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존재 이해와 사유 문화의 전환*

나뭇잎숨결 2022. 11. 24. 12:09
존재 이해와 사유 문화의 전환*

최 우 원(부산대)

1. 지식의 문제 상황

오늘날 철학에서 존재와 사유를 이해하는 근본적 시야는 변화하고 있다. 이것은 형이상학이 종래의 사고 수준을 넘어서는 차원으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존재와 사유의 불가분한 관계에 대한 논의는 원초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부터 다시 시작하여야 하며 이제 철학적 지식은 본질과 전체라는 이념을 새로운 관점에서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현대 과학기술 사회의 지식문화 형태를 근원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요구한다. 고도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내세우는 지식들이 한편으로는 연관 고리들을 상실한 채 각각 독방들 속에 고립되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본질적인 역동성을 상실한 채 화석화되어 있는 상태를 보이고 있다. 존재본질로부터 단절되고 내적 연관을 망각한 지식들은 피상화의 길을 걷게 되고 결국 획일화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 있다. 오늘날의 지식 문화는 외면상 매우 다양해 보이지만 지식의 본질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너무도 피상적이고 단순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학적 지식의 형태를 모든 지식의 이상적 원형으로 규정하고 그 이외의 지식 형태는 주관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서 무의미하다고 단정하여 학문에서 배제할 것을 주장하였던 논리실증주의의 사고 방식은 분명 현대 과학기술문명 사회에 내재하는 어떤 강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 이성의 사고 수준을 한계지웠던 일정한 형태의 바탕 원리가 19세기 후반에 극단적인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고 실증주의적 지식 문화는 이러한 경향의 타성적인 연장선상에 위치해 있음을 우리는 보아야 한다. 이러한 획일적 사고문화는 다원적 의미 형태들의 실재성을 이해하지 못하며, 사회적 차원에서는 기존 문화의 통상성을 반복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심층 구조 영역의 내적 상호 연관성을 시야에서 상실하게 되고 스스로를 독방 속에 고립시키게 된다.
본질로부터 유리되어 피상적 수준을 맴돌게되고 구조 연관을 상실한 지식문화는 기계적 효율성의 획일화된 가치에 쉽사리 종속된다. 지식-권력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지식문화의 배후에는 자본에 의한 상업주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획일적인 과학기술주의의 이데올로기로 포장된 상업주의 시대에 있어 수단화된 인간이 과연 자신의 존재 본질에 얼마만큼이나 공감하며 스스로를 확인할 수 있는가? 오늘날 철학마저도 타성에 빠져 그 스스로를 이러한 피상적 문화의 한 표현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철학이 의미의 의미를 진정 논의한 바가 있는가? 일정한 피상적 수준의 언어 놀음에 그친 것이 아닌가?
존재 본질의 망각은 왜곡된 사회 문화에로 이어져 인간 공동체의 형성에 장애가 되고 있다. 스스로와의 공감과 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하는데 어떻게 타자와의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우리가 나누고 있는 것은 내부로부터 우러나와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대화라기보다는 이미 정해진 일정한 틀 내에서의 훈련된 반복이다. 철학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져 보인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다. 현대 철학계에서 인식론과 사회 철학을 전혀 별개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철학자들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지식 문화가 얼마만큼이나 자기 인식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가를 여실히 잘 보여주고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형이상학과 무관한 인식론을 주장하는 사례가 많았다는 사실이 19세기 후반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지식 문화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본 논문에서 오늘날의 철학이 스스로를 극복하여 갈 수 있는 새로운 시야를 시간의 형이상학과 연관하여 찾아보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는 종래의 합리론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존재와 사유의 불가분성을 확인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2. 거꾸로 된 존재 이해

일상적 지식문화의 바탕에 놓여있는 존재 개념은 거꾸로 되어있다. 이러한 전도된 존재 개념으로 인해 우리들은 스스로에 대하여 그리고 또한 사회적 과정에 있어 넘어서지 못하는 장애를 안고 있다. Bergson은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를 착각의 역사로 설명하고 있으며 Bergson의 영향을 받은 Heidegger는 존재 망각의 역사로 규정하고 있다. 착각, 망각, 전도, 역전, 실향성등은 일상적 차원의 존재사고 방식이 안고 있는 문제를 드러내 주는 용어들인 것이다. 지적으로 사고한다고 생각할수록 자아 본질로부터 멀어져 거꾸로된 인위적 추상물의 세계에 빠져버린다면 어떻게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겠는가? 합리성의 미명하에 기계적인 효율성의 획일화라는 이데올로기에 빠져버린 사회에서 어떻게 진정한 인간 공동체의 문화가 형성될 수 있겠는가? 합리주의를 자처한 Réné Berthelot의 존재 세계 이해 방식을 살펴보자. 그의 Bergson 비판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풍미한, 그리고 아마 오늘날에 있어서도 우리의 일상적 사고 방식의 어딘가에 숨어있는, 일반적 지식 문화의 저변에 놓여 있는 일정한 사고의 경향과 틀을 잘 보여준다. Bergson의 시간의 형이상학에 대한 그의 비판은 합리주의적 세계 이해의 근본 원리로서 다음의 내용들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물리학에 있어서든 심리학에 있어서든 실재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원자론적인 모델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물리적 세계는 엄격한 물리적 결정론의 세계이며 따라서 비결정성을 도입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사고 방식이다. 셋째, 절대 시간과 절대 동시성에 대한 부정은 과학적 합리주의의 이름으로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이러한 개념틀은 전문적 수준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붕괴되었지만 타성적이고 무반성적인 일상적 사고 수준에서는 아직까지도 상당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리적 차원에서든 생물학적 차원에서든 심리학적 차원에서든 사회적 차원에서든 모든 존재 세계에 대한 탐구는 과학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과학의 이름으로 제시된 해당 분야의 지식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없이 확정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과학에 대한 근본 이해가 잘못 되어 있는 점 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이러한 통상적 과학기술주의가 가지고 있는 존재 개념이 거꾸로 된 오류 개념임을 지적해야 한다. 과학적 방법으로서의 환원적 분석은 인간 지능의 강한 내재적 경향으로서 공간화, 양화를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대상을 원인-결과의 결정론의 틀 속으로 밀어 넣으려 한다. 지능이 생산한 과학의 개념과 틀, 방법 등은 죽어있는 물질을 도구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물질 세계를 변형시켜 수단화하려는 기술적 관심과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과학적 지식이 알려 주는 것은 대상 세계를 우리의 삶을 위해 도구화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 것이지 결코 대상 그 자체의 본성, 본질은 아닌 것이다. 우리와 대상 세계 사이에 지능을 매개로 한 간접적이고 상징적인 상호작용의 관계 체계가 바로 과학의 지식이며 이러한 과학은 공간화된 인공적인 개념틀로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과학적 지식을 산출하는 우리들 삶의 근원적 존재를 망각한 채 획일적인 시대의 타성에 젖어 기계적인 사고 방식을 무차별적으로 우리의 존재 자체에까지 적용하고자 한다. 형이상학의 근원적 지평에서 보았을 때 우리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살아있음”과 “죽어있음”의 혼동인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가치 전도의 원인으로서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존재론과 인식론의 근원을 되물어가서 존재와 사유의 불가분한 원초성을 되찾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존재 세계에 대한 이해가 열리는 과정을 되돌아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앎의 바탕에 이미 불가분하게 내재하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앎은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 사유하는 살아있는 우리들의 존재인 것이다. 이처럼 형이상학의 원초성의 지평으로 되찾아 갔을 때 우리는 분명히 “살아있음”의 개념으로부터 “죽어있음”의 개념이 파생되어 나오는 것이지 결코 “죽어있음”의 개념들을 모아서 “살아있음”을 재구성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오늘날의 일상적 사고 문화는 분명히 거꾸로 된 존재 개념에 깊이 물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존재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라는 뿌리를 상실함으로써 기술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 채 진행되고 있는 생물학, 심리학에서의 기계론적 작업들은 무의식중에 가치 전도적인 상황을 조장하고 있다. “살아있음”의 개념은 의식의 연속성과 역동성을 신체-행동과 불가분한 관계에서 파악하고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의미론적으로 확장하여 사회적인 구조연관의 총체성 속에서 지식이 활동하는 현장 모습을 실재의 본질과 전체 그 자체로서 파악함으로써 성립한다. 불가분하게 얽혀 있는 존재의 여러 층들 중에서 신체로서 드러난 표피적인 층의 물리화학적 과정들에 대한 기계론적 탐구는 기술적 관심의 측면에서는 그 의미를 인정할 수 있으나 그것이 존재를 본질에 있어서 설명해주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착각 그 자체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생리학적 심리학과 분자 생물학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러한 한계 내에서이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 초에 걸쳐 큰 영향력을 가졌던 심리 연합설(associationisme)은 그러한 의미마저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식의 본질과 활동 그 자체를 설명하고자 하였으나 수면 위의 의식으로 드러난 과정들을 읽어내는 초보적 수준에서 이미 실패를 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류는 근본적으로 현전하는 지각-의식과 기억의 관계를 심리과정 자체 내에서 섬세하게 읽어내지 못한 데에 기인한다. Descartes 역시 이러한 초보적인 단계에서 실패함으로써 오류를 증폭시켜간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Descartes는 현재를 과거, 미래와 완전히 단절된 수학적 점으로서의 순간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현전성은 현재의 순간이 지나가 버림과 더불어 없어져 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정의에 따라 존재하는 것은 현재 뿐이기 때문에 이 현재가 과거로 사라짐에 따라 이 세계도 같이 없어질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는 도대체 어떻게 이 세계가 존속할 수 있는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Descartes는 신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는 신이 매 순간에 있어 이 세계를 무한한 횟수로 재창조하기 때문에 이 세계가 존속하고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어리석음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심리연합설, Descartes 모두의 오류는 존재와 시간의 본질을 읽어내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지능에 의해 공간에 투사되어 추상화된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원초적인 실재로서 살아서 체험되는 현재를 세밀하게 들여다 보아야 한다. 현재의 지각장은 주체와 객체가 불가분하게 얽혀 있는 전체장(le circuit total)이며 진정한 의미의 현재는 수학적인 점으로서가 아니라 지속의 두께(épaisseur de durée)를 가지고 성립하는 것을 우리는 확인 할 수 있다. 이러한 살아있는 현재의 지각은 과거의 기억이 침투된 상태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기억과 분리된 지각은 한갖 추상적인 개념일 뿐 실재장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시간에 있어서 과거는 현재에 침투하여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시간과 존재의 연속성은 여기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들여다 보지 못함으로써 심리연합설, 데까르트 등은 지능의 타성에 따라 공간화를 맹목적으로 적용하여간 것이고 결국은 본질과는 전혀 역방향의 지점에 봉착하고 만 것이다.
지능의 조작적 메카니즘을 타성적으로 추종하는 것을 벗어나 존재 개념의 원초성에로 되돌아 왔을 때 우리는 존재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 방식이 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살아있음”으로서의 근원적 존재 개념과 본질적 역동성과 구조적 전체성을 회복한 사유 개념이 본원적 영역에서 합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근원 개념으로부터 다양성의 새로운 질서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살아있음”의 개념으로부터 희석화의 방식에 의하여 “죽어있음”의 개념이 파생되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지능과 오성은 사유의 전체 과정 중 부분으로서 도구적 목적을 위한 조작적 메카니즘이며 이 메카니즘이 사용하는 도구 개념들이 놓여있는 지평은 공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3. 과정-실재와 내적 연관

이제 형이상학은 과거의 오류로부터 벗어나 시간의 본질적 지평 위에서 과정 자체(le progrés même)를 실재로 파악하는 새로운 시야를 발전시켜 갈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야에서는 존재 세계에 대한 공간적 표상을 실재 자체의 본성을 그려내는 것으로 착각하던 수준을 벗어나 지능의 도구적 조작에 의한 추상물로 인식함으로써 Descartes, 유물론, 기계론등이 빠질 수 밖에 없었던 오류를 극복할 수 있다. 과정 자체를 실재로 파악하는 형이상학의 관점은 오늘날의 물리학의 내용들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에로의 길을 열어놓는 데에 기여한 De Broglie의 물질파 개념은 Bergson의 형이상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Bergson은 물질을 공간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시간의 차원에서 정의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물질도 과정-실재로서 정신과 같이 시간성을 공유하는 것이며 단지 물질에 있어서는 그 지속이 희석화되어 있을 뿐이다. 사유하는 정신과 물질화된 신체는 과정을 실재로 파악하는 시간의 형이상학에서는 서로의 얽힘과 상호작용이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존재 세계에 대한 새로운 형이상학의 시야는 실증주의, 과학주의의 굳은 사고 방식에 가려 은폐되어 있던 사유-신체-행동의 보이지 않는 구조연관을 하나의 불가분한 전체장 속에서 설명할 것이다. 또한 구조 연관의 역동성에 관한 인식은 자연스러운 연결 고리를 찾아 나아가 이미 우리의 사유-행동 속에 스며들어와 있는 문화와 사회의 의미 연관을 찾아 낼 것이다.
철학은 존재를 그 본질에 있어서 그리고 전체의 구조 연관에 있어서 인식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시간의 형이상학은 실재를 과정 자체로서 파악하고 있으며 실재 과정들의 상호 침투와 얽혀진 모습을 보여준다. 실증주의, 과학주의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이러한 시야는 미래 지식 문화의 방향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논리실증주의는 종합의 학으로서의 철학의 시대는 끝났으며 철학의 작업은 자연과학 언어의 분석에 국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이것은 근대 오성과 그 타성적 영향 하에 놓인 오늘날의 지식 문화의 피폐함을 극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는 사례에 불과한 것이다. 논리실증주의는 분석과 종합의 관계를 파악하는 초보 수준에서 이미 오류를 범하여 버렸다. 분석과 종합은 서로 대립하여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분석의 작업은 이미 배면에 보이지 않는 종합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며 종합 역시 얽혀 있는 구조에 대한 분석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논리실증주의가 이해하였던 과학은 착각에 불과하였으며 근본적으로 그것의 오류는 과학-기술적 인식의 의미 형태가 다원적인 의미 세계들 중의 하나의 형태로서 삶의 존재와 어떠한 연관을 맺고 있는가를 인식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근대 이성이 타성에 빠져 본질적인 자기 인식에 도달하지 못한 채 화석화 되어버린 하나의 극단적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전문화와 효율화라는 미명 하에 독방 속에 갇혀 고립되어 버리거나, 굳어 화석화된 개념 체계 속에서 기계적인 분석의 세밀화를 수행하고 있는 모습 등은 오늘날의 지식문화의 문제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존재를 망각한 채 거꾸로의 길을 가고 있는 사유의 이러한 전락의 장면은 오늘날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비록 형태는 전혀 다르지만 고대, 중세의 형이상학 역시 망각과 역전의 함정에 빠졌음을 우리는 확인하고 있다. 이 과정은 동일한 주제가 각 시대에 있어 다른 형태의 변주곡을 낳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근본 바탕에 놓여 있는 착각의 주제가 무엇인가를 드러내야 할 것이다
형이상학은 이제 망각된 존재 본질을 회복하고 은폐되었던 의미연관을 되살려내는 새로운 종합의 길을 가야할 것이다. 이 종합은 실재의 역동성과 의미연관에 근거한 활동으로서의 사유인 것이지 합리론적인 도출로서의 체계화는 결코 아닌 것이다.


4. 자기 인식의 실패

죽은 것을 가지고 산 것을 재구성하려는 억지를 버리고 원초성으로 되돌아가 살아있음으로부터 존재 이해를 새로이 시작할 것을 논한 바 있다. 이러한 존재 이해의 형이상학은 다음과 같은 주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는 과정 자체(le progrés même)를 실재로서 파악하는 것이다. 둘째는 “살아있음”으로부터 개념을 비워감으로써 “죽어있음”, 즉 타성(inertie)의 개념에 도달한 것임을 확인한다. 근대오성은 착각에 빠져 이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유는 존재 본질 그 자체인 것이다. 셋째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의식은 이를 위한 한가지 형태이자 방식이다. 생물계에서 보는 바와 같은 다양한 심리적 활동과 삶의 방식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의 근본적 관점은 존재 세계를 열린 세계로서 파악하며 상호작용의 얽혀진 구조를 중시한다. 또한 삶을 그 자체로서 바라보기 때문에 의미와 문화의 다원성, 다양성을 실재로서 확인한다. 그런데 종래의 철학은 이 세계를 새로움이 있을 수 없는, 반복만이 되풀이되는 닫힌 체계로서 파악하거나, 상호침투의 사실을 간과하고 원자적 체계로 재구성하거나, 의미와 문화의 획일성을 철학의 이름으로 강요하는 어리석음을 계속하여 온 것을 우리는 철학사에서 너무도 많이 보고 있다. 철학은 자기 인식이라는 목표를 향하여 계속 노력은 하여 왔으나 함정과 착각에 빠져 계속 헛돌았던 것이다. 도구화를 위한 기계성의 개념 체계는 이 과정에서 발전하여 기술문명의 혜택에 연결된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존재 본질에 관한 이해는 거꾸로의 길 속에서 헤메이고 있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비인간화는 바로 여기에 직결되어 있다. 죽어있는 물질들을 다루는데 적합하게 고안되어온 도구적 개념의 체계와 사고 방식이 그 발생적 연관을 망각하고 존재 본질 자체에까지 역류하여 무차별하게 적용됨으로써 존재이해의 세계가 기형화되고 혼란에 빠져버린 것이다. 지식의 소외, 개념과 직관의 분리, 도구와 본질의 혼동은 서구 이성주의 철학이 빠져있는 문제 상황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원초성으로 되돌아가 살아있음으로서의 근원적 존재 개념을 되찾아 냈을 때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이 존재 개념이 사유-신체-행동으로 불가분하게 연결된 인식과정의 개념과 합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사유-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형이상학과 인식론이 불가분한 본원적 관계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점에서는 고대로부터 근대에까지 이어져 온 합리론적 형이상학과 외양상 유사할지 모르나 실제로는 정반대되는 세계이해 방식인 것이다. 합리론적 형이상학이 주장한 영원한 차원의 존재는 실상은 과정 자체로서의 실재를 절단하여 공간에 투영하고 논리적으로 추상하여 만들어낸 인위적 가공물일 뿐이다. 이것은 유용성을 위하여 지능이 공간이라고 하는 무대에서 도구적인 개념들을 가지고 행한 조작들의 결과물인 것이다.
사유의 측면에 있어서 합리론적 인식론은 사유로서만의 사유, 즉 경험, 행동, 신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순수사유만을 주장하였으나 이러한 오류 역시 존재이해에 있어서의 오류와 그 근원을 같이 하고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인식한다는 것이고 이 인식은 사유-신체-행동의 과정이 주변 세계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인식론의 상당한 부분이 신체, 행동과의 연관에 대한 시야를 상실한 채 과학 이론의 분석에 논의를 국한하고 있다는 것은 애석한 사실이다. 결국 과학의 본성에 대한 근본적 논의의 장은, 즉 존재와 과학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이들에 있어서는 열려있지 못한 것이다. 또한 이들과는 달리 인식을 신체-행동과 연결하는 현대 인식론자들의 경우에도 인식과정의 전체장을 보지 못하는 한계는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신체-행동 과정에만 주목하지 실재로서의 정신과정과 관련한 형이상학적 논의는 공백지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정신과정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단지 부수현상에 불과한 것으로 보거나 신체를 매개로 한 의식과 무의식의 운동성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철학으로서의 인식론은 존재-인식과정의 전체 중 어느 한 부분만을 떼어내어 고립시키고 전문적으로 분석하는 개별 실험 과학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실재 과정을 그 본질에 있어 그리고 그 전체로서 다루고자 하는 것이 철학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인식론에 있어 우리의 자아는 현전하는 의식의 보이지 않는 심층부에서 움직이는 무의식의 영역에까지 확대된다. 종래의 인식론은 수면 위로 드러난 의식 만을 가지고 자아로 파악하였으며, 그 의식의 내용 중 일부에 해당하는 지능적 개념 체계와 그것의 사고 방식 그리고 그에 의존한 인식 체계를 오성 또는 이성이라는 이름 하에 인식과 사유의 전체로서 규정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지각의 과정을 Theoria적 입장에서 잘못 읽어내는가 하면 더 나아가 지각장의 내면적 구조를 원자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거듭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볼 때 인식론사는 자기 인식의 실패로서의 역사인 것이다. 이제 인식론은 자기 인식의 과정을 원초적으로 새롭게 그리고 세밀하게 다시 읽어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종래의 인식론을 오류로 이끌고 간 근본 바탕에 어떠한 착각이 놓여 있었는가를 드러내야할 것이다.
과거의 인식론은 인식 과정이 지니고 있는 운동성의 모습을 그 자체 내에서 세밀히 읽어내지 못하고, 지적인 메카니즘이 인위적으로 절단하고 정지시켜 놓은 지각상을 실재로 잘못 파악하고 그것의 분석에만 몰두함으로써 과정과 운동 자체가 가지고 있는 실재성의 모습과 의미가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럼으로써 무의식에 있던 기억이 지각에 침투해 들어오는 과정, 주체와 객체가 불가분하게 얽힌 역동장(le champ dynamique)으로서의 지각의 전체장(le circuit total), 지각의 신체와 연관된 운동성 등이 모두 상실되어 버렸고 이러한 자아의 본질적 모습은 종래 인식론에서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존재 본연의 활동 모습과 다양하고 미세한 의미 연관들이 은폐되어 버린채 인식론은 과학 이론으로서의 테두리에 갇혀 버리거나 의미세계의 본질을 망각하고 다원적인 의미세계에 자연과학적 의미의 획일적인 잣대를 강요하는 조악한 수준으로 전락해 버렸다. 오늘날 전문성, 효율성의 미명 하에 독방에 고립되어 있는 지식들의 왜곡된 문화 상태는 이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근대 이성 철학은 존재 개념 자체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신과 신체가 어떻게 연관을 맺을 수 있는지, 도대체 정신과 신체가 어떠한 실재과정들을 의미하는 지를 설명할 수 없었다. 또한 신체를 매개로 한 의식과 무의식의 활동 모습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사유와 인식 활동의 근거로서의 무의식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19세기 후반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무의식의 실재성에 관한 철학적 논의가 비합리주의로 매도되었다는 사실은 근대 이성의 사유 수준의 한계를 잘 말해주고 있다.
동일한 연장선 상에서 이러한 한계는 자유를 존재 본질로서 그 원초성에 있어서, 그리고 그 절대성에 있어서 확인할 수 없게 하였다. 자유와 필연에 대하여 이율배반을 주장하거나, 자유를 실천이성의 요청개념으로 보거나, 자유와 필연의 변증법적 통일을 주장하는 등의 여러 설명 방식들이 있었지만 자유를 존재 본질 그 자체로서 파악하지는 못하였다. 합리적 사고는 엄격한 인과율의 틀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근대 이성주의 철학 전반을 지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서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유의 원천적 사실 또한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근대 이성주의 철학은 자유와 필연의 문제를 이론적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보거나 아니면 변증법적인 통일이라는 이름 하에 양립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에 도달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사유가 자기 자신을 분명히 들여다 보지 못한 데에서 생긴 오류인 것이다. 자유와 필연의 문제는 이론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또한 변증법에서와 같이 자유가 사실상 필연 속에 귀속하는 것도 아니다. 사유가 자기 의식에 충분히 도달하지 못함으로써 그 자신의 본질과 전체를 읽어내지 못하였고, 따라서 부분으로서 자기 내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적인 사고 장치들의 기능과 본성을 파악하지 못한 데에서 자유와 필연의 문제가 생겨난 것이다. 오성, 이성, 지능으로 불리우는 지적인 과정들은 그들 사이에 의미의 차이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들이 사용하는 개념장치들과 사고 방식은 공간화와 이를 통한 결정론적 체계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것들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지적 개념 장치들과 사고 방식이 우리를 닫힌 세계 이해에로 이끌고 간 사례를 우리는 철학사에서 너무도 많이 보고 있는 것이다.


5. 사유의 거울

사유가 존재 개념의 원초성에서 자기 의식을 되찾을 때 우리는 이러한 사고의 수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공간화와 결정론적 체계화의 경향을 지닌 지적 개념 장치들과 사고 방식은 죽어있는 물질 세계를 수단화하고 도구화하기 위한 기능으로서 발생하고 진화해 온 것임을 Bergson은 밝히고자 한다. Piaget는 Bergson과는 달리 지능이 물질에 대한 행동으로 부터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행동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지능이 결정론적인 강한 사고 경향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즉 반성적 수준의 지능은 행동의 각 단계들에 대한 인식을 동시적인 하나의 전체로 용해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른 사고 속도를 가지며 행동의 기대되는 결과뿐만 아니라 그 과정까지도 예상함으로써 해결 과정 전체를 의식화하려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능은 관심의 대상이 된 세계의 전 진행 과정을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동시적인 하나의 전체 속에서 파악하려 하기 때문에 폐쇄적인 세계 이해의 틀 속에 갇히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하나의 강한 사고 경향에 의한 추상물일 뿐이다. 사유가 자기 내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다양한 의미 형태의 활동들에 대한 시야를 잃어버리고 한 부분에만 몰두함으로써 그 부분이 가지고 있는 틀과 사고 경향을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착각한다면, 그리하여 그 틀과 사고 경향을 전 사유과정과 존재 이해에 씌워버리게 된다면, 그리고 이렇게 하여 형성된 철학이 시대적 타성에 편승하여 확산됨으로써 사회 제도와 문화의 보이지 않는 무의식적인 저변부에 숨어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고 결국은 권력 구조화하여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철학사에서 우리는 초월적 형이상학, 선험주의, 변증법, 실증주의 등을 이러한 불행한 의식의 사례들로서 확인할 수 있으며 오늘날에 있어서는 특히 실증주의의 한 형태인 과학기술주의 속에서 존재망각의 극대화된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서양 철학사에서 되풀이된 이러한 오류는 사유와 지능의 관계를 잘못 파악한 데에서 비롯한 것이다. 지능이 사유의 거울인 것이지 사유가 지능의 거울인 것으로 착각해서는 결코 안되는 것이다. 사유의 존재 망각은 세계 이해에 왜곡을 가져왔고 진정한 공동체 문화 형성에 장애물이 되었다. 존재 망각은 동시적으로 내적인 구조 연관과 의미 연관의 시야 상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 대화는 일정한 피상적 수준에서의 훈련된 습관적 반복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지식은 독방 속에 감금되어 버렸기 때문에 심층부에서 움직이는 구조와 의미의 발생과 얽힘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활동으로부터 다양한 구조들과 의미세계들이 발생하고 상호작용하면서 변화하는 과정을 읽어내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 인식이 닫혀져 있음을 말함과 동시에 타인, 타문화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열려져 있지 못함을 뜻한다. 예를 들어 지식이 존재와의 불가분한 관계를 망각하고 객관성의 환상에 빠져 자연과학적인 형태를 지니지 않은 지식들과 문화들을 주관적인 것으로서 무의미하다고 규정하고 그 존재 가치를 부정하여 학문의 영역에서 배제할 것을 주장한다면 그 보다 더한 착각과 의식의 불행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피상적이고 고립된 그리하여 획일화된 지식 문화의 정치적 동의어는 권력구조로부터 타자화된 수동적 삶이다. 지식학의 전략에 의해 무력화된 개인들의 눈에는 더 이상 존재-인식-사회구조를 불가분하게 연결하는 고리들이 보이지 않게 된다. 이제 사회적 관계는 단절된 개체들의 모임이고 전 사회적 존재 과정이 서로에게 수단화되고 도구화된 교환의 과정으로 전락하게 된다. 수단과 도구를 본질로 착각하는 문화가 제도로서 자리를 굳히고 지배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원자론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단절되고 고립된 동질적인 타자들의 세계가 결코 아니다. 이 세계는 서로에게 침투하여 서로에게 의존해 있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질적인 타자들의 세계인 것이다. 생물의 형태, 문화, 종교 등을 특징지우는 존재세계의 이질적인 다양성들은 존재 내부로부터의 자발성에 의한 창조적 자기 표현들로서 긍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다양성을 산출한 존재 활동에로 거슬러 올라가 그 발생 과정을 읽어낼 때 진정한 이해와 공감이 형성되는 것이다. 존재의 의미는 분할하여 가르고, 다르다는 이유로 도구화, 수단화하여 지배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타자들 사이에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고 함께 나누는 데에 있는 것이다. 존재를 망각함으로써 길을 잃은 지능이 비인간화의 방향을 맹목적으로 추구하여 간다면 그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우리는 철학의 역사가 존재 망각과 착각의 역사였다는 사실이 오늘날 무엇을 경고하고 있는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6. 현전과 의미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존재의 원초적 개념은 사유의 자기 의식 속에서 성립한다. Descartes의 Cogito ergo sum 은 사유와 존재 개념의 불가분성을 확인한다는 점에서는 의의를 가지고 있으나 그 원초성의 내적 본질을 읽어내는 데에 있어 피상적 차원에 그쳐버렸고 그 이후 이와 유사한 상황은 반복되어 근대 이성의 한계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오류는 근본적으로 사유가 지능을 자신의 거울로 삼지 못하고 역으로 사유가 지능의 거울이 되어버린 데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러한 사고 수준에서는 지능의 발생과 변화 과정, 지능과 전체 사유와의 의미 연관, 다양한 의미 세계의 상호작용등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수단에 불과한 것을 본질로 생각하는 착각이 일어나게 되고 결국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거꾸로된 존재 이해 방식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굳어진 사고 방식이 존재 개념에 영원한 것을 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결코 존재가 과정 그 자체로서 이해되지는 않는 것이다. 이 세계에 대한 개념적 이해에 있어 운동, 변화, 이질성 등이 일차적인 것이고 정지, 불변, 동질성 등은 덜어냄의 방식에 의해 차후에 파생된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Leibniz는 합리론의 역전(inversion du rationalisme)을 주장하면서 원초성의 영역에 접근하기도 하였으나 과정 자체를 존재로 이해하는 단계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하였다. 미적분학의 체계를 발전시키면서 Leibniz는 동등성은 비동등성을 감소해간 과정의 극한이라고 정의하였으며 같은 연장선 상에서 수, 점, 선과 같은 불연속적인 요소들을 연속적인 과정 속으로 통합시켜 버렸다. 정적인 요소들을 연속적인 과정 속에서의 한 순간 상태들로 본 것이다. 이제 정지, 동시성, 동일성, 불연속성은 파생된 것으로서 2차적으로 정의되며 운동, 차이, 연속성이 선행 개념이라는 사실을 Leibniz는 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사고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사유의 역동성 속에서 존재의 원초개념을 찾아내는 일은 결코 하지 못하였고 근대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한 표현 형태로서의 형이상학에 그치고 말았다.
사유가 모든 철학적 논의의 출발점인 현전(présence)을 정밀하게 읽어내지 못함으로써 오류의 역사가 되풀이되어 온 것이다. 활동하고 있는 과정 자체로서의 현전 속에서 존재와 사유의 원천적 불가분성을 확인하지 못하고 또한 의식 내에서의 의미 연관들의 생생한 상호작용을 밝혀 드러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세계 이해와 공동체 형성을 위한 지식 문화의 보이지 않는 저변이 왜곡되어 기형화된 타성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철학사에서 현전에 관한 논의가 오류를 거듭해 온 것은 현전을 그 자체의 실재 과정에서 읽어내려 하지 않고 잘못된 시간 개념에 의해 현전을 정의하고 재구성하려 했기 때문이다. 즉 실재하는 현전 과정(progrés)을 수학적 점에 해당하는 정지된 순간 상태(état)라는 추상적 개념 속에 억지로 밀어넣으려 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지속의 두께(épaisseur de durée) 속에서 그 의미 연관성과 운동성을 읽어낼 수 있는 기억의 현전에의 침투, 무의식과 의식의 관계, 현재의 지각과 중추 신경계, 감각 운동계와의 불가분한 연관들은 정지된 순간 상태로서의 추상적인 현재 개념 속에서는 보여지지 않는다. 실질적인 본질 내용이 사라져버린 시야의 공백 상태를 대신 차지하게 되는 것은 Theoria적인 종래의 인식이론들이거나 또는 Descartes에서 본 바와 같은 신의 무한한 재창조 등의 허구 개념들 뿐인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잘못된 시간 이해 방식은 운동, 변화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데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Zénon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추상적이 아닌, 우리가 직접 확인하는 실재하는 현재는 수학적 점이 결코 아니며, 그것은 두께(épaisseur)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가장 단순한 감각질(qualité)을 살펴보더라도 알수 있다. 색깔에 대한 지각이 우리의 의식에 성립하기 위해서는 수 많은 파장들이 감각기관을 진동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리에 대한 지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러한 파장들을 지속하는 두께를 가진 현재 속에서 질(qualité)로 응축시켜 지각하고 있는 것이다. 두께를 가진 현전하는 의식장 또는 지각장(le champ perceptif)에서 우리가 정밀하게 읽어내야 할 것은 활동하고 있는 의미 연관성과 행동 연관성이다. 이 두 가지는 이미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추상적 사고라 하더라도 이것은 상징 기호, 부호들을 매개로 하여 세계와 간접적으로 상호작용한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지 행동연관성은 본질적이다. Piaget는 이러한 의미에서 사유를 내부화된 행동(actions intériorisées)이라고 부르고 있다. 대상에 대한 지각의 경우에 있어서 지각은 과거의 기억이 이미 그 안에 침투되어 있는 상태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실재하는 현전에 있어 지각은 기억과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기억과 완전 분리되어 있는 지각, 따라서 전혀 기억이 침투해 있지 않은 지각, 즉 대상만으로서의 대상에 대한 지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똑 같은 의미에서, 살아있는 실존하는 현재에는 과거가 침투하여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와 완전 분리된 수학적 점과 같은 현재는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현전하는 지각장이 주관과 객관이 불가분하게 얽혀있는 전체장(le circuit total)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과학 철학, 인식론에 있어 순수 객관성이라는 이념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인식과정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한 눈먼 개념일 뿐이다. 그런데 이 전체장이라는 개념의 보다 심층적 의미는 무엇일까? 기억이 침투한 현재의 지각과정은 대상에 대한 우리의 행동 반응의 윤곽이 그려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우리의 의식적 지각에 있어서 파악되는 것은 그 자체, 전체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다양한 요구, 관심에 관계되는 부분들 뿐인 것이고 나머지 부분들은 드러나지 않은 채 통과하여 버리는 것이다. 지각과정은 기억, 신경계, 감각운동계와의 불가분한 연관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우리가 내부에서 직접 확인하는 사실이다. 인식-신체-행동의 과정은 불가분한 하나의 통합된 과정인 것이다.
기억이 현재 의식에 침투하는 과정은 현재 상황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과거의 의미 연관들을 되살려 물고 들어오는 과정이다. 현재의 문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의식이 첨예해지면 해질수록 침투해 들어오는 의미연관들은 더욱 다양해지고 풍부해지며 이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한층 더 활발해진다. 이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의미연관들은 서로에게 불가분하게 얽혀 일정한 형태로 구조화된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으며 평소에는 무의식 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배면 구조로서 작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논리적 원자론(logical atomism)은 의식과 의미의 이러한 질서를 파악하지 못한 데서 생겨난 착각일 뿐이다. Bergson, Duhem, Piaget는 구조화된 전체로서의 의식의 활동을 강조하였다. Bergson은 질적 다양성(multiplicité qualitative)의 개념에 의해 수적 다양성(multiplicité numérique)에 입각한 세계 이해 방식을 극복할 것을 제시하였고, Duhem은 과학이론들이 구조적으로 연결된 전체를 이루고 있음을 강조 하였으며, Piaget는 지능이 어떠한 발생 단계들을 거쳐서 안정된 집단화(groupement) 체계의 평형상태에 도달하게 되는가를 밝혔던 것이다. 한 개념의 의미는 고립되고 독립된 상태에서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불가분하게 상호의존하고 있는 구조화된 전체의 연결망 속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사실들을 생각해 볼 때 Derrida의 형이상학 해체론은 형이상학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한 오류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차연 개념 자체가 Bergson의 질적 다양성(multiplicité qualitative) 개념을 모방하고 있으며 그 개념의 성립 근거는 시간의 형이상학에 있는 것이다. 철학의 임무는 단순한 해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형이상학들이 범한 오류를 그 발생 원인으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새로운 시야를 찾아내는 데에 있다. 우리의 사유에 내재하는 뿌리깊은 착각의 경향, 보이지 않는 구조틀로서 습관화되어 버린 지식-권력의 체계를 내려다봄으로써 역사적 문화로서의 형이상학들이 발생하고 활동한 과정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근본적 형이상학은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존재 상황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며 새로운 존재 실현에로 나아가는 길이다. 우리의 사유-존재는 항상 열려져 있는 체계인 것이다. 철학은 우리의 역동적 본질에 눈뜨고 이제까지 드러나 보이지 않던 저변에서 상호작용하는 다양한 의미연관들을 정밀하게 읽어 낼 것을 임무로 삼아야 한다. 열려진 체계에서의 이러한 ‘읽어냄’은 새로운 지향과 발생을 의미하며 이것은 형이상학이 본질적으로 역사성과 사회성에 기초하고 있음을 말한다.
의미는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활동이다. 우리의 사유에서 활동하는 의미 세계들은 국지적인 다양성들을 이루고 있다. 이 다원적인 의미 세계들은 활동으로서의 존재 본질이 지닌 다양성을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다원적인 의미 세계들은 모두 존재 본질에 뿌리를 두고 활동하는 실재 과정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하며 이 형태와 차원이 다른 다양성들을 어느 한 형태의 의미 세계에로 환원하려 하는 것은 획일화의 함정에 빠져버린 의식의 불행을 말해줄 뿐이다. 만일 철학과 예술이 이루고 있는 의미의 세계들을 자연과학이 가지고 있는 도구적 수준의 의미 기준을 가지고 이해하려 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오늘날 과학-기술 문명 사회의 지식 문화는 인문학, 사회과학을 자연과학 내지는 공학과 동일한 사고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획일적 경향 속에 점점 더 빠져들고 있음을 우리는 경계해야한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가 존재 본질과 사회적 연관 관계에 대하여 깊은 망각 속에 잠드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보이지 않는 배후의 지식-권력체계에 완전히 예속됨을 말해준다. 우리는 의미와 문화에 대하여 존재 본질의 관점에서 다시 한번 새로운 이해를 구해야 하며 진정한 인간성의 재발견과 재통합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의미는 삶과 세계와의 상호작용 과정이며 또한 삶의 자기 성찰 과정이다. 이러한 의미가 변화, 발전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또한 다양한 의미세계들이 서로에게 침투하여 상호작용한다는 것은 우리의 사유와 행동이 우리 인격의 종합적 표현인 것과 같다. 다양한 의미 세계들은 서로 구분이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구분이 단절이나 고립의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류이다. 서로 다름으로써 구분이 되지만 내면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불가분한 연관 관계를 맺고 있는 실재 세계의 이러한 다양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타성적이고 습관적인 공간적 사고 방식을 넘어서야 하며 진행 과정 자체로서의 세계가 가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내적 질서를 읽어낼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사유를 열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시간의 형이상학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7. 결 론

철학사는 두 부류의 철학이 존재하여왔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시대의 타성에 젖어 기계적 분석을 일삼은 철학과 부단히 존재 본질과 자기 인식에 다가서고자 기존틀의 극복을 향해간 철학들이 존재하여 왔음을. 오늘날 우리는 과거의 철학들이 빠져 있던 오류들을 밝히고 그 근원으로부터의 발생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시야를 찾아가야 할 것이다.
과거 형이상학의 대부분은 영원의 차원에서 존재를 논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그 체계성이 완성될수록 진정한 실재의 세계로부터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거의 모든 인식론이 사유과정의 어느 한 부분에서의 경향에만 의거하여 사유와 진리 전체를 규정하려한 그러한 망각과 착각의 오류를 증폭시켜 왔다.
오늘날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서양 철학사에서 존재를 밝히는 진리의 빛으로 상정하였던 이성이 사실은 그 실체가 기능적 지능에 불과했던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바로 이러한 근원적 착각 때문에 철학이 존재 본질에 도달할 수 없었고 사유를 논함에 있어서도 그 전체 연관 구조의 역동성에 다가서지 못하고 결국 화석화된 획일적 사고의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 오늘날 과학과 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하지만 삶의 존재 세계, 즉 인류 공동체로의 길은 아직도 요원한 채 지식 문화가 존재 망각과 착각에서 맴돌고 있는 것은 이러한 사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우리는 원초점으로 되돌아가 이러한 오류의 발생 과정을 읽어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이러한 작업은 단순한 해체이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며, 실재 세계는 그 살아있는 본질과 얽혀 움직이는 전체장에서, 그 구조 연관의 현장에서 복잡한 다원성의 상호작용으로서 드러나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과거의 형이상학을 근본적으로 극복한 시간의 형이상학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이러한 새로운 시야에서 존재와 사유의 불가분성은 그 토대가 되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