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데카르트의 자아관Descartes's Theory of The Self

나뭇잎숨결 2023. 8. 26. 08:48

데카르트의 자아관 Descartes's Theory of The Self

한자경
(HAN, Ja-Kyoung)
계명대학교 철학과





I. 들어가는 말
이데아계라든가 신이라든가 또는 세계라든가 그런 아직 근거지워지지 않은 것을 가정하거나 전제함이 없이 철학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철학적 사유는 어디 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하는가? 확실한 것으로서 증명되지 않은 어떠한 것도 선행 적으로 전제하지 않는 무전제의 철학을 행하고자 한다면, 그러면서도 철학이 수 학과 달리 일정한 공리와 정의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해내는 개념의 엮음이 아 닌 철학적 사태의 직관이어야 한다면, 그러한 철학적 사태는 어디에서 찾아져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당시까지 지배적이던 일정한 신학적 전제들로부터 벗어나 인간 이성에 근거하여 사유하고자 했던 근세 철학자들이 해결해야 했던 제 1의 과제이었다.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을 이루는 최초의 철학적 사태란 과연 무엇인 가? 우리가 참이라고 알고 있는 많은 앎들을 서로 연관되는 하나의 체계로 완성 하는 체계의 출발점 내지 토대는 어떤 앎이어야 하는가? 이와 같은 문제제기 자 체가 곧 근세철학의 "토대주의" 내지 "체계주의"적 특징을 보여준다. 근세철학 자들은 한결같이 다 이와 같이 인식체계를 밑받침할 수 있는 확실한 토대를 추 구하였으며, 그것을 철학의 제1과제로 삼았다. 다른 가정에 근거하지 않고 그 자 체로 가장 확실한 앎, 그리하여 다른 앎들이 그 위에 기초하는 토대가 될 수 있 는 그런 확실한 앎은 어떤 앎인가?

데카르트가 발견한 그 자체 확실한 인식의 토대는 바로 그런 토대를 찾아 의 심하고 부정하고 판단하는 사유주체 자체이다. 경험적 인식이든 관념적 인식이 든 모든 인식내용들의 확실성의 근저에는 그런 인식을 수행하는 사유주체인 자 아 자체가 가장 확실한 것으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근세철학의 문을 연 데 카르트의 통찰이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그 사유주체를 시공간적으로 제한된 나의 신체 속의 어떤 것으로서 실체화하였기에 그에 있어 자아는 외적 사물세계 나 다른 인간의 사유주체와 철저하게 분리된 유아론적 자아로 머무를 뿐이다. 데카르트 자신은 이러한 이원론과 유아론을 극복하는 길로서 중세적 완전자로서 의 신을 제시한다. 이 신의 존재와 성실함의 본질을 통해 사유와 연장을 통합함 으로써, 의식 주체 외부의 사물세계와 타 의식 존재를 증명하게 된 것이다. 본고 에서는 그의 주저 『성찰』을 바탕으로하여 그의 자아와 신 그리고 세계의 이해를 해명해보기로 하며, 끝으로 그의 철학이 지닌 문제점들을 제시하며 글을 맺기로 한다.

II. 의식활동성으로서의 자아의 발견
1. 방법론적 의심의 전개과정
데카르트의 의심은 바로 이런 확실한 앎을 찾아내기 위해 고안된 방법론적 의심이다, 그는 한 때 참이라고 생각한 많은 인식들이 후에 거짓으로 드러난 경 우가 있음을 경험하고는 그처럼 거짓일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배제된 앎만을 확 실한 앎으로서 인정하기로 마음먹는다.1)어떤 인식이든 그것이 거짓일 수 있는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포함하고 있다면 설사 그것이 아직은 거짓이라고 증명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언젠가 거짓으로 밝혀질 수도 있기에 그것은 절대적으로 확 실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체 인식의 토대로서 기능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앎은 그 자체 내에 거짓일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그런 앎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앎이 거짓일 수 없는 그런 확실한 앎 인가?

우리의 앎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험적 인식, 즉 눈이나 코 등 우리의 오판 을 통해서 얻어낸 인식이 우리의 전체 인식의 토대가 될 수 있을만한 그런 확식 한 앎인가? 다시 말해 경험적 인식은 그 자체 거짓일 수 있는 가능성이 배제한 앎인가? 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참이라고 생각한 경험적 인식이 후에 거짓이라고 밝혀진 경우가 단 한 번이라도 존재한다면 일체의 경험적 인식은 그것 역시 그 런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리 고 우리는 실제로 오관을 통해 얻은 인식이 거짓으로 밝혀지는 경험, 즉 "착각" 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2) 멀리 있는 형체를 보고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다가가 보니 마네킹이었다거나, 비소리를 들은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차소리였다거나, 그런 감각 상의 착각을 경험한 적이 있다. 우리의 경험적 인식은 그것이 착각일 수도 있기 때문에, 즉 착각이라는 의심가능근거를 배제하지 못하기때문에 절대적으로 확실한 인식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데카르트는 다시 반문한다. 감각 상의 착각은 멀리 있는 아주 작은 것에 대해서나 발생하지, 감각하는 자 바로 가까이에 있는 것에 대해 서는 착각이 일어날 수 없다. 바로 눈 앞에 있는 것이 책이라든가 내 손에 연필 을 쥐고 있다든가 이런 것에 대해서까지 착각한다면, 이는 미친사람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가까이 있는 사물의 감각적 앎에 대해 거짓일 수 있는 가 능근거로서 착각을 제시하는 것은 정상인과 미친사람의 구분을 무시하는 것이am 로 옳지 못하다.3) 그렇다면 가까운 것에 대한 감각경험적 앎은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것인가?

이에 대해 데카르트는 다시 제 2의 의심가능근거를 제시한다. 내가 지금 손 에 연필을 들고 눈 앞에 책을 보고 있다고 확신한다고 할지라도, 그 확신이 거 짓이라고 밝혀지는 그런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꿈"의 경우이다. 4) 꿈에서나는 연필을 들고 책을 읽고 있다고 경험하지만 실제로 나는 침대 위에 누워서 눈감고 자고 있을 뿐이다. 내가 착각일리 없다고 생각하는 이 모든 내 주위의 것에 대한 감각경험은 꿈일 수도 있다. 즉 실제와는 다른 앎, 거짓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분명 꿈이 아니고 각성상태라는 자각이 꿈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는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꿈 속에서도 그것이 깨어 있는 현실이라고 경험하 기 때문이다. 결국 감각경험적 앎은 그것이 착각 내지 꿈일 수도 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확실한 앎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감각경험적 앎이 아닌 수학적인 관념적 앎은 어떤가? 2+3=5라는 것은 감각을 통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통해 아는 것이므로, 꿈 속에서도 이성이 바로 작동하는 한 그것은 참이라고 간주될 것이므로 이에 대해 꿈이 의 심가능근거로 제시될 수는 없다.5) 그렇다면 그것은 거짓일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확실한 앎인가? 이에 대해 데카르트는 인간의 이성 전체가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 즉 인간의 이성 전체를 기만하는 "악령"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들어 수학적 관념적 앎이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음을 밝힌다.6) 그런 악령이 있는지 없는지, 인간의 수학적 판단이 거짓인지 참인지 그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악령이 있을 수도 있고, 따라서 그런 악령의 조작에 기만되어 우리의 모든 관념적 앎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그런 거짓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한, 그런 앎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일 수 없는 것이다. 7)

감각적 앎이나 관념적 앎은 착각이나 꿈 또는 악령의 의심가능근거를 배제하 지 못한다는 점에서 확실한 앎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의심가능하 고 언제라도 거짓으로 밝혀질 수 있으며, 절대적으로 의심불가능한 확실한 앎이 란 있을 수 없는 것인가? 우리는 어떠한 실재도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것인가? 어떤 것도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이라고 알 수 없는 것인가?

모든 대상적 인식을 의심가능한 불확실한 것으로서 배제한 후, 데카르트는 그렇게 의심하고 있는 의심주체에로 물음의 방향을 바꾼다. 나는 감각적 인식에 있어 착각하거나 꿈꾸고 있는 것일 수 있으며, 관념적 인식에 있어 악령에 의해 기만당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럴 경우 감각 대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닐 것 이며, 관념적 진리도 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기만당할 수 있기 위해서 라도 기만당할 수 있는 자로서의 나는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감각적으로 알려진 나 자신은 꿈꾸어진 나일 수 있기에 존재하지 않을 수 있더라도, 그런 꿈이 가능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의식활동으로서의 나는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 닌가? 의식의 대상은 그것이 착각과 꿈과 기만의 결과로서 모두 다 거짓일 수 있지만, 그것이 착각이든 꿈이든 기만이든 그런 의식활동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 만은 부정할 수가 없다. 다시 그것을 의심하고 부정할 경우에도 그렇게 의심하 는 나 자신은 분명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만은 그 자체 다시 의심이 가능하지 않은 확실한 것이다.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 ' 이 명제는 필연적으로 참이다. "8)

2. 자아의 발견과 그 의미
이와 같은 의심의 방법을 통해 데카르트가 발견한 것은 단지 내가 존재한다 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렇게 의심하는 등의 의식활동자로서의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지각, 의심, 희망 내지 판단 등의 일체의 의식활동을 총괄하 여 사유라고 부르므로,9) 의식활동주체로서의 자아의 존재의 확실성은 그의 다음 과 같은 명제로서 표현된다.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10)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나의 사유와 나의 존재가 별개의 사태로서 따로 있는 것 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존재는 사유활동 자체로서만 확인되며, 존재하는 나의 본질 자체가 바로 사유라는 것이다.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 이것은 확실하 다. 그러나 얼마동안 존재하는가? 사유하고 있는 동안 존재한다. "10) 나에 의해서 지각, 의심, 판단 등 사유된 내용은 다 거짓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유활동 자체, 의식활동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렇게하여 데카르트는 사 유하는 자로서의 나의 존재, 의식활동으로서의 나의 존재의 확실성을 모든 다른 앎이 기초할 수 있는 제 1원리, 확실한 토대로서 확립한다.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제 1원리는 사유로부터 존재 를 삼단론법에 의해 추론해내는 논리적 인식이 아니라, 데카르트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사유와 존재의 근원적 통일성에 관한 정신적 직관이다. 자아의 활동성 안에서 그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이러한 정신적 직관이 바로 소박한 객관주의 내지 실재론으로부터 벗어나 일체의 존재를 자아의 활동성 속에서 이해하는 초 월적 주관주의에로의 길을 열어 놓았다.12) 데카르트에 의해 발견된 이 사유하는 자아가 곧 라이프니츠의 지각과 욕구의 모나드이고, 칸트의 일체의 표상을 수반하는 "나는 생각한다'의 초월적 통각이며, 독일관념론자들의 자기활동성에 관한 지적 직관의 절대 자아 내지 절대 정신이며, 훗설의 일체의 존재를 지향적으로 구성하는 초월적 주관성이 된다.

III. 자아의 실체화와 그 문제점
1. 표상과 사물 자체의 구분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확실한 제 1원리로 확립하고 나 서 데카르트는 그 원리로부터 확실한 인식의 기준을 구한다. 즉 그 원리가 어떤 조건을 만족시키기에 확실한 인식일 수 있는가를 찾아내어, 그 기준을 여타의 다른 인식에 대해서도 그 확실성의 판단기준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제 1원리가 포함한 조건은 의식에 명석 판명하게 주어졌다는 것 이외의 다른 것 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든 의식에 명석 판명하게 주어지는 것은 다 참이다. 13) 예를 들어 하나의 집을 바라봄으로써 의식에 그 집의 표상이 명석 판명하 게 그려지면, 그 때 그 의식체험자에게 분명하여 의심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의식에 집의 표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의 판단이 나의 의식에 주 어지는 명석판명한 관념 안에 머무르는 한, 그 판단은 항상 참이다. 그러나 의식 안에 주어진 명석판명한 관념으로부터 자신의 의식 밖에 집이 실제로 존재한다 는 사실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명석판명성의 기준에 따라 볼 때 우 리 의식에 확실한 앎은 언제나 우리의 의식에 주어진 의식내재적 실재성일 뿐이 기 때문이다. 명석판명하게 주어져서 확실하게 인식된 것은 의식내재적 표상일 뿐이다. 그것 너머 의식 외적 사물 자체는 우리 의식에 확실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데카르트는 의식 외적인 사물 자체와 그것에 관한 의식 내적 표상을 구분한다. 의식에 명석 판명하게 주어지는 확실한 앎의 영역은 주 관적인 의식 내적 관념의 영역일 뿐이고, 의식 외적 객관 세계 자체에 대해 우 리는 직접적인 확실한 앎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내적인 관념에 상 응하는 외부세계가 과연 실재하는가? 외부세계가 우리의 관념이 그리는 그 방식 그대로 실재하는가? 하는 물음들이 데카르트에 와서 비로소 심각하게 제기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식 내면과 외면, 주관과 객관, 표상과 실재의 이원적 구도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것은 바로 근세 사유의 특징인 '세계의 이중화'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다. 즉 근세의 합리론자나 경험론자나 모두 객관적 세계 자체와 그 세계에 대한 주관적 표상세계라는 식의 이중적 세계를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 주객의 이 원적 구도, 의식 내적 표상과 그 너머의 실재 자체의 구분이 바로 칸트에서 현 상과 물자체의 구분으로 이어진다. 그 후 그러한 칸트적 물자체를 비판하는 독 일관념론자들의 논의는 결국 이러한 이원구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원구도, 주객도식, 현상과 물자체, 의식에 대한 존재와 즉 자적 존재 자체의 구분은 우리의 일상적 사유논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상적 사유가 바로 그런 이원화를 낳는 실체화의 논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이 제 그런 실체화의 논리가 어떤 것인가를 밝혀보기로 하자.

2. 자아의 실체화와 이원론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사고활동 자체로서의 자 아의 존재를 확인함으로써 가능한 명제이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이 명제가 의미 하는 바를 자아의 존재의 확실성만으로 해석하면서, 그 다음의 문제로서 그렇다 면 그와 같이 확실하게 존재하는 그 자아의 본질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던진 다.14) 이와 같이 자아의 존재의 확인과 그 본질의 물음을 구분함으로써 데카르트 는 특별한 논의 없이 전통적으로 행해져온 존재와 본질의 구분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15) 즉 어떤 것이 있는가 라는 존재의 문제와 그 있는 것이 무엇으로서 있 는가 하는 본질의 문제를 구분하면서, 그 구분을 자아에 있어서까지 그대로 적 용할 수 있는 것으로서 받아들인 것이다. 어떤 것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 무엇으로서 있는가, 즉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과 독립적으로 확인 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될 경우, 그렇게 있는 것은 실체로서 있는 것이 되며, 그 렇게 있는 것이 무엇으로서 있는가 하는 그 무엇은 그 실체가 지니는 속성의 자 리를 점하게 된다. 따라서 전통적인 존재와 본질의 구분은 곧 실체와 속성의 구 분으로 이어지게 된다.

물론 자아의 존재를 확인한 후 제기된 자아의 본질에 관한 물음에 대해 데카 르트는 그것은 곧 사유라고 대답한다. 자아의 본질은 그 자아의 존재가 확실한 만큼 확실해야 하는데, 그것은 이미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사유 이외의 다른 것 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아의 본질은 사유이며, 그 사유를 본질로 삼는 자아는 그러므로 사유적 실체이다. 이와 같이 연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체로서의 자아와 그 자아의 본질을 구분하는 실체화의 논리 안에 함축되어 있는 주객이원 화의 논리를 밝혀보자.

"사고하는 한 나는 존재한다"로서 데카르트가 직관한 것은 다름 아닌 나 자 신에게 직접적으로 의식되고 확인될 수 있는 것은 사고의 활동성이라는 점이다. 의식 활동 자체가 활동성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것을 보고있음을 의식할 때, 내게 직접적으로 확실한 것은 그것을 보는 활동성 자체 이다. 그 활동성 안에서는 아직 어떠한 분리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 봄의 활동 자체가 확실한 것이지, 보고 있는 주체가 존재한다거나 보는 나의 눈(신체)이 존재한다거나 아니면 보여진 것이 보는 활동과 무관하게 따로 객체로서 존재한 다거나 하는 것이 확실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무분별의 확실성 안에 머물러 있지를 못한다. 사유 내지 의식 활동 그 자체만으로는 우리의 언어 논리가 만족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적 언어논리는 그 활동이 누구의 활동인가 하는 활동 주체를 묻는다. 그저 활동이라는 것은 불완전한 것으로 이 해되며, 활동에 대해 활동하는 것, 활동주체가 그 활동의 기반인 실체로서 전제 되고 그리하여 그 활동이 그 실체의 속성으로 설명되어야만 납득하는 것이다. 그저 빨간색이라는 것은 불완전하며 꽃이 빨갛다거나 종이가 빨갛다거나 해야 비로소 납득이 가듯이, 그저 봄이라는 것도 불완전하게 여겨지며, 내가 본다거나 네가 본다거나 해야 비로소 납득이 간다. 눈 앞의 빨간색에 대해서는 '이 꽃이 빨갛다'고 말해야 하며, 나에게 떠오르는 사유에 대해서는 '내가 사유한다'라고 말해야 된다. 이것이 곧 '주어-술어' 관계의 우리의 언어구조에 상응하는 '실 체-속성'의 관계이다. 속성이 변화하고 달라질 때 그 속성의 담지자인 실체는 불변하는 자기 동일적인 것으로서 그 변화의 기저에 놓여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실체화의 논리는 어떤 분리를 가져오는가?

봄의 활동 자체에서는 보는 자와 보아진 것이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봄의 활동은 그 둘을 포괄하는 미분의 전체가 된다. 그런데 실체화의 논리는 활 동에 앞선 존재를 설정함으로써, 즉 활동성을 하나의 활동적인 것의 활동으로 해석함으로써, 활동 자체를 본래 그것이 지닌 주객포괄적 전체성을 벗어나게하 여 그 한쪽 끝인 보는 자(주관)만의 우연적 속성으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보아 진 것까지도 봄이라는 주관적인 우연적 활동 결과로 간주됨으로써 직접적으로 보아진 것은 그런 주관적 활동결과인 주관적 표상일뿐, 그와 독립적인 객관 자 체는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객관 자체는 주관적 활동과 무관하게 존립하는 실체로서 이해된다. 이와 같이 주객포괄의 동일적 전체성은 깨어지고 오히려 보는 주관의 일차적인 대상은 관념적인 주관적 표상일 뿐이고 객관 자체는 주관과 분리된 고정된 실체가 된다. 이와 같이 데카르트는 의심의 방법을 통해 의식활동성으로서의 자아의 본질을 직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 을 실체화함으로써 다시금 정신과 물질, 사고적 실체와 연장적 실체의 이원론에 빠져들고 만다.

3. 이원론과 유아론적 관념론
이와 같이 정신과 물질이 각기 사고적 실체와 연장적 실체, 주관과 객관이라 는 별개의 독립적 실체로서 간주됨으로써 근세 이후 서양철학의 독특한 이원론 과 다시 그 이원론을 극복하려는 각고의 노력이 가능하게 된다. 데카르트의 사 유적 실체는 초월철학에로 나아가는 주관주의 철학의 발판이 되며, 반대로 그의 연장적 실체는 근세의 기계론적 자연관과 일치되는 객관주의 철학의 발판이 된 다. 주객분리에서 시작하는 이원론이 해결해야 할 철학적 문제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유하는 자아 만큼 확실한 것인 사유된 것이 객관적인 연장적 사물세 계 자체가 아니라 단지 그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 표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사유실체와 연장실체 간에 어떠한 공통성이나 매개성도 찾아지지 않는 것이라면, 즉 정신과 물질이 각각의 실체로서 각자의 원리에 따르는 서로 무관 한 것이라면, 어떻게 구체적 인간에 있어서 그 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과 신체로서 상호관계하며 화합할 수 있는 것인가? 사유적 실체와 연장적 실체가 서로 별개의 것이고 그 둘 사이에 어떠한 공통성도 없다면 인간의 사유가 어떻 게 그것과 아무 상관없이 존재하는 물질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질 수 있는 것 인가? 사유적 실체의 사유 안에서 표상된 것이 연장적 실체 자체와 일치하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데카르트에게 있어 사유하는 자아와 사유활동 만큼 그 사유대상이 확실하다 고 해도, 그렇게 확실한 사유 대상이 객관 세계에 속하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주관적인 사유된 표상에 그치기 때문에, 확실성의 영역은 의식 내재적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며, 의식 외적 실재성은 전혀 확보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데카르 트에게 있어 확실성의 자아는 외적 세계와 분리된 의식 내면에 밀폐된 자아, 유 아론적 자아인 것이다. 이처럼 실체화의 논리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데카르트적 의식분석을 통해서는 의식 초월적 외부세계의 실재성은 확보되지 않는다. 그러 므로 이 유아론적 자아를 벗어나 외적 세계로 나아가는 길은 데카르트에게서는 자아 너머의 또 다른 실재, 즉 신을 매개로 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즉 사유하는 자아와 객관 세계와의 직접적 연관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그 둘을 매개하는 제 3자가 요구되며, 그것이 바로 신이 된다. 객관세계의 실재성은 그 신의 성실성에 근거해서 만 확보되는 것이다. 16)

IV. 주관적 관념 너머의 객관적 실체: 신과 사물세계
1. 관념과 관념의 원인
데카르트가 신에 나아가는 길은 물론 의식분석을 통해서이다.17) 의식내재적 실재성의 분석을 통해 그 유한성 너머의 무한자로서 신을 주장하게 된다. 그런 의식분석의 단초는 우리 의식 안에 주어진 관념의 실재성이다. 여러 상이한 관 념들은 그 형식에 있어서는, 즉 그것이 사유양태로서의 표상이라는 것에 있어서 는 다 동일하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즉 그 사유된 것이라는 내용적 측 면에 있어서는 다 상이하다. 예를 들어 빨간 사과 한 개의 표상과 빨간 사과 다 섯 개의 표상 또는 무수한 사과가 달린 사과나무의 표상등은 표상이라는 형식상 으로는 동일하지만, 그 내용상으로는 서로 상이하다. 이처럼 관념 자체가 지닌 상이한 내용성, 그 관념적 사태 자체를 데카르트는 스콜라철학의 용어를 따라 그 관념의 "객관적 실재성"이라고 칭한다.18)

의식의 양태로서는 모든 관념의 형식이 다 의식 내재적일 뿐이며, 그런 형식 상의 근거는 의식 자체, 사유자 자체 안에 있다. 그러나 문제는 관념의 상이한 내용, 그 차별적인 객관적 실재성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관념의 내용 자체가 표현하는 객관적 실재성에 대해, 그런 관념을 일으킨 관념의 원인 이 포함하는 실재성을 데카르트는 다시 스콜라철학적 개념에 따라 "형상적 실재 성"이라고 칭한다. 문제는 내가 가지는 갖가지 관념에 대해 그 원인은 과연 무 엇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가지는 일체의 관념이 다 나 자신을 원인으로 한 것 일 수 있는가? 그렇다고 판단될 경우 나는 영원히 나의 관념세계를 넘어설 수 없으며 넘어설 필요도 없다. 그러나 나 자신이 내가 가지는 어떤 관념의 원인이 될 수 없을 경우, 나는 그 관념의 원인으로서 나 이외의 다른 존재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이런 방식으로 나는 나의 관념 밖의 다른 실재의 인정에 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데카르트가 채택하는 또 다른 원리는 바로 "작 용하는 원인 안에는 그 원인의 결과보다 같거나 더 많은 실재성이 있어야 한다" 는 "자연의 빛"에 따른 원칙이다. 19) 이것은 무에서는 무밖에 나오지 않으므로 원인 안에 없던 실재성이 결과에 나타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관념의 객관적 실재성이 나에 대해 내가 가지는 나 자신의 관념의 객관적 실재성 보다 클 경우, 나 자신이 그 관념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그 관념의 원인 은 그 자체 나 보다 더 많은 형상적 실재성을 지니는 존재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밖의 다른 것의 실재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에 대해 내가 가 지는 관념들의 객관적 실재성의 많고 적음을 비교하여 판단하는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관념들의 객관적 실재성의 다소는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물질적 사물에 있어 감각적 관념들은 명석판명하기 보다는 혼탁하고 혼동되어 있다.20) 그 관념들이 참이라고 해도 그런 관념들의 실재성은 명석판명한 나 자신의 관념 보다 실재성이 더 적다. 또 그것이 거짓이라면 그것은 무로부터 나온 것일 것이 며, 그 무는 내 안의 결핍일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그런 관념들은 다 나 자신의 관념으로부터 나온 것일 수가 있다. 물질적 사물의 명석판명한 이성적 관념, 실 체, 지속, 수, 양등 역시 나 자신이 원인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나 자신이 실체이고, 그 이외의 관념은 다 이 실체의 양태이므로, 실체인 나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예를 들어 사과 다섯알의 관념의 객관 적 실재성이 사과 한알의 관념의 객관적 실재성 보다 더 크므로, 따라서 나는 사과 한알을 관념 밖의 형상적 실재성으로서 상정함이 없이도 사과 다섯알의 관 념을 통해 사과 한알의 관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과 같다.

2. 신 존재 증명
그러나 신의 관념이 포함하는 객관적 실재성, 즉 무한성, 자립성, 전지, 전능 등의 관념의 객관적 실재성은 사유적 실체로서의 나의 존재를 넘어선다.21) 그러므로 나 자신이 신의 관념의 원인일 수가 없다. 더 적은 실재성의 내가 원인이 되어 더 많은 실재성의 신의 관념을 결과로 가질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내가 가 지는 신의 관념의 원인은 나보다 더 많은 형상적 실재성의 신 자신일 수 밖에 없다. 한마디로 말해 유한자로서의 나로부터 무한자로서의 신 관념이 형성될 수 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인간이 유한하므로 그 반대로서 무한자의 관념을 떠올리게 되고 그 관념을 실체화하여 신의 존재를 설정하는 것이라고 생 각한다. 그렇게 되면 무한자의 관념에 대해 유한한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를 그 관념의 원인으로 설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신은 유한한 인간이 소망하는 바의 투사가 되며, 무한의 관념은 유한한 것의 부정으로서 지각되는 내용적 허위일 뿐이다. 이에 반해 데카르트는 무한자의 관념이 인간의 유한성의 의식에서 비로 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인간의 유한성의 의식 자체가 무한자의 관념에 비추어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무한성의 관념이 전제되지 않 는다면, 어떻게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유한한 것으로 의식할 수가 있겠는가? 완전 성의 관념이 있어야 그에 비추어 결핍의 의식이 가능하고, 확실성의 관념이 있 어야 그에 비추어 불확실성의 의식이 가능하고, 행복의 관념이 있어야 그에 비 추어 불행의 의식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실제로 자신을 유한한 존재로 의식하고 있다. 의심과 갈등과 욕구 등의 현상 자체가 결핍의 의식을 말 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유한성의 의식의 가능조건으로서 우리에겐 무한성 내지 무한자의 관념이 선천적으로 주어져 있다. 나아가 내가 가장 확실한 인식 이라고 얻어낸 "나는 사유하는 한 존재한다"라는 명제 조차도 인간 자신의 유한 성을 대변해준다. 왜냐하면 나의 존재가 나의 사유 안에서만 확인되기 때문에, 나의 존재는 시간적 제한성 속에 있기 때문이다. 즉 나는 사유하는 한, 의식활동 이 있는 한에서만 나로서 존재하며, 그 사유가 멈추는 순간 나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나의 존재의 지속성은 나 자신에 의해서는 확보되지 않는다. 이 것이 바로 데카르트가 신에 의한 세계와 나의 창조는 매순간 행해져야 한다는 "매순간의 창조"를 말하게 되는 근거이다. 지속적인 나 자신의 존재조차도 신의 존재에 의존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유한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궁극적 존재근거로서 무한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와 같이 외부세계 존재 를 논하기에 앞서 데카르트는 일단 우리가 가지는 무한자의 관념의 원인으로서 의식초월적 신의 존재를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신으로부터 어떻게해서 외부세 계 존재 증명으로 나아가게 되는가?

3. 외부세계 존재 증명
데카르트는 우리의 관념 너머의 신의 존재를 먼저 확립하고 나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그 존재하는 신에 근거하여 외부세계를 증명한다. 우리가 감성을 통해 갖게 되는 관념들의 내용은 연장성이지 사유성이 아니다. 즉 우리는 관념 들 자체를 그 내용에 따라 사유성과 연장성으로서 구분할 수 있는데, 감성적으 로 주어진 관념들은 연장성, 즉 색과 크기와 모양 등을 가지는 것으로서 주어지 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그 관념이 실제로 사유하는 자아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면, 그 관념이 사유성이 아니고 연장성의 내용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 인간 전체 가 하나의 공통적인 착각 속에 살고 있다는 말이 된다. 즉 그것이 나 자신으로 부터 만들어지는 내적 관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외적으로 얻어진 수동적 표상? 인 것처럼 여겨지는 그런 착각 속에 산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인류 전체가 그런 착각 속에 산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것은 인류 전체의 정신이 본래 그런 착각하는 정신으로서 창조된 한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즉 인간 정신 을 창조하는 신이 인간 정신을 그처럼 영원한 착각 속에 살도록 만든 한에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신이 그럴 수가 있겠는가? 남을 착각하게 하거나 속이는 것 역시 비성실성과 불완전성을 말해주는 것인바, 전지 전능의 완전성을 지닌 신, 성실한 신이 그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신의 완전성과 성실함에 비추어볼 때, 인 간 정신이 본래 그런 공통적 착각 속에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일은 있을 수 없 다. 결국 신의 성실성이 우리 정신의 영원한 착각된 삶을 배제하며, 이는 곧 우 리가 실재에 대해 가지는 관념 그대로 실재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이다. 즉 우리가 이성과 구분하여 감성을 관념을 받아들이는 수동적 능력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실재 자체가 우리의 감성에 관념을 제공하는 객관 세계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의 성실성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감성 대상인 외 부세계는 객관적 사물 세계, 연장적 본질의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신을 매개로하여 확보되는 외적 세계란 어떤 세계인가? 인간 주관의 사유로부터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연장적 사물세계란 어떤 세계인가? 사유성 내지 정신성이 배제된 세계, 순수하게 연장성만을 그 본 질로 하는 자연은 어떤 자연인가?

V. 데카르트 철학의 특징
1. 외부 실재세계의 본질 이해 :기계론적 자연관의 확립
사유적 실체와 연장적 실체의 이원론적 구분은 앞서 논했듯이 우리의 실체화 의논리에 따른 것이다. 전체성, 동일성, 무차별성에서 벗어나 분리화하고 대상 화,고정화하는 경향의 인간적 사고의 논리에 따라 이원적 실체론이 귀결되는 것이다. 자연에 있어서의 움직이는 힘과 움직여지는 것, 활동하게 하는 힘과 활 동하는 것이 분명 하나의 운동, 하나의 활동 안에 함께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리의 논리는 이들 두 양상을 서로 분리시킨다. 그리하여 움직이게 하는 활동 적인 것은 의식작용이고 사물은 단지 움직여지는 수동적인 물질일 뿐이라는 정 신과 물질, 능동성과 수동성의 이원화를 빚는다. 다시 말해 주객 미분의 봄의 활 동을 놓고 보는 자(주)와 보아진 것(객)을 구분하는 것이 인간의 차별성의 논리 이다. 이처럼 사유주체와 사유된 물질 객관을 이분화함으로써 결국 시공 안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물은 활동성이 없는 죽은 기계, 연장적 실체일 뿐이라는 근 세의 자연과학적 자연개념이 성립하게 된다.

데카르트의 연장적 실체에서 나타나는 근세 자연과학적 자연의 의미를 바르 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고중세의 자연 이해와 구분지어볼 필요가 있다. 고중세에서 자연은 그 스스로 그러함, 스스로 그렇게 됨을 의미한다. 만물이 스 스로 그렇게 된다고 하는 것은 자연이 그렇게 되어야 할 바를 그 자체 내에 지 니고 있다는 뜻이다. 즉 만물이 자기 자신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 서 인위적이 아닌 자연적인 운동은 자연물이 자신의 본성에 따라 자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운동이다. 물, 흙, 공기, 불이 각기 그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가 지며, 자기 자리를 찾아 운동하는 자연물은 자기 자리에 도달하면 그 때 비로소 정지할 수 있다. 자연물이 각각 자기 자리가 다른 것은 그 각각의 본성이 질적 으로 다르기 때문이며, 자연에서의 이러한 질적 차이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 는 것이 지상계와 천상계의 질적 구분이다. 자연물의 운동 과정을 그것이 미래 에 위치하게 될 자리, 즉 운동의 목적지에 따라 목적 지향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곧 운동의 힘이 자연물 자체에 목적인으로서 내재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 연에서의 변화 및 성장은 스스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자연의 능동적 운동이 며, 스스로 자신의 목적을 실현시켜 가는 생성적인 운동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 연관을 자연의 운동이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는 점에서 목적론적 자연관 이라고 부르며, 다시 그 목적이 외적으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안에 본성 적으로 내재된 것이라는 점에서 목적 내재적 자연관이라고 부른다. 나아가 자연 은 목적으로 나아가는 운동의 힘 뿐만이 아니라 목적지에 도달한 후 그 운동의 끝, 즉 죽음도 그 본성 안에 함께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유기체적 자연관이라고 도 할 수 있다.

근세로 들어오면 자연은 더 이상 그 각각의 본성에 있어 질적으로 서로 구분 되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천상계와 지상계의 구분을 포함해서 모든 종래의 질적인 구분, 존재의 계층적 다양성의 의미는 사라지고, 모든 존재하는 것의 차 이는 오직 양적인 차이로 환원된다. 따라서 사물 자체가 본래 속해야만 하는 본 래적 자기 자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연의 운동은 더 이상 자 신의 목적지를 찾아가는 자발적인 운동으로 설명될 수가 없다. 운동은 더 이상 최고선의 궁극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자연이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 이 아니라 단지 자연이 지닌 획일적인 관성의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기계적인 움직임일 뿐이다.22)즉 가야할 바가 없는데도 사물이 움직이게 되는 것은 스스로 움직이고자 해서가 아니라 다른 것에 의해 피동적으로 움직여지기 때문에 가능 한 것일 뿐이다. 도달하여 멈춰 서고자 하는 자기 자리가 없으므로 한 번 움직 여진 것은 스스로 멈출 줄 모르고 계속 관성에 의해 나아가게 된다. 따라서 머 무르고자 하는 바가 없는 데도 사물이 멈추는 것은 스스로 멈추고자 해서가 아 니라 다른 것의 저항에 의해 제지받기 때문에 멈추는 것일 뿐이다. 자연은 더 이상 스스로 생동력을 갖고 움직이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밀 때 밀려가 고 남이 막을면 멈춰서는 생명력 없는 수동적인 기계로 이해될 뿐이다. 이처럼 자연을 자발적 활동성이 없이 수동적으로 돌아가는 기계처럼 이해하는 자연관이 바로 기계론적 자연관이다.

이와 같이 주객대립의 이원론은 기계론적 자연관을 성립시키는데, 근세 이후 의 자연과학이나 그에 의해 세례받은 실증주의적 사고는 결국 이러한 기계론적 자연관에 기반을 둔 것이다. 실증주의적 사고가 철저화되면 궁극적으로 실재하 는 것은 시공 안에 위치한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연장적 사물이고, 그에 반해 주 관적이고 심리적인 사고는 그런 물리적 실체의 부수현상일 뿐이라는 자연주의적 일원화의 길을 가게 된다. 의식활동성으로서의 자아를 발견함으로써 초월적 주 관주의로의 길을 열어준 데카르트 철학이 다시 그런 자아를 실체화하는 과정에 서 결과적으로 기계론적 자연관을 확립하여 실증주의적인 객관적 자연주의의 기 틀을 마련한 셈이다. 실증주의적 전통에 이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계속되는 자 연주의적 일원론에 따르면 주관성, 심리성, 내면성은 우연성과 비실재성과 상대 성을 대변해주며 반대로 객관성, 물리성, 연장성이 참된 실재성과 보편성을 말해 준다. 즉 사고와 정신이 배제된 기계적 연장성만으로 특징지어진 자연물, 다시 말해 수학, 물리학의 탐구대상이 되는 객관적 사물만이 본래적이고 1차적 의미 에서 실재하는 유일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사물들의 자연 은 자발적 활동성이 없는 수동적인 죽은 기계이며, 시공적인 연장성만을 본질로 하는 대상물로서만 이해될 뿐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오로지 명석판명한 관념을 가지는 인간의 정신 만이 자연 안에서 예외적으로 사유적 실체로 존재할 뿐이며, 그 이외의 다른 모든 존재, 즉 무생물 뿐 아니라 식물 동물의 생명체까지도 모두 시공간 속에서 기계적 필연성에 따라 움직이는 연장적 실체로 이해된다.

2. 남는 문제
데카르트에 의해 발견된 사유활동성으로서의 자아는 본래 연장적 물질세계를 그 사유대상 내지 사유결과로서 지향적으로 포괄할 수 있는 통일적 원리이었는 데, 데카르트 자신의 실체화의 논리에 따라 연장적 실체와 존재론적으로 구분되 는 또 다른 존재방식의 실체로서 축소 해석됨으로써 결국 자신 밖의 일체의 객관 세계와 대립적으로 관계하는 외로운 유아론적 인식주관으로 그치게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대립되는 사유적 실체와 연장적 실체의 이원성의 매개를 데카르트 가 신 안에서 찾았다는 것은 결국 그 문제를 인간 이성 내지 의식 자체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아포리로 남겨 놓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밖에 물질세계가 존 재하고 그것도 나의 관념이 나타내는 모습대로 존재한다는 것은 신이나 알 수 있고 신이나 보증할 수 있는 것이 되버리고 만다. 결국 자아는 그런 신의 성실 성에 대한 믿음을 통해 내 밖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살아가거나 아니면 영원히 나만의 사적이고 심리적인 관념세계를 벗어날 수 없음을 괴로워하면서 살거나 둘 중 하나인 것이다. 데카르트의 이와 같은 이원론과 유아론이 데카르 트 이후의 철학자들에게는 철학이 해결해야 할 문제거리로 대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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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Descartes ,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1641), hrsg. v. L der G be, Hamburg, 1959.
Descartes , ber die Prinzipien der menschlichen Erkenntnis (1644), bzt. v. A. Buchenau, Hamburg, 1965.
Hobbes , Leviathan, ed, by C.M. Macpherson, New-York, 1977.
Husserl , Catresianishe Meditationen und Pariser Vortr ge (1929), Husserliana Bd. 1, Haag,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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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데카르트는 『성찰』을 의심할 수 없는 것, 의심가능근거를 전혀 가지지 않은 것, 결코 흔들릴 수 없이 확고한 것. 이런 것을 찾아서 학문에다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말로써 시작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근세의 토대주의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Descartes,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ghia(1641), Hamburg, 1959, Felix Meiner(이하에서는 Med. 로 약함), 31면.
2)Med. 31-33면.
3) 이와 같이 데카르트의 『성찰』에서의 의심과정의 서술은 하나의 주장과 다시 그 주장에 대한 반박이라는 논쟁적 대화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물론 『성찰』 전체가 1인칭 서술방식으로 쓰여졌으므로 그 대화는 자기주장과 자기반박이라는 자기 자신안에서의 대화이다.
4) Med. 33면.
5) 깬 상태에서의 감각대상이 여러 요소들의 복합물로서의 개체들이라면, 그런 복합물을 이루는 구성단위로서의 "단순자와 보편자"는 꿈에서도 타당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 데카르트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순자와 보편자"로서 데카르트는 "대수학과 기하학"의 대상이 되는 것 뿐만 아니라, "물리학, 천문학, 의학"의 대상이 되는 색, 형태들을 든다. 그러나 다시 후자는 우리가 개체를 감각하는 기관과 동일한 감각기관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이므로 개체들이 의심가능하듯이 그와 마찬가지 근거에서 의심가능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감각경험과 독립적으로 얻어지는 수학적 진리만이 "가장 단순하고 가장 보편적인 대상"으로서 아직 반박되지 않은 확실한 것으로 간주된다. Med. 35-37면 참조.
6) 나를 속일 수도 있는 전능한 신인 악령을 수학적 진리의 의심가능근거로 제시하는 데카르트 사유 속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근세의 수학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발견할 수 있다. 신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닌 한, 수학적 진리가 참이라는 주장은 곧 수학에 대한 절대화와 신격화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수학은 가장 이상적 학, 절대적 확실성의 학으로 간주된 것이다. 악령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Med. 37면 참조.
7) 그런 악령이 존재한다는 것을 무슨 근거에서 가정하느냐, 또 만일 신이 존재한다해도 그 신은 선한 신인데 우리를 속일 리가 없다 등등의 반박에 대해서 데카르트는 이 모든 의심가능근거의 제시가 확인된 사실에 기반한 것이 아니고 단지 우리의 사유가능성, 즉 신이 존재할 수도 있고, 그 신이 우리를 속이는 것일 수도 있다는 그런 가능성만에 기반한 것이므로, 그 실재성의 증명이 불필요하다고 다시 반박한다. 문제는 어떤 명제가 참이냐 거짓이냐가 아니라 참일 수 있듯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또는 실제적으로 거짓일 수 있는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지닌 것은 그만큼 확실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Med. 37면 참조. 데카르트의 이러한 주장, 즉 '거짓일 수 없는 것만이 진정으로 확실한 앎'이라는 주장은 현대의 반증주의적 논리, 즉 '거짓일 수 있는 명제, 반박가능한 명제만이 진정으로 의미있는 명제'라는 주장과 비교해볼만 한다. '그 거짓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는 명제는 무의미한 명제'라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전후기 사상을 일관하는 논리이다.
8) Med. 45면.
9) 데카르트는 사유한다는 것을 "의심하고 통찰하고 긍정하고 부정하고 의지하고 의지하지 않고 그리고 상을 표상하고 감각하고"등의 일체의 의식활동으로 설명한다. Med. 51면.
10) Descartes, ber die Prinzipien der menschlichen Erkenntnis, bzt. v. A. Buchenau, Hamburg, 1965, 2면.
11)Med., 47면.
12) 감각된 객관세계 존재와 수학적 진리가 거짓일 수 있는 불확실한 것으로서 판정내려진 데카르트에게 있어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것은 오로지 의심하는 사유적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 "나는 사유하는 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의심의 방법을 통해 참된 인식의 근거를 명증적으로 정초하고자 한 데카르트의 시도를 훗설은 소박한 객관주의로부터 벗어나 초월적 주관주의에로 전회케 한 중요한 동기라고 평하면서 그런 자아의 발견의 새로움과 역사적 의의를 거듭 강조한다. 그러나 훗설에 따르면 데카르트는 이런 사유하는 자아를 실체화하였으며, 그에 대한 참다운 초월철학적 분석을 행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 자아는 세상을 초월하지도 세상을 보유하지도 못하면서 사유자 자신의 내면성으로 제한되어, 결국 그 자신 밖의 객관세계를 대립적으로 대면하게 되는 외로운 유아론적 인식 주관으로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데카르트가 주관적 근거를 구하였고 그 단서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바른 분석이나 해명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며, 이는 갈릴레이식의 보편적 절대적 물질세계의 확실성에 대한 신뢰, 학문의 모형으로서의 수학, 자연과학 등에의 신뢰, 연역적 방법에의 신뢰등 다양한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훗설의 데카르트 평가 및 비판에 대해서는 Husserl, Catresianische Meditationen und Pariser Vortr ge (1929), Husserliana Bd. 1, Haag, 1973, 3면 이하 참조. 훗설이 비판하는 데카르트에 있어 자아의 실체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하 본문에서 다뤄질 것이다.
13)"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제 1의 확실한 인식으로부터 "내가 명석 판명하게 통찰하는 것은 모두 참이다"라는 일반적 규칙을 끌어내는 논의는 『성찰』 제3장 앞부분에서 행해진다. Med. 61-63면.
14) "나는 무엇인가?" 의 물음을 던지고 그 가능적 답으로서 신체, 먹거나 걷는 신체의 활동, 신체적 감각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는, 그처럼 신체와 연관되지 않은 사유를 자아의 본질로 규정한다. Med. 45-47면 참조.
15) 이러한 존재(existentia)와 본질(essentia)의 구분은 단순히 존재한다는 "있다"(daß-sein)와 그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이다"(was-sein)로도 표현되는 구분이며, 이 둘의 구분 및 그 둘의 관계는 끊임없는 형이상학적 논쟁거리이어왔다. 그리고 그 논쟁은 현대까지도 이어진다.
16) 가장 확실한 것으로서 자아를 발견한 점이 데카르트를 소위 근세 철학의 시조로 만들지만, 그 자아를 연장적 실체와 분리된 유아론적인 사유적 실체로 실체화함으로써 결국 자아와 타자, 자아와 세계와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시 자아 초재적 신을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데카르트를 아직 중세 스콜라 철학적 영향권 하의 사람으로 간주하게 하는 요소이다.
17) 이런 의미에서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 방식은 그 이전의 증명 방식, 즉 단순히 '가장 완전한 존재'라는 신의 개념에서 출발하는 존재론적 증명이나 경험적으로 주어진 사물의 존재에서부터 출발하는 우주론적 증명 방식과 구분된다. 신 존재 증명은 『성찰』 제3장에서 행해진다.
18) '객관적 실재성'(objcktive Realit t)과 뒤에 나오는 '형상적 실재성'(formale Realit t)과의 구분 및 그 관계에 대해서는 Med. 71-75면 참조.
19) Med. 73면.
20) 물질적 사물을 논하기에 앞서 데카르트는 아직 그 존재가 확인되지 않은 타인이나 동물 또는 천사 등의 실재성도 논하고 있다. 그것들 역시 그 표상의 객관적 실재성이 나의 객관적 실재성을 넘어서지 않으므로 나로부터 나온 표상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이에 대해서는 Med. 77면 참조. 그리고 나서 외적인 연장적 실체에 대해서는 소위 일차성질과 이차성질을 구분하여 자세히 논하고 있다. Med. 79면 이하 참조.
21) 이하 신 존재증명은 Med. 83면 이하 참조. 데카르트는 여기에서 단지 의식분석적 증명만으로써 신 존재 증명을 마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전통적인 존재론적 증명 또는 우주론적 증명 방식도 사용하여 여러번에 걸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22) 이와 같이 근세에는 일체가 다 자기 자리인 궁극 목적지에 도달한 상태로서의 "최고선의 이념"이 부정된다. 이처럼 최고선의 이념이 부정되고 그 대신 끊임없는 관성적 운동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논의를 우리는 홉스의 자연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Hobbes, Leviathan, ed, by C.M.Macpherson, New-York, 1977. 제 1장, 11절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