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존재론을 위한 서론
이 근 세(경희대)
요 약 문
스피노자가 제시한 존재론은 비인격신, 혹은 자연신을 그 원리로 하며 지성과 의지의 신을 원리로 삼는 전통 형이상학을 전복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스피노자의 존재론은 ?에티카?에 개진되어 있다. 그러나 ?에티카?는 아무런 전제도 없고 서론도 없이 곧바로 존재론적 원리로부터 시작한다. 본 논문은 ?에티카?의 서론이라 할 수 있는 ?지성개선론?의 분석을 통하여 스피노자가 신에 대한 고찰로부터 자신의 존재론을 시작해야 했던 이유를 밝히려 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철학적 반성은 삶의 문제로부터 나온다. 경험의 상대성에 대한 의식이 철학적 반성의 시작이며, 경험은 이성적 탐구를 통해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성적 탐구는 참된 관념으로부터 출발해야 그 여정이 길을 잃지 않고 계속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 진리가 인간 정신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지성의 개선 절차이며, 개선된 지성만이 진리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 진리의 영역을 최고로 확장하려면 이성적 탐구는 참된 관념들 중에서도 최상의 관념, 즉 절대존재의 관념으로부터 재출발해야 한다. 결국, 존재론의 시작은 즉자적 존재인 자기원인의 관념이다.
※ 주요어 : 경험적 선, 선과 악, 지성, 관념, 확실성, 원인, 정의, 연역.
1. 머리말
스피노자의 철학이 지닌 독창성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원칙적인 것은 그의 존재론이다. 인간의 자유를 거부하는 그의 심리학도 존재론에서 비롯되며, 육체의 분석을 통한 상상론과 결합되는 인식론과 감정론, 인간과 신이 합일되는 구원론도 모두 존재론을 원리로 삼기 때문이다. 서양 철학사에 있어서 스피노자의 존재론의 특징은 전통적으로 인정되어 오던 신의 속성을 부정하고 새로운 신의 개념을 제시한 데에 있다. 전통적 존재론에 따르면, 신은 지성과 의지, 혹은 자유를 가지고 있다. 즉, 창조할 세계를 지성을 통해 구상하고 의지를 통해 실재적으로 창조하는 인격신(人格神)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에 따르면, 무엇인가를 구상하고 그것을 실현한다는 것 자체가 신의 내부에 인식과 실재의 간극을 설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지성이나 의지는 인간적 특성에 불과하며, 전통적 존재론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자신과의 유비를 통해 신의 모습을 구상한 것으로 결국 인간적 투영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적 탐구에 있어서, 인간적인 관점에서 출발을 할 경우, 항상 전통적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초월자라는 타협적 개념에 이르므로, 철학의 출발점은 바로 신이어야 한다. 스피노자의 신은 비인격적 신으로서 자신 안에 모든 것을 산출하는 자연신(Deus sive Natura)이다. 신은 가장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질적으로 무한한 속성들을 양적으로도 무한히 많이 가지고 있다. 신은 무기력하지 않으므로 신의 무한한 속성들은 산출을 한다. 속성들에 의한 무한히 다양한 산출 방식이 신의 결과이며 인간도 신의 결과들 중 작은 편린에 불과하다. 결국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행위는 자연 전체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존재론과 윤리학이 체계적으로 설명되어 있는 Ethica는 서론도 예비적 설명도 없이 신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모든 결과들을 연역적으로 도출해낸다. 본 논문의 목적은 스피노자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론의 출발점에 도달하는지를 살펴보는 데에 있다. 스피노자가 ?에티카?의 본격적 집필을 시작하기 직전까지 완성을 시도했던 저작이 ?지성개선론?이다. ?지성개선론?에는 스피노자가 ?에티가?에서 신으로부터 출발해야 했던 이유와 연역적 방법을 사용해야 했던 이유의 실마리가 담겨 있다. ?지성개선론?은 평생 보편적 이성을 통해 사유했던 스피노자가, 철학을 시작해야 했던 이유를 예외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서술한 유일한 책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첫 번째로 스피노자에 있어서 인간을 철학으로 이끄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두 번째로는 철학을 위한 예비적 훈련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는, 철학을 위한 예비적 훈련의 결과가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이 점은 결국 진정한 철학은 절대존재의 체계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줄 것이다.
2. 실천적 위기와 결단
스피노자는 ?지성개선론?의 첫머리에서 자신이 헛된 일들에 매달렸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어떤 확실한 선을 추구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밝힌다: “일상 생활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헛되고 부질없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나서, 그리고 내게 있어 불안의 원인과 대상이었던 그 어떤 일도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혹은 만일 선과 악이 포함되어 있을지라도 이는 단지 정신이 어느 정도로 자극되었는가를 보여줄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마침내 나는 참된 선이라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를 탐구해보기로 결심했다.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선,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정신이 오로지 그것을 통해서만 감화될 수 있는 선,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고 획득함으로써 최상의 행복을 영원히 향유하게 해줄 수 있는 선이 과연 존재하는가를.”
사람들이 무엇보다 높게 평가하는 것들 중 우리는 쾌락, 부귀, 명예를 들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그 강한 자극과 삶에서의 즉각적 유용성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다. 과연 우리는 이러한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스피노자는 이러한 경험적 선들의 유혹에 휩싸여 “극도의 위험”에 처해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사실, 먼저 질문해보아야 할 것은 쾌락, 부귀, 명예의 유혹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게다가 우리는 비록 그러한 감각적 선들로 인해 후회를 겪어본 경험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원하는 출구로 이끌어줄 참된 선이 어디에 있는지, 심지어는 그것이 존재하는지조차 아직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천착하던 경험적 선들(그것들이 진정한 선들인지 혹은 악들인지 몰랐지만)에 대한 기억이 나를 지배하는 한, “아직 확실하지 않은 어떤 것을 위해 확실한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경험적 선들에 대해 의심이 생겨났다면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위기 앞에서 필요한 것은 사변이 아니라 결단이기 때문이다. 반복적으로 계속되는 병적 징후가 순수하고 영원한 기쁨을 구성할 수는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므로, 혹시 다른 형태의 삶이 존재하는지 진지하게 자문해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선들의 의미와 앞으로 추구해야 할 선의 의미를 가늠해보기 위해 일종의 후퇴가 요청된다. 즉, 반성의 개입이 필요한 것이다. 왜 지금까지 추구해온 선들은 안정적인 감정을 주지 못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현재까지 겪어온 오류들을 바로잡고 앞으로 추구해야 할 선에 대해 인식하기 위해 도움이 될 것이다.
반성을 개입시켜 볼 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삶의 목적으로 삼는 감각적 쾌락, 부귀, 명예와 같은 선들은 상대성을 그 특징으로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선들의 추구는 때로는 기쁨을 때로는 슬픔을 가져옴으로써 그것들에 대한 사랑은 끊임없이 방해받고 혼란해지며 동요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대성을 고려함으로써 우리는 감각적 선들이 본성상 불확실한 선들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감각적 선들이 반복적으로 야기한 악들이 “극도의 위험”으로 이끈다는 것을 계속적인 반성을 통해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감각적 선들에서 확실한 악을 보며 어떤 안정적인 선의 추구에 모든 희망을 걸 수 있다. 비록 안정적 선의 존재와 획득 자체가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치명적 병에 걸려 만일 치료책을 쓰지 않으면 죽음이 확실할 것이라는 것을 느끼는 환자가 그것이 불확실할지라도 치료책을 찾는 데에 전력을 기울이듯이”, 어떤 안정적 선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거짓 선들을 자신의 사유로부터 배제함으로써 이미 시각의 변화가 일어난다. 나는 이제 악의 확실성이 아니라 어떤 선, 적어도 그 불확실성으로 인해 확실한 악에 대한 그 우위가 문제시되지는 않는 어떤 선을 향하기 때문에 새로운 삶의 확립을 위한 노력 자체가 나에게는 이미 “커다란 위안”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형태의 삶을 향한 전환을 이루어내면서 인간은 선과 악의 본성에 대한 소중한 인식을 얻게 된다. 그것은 선과 악은 “상대적으로만 말해질 뿐”이라는 사실이다. “동일한 한 사물에 대해서도 그것이 고찰된 관점에 따라 좋거나 나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로부터, 윤리적 목적이 도출된다. 인간이 획득하고자 하는 것은 기쁨이고 기쁨에 도달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선이므로 윤리적 목적은 그러한 선을 획득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만일 변하지 않는 영원한 기쁨을 제공할 수 있으며, 모든 이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최상의 선일 것이며, 그러한 최상의 선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상태가 있다면 그 상태는 완전한 본성을 획득한 상태일 것이다. 따라서 윤리적 목적은 어떤 선을 향해 나아가는 데에 있으며, 그것은 선과 악을 지나치게 대립적으로 간주하지 않으면서(이 경우는 지금까지 추구했던 감각적 선들을 전적으로 배제해야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실재화해야 하는 일종의 이상적 선이다.
이런 식으로 선과 악의 상대성에 대한 의식과 함께 윤리적 목적의 범위가 정해졌을 때, 인간은 이전에는 자신만을 위해 이용 대상으로 간주한 외부 사물들과 타인들을 중립적이고 절제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정념의 상태에서는 해악으로 다가왔던 외부 사물들과 타인들을 이제는 윤리적 계획의 실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 대상들로서 원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제 우리는 생명과 건강을 보존하기 위한 감각적 쾌락이나 물질적 선들을 추구하고, 야비한 술수로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함께 탐구하고 공유하기 위해서 타인들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면서, 그리고 자신의 목적에 어긋나지 않는 한에 있어서 사회 관습들을 존중하면서 윤리적 계획의 실현을 촉진시킬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선과 악이라는 가치의 상대성은 진정한 선을 감정과 관련하여 좀더 정확히 규정하게 해준다. “우리의 모든 행복과 불행은 오직 우리가 사랑을 통해 천착하는 대상의 질에만 달려 있다"는 사실이 점점 깊어지는 반성을 통해 나타난다. 따라서 사랑은 사멸하지 않아서, 즉 상대적이지 않아서 슬픔도 불안도 증오도 일으키지 않는 대상, 즉 ”정신을 순수한 기쁨으로 양육하는 영원하고 무한한 대상"으로 향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상적 선이 명백하게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즉, 정념에 빠졌던 본성보다 우위에 있는 본성, 즉 모든 이에게 공통적인 것이어서 모든 이가 공유할 수 있는 영원하고 무한한 대상과 사랑을 통해 결합될 수 있는 본성을 타인들과 함께 획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삶을 계획하는 이는 이미 치유가 불가능해 보이던 병적 상태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하고 있다. 최상의 기쁨을 획득하려는 계획을 거스르는 장애물을 함축하지 않는 선의 추구에 자신을 맡기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선이 이미 눈앞에 구체적인 모습으로 주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감각적 선들을 상대화하는 데 성공했다면, 이제는 제시된 이상적 선을 절대화해야 한다. 하지만 우선적으로 자신을 진리로 파악함으로써 선의 진리를 절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정신을 구비해야 할 것이다. 즉, 지성을 개선해야 할 임무가 부과된다.
3. 지성의 개선
이제 인간이 실현해야 할 일은 자신의 존재와 외부 사물들의 상대성에 다시 빠지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절대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사물들의 상대성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은 정신이 어떤 근원적 힘, 즉 실재적이고 참된 것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참된 관념”이 인간에게는 내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비록 인식 대상이 이미 전면적으로 밝혀진 것이라고 주장하기는 힘들지만 말이다. 지성의 개선은 최소한의 진리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그 적용 영역을 최대한으로 확장하는 데에 있다.
물론, 극단적 회의론은 어떤 진리도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어떤 이해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회의론자의 논거는 일종의 무한한 역진에 그 기반을 둔다. 즉, 인간이 진리의 인식에 이를 수 없는 이유는 하나의 인식은 또 다른 인식을 가정하며 이 또 다른 인식 역시 또 다른 인식을 가정하며, 그렇게 무한히 계속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의론에 의하면, 인류가 여러 다른 도구들을 만들게 해줄 첫 번째 도구를 만들 능력이 전혀 없는 것처럼, 인간은 일말의 진리도 소유할 수가 없다. 이렇게 스스로 절대적 회의론자이고자 하는 이들은 첫 번째 참된 관념의 존재를 그 뿌리에서부터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들은 아무것도 알기를 원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그들이 모른다는 것조차 알기를 거부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이들과 무엇을 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담론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며 남이 그들에게 증명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며, 간단히 말해 그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적 회의론자들은 혹은 절대적 침묵 속에 소멸하던가 아니면 “정신이 전적으로 결여된 기계들”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대상의 본성이 지닌 모든 의미, 그리고 그 존재론적 함의들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최소한의 결과, 즉 우리는 참된 관념을 가지고 있으며(habemus ideam veram) 이 참된 진리는 확고부동한 것으로서 우리의 근원적 이해능력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4=3/x 라는 등식에서 6이 네 번째 수라는 것을 아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것을 들어서 알 수도 있을 것이며, 기억을 통해서, 혹은 우연히 계산을 해보다가, 혹은 수들의 비율에 대한 인식을 통해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율성” 자체의 진리는 지성의 즉각적 행위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즉각적 행위를 통해 지성은 지성 자신을 진리로 파악함과 동시에 비율성의 진리를 진리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은 관념의 형상을 지성의 본성이 지닌 힘에 달려있는 관념 자체에서 보아야 하며 관념의 대상, 혹은 사유의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을 관념의 진리의 원인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즉 지성의 힘 자체가 진리의 실재적 원인인 것이다.
예를 들어, 정신은 원의 관념이 원주나 중심을 갖지 않는 것처럼 참된 관념을 그 대상과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관념을 통해 관념과 원을 동시에 고찰할 수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관념과 원은 두 개의 구분되는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원이 하나의 실재적 본질로서 관념의 대상을 구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의 관념 역시 하나의 실재적 본질로서 다른 관념, 즉 표상적 본질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이 표상적 본질 또한 다른 관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식으로 무한히 계속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관념, 그 관념 대상이 서로 구분되는 바, 지성은 각 관념, 혹은 각 표상적 본질에 대한 확실성을 갖기 위해 외부의 규범을 요청하지 않고, 근원적 이해 능력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참된 관념 자체와 동일시할 수 있다. 즉, 지성 자체가 참된 관념이자 확실성인 것이다. “알기 위해서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는 없으며,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을 알 필요는 더더욱 없다. 삼각형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원을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비록 진리는 그 자체로 지성의 내부에 나타나기 때문에 결코 전적으로 소멸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외부 사건들이나 인간 정신의 연약함에서 오는 편견들에 의해 진리가 은폐될 위험이 끊임없이 도사리고 있다. 방법이라는 것은 진리를 보호하고 정신을 “내적 성찰”로 인도하기 위해 요청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규범은 작동 중에 있는 지성의 내부에 있는 것이므로, 방법은 진리를 인정하게 해주는 외부 규범이나 정신으로 하여금 사물들과 그 원인들에 대한 이해를 가능케 하는 규범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방법은 “반성적 인식, 혹은 관념의 관념”에 다름 아니다. 달리 말하면, 방법은 “정신을 참된 관념의 규범에 따라 인도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방법의 역할은 정신에게 보조적 규칙들을 제공하고 “무용한 탐구들로 힘을 잃지 않도록”, 잘못된 길을 피할 수 있게 도와줌으로써 완전성을 향한 정신의 여정을 동반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성적 방법의 주요 임무는 참된 관념을 그 순수한 형태로 유지하고 그 활동 영역을 확장함으로써 참된 관념을 참된 관념이 아닌 모든 것들과 구분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참된 관념과 참되지 않은 관념의 분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단지 “주의력”이다. 주의력을 통해 또한 정신은 참되지 않은 관념들을 자동파괴로 이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참되지 않은 관념들을 완전히 외부적인 소여들인 듯 간주하며 진리의 밖으로 전적으로 추방하자는 것은 아니다. 참되지 않은 관념들의 발생학적 구성에 파고들어서 그것들이 긍정의 요소로 포함하고 있는 부분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허구적인 관념이나 거짓된 관념은 그 필연성이나 불가능성이 증명되지 않은 한, 우리의 정신에 자리를 점유하려는 힘과 참된 관념을 대체하려는 성향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명도 없이 허구적 관념이나 거짓 관념을 논박하는 것은 아무 소용도 효과도 없는 일이다. 그보다는 이 관념들이 실제로 하나의 온전한 의미를 창출해낼 수 있는지, 그것들이 표현하려는 의미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과연 개념을 형성할 수 있는지, 그리고 외부 개념들에 의존하지 않고도 개념적 자율성을 토대로 확립되는지, 간단히 말해 이 관념들을 긍정할 때 일종의 자기 부인, 즉 암암리에 필연과 불가능으로부터 그들의 가능성을 불법으로 인정하는 타협이 있지는 않은지 주의 깊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구(球)의 개념이 형성되는 허구적 과정을 보자. 구는 반구가 중심을 한바퀴 완전히 회전함으로써 생기는 도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해서 구가 실제로 생긴다는 사실을 거짓되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반구의 완전한 회전이 구를 생겨나게 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형성된 구의 개념은 분명 명석 판명한 관념이다. 그러나 구의 개념의 형성 과정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거기에는 허가되지 않은 불법 침입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반구의 회전 운동은 어디에서 왔는가? 회전 운동은 반구의 개념에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개념이 아닌가? 실제로, 회전 운동의 긍정은 무언의 타협과 함께 임의적으로 이루어졌다. 따로 떼어서 고찰할 경우에 회전 운동의 긍정은 거짓이지만, 거기에 구의 개념이 개입되어 회전 운동의 개념에 생명력을 부여할 경우는 참된 관념일 수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의 동일한 관념이 전체적으로 고찰되었느냐 아니면 단절되고 삭제된 방식으로 고찰되었느냐에 따라 참될 수도 있고 거짓될 수도 있는 것이다. 관념들을 그 개념적 적합성과 함께 긍정하도록 정신을 인도하는 것은 다름 아닌 주의력이다. 정신의 내부에는 이미 진리와 거짓의 경계가 세워져 있으며 주의력을 통해 이를 넘지 말아야 하며, 우발적인 요소들이 마치 개념적 형태를 가진 것처럼 정신 속에 응고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런 점을 주의하게 되면, 정신은, ?에티카?의 한 표현을 미리 사용하자면, “전제 없는 결론”(consequentiae absque praemissis)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가장 큰 위험은 추상이다. 추상은 몇몇 요소들을 마치 그것들이 독립적인 한 전체인 것처럼 고립시켜 간주함으로써 자율적인 개념으로 확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상적 일반화에는 감각, 상상, 언어, 공간성, 시간성, 기억 등, 지성의 힘 자체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기여할 수 있다. 그런데, 위에서 본 것처럼, 이러한 요소들을 설명 없이 그대로 진리의 영역 밖으로 내몰아서는 소용이 없다. 그 요소들의 관념들을 단순 관념들로 분해하여 그 진리를 이해함으로써 더욱 광범위한 개념에 통합시켜야 한다. 이런 식으로 진리가 된 관념들은 지성을 실재적 원인으로 갖게 되며 지성의 활동 혹은 특성들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지성이 자신 안에서 진리의 원천을 갖는 행위들 혹은 특성들과 함께 진리로서 표현될 때, 우리는 지성이 순화, 혹은 개선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개선된 지성은 그 자체로 진리의 규범이다. 개선된 지성은 자기 자신에 의해, 말하자면 자신에게 고유하게 속해 있는 행위들이나 특성들에 의해 정의된다.
그런데, 지성이 진리의 규범 그 자체라면 또한 지성은 진리에 대한 최상의 규범, 즉 최상의 참된 관념을 구상할 수 있다. 이는 정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풍요로운 행위일 것이다. “관념들이 표현하는 대상의 완전성이 더욱 클수록 그것을 표현하는 관념들도 더욱 완전하다. 우리는 웅장한 사원을 구상한 설계자에게 감탄하는 것만큼 작은 예배당의 설계자에게 감탄하지는 않는다.”
이 “웅장한 사원”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가장 완전한 절대존재이다. 앞에서 우리는 참된 것으로서 주어진 하나의 관념은 무한 역진 속에서 길을 잃기보다는 일종의 참된 관념들의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을 보았다. 하나의 실재적 본질로서의 참된 관념은 다른 표상적 본질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이 표상적 본질은 다시 또 다른 관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무한히 진행된다. 따라서, 표상적 본질은 확실성 자체를 구성하는 바, 하나의 사물, 혹은 이 사물의 실재적 본질을 진정으로 인식하려면 그 표상적 본질을 갖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렇게 하나의 아무런 참된 관념에서 출발하여 그로부터 진리의 탑을 쌓을 수 있다면, 가장 포괄적이고 가장 광범위한 참된 관념에서 출발하는 것은 지극히 풍요로운 일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좋은 방법은 어떻게 정신을 참된 관념의 규범에 따라 인도하는지를 제시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가장 완전한 절대존재의 관념에 대한 반성적 인식은 다른 모든 관념들에 대한 반성적 인식보다 우월할 것이다. 달리 말하면, 가장 완전한 방법은 어떻게 정신이 가장 완전한 절대존재의 관념의 규범에 따라 인도되어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지성, 즉 정신의 참된 사유는 사유의 내부에서 진리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또한 다음과 말할 수 있다: “지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하나의 새로운 대상을 지각하고 (어떤 이들은 이런 식으로 신이 사물들을 창조하기 전의 신의 지성을 구상하며, 이 경우 지각의 기원은 외부 대상이 아니다) 이 지각으로부터 합법적으로 지성이 다른 사유들을 연역해낸다고 가정할 때, 이렇게 연역된 다른 사유들은 모두 참된 것이고 어떠한 외부 대상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을 것이며 오로지 지성의 힘과 본성에만 의존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정신은 참되지 않은 관념들로부터 자신을 구분하거나 혹은 이 관념들을 적합한 관념들로 변형시켜 자신의 존재의 구성요소들로 만듦으로써 결국 최상의 참된 관념을 형성하게 되며 최상의 관념을 유일 원리로 간주하고 그로부터 다른 모든 참된 관념들을 연역해낼 준비를 갖추게 된다. 이는 물론 모든 관념들의 연쇄를 통해 전체적 질서를 형성함으로써 “자연의 실재적 구조를 그 전체와 부분들까지 표상적으로 재현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자연의 “실재적 구조”의 재현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연역을 위해 요청된 유일 원리는 다른 모든 실재적 존재들을 산출하는 제1원인이어야 한다. 따라서 제1원인으로부터 결과들의 전체적 연역이 진행되어야 하며, 그러한 연역 과정에서, 개선된 정신은 마치 “정신적 자동기계”처럼 인과적으로 규정된 법칙을 따라 작동해야 한다. 그리고 “실재”에 관한 연구를 실행해야 하기 때문에 인과적 연역은 제1원인의 본질을 표현하는 관념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며, 무한히 많은 사물들 일반에 정확한 구분 없이 적용될 수 있는 제1원인의 몇몇 특성들이나 공리들을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관념으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된다. 제1원인의 관념이 충만한 적합성과 함께 형성되어 일반 개물들의 실재까지도 고찰하게 해줄 진정한 기초를 제공할 때 그것은 진정하고 합법적인 정의(定意)가 된다. 그렇다면 올바른 정의의 조건들은 무엇인가?
4. 정의: 절대존재의 체계를 향하여
지성은 참되지 않은 관념들과 자신을 구분하고 그것들을 참된 관념들로 변형시키는 과정에서 명확하게 나타나는 행위들을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이성의 요청에 따라 진리의 규범인 자신의 힘을 근거로 최상의 규범을 형성한다. 이제 지성의 임무는 올바른 정의를 구성하는 것이다. 절대존재의 합법적 정의로부터 연역이 출발할 때 지성은 절대존재의 “본질, 질서, 그리고 통일성을 표상적으로” 소유할 것이다.
진정한 정의는 정의된 대상의 내밀한 본질을 명확히 드러내야 하며 그 몇몇 특성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요청은 절대존재에게도 개별 존재들에게도 모두 적용된다. 그리고 정신이 앞으로 해나가야 할 작업은 인과적 연역이므로 연역의 출발점인 정의는 인과성을 표현해야 한다. 정의를 통해 표현된 본질로부터, 정의된 대상의 모든 특성들이 그 결과들로서 도출되어야 하는데, 이는 한 대상의 특성들은 그 인과적 본질들의 인식을 통해서 비로소 진정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의를 위한 이러한 조건이 지켜지지 않고 대상이 그 특성들을 통해 정의될 경우 이 대상의 인식은 쉽사리 추상적 인식으로 변할 수 있으며, 그 본질적 진리는 부분적이고 단절적인, 혹은 간단히 말하자면, 비적합한 형태로 은폐될 수 있다. 이는 결국 어느 한 순간에 반드시 연역 절차를 중지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원을 정의한다고 가정해보자: “원은 중심에서 원주까지의 직선들의 길이가 동일한 도형이다.” 이러한 정의는 원의 본질을 표현하지도 못하며 원의 구성요소들의 개념적 종합을 실현하지도 못한다. 실제로, 중심의 관념과 원주의 관념은 이미 원이라는 도형을 가정할 때 비로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정의는 원의 본질을 명확히 드러내기보다는 원의 특성들 중 하나, 즉 반지름들의 동일성을 표현할 뿐이다. 반대로 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해보자: “원은 하나의 직선의 한 끝은 고정되고 다른 한 끝이 회전하여 생기는 도형이다.” 이 경우는 원의 “발생” 자체가 설명된 것이며, 이러한 정의로부터 즉각적으로 원의 특성인 반지름들의 동일성이 도출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정의는 인과적, 혹은 발생학적 정의여야 한다는 것이다. 개별 존재들의 경우에는 인과적 정의는 그것들을 근접 원인들을 통해 설명하여 그 특성들을 도출해내야 한다. 왜냐하면 결과의 인식은 원인의 인식에 의존되기 때문이다. 절대존재의 경우에는 대상의 정의로부터 그 모든 특성들이 도출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 이외에도 한 가지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원인을 요청하는 개별 존재의 정의가 아니라, 유일하고 무한한 절대존재, 즉 그 존재의 외부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는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대상, 즉 자기원인Causa sui의 정의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존재는 그 본질만을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I. 정의는 모든 원인을 배제한다. 즉 설명되기 위해 자신의 고유한 존재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아야 한다. II. 정의가 주어지면, 정의 대상에 대해 그것이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
따라서 가장 완전한 절대존재의 정의는 주어진 원인의 원인을 다시 요청하는 무한 역진에 빠져서는 안 된다. 절대존재의 정의는 원인 없는 원인, 즉 자기원인을 표현해야 한다. 절대존재의 정의는 그 유일한 특이성으로 인해 가장 명석하고 가장 판명한 개념, 즉 가장 적합한 개념이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가장 완전한 절대존재의 관념은 절대진리 자체를 구성함으로써 절대존재가 만물의 원인이듯이 절대존재의 표상적 본질은 모든 참된 관념들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존재의 전체적 설립을 위한 존재론 체계는 절대존재의 관념에서 연역적으로 출발하게 된다.
5. 맺는 말: 윤리학과 존재론
철학적 반성은 삶의 문제로부터 시작되며, 경험적 선들의 상대성에 대한 의식을 통해 참된 관념을 획득하고 그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 지성의 개선 절차라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지성 개선의 궁극적 결과는 절대존재에 대한 참된 관념, 즉 자기원인의 정의를 내리는 데에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실제로, 스피노자의 존재론이 규명되는 ?에티카?는 자기원인의 정의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존재론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은 무엇인가? ?지성개선론?에서도 이미 어떤 방식으로 인간이 경험적 선들에서 해방되는지 제시했고, 정신은 절대존재를 향해야 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윤리학을 위한 존재론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결론을 대신하려 한다.
본 논문의 서두에서 스피노자가 경험적 선들의 예로 쾌락, 부귀, 명예를 든 것을 보았다. 물론 이는 스토아학파에서 이미 제시한 윤리적 구도이기는 하지만, 스피노자의 철학에서는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실,?지성개선론?에서 제시된 쾌락, 부귀, 명예에 대한 분석은 지극히 간결한 것으로 ?에티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정념론에서 깊이 있게 다시 다루어진다. ?에티카?는 ?지성개선론?에서 전혀 고찰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육체의 문제를 제시하고 규명함으로써 상상론, 감정론, 인식론을 정립한다. 즉, 인간이 경험적 선들에 집착하는 이유가 발생학적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리고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Mens humana)이라는 것은 육체의 관념(idea Corporis)이기 때문에, 상상, 인식, 감정, 행복, 자유 등 삶의 모든 측면은 육체의 분석을 통해 고찰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서는 육체와 세계의 관계가 지닌 제 양상들까지 다룰 수 있는 물리학을 토대로 설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 삶의 모든 방식, 세계의 모든 존재 방식, 인간과 세계의 관계가 나타낼 수 있는 모든 것의 근거가 바로 만물의 근원인 신 즉 자연(Deus sive Natura)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총체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 절대존재의 관념을 통한 총체적 연역에 지성의 힘을 적용시켜야 한다.
참 고 문 헌
스피노자의 저작:
스피노자, ?에티카?, 강영계 역, 서광사, 1990.
Spinoza, “Traité de la réforme de l'entendement” in Spinoza Oeuvres com- plètes, Gallimard, La Pléiade, Paris 1954.
스피노자 철학에 관한 문헌:
G. Bosse, “Méthode et doctrine dans le Traité de la réforme de l'entendement”, Studia Spinozana, vol. 2, 1986, pp. 93-108.
Brunschvicg Léon, Spinoza et ses contemporains, 5ème éd., P.U.F., Paris 1972.
Darbon André, Etudes spinozistes, P.U.F., Paris 1946.
Delbos Victor, Le problème moral dans la philosophie de Spinoza et dans l'histoire du spinozisme, Alcan, Paris 1893.
Deleuze Gilles, 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Les éditions de Minuit, Paris 1968.
Rousset Bernard, Traité de la réforme de l'entendement, Introduction, texte, traduction et commentaire, Vrin, Paris 1992.
Zweerman Theo, “L'indication d'une perspective philosophique dans l'introduc- tion du 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 Revue des sciences philo- sophiques et théologiques, n. 71, 1987, pp. 77-94.
Résumé
Introduction à l'ontologie spinozienne
― Lee, Keun-Se ―
L'ontologie, proposée par Spinoza tient un Dieu impersonnel ou Nature pour le principe unique et elle a une structure qui va à la subversion de la métaphysique traditionnelle, laquelle a pour principe un Dieu personnel, doué de l'intelligence et de la volonté. Cette ontologie spinozienne se déploie dans L'Ethica. Mais celle-ci part d'emblée, sans aucun préliminaire ni une introduction, du principe ontologique. Notre article a pour but d'éclairer la raison pour laquelle Spinoza a du commencer son ontologie par la considération sur Dieu, et ceci à partir de l'analyse du Traité de la réforme de l'entendement, pouvant être considéré comme une introduction à l'Ethica. En effet, selon Spinoza, la réflexion philosophique provient du problème de la vie. La conscience de la relativité de l'expérience constitue le seuil de la réflexion philosophique et l'expérience doit être reconstituée à travers une enquête rationnelle. Or, cette dernière ne peut se poursuivre sans égarement qu'en partant d'une idée vraie. La procédure de la purification de l'entendement consiste précisément à montrer que la vérité est immanente à l'esprit humain, et seul l'entendement ainsi réformé est à même d'élargir le champ du vrai. Et pour conduire celui-ci au plus grand élargissement, l'enquête rationnelle devra partir d'une meilleure idée vraie parmi les idées vraies; c'est-à-dire de l'idée de l'Etre absolu. C'est donc l'idée de l'Être en soi, de la Causa sui, qui constitue le point de départ de l'ontologie.
※ Mots-clés : bien empirique, bien et mal, entendement, idée, certitude, cause, définition, dé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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