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해바라기는 해를 잊거나 잃지 않는다.

나뭇잎숨결 2008. 10. 5. 07:38

 

 

 

 

잃어버린 것들 / 김혜순



연두빛 지갑
검은 가죽 장갑
다음,손에 걸고 다니게 끈이 달린 은빛 지갑
지갑과 함께 돈,만년필,주민등록증
(꿈속에서 죽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두어 가지씩)
대학 3학년 1학기 등록금
진홍빛 머플러
결혼시계
그 다음 금도금 오리엔트 아날로그
(평균 1년에 한 개쯤)
그의 이름이 새겨진 약속의 반지
그리고 처녀
반지와 함께 그의 가슴에 새겼던 내 이름
희망 속의 희망
삶 속의 삶
그리고 내 아이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이 내 아이로 보여 서울 거리를
헤메며 수많은 남의 아이를 껴안고 나서야 비로소 찾음)
내가 보낸 간절한 사연들과 숨죽인 눈물
하얀 털장갑
밥그릇 속에 흘렀다가
무심코 설거지 해버린 내 영혼
잘라버린 머리칼과
내가 감고 태어났던 붉은 탯줄
모두들 어디로 갔을까?

아마
죽어서도
죽음을 잃어버려
구천을 헤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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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다, 잊지 않다와, 잃다 잃지 않다 사이에서 해바라기를 보았다.

어떤 해바라기도 해를 잃거나 잊지 않는다.

해바라기의 중심엔 해바라기가 아니라 해가 있기 때문이다.

내 중심엔 언제나 내가 너무 커 당신을 잃거나 잊는다. 당신은 나에게 자주 주변인이다.

아니, 절대로 잊지 못하거나(섭섭한 일) 잃은 것에 연연해 한다.

잊어주어야 할 것을 잊어 주는 것은 배려이다. 이미, 잃은 것은 뒤돌아 보지 않는 것은 사랑이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을 꼭 기억해 주는 것은 배려이고,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을 소중히 간직하는 것은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