이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혀지고 말 현장.
남해안의 산비탈을 타고 내린 논이 바닷가에 이르면 논두렁에 앉아 낚시를 할 수 있다는 100층 계단논도 머지않아 책 속의 풍경으로나 남을 우리 논의 모습이다.
나아가, 봄 농사가 시작될 무렵 쟁기질로 뒤집혀진 흙덩이 위에 어여쁘게 피어난 자운영 꽃밭, 써레질로 노골노골하게 삶아진 무논이 달빛을 받아 호수처럼 빛나는 풍경, 자연과 인간의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이어붙인 다랑논의 행렬이 빚어내는 절묘한 균형미.... 논과 논농사에 대한 지은이의 깊숙한 애정은 단지 사라져가는 풍경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무심하게 지나쳤던 논의 아름다움에도 진득한 눈길을 주고 있다.

우리는 논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논은 쌀을 얻기 위한 오랜 노력, 차라리 위대한 전쟁이라고 불러 마땅할 오랜 역사에서 얻은 소중한 전리품이다. 그 논이 밥 한 그릇의 시원(始原)임을 풀어서 보여주는 이 책은 먼저 무딤이 너른 들과 산비탈 다랑논이 공존하는 평사리의 사계에서 출발한다.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였다는 점에서 평사리는 논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맞춤한 장소일 터, 그러나 너른 무딤이들판은 제자리를 지켜도 만석꾼의 꿈을 꾸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는 조금 쓸쓸한 이야기를 통해 논이 처한 현실을 드러낸다(부의 척도가 땅이 되었을지언정 볏섬이 아닌 지는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장에서는 자연을 본뜬 인공습지인 논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지 역사적 과정을 훑고 '맡은 일이 막중해서 종류도 많았던' 논의 정감 가득한 이름과 특징을 소개한다.
무논, 보리논, 구들장논.... 장구배미, 우묵배미, 외배미.... 그 논들에서는 무슨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세 번째 장 '논의 한 살이'는 논두렁 태우기부터 가래질, 보리 밟기, 보리 베기, 쟁기질, 소 길들이기, 써레질, 모내기를 거쳐 가을걷이까지 논농사의 과정을 세심하게 그리고 있다. 농가에서 자라지 않은 사람들에게 특히 공부가 될 디테일이 가득하다.
그런데 논에서는 벼만 자랄까? 학창 시절 "남부 지방은 보리와 이모작을 하고 운운" 정도를 배운 게 전부인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봄 들녘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자운영 이야기도 새로울 것이다. 벼, 보리, 밀, 자운영, 미나리, 콩이 네 번째 장 '논에서 자라는 작물들'로 소개된다.
마지막 장에서는 이 논들이 농촌마을, 그리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농민들과 어떻게 맺어져 있는지 세 마을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준다. '논, 마을 그리고 땅의 사람들'은 쟁기질하던 소가 깜빡 졸면 바다로 떨어진다는 남해 가천마을, 가을단풍보다 아름다운 황금빛 계단을 가진 구례 중대마을, 구들장논으로 섬의 팍팍한 숙명을 헤쳐나간 완도군 청산도의 이야기다.

외로운 다랑논처럼 묵묵히 밀고 온 작업의 결과물
마치 그 자신이 말없고 외로운 다랑논인 양, 오랫동안 그 쓸쓸함을 사진과 글로 여투어낸 최수연은 농민신문사에서 내는 월간지 <전원생활>의 사진기자로 일하면서 틈틈이 논 사진을 찍고 자료를 모아왔다. 그런 지은이의 오랜 공력으로도 미처 못다 표현한 논 이야기는 농사짓는 소설가 최용탁이 머리글과 사진설명으로 풍성하게 풀어놓아 이 책에 깊이와 아름다움을 더했다.
논에 삶의 바탕을 두고 수천 년을 살아왔으면서도 일반 독자에게 논 이야기를 전달할 제대로 된 책 한 권 없는 현실에서 이 책이 그 문을 여는 구실을 다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사람이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이루어낸 수많은 것들 중에서 논보다 위대한 창조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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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밥 한 그릇의 始原…최수연 글·사진 | 마고북스

'무논, 보리논, 다랑논, 구들장논, 고래논, 두렛논, 샘논, 세골논, 사래논, 고지논, 천둥지기, 텃논, 갯논, 물잡이논, 뙈기논, 묵논.'

'장구배미, 다락배미, 반달배미, 자라배미, 우묵배미, 아랫배미, 진배미, 외배미, 구석배미, 나팔배미, 수렁배미, 소시랑배미, 물배미, 굿배미, 둥그렁배미, 넓적배미, 두멍배미, 마당배미, 큰배미, 벼락배미, 항아리배미, 버선배미.'

열거한 단어의 뜻을 하나라도 제대로 맞출 수 있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어지간해선 알기 힘들다. 논의 종류가 이리 많은지, 논의 생김새를 이르는 말이 이리 다양할 줄은….

사람들에겐 '쌀밥을 배불리 먹는 것'이 소원이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30년도 안된 일이다. 그러나 시절이 좋아져 쌀이 남아돌면서 사람들은 점차 한 그릇의 밥에, 그 근원이 되는 땅에 무심해졌다.

저자 역시 다르지 않았다. 어느날 모 한 춤을 쥔 채 굽은 허리를 펴던 농부의 모습이 뇌리에 박히면서 논과 더불어 그곳을 생명의 터전이자 평생의 일터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생명의 근원에 대한 고민을 사진으로 풀어내는 일을 자신의 주 관심사로 삼아온 그가 오래 묵힌 사진과 글을 책으로 엮었다.

책은 논의 역사에서부터 시작해 한 해 동안 논에서 벌어지는 농사일 풍경을 한 자락씩 늘어놓는 등 문화사적인 고찰을 담은 보고서이면서 한 편의 담박한 에세이이다. 한반도에서 벼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4000여년 전. 그러나 논의 역사는 벼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삼국사기' 중 '백제 본기'에 "다루왕 6년(AD 33년) 2월, 나라의 남쪽에 주군(州君)에 벼농사를 위한 논을 만들게 하였다"는 기사가 논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습한 곳을 좋아하는 벼를 재배하기 위해 선조들은 땅을 평평하게 고르고 가장자리에 흙을 둘러 논두렁을 만들고 물을 채웠다.

그런 논에는 벼만 자라는 것이 아니다. 한 치의 땅이 아까워 농부들은 논두렁에는 콩을 심고, 추수를 하고 나면 논에서 물을 빼 보리나 밀, 호밀, 마늘, 자운영 등을 심는다. 또한 물을 채우면 미나리와 연근을 키울 수 있다.

논은 가장 자연에 가까운 공간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생존력과 적응력이 탄생시킨 인공적인 공간이다. 그러나 산업화, 개발정책에 떼밀려 논이 사라지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서울면적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논이 사라졌고 지금의 속도라면 앞으로 150년 후에는 우리나라에서 논이 완전히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논이 없어지면 지구온난화는 더욱 가중되고 무엇보다 식량수급이 가장 큰 문제로 남는다.

글과 더불어 담백하고 진솔한 사진은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사실 논이란 공간은 그다지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피사체는 아니다. 전봇대며 요란한 색색의 개량지붕을 얹은 시골집 등 인공의 흔적들을 피해보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프레임 안에 들어오고야 마는 것이 요즘 농촌의 풍경이다. 그런데도 저자는 용케 소가 쟁기질 하는 모습이며 자줏빛 꽃이 활짝 핀 자운영을 갈아엎은 초봄의 논 풍경 등 바지런하게 몸을 놀려 찍은 사진들을 담았다. '농사짓는 소설가' 최용탁씨가 붙인 짧은 사진설명글이 사진과 어우러져서 우리의 몸 안에 얼마간 남아있는 농부유전자를 톡 건드린다.

 

<윤민용기자 vista@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