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의 칸트 인식론 비판
―‘오성’ 개념을 중심으로―
문성화(경상대)
[한글요약]
이 논문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고찰하고 있는 철학사적 의미 가운데, ‘오성’ 개념을 중심으로 한 칸트의 인식론을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동시에 그리고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은 헤겔이 자신의 ������철학사 강의������에서 다루고 있는 「칸트」 장이다. 우리는 헤겔의 ������철학사 강의������를 통해서, 헤겔이 자신의 체계를 정립하기 위하여 철학의 역사를 얼마나 철저하게 연구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자신의 철학적 체계의 ‘입문서’로 간주하였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 헤겔은 무엇을 했을 것이며, 우리는 거기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절대적 관념론 철학자인 헤겔로서는 정신―이성, 의식―을 철학의 원리로 삼은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경험을 배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험론적 견해를 사유의 출발점으로서 적극 수용한다. 철학의 역사도 바로 이와 같은 관점에서 출발하며, 헤겔에 있어서 참다운 지(知)의 출발점도 이와 동일하다. 이러한 관점이 대상의 영역에만 적용될 때, 우리는 그것을 인식론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헤겔은 이것을 대상의식의 관점에서 고찰하고 있다. 그런데 그 논의의 전개과정이, 철학사에 있어서 중요 철학자들이 행한, 자연에 대한 인식 주관의 발전․전개과정과 동일한 과정․방식이다.
이러한 인식과정을 최초로 행한 자들이 희랍의 자연철학자들이었으며, 다음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고 칸트가 헤겔에 앞서서 인간의 인식능력을 철저하게 검토하였다. 헤겔은 칸트의 뒤를 잇고 있는데, 「감성적 확실성」과 「지각」 그리고 「힘과 오성」 장에서 앞선 철학자들의 사상을 각각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특히 칸트에 관련해서 헤겔은, 칸트의 ‘오성’ 개념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대상의식에서 자기의식으로 이행하는 정신의 변증법적 발전계기를 다루고 있다.
주제분야: 철학사, 인식론, 관념론
주제어: 인식, 감성, 지각, 오성, 경험
1. 들어가는 말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지각」 장(章)에서, 지각에 의해 통일된 자연의 개별성과 보편성이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지각은 여전히 감성적 경험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어서, 보편성이 진정한 보편성으로 고양되기 위해서는―헤겔에 따르면―의식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을 제시하는 단계가 「힘과 오성」 장이며, 이것은 헤겔이 철학사적으로 칸트의 인식론에서 찾고 있는 것과 같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자연의 원리를 발견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개별적 자연물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지각작용에 의해서 자연물에 보편성을 부여하기는 하였지만, 여기에는 대상의 측면만 고려되었을 뿐, 주관의 작용은 그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정립된 보편성은 진정한 보편성이 될 수 없는 노릇이다. 또한 이와 더불어 ‘(대상)의식’은 아직 완전한 의식으로서 확립되지 못하였다.
물론 감성적 확실성의 주체도 지각의 주체도 엄밀하게는 ‘의식’이다. 그렇지만 이 때의 의식은 감성적 수용성의 상태에 있는 의식일 뿐이며, 스스로를 주체로서 확인하고 있는 인식의 주체는 아닌 것이다. 적어도 대상의식에서 인식, 즉 경험의 주체인 의식이 스스로의 적극적인 활동을 확인하는 단계는 의식이 ‘오성’으로서의 자신의 활동을 확인 할 때이다. 헤겔은 이 점을 칸트의 인식론에서 찾고 있다.
헤겔은 자기 시대의 독일에서 행해진 사상의 형식을 철학에서 혁명적 사건으로 규정하고, 독일에서의 정신의 진보를 칸트와 피히테, 셸링이 이룩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그는 철학의 과제를 사유와 존재의 통일로 설정하고, 철학은 이것을 근본 이념으로 삼아서 개념적으로 포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헤겔에 따르면, 이 과제의 형식적인 것을 수행한 철학자가 바로 칸트이며, 칸트는 이성의 추상적 절대성을 자기의식에서 찾았지만, 부정적인 측면에만 머무르고 만다.(Bd. 20, S. 314. 참조)1)
헤겔에 따르면, 칸트 철학의 핵심은 “사유가 스스로를 규정하는 구체적인 것으로서 파악한다”는 점에 있다. (Bd. 20, S. 331. 참조) 그러나 이것이 우선은 대상 인식의 측면에서 나타나는데, 칸트의 인식론에서는 「초월적 감성론」(die transzendentale Ästhetik)이 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초월적 감성론」의 주체인 ‘오성’은 객체로서의 대상인 타자와 관계를 맺고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를 인식의 주체로서 적극적으로 규정하지 못하는―헤겔적 의미에서―대상의식으로만 남을 뿐이다. 이 때문에 이러한 과정을 포함하는 인식작용이 헤겔에 의해서는 ‘유한한 인식’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Bd. 20, S. 333. 참조)
그러나 헤겔이 인정하고 있듯이, 칸트 철학에서 중요한 일반적 의미는 인식에 있어서 보편성과 필연성과 같은 제 규정을 ‘지각’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지각과는 다른 원천인 주관, 즉 ‘자아’에서 찾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칸트가 시도하는 것이 바로 “인식능력의 비판”(Kritik des Erkenntnisvermögens)이다. (Bd. 20, S. 333.) 그런데 문제는 헤겔이, 인식능력에 대한 비판은 인식작용 및 그 과정과 더불어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이미 인식이라고 고찰한 반면에, 칸트는―헤겔에 따르면―인식과 인식능력의 비판을 분리했다는 데에 있다. 이와 관련해서 헤겔은 다음과 비판한다:
“인식능력을 탐구한다는 것은 인식능력을 인식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인식을 행하기 이전에 인식능력을 인식해야만 한다고 하는 요구는, 마치 사람들이 물 속에 들어가기 이전에 수영을 하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Bd. 20, S. 334. 그리고 Bd. 8, S. 114.도 참조 할 것)
이에 따라서 보면, 결국 헤겔이 칸트의 오성 개념을 비판하는 것은 칸트의 인식론을 비판하는 것이 되고, 인식능력을 비판하는 것은 이성의 능력을 비판하는 것이며, 그 결과로서 헤겔은 인식에 있어서 주관과 객관 모두가 통일된, 인식의 참된 보편성과 필연성을 확립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힘과 오성」 장은 칸트의 인식론에서 인식 주체인 ‘오성’ 개념을 비판하면서, 헤겔 자신의 대상의식을 확립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헤겔이 그 뒤를 밟아가고 있으면서도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칸트의 인식론적 과정을 분석․고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2. 지금․여기와 시간․공간
자연의 원리로서 ‘존재’가 무엇인지를 고찰하는 데에서 출발한 서양철학의 역사는, 인간의 주체적인 측면이 배제된 채 천 년의 세월을 허송하던 중, 마침내 데카르트와 베이컨에 의해서 인간의 정신을 그 중심에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사상은 인간의 모든 지식의 근원을 문제삼으면서 ‘이성’과 ‘경험’으로 나누어지게 되었고, 결국 통일된 인식의 체계를 수립하는데 성공하지 못한다.
이렇게 분열된 인식의 근원은 칸트에 의해서 다음과 같이 종합되기에 이른다. 즉, 칸트는 인식의 출발점으로서 경험을 수용하면서, 감성적 직관이 어떻게 성립하는가를 ‘감성론’을 통해서 고찰하고, 여기에 오성의 활동으로서 개념이 결부되지 않는 한, 그 직관은 ‘맹목적인’(blind) 것으로만 남게 되어, 결국 인식이 성립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능력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밝혀 내었다. 그러나 칸트의 사상은 인식능력을 감성과 오성 그리고 이성으로 분리한 것 때문에, 인식의 최종 목표인 ‘절대 지’에는 이르지 못하였고, 이 점은 헤겔에 의해서 다시 비판되고 극복된다.2) 그렇다면 헤겔은 칸트를 어떻게 뛰어넘고 있는가?
헤겔에 따르면, 칸트 철학의 핵심은 사유와 존재의 통일이 주관성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헤겔도 “주체로서의 정신이 객체로서의 타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한에서 현상하는 정신이 바로 의식”(Bd. 4, S. 42.)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이 의식은 공간과 시간의 규정 하에 출현하는 타자가 없이는 인식의 주체로서 존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식은 경험으로부터 시작하고, 경험은 의식의 경험으로서 감성적 확실성에서 시작하며, 감성적 확실성은 타자를 규정하는 공간․시간이라는 조건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간과 시간은 그 자체가 감성적 확실성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감성적 확실성을 위한 조건이다. 감성적 인식의 대상은 공간과 시간의 규정 하에 현상한다(erscheinen). 따라서 헤겔이 ������철학사 강의������의 「칸트」 장(章)에서 “감성적인 것에는 하나의 보편적으로 감성적인 것 자체가 있는데, 이러한 소재에 있어서 타자는 공간과 시간의 규정이며, 이것들은 공허하다. 공간적인 것은 우리의 외부에 있다. …” 이것은 다른 소재에 의해서 가득 채워진다. “시간도 마찬가지로 공허하다.”(Bd. 20, S. 339.)고 칸트의 「초월적 감성론」(Die transzendentale Ästhetik)을 평가하는 것은 ������정신현상학������의 「감성적 확실성」에서 다루고 있는 “지금․여기”와 통한다. 지금과 여기는 모든 인식을 위한 필수 조건이고, 개별적 자연물이 정립될 수 있는 선험적 조건이며, 따라서 칸트에게서처럼 순수한 선험적 직관인 것이다. 즉, 이와 같은 조건은 대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상이 그것에 의해서 규정되기 때문에, 그것은 선험적이며, 따라서 순수한 직관의 형식인 것이다.
헤겔은 현상하는 대상에 대해 “이것이란 무엇인가?”(Was ist das Diese?)라는 구체적인 물음을 던지고, ‘이것’이 지니는 변증법적 존재양식을 시간․공간적인 측면에서 각각 “지금․여기란 무엇인가?”라고 물음으로써 대답하고 있다.(PhdG, S. 71 f.)3) 우리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을 ������철학사 강의������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즉, 지금과 여기라는 시간적, 공간적 형태로 현상하는 ‘이것’은 의식에 의해서 포착된 대상이며, 지금과 여기라는 “직관은 소위 직접적 의식이다. 그러므로 공간과 시간은 감성적인 것 자체의 보편자이다.”(Bd. 20, S. 340.) 이처럼 헤겔도, 칸트와 마찬가지로, 지금과 여기를 주관―의식―에 독립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직관이고, 사유이며, 의식”(Bd. 20, S. 340.)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그런데 헤겔에 따르면, ‘이것’이 지니는 시간적 존재양식으로서의 ‘지금’은 ‘밤’일수도 있고 ‘낮’일수도 있기 때문에, 지금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매개된 것, 즉 “부정적인 것 일반”(Negatives überhaupt)으로서 존재하게 된다.(PhdG, S. 72.)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도 또한 ‘나무’일수도 ‘집’일수도 있어서, ‘지금’처럼의 존재양식을 띠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과 ‘지금’ 그리고 ‘여기’, 이 모두가 이미 매개 된 것으로서, 사유에 의해서 규정된 것이라는 말이다. 매개된 지금과 여기는 한편으로 밤과 낮, 나무와 집을 모두 부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양자 모두를 긍정하기 때문에, 인식에 있어서 필연자이고 보편자, 즉 필연적 보편자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필연적 보편자’는 인간의 인식능력에 속하는 것으로서, 인식의 주관적 조건일 뿐이라고 하는 헤겔은, 칸트에 따라서, “필연성과 보편성은 외적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선험적(a priori)으로, 즉 이성 자체에, 스스로를 의식한 이성으로서의 이성 안에 있다. 그것은 사유에 속한다.”(Bd. 20, S. 335 f.)고 주장한다.
여기서 헤겔은 칸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즉, 헤겔은 한편으로 칸트가 공간과 시간을 ‘순수 직관’이라고 하는 점을 수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매개 된 것’ 또는 ‘부정적인 것 일반’으로서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그 까닭은 우선, 공간과 시간이 최초의 가장 단순하고 가장 직접적인 인식을 성립하게 하는 조건이긴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인식이 성립하지 않으며, 또한 그 자체가 곧 인식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인식은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서 출발하지만, 여기에 사유의 적극적인 활동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참된 개념적 인식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공간과 시간이 주관과 객관 사이의 참된 인식을 ‘매개’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헤겔은 칸트의 ‘감성론’을 다음과 같이 고찰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은 감성적 경험의 보편자이며, 그러나 선험적 직관이다. (…) 객관적인 것으로서 현상할 수 있는 것, 즉 공간과 시간은 결코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의식이 그 이전에 자기 자신 안에 공간과 시간을 가지고 있다. 공간과 시간이 비로소 의식으로 하여금 개별적인 것을 수행하고 정립하도록 가능하게 한다. (…) 공간과 시간은 외적 현상들의 필연적인 근거이다. (…) 요컨대 우리는 그것을 발견한다. (…) 공간과 시간은 사물들의 제 관계에 대한 보편적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직관이다.”(Bd. 20, S. 341.)
하지만 우리는, 직관이 경험적 인식을 위한 필연적인 근거라고 해서, 그것만으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인식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공간과 시간이 자체적으로는 보편자이지만, 그 안에 존재하는 인식의 대상은 주관의 자기 반성이 없이는 언제나 개별자로 머물러 버리기 때문이다.4) 이 때문에 헤겔은 「감성적 확실성」과 「지각」을 구별하는 것이며, 「칸트」에 있어서 “두 번째 인식 능력으로서 오성”을 고찰하는 데에서 ‘지각’을 엄밀하게 고찰하고 있다. (Bd. 20, S. 343 - 351. 참조)
3. 지각과 감성의 수용성
“‘…’ 모든 개인은 본디 자기 시대의 아들(ein Sohn seiner Zeit)이며, 그래서 철학도 역시 자신의 시대를 사상으로 포착하는 것이다(die Philosophie erfaßt ihre Zeit in Gedanken).” (Bd. 7, S. 26.)5)
이 말은 헤겔이 자기 자신과 철학에 대한 시대적 사명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낡은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나가는데 선도적인 역할 하고자 했던 헤겔은 스스로를 “미네르바의 부엉이”(die Eule der Minerva)6)에 비유한다. 그러기 위하여 헤겔은 자기 이전 시대까지의 철학의 역사를 총괄하여 개별적 사상가들의 정신을 추적하는데, 그 가운데 근대 사상가 가운데 헤겔이 가장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사상가가 바로 칸트이다.7)
헤겔은 칸트의 감성론과 오성론 그리고 이성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자신의 이성론을 그 위에 위치시킨다.8) 주지하다시피, 칸트의 이성론은 인식 이성의 능력으로서는 무제약자―물 자체, 절대자―를 결코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지만, 이에 반해서 헤겔의 이성론은―이성이 오성보다 우위의 능력을 가졌음에 틀림없다면―감성과 오성의 단계를 거쳐온 이성은 당연히 절대자를 인식해야 한다는 관점에 서 있다. 그래서 헤겔은 오성론을 다루기에 앞서 감성론을 더욱 엄밀하게 고찰하고, 감성적 확실성과 지각을 분리하여 고찰하는 것이며, 동시에 지각과 오성의 연관성을 칸트의 오성론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칸트는 다음과 같은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진리 인식에 관련하여 이성이 나아갈 수 있는 모든 회의주의와 독단주의를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경험론과 합리론을 자신의 체계 속에 통일한다: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그러나 비록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한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모든 인식이 경험에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 그러므로 경험, 그리고 모든 감각 인상과 상관없는 독립적인 인식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으며 ‘…’, 우리는 이러한 인식을 선험적(a priori)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그 원천이 후험적인(a posteriori), 즉 원천이 경험 중에 있는 경험적 인식과 구별한다.” (KrV, B 1 f.)9)
칸트는 경험론자들이 제시한, 모든 학문의 원리로서의 경험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완전한 인식이 성립할 수 없으며, 따라서 경험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인식은 진리일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칸트에 따르면, 경험이 발생하는 곳은 시간과 공간상에서인데, 경험의 대상은―경험의 선험적 조건인 시간, 공간과는 달리―후험적 조건 하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경험은 엄밀한 보편성도 제공하지 못하고 또 필연적인 확실성도 제공하지 못한다”(KrV, B 47.)는 것이다. 이렇게 경험의 결과가 참된 인식으로서 성립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칸트에 따르면, 인식에 앞서서 인식 능력에 대한 비판이 선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성에 의해서 제공되는 인식의 소재(질료) 그 자체는 한갓 개별자로 남을 뿐이지, 결코 보편자로 등장하지 못한다. 칸트가 인식의 능력을 직관과 오성 그리고 이성으로 구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견해는 헤겔이 ‘오성론’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이전에 「감성적 확실성」과 「지각」을 구별하여 “직접적 확실성은 스스로 진리의 구실을 할 수 없으니, 왜냐하면 그의 진리는 보편자이지만 그는 이것(das Diese)을 취하려고 하기 때문이다”(PhdG, S. 79.; 171 쪽.)고 하는 말과 일치한다.10) 다시 말해서, 의식(주관)의 적극적인 개입과 활동이 없이 경험만으로 참된 인식으로 성립하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헤겔은 ������철학사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딱딱함은 나의 감각이다. 내가 어떤 딱딱한 것을 감각한다는 직관은 딱딱한 것을 공간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주관성과 객관성을 분리하는 것이다. 내용은 공간 안에서 서로 외면적으로 있으며, 나의 외부에 있다.” (Bd. 20, S. 340.)
이것은, 직접적 감각은, 비록 나(주관)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인식에 있어서는 주관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여러 가지 감각기관과 그에 따른 감각에 있기는 하지만, 감각은 언제나 개별적으로 분리된 채로 존재할 뿐이지, 이 때의―오성, 이성과 연관성을 갖지 못하는―감성적 주관은 분리된 감각들을 통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겔은, 칸트에 따라서, “지각한다(perzipieren)는 것을 감각한다는 것, 표상한다는 것과 구별”(Bd. 20, S. 343.)한다. 즉 칸트는, “경험적 직관에 있어서의 다양성을 종합”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지각”이기 때문에, 이러한 지각이 감각이나 표상과는 다르다는 것이다.(KrV, B 160. 참조)11) 그렇다고 해서 칸트나 헤겔이 지각(Wahrnehmung)을 인식에 있어서의 완전한 경험으로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 까닭은 칸트와 헤겔 모두에게 있어서, 지각을 완전한 경험적 인식으로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오성의 적극적인 활동이 개입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칸트와 헤겔의 인식론적 체계에 있어서 ‘지각’은 ‘시간․공간’, ‘지금․여기’의 다음에 위치하지만, 그것이 완전한 경험도 완전한 사유활동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완전한 인식을 위해서는 오성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12) 그래서 칸트와 헤겔의 인식론에서 인식의 과정을 고찰하면, 우리는 이들 모두에게 ‘지각’이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감성적 확실성’도 경험이고 ‘지각’도 경험이지만, 이 양자가 동일한 경험은 아니며 또한 ‘경험’은 이 양자를 포괄하는 ‘유개념’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가 있다. 헤겔은 칸트의 오성론을 고찰하는 자리에서, 경험을 통해 지각되는 소재는 감정․직관에 속한다는 것을, 그리고 참된 개념은 개별성과 직접성에 따라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념은 제 범주에 의해서,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자연법칙과 보편적 제 규정, 유(Gattungen)에 의해서 결합된다. 이것들은 직접적인 지각이 아니다. 사람들은 하늘의 제 법칙을 직접적으로 지각하지는 못하고, 다만 천체의 위치 변화만을 지각할 뿐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지각된 것은 보편자로서 확정되며, 이것이 바로 경험이다. 그래서 경험에는 보편적 사상규정이 있다. 경험이라는 것은 어느 시대에서건 보편적으로 타당해야 한다.”(Bd. 20, S. 347. 강조는 필자의 것)
헤겔이 칸트의 사상을 이와 같이 이해하는 것은 칸트의 다음과 같은 견해와 직결된다:
“이제 우리는, 아래로부터 요컨대 경험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함으로써, 오성이 범주를 매개로 해서(vermittelst) 현상과 필연적 관련을 가진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자 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최초의 것은 현상이며, 이것이 의식과 결부하였을 때에는 지각이라고 부른다. (…) 그러나 모든 현상은 다양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여러 가지 지각이 심성 안에서 분산되어서 개별적으로 만나지기 때문에, 지각의 결합이 필요한데, 지각은 이 결합을 감각 기관 그 자체 중에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KrV, A 119 f. 강조는 필자의 것)
여기서는 칸트와 헤겔의 ‘의식’ 개념에 대한 견해가 서로 매우 유사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그것은 “나는 사유한다”(Ich denke)라는 활동성을 의식의 근거라고 하는 점에서만 일치를 보일 뿐이다. 하지만 칸트는 인식의 원천을 분리시킨 속에서 그때 그때의 대상과 주관을 결합시키는, 일종의 수단으로서만 의식을 강조할 뿐이다.13) 이에 반해 헤겔에게 있어서 의식은, 공간적 병렬성과 시간적 연속성 속에서 등장하는, 모든 대상과 관계하는 정신의 활동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의식은 정신이 활동 할 때를 말하며, 이 활동이 더욱 구체적으로는 ‘의식의 경험’인 것이다.
의식이 이렇게 경험을 행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확립하는, 경험의 형태가 바로 감성적 확실성이고 지각이며, 이들은 동시에 의식의 능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아직 대상 인식의 측면에서 완전한 인식을 성립시킨 것은 아니다. 여기에 주관(사유, 의식)의 적극적인 활동이 뒷받침되어야만 완전한 인식이 성립하는데, 이때 ‘오성’이 작용한다.
4. 의식의 경험과 경험적 인식
칸트 인식론에 있어서 오성의 활동은―비록 경험적 인식이기는 하지만―완전한 인식을 보증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한다’함은, 칸트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 내에서만 언제나 존재할 수 있는 현상적인 모든 대상에 대한 ‘경험적 표상’을 갖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칸트는 이 경험적 표상에 순수 오성 개념인 범주가 적용되는 한에서만, 경험적 인식이 성립한다고 말하고, 이 때의 경험적 인식을 ‘경험’이라고 칭한다. (KrV, B 147. 참조) 즉, 칸트에게서 경험은 경험적 인식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하여 칸트는 “경험은 오직 지각의 필연적 결합의 표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KrV, B 218.)는 원리를 제시하는데, 이와 관련된 그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경험은 경험적 인식, 즉 지각을 통해서 객관을 규정하는 인식이다. 그러므로 경험은 지각의 종합이며, 이 종합 자체는 지각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 있어서의 지각의 다양의 종합적 통일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종합적 통일은 감각기관의 객관을 인식하는데 본질적인 것, 즉 (단순히 직관이나 감각만은 아닌) 경험의 본질적인 것을 이루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경험은 지각을 통한 객관의 인식”인데, “지각을 필연적으로 결합시키는 표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KrV, B 218 f.)
각각의 감각기관에 의해서 감각된 대상의 여러 측면이 주관―의식―과 최초로 결합될 때 대상은 ‘지각’되는데, 이때 ‘지각된 것’은 아직은 인식된 것이 아니며, 따라서 경험적 인식이 성립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각된 것은, 경험적 인식의 측면에서 보면 여전히 개별자로 남아 있을 뿐이어서, 완전한 경험적 인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주관의 적극적인 활동―오성의 작용―이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칸트와 헤겔의 인식론에서, 한편으로, ‘경험’ 개념에 공통되는 사상이며, 이와 관련된 헤겔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의식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즉 자신의 지(知)와 자신의 대상에 대해서 행하는 이와 같은 변증법적 운동은, 바로 이 운동으로부터 의식에게 새롭고도 참다운 대상이 발생하는 한에서, 본래가 경험이라고 불린다.”(PhdG, S. 66.)
감각된 것 또는 지각된 것은, 의식의 측면에서 보면, 동일한 대상이면서도 동시에 동일한 대상이 아니다. 더군다나 경험된 것은 이전의 대상들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이것은 현상하는 대상이 수시로 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상을 대하는 주관의 태도가 변한다는 말이다. 이에 따라서 칸트가 경험적 인식의 객관성을 학적으로(wissenschaftlich) 보증하기는 하지만, 주관의 변화를 현상계에만 한정시킴으로써―헤겔처럼―‘의식의 경험’을 계속 수행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헤겔은 칸트의 경험적 인식을 다음과 같이만 이해 할 뿐이다:
“인식작용 자체는 양 계기―감각기관과 범주―의 진리이다. 인식된 것은 현상일 뿐이며, 인식작용은 주관에 속한다. 주관의 인식작용은 그러므로 현상만을 포괄하지, 그 자체(das Ansich)는 포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식작용은 사물을 직관작용과 감성의 제 법칙의 형식으로만 포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험은 감각된 것과 범주의 종합이다.” (Bd. 20, S. 350.)
경험적 표상에 범주를 적용시킨다는 것은 이미 인식의 활동이자 인식의 과정을 의미하며, 한 마디로 말해서 인식작용(Erkennen)이다. 칸트는 이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예를 들면, 물 자체가 그것이다―은 경험적 인식의 대상에서 제외한다. 따라서 이렇게 제외된 대상에 의식이 작용하더라도, 그것은 의식의 경험이라고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헤겔에 따르면, 칸트가 인식의 대상을 현상과 물 자체로 분리한 결과이기 때문에, 결국 인식에 있어서도 주관과 객관이 분리된 채로 있어서, 완전한 인식은 성립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헤겔이 제시하는 경험 개념을 ‘변증법적 경험 개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칸트의 견해를 좇아서 보더라도, 감성에 의해서 수용된 경험적 표상이 물 자체는 아니며, 경험적 인식의 성립을 위하여 경험적 표상에 범주를 적용시킨다는 것도 현상과는 다른 대상을 발생시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경험적 인식의 이러한 과정은, 공간․시간 속에 등장하는 물(Ding)과 공간․시간에 초월적인 물 자체(Ding an sich) 가운데에서, 의식을 매개로 하는 새로운 경험의 발생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식의 주관인 의식의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경험은 ‘변증법적 경험’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경험적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변증법적으로 사유하지만, 경험적 인식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반면에 헤겔은 경험적 인식에 있어서도, 의식이 인식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은 계속해서 이전 단계를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긍정하여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것(das Aufheben)이기 때문에, 그 과정은 변증법적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칸트는 인식의 요소와 과정 모두를 분리하여 고찰하는 반면에, 헤겔은 인식에 있어서 모든 것을 통일체로 간주하는 것이다.14)
5. 오성의 힘과 오성의 자발성
경험 개념을 둘러싼 칸트와 헤겔의 사상의 차이는 헤겔로 하여금 칸트 인식론의 결점을 극복하게 한다. 우선 헤겔은, 경험 개념과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우리로 하여금 자연의 개념을 최고의 방식으로 생각하게 하고, 이 개념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고 고양시킨 사람은 칸트이다”라고 하며,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의 공로를 인정한다. (Bd. 19, S. 172. 참조) 또한 모든 철학의 궁극 목표가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점에서 일치를 보이고 있는―아리스토텔레스를 포함하여―칸트와 헤겔이기에, 헤겔은 칸트의 “비판철학은 형이상학에서―또는 다른 제 과학과 일반 표상작용에서―사용된 오성 개념의 가치를 비판하는 데에서부터 먼저 시작하였다”(Bd. 8, § 41, S. 113.)고 그 가치를 인정한다.
하지만 헤겔은, 경험적 인식에만 국한되고만 칸트 이론철학의 한계를 지적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칸트철학은 이론적으로는 방법적으로 만들어진 계몽, 어떤 참된 것은 결코 아닌, 다만 현상만이 인식 될 수 있을 뿐인 계몽이다. 그의 철학이 지(知)를 의식과 자기 의식으로 이끌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의식은 이러한 관점에서는 주관적이고 유한한 인식작용으로 머물 뿐이다. ”(Bd. 20, S. 333.)15)
한 마디로 말하자면, 헤겔은 칸트 인식론의 한계가 오성 개념의 한계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칸트의 “오성은 결코 경험을 넘어서서는 안 되며, 만일 그렇지 않으면 인식능력 스스로는 다만 공상 이외에 아무것도 잉태할 수 없는 이론이성으로 되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한 학설은, 사변적 사유를 포기하는 학문적 측면을 정당화하는 것이다”16)라고, 헤겔에 의해서 혹평을 받기에 이른다.
이렇게 칸트 철학에서 하나의 한계를 보았기에, 헤겔은 그 한계를 뛰어넘고 자신의 ‘사변적 이성철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칸트의 한계가 동시에 헤겔에게 있어서는 발판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헤겔이 오성이라는 의식 속에서 (감성적) 내용이 나(자아)의 내용으로 된다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즉, 칸트에게서 지각의 “다양성의 통일은 나(자아)의 자발성(Spontaneität)에 의해서 정립”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자발성은 사유 일반이며, 다양성을 종합하는 것”이라는 점을 헤겔이 간파했고, 그 결과 “이것은 위대한 의식이며, 중요한 인식이다”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헤겔은 칸트를 뛰어 넘을 수 있었던 것이다. (Bd. 20, S. 344.)
주지하다시피, 칸트의 이론철학에서 감성과 오성은 각각 별도의 능력을 발휘한다. 거기서는 감성이 표상을 수용하는 능력을 발휘하건, 오성이 표상을 통해서 주어진 대상을 개념적으로 사유하건, 이 둘의 관계는 직접적이지 않다. 그런데도 이 양자는 결합해야만 인식이 성립한다. 이 결합을 위해서 등장하는 것이 자기 의식의 ‘순수 통각’이고 ‘판단’이며 보편적 사유 규정으로서 ‘제 범주’이다. 그리고 이들의 결합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이 ‘초월적 판단력’이고 ‘순수 오성의 도식주의’(Schematismus)이며 ‘초월적 상상력’(Einbildungkraft)이다.
헤겔은, 이러한 모든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론적 의식의 세 가지 방식인 직관과 오성 그리고 이성의 상호작용이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며, 그 결과로서 무한자가 대상으로 등장하는 것도 필연적 귀결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칸트의 인식론에서는 이성이 아무런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다. 헤겔은 그 까닭을 칸트에게서 “사유, 오성은 특수자로 머물러 버리고, 감성도 특수자로 머물러 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Bd. 20, S. 348.)17) 그래서 결국 칸트에게서 이성이 무한자를 스스로의 대상으로 상정하면서도18) 인식하지는 못하는 (변증법적) 모순에 빠지고 마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헤겔에게서 문제는, 의식이라는 주관이 스스로를 인식하고, 또한―칸트에게서처럼 ‘무한자’라는―스스로의 대상을 인식해야만, 의식은 참된 주체가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오성적 사유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또한 문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칸트의 한계가 ������정신현상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비판된다:
“그러나 이제 이 무조건적 일반자가 제 아무리 의식의 참된 대상으로 부각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의식의 대상으로 그칠 뿐이다. 따라서 의식은 아직도 자신의 개념을 개념으로서 포착하지 못했다는 것이 된다.” (PhdG, S. 93.; 192 쪽)
이때의 의식은 이성적 의식이 아니라, 대상과 분리된 오성적 의식이다. 이러한―칸트적 의미의―오성적 “의식은 자신에게 되돌아온 일체의 반성적 대상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지는 못한다”. (PhdG, S. 93.; 192 쪽) 그러나―헤겔적 의미의―이성적 의식은 “존재하는 대상에 본질적으로 관계하는 것으로 현상하는(erscheinend) 정신”(Bd. 4, S. 112.)이기 때문에, 궁극에 가서는―‘무한자’라는―자신의 대상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인식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헤겔은 이것을 어떻게 확정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긍정적인 것에서 부정적인 요소를 찾아내고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요소를 발견하여 참된 변증법적 발전을 도모하는, 헤겔의 ‘사변철학적 방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19) “헤겔의 방법이란 지(知)가 성립하는 매 순간마다―헤겔 자신, 혹은 엄밀히 말해서 사변적 철학자들인―우리(wir)가 지를 검증하는 것을 말한다. (…) 진리 검증의 척도인 우리는 지의 입장에서는 절대지로, 정신의 능력에서는 적극적(positiv) 역할을 하는 이성으로, 인류 가운데서는 철학자로 그리고 철학자들 가운데서는 헤겔 자신으로 등장한다.”20) 여기서 ‘우리’는, 대상과 관계하는 의식의 측면에서 보면, 감성과 오성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들을 초월하는 ‘이성’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성의 자발성’은 지각의 다양성을 통일하고 사유하기는 하지만, 그 결과가 진리인지 아닌지는 검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감성의 수용성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오성적 의식이 경험하는, 지각의 다양성에 대한 ‘통일’의 계기를 제공하는 것은 주관의 측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의 측면에 있는 것이 된다. 이 계기를 헤겔은 “힘(Kraft)이라고 명명되는 운동”(PhdG, S. 95.)이라고 칭한다.21) 이 힘은 본래가 객관에 존재하는데, 지각하는 의식이 어떤 객관을 “많은 특성을 지닌 사물”(das Ding von vielen Eigenschaften)(PhdG, S. 80.)로서 지각하고, 오성적 의식이 이 사물에 개념을 부여함으로써, 객관의 측면에 있던 힘은 주관으로 옮겨오게 되어 “오성의 힘”(die Kraft des Verstandes)(PhdG, S. 120.)으로서 등장한다. 그리고 객관의 세계는 오성에 의해서 “법칙의 영역”(Reich der Gesetze)(PhdG, S. 105.)으로 파악되며, 힘은 객관에도 주관에도 진리를 위한 계기로서 등장하게 된다.22)
객관의 실체를 이루고 있던 힘은 이렇게 하여 의식의 힘으로서 등장한다. 그러나 오성이 파악한 법칙은, 무조건적인 일반자와는 분리된 것이기 때문에, 고정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남는다. 하지만―헤겔적 의미의―의식의 힘은 대상과의 관계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즉 대상의 힘에 의해서 스스로의 존재를 자각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대상을 배제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위와 같은 오성의 한계를 파악하는 것도 의식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은 자신에게 전달된 대상의 힘을 통해서 “참된 세계로서의 초감성적 세계”(eine übersinnliche als die wahre Welt)로 자신이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PhdG, S. 101.) 즉, 초감성적 세계는 그 존재근거를 현상의 세계에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그것은 의식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대상을 사유하기 위하여, 먼저 자신의 능력을 반성하게 한다. 이렇게 보면, 헤겔에게서 초감성적 세계는 주체인 의식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대상으로 삼도록 하는 근거가 되는 셈이다. 원래 대상의 영역에 있던 초감성적 세계가 이처럼 의식―자아―의 세계로 떠밀려 들어올 때, 그 세계는 “전도된 세계”(die verkehrte Welt)(PhdG, S. 111 f.)가 된다. 이 세계는 주체를 참된 주체로서 각성시키기 시작하는 단초이다.
6. 나오는 말
철학이라는 학문을 염두에 두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면, 아마도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다’라는 대답이 첫 번째로 주어질 것이다. 그 까닭은 우선 인간과 여타의 생물을 구별하기 위해서일 것이며, 다음으로는 다른 모든 것이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규정되고 정의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성’이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이성이란 말인가? 우리는 헤겔에게도 이 물음을 당연히 던질 수 있다. 이에 대답하기 위해서―철학자로서는 당연하겠지만―헤겔은 철학의 역사를 검토해야 했을 것이다. 그 까닭을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철학사가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것은 연이어 나타나는 고귀한 정신들의 모습이며, 사유하는 이성의 영웅들이 도열해 있는 회랑(回廊)과도 같은 것이다. 이들 영웅은 이성의 힘으로 사물과 자연과 정신의, 더 나아가서는 신의 본질을 추구함으로써 이성적 인식이라고 하는 최고의 보물을 우리에게 마련해주고 있다.” (Bd. 18, S. 20.; 임석진 역, ������철학사 Ⅰ������, 서울 (지식산업사) 1996, 23 쪽. 강조는 필자의 것)
그렇기 때문에 헤겔 스스로가 ������헤겔의 학문의 체계 ― 제1부: 정신현상학������이라는 명칭으로서 서술하고 있는 책의 내용을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우리는 이 책의 서술과정이 ‘철학사’와 어느 정도로 부합하는가를 알게 된다. 이 책의 내용에 따라서 명명된 ������의식의 경험의 학������(Wissenschaft der Erfahrung des Bewußt- seins)은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의 다른 명칭이다. 이 책의 명칭이 ������정신현상학������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책에서 처음부터 등장하는 것은 ‘의식’이지 ‘정신’이 아니다―정신은 「자기의식」 장에 가서야 비로소 등장한다. 앞서 고찰한 것처럼, 헤겔은 ‘정신’이라는 개념을 처음부터 주관으로서 설정하고 객관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으로 취급하였다. 그 대신 그는 객관과 관계하는 정신을 ‘의식’이라고 명명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헤겔이 의식이라는 명칭을 통해서 밝히고자 한 것이, 처음부터 주관 자체가 아니라, 객관에 대한 의식의 태도와 방식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말하자면, 헤겔은 인식의 주관으로서 정신이 어떻게 현상하는가를 고찰한 것이었으며, 그것이 철학사적으로는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자신의 체계 내에 수용하여 밝힌 것이었다.
하지만 절대적 관념론 철학자이면서 변증법을 자신의 철학적 방법론으로 삼고 있는 헤겔로서는 ‘이성’의 능력이 ‘한낱’ 대상을 인식하는데 그치고 마는 것에는 도저히 만족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앎의 시작은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지만, 앎의 진리성이 검토되기 위해서는 주관의 측면도 함께 검증되어야 할 것이고, 동시에 이성 또한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헤겔이 (대상) 의식을 거쳐서 자기의식(Selbstbewußtsein)으로 나아가는 것은 당연한 순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와 헤겔의 고찰 순서에 따라서, 헤겔이 자기의식을 ‘철학사’와 어떻게 관련짓고 있는가 하는 점을 다음 과제로 남겨두게 되었다.
참고문헌
(“Bd.”로 표기된 헤겔 전집은 “G. W. F. Hegel Werke in zwanzig Bänden, Theorie―Werkausgabe Redaktion Eva Moldenhauer und Karl Markus Michel, Suhrkamp Verlag, Frankfurt a. M. 1970~1971”을 주 텍스트로 함)
G. W. F. Hegel, Bd. 4, Nürnberger Schriften
______________ Bd. 7,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______________ Bd. 8,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Ⅰ
______________ Bd. 18, Vorlesungen übe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Ⅰ; ������철학사 Ⅰ������, 임석진 역, 서울 (지식산업사) 1996
______________ Bd. 19, Vorlesungen übe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Ⅱ
______________ Bd. 20, Vorlesungen übe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Ⅲ
______________ Phänomenologie des Geistes, Vorrede, Felix Meiner Verlag, Hamburg, 1988; ������정신현상학������ Ⅰ, 임석진 譯, 분도출판사, 1983
______________ Die Vernunft in der Geschichte, hrsg. v. Johannes Hoffmeister, 6. Aufl., Hamburg 1955
______________ Wissenschaft der Logik Ⅰ, hrsg. v. F. Hogemann und W. Jaeschke, Felix Meiner Verlag, Hamburg, 1978
I.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Felix Meiner Verlag, Hamburg,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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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편저, ������과학사 개론������, 서울 (다산출판사) 1987
문성화, 「������정신현상학������과 철학의 역사 (Ⅰ)」, ������철학연구������ 제 67집, 대한철학회, 1998. 8
문성화, 「������정신현상학������과 철학의 역사 (Ⅲ)」, ������철학연구������ 제 75집, 대한철학회, 2000. 8
[Zusammenfassung]
Hegels Kritik der Kantischen Erkenntnistheorie
― in Bezug auf den Begriff 'Verstand' ―
Mun, Seong - Hwa (Gyeongsang National Univ.)
Ich bemühe mich in dieser Abhandlung um die Hegelsche Untersuchung zur Kantischen Erkenntnistheorie in Bezug auf den Begriff 'Verstand', und demgemäß bezieht sich meine Darlegung vor allem auf die Untersuchung 1. des Kapitels Kraft und Verstand in der Phänomenologie des Geistes, 2. des Kapitels Kant in der Vorlesungen übe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3. Kants Kritik der reinen Vernunft.
Man schätzt Kant und Hegel als großen Philosophen, da sie sich ihre eigenen philosophischen Systeme aufgrund früheren Gedankens entwickeln. Wenn wir von diesem Standpunkt ausgehen, können wir vorausnehmen, daß Hegel auch von der Philosophie Kants auf seine systematische Entwicklung ausgegangen ist.
Es ist unvermeidlich, daß Hegel als absoluter Idealist den Geist ― Vernunft, Bewußtsein ― zu dem Prinzip der Philosophie. Trotzdem schließt Hegel den Begriff 'Erfahrung' nicht aus, und umgekehrt nimmt er diesen Begriff als den Ausgangspunkt seiner Geistesphilosohie auf. Wenn solcher Gesichtspunkt auf die Sphäre des Objekts angewendet wird, können wir es wohl erkenntnistheoretisch nennen.
In der Phänomenologie des Geistes als System der Wissenschaft im Kapitel (Gegenstandes-) Bewußtsein und in der Vorlesungen übe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im Kapitel Kant verweist Hegel in die Richtung, die Kant mit seinen Begriffen 'Anschauung, Wahrnehmung, Verstand' gewiesen hatte. Da das geistige Vermögen des Menschen sich natürlich dialektisch entwickelt, kann und müß das (Gegenstandes-) Bewußtsein sich ― bzw. der Geist oder die Vernunft ― zum Selbstbewußtsein entwickeln. Nun die Kantische Erkenntnistheorie wird nach Hegel durch das Vermögen des Verstandes eingeschränkt. Daher entwickelt das Bewußtsein bei Kant sich nicht das wahre Subjekt des Erkennens.
Schlagwörter: Philosophiegeschichte, Erkenntnistheorie, Idealis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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