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역동적 움직임으로서의 예술의 진리
- “진리”개념에 대한 탈형이상학적 이해 시도
신 승 환 (외대)
목 차
I. 존재의 사유적 역동으로서의 예술의 진리
§1. 존재역사적 사유에 대한 탈형이상학적 성격 규정
§2. 존재역사적 사유로서의 “회상”
§3. “회상”이란 개념에 대한 비판적 진술
II. “형이상학의 초극”이란 관점에서 본 “근원에로의 전향”과 아도르노의 미학이론
§1. “근원”과 “한걸음-물러섬”의 성격
§2. 진리의 차이로서의 존재의 생기
§3. 존재론적 차이로서의 진리의 본질: 하이데거와 아도르노
III. “사유와 시작(詩作)”의 진리 -초기 낭만주의의 예술철학과 하이데거의 시작 개념
§1. 하이데거의 “사유와 시작” 논의
§2. 예술의 진리와 이성의 진리
§3. 철학으로서의 예술 - 초기 낭만주의에서의 예술의 본질
I. 존재의 사유적 역동으로서의 예술의 진리
§1. 존재역사적 사유에 대한 탈형이상학적 성격 규정
하이데거의 “사유”라는 개념은 존재역사적으로 형성된 술어이다. 존재역사적 사유틀 안에는 그때마다 일정한 양식과 방식으로 세계가 사유에 의하여 주제화되어 제시된다. 하이데거의 존재사유에서 고찰할 때 “사유”라는 술어는 전통적 형이상학의 사유구조에 대당되어 이루어 진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존재를 비은폐성(ʾαλήθεια)으로 변용하여 이해한다. 이 비은폐성은 “사유의 사태”로서 이루어지며, 이로서 “비은폐성은 언어에의 비은폐성에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 비-은폐성은 수수께기 그 자체이며, “사유되지 아니한 사유거리”이다. 사유는 그 본질에 있어서 존재의 사유이며, 바로 존재에서부터 “모두어 보내어짐” 자체이다. 존재가 “모아 보냄”(Ge-schick)이라는 말은, 존재는 스스로 “탈취함”이며, 동시에 사유에로의 개시됨이다. 존재의 사유는 이제 존재의 보냄 안에서 변용된다. 사유는 존재진리에 대한 질문에 기여하는 도상에 놓여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존재의 사유는 역사적이다. 이같은 존재역사적 사유는 “존재의 진리에 [존재]자체를 사유하려는 [시도이며], 이로서 존재자를 오직 존재자로서 표상하려는” (<<형이상학이란-입문>>/이정표, 363) 시도이다.
사유의 과제는 “지금까지의 사유가 지니는 사유의 사태에 대한 규정을 포기”(<<사유의 사실>> 80) 하는 것이며, 이것은 오직 존재를 존재로서 있게 하는데에 근거하여 있다. “철학에서 한걸음 물러나 존재의 사유에로”(<<사유의 경험>> 82) 다가가는 경험은 이러한 도정(道程)에서 이루어진다. 이 사유는 근대의 인간이 지닌 세계운명적인 고향상실성에 기인하여 “존재의 존재역사적 모아보냄을 사유”(<<휴머니즘>>/이정표 336) 해야하는 과제를 지닌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의 “존재역사적 사유”라는 술어는 존재망각의 시대에서 근원적이며-시원적인 진리가 우리에게로 되돌려지는 “돌아섬”으로 이해된다. 존재역사적 사유라는 말은 “전래적 사유 안에로 해소된 결합에 대한 회-상(an-denkend)함에 우리를 내어맡김”이다. 이러한 사유도정은 “말하여지지 아니한 것”을 듣는 들음에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다. 이러한 성격은 니체의 “신의 죽음”에 대한 “디오니소스적 신”의 도래를 기다리는 체험이다. 니체는 형이상학 안에서 형이상학의 전도이외의 아무런 다른 탈출구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오로지 “진리” 안에서는 이러한 “출구 상실성이 완성”되어갈 뿐이다. 따라서 니체는 “진리에로 몰락하지 않기 위하여 예술을 가지며” (단편 822) “예술은 진리보다 더 가치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횔덜린의 ‘고향상실성’의 체험에서도 이같은 성격을 발견할 수 있다. 고항상실의 체험에서 횔덜린은 ‘귀향’에 대하여 시작(詩作)하고 있다.고향 상실성이란 하이데거에서는 바로 존재역사적 “사유 상실성”이기도 하다.
존재역사적 사유는 존재이해에 대한 몰입과 차이성이라는 방식 안에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사유 안에서 존재의 본질은 현존재에게 “스스로 보냄”이며, 여기서 현존재는 존재에 대하여 “존재의 목자”로서 관계지워진다. 사유의 존재에 대한 본질관계에 대하여 묻는 것은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의 개화”를 의미한다. 존재역사적으로 방향지워진 현존재의 특출한 도정은 여기서 예술 내지는 시작으로 이끌려진다. 이러한 예술의 체험은 길을 열어가는 체험이며, 그것은 존재진리의 기획에서 현존재의 실존적인 피투성에 근거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사유에 대한 논의는 생기(生起)를 존재자체 안에서 근거지워가려는 시도이다. 여기서 예술의 체험은 “존재질문에 대한 존재역사적 사유의 길”을 개시한다. 길의 개시성에 대한 체험이란 존재의 본질을 생기로서 이해하는 관점 안에 정립되어 있다. 사유적 기투의 길은 존재자체에서부터 규정된다. 이러한 길은 생기적인 내어던짐 안에서 열망하며 기투 가능한 길로서 자유로이 주어진다. 예술의 작품존재는 사유의 객체나 시작적 객체가 아니라, 존재 발생의 하나의 특출한 양식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마치 철학이 존재의 사유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존재사유의 역사인 것과 같다. “존재에서부터 개시성에로 발생되는 어떠함”으로서의 “존재역사적 사유”라는 술어는 대상을 향한 이성이 아닌 “그 자체 안에 정립되어 있는 이성”을 의미한다.
“모든 존재의 본질에 따라 존재자를 전체적으로” 숙고하는 사유는 역사적으로 성격지워진다. 이것은 바로 “기재, 도래 그리고 현재”로서의 존재를 사유함이다. 인간이 지니는 역사적 사유는 “유래와 미래에서 이것으로 그리고 저것으로”(<<니체. 사유와 시작>> 90) 발생한다. 사유의 본질은 본질적으로 “가까이-에로-다가오는 것의 멀리”에로 나아감이다. 그러나 사유는 형이상학과 학문의 시대에는 기술의 계산하며 표상하는 형태 안에로 퇴화된다. 하이데거의 확신에 의하면 이러한 잘못된 이해로 인한 사유의 오용은 오직 “하나의 진정하며 근원적인 사유”를 통하여만 근본적으로 극복 가능하다. 존재진리에 대한 사유는 존재 자체의 모아보냄으로서 존재의 부름에 대하여 순명적으로 대답함이다.
마침내 하이데거는 “밝힘”과 “비은폐성”(ʾαλήθεια)으로서의 존재의 사유를 전통 형이상학적 “진리”개념으로 환원시킬 수 없다는 특성을 하나의 전제로 설정한다. ʾαλήθεια의 개념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고요함(Stille)의 터(장소)이다.(<<사유의 사실 75>>) 이러한 터는 먼저 비은폐성의 드러남을 그 자체로 “모아들임”이다. 은폐는 한편으로 “모아보냄의 억제”이며 다른 한편 “결코 단순한 자체폐쇄성이 아니라 나타남의 본질가능성이 보존되며 머무르는” 은닉이기도 하다.(<<강연과 논문>> 271). 자체은닉함은 존재의 본질을 “자체탈은닉”으로서 보존하고 있다. 이러한 “은닉의 모아들임”과 그로부터 “그때마다 나타나는 탈은닉성(Entbergung)”은 인간에게 “다가가 사유함”(Zu-denken)이며, 이로서 인간은 그 때마다의 탈은닉성(Entbergung)과 밝힘(Lichtung)의 두드러진 모아보냄에 따라 이에 “상응하는” “탈은닉함”을 넘겨받게 된다. 존재는 우선적으로 은닉되어 있음이며, 그 때마다의 탈은닉성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사유의 모아들임의 특성을 하이데거는 “사유의 회상”(Gedächtnis)으로 명명한다. 이것은 바로 인간은 자신의 본질 안에서 “존재의 사유모음”(Gedächtnis des Seins)이라는 것이다. 사유는 결코 존재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서부터 존재자를 사유한다. 사유는 사유함으로서 존재의 발생인 것이다. 존재의 드러남으로서의 사유는 하나의 존재 양태이다(“사유는 표상이 아니다.” <> 49.) 왜냐하면 사유는 존재자를 전체로서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사유의 본질은 “사유에서부터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자기 자체의 타자에서, 즉 마주-모아-내어놓음(Gegnet)에서” 규정되며, 또한 그러한 것으로 현성(west)된다.
존재의 은닉이란 측면에서 존재자의 존재가 드러남은 바로 탈은폐성이며, 존재의 측면에서 존재는 “말함과 사유를 체험함”으로서의 비은폐성이다. 말함과 사유의 체험에 대한 그리스적 이해에 따라서 고찰할 때 진리의 본질은 “마주-모아-내어놓음”(Gegnet)이며, 그것은 “추측컨대 진리의 은폐하는 본질”(<>) 이리라. 여기서부터 우선적으로 인간에게 “모아서 열어 주는” 본질에 속하는 곳(터전)에서 사유의 본질이 현성한다. 여기에 “허용함 안에서 사유는 이러한 표상함에서부터 마주-모아-내어놓음을 기다림에로 스스로를 변경시킨다”(<>). 사유와 관련하여 하이데거는 철학의 진리를 “존재의 회상하는 참됨”이라 성격 지운다. 이러한 관련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존재의 도래를 기다리는 한 사유자의 사유는 참되다. 사유함은 존재를 보존하며, 이로서 존재의 도래는 자신의 말함 안에서 회상적으로 보존된다. 그것은 우리에게 말함의 단어 안에로 감추임이며 그럼으로써 존재는 동시에 언어 안에 비은폐됨이다. 이것은 철학의 참-됨(진-리)이다”. 인간은 창조적인 사유 안에서 “존재의 가장 높은 체험”(<<니체. 사유와 시작>> 110)에 도달한다. 사유는 존재의 집을 건축한다. 이것은 “존재의 결합이 그때마다 보내는 특성으로서 인간의 본질을 존재의 진리 안에서 거주함에로 처리시키는” 존재의 집이다.(<<이정표>> 358). 그러한 성격은 바로 인간을 위하여 역사적 탈존이 성취됨을 의미한다. 이 특성을 하이데거는 근원을 향하여 도약하는 “새로운 사유”라 명명한다.
하이데거가 “존재에 공속되는 것에서 탈-존으로서 인간성의 본질”에 의하여 사유를 규정하는 것은 결코 이론적이거나 실제적인 규정이 아니다. 이러한 사유는 존재론적 차이지움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사유란 자신의 본질에 따라서 존재의 진리에 대한 질문이라 성격지운다. 따라서 이것은 질문할 가치가 있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존재에서부터 인간의 본질거주를 규정하며, 본질거주함으로” 정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역사적 사유는 더 이상 학문이 아니며, 윤리학도 존재론도 아니다. (<<휴머니즘>> 354) “도래하는 사유는 더 이상 철학이 아니다”(<<휴머니즘>> 360). 그대신 이것은 존재 모아보냄(Seinsgeschick)의 드러나지 아니하는 걸음(Schritt)이며, 존재역사적 사유에 상응하여 규정된다. 이러한 ‘다른 사유’는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존재진리의 사유이며, 존재진리에 의한 사유이다.
§2. 존재역사적 사유로서의 회상
존재 역사적으로 각인된 하이데거의 새로운 사유는 형이상학을 극복하며 초월(초극)하려한다. 이렇게 동기지워진 사유를 하이데거는 “회상”(Andenken)으로 특징지운다: “만일 존재의 진리에 대한 질문의 발전에 있어서 형이상학의 극복이 거론된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존재자체에 대한 회상을 말한다.”(<<형이상학이란-입문>>/이정표, 363) 이러한 회상의 특성은 “기재하는 모아보냄”이란 성격을 지닌다. 기재하는 것에 대한 회상은 사유되지 아니한 것을 다가가-사유함에로 앞서-사유함이다. 따라서 사유는 회상하는 앞선 사유이다.“(<<근거율>> 159쪽) 이러한 사유는 이제 양면적인 요구를 지닌다: 한편으로는 그것은 형이상학의 본질에 상응하는 체험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잊어버린 근원에 대한 초월적 극복을 요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이데거의 관점은 “기재된 것의 도래에 대한 사유는 스스로를 간직하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회상이다.”(<<사유의 경험>> 82). 존재는 모아보냄과 회상이라는 전체적 맥락 안에 존재하며, 역사적-운명적 성격을 지니는 개시함의 전달로서 고찰된다. 이러한 모아보냄의 성격이 개시됨은 역사적으로 구체적, 실존적 인간에게 “그때 그때마다”의 근원적인 발생이 세계에로 다가오는 시원적 발생 가능성으로 정립된다. 존재의 이러한 체험은 “송부된 것을 수용하며, 전달된 것에 대하여 대답하는 체험”이다. 이러한 사유는 근원을 향한 접근의 가능한 방식이며 그러한 형태이다.
“회상(기억하며-사유함)”을 하이데거는 “존재역사적 사유”에서 이루어지는 “도약” (Sprung)으로 규정한다. “회상(기억하며-사유함)”은 존재망각성에 대립되는 명제로서 존재의 심연에로 뛰어듬으로 규정된다. 도약은 그럼으로 전적인 공허란 의미로 이해되는 근거제거에로 뛰어듬이 아니라, 사유를 존재로서의 존재에 상응하게 함, 즉 존재의 진리에 이르게 하는 도약이다. 이러한 도약은 존재의 근거-떨어짐(Ab-Grund)에로의 뛰어듬으로 이해된다. 회상으로서의 도약은 “존재의 모아보냄(Geschick des Seins)의 시각에서부터 사유함”을 의미한다. 회상의 이러한 특성을 하이데거는 “기억함”(Erinnerung)으로 묘사한다. 존재의 진리는 이제 기억함으로 이해되는 회상의 형태 안에서 스스로 생기하게 된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지구의 기술의 지배위에서 형이상학의 완성과 존재망각성의 세계에 맞서는 비판적 열정”(<<사유의 사실>> 65)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회상의 근본과정이며 이로서 사유의 초월적 극복이 성취된다. 그 말은 하이데거에 따르면 근대적인 표상하는 사고에서부터 “간격을 두는, (그에서) 떨어져 뛰어오르는” 회상이다. 학문과 기술이 지배하는 시대는 기술의 지배를 통하여 존재의 망각성이 전적으로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이러한 시대에서 하나의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이 개시된다. 그 가능성과 연관지워 하이데거는 기술의 본질을 “모아-세움(Ge-Stell)”으로 이해한다. “모아-세움”은 그리스어 “μορφή 즉 형상”에서 유래되었으며, 그에따라 “밖으로-이끌어-냄의 모음”(Die Versammung des Her-vor-bringens)으로 이해되었다. 이에 근거하여 하이데거는 모아세움이란 개념의 두가지 의미에 주목한다. 즉 기술의 본질과 생기의 첫번째 특출한 번쩍임을 형이상학의 완성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아세움의 시대는 다른 한편 “근대 기술의 시대에서 존재와 인간의 위상(Konstellation)”(<<동일성과 차이>> 25)을 나타내고 있다. 이 몰아세움(Gestell)을 초월하며 극복함은 존재의 생-기에서부터 그 가능성의 단초를 잡는다. “생기에서는 생기가 몰아-세움의 맹목적 작업을 하나의 보다 시원적인 생기함에로 초극할 수 있는”(<<동일성과 차이>> 25) 가능성이 솟아오르고 있다. 이러한 위상을 하이데거는 “기술의 세계 안에서 어느 곳에서 그리고 어디에서부터 인간과 존재가 관련을 맺을 수 있는지”를 밝히는 상황지평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인간은 “생-기라고 하는 것의 선재적 유희”를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두가지 의미성에서부터 모아-세움은 무엇보다도 초월적 극복의 의미와 연관지워 비로서 전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근거하여 형이상학의 초극이란 기술의 몰아-세움의 특성을 한편으로 극복하며, 한편으로 테크네(Techne)의 모아-세움이란 성격을 완성해 감으로써 성취되어질 수가 있다.
사유의 회상함을 하이데거는 시작(詩作)함으로 규정한다. 이제 “회상은 시인과 사유가가 지니는 두 개의 언어에서” 일깨워지게 된다. 하이데거의 수수께끼같은 “회상”이란 용어를 바티모는 탈형이상학적 사유라는 의미에서 존재사건을 “다시금 받아들이며, 다시금 관통하여 사유함”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문제를 새로이 수용하기 위한 것”이다. 사유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그러나 하이데거의 문맥 안에서는 어떠한 체계적 논의로도 거론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사유의 이러한 측면을 “형이상학 역사의 거대한 순간이나 시인과 사유가의 위대한 언어적 표현들이 드러나는 순간들을 널리 진행되도록 함”으로 제한하여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회-상은 이제 존재를 존재자에 대한 타자(das Andere)로 기억하는 것, 즉 “차이로서의 차이”(<<동일성과 차이>> 43)로 기억하는 사유로 기술된다. 존재는 이러한 회상을 통하여 존재자에게서 구별된다. 이러한 존재론적 차이는 회상을 통하여 완전하게 구현되는 것이다. 실존의 해석학적 전체성이란 의미에서 기초존재론적으로 동기지워진 철학은 하이데거의 후기 작품들 안에서 회상으로, 즉 “스스로 기억해내는 사유”(<<사유의 사실>> 5-6쪽)로서 해석된다. 하이데거는 존재망각성의 시대에서, 그리고 오직 이러한 망각성의 사유 안에서 한 걸음 나아가 구원을,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에서 그 구원의 가능성을 보고 있다. 근원적 사유는 이제 “예술과 시작, 혹은 일반적으로 언어의 ‘시작하는 것의 영역’에 대한 조망”에서부터 그 출발의 단초가 이루어 진다.
§3. “회상”이란 개념에 대한 비판적 진술
하이데거의 개념들, 특히 후기 철학작품 안에서의 개념들은 가다머에 따르면 “주관적 증명” 안에 갖혀 있다. 하이데거의 후기 철학적 시도들은 전래적 철학언어에서부터 시작(詩作)적 은유에로 넘어가려는 시도들이다. 이러한 시도를 야메(Jamme)는 후기 하이데거 작품에 대한 학문적 토의와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는 이유로 꼽고 있다. 특히 그의 후기 철학적 언어가 지니는 주관성과 난해함, 비일관성은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대화단절성과 신비주의적 해석을 초래하고 있으며, 이러한 책임의 대부분은 하이데거가 져야할 부담이기도 하다.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은 시작에 대한 해명과의 연관 안에서 횔덜린에서부터 영감을 받고 있다. 하이데거는 “슈피겔지와의 대담”에서 “나의 사유는 횔덜린의 시작과의 절대적 관련 안에 서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횔덜린 시작해명에 대한 첫번째 비판은 그가 인용한 횔덜린 시작의 불명확성과 부정확성에 있다. 하이데거가 명확히 횔덜린과의 만남 안에서 이루어 낸 이러한 새로운 포에시적 언어는 “Jargon der Eigentlichkeit”의 출판 이래로 이미 여러번 비판되었던 점이다. 이와 연관지워 하이데거가 횔덜린 시작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제시한 해석의 실재들도 시작에 대한 철학화로 비판받는다. 이러한 텍스트 형성은 사실 “하나의 해석, 명확히 잘못된 해석”에 근거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는 귀향에 대한 비가(엘리지)의 해석 안에서 귀향을 “전반적인 문화의 변혁적 전환의 준비”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고향에 대한 사유의 존재론화는 “인간의 ‘집안에 머무름’을 ‘고향의 모아보냄의 고유성’ 안에 머무는 공간으로” 해석한다. 슈티어를레(Stierle)는 이러한 하이데거의 횔덜린에 대한 관계를 시작의 존재론화로 규정하여 “철학자 하이데거는 아마도 눈 하나를 감고 있는 것 같다”라고 비유적으로 기술한다.
횔덜린 시작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을 “성스러움에 대한 이름지움”으로 이해하는 야메는 이러한 근거를 “횔덜린과 하이데거 사이의 친화력이 하나의 깊은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횔덜린에 대한 접근은 근대의 합리성과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 그리고 특히 “시작과 사유” 안에서 이해되는 근원적 진리모형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기인하고 있다. 시인의 과제는 전(前) 형이상학적 사유에 자리하며, 결코 형이상학이나 이성의 원리를 새로이 건립하려는 의도에 근거하지는 않는다. 그의 과제는 “아직 신에 관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언어 안에로 이끌어 내는 것이며, 이로써 자기자신의 의식에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언어는 형이상학적 언어를 넘어서서, 일상적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출발하고 있다. 사유의 과제라는 명제를 야메는 “존재를 미리-사유하는 길을 준비하는 시작(詩作)”이라 명명한다. 이로서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이래 기초존재론에 의거하여 준비하였던 존재사유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 길을 의도하였던 것만큼 그렇게 명료하게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가까이(Nähe)”와 “사유와 시작의 이웃”이란 술어는 하이데거의 존재사유에서 유래하는 그의 고유한 규정이며, 형이상학의 초월적 극복이라는 사유동기에서 제시되어 있다. 예술의 철학은 여기서 “가장 먼저 신학적 관점 아래에서” 선행적 조건 없이 제시된다. 시작 안에서의 이러한 종교적 성격은 예를 들어 기술의 시대에 요구되는 “구원”에 대한 거론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하이데거는 “오직 하나의 신이 있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라고 슈피겔지와의 대담에서 표현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 즉 사유와 시작 안에서 신의 부재성을 몰락시키고 신의 드러남을 미리 준비하는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술어 “회상”은 명백히 종교적이며 신학적으로 각인되어 있으며,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이루어 지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예를 들어 그의 “현상학과 신학”에 대한 강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시작적 말함은 신에게는 그 옆에 머무름[...]이다. 무엇 옆에 머무름은 [...] 신의 현존을 순수하게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것이다.”(<<현상학과 신학>>/이정표 78) 하이데거의 시작에 대한 종교적 맥락에 의한 해명에는 시인에 대한 이해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시인은 이제 절반의 신(Halbgötter)으로 불리워진다. 왜냐하면 시인은 신적인 것과 죽어야할 것들 사이를 중개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행위는 “신들에 대한 근원적인 이름지움”(<<형이상학 입문>> 40 이하)이며 “신의 번쩍임을 단어 안에로 이끌어 들이며 그것에로 마법을 부리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번쩍임을 자리매김하는 단어를 그의 민족의 언어 속에로 세우는 것이다”.(<<형이상학 입문>> 45) 시인은 이러한 의미에서 신의 섬광 아래에 서 있는 존재자이다. 존재의 이러한 창립을 하이데거는 신들의 눈짓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적 언어는 기초존재론적으로 동기지워져 있다. 그것은 전래의 형이상학적 언어의 해체에로 방향지워진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초래하고 있다. 이같은 문제성을 프란첸은 다음과 같이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비록 하이데거가 상당히 분명하게 [용어의] 경계를 설정하고 있지만, ‘사유’라는 말로 이해하는 바는 부정적이다. 그는 어원학-언어적인 연상작용을 통하여서도 (예를 들어 고마움Dank, 추억Gedächtnis, 예배Andacht등: 특히 <<사유란 92>>) 거의 보충할 수 없는 개념들과 또한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내용들도 모호하게 규정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신이 떠난 시대에 대한 사유는 니체와 비교할 경우, 신적인 창조에의 용
기와 그에 상응하는 능력을 인간에게 다시금 일캐워낼 수 있으리란 생각에 따라 이루어 지고 있다. 이것은 고대의 몰락과 그리스도교가 (특히 계몽주의와의 연관에서) 무너지는 시점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이다. 이러한 결핍된 시대에는 시인이 상실되어 있고, 세계내의 집안 친구가 사라져 버렸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집안 친구가 없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모습에 대웅하여 하이데거는 인간을 존재와 시작에 대한 “목자이며 봉사자”로 묘사하고 있다. “신(神)의 결핍”은 “더이상 아무런 신도 보여지지 않으며, 분명히 인간과 사물들이 스스로 모여들고, 이러한 모임을 통하여 세계역사와 인간의 세계 안에서의 거주를 마련하는 것”(<<무엇을 위한 시인>>/숲길 248)이다. 결핍된 시대는 “떠나간 신들의 ‘더 이상 없음’과 도래하는 신의 ‘아직-아니’“(<<횔덜린의 시작 47)의 긴장과 그 사이에 놓인 시간이다. 신 상실성을 통하여 횔덜린은 존재망각성을 체험한다. 하이데거는 횔덜린을 도래하는 시간의 시인으로 표상한다. 이러한 신이 떠나간 “세계의 어둔 밤의 결핍된 시대” 속에서 시인은 새로운 도래를 위한 길을 다듬고 그 길을 예비하는 자이다. 횔덜린은 그 이전이나 그 이후의 다른 어떠한 시인과는 달리 이러한 (신의) 도주를 체험하였으며, 그 체험을 시작적 언어 안에로 정립시켰다. 신이 떠나간 시대에서는 “한걸음 물러섬”이 관건이다. 그것은 하나의 특출할 가능성의 방식 안에서 소리없는 음성을 듣는 것이며, 사유자와 시인이 근원과 고향에로 가까이 다가감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를 위하여 시인은 사유 안에서 기재함과 도래함을 사유한다. 모범적 시인에 대한 묘사로서 하이데거는 “도래하는 하느님”과 연관지워 “디오니소스”에 대하여 사유한다. 디오니소스란 “신들이 떠나간 발자취를 따라 내려와 신상실의 세대에로 이끌려져” 오고 있다. 따라서 시작은 이러한 이끌어 냄의 “시원적 부름”으로, 즉 “도래하는 것 자체에서부터 불리워진 것”이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거룩함”이라 명명한다. 시작은 이러한 의미에서 거룩함의 발생이며, 이와 연관지워 존재의 진리는 “거룩함”으로 표상될 수 있다. 도래하는 시대는 거룩함의 시대이다. 여기에서 신성의 시간성은 시작에 대한 하이데거 철학의 중심에 위치한다. 존재는 이제 그리스 술어 “퓌지스φύσις”의 근원성에 놓여있다. “퓌지스는 생겨남이며 솟그쳐 오름”으로서 빛의 성장이며 그래서 바로 거룩함이다. 이러한 거룩함은 스스로 오직 시인의 고요함을 통하여 주어지며, 그 안에서 인간은 각각의 시간에 “가장 외적인 위험을 시야에 담고” 있을 수 있게 된다.
현전성의 형이상학이라는 하이데거의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과 연관하여 신 개념은 어떠한 경우에도 존재와 동일시 되어서는 아니된다. 횔덜린의 시작해명에서의 “신”이라는 개념은 전기의 (예를 들어 <<존재와 시간>>) 개념에 따라서 이해될 수는 없다. 비록 하이데거가 명시적으로 정의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시작해명에서 신이 존재처럼 이해되는 인상은 뚜렷이 주어진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분열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존재는 그의 형이상학 비판의 단계에서는 결코 신도 아니며 최고의 존재자도 아닌 것이다. 신이란 개념은 후기 하이데거에 있어서 결코 초기의 개념과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차이는 그의 ‘근원철학’ 안에 그 원인이 내재되어 있다고 하겠다. 만일 그가 시작해명에서 신 내지는 신이 떠나간 시대를 이야기 하고 있다면, 이러한 문맥 안에서 신이 떠나간 시대는 존재가 망각된 시대와 동동한 의미를 지닌다. 비록 그가 이것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기서 신이란 개념은 현전성의 형이상학에서 근원성의 철학에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개념이다. 후기의 시작해명 안에서의 신개념은 이러한 ‘존재망각성의 시대’와 신상실의 시대와의 연관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신이 떠나가 버린 시대를 고향상실의 시대, 존재 망각이 지배하는 시대, 몰아세움이란 기술의 위험이 지배하는 시대로 이해한다. 하이데거가 시작에 대한 해석이외 다른 어느 곳에서도 신을 존재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지 않았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의 신개념에는 이렇게 하나의 변환점들이 내재한다. 이러한 개념의 변화는 무엇보다도 시작해명을 위하여 명백히 주시하여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의 시작해명을 결코 진정하게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하이데거는 근원철학과 연관지워 신개념을 더 이상 논구하지는 않는다. 이로서 우리는 그의 후기 작품들의 (특히 횔덜린의 시작해명들) 표현 안에 내재한 전반적인 비일관성과 모순들을 보게된다. 전혀 명확한 개념 분류나, 규정없이 신의 개념을 시작 해명의 전과 후와의 연관하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하이데거는 두 개의 다른 개념을 하나의 같은 이름으로 혼재하여 쓰고 있다.
II. “형이상학의 초극”이란 관점에서 본 “근원에로의 전향” 과 아도르노의 미학이론
§1. “근원”과 “한걸음-물러섬”의 성격
사유는 “가까이-감”에의 도상에 있다. 그 말은 “존재의 이웃에로 가는” 길 위에 있다는 뜻이다. 근원에로 가까이 감을 하이데거는 횔덜린의 술어와 연관지워 “귀향”이라 파악한다. “고향 자체는 가까이 거주한다. 고향은 가정(중심지)와 근원에로 다가가는 장소이다. ... 고향의 가장 고유하고 좋은 점은 오로지 이같은 근원에 다가 간다는데 있다. ... 귀향은 근원 가까이에로 돌아감이다.”(<<횔덜린의 시작>> 23쪽) 근원에로의 도착은 고향에 돌아옴으로서 존재의 진리를 개시하는 바로 그 과정이다. 인간에게 우선적으로 은닉되어 있는 근원에로 가까이 감을 하이데거는 하나의 비밀로 보고 있다. 오직 시인만이 이러한 근원에 가까이 살고 있다: “그가 멀리를 가르킴으로, 거룩함의 도래에 가까이 있다.”
존재는 먼저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존재하게끔 한다. 이러한 성격을 하이데거는 “존재자를 존재자로 그리고 그것 >자체<로서 풀어놓음이며 열어놓음으로 도약하여 존재하게 함”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존재자를 “바로 그것으로 이끌어-냄(ent-springen)”이다. “존재는 근원”이라는 명제를 하이데거는 존재자를 “스스로-근거에-뛰어다다름(das Sich-dem-Grund-erspringen)”으로 규정한다. “근원”이라는 말은 그래서 “하나의 사실이 무엇에서부터 무엇을 통하여, 그것이 무엇으로 그리고 어떻게 있는지”의 근원이며, 이를 철학적으로 규정하면 바로 현존과 본질을 말한다. 예술작품의 근원은 그래서 “그의 본질의 유래”를 말하는 것이다.(<<예술 작품>>/숲길 7) 예술의 본질유래를 하이데거는 “진리에-이끌어내게-함(der-Wahrheit-entspringenlassen)”이라 규정한다.
사유가 스스로 “존재의 진리”에서 탈취되어 나오는 한, 하이데거의 “근거”에 대한 성찰은 존재역사적 동기를 지닌다. 근거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하이데거는 “존재(Seyn)자체의 진리에 관한 질문”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근거 문제의 “가까이”(Nähe)에 다다르게 된다. 이 “가까이”는 “근거-떨어짐(Ab-Grund)에서 “실제적인 도약”을 통하여 온전히 성취된다.. “근원적-도약(Ur-Sprung)”이란 처음의 도약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모든 새로운 도약이다. 실제적인 도약은 “지반-확립”으로서의 설립을 의미한다. 인간은 “존재의 밝힘과 존재의 진리에서” 오직 “근거-떨어짐으로서의 진리”에로 향하는 “가까이”에로 도달할 수 있다. “존재는 존재로서 근거-상실에 머물러있다. 근거는, 즉 그것은 먼저 근거지우는 근거로서, 존재에서부터 탈취되며 [거기에서] 떨어져 머무르게된다. 존재는: 근거-떨어짐이다.”(<<파르메니데스>> 223) 존재이해와의 연관 안에서 하이데거는 근거를 하나의 “존재 일반의 초월적인 본질특성”이라 명명한다. 이것은 존재의 본질에 속하여 있다: 왜냐하면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는 세계기투적 정태성의 근거로서 오직 초월성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유로서의 인간 실존은 이로써 “근거율의 근원”(<<근거의 본질>>/이정표 170)으로 조망되게된다. 이러한 특성을 하이데거는 존재진리의 “가까이”와의 연관 안에서 성취시켜가고 있다.
사유의 근원은 개시성 일반이다. “우리가 진리의 본질을 근원적으로 소유할수록 근거의 문제는 더욱더 절박하게 제시되어진다. 이러한 의미연관에서 [사유의] 특성은 하나의 도약이다. 즉 그것은 진리와 존재의 본질을 밝게 비추이는” (<<근거의 본질>>/이정표 169) 도약이다. 존재는 사유와 마주한다. 존재는 사유를 도약에로 이끌어간다. 이에 따라서 사유는 존재 자체와 상응하여 존재 자체에서 발원한다. “사유는 자기 자신을 발생하는 부름에서 체험하기에, 도약으로서의 사유는 이제 존재의 현성을 생기로서 개시한다”(<<철학에의 기여>> 249) 이러한 도약을 하이데거는 자유와 연관지워 던져진 기투로 묘사한다. 도약으로서의 사유는 “존재진리의 기투를 실행함”으로 이해된다.
근원의 성격은 “도약”이라는 관점에서 “시원(Anfang)”으로 불리워진다. “시원”이라는 말과 연관지워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을 “시원에서부터 멀어”지는 과정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형이상학의 진행은 어느 때인가는 [시원에로] 되돌아감을 불가피하게 하며, 시원에의회상을 시급히 필요하게 한다.” 이러한 시원에서부터 이루어지는 진행 안에서 존재는 자신을 존재자성으로 떨어트려 나타내며, 그럼으로써 “시원의 시원성”은 감추어지게 된다. 근원의 사유는 이렇게 하이데거의 전체적 사유의 도정에 주도적 동기로 작용하고 있다. “모아 보냄의 시원은 가장 위대한 것이다. 그것은 도래하는 모든 것을 특별하게 주재한다.”(<<예술과 숙고>> 12) 하이데거의 근원에 대한 정의에 따라 예술은 “작품 안에서의 존재자의 진리를 정립하면서 보존함”(<<예술작품>>/숲길 64)으로 뛰어다다르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근원”이란 “무엇에 뛰어다다름, 즉 정초하는 도약 안에 본질유래에서부터 존재에로 이끌어감”(<<예술 작품>>/숲길 64)을 의미한다. 이러한 근원적-도약은 시원적 도약으로서 첫번째의 차이지움으로 일컬어진다. 근원은 이제 분리의 근원이다. 세계는 예술의 근원적 도약 안에서 대지에서부터 뛰어오른다. 대지에서의 세계의 균열(Riß)은 예술작품의 근원이다. 이 균열은 근원적으로 시작(詩作) 안에서 스스로 발생한다. 예술은 예술작품 안에서의 시원적인 차이지움이다. 하이데거는 “근원적-도약”이라는 말로 “진리의 본질에서부터 밖으로”라는 격률을 지시하고 있다. 근원에서부터 사유된 진리는 인간이 학문과 인식의 특질에 반하는 선과 미를 구분하기 위한 특정한 성격의 진리, “일반적으로 진리란 이름으로 이해되며, 인식과 학문이란 이름으로” 이해되는 진리개념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러한 진리개념은 나아가 “이론적이지 아니한 행위의 가치”에 주어진 이름으로 이해된다. 하이데거 철학은 이러한 관점에서 철학의 다른 단계에서의 위상과 구별하기 위하여, 형이상학 이후의 특징을 지니는 근원철학이라 이름할 수 있다.
근원적-도약이라는 말과 연관지워 “한걸음-물러섬 (Schritt-zurück)”이란 개념은 하이데거 사유의 마지막 단계에서 중심이 되는 요체이다. 이 두 개념은 같은 존재론적 의미에서 형성된 것으로서 하이데거의 시작적 언어를 지시하고 있다. “한걸음-물러섬”은 인간을 근원의 가까이로 이끌어간다. 그리고 이와함께 인간은 “존재와 인간의 성좌(Konstellation)”(<<동일성과 차이>> 25) 안에 머물게된다. “한걸음-물러섬”이란 말은 근원에 대한 기억으로서의 회상의 한 방식이다. 이로서 하이데거의 사유의 길은 진리의 성좌에서 예술을 최초의 가능성으로서 나타내며, 그리고 지속적인 동반자로 허용한다. 하이데거의 근원에 대한 은밀한 사유의 길은 이제 “한걸음-물러섬”의 실행이며, 그리고 그것은 바로 “차이에 대한 망각성에서부터” 떨어져 물러섬이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철학에서부터 존재(Seyn)의 사유에로” 한걸음-다가섬이다. 인간은 우리가 “사유의 유래에서부터 고향처럼 느끼게 될 때”(<<사유의 경험>> 82) 한걸음 물러섬을 과감히 수행할 수 있게 된다.
“한걸음-물러섬”이라는 용어는 “서구 사유의 역사와 함께 하는 우리의 대화의 특성(<<동일성과 차이>> 40)”에 관계되어 있다. “한걸음-돌아섬”이란 “오직 표상하는, 즉 설명하는 사고에서부터 회상하는 사유”로 나아감이다. 하나의 사유에서 다른 사유에로 “한걸음-돌아섬”은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단순한 관점의 변화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존재역사에로의 기억함”으로 뛰어오름(Überspringen) 이다. 이러한 기억은 존재에서부터 존재의 역사에로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시원”안에로의 선-사유이며, “존재 자체에서 생기함”이다. “한걸음-돌아섬”은 사유되지 아니함에서, 그리고 차이 그 자체에서 “다가가 사유함”(Zudenken)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는 “시원적으로 드러난 차이에 속하는”(<<동일성과 차이 41>>) 은닉으로서의 차이의 망각에 관한 사유이다. “한걸음-돌아섬을 통하여 우리는 사유의 사태를, 즉 차이로서의 존재를 마주 서있음에로 허용한다. 이러한 마주 서있음은 전적으로 대상 없이 존립할 수 있는 것이다.”(<<동일성과 차이>> 55-56)
“한걸음-돌아섬”이라는 술어와 연관하여 우리는 하이데거의 전회를 하나의 “넘어감”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것은 <<존재와 시간>>의 단계에서 “던져진 기투”로서의 현존재가 <<휴머니즘의 편지>>에서 “존재의 기투 안에서의 기투하는 것”(<<휴머니즘의 편지>>/이정표 344)으로 변화된 인간 이해의 이월이다. 예술작품의 근원에 대한 질문 내지는 시작의 근원에 대한 질문의 동기는 이제 이러한 사유와 연관지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존재를 주체성에서가 아니라” 하나의 “모아보냄”에서 부터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넘어감이란 의미에서 전회는 존재자체의 생기라는 측면에서 그 의미가 올바르게 드러난다.
§2. 진리의 차이로서의 존재의 생기
작용과 밝힘으로서의 존재는 존재자가 무에서부터 하나의 존재자로서 탈취되는 것을 통하여 생기로 이해된다. 이것은 존재자의 존재에서의 차이의 진행이며, 생기로서의 존재는 존재의 존재자에의 차이의 개시성이다. 차이는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는 이름이다. 존재론적 차이와 연관하여 하이데거는 존재자로서의 구체적인 시작품과 그의 존재를 이러한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서의 “시작”(詩作)으로 이해하여 구별하고 있다. 시작의 존재는 밝힘과 감추임사이의 거울놀이의 진리생성이라는 방식에 따라 하나의 구체적인 시작품 안에서 이루어 진다. 이러한 시작의 존재와 구체적 시작품 사이의 시작적 차이는 존재론적 차이의 지평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또한 예술작품 안에서, 시작 안에서 하나의 특출한 방식으로 완성된다. 존재는 차이의 차이지워진 것이 아니라 차이자체이다. 이러한 차이자체로 이해된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이후적 도식은 시작의 언어성 안에서 가장 의미깊게 이해할 수가 있다. 존재는 포에시적 언어의 작용 안에서 차이로서 자신을 드러내며 그 의미는 표현됨으로 다가오며, 이로서 그 흔적은 명료화되는 것이다. 시작의 언어성 안에서 차이는 모든 의미의 동일성에 대한 근원으로서 드러나게된다. 이제 존재는 존재자의 근원에 대한 차이로서 이해되며, 이로서 존재는 그대로 존재함이며 또한 없는 것이 아닌 것으로 있음이다. 존재의 개시성으로서 존재론적 차이는 현존재의 근본구조 안에서-즉 “DA”(現)의 구조 안에서 주제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존재의 이러한 개현성은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재론적으로 차이를 나타내는, 즉 그때마다의 존재자를 향한 차이-드러냄의 상호작용의 과정이다. 다른 한편 이러한 존재론적 차이는 존재자와 존재사이의 무로서 파악할 수 있다. 타자로 향한 개시성은 존재를 무로서 은닉하는 것이다. 즉 존재론적 차이는 무로서의 존재의 본질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존재는 하이데거에서 타자를 향한 차이 드러냄에서부터 사유된다. 사유의 기투는 이러한 무 안에서 존재가 차이화하는 개시성이다. 이와 연관하여 바티모는 하이데거에서의 근원을 향한 접근을 차이를 향한 접근으로 개념짓는다. 단순히 현전하는 존재자에서부터 기인하는 차이 안에서 근원을 향한 접근은 바티모의 이해에 따르면 세계의 지평을 형성하는 것, 내지는 그 지평을 규정하는 것이다. 세계내적인 차이화는 “세계의 타자”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존재함을 나타내 보이는 과정이다. 존재는 이제 “동일함에서부터의 차이지움으로, 즉 사이를 가름”으로 특징지워진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존재를 “타자임”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존재자의 차이로서의 존재구조에 대한 하이데거의 이해에 따르면 존재는 “존재자에서부터의 자신의 차이지움 안에서 하나의 에포케(epoche)의 원리”로 규정된다. 에포케로서의 존재의 원리가 의미하는 바는 본질로 이해된 세계와 존재에 대한 지양과 포기를 의미한다. 이렇게 이해되는 존재란 “모든 가능한 변화의 원리, 새로운 것에서 스스로-생기하는 원리, 새로운 에포케적 개시성의 가능성”으로 간주된다. 개시성의 과정으로서의 차이지움은 존재의 진리가 표현되는 존재론적 지평이다. 이러한 진행은 예술작품에 대한 숙고 안에서 “세계드러내세움”(Weltaufstellen)과 “대지일으켜세움(Erdeherstellen)”사이의 투쟁으로 표상된다. 작품 안에서 존재론적 차이는 아주 고유하게, 즉 그 이전에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방식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예술은 하나의 특출한 존재역사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세계와 대지와의 투쟁으로서의 예술의 성격에서 예술은 진리 생성을 차이로서 작품 안에로 형상화시키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존재는 은닉과 밝힘사이의 차이로서 이러한 투쟁의 의미연관 안에서 사유되었다. 예술작품은 이러한 “차이”의 관점에서 따라서 “어둠을 통한 밝음과 밝음을 통한 어둠을 식별할 수 있도록 허용함”이라는 차이지움의 지평이다. 플룸페는 이 특성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존재자의 존재는 결코 ‘비은폐성 자체의 존재도, 은닉성 자체의 존재도 아니다. 그것은 전체적인 투명성도 아니며, 전체적인 불투명도 아니다. 존재는 존재자에서 감추임과 드러남을 동시에 생겨나게하는 차이 바로 그것이다.” 차이에서 고찰할 때 작품의 실제성은 하나의 차이-있음-허용(Differenz-sein-lassen)이다. 즉 이것은 하나의 “균열”(Riß)이다. 이러한 균열 내지는 투쟁에서 다른 존재자들은 차이의 형상화로서 생겨나게 된다. 예술의 이러한 차이의 형상화는 탁월하게 시작으로 드러나 보여지게 된다. 이로서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을 플룸페는 “일상적이며 포에시적인 세계관점에서의 차이의 첨예화”라고 특징지운다. 이러한 첨예화는 특히 언어의 차이에서 명백히 드러나게된다. 진리의 변형 과정으로서 작품의 이러한 역동은 존재의 모아보냄이라는 의미에서 차이화의 변화 역정으로 이해된다.
존재의 존재론적 차이는 진리의 차이로, 즉 존재적 진리와 존재론적 진리의 차이로 연관지워 이해할 수 있다. 존재망각성은 이제 정확히 “진리의 차이망각성”(<<동일성과 차이>> 46이하)을 의미한다. 근본적인 진리문제성은 하이데거에 있어서 이러한 존재적이며 존재론적인 진리의 차이지움이다. 존재의미에 대한 질문은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차이의 의미에 대하여 묻는 질문이기에, 이로서 우리는 진리란 이제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를 지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해하게된다. 하이데거의 “비진리로서의 진리”라는 진리구조는 이러한 차이지움의 특성에서 자리매김 된다. 진리의 근본구조는 이제 비은폐성과 은폐성 사이의 구조적인 차이화이다. 이러한 차이는 바로 “항상 모든 존재자” 안에서 “존재는 자신을 드러내며 동시에 은닉한다”는 방식으로 활동하는 가운데 정립되게 된다. 존재의 진리는 하이데거적 사유에 의거하여 명확히 표현하면, 단순히 “비은폐성”에 근거할 뿐만 아니라, 역동적으로 존재의 존재자에 대한 “차이지움”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존재는 비은폐성에로 다가오며,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은폐성 안에로, 바로 이러한 차이라는 관점에서 들어 올려진다. 이 말은 차이에서부터 존재의 진리는 하나의 역동적인 개현의 진행으로, 동시에 “비-진리”로 자신을 이해하게한다. 존재의 비은폐와 은닉사이의 역동적 움직임 안에서 진리 역시 존재의 감추이며 드러내는 진행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개시성의 대당과정이며, 밝힘과 은닉의 차이지움인 것이다. 예술의 비추임은 하이데거에 있어서 결코 절대 정신의 현시가 아니다. 그것은 차리리 존재론적 차이의 역동인 것이다. 예술안에서 드러나는 차이는 밝힘과 은닉의 차이로서 사유에게는 처리불가능한(Unverfügbarkeit) 것이다. “예술”에 대한 하이데거의 철학은 이로서 바로 “존재-차이를 허용함”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이것은 바로 하이데거에서는 “존재자의 존재가 차이로서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특출한 장(場)을 선행적으로 근거지우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도르노 역시 존재를 동일한 존재자의 현시로 이해하지 아니하고 마치 하이데거가 언급하였듯이 “오히려 모든 존재자에로의 차이 안에 활동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차이는 “탈은폐하고 은닉하는 중재(Austrag) 양자의 건너옴과 도래의 차이-지움”(<<동일성과 차이>> 57) 이다. 사유의 사태는 여기서 인간에게 차이의 길을 나타내 보이는, 즉 선행적인 “차이로서의 차이”(<<동일성과 차이>> 37)로 이해된다.
§3. 존재론적 차이로서의 진리의 본질: 하이데거와 아도르노
하이데거의 아도르노에 대한 일방적인 무시와 아도르노의 하이데거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때문에 아도르노와 하이데거를 철학적인 대화에로 이끌어 온다는 것은 많은 문제를 안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주장이라는 관점에 의하여 이 두 사유에서 우리는 최소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보러(Bohrer)는 아도르노의 미학이 지니는 하이데거의 예술철학과의 연관을 비동일성이라는 개념에 따라서 체계적으로 개념짓는다. 여기서는 진리문제와 연관하여 아도르노의 미학이론을 살펴보려 한다.
기술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예술은 기술의 위험 안에서 구원의 힘으로 제시될 수 있다. 이점에서 우리는 하이데거의 예술철학과 아도르노의 “미학 이론”의 일치점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사유의 출발점은 미학적인 것에 의한 미학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오히려 기술의 힘에 의하여 증가하는 위험에 근거하고 있다. 그 위협이란 “항상 더욱더 인식의 영역과 진리영역을 잘못 이끌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뿐만 아니라 아도르노 역시 원칙적으로 기술의 간계를 거부하고 있다. 하이데거 사유와의 연결점으로서 특히 합리성비판과 그 지배성의 비판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에 잘 나타나 있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비판과 연결지어 예술의 과제를 확고히 한다. 여기서는 진리주장이 관건이다. 아도르노에게서 예술성은 “밝히는 진리의 기획(lichtendes Entwerfen der Wahrheit)”이다. 지식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비동일성을 뒤섞여 놓으려는 진리에 대한 위협, 즉 차이성의 포기에 반대하여, 아도르노는 예술을 하나의 “기억의 여신”으로, 즉 “기억하는 숭고함”, “마법적인 이전 세계에서의 계산할 수 없음을”, 오늘날 “인간에게 제어 가능하며 계산할 수 있는 세계로 만들려는 시도에 반하여 예술은 이러한 실수에 대한 하나의 교정”으로 역할매김 된다. “예술 작품의 진리내용은 개개의 난해한 수수께끼에 대한 객관적인 해명이다.” 아도르노에 의하면 예술작품의 진리내용은 “아무것도 직접적으로 동일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형이상학적 오류와 기술의 잘못”에 대한 “확실한 부정없이는 예술 작품에서의 진리란 존재치 않는” 것이다. 아도르노에 의하면 미학은 오늘날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여야 한다. 철학과 예술은 그들의 진리내용에 있어서 서로 수렴된다. 즉 이 말은 “스스로 발전하며 전개되는 예술작품의 진리는 철학적 개념의 진리와는 다른 어떠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예술의 수수께끼같은 형상 안에서 “진리의 드러남”에 주목하고 있다.
패촐트(Paetzold)는, 아드르노의 “미학 이론”은 방법론적으로 “독일 관념론의 범주적 그물망”을 이용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아도르노의 예술철학은 진리발생과 아름다움의 이데아로서의 진리와 자유에 연관지워져 파악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에서 고찰해보면 아도르노의 미학적 구상은 여전히 전통적 형이상학의 형상 안에 머물러 있다. 왜냐하면 아도르노는 진리의 구조를 동일성과 차이성의 근원적 구별보다는, 그것들의 통일성 안에서 사유하기 때문이다. 그의 예술철학은 따라서 여전히 근대적 사유틀 안에 놓여있다고 하겠다. 그럼으로 보러는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적 이론은 후-아도르노적 미학이론 내지는 탈근대적 문법학(Grammatology) 안에서 타당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도르노에게 있어서 예술작품은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예술작품이 무엇을 말한다 함과, 동일한 과정에서 무엇을 은닉한다는 것은, 언어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수수께끼의 성격을 지닌다.” 예술작품은 진리내용을 은닉하기 때문에, 작품의 진리주장은 개념에로 이끌려질 수가 없다. 그보다는 이러한 진리내용은 “항상 새롭게 거듭 사유에게 새로운 동기로서 주어진다.” 아도르노에게 있어서 예술작품은 진리내용이 결코 무화되지 아니하는, 하나의 체험 지평이다. “모든 예술작품, 꺼리길 것 없는 부정성의 작품은 침묵중에 말하며(non confundar)”, 예술은 “비존재자”를 드러낸다. 그것은 아도르노에 따르면 “침묵하는 약속(promesse du bohheur)”이다. 올바른 예술을 아도르노는 하나의 언어상실성으로 특정짓는다. 이러한 언어 상실의 순간은 “의미있는 시작(詩作) 보다 우위를” 지닌다. “부정적 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참다운 진리에의 관심”을 “개념상실성[에의 관심], 개개의것과 특별한 것”에의 관심으로 묘사한다. 이로서 아도르노는 예술을 “개념상실의 인식론”으로 이해한다. “작품들은 마치 동화에서 요정들 처럼 말한다: 너는 무한한 것을 원하지. 그래 그것은 네게 이루어질 수 있어. 그러나 알려지지않게 말이다. 개념적인 인식론의 참됨은 감추어져 있어. 인식론은 그 참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아. [하지만] 예술인 인식론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그렇지만 그가 가진 참된 것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야.” 이러한 감추어진 근원을 우리는 아도르노와 함께, “자연, 비동일성”으로, 혹은 하이데거에서와 함께 “존재, 탈은폐성 내지는 존재의 진리”로 묘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철학자가 비판하는 것, 즉 아도르노가 “합리성”이란 술어로 표상하는 것이나 하이데거의 “표상하는 사유”내지는 기술의 “몰아세움(Gestell)”은 결코 동일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도르노는 이 합리성을 그의 저서 “미학 이론”에서 아주 철저히 파괴하고 있다. 예술은 이러한 파괴를 “비동일성”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나타내고 있다. 예술작품은 “작품이 하나의 검게 감추어진 절대적인 것의 ‘거울문자’에로, 화해하는 거울 문자에로” 향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진리내용 소유하게 된다. 진리내용은 예술의 표현적 성격에서 결코 분리되지 아니한다.
III. “사유와 시작(詩作)”의 진리 - 초기낭만주의의 예술철학과 하이데거의 시작개념
§1. 하이데거의 “사유와 시작” 논의
생기의 본질은 존재의 역동적인 개시성이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진리의 본질”로 표현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모아보냄의 두가지 양식을 언급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존재진리의 양면적 근원: 사유와 시작이 일깨워진다. 인간의 특출한 행위는 존재생기의 선행적인 역동에 놓여 있다. 그것을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존재의 진리를 향하는 본질적인 관계라 이름한다. 이것은 바로 존재자가 존재에로 도래하는 “개방의 자기-개시”이며, 그 성격은 정초하는 생기로서 특징지워진다. 정초하는 생기는 하나의 언어의 생기이며, 그의 터전은 바로 시작(Dichtung)이다. “사유와 시작”의 진리는 이러한 의미연관 안에서 바로 “존재-하게함”(Sein-Lassen)을 의미한다. 이로써 하이데거는 시인의 사유를 “하나의 근원적으로 기획하는 정초함” (<<게르마니엔과 라인강>>전집 226)이라 성격지운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시작에 대한 숙고의 결정적 동기는 전통적 형이상학의 해체와 존재의미 일반에 대한 추구라는 사유동기에서 이해된다.
사유는 시인의 작품을 위한 “앞마당(선행적 장소)”을 터 닦는 행위이다. 횔덜린의 시작과 연관지워 하이데거는 사유와 시작 사이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발견한다. 시인의 작업은 사유의 말함과 동일한 유래를 지니고 있다. “사유와 시작”은 언어의 영역 안에서 하나의 ‘모아들이는 이름 붙임’ 안에로 스스로를 배타적으로 변화시켜간다: “존재의 소리에 순종하는 사유는 그로부터 존재의 진리가 언어에로 다가옴 안에서 [이러한 모아들이는] 말을 추구하고 있다.”(<<형이상학이란-후기>>/이정표 309) 사유와 시작은 하나의 특별한 방식으로 동근원적이다. 그들의 공통의 뿌리는 “언어의 본질”이다. 하이데거는 “사유와 시작”이라는 술어를 “철학과 포에시”의 동의어로 연관지워 이해한다. “절대 <사유>는 철학이며, 시작의 절대로서의 시작함은 바로 <포에시>이다.”(<<니체. 사유와 시작>> 136) 이로서 사유자와 시인은 “언어 안에서의 단어의 고유한 보존자”(<<니체. 사유와 시작>> 94)로서 이해된다. 이 사유의 “말함”은 “존재-하게함”이다. “사유와 시작”은 “의미적 단어”라는 하나의 공통의 뿌리를 가진다. 바꾸어 말하여 “존재의 본질이 어디에서 언어에로 다가오는지”(<<니체. 사유와 시작>> 94)를 묘사하는 것이다. “사유자와 시인은 의미적인 말함이며 말하는 의미규정이다”. 이러한 의미연관 안에서 노발리스 (Novalis)는 포에시가 그 자체로 오직 자의적으로 이 세계를 형성한다는 사실 때문에 “사유와 시작”은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개념 규정하고 있다.
존재의 근원적 말함은 사유의 조건이며 이로서 사유적인 시작(詩作)이 된다. 사유는 비록 그 자체 시작하지는 아니하지만 시작과의 공속적 뿌리에 근거하여 시작 가까이 머물러 있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인간의 필연적인 과제를 “사유자에게 가까이 사유하며, 시인에게 가까이 시작함”에 놓여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니체. 사유와 시작>> 104) 이러한 공통점은 학문과는 전적으로 다른 차원에 놓여있다. 학문은 “이성(ratio)이라는 사태, 즉 넓은 의미에서 계산하는 이성”에 대한 사태이며, 그것은 “이성 안에 그의 더 높은 판단의 척도”를 지니게 된다. “사유와 시작”이라는 술어는 진리주장과의 연관아래에서 유효성을 지닌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진리와 오류”의 구별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사유를 “초월 학문(Überwissenschaft)”이라 명명한다. 왜냐하면 사유는 “다른 한편 시작에 가까이 있으므로 학문에서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사유란>> 155) 근대의 주관-객관-도식에 반대하여 시인은 유일하게 “전체적 자연의 비대상성”을 보고 있다. 이로서 모든 시작함은 넓은 의미에서 포에시적 본질로, 좁은 의미에서는 하나의 사유로 그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하여 사유의 시작적인 본질은 존재진리의 역동을 보존한다: “존재의 사유는 시작함의 근원적인 양식이다. 이러한 사유 안에서 무엇보다도 모든 것에 앞서서 언어가 언어에로, 즉 언어의 본질 안에로 다가온다. 사유함은 존재의 진리의 기술(Diktat)이며, 사유함은 근원적인 기술함이다. 사유함은 하나의 근원적 시작이며, 그러한 시작은 모든 포에시보다 앞서, 예술의 시작적인 것에 앞서 다가온다. 그것은 이러한 예술이 언어의 영역 안에서 작품 안에로 다가오는 한 이루어진다.”(<<숲길>> 303)
“가까이 감에의 가까이라는 비밀”을 말하기 위하여 인간은 시작함을 통하여 근원에 가까이 다가간다. 하이데거는 시작함이란 “단어 안에서 가까이 감의 비밀이 친밀하게 됨”(<<횔덜린의 시작>> 28)을 보호 하는 것이라 규정한다. 이러한 근거에서 언어작품으로서의 시작 안에서 그는 근원에로의 특출한 가까이를 보고있다. 시인과 사유자는 인간에게 존재를 이해하게 하는 중개자이다. 그들은 사유와 시작을 통하여 “세계-이끌어내어옴”을 언어로 표현한다. 시인의 소명은 하이데거에 의하면 “아름다움의 기획 안에서 아름다움을 나타나게 하는 것”(<<횔덜린의 시작>> 135)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니체를 마지막 사유자로 이해한다. 즉 그는 “시인철학자”이며 횔덜린은 “철학에로의 가까이를 통하여” 그에 “더불어 힘입고 있는” 시인중의 시인이다. 하이데거는 “사유자로서의 시인”인 니체와 “시인으로서의 사유자”인 횔덜린을 근원에서 변화된 마주하는 두 축으로 이해하고 있다.
“시작함과 사유함”의 이러한 모든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사유와 시작”은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유사한 것은 오직 타자로서 유사한 것일 뿐이다. 사유함과 시작함은 그러나 가장 풍부하게 단어의 배려함 안에서 비슷한 것이다. 그것은 둘다 동시적으로 가장 넓은 의미에서 그들의 본질에 따라서 분리된 것”(<<형이상학이란-후기>>/이정표 309쪽)으로서 유사성을 지닌다. 사유함은 예술과 시작들과 함께 새로운 길을 발견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다. 시작함과 사유함은 “공통적으로 이러한 넘어감을 다른 시간 안에서 찾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본질에 따라서 분리된 채로 존재한다. 여기서는 “예술은 사유의 자의적인 요구”라는 오해를 불식시켜야 한다. 예술은 “오히려 시원적인 것을 존재의 역사 안에서 회상하는 사유로” 존재하려는 탁월한 과제를 지닌다. 이 둘은 같은 근원에서부터 유래하지만 각기 다른 터전으로 방향지워졌다. “사유자는 존재를 말한다. 시인은 성스러움을 명명한다”. (<<형이상학이란-후기>>/이정표 309) 여기서 야메는 시작과 사유의 공통의, 또한 동시에 차이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철학자가 말해서는 안되는 것을 시인은 시작한다.” 마르크스(W. Marx)는 이것을 이러한 말로 요약하고 있다: 존재역사적 사유가 “존재의 단어” 안에로 다가온 것이 바로 시작이다. 이러한 “존재의 단어”안에 거주하는 사유, 즉 로고스(Logos)의 사유는 시원적으로 “포에시적”이다. 이러한 “존재의 단어”가 지니는 포에시적 성격은 역시 존재의 창조적 의미를 발견한다. 근거지움이 사유에게로 병렬화 되듯이 창조하며 건립함은 시작에게로 방향지워진다.
시작함은 하나의 사유적 성취라는 동근원성에서부터 질문이 제기된다: 어떠한 근거에서부터 시작하는 사유의 근거를 설정할 수 있는가? 이 둘은 서로 어떠한 관계를 지니는가? 만일 “사유와 시작”이 그 근거에서 하나의 공통의 뿌리를 지닌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철학 안에서 따로이 시인을 필요로 하는가? 이 모든 질문에도 불구하고 사유와 시작 사이의 본질적 연관이나, 그들 사이의 대화에 대하여 하이데거는 결코 충분하거나 언제나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근원적 사유와 시작이라는 근원적 말함 안에 존재하는 본질적 성격은 하이데거가 스스로 인정하듯이 그렇게 충분히 사유되지도, 넉넉히 해명되지도 않았다. 시작과 사유는 서로 분리된 산 안에서 살고 있다. 이들이 지니는 차이성의 특성 역시 하이데거의 사유 안에서 아직도 충분하게 개시되지 않고 있다. 그에 따라서 시작과 사유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차이도 정확하고 의미깊게 숙고되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존재 사유에 대한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2. 예술의 진리와 이성의 진리
형이상학의 극복에 대한 하이데거의 사유는 근거를 향한 존재역사적 전회로 이해된다. 이러한 전회의 성격은 “넘겨줌”(Überlieferung)에 대한 극복으로 성취되어야 한다. 그것은 “서구의 사유에게 자신을 ‘존재’라는 이름으로 전래된”(<<동일성과 차이>> 53) 사유의 사태에서의 “넘겨줌”을 의미한다. “넘겨줌”이란 술어의 성격은 하이데거는 전통의 전달자라는 의미와 연관하여 창조하는 발생으로 생기하는 언어의 창출로 이해하려 한다. 이러한 특성은 “건립하는 생기들” 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적 개방성 안에 서있다. “사유와 시작”은 “일정한 양식으로 항상 이미 존재하였지만 또한 동시에 아직도 건립되지 아니한 그 곳에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러한 “되돌아감”은 바로 근원에서의 “넘겨줌”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그것은 이러한 전체적 맥락에서 “근원”에 대한 예술의 철학을 의미한다. 이러한 근원은 바로 진리의 장소, 지평이다. 따라서 되돌아 이루어감은 “형이상학의 초극에 대한 터전”(<<이정표>> 416-417)으로의 전향으로 이해된다.
예술의 위상은 진리질문의 영역 안에서 해석학적 진리체험의 중요한 지평이다. 예술의 진리 내지는 예술에서의 진리체험은 특히 가다머(Gadamer)의 해석학적 진리개념 일반의 토대로 제시되며, 미학적 의식과 학문 인식은 진리주장이라는 공동의 동기 안에 각인지워져 있다. “예술작품은 실제로 구두라는 도구가 무엇인지 알려 주었다”(<<예술작품>>/숲길 24)라는 문장은 결코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구두도구”에 대한 하나의 학문적으로 완성된 설명을 제시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작품 안에 정립된 진리는 결코 인식론적 진리나, 학적인 진리가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제 예술의 의미는 시작적 진리라 이름하여진다. 여기에서는 존재의 진리가 “근원”과의 관련하에서 거논되고 있다.
예술의 정의와 연관지워서 사유와 시작의 관계는 사유의 “다른 시원”에서부터 진리의 창립이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진리의 창립이란 사유와 시작 안에서 형성된다. 이러한 근원적으로 정초된 존재의 진리는 바로 시작이며, 사유자는 이렇게 개현된 존재자의 존재를 개시한다. “존재의 목자”로서의 인간은 이제 예술진리와의 연관 안에서(특히 후기 하이데거의 사유 안에서) 예술의 진리가 작품 안에서 생성되는 한, “사유자와 시인”으로 나타난다. 사유의 이러한 “자신을 개시하는 그 무엇을 ‘스스로-말하게-허용함’ 이라는 특성에서부터 하이데거는 시작함의 특성을 사유하는 말함으로 기술한다. 사유와 시작함은 결코 이론적-학문적 표상과 언표 안에서 자신을 창조하지는 못한다. 존재의 망각성에서 근원적-시원적 진리로의 전환은 시작과 시원적 사유가 공통으로 지니는 역동적 움직임이다. 학문과 기술의 일면성에 대한 부정과 초월로서의 예술과 시작은 오직 인간적 거주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보증한다. 진리 생성으로서의 존재의 도래는 사유와 시작의 대당적 활동 안에서 완성된다. 인간은 사유에의 길 위에 서있으며, 그는 시작의 단어들을 듣는다. 이로써 인간은 소리없는 존재의 소리를 듣게된다. 사유하는 시작은 “존재의 위상학”이며 그 특성은 “존재본질의 터”이다. 그들은 “존재를 발생하게 하며, 존재의 진리에로 다다”른다. 하이데거의 미학이후의 예술철학은 우리를 이러한 새로운 길로 이끌어간다. 이 길은 사유의 대화를 시작과 함께 진리요구의 관점에서 이끌어가는 길이다. 이러한 진리주장의 길은 “진리요구를 위한 새로운 사유틀”의 설정이며, 이성적 진리이해의 구조가 지니는 일면성에 대한 보완이기도 하다.
§3. 철학으로서의 예술 - 초기낭만주의에서의 예술의 본질
여기서 우리는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이 지니는 성격을 초기낭만주의의 미학과 연관지워 살펴보고자 한다. 이 점에서 초기낭만주의 형이상학의 근본적 사유로 쉘링의 “예술철학”을 인용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그러나 초기 낭만주의에 대한 하이데거의 언급이나 인용없이 이같은 사실을 논증하여야 하는 어려움이 뒤따른다. 프랑크는 진리개념의 성격에 따라서 하이데거의 존재개념이 지니는 “스스로-비은폐함과 스스로-은닉함의 대당적 진행” 안에서 이 두 사유의 비교에 대한 연결점을 찾고 있다. 그 점은 초기 낭만주의의 미학적 기획 안에서도 뚜렷이 파악할 수 있다. 초기 낭만주의의 “절대”(Absolut)개념과 세계 개시성의 근거로서의 하이데거의 진리개념 사이에 병행하는 특성은 “세계개현성”이다. 프랑크는 이렇게 주장한다: “예술안에서 개현되는 것은 우리가 초기 낭만주의 사유 전체에서 부터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최고의 것, 결코 다른 어떤 것으로는 표상될 수 없는 것”이다. “참된 명제가 그 연관을 유지할 수 있는 전체성”으로서의 하이데거의 세계개념에 근거하여 예술의 구조는 “세계-전체의 진리가 작품-안에로-자리잡음”으로 파악할 수 있다. 쉘링은 이러한 진리개념을 결코 정합성의 진리구조란 의미에서 이해하지는 않는다. 예술 작품에 상응하는 진리는, 노발리스의 언명과 같이 “절대적 실제적인 것의 최고의 것”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원형과, 이데아와 그 모사 사이의 연결점없는 일치로서 확증되지는 않는다.
프랑크는 여기서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의 명제들과 초기낭만주의 미학을 종합적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공통된 모토로 클레(Paul Klee)의 “예술은 보이는 것을 되풀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이게끔 만든다” 라는 격률을 인용한다. 여기서 “보이게 만듬”이란 해석의 개념적 작업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는 “세계개시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클레의 격률을 프랑크는 예술에서의 진리의 개현과 동시에 은닉으로 이해하며, 이것은 하이데거의 표현대로 존재의 은닉과 비은폐의 역동이기도 하다. 예술은 “오직 철학자들의 예견 안에서 - 그러므로 오직 가정적으로 - 존재하는 목록들을 제주관적으로 보이게끔” 만든다. 예술적 조망 안에서 “철학적 의식과 그 안에 존립하는 것”은 그러므로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쉘링의 확신에 따르면 이러한 순수 철학적 지향, 즉 예술을 철학적 진리관심의 기능으로 이해하려는 지향은 이성의 신화학이며, 아름다움을 절대성의 언어로 은닉시키는 것이다. 철학은 이제 그것을 되찾아가며, 그에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로 이해된다. 쉘링은 “미학적 행위”를 하나의 “이성의 행위”로 조망한다. “로고스”의 성격은 “창출하는” 활동이라는 관점에서 이중적 가치평가로 체험된다. 즉 세계 개시성과 진리의 작품 안에로의 자리매김이라는 명제구조를 지닌다. 쉘링은 이것을 나아가 “언표하는 말”과 “언표된 말”, 즉 “사태들의 전체성을 드러내는 활동으로서의 세계이해의 근원적인 개시”와 “참된 명제들의 전체 내지는 정태성의 연관항으로서의 구체적 세계의 성질(상태)”에 대한 진술로 이해하고 있다. 노발리스 역시 “창조적인 작품-안에로의-정립”이라는 동일한 의미연관 안에서 진리개념을 조망한다. 프랑크의 서술에 따르면 초기낭만주의 미학은 특히 쉘링에서는, 서구철학의 역사 안에서 처음으로 “미학이 예술을 그 원리적 위치에로 들어올린 최고의 시간”이다. 이러한 이해구조가 의미하는 바는, “의미충만함은 예술작품을 절대성의 표현으로 입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술은 오직 홀로 “인간 실제성의 가장 본질적이며 가장 내재적인 것”을 이끌어 낸다. 쉘링은 이러한 관점에서 예술의 특징을 “철학의 기관(Organon)이며 증서(Document)”로 기술한다. 따라서 예술은 “항상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철학이 외적으로 표상될 수 없는 것을 거듭 새로이 증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행위와 작품활동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며, 자신의 근원적 동일성을 의식적인 행위 안에서 드러내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철학 안에서 “절대적인 것을 찾고 있지만 단지 개체들 만을 발견할 뿐”이라고 노발리스는 말하고 있다. 존재에 관한 사유는 이제 이성의 다른 부분을 포괄하는 형이상학 이후의 형이상학이며, 이에 따라 통합적인 진리로서의 존재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이해된 “다가올 사유는 더 이상 (전통적 의미의) 철학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유는 “형이상학보다 더 근원적으로 사유하기 때문”이라고 하이데거는 <<휴머니즘에 관한 편지>> 마지막 장에서 진술하고 있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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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경험>>: Aus der Erfahrung des Denkens 1951-1969,
<<강연과 논문>>: Vorträge und Aufsätze, Tübingen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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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밖의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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