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학원] 2008 가을 주제학교, 루쉰의 검. 루쉰의 미소 /고미숙
요즘 연암을 넘어 동의보감과 루쉰이라는 쌍칼로 종횡무진 하고 계신 고미숙 선생님이 이번 주제학교 테마를 <루쉰의 검, 루쉰의 미소>로 잡으셨다. 고전평론가 고선생님의 눈을 통해 어떤 루쉰의 새로운 면들이 나타나게 될지 자못 궁금해진다. 이번 주제학교를 통해 우리들은 어떤 새로운 검법을 배우게 될지, 그 검법에서 어떤 루쉰의 미소를 보게 될 것인지. 고미숙 선생님으로부터 이번 강학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Q. 먼저, 선생님과 루쉰과의 만남은 어떤 인연이신지요?
A. “뭐랄까. 아주 우연적이면서도 필연적이었어. 열하일기 때문에 중국으로 여행을 가게 됐는데, 그때 마지막으로 간게 루쉰박물관이었지. 루쉰박물관 간 것도 그때 사스 때문에 모든 박물관이 닫아서 갈 데가 없어서 간거였거든. 그런데 보니까 루쉰의 글쓰기 궤적이 연암하고 닮아있는거야. 촌철살인의 글도 그렇고, 소설에서 시작해서 잡문으로 간것도 그렇고. 더더욱 사유자체가 어떤 것에도 포획되지 않는다고나 할까. 난 그런게 삶의 표현이라고 생각해. 개념을 구지 만들어 낸다기보다 자기가 자기 생활안에서 절실하게 고민하는 것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족한거지. 연암도 그런 글을 썼던거고. 박물관에서 그런 연암의 모습을 루쉰에게서 봤던거야.
그러고 나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조금 우회적이긴한데, 동의보감을 공부하면서 뭔가 잉여나 간극이 있으면 안된다는, 몸과 생활, 글과 생활에 간극이 없는게 동양에서 가장 큰 공부라는 것을 알게 된거지. 즉, 가장 건강하다는 것은 신체가 표준적이거나, 흔히 말하는 통속적인 웰빙적인 삶을 사는게 아니라 뭐랄까 ‘완전연소'라 할 수 있는 그런 경지를 일컫는거라는 걸 알게 된거야. 즉, 자기가 갖고 있는 몸의 기운을 불완전함 없이 고스란히 드러낼수 있는 것을 동양적 공부에서 가장 높은 경지라 보았던 거야. 동의보감에서 이야기하는 잘산다는 것 역시 그런 의미인거고. 그러니까 중국여행하면서 봤던게 글이라던가 지식이라는 속에서 연암과 루쉰의 일치였다면, 몇 년 지나고 몸의 문제로 생각이 옮겨가면서 루쉰을 읽으니까 루쉰이 갖고 있는 그동안 해석도 안되고 감도 전혀 오지 않던게 강렬하게 다가왔던거야. 브라보! 이 사람은 시간의 순간순간을 정말 빈틈이 없게 하는구나. 그거는 혁명적인 글을 쓴다, 좋은 글을 쓴다와는 다른 문제인거야. 자기 존재와 간극이 없는 글을 쓴다는거. 그걸 루쉰을 통해서 알게 됐다고나 할까. 비유해서 말하자면, 검(劍)속에도 도(道)가 있구나 이런거를 느껴서 다시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볼려고 강학원을 열게 된거야. 루쉰의 칼날같은 날카로운 글에도 구도적인 측면이 있다는 걸 알게 돼서..”
Q. 요즘 의역학이랄까, 명리학에 빠져 계신걸로 아는데, 루쉰과 동의보감, 그리고 연암이 연결되는 지점이 거기인거군요. 루쉰과 동양학의 만남이랄까요? 그렇다면, 이런 관점에서 루쉰을 공부하는 것이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요?
A. “나는 루쉰의 사상이, 루쉰의 글이 일상에 얼마나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가 그의 사상을 보여준다고 생각해. 루쉰의 연애 이야기, 가족과의 관계 등등 자신의 자질구레한, 속된 삶에 그의 글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 감(感)에서 나오는 글쓰기는 하나도 허황함이 없는거라고 봐. 흔히 일상이 두터우면 일상에 매몰되어 버리기 쉽거든. 하지만 오히려 반대로 일상을 넘어 이념적 투쟁에 매몰되면 자기도 책임질 수 없는 허망한 말들만 하게 되. 말이 자기를 지배해버리게 되는 경우인거지. 하지만 루쉰의 글은 삶에 매몰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이념에 휘둘리지도 않으면서 삶에 뿌리내려 온전히 자기 글로 드러나. 이것이 철학이나 어떤 주의, 장르적인 구별을 넘어서서 루쉰적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는게 아닐까 생각해. 그런 점에서 루쉰은 뭐랄까 삶이란 이런 간극 없이 살기, 글쓰기란 어떤 잉여도 없이 ‘지금, 여기' 에서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라는걸 가르쳐주고 있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
Q. 그렇다면, 루쉰의 삶이랄까, 사상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좀 해주세요.
A. “루쉰이 통과한 그 시대도 재미있지만 루쉰의 개인사도 뭐랄까 굉장히 흥미롭다고 해야하나. 평범해 보이는데 굉장히 흥미로워. 감옥에도 안갔고 암살도 당하지 않았으니까. 그 시절에 극적인 대목이 없는데 오히려 그게 역설적으로 일상이 얼마나 순간순간이 정말 흐트러짐이 없는가를 보여주는 거 같아. 명리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관성이랄까. 어떻게 보면 루쉰에게 청년의 시절이 있었던 적이 있었던가하는 생각이 들기도해. 루쉰은 쉽게 쉽게 희망을 이야기 하지 않아. 어찌보면 애늙은이 같기도 한데. 혁명도 과학도 해방도 희망일 수 없다는 것, 그렇게 선악시비가 없이 허망의 상태를 살아갈 수 밖에 없다라고 말하고 있어. 불명불암(不明不暗)의 세계랄까. 그런 점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는 분명하지만, 그것이 허망하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고 루쉰은 생각한듯해.. 루쉰의 말중에서 “절망은 허망이다. 희망이 그러함과 같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루쉰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말인듯 하고.”
Q. 마지막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텍스를 읽는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알려주세요. 강학원을 들으러 오시는 동학들께 준비해야 할 사항이라든지..
A. 일월서각에서 나온 6권짜리 루쉰 전집을 읽고, 거기에 상황에 따라서 루쉰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들을 읽어나갈거야. 루쉰의 글을 읽고 이런거는 오히려 쉬워. 백년도 안된 시기니까. 번역되서 나온 책도 많고 주변 관련 텍스트도 엄청 많이 나와있기도 하고. 하지만, 읽는거 자체는 어렵지 않은데 그걸 가지고 사유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봐. 루쉰 주제학교를 통해서 어떻게 사유를 바꾸고, 그것이 어떻게 삶을 바꿀수 있는가를 사유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누구나 자신 안에는 검(劍)이 있잖아. 명리학적으로 말하면 금(金)기운일거고. 어떻게 하면 루쉰을 통해서 자신안의 검을 벼리는가. 어떤 검이 나오는가는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그 검을 벼리는 과정이 이번 강학원의 목표랄까.
따로 준비해야 할 사항은 없고, 뭐 루쉰의 전기나 동양근대사 또는 중국근대사 책 정도는 한번 일독하고 들어오면 훨씬 따라가기가 좋겠지. 아무거나 상관없고. 루쉰의 글이 동양고전처럼 이해가 어렵다거나 그런게 아니니까 이번 강학원은 짧고 길고 간에 다양한 글을 많이 써보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어. 글쓰기 형태가 다양할 수 있는데 그래서 까다로울수도 있지. 하지만 루쉰이 던져주는 실마리는 너무너무 많으니까 루쉰을 통해서 지금 우리 시대, 우리 삶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가 돼.”
자료: 연구공간 수유+너머 웹진 지나 기자 teseus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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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 자는 예재(豫才).
루쉰의 어린시절 이름은 장서우[樟壽]였고 수런이라는 이름은 1898년 난징[南京]의 학교에 입학할 때 가지게 되었다. 광서(光緖) 11년에 동생 저우쭤런[周作人:1885~1966]이 태어났다.
루쉰은 어렸을 때 서당 선생에게서 역사서나 유교 경전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림책을 보거나 베끼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나중에 그는 중국 고대의 목판화집 〈북평전보 北平箋譜〉·〈십죽재전보 十竹齋箋譜〉를 정전둬[鄭振鐸:1897~1958]와 공동으로 다시 새겨 출판하는가 하면 독일 메에펠트의 소설 〈시멘트〉의 그림, 소련의 판화집 〈인옥집 引玉集〉, 독일 콜비츠의 판화집 등 외국의 새로운 판화를 복사하여 출판함으로써 중국에서 새로운 판화를 육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같은 그의 회화 지향은 이미 소년시대부터 싹튼 것이었다.
그가 13세 때 가정의 중심이자 경제적 지주였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체포·투옥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친지가 관리시험을 치를 때 평소 알고 지내던 시험관에게 뇌물을 건네주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현지사(縣知事)와 중앙정부 관리까지 지냈던 할아버지가 감옥에 갇히게 되자 그의 일가는 커다란 타격을 입었고 생활은 갑자기 곤궁해졌다. 그의 아버지는 본래 병약하여 당시 폐결핵으로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다. 그는 거의 매일 어머니의 장신구 등을 전당포에 맡기고 받은 돈으로 약을 사왔지만 아버지는 결국 그가 16세 때 사망했다.
그의 첫번째 소설집 〈눌함 呐喊〉의 자서(自序)에는 당시의 일이 이렇게 씌어 있다. "누구라도 평온한 가정으로부터 곤궁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세상사람들이 가진 대부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죽은 2년 후 18세가 된 그는 8원의 학비를 어머니로부터 받아 난징으로 갔다. 학교에 입학하여 새로운 학문을 닦기 위해서였다.
그는 원래 학비를 면제받는 해군학교에 입학했지만 곧 육군학교 부설 노광학당(路鑛學堂)으로 전입했다. 여기서 그는 독일어를 공부했고 물리·지질·광물·지리·역사·그림·체조 등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서양식 과목에 접하게 되었다.
1902년 22세 때 노광학당을 졸업하자 일본에 유학하여 8년에 걸쳐 도쿄[東京]와 센다이[仙台]에 체류했다. 그는 처음 2년간 중국유학생을 위하여 특별히 설치한 도쿄의 홍문학원(弘文學院)에서 일본어와 교양과정을 배웠고 24세 때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2년째 되던 해 그만두고 도쿄에 돌아와 문학활동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의학교를 그만두게 된 사정에 관해서도 〈눌함〉의 자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당시 학교에서는 세균학강의에 영화를 사용했는데 시간이 남을 때에는 풍경이나 시사에 관한 것도 보여주었다. 마침 러일전쟁 때였기 때문에 시사에 관한 것이 많았는데 때로는 그와 같은 영화 속에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동포들과 만나게 되었다. 러시아를 위해 스파이 노릇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참수당하는 동포와 그것을 에워싸고 구경하는 많은 동포들이었다. 모두 당당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덤덤한 얼굴로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대체로 무지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훌륭하고 건장해도 바보같은 구경꾼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우선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의 정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그렇게 하는 데에는 문예가 가장 적당한 수단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의학교를 그만두고 도쿄로 돌아갔다."
선통(宣統) 1년(1909) 그는 8년 간의 일본유학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항저우[杭州] 사범학교에서 화학과 생리학을 가르쳤으나 다음해에는 사오싱 중학교의 교감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다음해인 1911년 가을 후베이 성[湖北省]의 우창[武昌]에서 혁명이 일어나 곧바로 전국에 파급되어 각지의 청조(淸朝) 지배기구는 속속 무너졌다. 사오싱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도독(都督:지방군권 장악자)에 의해서 교장에 임명되었지만 그의 학생 중 하나가 도독을 비판하는 신문을 냈기 때문에 기피인물로 지목되어 이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 신문에 루쉰은 하이네의 시를 번역하여 실었다. 또 이즈음 그의 첫 소설인 문어체의 단편 〈회구 懷舊〉(1913년 3월 〈소설월보 小說月報〉에 게재)를 저술했다.
1911년 혁명으로 청조가 쓰러지고 다음해인 1912년 1월 난징에서 중화민국임시정부가 탄생했는데, 그는 고향 선배이자 새 정부의 교육부를 관장하던 차이위안페이[蔡元培:1868~1940]의 초청으로 교육부 관리로 임용되었다. 이해 5월 정부가 베이징으로 옮기면서 그도 베이징으로 이사하여 그후 15년 간 교육부관리로 사회교육국에 근무했다. 1918년부터 집필활동을 시작했지만 그때까지의 베이징 생활 역시 '적막감'의 연속이었다.
베이징 시절 초기 그는 공적으로는 교육부 일을 보면서 틈이 나면 개인적으로 오래된 탁본을 모아 그것을 베껴쓰거나 오래된 소설집을 교정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행동들이 '적막감'에 사로잡힌 영혼의 고통을 마취시키는 방법이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즉 혁명 후의 정치불안과 공포분위기를 잊기 위한 행동들이었다. 외형적으로야 어떻든 실질적으로는 중국이 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혼란과 불안만 가중된 현실이 그를 절망으로 몰아간 것이다. 혁명 후 실권자가 된 것은 청조를 배반한 위안스카이[袁世凱]였다. 그는 중화민국 대총통이 되고서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제정(帝政)을 부활시켜 자신이 황제가 되려 했고 심복을 부려 제정 부활 여론을 만들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반대자의 입을 막기 위해 암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정부 관리가 잡담중에 반대의견을 흘리기라도 하면 어느 사이엔가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될 정도였다. 그때 루쉰이 탁본을 모으고 그것을 베껴쓰면서 세월을 보낸 것은 암살을 면하기 위해서였다고 동생인 저우쭤런은 쓰고 있다. 그의 작품 속에 때때로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당시 그가 받았던 마음의 충격이 마치 후유증처럼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후로 계속된 그의 문필활동을 볼 때 그러한 사건들이 그의 인간적인 민족애를 한층 확고히 해주고 나아가 다음 단계의 싸움을 자극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자선집 自選集〉(1932)의 서문에서 "절망이 허망하기는 희망과 마찬가지이다"라는 헝가리 시인 베트피산더의 시구를 인용하고 있다.
1918년 친구 첸셴퉁[錢玄同]이 루쉰을 방문하여 잡지 〈신청년 新靑年〉에 기고할 것을 권했는데 이 잡지의 5월호에 루쉰은 단편소설 〈광인일기 狂人日記〉를 실었다. 이것이 루쉰이 작가로서 출발한 첫번째 작품이다.
또한 이같은 목표와 관련하여 중국 봉건사회를 2,000년 이상이나 윤리·사상적으로 구속해오던 '유교'의 권위는 새로운 민주 중국의 앞길을 방해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신청년〉은 국민의식 속에서 민주와 과학을 추진하기 위해 유교주의를 격렬하게 비판·공격했다. 예로부터 확고부동한 권위를 누리고 있던 문어를 부정하고 구어문학을 정통으로 하는 '문학혁명론' 역시 봉건사회에 뿌리깊이 자리잡은 기성의 권위를 부정하는 주장이었기 때문에 〈신청년〉은 후스의 구어문학 주장을 곧바로 받아들였고, 나아가 그것을 '문학혁명'이라는 한층 정치적인 표어로 바꾸어 제기한 것이었다.
는 후스와 천두슈의 구어문학이나 '문학혁명' 주장을 최초로 실천한 작품이다. 구어적 표현을 채택한 이 작품은 유교의 억압적인 도덕이 '사람이 사람을 먹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암시하고 이것을 미친 사람의 입을 통해 대담하게 말한 내용으로, 결말은 "어린이를 구하라"는 말로 맺고 있다. 중국의 장래를 위해 이제부터 새로운 사람은 유교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1926년 3월 18일 외교문제에 관해 정부에 청원하려는 학생들의 시위행진이 있었는데 호위병이 이 행렬에 발포하고 다수의 사상자를 내는 사건이 발생했다. 루쉰은 그 날을 '민국 이래의 가장 어두운 날'이라 하여 사망자에 대한 애도와 학살자에 대한 분노를 글로 표현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군벌정부는 사상탄압을 강화하고 많은 진보적 예술인을 체포하려고 했다. 루쉰은 베이징을 탈출하여 남쪽으로 피신하여 샤먼대학[廈門大學]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그곳에 4개월 간 머물다가 다음해 1월에는 광저우[廣州]의 중산[中山]대학으로 옮겼다. 중산대학에 부임하여 얼마 되지 않아 국민당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국민당과 합작하고 있던 공산당원을 체포하고 그 동조자에 탄압을 가했는데 그가 가르치던 학생도 다수 체포되었을 뿐 아니라 진보파라고 간주되던 그 자신도 감시를 받아 연금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그해 10월 비밀리에 상하이로 탈출하여 그곳에 죽 머물면서 신문과 잡지 등에 발표했던 자신의 수필집을 교정·편집하기도 하고 신문과 잡지에 익명으로 반정부적인 단평(短評)을 써나갔다.
루쉰은 본래 단편작가로서 그의 단편은 제1소설집 〈눌함〉(15편, 1923 초판)과 제2소설집 〈방황 彷徨〉(11편, 1926)에 담겨 있다. 그러나 그는 소설활동을 개시함과 동시에 평론적인 수필을 썼으며 소설활동을 그만둔 뒤에도 죽기 직전까지 단평·수필을 계속 집필했다. 그러므로 양적으로는 소설보다 수필이 훨씬 많다. 수필집으로는 〈열풍 熱風〉(1925)·〈화개집 華蓋集〉(1926)·〈화개집 속편〉(1927)·〈이이집 而已集〉(1928)·〈삼한집 三閒集〉(1932)·〈이심집 二心集〉(1932)·〈남강북조집 南腔北調集〉(1934)·〈위자유서 僞自由書〉(일명 〈불삼불사집 不三不四集〉, 1933)·〈준풍월담 准風月談〉(1934)·〈화변문학 花邊文學〉(1936)·〈차개정잡문 且介停雜文〉(1937)·〈차개정잡문 2집〉(1937)·〈차개정잡문말편(末編)〉(1937) 등이 있다. 뒤에 열거된 3권은 사후에 출판된 것으로 부인 쉬광핑[許廣平]이 편집한 것이다.
이외에 초기 일본 유학중에 쓴 것을 포함하면 논문집 〈분 憤〉(1927), 산문시집 〈야초 野草〉(1927), 회고문집 〈조화석습 朝花夕拾〉(1928), 역사소설집 〈고사신편 故事新編〉(1936)이 있고 베이징대학에서의 강의를 정리한 〈중국소설사략 中國小說史略〉(처음에는 상·하권으로 나누어 출판되었음. 1925 합정조판, 1930 개정판)과 소설사 관계자료집 〈소설구문초 小說舊聞鈔〉(192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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