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너무 붉은 사랑은 가던 길을 멈추게 한다.

나뭇잎숨결 2008. 10. 6. 22:06

 

한 잔의 붉은 거울 / 김혜순



네 꿈을 꾸고 나면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창들은 불을 다 끄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밤거리 간판들만 불 켠 글씨들 반짝이지만 네 안엔 나 깃들일 곳 어디에도 없구나


아직도 여기는 너라는 이름의 거울 속인가 보다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고독이란 것이 알고 보니 거울이구나 비추다가 내쫓는 붉은 것이로구나 포도주로구나


몸 밖 멀리서 두통이 두근거리며 오고 여름밤에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이 길에선 따듯한 내면의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 이 거울 속 추위를 다 견디려면 나 얼마나 더 뜨거워져야 할까


저기 저 비명의 끝에 매달린 번개 저 번개는 네 머릿속에 있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네 속에는 너 밖에 없구나 아무도 없구나 늘 그랬듯이 너는 그렇게도 많은 나를 다 뱉어내었구나


그러나 나는 네 속에서만 나를 본다 온몸을 떠는 나를 본다 어디선가 관자놀이를 치는 망치소리 밤거리를 쩌렁쩌렁 울리는 고독의 총소리 이제 나는 더 이상 숨 쉴 곳조차 없구나


나는 붉은 잔을 응시한다 고요한 표면 나는 그 붉은 거울을 들어 마신다 몸 속에서 붉게 흐르는 거울들이 소리친다 너는 주점을 나와 비틀비틀 저 멀리로 사라지지만 그 먼 곳이 내게는 가장 가까운 곳 내 안에는 너로부터 도망갈 곳이 한 곳도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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