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현존재의 존재세계, 공간성을 중심으로

나뭇잎숨결 2022. 11. 24. 12:11

 

현존재의 존재세계, 공간성을 중심으로

 

 

성 홍 기*

 

 

[한글 요약]

 

공간성을 문제로 삼는 궁극적인 의도는 물론 공간 그 자체의 파악에 있다. 이를 공간성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존재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공간이 아니라 공간성이기 때문이다. 공간성을 통하여 공간 그 자체에로 점차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또한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공간성이란 다름아닌 존재자가 가지고 있는 공간적 성질이기 때문에 부득불 존재자를 일차적으로 다루어 나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다루어 나갈 것인가. 존재자일반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혹은 특정한 존재자를 선택하여 이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이 또한 문제로 되는 것이다. 우선 존재자일반을 대상으로 하여 공간성을 이끌어 내는 것은 어떤가. 이것은 쉽지만은 않다. 양적으로 존재자일반을 한꺼번에 분석한다는 것 자체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특정한 존재자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어떤가. 여기에는 별 어려움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존재자일반의 분석에서 문제로 된 양에 관한 것은 다소 해소된다 하더라도, 이를 통하여 이끌어 낸 공간성의 질이 문제로 되는 것이다. 즉 특정한 존재자를 통하여 이끌어 낸 공간성이 존재자일반의 공간성에 만족할 만한 해답을 제시한다고 보장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거기서나 여기서나 어려움은 여전히 남아 있게 마련이다.

 

하이데거는 후자의 입장에서 종래의 직관적 인식을 버리고 이해에 따른 해석의 길을 택한다. 그리하여 공간성파악의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척도를 마다하고 현존재의 실존적 척도로 무장한다. 이를 통하여 현존재의 실존적 삶 속에 스며들어 있는 공간의 존재의미를 읽고자 한다. 이것이 곧 직관적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는 길이라 그는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는 어디가지나 현존재 자신의 이해와 해석에 따른 것이지 존재자 일반에 따른 것은 아니다.

 

주제분야 : 현상학적 존재론.

주 제 어 : 현존재, 실존, 관심, 세계성, 공간성.

1. 머리말

 

공간과 공간성은 구별되어야 한다. 공간 그 자체가 공간성은 아니다. 적어도 그 존재방식에 있어서 그러하다. 공간은 그 자체 존재하는 바의 것이나 공간성은 여기에 근거하여 현시되는 바의 것이다. 공간은 존재자를 초월하여 있으나 공간성은 철저히 존재자와 결부되어 있다. 공간이 존재자를 통하여 개시되는 바 그것이 다름아닌 공간성이다.

 

공간성을 문제로 삼는 궁극적인 의도는 물론 공간 그 자체의 파악에 있다. 이를 공간성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존재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공간이 아니라 공간성이기 때문이다. 공간성을 통하여 공간 그 자체에로 점차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위하여 종래의 직관적 인식을 버리고 이해에 따른 해석의 길로 나아간다. 그가 굳히 직관적 인식을 뿌리치고 이해와 해석의 길을 고집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것 역시 직관적 인식과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공간이 아닌 공간성 파악에 머물러 있을 따름인데 말이다. 공간을 직관적으로 인식한 내용과 이에 관한 이해의 완성으로서 해석된 그것이 다른가. 어떻게 다른가. 공간파악의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척도를 마다하고 현존재의 실존적 척도로 무장하는 궁극적인 의도는 무엇인가. 직관적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가. 그리하여 현존재의 실존적 삶 속에 스며들어 있는 공간의 존재의미를 읽고자 하는가. 그러나 의미는 어디까지나 현존재 자신의 이해와 해석에 따른 것이지 존재자 일반에 따른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 공간이 아닌 공간성을 문제로 삼는다. 여기에서 공간성이란 인간현존재에 대해서 존재하는 바 공간에 관한 그 존재의미의 해석이다. 공간이 적어도 인간현존재에게 어떻게 개시되는가를 실존의 일상분석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현존재의 공간성은 그의 존재구조인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의 분석에서 시작된다. 물론 현존재만이 세계­내­존재를 자신의 존재구조로 갖는 것은 아니다. 여타의 존재자들도 이것을 존재구조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오직 현존재의 존재구조로 되는 데에는 세계에 관하여 취하는 현존재의 존재방식에 기인한다. 현존재가 맺는 세계와의 관계는 여타의 존재자들이 맺고 있는 그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현존재가 세계­내­존재를 자신의 존재구조로 갖는다 함은 여타의 존재자들 마냥 세계 안에 단순히 있는 존재자가 아니라 세계와 지속적으로 교재하고 교섭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현존재의 존재방식을 하이데거는 실존(Existenz)이라 부른다. 실존이란 세계에 관한 제반사항을 교섭하고 있는 존재자를 일컬음이다. 이러한 존재구조와 존재방식을 갖는 존재자를 일컬어 하이데거는 現-存在(Da-sein)라 칭하는 것이다.

본 논문은 현존재의 공간성을 그의 세계성과 더불어 다루어 가고자 한다. 그의 공간성은 자신의 세계성과 함께 현존재 자신이 세계에 관하여 취하는 실존적 존재방식을 분석함으로써 이해되어 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관한 이해를 현존재의 분석으로부터 시작해 보자.

2. 현존재 분석

 

그렇다면 현존재분석은 어디로부터 어떠한 방법으로 행해져야 할 것인가. 현존재는 구조적으로 세계­내­존재이기 때문에 구태여 분석의 출발점을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겠다. 즉 세계 밖에서 세계를 대상화하여 이를 구성적으로 인식할 필요는 없다. 세계 내에서 현존재의 일상적 삶을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으면 되는 것이다. 현존재는 처음부터 의식과는 달리 세계와 분리될 수 없는 존재자로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세계 바로 거기에 있다. 즉 현존재는 의식처럼 세계로부터 이탈하여 이로부터 분리되는 데에 만족하는 존재자는 아니며, 그는 더구나 대립을 지향하는 존재방식을 취하는 존재자 또한 아니기 때문이다. 현존재가 현존재다운 점은 다름아닌 세계 내 바로 거기에서 이것과 끊임없이 사귀고 교섭하는 데에서 찾아 볼 수 있겠다. 이것이야말로 현존재의 참모습이다.

 

내­존재는, 현존재가 때로는 갖기도 하고 때로는 갖지 않기도 하며,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갖지 않고도 현존재가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이 아니다. 인간은 기회있을 때마다 자기에게 덧붙이는 세계에 대한 존재관계로 있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그러한 존재관계를 갖는 것도 아니다. 현존재는 우선 이를테면 내­존재를 벗어나 있다가, 이따끔 세계와 관계를 맺으려고 변덕을 부리는 그런 존재자가 아니다. 그렇게 세계와의 여러 관계를 맺는 일이 가능한 유일한 이유는, 있는 그대로의 현존재가 그렇게 세계­내­존재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재는 세계 내에서 여타의 존재자들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전혀 이질적인 존재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들은 단지 세계 내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공통적이다. 그러나 현존재와 달리 여타의 존재자들은 그들이 놓여 있는 세계에 대하여 별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에 반하여 현존재는 지나칠 정도로 세계에 관하여 애착을 가진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의 존재방식에 기인한다. 이로 인하여 현존재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보이는 것은 온통 관심의 대상이고 애정을 쏟아 부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현존재가 세계에 관계하고 있는 바 그 전부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현존재의 세계는 관심의 세계이다. 관심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다 객관적으로 보고 인식하는 것을 눈멀게 한다. 그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의 세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결부된 세계 즉 생활세계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존재가 세계와 지나치게 밀착된 존재구조를 가지고 있음으로써 가능한 현상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도 현존재의 실존적 관심의 대상으로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그것이 존재하는 바 그 의미가 현존재에게 달라지는 것이다. 관심 즉 배려가 현존재의 교섭의 양상이다.

 

내­존재의 그같은 방식의 다양성은, 어떤 일에 관여하고 있다, 어떤 것을 만든다, 어떤 것을 정리하고 돌보다, 어떤 것을 사용한다, 어떤 것을 포기하고 분실한다, 시도한다, 성취한다, 탐지한다, 물어 본다, 고찰한다, 서로 토론한다, 규정한다…와 같은 사례에 의해 예시적으로 시사 된다. 내­존재의 이런 방식들은 배려한다는 존재양식을 갖는다.

 

교섭은 현존재의 평균적 일상성에 기초해 있다. 그것도 세계를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따라서 이것은 직관적 인식에 의한 세계와의 만남과 구별되어야 한다. 직관적 인식의 태도는 세계를 직접적인 체험의 장(場)으로 또는 현실적인 삶의 공간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장으로 혹은 학문의 장으로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부득불 세계를 대상화해야 하며, 이를 인식하고자 하는 주체는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대립의 양상을 띠어야 한다. 인식체계 자체가 바로 인식하는 자와 인식되는 자 그리고 인식을 성립시키는 매개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식하는 자는 현존재와 다른 존재구조와 존재방식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인식되는 자 즉 객체를 향하는 지향자가 아니면 안된다. 객체를 향하는 지향자를 일러 우리는 의식 (BewuՂtsein)이라 한다. 따라서 의식의 본질은 지향성 바로 그것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현존재의 실존성과 구별된다. 이것은 세계­내­존재를 그의 존재구조로 하는 현존재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현존재에 관한 분석은 인식론적으로 행해져서는 안된다. 현존재는 근원적으로 그 존재구조와 존재방식을 의식과 달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인식이라는 현상자체가 파악되자마자, 이 현상은 이미 어떤 외적 형식적 해석 속으로 빠져 들고 만다. 이 점을 나타내는 지표는 오늘날 아직도 관행처럼 되어 있는 바, 인식의 단초를 주관과 객관 사이의 관계로 놓는 것이다. 거기에는 진리도 있으려니와 그만큼 공허함도 있다. 그러나 주관과 객관은 현존재와 세계에는 결코 부합되지 않는다.

 

현존재는 의식이 아니다. 적어도 그의 존재구조와 존재방식에 있어서 그러하다. 현존재가 세계­내­존재를 존재구조로 하고 있다 함은 그가 세계의 내(In) 바로 여기에서 처음부터 세계를 만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현존재의 현(Da)은 어디인가. 세계-내-존재의 내(In) 바로 거기이다. 세계의 내(內)에 현존재가 있고 현존재의 현(現)에 세계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존재와 세계는 상호간에 대립에 의한 단절의 상태로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은 상호 열려있는 상태로 통일되어 있다. 즉 세계는 현존재에게 트여있고 현존재 또한 세계를 향해 열려있다. 이렇게 이들은 상호간에 처음부터 터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존재는 의식의 경우처럼 새삼스럽게 세계를 알려고 지향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없다. 구조적으로 개방된 상태에서 서로를 교제하고 교섭해 가면 되는 것이다. 세계는 적어도 현존재에게는 비은폐되어 있다. 그러나 세계는 의식에 대하여 자신을 전적으로 개방하지 않는다. 존재세계가 은폐된 체 대상세계로 의식 앞에 놓여 있다. 닫힌세계를 여는 것, 이것은 어디까지나 의식의 몫이다. 이것이 의식에게는 하나의 과제로 남아 있다. 세계는 적어도 현존재에게만은 관대하다.

 

인식을 행하는 주관은 어떻게 자신의 내적 영역에서 나와서 다른 외적 영역 속으로 들어가는가. 인식 작용은 도대체 어떻게 대상을 가질 수 있는가. 주관이 다른 영역 속으로 뛰어들 필요없이 마침내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대상 자체가 어떻게 고찰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단초가 이렇게 다양하게 변하는 데도 불구하고, 주관의 인식작용이 논의될 때마다 이 주관의 존재방식은 부단히 암묵적으로만 언제나 이미 주제로 되어 있을 뿐, 인식하는 주관의 존재양식에 대한 물음은 철저하게 등한시되고 있다.…인식 작용이 어떻게 그 내면영역으로부터 밖으로 나아가서 초월을 획득하는가 하는 물음만이 제기되어 있는 한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인식작용을 문제시하면서도 그같은 수수께끼를 던져주는 이 인식작용이 도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있는가 하는 것을 미리 분명하게 해두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의식에게 문제로 되는 것이 현존재에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의식에게는 비록 힘겨운 과제로 남아 있지만 현존재에게는 별 어려움이 없다. 그 자신이 인식의 지평이 아닌 존재의 지평에서 바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 혹은 구조을 갖추어 태어났기 때문이다.

 

인식현상을 아무리 잠정적인 주제로 삼는다 하더라도 이미 다음과 같은 사실이 암묵적으로 함께 언급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 : 인식작용은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한 존재양상이어서, 그 존재적 기초를 이 존재 틀 속에 가지고 있다. 이 현상적 실상 ― 인식작용은 세계­내­존재의 한 존재양식이다 ― 에 대한 이런 지적에 대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식작용을 그렇게 해석하면 인식문제는 말살된다. ; 인식작용은 주관이 초월할 때 비로소 세계에 도달하는 것인데, 인식작용이 그 세계 곁에 이미 있다고 전제한다면, 도대체 무엇이 또 더 물어져야 하는가.

3. 현존재의 세계성

 

이처럼 인식의 지평이 현존재의 유일한 활동무대는 아니다. 그는 존재의 지평까지도 종횡무진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의식이 건너가지 못하는 존재의 늪을 그는 거침없이 넘어간다. 따라서 존재를 향한 그의 발걸음은 그 어떤 존재자보다 가볍다. 존재를 향한 의식의 발걸음에 비하면 그의 발걸음은 너무나 활기에 넘쳐 있으며 눈이 부시도록 당당해 보인다. 의식에게는 그렇게 멀고 험난한 존재의 세계가 그에게는 가깝고 다정다감한 생활세계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물론 현존재의 생활세계가 곧 존재세계 그 자체는 아니다. 의식의 세계인 대상세계가 그러하듯이, 현존재의 생활세계 역시 존재하는 세계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 의식이 현상하는 대상세계를 매개로 하여 그 자체 존재하는 세계를 인식하고자 하듯이, 현존재 또한 생활세계를 통하여 존재하는 그 자체의 세계에 다가가고자 한다. 대상이 의식에게 우선적으로 현상하듯이, 생활세계가 현존재에게 우선적으로 교섭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세계를 향한 그의 첫걸음은 어디까지나 생활세계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것이야말로 존재자일반의 존재세계를 파악하는 데에 유일한 지름길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현존재의 생활세계에 관한 분석이 다름아닌 현존재의 실존분석이며, 이것이 곧 현존재의 평균적 일상성의 분석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현존재의 존재세계에 관한 존재의미의 세계로 향한다. 이것이 말하자면 기초존재론이다.

 

이를 위한 방법적 지시는 이미 주어져 있다. 그것은 세계­내­존재가, 따라서 세계도, 현존재의 가장 친근한 존재양식인 평균적 일상성이라는 지평에서 분석론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상적 세계­내­존재를 추적하여, 이것을 현상적 발판으로 해서, 세계라든가 하는 것이 시야 속에 들어와야 한다. 일상적 현존재의 가장 비근한 세계는 환경세계이다. 우리의 탐구는, 평균적 세계­내­존재의 이 실존론적 성격으로부터 출발해서 세계성일반의 이념에 이르는 길을 취한다.

 

현존재의 분석은 그의 생활세계의 분석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거기에서 현존재의 일상적 삶의 분석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현존재의 일상적 삶은 어떤가. 그는 여타의 존재자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가. 그는 때로는 배려적으로 때로는 고려적으로 이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한마디로 말하여 관심(Sorge)을 가지고 만나면서 생활해 간다. 여기에서 여타의 존재자들과의 만남을 배려(Besorge)라 하고 인간실존과의 만남을 고려(Fürsorge)라 한다. 특히 전자의 배려적 양상은 어떤가. 인간실존 이외의 존재자들과의 만남의 양상은 어떤가. 이것은 그들을 대상화하여 인식하는 인식의 양상을 띠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몰입하여 종사하고 나아가 그들을 활용하는 양상을 띤다. 즉 이 존재자들은 현존재의 인식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그의 삶을 위하여 이용되거나 생산되는 사용존재자의 양상을 띤다.

 

가장 가까이 만나는 존재자의 존재의 현상학적 제시는, 우리가 세계내에서 그리고 세계내부적 존재자와의 교섭이라고도 부르는 일상적 세계­내­존재를 실마리로 하여 수행한다. 이 교섭은 이미 배려의 다양한 방식들로 분산되어 있다. 그러나 이미 지적되었듯이, 교섭의 가장 비근한 양식은 단지 인식하기만 하는 인식작용이 아니라, 종사하고 사용하는 배려이다.…당면한 분석의 범위 안에서 예비주제로서 단초에 놓여진 존재자는, 환경세계적 배려 속에서 자기를 현시하는 존재자이다. 이 때 이 존재자는 이론적 세계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사용되거나 생산되는 등의 존재자이다.

 

현존재에 의한 배려적 교섭은 존재자를 도구로서 그 존재성격을 갖게 하는 것이다. 현전존재자(Vorhandenes)가 도구존재자(Zuhandenes)로 존재하는 바 그 의미는 현존재에 의하여 비롯되는 것이다. 눈 앞에 있는 존재자가 눈앞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유용한 존재자 즉 도구적 존재자로 비치는 것이다. 이리하여 현전존재자는 온통 도구존재자로 채색되는 것이다. 사물성을 본질로 하는 존재자에서 도구성을 본질로 하는 존재자에로 그 존재성격이 달라져 있는 것이다. 현존재의 손길이 미치는 존재자는 부지불식간에 도구로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현존재의 교섭방식에 기인하는 것이다.

 

현존재의 손은 마술가의 손이다. 있는 것을 있지 않게 하고, 있지 않는 것을 있게 하는 그야말로 마력을 지닌 손이다. 이것에 걸려든 존재자는 온전한 본래의 모습으로 존재하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이리하여 현존재의 생활세계는 온통 도구들로 가득차 있다. 현전존재자가 배려적 교섭에 따라 재배열되고 재편성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배려적 교섭의 한계를 벗어나 있는 존재자라 하더라도 이와 전적으로 무관하게 존재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도구란 고립된 오직 하나의 도구로 존재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도구는 또 다른 도구와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 도구란 「∼위한 어떤 것」으로서 반드시 다른 도구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구는 또 다른 도구를 항상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배려 속에서 만나는 존재자를 도구라고 부른다. 교섭 속에서 눈에 띄는 것은 필기도구, 재봉도구, 작업도구, 여행도구, 측량도구 등이다.…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만의 도구란 존재하지 않는다. 도구의 존재에는 그 때마다 언제나 도구전체가 속해 있고, 이 도구전체 속에서 도구는 바로 그 도구로서 있을 수 있다. 도구는 본질적으로 ∼을 하기 위한 어떤 것이다. 유용성, 기여성, 사용가능성, 편리성 등 하기 위한의 상이한 방식들이 도구전체성을 구성한다. 하기 위한의 구조 속에는 어떤 것에 대한 어떤 것의 지시가 들어 있다.

 

지시는 지시에 연하여 끝없이 전개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지시는 특정한 존재자에 이르러 종말을 고하고야 마는 것이다. 지시연관의 최종점, 지시연관이 최종적으로 수렴되는 존재자 그가 바로 인간현존재인 것이다. 지시는 현존재를 향해 방향잡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용사태의 전체성 자체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어디에 즉 어떤 사용사태성도 이제 더 이상 없는 어디에로 귀착된다. 그것은 세계내부에서 유용존재자의 존재양식을 갖는 존재자가 아니라, 그 존재가 세계­내­존재로서 규정되고, 그의 존재 틀에는 세계성 자체가 속하는 그런 존재자이다. 이 일차적 어디에는 어떤 사용사태성이 가능한 경우로서의 거기에가 아니다. 이 일차적 어디에는 궁극목적이다. 그러나 궁극목적은 언제나 현존재의 존재에 관계하며, 현존재는 자기존재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자기존재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현존재의 생활세계 내의 존재자들은 현존재의 배려적 교섭에 따라 도구적 존재자로 한결같이 현존재 자신을 향해 질서지워져 있고 배열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현존재의 평균적 일상성과 연관하여 드러나는 세계의 세계성이다. 이렇게 현존재의 존재세계는 도구성으로 현존재의 평균적 일상성 속에 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때 그때의 쓰일 곳에 대한 지시가 배시적으로 일깨워짐으로써, 이 쓰일 곳 자체 및 이와 함께 작업연관, 즉 배려가 언제나 이미 거기 머물러 있는 그 작업장으로서의 전체 작업장이 시야에 들어 온다. 도구연관은 아직까지 한번도 보여진 적이 없는 전체로서가 아니라, 배시 속에서 부단히 처음부터 이미 보여진 전체로서 밝혀져 온다. 이 전체와 함께 세계가 고지 된다.

 

그러나 도구적으로 질서화 되고 재배열된 존재자들, 이 존재자들은 물론 있는 그대로 현전하는 존재자는 아니며 이 존재자들로 구성된 세계 역시 존재하는 세계 그 자체는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도구성을 본질로 하는 환경세계로 오직 현존재에게만 유일하게 열려있다.

 

게다가 지시와 지시 전체성이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성 자체를 구성하게 될 것이라는 점도 분명해졌다. 우리가 이제까지 보아 온 것은, 세계가 유용존재자를 환경세계적으로 배려하는 특정한 방식에 있어서만 그리고 그런 방식에 대해서만 밝혀져 온다는 것, 그것도 유용존재자의 도구성과 함께 밝혀져 온다는 것이다.

4. 현존재의 공간성

 

이처럼 현전하는 존재자가 현존재의 배려적 교섭에 따라 도구적 존재자로 그 존재방식을 달리함으로써, 세계 또한 현전하는 존재세계에서 현존재의 삶에 유용한 세계 즉 환경세계로 이를 달리 한다. 문제는 이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와 더불어 존재자들이 세계 내에서 위치하는 공간성질이 달라지는 것이다. 존재자가 현전적으로 세계 내에 존재하는 경우 이 존재자가 갖는 공간적 특성은 어디까지나 이 존재자의 연장성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이 존재자가 현존재의 배려적 교섭에 의하여 도구화 됨으로써, 연장성이 아닌 유용성이 이제 이 존재자의 공간적 특성을 규정하는 기준으로 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전존재자는 그 자신 현존재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연장하여 있는데 반하여, 도구적 존재자는 현존재와 철저하게 결부되어 도구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구적 존재자는 무엇보다도 현존재의 평균적 일상적 삶에 얼마나 유용하냐에 따라 즉 유용의 정도에 따라 그 배열순서가 정해지고, 이 배열의 순서가 곧 현존재의 환경세계 내에서 이들의 위치를 결정하게 된다.

 

이미 유용존재자를 성격지을 때, 우리는 어느 만큼 유용존재자의 공간성과 마주쳤는가. 우리는 우선 유용존재자에 관해 말한 바 있다. 그것은 그 때마다 다른 존재자에 앞서서 가장 먼저 만나는 존재자를 의미할 뿐 아니라, 동시에 가까이 있는 존재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일상적 교섭에서 만나는 유용존재자는 가까움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도구의 이 가까움은 도구의 존재를 표현하는 용어인 유용성에서 이미 시사되고 있다.…이 가까움은 거리 측정을 통해 확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 가 까움은 배시적으로 헤아리면서 다루거나 사용하거나 함으로써 조정되는 것이다.

 

이 위치가 이들의 공간적 특성으로 규정되는 자리이다. 이처럼 도구적 존재자의 위치연관은 이것의 사용사태연관에 사실상 기초해 있으며, 이것은 또한 도구의 지시연관 전체를 제시한다. 따라서 사용사태의 연관전체성이 곧 유용존재자가 갖는 공간성을 개시하며, 뿐만 아니라 도구의 지시연관 전체성이 현존재의 생활세계 내에서 갖는 그들의 공간성을 열어 보인다. 사용사태에 따른 도구의 지시연관 전체성이 현존재의 생활세계 내에서 그들이 갖는 공간성이다. 세계 내에서 유용존재자는 이렇게 자신의 공간성을 개시하고 있는 것이다.

 

도구가 방향을 잡아 가까이 있다 함은, 도구가 현전적으로 공간 안에 어딘가에 제 위치를 점유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도구로서 설치되고, 보관되고, 배치되고, 정돈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구는 제 자리에 있거나 혹은 주변에 흩어져 있다. …그때 그때의 자리는 ∼을 하기 위한 도구의 자리로서, 환경세계에 유용하게 있는 도구연관이 서로서로 방향을 잡은 자리들의 전체에 의거해서 규정된다.…자리는 그 때마다 하나의 도구가 귀속하는 특정한 저기이고 거기이다. 그때 그때의 귀속성은 유용존재자의 도구성격과 상응한다. 다시말하면 유용존재자가 도구전체에 사용사태적으로 귀속하는 것과 상응한다. 그러나 도구전체가 자리잡을 수 있는 귀속성의 근거에는, 그 귀속성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어디로 일반이 놓여 있고, 이 어디로를 향해서 하나의 도구연관에 자리 전체가 지정된다.

 

이것은 곧 기존의 현전존재자의 연장성을 토대로 하여 이를 다시 현존재의 유용성에 따라 새롭게 재배열하는 것이다. 길고 짧음, 넓고 좁음, 멀고 가까움 등에 관한 공간적 규정은 현전하는 존재자들의 상호간의 비교 속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전적으로 현존재의 배려적 교섭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현존재와 무관하게 현전하는 존재자가 갖는 세계 내에서의 공간적 규정과 현존재의 배려에 의한 도구적 존재자가 갖는 세계 내에서의 그것은 일치하지 않는다. 현전적으로 아무리 멀리 위치하여 있는 존재자라 하더라도 이것이 현존재의 배려적 교섭 내에서는 가장 가까에 위치를 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현존재의 교섭에 의한 것이지 여기에 무슨 모종의 다른 계기가 있어 그런 것은 아니다.

 

현존재가 길을 갈 때, 현존재는 현전적 물체 사물이 되어 공간적 거리를 측정하면서 통과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현존재는 킬로미터를 먹어 들어 가는 것이 아니다. 가까이 하는 것도 거리를 제거하는 것도 가까워진 것이나 거리가 제거된 것에 이르는 그때 그때의 배려적 존재이다. 객관적으로 긴 길도 객관적으로 매우 짧은 길보다 더 짧을 수 있는데, 이 때 객관적으로 매우 짧은 길은 아마 힘든 길일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무한히 길게 여겨지는 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여겨짐 속에서 그때 그때의 세계가 비로소 본래적으로 유용존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현전적 사물의 객관적 간격은, 세계내부적 유용존재자의 원격성이나 가까움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 거리가 정확하게 알려질 수 있다 하더라도, 이런 지식은 맹목적 지식일 뿐이고, 환경세계를 배시적으로 발견하면서 가까이 한다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바로 여기에 현존재의 공간성이 동시에 개시되고 있다. 연장적으로 긴 길이를 가진 존재자가 그의 배려적 교섭에 의하여 단숨에 짧아지고, 연장적으로 먼 공간거리에 놓여 있는 존재자가 한 순간에 코 앞에 놓여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현존재는 세계 내에서 배려적 교섭에 따라 연장적 거리를 없애 가면서 현전하는 존재자를 자신의 실존적 삶에 유용하게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다.

 

현존재가 배려를 통해 어떤 것을 자기에게 가까이 가져 올 때, 이것은 신체의 어떤 점으로부터 최단 거리에 있는 공간 위치에다 그것을 고정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까이라 함은, 배시적으로 우선 하는 유용존재자의 영역내를 뜻한다. 가까이 함은 신체를 가진 자아라는 사물에 정향하지 않고, 배려하는 세계­내­존재에, 즉 세계­내­존재에서 그 때마다 우선적으로 만나는 것에 정향한다.

 

이렇게 현존재가 거리를 없애 가고 방향을 잡아 가는 가운데 그의 공간성이 그려지는 것이다. 현존재의 공간성은 거리없앰(Ent-fernung)과 방향잡음(Ausrichtung) 바로 그것인 것이다. 이를 규정하는 척도는 다름아닌 배려적 교섭이다. 이리하여 현전하는 존재자들이 갖는 연장성은 자연히 붕괴되고 여기에 새로운 공간성이 들어 서는 것이다. 이 공간성은 내부성에 기초한 연장성에 의하여 개시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실존성에 기초한 유용성과 도구성에 따라 개시되는 공간성이다.

 

거리없앰과 방향잡음은, 내­존재의 구성적 성격으로서, 발견된 세계내부적 공간 안에서 배려적­배시적으로 있어야 하는 현존재의 공간성을 규정한다.

5. 맺음말

 

여기에서 우리는 공간개념이 발견되는 한 예를 보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현존재의 실존분석에 따른 것이었다. 인간현존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여타의 존재자들과 교섭해 가는 과정 속에서 이끌어 내었던 공간개념이었다. 교섭은 현존재 자신이 몸담고 있는 바로 그 세계 내에서 이루어지며, 이 세계와 교섭이 교차하는 바로 그 순간에 현존재 자신에 있어서 존재세계의 세계성이 그려지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의 존재성격은 바로 그 자신의 일상적 배려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세계와 이 세계의 세계성이 인간현존재의 일상적 삶과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일상적 삶 속에 즉 배려적으로 교섭해 가는 것 바로 거기에 그의 존재세계가 있으며, 바로 여기에 세계의 존재성격이 있는 것이다.

 

공간성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인간현존재의 삶과 결부된 세계 바로 그 세계 내에서 유용존재자들이 위치하여 있는 자리가 곧 그들의 공간적 특성을 규정짓는다. 삶과 결부된 세계, 삶과 결부된 공간 바로 거기에 이들이 갖는 존재성격 즉 세계성과 공간성이 있는 것이다. 존재하는 세계와 공간은 적어도 인간현존재에게는 이러한 방식으로 개시되는 것이다. 인간현존재의 삶 속에 세계가 있으며, 바로 이 세계 속에 공간이 있다.

 

그러나 실존론적으로 범주화된 세계와 공간은 결코 우리 모두의 세계일 수 없고 공간일 수 없다. 실존적 교섭에 따라 체험된 현존재 각자의 세계이고 각자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인간을 포함한 존재자 일반의 세계와 공간은 더구나 아니다. 어디까지나 인간 현존재의 일상적 삶과 결부하여 이해된 바 해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성일반의 인식능력 비판'을 통하여 '해답할 수 없고 물리칠 수 없는' 바로 이 존재하는 바 세계에 다가 가고자 했던 칸트에 비하면,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라 칭하면서 그의 존재방식의 분석을 통하여 세계에 한층 더 다가 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이해된 바 세계의 의미를 읽어 내는데 그치고 말았다.

 

순수직관의 일종으로서 공간은 적어도 우리 모두의 공간개념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이성일반의 인식능력 비판'을 통하여 구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존적 관심에 의한 공간개념은 현존재의 체험에 따라 이해된 바의 해석이고 보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존재 각자의 공간개념에 불과한 것이다. 실존하는 바 현존재는 교섭의 양상을 각자 달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존재의 공간성은 그의 평균적이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 유용존재자의 사용사태에 따른 지시연관 전체와 관련하여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공간이 주관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세계가 공간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현존재를 구성하는 세계­내­존재가 공간을 개시한 이상, 공간은 오히려 세계 안에 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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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Hartmann. 河岐洛 譯, 『存在學原論』, 螢雪出版社,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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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균 편역, 『실존철학과 현대』, 계명대학교출판부, 1987.

申午鉉 著, 『自由와 悲劇 - 사르트르의 人間存在論』, 文學과 知性社,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