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헤겔의 아름다운 영혼 개념에 관한 연구

나뭇잎숨결 2023. 2. 18. 10:51

헤겔의 아름다운 영혼 개념에 관한 연구

 

 

 

A Study Of The Concept Of Beutiful Soul By Hegel

 

Byung Chang Lee   철학전공 교수 이 병창

Professor. Ph. D,  Byungchang Lee

Department of Humanities, Dong-A University.

 

 

초록

 

 

헤겔은 예나 시대에 쉘링으로부터 낭만주의 철학에 접하게 되면서, 한편으로 그것에 매료되기도 했지만 다른 편에서 그는 횔더린 등으로부터 고전주의 이념을 받아들여 결국 낭만주의를 비판하게 되었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낭만주의에 대한 헤겔의 비판을 다루고자 한다. 그래서 이 논문은 우선 낭만주의의 인식 및 미학의 원리에 대한 헤겔의 비판부터 살펴보고, 이어서 낭만적 양심 개념에 대한 헤겔의 비판으로 진행한다.  필자는 그 가운데 특히 후자의 측면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왜냐하면 필자가 보기에 헤겔적 관점에서 본다면 낭만주의의 본령은 미학적 현상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 심리적 태도, 또는 자아인 양심 개념에 있기 때문이다.

계몽주의가 근대 시민사회에서 개체의 해방을 간취하고 그것을 환호하였던데 반하여, 낭만주의는 근대 시민사회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소외와 분열의 문제를 자각하고, 이것을 극복하려 했다. 물론 낭만주의가 근대사회의 자유의 이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낭만주의는 자유의 이념을 긍정하면서도 소외와 분열을 넘어서 조화와 통일이 가능한  진정한 보편성의 원리를 찾으려 했다. 헤겔 역시 이런 점에서 낭만주의의 이념에 공감하며, 이를 ‘실체적 삶’에 대한 시대적 요청으로 파악했다.

이 논문은 2장은 낭만주의 인식 원리나 미적 원리를 다룬다. 낭만주의는 조화와 통일의 원리를 확보하기 위해 무제약적인 절대자를 인식하려 했다. 낭만주의는 직접지나 지적 직관을 통하여 절대자를 포착하려 했다. 낭만주의에 의해 포착된 절대자는 ‘다양성의 통일’ 속에서 끊임없이 생산적으로 전진해 나가는 운동이었다. 이 같은 절대자의 개념이 자연의 원리이며 동시에 사회의 원리로 되면서, 이를 원리로 하는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 낭만주의는 총체적인 교환관계가 지배하는 근대 시민사회에서 경직되고 억압된 주체의 해방을 우선적인 과제로 삼았다. 낭만주의에서 이것은 미적인 원리에 의해 가능하다. 세계에 대한 낭만화, 그리고 이로니의 개념을 통해서 낭만주의는 자아의 해방과 순수 주관성의 절대적 자유를 확립하고자 했다.

헤겔은 비록 낭만적 인식의 원리에 공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독특한 방법론인 변증법을 통하여 낭만주의와 마찬가지로 다양성의 통일이라는 원리에 도달했다. 따라서 그는 낭만주의의 이념에 동조하였지만, 낭만주의가 우선적으로 제시했던 과제 즉 자아의 해방이라는 과제에서는 방법론을 달리했다. 그는 미적 체험을 통해 피스톨이 발사되는 것처럼 직접 자아의 해방이 이루어진다고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개념의 엄격성과 사상의 내적 필연성에 따라서, 세계사의 어마어마한 노동과 정신의 고투를 통해서 이것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 논문은 3장에서 낭만적 양심 개념에 대한 헤겔의 비판을 다룬다. 낭만주의의 자아 해방의 방법론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헤겔은 자아의 궁극적인 해방의 과정에 몰두했다. 이것이 ?정신현상학?인데, 거기서 그는 절대정신에 이르기 위해서 최후 단계로 낭만적 자아인 양심 개념을 비판했다. 이때 낭만주의 소설에서 나타난 다양한 인간의 모습은 낭만적 자아를 비판하는 헤겔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었다. 낭만적 소설에서 인간의 다양한 모습은 분열되어 나타났고, 서로 모순된 자아 사이에 전전하는 것이었으며, 이런 분열은 내적 필연성 없이 외부의 저주나 악마의 힘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므로 낭만주의는 이런 분열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없었다. 헤겔은 낭만적 양심의 비판에서, 이런 자아의 분열을 낭만적 양심 개념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하고자 했다. 그는 이런 필연성의 인식에 의해 비로소 낭만적 자아의 근본적인 극복과 진정한 자아의 해방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낭만적 양심 개념에 대한 헤겔의 비판은 세 가지 계기를 갖는다. 첫 번째 계기는 양심이 보편적 의무를 수행한다는 자기확신에 대한 비판이다. 헤겔에 따르면 양심은 행위에 있어서는 특수한 욕망을 수행하는데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양심은 자기를 행위를 통해 실현하려는 외화의 의지를 상실하고, 주관의 단언이나 순수 주관성 내면에 머무르려고 한다. 이것이 헤겔의 ‘아름다운 영혼’의 개념이다. 낭만적 소설에서 이는 무한한 동경에 가득 찬 인물로 나타난다.

헤겔의 비판에서 두 번째 계기는 위선이다. 양심은 자신의 행위가 특수한 욕망의 수행임을 알고 타인에게 이를 보편적 양심의 수행인 것처럼 위장하거나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속이고자 한다. 이렇게 하여 등장한 것이 낭만적 소설에 등장하는 범죄적 충동에 사로잡힌 인간이다. 그들에게서 물질적 소유욕이나 더러운 정욕은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선의지와 뒤섞여 나타난다. 낭만주의에게서 양심의 이런 착종은 저주나  악마의 힘에 의존한다고 설명되지만, 헤겔은 이는 양심의 위선에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낭만적 양심의 비판의 마지막 계기는 죽음에의 유혹이다. 양심의 한 계기는 행위하면서 특수한 욕망에 빠져든다. 그는 위선이 불가능함을 알고 솔직하게 자신의 사악함을 고백한다. 그러나 양심의 또 하나의 계기 즉 보편적 의식은 이런 양심의 사악함에 대해 비난하고 타협을 거부한다. 보편적 의식은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 죄의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데, 그 결과 마침내 죽음에의 유혹을 느끼게 된다. 낭만적 소설에서 아름다움의 유혹에 사로잡혀 죽음에 이르는 인물들이 나타나는데, 헤겔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은 죽음 자체의 아름다움에 유혹되는 자들이다.

헤겔에서 보편적 의식이 마침내 이르게 되는 죽음에의 유혹은 결코 부정적인 의미만을 가지지 않는다. 헤겔은 보편적 의식은 이런 죽음에의 유혹으로부터 일어서서 결국 자기의 집착, 즉 보편적 양심에의 집착과 죄의식을 포기하게 되며, 이런 포기에 의해 그는 자신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지금 껏 그가 사악하다고 비판했던 행위하는 자아도 용서하게 된다. 양자 상호의 고백과 용서로부터 진정한 자아의 통일, 그리고 외면적 대립의 해소가 일어나게 된다. 헤겔은 이를 상호인정의 개념으로 설명하며, 이것이 절대정신이다. 물론 고백과 용서의 개념은 이미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해 이미 밝혀졌던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의식의 변증법적 경험이라는 내적 필연성에 따라 이 개념에 도달했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낭만주의에 대한 헤겔의 비판은 우리 시대의 사상적 고투에서도 상당한 시사점을 준다고 본다. 최근 포스트모더니즘은 낭만주의와 상당히 닮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낭만주와의 이념을 공유하면서, 심지어 방법론적으로도 닮았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념을 수용하면서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말 잔치를 넘어서 진정한 사회 개혁의 단초를 찾으려는 데에 헤겔적 입장은 풍부한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믿는다.

 

논문 검색어; 사상사, 정신,미학, 낭만주의, 헤겔

 

 

헤겔의 '아름다운 영혼' 개념에 관한 연구 -헤겔의 낭만주의 비판1)

                                           *동아대 인문대학 인문학부 교수 이 병 창

 

 

1장. 서론

독일 낭만주의에 관한 헤겔의 관심은 다방면에 걸쳐있고, 그의 생애에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우선 헤겔은 초기 저서인 ?정신현상학?에서, 특히 그 「서문」이나 「정신」 장의 마지막 절인 「아름다운 영혼」의 절에서 낭만주의를 비판한다. 그는 「서문」에서 낭만주의의 인식 원리로서 직접지나, 직관 개념을 비판하며, 「아름다운 영혼」 절에서는 낭만주의의 정신적 태도인 양심의 개념을 비판한다. 후기의 저서인 ?법철학?의 「도덕론」 부분에도 낭만주의 비판이 나타나는데, 역시 양심의 개념을 중심으로 한다. 그러나 여기서 양심은 법적인 행위의 문제와 관련되어 제시된다. 마찬가지로 후기 저서인 ?미학 강의?의 곳곳에서도 낭만주의 미학에 대해 비판이 전개된다. 물론 이 경우 낭만주의는 근대문학 전반을 가리키는 폭넓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그 가운데 특히 「이로니」 개념에 대한 그의 비판은 독일 낭만주의에 대한 직접적 비판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낭만주의에 대한 헤겔의 관심은 그 당시 낭만주의가 미쳤던 광범위한 시대적 영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헤겔은 독일의 개혁과 통일을 요구하는 계몽주의의 흐름을 이어가면서도, 쉘링의 낭만주의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면서 헤겔은 양자를 종합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는데, 낭만주의를 비판적으로 지양하는 것은 그의 사상 형성에서 매우 주요한 계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낭만주의에 대한 헤겔의 비판은 정신의 현상에 대한 그의 독특한 구조적-역사적 분석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필자는 이 논문에서 그의 구조적-방법론적 입장에 대해서는 일단 제쳐놓고2)  낭만주의에 대한 헤겔의 비판에 집중하고자 한다. 필자는 특히 헤겔의 ?정신현상학? 「아름다운 영혼」 절에 전개된 낭만주의의 정신적 태도로서 양심의 개념을 주로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 개념이 낭만주의를 비판적으로 꿰뚫어 보는데 매우 유리한 시각을 제시할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2장. 헤겔의 낭만주의 연구

이 논문의 초점은 낭만주의의 정신적 태도로서 양심 개념에 있지만, 그에 앞서서 낭만주의의 다양한 측면들을 간략하게나마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 장에서 낭만주의의 시대적 과제, 인식 및 창작 원리, 자연 및 사회관, 미적 원리와 수단과, 그에 대한 헤겔의 비판을 검토하고자 한다.

 

1)시대적 과제-시민사회에 대한 비판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그의 시대를 ‘탄생과 이행의 시대’로 파악하면서, 이 시대에 등장한 계몽주의적 오성의 철학이 ‘실체적 삶’을 포착하지 못하며, 그러므로 이 시대에 사람들은 ‘실체적 삶’에 목말라 하고 있다고 했다. 헤겔이 말하는 ‘실체적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규명은 헤겔의 철학적 관심을 드러내는데 매우 주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헤겔은 ?정신현상학? 「정신」 장에서 인륜적 사회로서 ‘정신적 실체’는 역사적으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정신적 실체는 그리스 로마의 ‘아름다운 인륜’의 단계를 거쳐, ‘자기 소외된 정신’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아름다운 인륜’의 단계에서 개체적 자아의 해방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개체는 습속(習俗)의 형태로 존재하는 정신적 실체에 매몰되어 있다. 비로소 정신적 실체의 근대적 단계에 이르러 각 개인은 자신의 주관적 욕망을 자유롭게 추구하게 되면서, 개체적 자아의 해방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 ‘정신적 실체’는 개체적 자아의 해방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개체적 자아에 대립하여 개체적 자아를 구속하는 대상적 현실(예를 들어 국가와 같은 지배권력의 형태)로서 출현하게 된다. 이런 역설적 결과를 일컬어 헤겔은 ‘정신의 자기 소외’ 또는‘자기의식의 고유한 소외와 탈존’이라 하며, 이렇게 성립되는 정신적 실체를 개체적 자아의 ‘부정적 노동’의 산물이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은 정신의 ‘자기소외’라든가, ‘부정적 노동’이란  근대 사회의 특징인데, 이는 ?법철학?에서 전개된 근대 ‘시민사회’의 개념과 관련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 

헤겔은 근대사회를 이해함에 있어서 아담 스미스 등의 정치경제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정치 경제학에 따르면 근대 사회의 경제적 관계는 일반화된 상품교환 관계이다. 여기서 각자는 자기의 노동 산물을 판매하고 타인으로부터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구입하며, 교환은 시장에서 익명적으로 이루어진다. 아담 스미스는 시장 교환이 일시적으로 불균형적으로 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균형을 이룬다고 본다.  하지만 이 ‘보이지 않는 손’은 개인에게는 파악되지 않는 것이며, 그러기에 그것은 개인에게 외적인 강제 즉 폭력적으로 작용하는 힘으로 나타나게 된다.

헤겔은 근대사회의 모든 인간관계, 예를 들어 가족이나 국가조차 상품교환의 원리에 지배된다고 보면서, 근대사회를 총체적으로 ‘시민사회’라고 규정했다. 헤겔에 따르면 시민사회는 개체의 특수한 목적, 즉 주관적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이며, 개인은 이 속에서 자의적으로 행동한다. 이런 시민사회에서 개인들 사이에서 통일성이 존재하지만, 그 통일성은 마치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처럼 개인에게는 파악되지 않는 외적 강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헤겔은 ‘시민사회’를 “개인의 자의와 자연필연성이 뒤섞여 있는 욕구의 전체”3)로 파악한다. 바로 이런 시민사회가, 즉 시민사회의 통일성이 개체적 자아에 대립하는 외적인 강제로 나타난다는 것이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한 ‘자기소외’나 ‘부정적 노동’의 의미로 간주된다. 

헤겔의 고민은 근대 시민사회의 이면이라 할 수 있는 개체적 자아의 자기소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헤겔이 근대 시민사회의 근본 이념인 개체적 자아의 해방 즉 자유의 이념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유의 이념을 실현하면서도 동시에 자기소외를 해결해나가는, 그럼으로써 근대 시민사회를 지양하여 진정한 근대 사회를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근대 시민사회가 개체적 자아가 지배한다는 점에서 특수성을 원리로 한다면, 이를 지양하는 진정한 근대 사회의 원리는 보편적 통일을 원리로 삼아야 한다. 이 원리는 개체적 자아를  말살시키고 전체에 굴복시킴으로써 통일시키는, 즉 특수성에 대립하는 추상적 보편성의 원리는 아니다. 그것은 개체적 자아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통일하는, 그러므로 구체적 보편성의 원리이어야 한다. 다름 아닌 이런 구체적 통일의 원리가 실현되는 사회, 그것이 헤겔이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실체적 삶’이라고 규정한 사회이다. 

 이런 보편적 통일의 원리는 헤겔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대의 일반적 요청이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낭만주의 역시 실체적 삶의 원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렇다면 시대적 요청으로서 보편적 통일의 원리의 역사적 원인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역사적 해석이 제시되어 왔다. 그것은 독일에 근대 시민사회를 전개할 부르주아적 주체가 결여되어, 혁명적인 방식으로 근대화를 실현할 수 없었다는 역사적 한계 때문일 수도 있다. 또는 30년 전쟁 이후 독일의 분열과 나폴레옹의 독일 침략의 고통 속에서 제시되었던 독일의 해방과 통일이라는 시대적 과제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상품 교환의 원리가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근대 시민사회의 모순에 대한 지식인의 선취적 자각 때문일 수도 있다. 그 어느 것이 올바른가 하는 역사적 논의는 이 논문에서 주요하지 않다. 오히려 주요한 것은 다중적인 역사적 상황들이 철학적으로 보편적 통일의 원리라는 하나의 근본문제를 중심으로 응집되었다는 것이다.

 

2)인식 원리로서 직접지

헤겔이 보편적 통일의 원리에 대한 시대적 요청이라 규정한 것은 낭만주의 철학에서는 절대자 또는 무제약자의 문제로 나타났다.  보편적 통일의 원리는 결국 인간이 자신의 주관적 욕망을 보편적 도덕법칙에 종속시키는 자유의지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자유의지가 실질적이려면, 인간이 자연적 의지를 넘어서는 자유의지를 실제로 가질 가능성과, 기계적이고 인과적인 틀에 속박된 현실 속에서 자유의지를 실현할 가능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런데 자유의지가 자연적 기초를 가질 수는 없으므로, 자유의지는 무제약적 절대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절대자가 인간의 의지와 현실 속에 내재해야 하는 것이다. 이 전제는 절대자의 인식 가능성을 요구한다. 이것이 낭만주의 철학이 제기한 무제약자의 문제이다.

낭만주의 철학의 선구자인 야코비는 절대자는 인간에게 직접 현현하는데, 이런 경우 의식은 종교적 감정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했다. 즉 인간이 순수한 종교적 감정에 이르게 되면, 신의 존재를 논증 없이 확실하게 인식한다는 것이다. 야코비는 이를 직접지라 불렀는데, 이것은 비단 종교적 감정뿐만 아니라, 개체의 의식이 상실되는 몰아지경, 즉 ‘아름다움과 선, 기적과 사랑, 존경과 경외심’과 같은 감정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야코비의 ‘직접지’ 개념은 후일 낭만주의의 대표적 철학자 쉘링에 의해 지적 직관의 개념으로 발전했다. 쉘링은 절대자를 자기의식의 개념으로부터 발견했다. 그의 출발점은 칸트의 선험철학인데, 이미 칸트에서 자기의식은 대상을 구성하는 능동적 작용임이 밝혀졌다.  그런데 쉘링에 의하면 자기의식은 다양한 형태를 가지며, 자기 인식 즉 자각의 정도에 따라 발전한다. 그 맨 낮은 단계에서 의기의식이 감각적 경험의 형식들이다. 감각적 자기의식은 이미 대상을 구성하는 능동적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마치 대상이 주어지는 수동적인 형식인 것처럼 파악한다. 그러기에 여기서 자기의식은 다만 잠재적일 뿐이다. 자기의식 발전의 최고의 단계는 자기의식의 본래적 개념 자체가 실현된 상태이다. 자기의식이란 본래 자기를 대상으로 구성하는 것이므로, 이 최고 단계의 완성된 자기의식에서 의식과 대상 사이에는 어떤 구별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만 그 이전의 단계의 자기의식에서  의식과 대상이 구별되므로, 이것에 비추어 본다면 완성된 자기의식의 단계에서 양자의 구별이 사라진다고 말하지만, 본래 자기의식에서는 의식과 대상 사이에 어떤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쉘링은 이런 미구분의 상태에서 관념성이 곧 실재성이며, 자기의식이 곧 절대자이라고 한다. 

의식과 대상의 미구분 상태에서 자기의식의 자기인식은 자기확실성을 갖는다. 이런 자기확실성을 쉘링은 지적 직관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것은 감각적 직관과 달리 대상을 마주보는 의식에서 대상과 의식의 합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의식과 대상이 구별되지 않는 미구분 상태 속에 있는 것이기에 지적직관이다. 지적직관은 실천의 측면에서 본다면 의지가 자기를 곧바로 대상으로 실현하는 것이므로, 완전한 자유의 상태이다. 지적직관은 대상과 대립하는 의식과 자아를 넘어선 것이기에 무의식적이며 자기 초월적인 것(탈아적)이면서 동시에 의식과 자아 자체이므로, 순수 주관성이다. 그러므로 쉘링은 이것을 ‘내적으로 솟아나는 어두운 충동’으로 본다. 절대자를 인식하는 지적직관의 개념은 셀링에 의해 후일 심미적 직관의 개념으로 발전된다. 아름다움이야말로 황홀한(탈아적) 감정이면 동시에 내적으로 자발적인 감정이라는 점에서, 절대자의 지적직관의 가장 구체적인 예가 된다. 그러므로 쉘링은 예술을 ‘지적 직관의 객관성’이라 한다.

야코비나, 쉘링에 의해 전개된 절대자에 대한 직접지의 개념은 후일 낭만주의 문학자들에게서 느낌과 상상력, 무의식의 문제로 발전되었다.

노발리스는 창백한 사유에 대해 아름다운 느낌을 대립시킨다. 그에게서 느낌이란 낭만주의 철학에서 말하는 직접지의 형식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외부적인 감각적 감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내적인 빛’ 이며, 슐레겔이 말하는 것처럼 “ 청춘의 정선(精選)기에 가물거리고, 연애하는 여성의 가슴속에 불타는”, “인류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근원적인 힘”4)에서 스스로 피어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이 느낌은 탈아적인 것이며, 그래서 자주 음악적 정감에 비유되며, 마치 “죽음의 미에 의해  다정하게 유인되며 그 속에 감싸여 버리는 것”5)같다고 말한다.

낭만주의 문학에서 느낌에 못지 않게 강조되는 것이 상상력, 환상, 공상이다. 이는 반복되는 지각에 의해 형성되는 경험 법칙적인 연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물들 사이에는 어떤 원초적인 연관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사물은 순수한 상징으로, ‘비밀스러운 자연의 산스크리트어로’ 이다. 이런 상징은 주술적이며 마법적인 힘을 가진다. 상상력은 사물에 내재하는 이런 원초적 연관을 비유를 통해서 파악한다. 그러므로 슐레겔은 “예술이 사랑의 정신을 마법의 말로 매혹하여, 그 결과 사랑의 정신이 예술에 순종하고 예술의 명령을 받들어, 예술의 ‘필연적 자의(恣意)’에 따라 아름다운 형성물에 생명을 부여하게 되는 힘을 갖는다”6)고 말한다.

이처럼 상상력에 대한 강조는 자연히 꿈, 무의식, 어두운 충동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 18세기 말 정신병리학의 발전으로 정신에 관한 흥미로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 가운데 메스머리즘(F A Mesmer)으로 알려진 이론은 정신은 자성을 가지고 섬세하고 유동적인 정신적 물질로 이루어지며, 이 물질은 반수면상태나 몽유상태에서 다른 물질들과 가장 활발한 상호작용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이런 이론과 앞에서 말한 쉘링의 자연철학의 영향으로 무의식이 시대적 유행으로 되었다. 낭만주의 문학자들은 무의식이 단순한 광기나, 정신의 파괴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심원한 진리를 함축하고 있는 절대자와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는 정신의 한 부분으로 간주했다.

야코비에서 쉘링, 그리고 낭만주의 문학자들로 이어지는 직접지, 순수 주관성, 상상력이라는 개념에 대해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정신이 얼마나 곤궁하길레, 하나의 느낌을 가지고 갈증을 식히는 청량제로 구하려고 ”7)하는가 하면서 한탄했다. 헤겔에 따르면 칸트의 선험철학의 진정한 의미는 자기의식의 자기확실성 속에 의식과 대상, 자아의 현실이 전혀 어떤 구별도 없다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의식은 자기를 구분하여 대상화하고, 이런 대상들 사이의 모순과 대립을 통하여, 새로운 자기의식으로 발전하여, 모순과 대립을 해소하는 변증법적인 과정이다. 헤겔은 이런 과정을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변증법적 경험’이라는 개념으로 정식화했다. 그에 따르면 절대자에 대한 인식은 이런 과정을 통하여 개념의 엄격함과 더불어 사상의 필연성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헤겔은 야코비나 쉘링의 직접지에서는 어떤 구별도 없으므로, 그저 공허한 순수 주관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순수주관성은 공허할 뿐이며 이 공허를 채우는 것은 결국 자기의 경험적 주관일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낭만주의자들은 “신이 잠 속에서 지혜를 넣어준다고 하지만” 헤겔은 직접지 속에서 "그들이 받아들이고 잉태하는 것은 꿈에 지나지 않는다“8)고 한다. 결국 직접지에 의해 파악된 절대자란 ‘모든 소들이 검게 보이는’ 암흑에 지나지 않다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3)낭만주의에서 자연 및 사회 원리

쉘링에 있어서 지적 직관 속에 포착된 절대자는 곧 자기의식이므로, 절대자는 자기의식의 근본적인 특성이라 할 수 있는 능동적 생산성이라는 성격을 지니게 된다.  피히테에서 자아가 자기를 정립하면서 동시에 자기에 대립된 비자아를 정립하고 다시 이것을 넘어 나가듯이, 쉘링에서 절대자는 스스로 자기를 대립물로 산출하는 힘과 동시에 대립을 통일하는 힘을 포함하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넘어서는 생산적인 힘이며, 그러기에 쉘링은 이를 능산적 자연이라 이름붙였다.

그의 자연 개념은 마치 우주적 소용돌이를 연상케 하는데, 이는 근대의 자연과학적인 자연 개념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근대 자연과학은 자연의 양적인 관계를 파악하면서, 질적인 특성을 양적인 비율로 환원시키고자 한다. 또한 자연은 기계적 인과성의 필연적 틀에 의해 엄격하게 묶여 있으며, 이 가운데는 목적과 자유라는 개념이 존재할 여지가 없다.  이런 자연 개념은 이미 일찍부터 자연을 신의 현재로 파악하는 기독교 신앙과 충돌하면서, 이 양자를 조화시키는 것이 근대 자연철학의 근본 과제로 대두되었다.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 개념, 라이프니츠의 활력 개념이라든가, 괴테의 색채이론은 과학적인 이성을 통해 자연 속에서 신의 현재를 찾으려는 시도이었다. 이제 쉘링의 자연철학에서 자연의 목적론과 자유의 이념이 자연의 일반적인 원리로 제시되었다. 

쉘링의 자연 개념은 낭만주의 문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인과적 기계적 자연과학이 “모든 신성한 흔적을 없애려 하였으며”, “다채로운 온갖 치장으로 가득한 세계의 옷을 벗겨 내려 했다고” 비판한다. 또한 그들은 근대 자연과학은 “수학적인 순종성과 뻔뻔스러운 빛”이었으며, “빛이 색깔과 유희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조각조각 부서지는 것을 좋아하였다"9)고 비난한다. 이런 비판 속에 낭만주의 문학자들이 강조하였던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은 감각적으로만 느껴지는 고유한 질적 특성을 지니면서  어떤 목적론적 의미를 지니는, 즉 신성한 흔적을 지니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낭만주의 문학에서 자주 말해지는 ‘다양성 속의 통일’ ‘전체 속의 부분’이라는 개념이다. 낭만주의적 자연은 자아와 대상이 구별되지 않는 통일체이며, 그러기에 자연과 인간 사이에는 주술적이며 마법적인 연관이 있어서, 이 연관은 자주 에로틱한 것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낭만주의적 자연관의 의미는 단순히 근대 자연과학에 대립되는 새로운 자연관이라는 데 한정되지 않는다. 낭만주의적 자연관은 새로운 근대 사회의 기본 원리를 담고 있는 모델이기도 하다. 즉 낭만주의자들은 다양성 속의 통일이라는 자연의 원리에 따라 새로운 사회가 구성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사회에서는 자유의지와 대상적 현실과의 대립 충돌 즉 자아의 소외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이제 개체적 자아는 자신의 자유를 전적으로 보존하면서도, 전체적인 통일이 가능하게 된다. 각자는 통일적 연관 속에서 개인에게 주어진 고유한 소명에 따라, 자기의 소명을 강제가 아닌 즐거운 마음으로 자유롭게 추구하면서 그의 소명은 현실 속에서 실현될 수 있으므로, 그는 현실적 행복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자들이 꿈꾸었던 새로운 사회는 구체적 모습으로 제시되지는 않았다. 낭만주의자들은 중세 카톨릭 사회라든가, 게르만의 고대사회에서 자신의 이념의 실현을 보았으며, 이런 점에서 중세나 게르만 고대에 열렬한 동경을 품었다.  그러나 낭만적 사회관이 구체적인 모습을 띄고 나타나지는 않았다. 심지어  이런 구체적 이론에 대한 진지함 관심이나, 상세한 이론화는 거의 없었다.

낭만적 자연관과 사회관의 기본원리인  ‘다양성의 통일’의 개념에 관한 한 헤겔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이 개념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차이라 할 수 있다.

헤겔은 뉴톤적인 자연법칙을 부정하지 않았다. 헤겔은 물질적 자연의 단계에서 자유와 목적은 다만 내적으로 은폐되어 있으므로, 물질적 자연에서는 오히려 기계적 인과법칙이 작용한다고 본다. 하지만 그는 이미 물질적 자연 속에서도 상호작용의 관계가 내재하고 있으며, 이 관계는 점차 발전하며, 장차 정신 속에서 나타나게될  자유와 목적의 토대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의 입장은 낭만주의가 자연에 정신의 특징을 그대로 부여해 버린, 즉 의인화된 자연관을 가진다고 비판한다. 그는 낭만주의처럼 자연 속에 자유와 목적 개념의 직접적인 현존이 아니라 다만 자유와 목적 개념의 가능성만을 인정할 뿐이다.

헤겔에서 사회는 근본적으로 개인과 개인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 즉 정신적 실체이다. 이런 상호작용에서, 만일 개인이 주관적 욕망을 자의적으로 추구하게 된다면, 오히려 분열과 대립이 일어나며, 개인과 개인 사이의 상호 인정을 통해서만 진정한 보편적 통일이 이루어 질 수 있다.  이런 상호 인정은 원리적으로 본다면 낭만적 다양성의 통일의 원리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헤겔은 이런 원리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데 있어서 기능적으로 분화되고 유기적으로 통일된, 그리고 공정무사한 관료계급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를 그렸다. ?법철학?에서 제시된 국가의 모습은 낭만주의가 동경한 중세 기독교 사회나 고대 게르만 사회의 모습과는 다르다.

 

4)낭만주의 미적 원리와 미적 수단

a. 낭만주의 미적 원리

고전주의 문학은 근대 시민사회의 이상을 전파하고 인간을 도덕화시키는 교육적 기능을 목표로 했다. 고전주의에서 미적 형식은 추상적 원리를 감각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낭만주의 문학자 슐레겔은 이런 문학을 “좋은 가위를 만들어 내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 그리고 똑같은 방법으로”10) 문학을 산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슐레겔은 「문학에 관한 담화」 서두에서 진정한 문학은 “개개인으로부터 그 독자적 본성과 가장 내면적인 힘을 탈취하여, 그 개인을 정신도 의미도 없는 보편적인 상으로 순화 또는 쟁화”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어떻게 자기를 형성해야 하는가를 교도해 주어야 ”11)한다고 말한다. 즉 문학은 인간의 자기 형성을 위한 촉매라는 것이다. 이때 자기 형성이란 쟁화나 순화, 즉 계몽된다는 것과는 다르게, 내면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의미이며, 그러므로 바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도록 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내면 속에는 근원적인 문학(자연적 느낌)이 있다. 그것은 “초목 속에 태동하고, 광명 속에서 빛나며, 어린이의 마음속에서 미소지으며, 청춘의 정선기에 가물거리고, 연애하는 여성의 가슴속에 불타오르는”12) 바로 그것이다. 문학의 역할은 근원 문학의 미메시스(mimesis)이다. 그것은 내재하는 자연적 ‘창조적 정신의 불꽃’에 불을 붙인다. 그러면 이 불꽃은 “우리 내부에 살고 있으며, 스스로 생긴 비이성의 잿빛더미에 깊숙이 신비로운 힘을 작렬하게” 13)될 것이다.

이런 슐레겔의 주장은 낭만주의 문학 예술에 관한 여러 오해를 불식시켜 준다. 낭만주의는 결코 미적 세계에 대한 탐닉, 순수 미의 유희만은 아니다. 이런 탐닉과 유희는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의 해방을 위한 것, 즉 ‘비이성의 잿빛더미에 신비로운 힘을 작렬하게’ 하는 수단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낭만주의 문학은 총체화된 교환원리가 지배하는 시민사회에서 고통의 보상물로서 제시되는 문학에 반대한다. 그것은 인간의 불행을 위로하고 상상적인 만족을 줌으로써 사회 속에 안주하도록 만들지만, 슐레겔이 요구하는 문학은 자기의 만족을 깨트리고, 시민사회적 억압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성과 질서는 인간을 이런 시민사회에 더욱더 꼼짝 못하도록 묶어 놓는다. 반대로 미의 탐미와 유희는 “지성적으로 사고하는 이성의 운동이나 법칙을 지양하고 공상의 아름다운 혼란, 즉 인간 본성의 원천적인 혼란 속으로 우리를 옮겨 놓는“14)것이다. 동일한 의미에서 노발리스는 문학을 ‘선험적 의사’라고 하며, 그는 문학을 ‘절대적 치유력을 지닌 삶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b. 미적 수단으로서 낭만화

그렇다면 문학은 어떻게 인간의 억압된 내면을 해방시킬 수 있는가? 노발리스는 문학이 세계를 낭만화해야 한다고 본다. 낭만화란 “흔한 것에 높은 의미를 부여하고 일상적인 것에 비밀의 얼굴을 부여하고, 알려진 것에 알려지지 않은 것의 위엄을 부여하며, 유한한 것에 무한한 가상을 부여하는 것이다.”15) 이것은 문학이 세상에 헛된 가상을 불어넣으라는 의미는 아니다. 절대자는 이미 이 세계 속에 내재해있다. 그러나 인간은 흔한 것, 알려진 것, 유한한 것에 사로잡혀 이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에 반하여 문학은 느낌과 상상력, 꿈속에서 현실에 내재하는 절대자의 모습을 포착한다. 바로 그것이 낭만화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일상적 의식와 이성에 비추어 본다면, 일상적인 것이 오히려 질서와 균형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낭만적인 것, 절대자의 현현은 오히려 불균형적이고 무질서한 것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낭만화는 오히려 “유쾌한 방식으로 소원화시키는 것이며, 대상을 낯설게 만들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려지고 매력적이도록 하는 것이다“16). 이런 점에서 슐레겔은 낭만적인 것을 ”기교적으로 나열된 혼란, 여러 모순의 매력적인 균정, 열광과 이로니의 신기하고도 부단한 교대“17)라고, 단적으로 ‘필연적 자의’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c. 낭만적 이로니 개념

낭만주의 문학은 절대자의 현현 순간을 작품으로 포착하는데, 절대자는 작품 속에 들어오면서 작품의 일정한 형상에 갇히게 된다.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무한한 절대자는 아니다. 또한 작품이 일정한 형상에 갇히게 되면, 그것은 독자의 주관을 해방하는 계기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도 없게 된다. 왜냐하면 독자는 작품 속의 형상에 집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작품이 일정한 형상을 버릴 수도 없다. 일정한 형상화는 불가피한데, 그렇지 않으면 직접지 속에 무구별적으로 존재하던 절대자의 표상이 생생하고 명백하게 표출되지 않는다. 절대자를 명백히 하기 위해서는 절대자를 형상적으로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이제 이것은 더 이상 절대자가 아니다.

이런 딜레마를 피하기 위해 낭만주의는  작품 속에서 한편으로 형상화하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형상화를 부정하는 개방성, 곧 무한성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슐레겔은 유명한 「아테네움 단장」에서 ‘전진적인 보편문학’에 대해 언급하면서, “낭만적 문학은 묘사하는 것과 묘사되는 것 사이에 자유롭게 부동하면서, 마치 무한히 늘어서 있는 거울 속에서와 같이 이 반영을 부단히 강화하고 배가해야 한다”18)고 말했다.

그렇다면 자유롭게 부동하는, 무한한 예술 형식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이 무한성의 형식과 연관하여 낭만주의 문학은 이로니(Ironie)의 형식을 제시했다. 이 개념은 슐레겔에 의해 제시되었지만, 본래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타나는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에서 유래했다.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깨우치게 하기 위하여 그 스스로 무지를 가장하면서, 하지만 진리의 빛을 이미 본 자로서 무지한 자의 주관적 견해를 모순 속으로 끌어 들여, 그로 하여금 진리를 깨우치게 만든다.  슐레겔은 낭만주의 문학이 낭만화를 기본으로 하지만, 낭만화는 이로니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로니는 작가가 작품 속에서 스스로를 비판하거나, ‘본인의 걸작조차도 높은 자신의 정신을 통해서 가소롭게 여기는 태도’이며,  ‘제한된 모든 것을 무한히 떨쳐 버리는 마음’이며, ‘우리가 숭배하는 것을 사고 속에서 없애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즉 문학이 자기의 비평과 더불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로니는 이처럼 부동하는 마음으로 예술작품을 떠다니면서도 이것을 높은 곳에서 조망하는 쾌할함을 상실하지 않는다. 이로니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절대자를 전달할 능력이 없다는데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결과이다. 동시에 이로니는  형상에 구속되고 일면적인 규정에 속박됨으로부터 자아를 전적으로 해방하여 순수한 주관성의 절대적 자유를 회복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로니는 낭만주의 문학의 목표, 즉 자아 해방을 위한 가장 결정적인 수단인 셈이다. 

낭만주의 작가들은 작품 속에 다양한 방식으로 이런 이로니의 형식들을 실험하였다. 그 방식은 작품 속에 작가가 등장하여 작품을 비판하는 형식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들은 심지어 문학적 장르 자체를 파괴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다양한 장르를 혼합하며, 나아가 그것을 넘어서 문학과 철학의 혼합으로까지 밀고 나가 이른바 ‘전진적 보편문학’을 시도하였다. 낭만주의 문학의 이런 시도는 다만 형식의 파괴에만 머무르지는 않았다. 이로니는 문학 작품의 내용 자체에까지 침투하였다. 그 결과 작품 속에서 인물의 고정된 자아가 파괴되었으며, 그래서 분열된 자아를 가진 인물, 스스로 혼동 속에 빠진 인물, 심지어 자의와 변덕에 가득한 인물 등이 낭만주의 작품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로니의 개념은 작품의 자기파괴, 우연성을 배태한다. 낭만주의자들은 이를 통해 더욱 고차적이며 더욱 영원한 진리, 절대자에 도달하려고 한다. 결국 끊임없는 방랑과 무한한 동경이 낭만문학의 기치인 셈이다.

 

“우리는 도처에서 형성된 것에 접해야 하며, 동류의 것, 유사한 것 ,동등한 가치가 있으면서 적대적인 것과 접촉함으로써 최고의 것을 발전시키고 점화시키고 배양하고 형성해야 한다.”19)

 

e. 작가와 독자.

낭만주의 문학에서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독특하다. 독자는 단순히 수동적이지 않으며, 비평가로서 작가에게 능동적으로 영향을 준다. 그리하여 양자는 ‘해체할 수 없는 유대’를 형성한다.  작가는 개인적인 한계를 가지므로, 그는 자기 자신을 보다 근원적으로 발견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그 스스로는 이 한계를 의식하지 못하므로 벗어날 수 없다. 이때 독자는 자기에게 고유한 내면의 불꽃에 따라서 작가에게 영향을 주어서 그 한계를 벗어나게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자기 견해를 영원히 확대하고, 그런 것들을 이 지상에서 가능한 한 가장 높은 것에 근접시키도록 노력할 수 있다.”20)

독자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평가로부터, 낭만주의 문학은 비평의 역할을 강조하며, 심지어 비평이야말로 문학의 완성으로 간주하게 된다. 비평은 작품이 고유한 본질을 스스로 획득하도록 만드는 것이며, 이를 통해 작품은 진정한 의미에서 완성된다고 한다.

낭만주의에서 독자와 작가 사이의 독특한 상호작용적 관계 때문에 실제 낭만주의자들은 매우 친밀하고 공동적 생활과 창작을 영위하는 서클을 형성하여 활동했다.

 

5) 낭만주의 미학에 관한 헤겔의 비판

낭만주의의 문학은 독자에게 미적인 충격을 주고자 했다. 그것을 통해 독자는 억압된 자아로부터  순수 주관성의 절대적 자유에로 해방될 것이다. 그 방법으로 가장 주요한 것은 미적 무한성, 즉 이로니 개념이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도 ‘의식의 현상학’으로서 자아가 절대적 자아에 도달하는 과제를 가지므로, 이는 낭만주의 미학의 자아해방이라는 과제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동일한 문제의식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낭만적 미학의 방법에 대해 믿지 못했다. 그러기에 헤겔은 ?미학강의?에서 낭만주의와 연관하여, 특히 낭만적 이로니 개념을 비판하는데 주력했다.

헤겔의 미학은 대체로 고전주의의 미적 이상에 따르고 있다. 즉 예술이란 진리의 표현과 서술의 특정한 방식이다. 여기서 진리란 보편적 통일의 원리이며 따라서 자유의 원리, 즉 헤겔적 의미에서 ‘이념’이다. 예술은 이런 진리를 감각적 형상으로써 표현한다. 예술이 진리를 드러내므로, 감각적 형상들은 형식적 통일성을 가진다. 이는 감각적 사물의 질서와 대립되며 따라서 예술의 형식은 자연필연성이 아닌 우연성으로 나타나지만 이것은 깊은 차원에서 통일성을 가진 것, 즉 무한적인 것, 아름다운 것이다.

예술은 이처럼 감각적으로 진리를 드러내므로 아름답다. 그것은 매혹적인 힘을 가지고 주관을 예술 작품 자체에 몰두하게 만든다. 주관은 예술 작품 앞에서 욕망을 통해 대상을 부정하려는 실용적 태도를 버리고, 대상을 그 자체로서 음미하도록 하는 심미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예술작품 속에서 대상과 자아의 대립은 해소되어 있으므로, 자아는 예술 작품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면서 자유를 느낀다. 그러므로 헤겔에서 아름다움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든다.

헤겔의 미학에서 볼 때 낭만적 작품은 형식적 통일성을 지니지 못하므로, 진리를 담지하지 못한다. 낭만적 작품 속에 인물은 특정한 자아를 갖지 못하고,  분열된 자아들 사이에 변덕스럽게 떠돌아다닌다. 낭만적 작품의 사건의 전개는 자주 외적이고 우연적인 사건으로 설명된다. 어떤 마술적인 힘, 기이한 만남, 이상학 약의 작용이 작품의 전개를 이끌어 나간다. 헤겔은 낭만적 작품의 이런 결함이 낭만미학의 순수주관성의 개념,즉 낭만적 이로니의 개념과 근본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낭만적 자아의  순수주관성은 모든 것을 전적으로 ‘나의 힘 속에서 하나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낭만적 주관은 자기를 ‘신적인 천재’로 파악한다. 그러나 낭만적 자아는 특수한 내용을 자아로부터 내적 필연성에 따라 산출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그때그때 우연하게 주어지는 자연적 욕망이나 충동에 사로잡힌다.

이처럼 낭만적 자아의 산물이 자의적으로 선택된 특수한 것에 불과하기에, 순수주관성 앞에서 이는 다시 부정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부정조차도 내적 필연성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의적으로 선택된 특수한 것으로 나타나는 한, 그 부정도 단적인 부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남는 것은 순수주관성의 공허한 형식에 불과하다. 헤겔은 이를 경멸하면서 ‘사악하고 쓸모 없는 주체’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로니적 예술가의 삶의 노련함은 자기를 신적인 천재로 파악하는데, 그 앞에서 모든 것은 본질을 결여한 창조물이고, 자유로운 창조자는 그런 창조물에 구속되지 않고, 그것을 창조하는 만큼 부정할 수 있다.”21)

 

이것이 바로 낭만적 이로니, 즉 자의적 선택, 단적인 부정, 그리고 결과적으로 남는 것은 자유의 공허한 형식이라는 삼박자이다. 헤겔은 낭만적 이로니의 결과는 영원한 동경이라고 한다. 즉 순수 주관성은 공허한 형식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그는  ‘확고하고 실체적인 것에 대한 갈증’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시 특정한 내용을 자의적으로 선택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 결과 이런 부동(浮動)적 상태는 영속적으로 진행된다. 이때부터 순수주관성에 불행과 모순이 출현한다. 순수주관성의 객관적 실현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영원한 동경에 머무를 뿐이다.

 

“모든 사상적, 인륜적 , 자체내 내용적인 것의 공허성, ..다만 자기의 주관성만은 예외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를 통해 스스로 공허하고 텅비게 된다. ..거꾸로 자아는 이런 자기만족 속에 만족함을 발견하지 못하고, 스스로 결핍적인 것을 느끼며, 이제 확고하고 실체적인 것에 대한 갈증을,...발견하게 된다. 이때부터 불행과 모순이 출현하는데, 주체는 한편으로는 진리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고, 객관성을 추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독과 자기 침잠을 깨뜨리고 불만족스러운 추상적 내면성을 극복할 수 없고 다만 동경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런 정적과 무기력의 만족스럽지 못함은, 내적 조화를 포기하지 않으려면 다루어질 수 없으며, 자체 내 머물러 있으려면 실재와 절대자에 대한 추구 때문에 비현실적이며 공허한데, 결국 병적인 아름다운 정신성이나 동경을 나타나게 한다.“22)

 

헤겔은 낭만주의 미학의 목표에 공감한다. 그의 철학 역시 경직된 자아를 해방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방법론적으로 미적 체험을 통한 직접적인 초월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낭만주의에서의 초월은 다만 사유 속에서 머무르며 그러므로 영원한 동경에 불과하다. 공허한 자유의 형식 속에는 자연적이고 개별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의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헤겔은 자아의 진정한 해방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세계사의 어마어마한 노동, 정신의 고투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은 개념의 내적 필연성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다.

낭만주의는 낭만주의에게서는 단연 미적인 현상이다. 왜냐하면 미적 초월이 낭만주의의 지렛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낭만주의를 비판하는 헤겔의 입장에서 볼 때, 낭만주의의 핵심은 다름 아닌 낭만적 자아, 그 정신적 태도에 있다. 따라서 헤겔의 낭만주의 비판의 본령은 미학의 영역이 아니라, 정신의 영역에 있게 된다.  이제 낭만적 인간의 자아, 그 정신적 태도에 대한 헤겔의 비판을 그의 방법론, 즉 의식 경험의 학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해 보고자 한다.

 

3장. 헤겔에서 양심의 개념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자아를 보편적으로 해방시키는 과정을 서술한다. 이 과정은 ‘의식의 변증법적 경험’23)이라는 방법을 통해 전개된다. 헤겔의 낭만적 자아의 비판은 이런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에 해당된다. 그것은 근대정신 가운데, 계몽주의 단계를 넘어서서, ‘정신의 자기 확신’ 단계에 나타난다. 다시 정신의 자기확신 단계는 칸트적 의무론과 이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낭만적 자아 즉 아름다운 영혼으로 구성된다. 헤겔에 있어서 낭만적 자아는 근대정신의 최후의 형태이다. 필자는 앞에서 낭만주의의 인식 원리와 자연 및 사회원리, 미학 원리에 관한 헤겔의 비판을 검토했다. 이런 검토 가운데 낭만주의의 전체적 무게 중심이 낭만적 자아에 걸려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제 낭만적 자아를 헤겔이 어떻게 비판하는지 살펴보자. 이는 동시에 자아를 보편적으로 해방하는 헤겔적 과정의 최후 단계에 대한 서술이기도 하다. 필자는 그의 서술을 그의 방법론인 의식의 변증법적 경험의 과정에 비추어 설명하고자 한다.

 

1)양심의 원리

헤겔은 낭만적 자아를 양심 개념으로 파악한다. 양심 개념의 특징은 칸트적 도덕의식의 의무론에서 분열되어 나타났던 계기들의 종합이다. 즉 칸트의 실천의지는 자유의지와 자연적 의지, 의무와 행복, 도덕의 보편성과 행위의 개별성 사이의 대립과 모순에 부딪혔다. 칸트는 이런 모순을 자유의지, 완전선, 신과 같은 개념을 도덕적으로 요청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그에게서 실천의지의 모순은 피안에서 해결되는 따라서 항상 당위로서만 나타나는 것이었다.

양심의 개념은 칸트 의무론의 모순을 종합하여 통일시킨다. 낭만적 양심의 개념은 주관적 확신이며, 동시에 자발적인 의욕이다. 즉 양심은 도덕적 법칙을 칸트에서처럼 이성적 사고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면 즉 주관의 자기 확신 속에서 발견하며, 양심은 도덕법칙을 현실적 의지에 대립하여 의무적으로 수행하기보다는 자발적인 의욕에 의해서  수행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양심을 ‘순수지(純粹知)이며, 동시에 순수의무’, 또는 ‘구체화된 도덕적 정신’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양심의 개념은 낭만주의 철학자 특히 쉘링이 자유의지의 개념을 밝히는 가운데 제기했다. ?인간 자유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탐구?(1809)에서, 쉘링은 우선 자유의지를 자의적 선택의 개념으로 보는 것에 반대한다. 자의적 선택이란 규정근거 없는 선택이라는 것인데, 이는 불합리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선택도 규정근거 없이 일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 규정근거가 알려지지 않을 때, 자의적이라 하지만, 실상 그 속에는 규정근거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또한 그는 자유의지가 칸트에서처럼 이성으로부터 나오는 행위라고 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필연적인 것이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성에서 나오지 않고, 그렇다고 자의적인 선택도 아닌 자유의지의 개념은 대체 어떤 것일까? 쉘링은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목적론적으로 재해석했다. 그래서 독특한 그의 자연철학을 세웠는데, 이 자연철학이 자유의지 개념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자연철학은 자연 사물 안에는 두 가지 원리가 존재한다고 본다. 그 하나는 자기를 생산하는 가능적 힘이며, 이는 자기를 개별적인 존재로서 개별화시키는 대립과 분열의 원리이다. 이 원리는 사물 내부에 있는 어두운 충동이다. 다른 하나는 분열된 사물을 다시 근원적인 통일에로 복귀시키는 보편화의 원리이다. 그것은 사랑의 원리이며 빛, 질서의 원리이다. 쉘링의 자연철학은 양자의 관계를 매우 독특하게 파악한다. 우선 빛의 원리는 어두운 충동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생산 근거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힘이다. 그런데 어두운 충동에 의해 사물이 생산되면서, 동시에 사랑과 빛의 원리도 자기를 발동시킨다.  그러나 사랑과 빛의 원리가 어둠의 원리에 종속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둠의 원리가 빛의 원리를 지향한다. 빛의 원리는 어둠의 원리를 규정한다. 왜냐하면 어둠의 원리는 사물의 생산의 근거가 되며 그래서 가능성을 지니지만, 빛의 원리가 규정원리가 됨으로써, 이런 생산 가능성을 현실화시키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물은 이 두 가지 원리가 상호작용 함으로써 형성된다. 그러나 양자는 필연적으로 일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양자는 균열 속에 있으며, 다만 어두운 충동은 사랑과 빛, 그리고 질서를 향하여 근원적으로 동경한다.

이런 자연의 두 가지 원리, 힘은 인간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인간의 근원적 충동은 어두운 생산의 힘이며, 인간의 고유의 의지이며 따라서 자발적인 것이다. 이 의지는 자기를 개별화하고 타자에 대립시키는 힘이다. 그런데 이 힘이 작용하는 동시에 인간에게서 빛과 사랑의 원리도 작용한다. 이 두 가지 힘은 인간의 생산 근거로서 근원적 충동에서 통일되어 있다. 근원적 충동은 빛과 사랑의 원리를 함축하면서 자기의 작용과 동시에 사랑의 원리를 작용시킨다. 그러나 동시에 빛과 사랑의 원리에 의해서 규정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가능적이었던 근원적 충동이 현실화된다. 근원적 충동은 빛과 사랑의 원리의 실존 근거이며, 빛과 사랑의 원리는 근원적 충동을 규정한다. 물론 양자가 합일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양자는 균열 속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원적 충동이 이미 빛과 사랑의 원리를 함축하고, 또한 그것을 지향하고 그것을 동경하고 있다. 쉘링은 자유의지 즉 선을 자발적으로 의욕하는 의지가 이런 근원적 충동의 지향과 동경에서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쉘링의 자유의지의 개념은 낭만주의에서 양심 개념의 기초를 확립했다.

물론 헤겔은 쉘링의 자연철학의 형이상학적 주장을 따르지는 않는다. 헤겔은 낭만주의의 양심 개념을 역사적으로 등장하는 정신적 태도(주관정신)로 설명한다. 헤겔에서 인간의 의지는 맹목적인 충동이다. 그러나 사유가 인간의 의지를 지배하면서 인간의 의지는 동물의 의지와 달리 자유라는 특징을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사유는 대상 속에서 자기관계하는 보편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사유가 의지를 지배하는 정도는 역사적으로 변화한다. 근대적 자아의 자의(Willkuer)란 사유 속에서는 보편성이 등장하지만, 사유에 대립하여 의지가 여전히 자연적 충동에 사로잡혀  있어서, 자의는 아직 생각만으로 자유로우며 실제로는 자연 필연적인 것이다.  헤겔은 개별적 의지가 자기를 규정, 제한하여 의지 속으로 사유의 보편성이 침투하게 되면서, 자기확신이라는 정신적 태도가 성립한다고 본다. ?정신현상학?에서는 이런 자기확신은 두 단계를 거쳐 나간다. 칸트적 의무의식에서는 사유의 보편성은 의지를 규점함에 있어서 아직은 형식적으로만 규정한다. 그러기에 의지에서 형식적 보편성과 내용적 개별성 사이의 분열과 대립이 나타난다. 마침내 도덕법칙을 자기 내면 속에서 확신하게 되는 양심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사유와 의지의 통일성이 더욱 발전하게 된다. 여기서 의지는 자기 확신 속에서 보편적 법칙을 발견하며, 이런 보편적 의무를 자발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2)양심 개념의 한계

독일 낭만주의는 정신적 태도에서 양심 개념에 기초하면서, 그 작품은 양심의 개념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양심적 인간의 내면적 모순과 분열을 그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포착했다는 것이 독일 낭만주의의 탁월성이다. 헤겔의 양심 개념의 비판도 독일 낭만주의가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낭만적 양심 개념에 대한 헤겔의 비판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몇 가지 흥미로운 낭만적 주인공들을 간단히 살펴보자. 필자는 낭만주의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①. 양심적 인간

독일 낭만주의 소설에서 가장 대표적 낭만적 인물은 클레멘스 브렌타노의 소설 「용감한 가스펠과 아름다운 안넬의 이야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 주인공 가스펠은 명예심으로 가득차 있다. 그의 명예심이란 인간의 진정한 자유정신, 자기 자신의 존엄성을 의미하며, 근대적 이상의 하나이다. 이 소설에서 가스펠은 자신의 이념을 지키려 한다. 현실은 그런 그를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이런 현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죽음조차 불사하면서 자신의 이념을 지킨다.

②. 범죄적 충동

독일 낭만 작가 가운데 E. T. A. Hoffmann의  소설 「스키데리양」의 주인공인 칼디라크라는 보석상은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보석에 흥미를 지니고, 나중에는 세계적인 보석가공사가 되었다. 그는 이상하게도 그가 만든 아름다운 보석들을 주문자에게 넘겨준 다음에는 불안과 절망에 빠져 잠도 건강도 살아갈 힘도 빼앗기고, 그가 만든 보석으로 치장한 인간의 모습이 밤낮없이 눈앞에 어른거려 견딜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끝내 그 사람을 뒤 좇아 살해하고 그의 보석을 다시 되찾아 오곤 한다.  그는 범죄적 행위조차 불사하는 인물인데, 그의 범죄는 사실 아름다움을 소유한다는,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세속적 욕망과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뒤섞여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 이 인물의 특징이다.

③.무한에의 동경

독일 소설에 나오는 낭만적 인물로서 또 하나 전형적인 것은 이상을 추구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어디에서도 찾지 못하고 동경에 가득 차서 끝없이 방랑하는 인물이다. 아이헨도르프의 소설 「타우게니츠(Taugenichts)」의 주인공 타우게니츠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시민적 속물근성에 반하는 태도를 지닌, 따라서 사회적으로는 쓸모 없는 놈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음악적 능력이 있다. 그는 음악의 마술적인 힘을 통해 신의 언어를 듣고 운명을 예감할 수 있다. 그는 농부나 어린아이와 같이 소박하게 살면서, 그의 모든 것을 신에게 맡기며, 낙천적이고 두려움 없이 이 세게 속에 살아간다. 그는 이 세상에 쓸모 없는 인간이므로, 세상을 방랑하면서 이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세상에 상관하지 않는다. 그는 이런 방랑을 통하여 어떤 영원한 것을 구하고 있다.

④. 죽음의 유혹

호프만의 또 다른 소설  「팔룬 광산」이라는 작품은 또 다른 낭만적 인물을 보여준다. 소설 「팔룬광산」에서 엘리스가 찾는 석류석, 강력한 여왕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엘리스는 이 지상에서의 삶에 어떤 희망도 갖지 못하고, 죽음에 강력한 유혹을 느끼는데, 그에게서 이 죽음은 강력한 여왕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⑤. 종합

독일 낭만주의 소설에 나타나는 인물 성격들을 필자가 의도적으로 추상화시켜 구분하였지만, 사실 낭만주의 소설에서 어떤 한 인물 성격에는 서로 대립되고 모순되는 인물의 성격이 함께 나타난다. 그러므로 낭만주의적 인물은 복합적인 성격을 가지며, 다양한 모순된 자아를 전전하는 분열된 인간으로 나타난다. 낭만주의 문학자들은 인간의 자아 분열을 파악했다는 탁월성에도 불구하고 , 이런 낭만적 인간의 자아 분열이 일어나는 내적 필연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분열을 어디까지나 외면적으로 즉 이상한 묘약의 힘이라든가 악마의 저주에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따라서 낭만주의는 낭만적 인간의 자아 분열을 극복할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양심 개념에 대한 헤겔의 비판은 이런 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헤겔은 낭만적 인간의 자아의 분열을 양심 개념에 의해 내적 필연성에 따라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하려 시도한다. 이를 통하여 헤겔은 낭만적 인간의 자기 극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헤겔에서 낭만적 양심 개념이 어떻게 전개되는가?

 

3) 양심의 비판 제1계기; 아름다운 영혼과 낭만적 동경

① 양심의 보편성

낭만적 양심의 개념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운 종합은 너무나 취약한 종합이었다. 양심이 실제 행동에 나서게 되면, 아름다운 통일성은 부정되고 파괴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헤겔은 먼저 내적 확신 속에 나타나는 양심이 과연 보편성을 가지는가를 문제삼는다. 문제는 행위에 있어서 하나의 상황은 여러 측면들과 연관되며, 이 각각의 측면들은 서로 다른 도덕법칙들에 의해 판단될 수밖에 없다는데 있다.

양심은 행위에 관련된 다양한 법칙들 가운데 선택하던가, 결단하여야 하는데, 만일 그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선택된 특정한 도덕법칙들은 양심적인 법칙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양심적인 법칙은 오직 순수한 것이어야 하며, 하나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양심이 특정 법칙을 선택한다면, 선택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그의 주관성이다. 그런데 도덕법칙이란 주관성에 대립되는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항상 의식에 대해 타자로 나타나며, 법칙과 경건한 명령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심이 주관성으로부터 끌어 내온 것은 도덕법칙이 될 수가 없으며 그저 개체의 자의와 자연적 의식의 우연성일 뿐인 것이다.

 이런 문제는 설혹 양심이 추상적인 보편법칙을 채택한다고 하더라도 회피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누구나 일반적 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법칙은 보편적 형식을 가지므로, 모든 사람에게 양심법칙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보편적 법칙조차 어떤 규정성을 지닐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예를 들어 ‘누구나 자기 이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법칙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다양한 법칙들 가운데 이성적인 숙고와 계량이 가능할 것인가? 그래서 특정한 경우에 누구나 인정할 보편적 법칙이 이런 비교에 의해 발견될 수 있을까? 그러나  숙고와 계량은 이미 어떤 다른 선을 전제로 하므로, 이는 도덕적인 법칙일 수 없으며, 더구나 숙고와 계량은 양심의 개념을 이미 벗어난다. 양심에게서 숙고와 계량처럼 비양심적인 것은 없다. 양심은 단적으로 확신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양심에게서는 보편적 법칙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주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양심의 법칙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지 간에, 자기확신이라는 형식를 통해서만 성립할 수 있으므로, 양심은 어떤 내용에 대해서도 자유롭고, 오히려 자기 확신의 힘 속에 ‘어떤 내용을 묶거나 해소하는 절대적 자율의 권능’이 존재한다고 본다. 즉 ‘자기결정’,‘순수 주관성’이야말로 양심의 최고 의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② 순수주관의 단언(Versicherung)

양심은 이런 자기 확신을 직접적으로 수행하므로, 양심은 자신의 행위가 누구에게나 양심적인 행위로 인정된다고 착각한다. 즉 그는 그것을 ‘모든 사람의 자아’로 간주한다.

그러나 양심이 행위한 이상, 그 행위는 대상적으로 존재하게 되며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는 특수한 규정성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양심적 행위자는  행위의 대상적 존재가 가지는 규정성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에게서 주요한 것은 자기 확신을 실현했다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규정성이란 외부로부터 주어진 우연한 것에 지나지 않다. 그러기에 그는 타인들이 자신의 행위 속에서 이런 규정성을 보지 말고, 그 속에 담겨진 그의 양심을 보아주기를 요구한다. 이를 통해 그는 "타인들에게 그가 제시한 것을 바꿔치기 하고자 한다"24)

하지만 행위가 이미 대상적으로 존재하는 한, 그것은 자아로부터 분리되며, 따라서 다른 대상과 마찬가지의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므로 타인들은 여기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행위자의 양심성을 확인할 도리는 없으며, 오히려 그것이 가지는 규정성에 비추어, 양심적 행위자의 행위는 그저 그의 쾌락과 욕망의 수행에 불과한 것으로 판단한다. 그것은 도덕적 판단에 의해서 부정되어야 할 것, 곧 악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양심적 행위자는 행위의 규정성에 무관심하고, 타인들은 행위의 규정성 때문에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가운데, 양심이 기대했던 객관적 인정이란 불가능하게 된다. 오히려 양심이 객관적 인정의 지반이라고 보았던 그의 행위, 즉 순수 양심의 행위는 상호간에 불신, '완전한 비동일성'의 관계에 이르게 할뿐이다.

양심은 행위하는 한 대상적 존재의 규정성을 벗어날 도리가 없고, 그의 행위는 대상성 때문에 타인들로부터 인정받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양심은 행위라는 지반 속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아를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방식을 찾는다. 그것은 대상적 규정성을 갖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언어이다. 언어는 ‘정신의 직접적인 현존이며, 타자에 대해 존재하는 자기의식’ 이어서, 언어는 정신을 자유롭게 아무런 왜곡 없이 자아를 표현할 수 있다. 타자 역시 언어를 통해 타인의 자아에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 헤겔은 양심의 이런 언어적 표현을 ‘단언’의 형식이라 말한다. 양심은 자기가 양심적임을 믿어달라고 호소하며, 또는 심정의 순수성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역설한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이 내적 확신을 얻었으며, 그의 행위가 내적 확신에 기초한 것이라는 것을 타인에게 확신시키려 한다. 

 

③ 심정종교: 아름다운 영혼.

양심은 처음에 ‘순수지와 순수의욕’으로 자신의 행위를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이런 기대는 행위의 현실에 부딪혀 좌절된다. 이런 좌절을 경험함으로써 양심에서 자기 확신이 무너지면서, 양심의 법칙은 자기를 초월한 대상적인 존재로서 의식된다. 물론 이때의 의식은 단순한 의식과 다르며, 따라서 여기서 대상은 자기에 단적으로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자기의 내면 속에서 확신되는 것이었으므로, 양심의 법칙은 의식에 이중성을 띄고 나타난다. 즉 양심의 법칙은 ‘내면 속에 초월한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심의 법칙은 자아를 초월하여, 동시에 내면 속에 들려오는 신의 목소리이다. 양심은 “자기 자신 속에서 신을 봉사하는 (der Gottesdienst in Selbst)"25), ‘고독한 봉사’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의 고유한 신성을 (대상으로) 직관“26)하기 때문이다.

양심에게서 주요한 것은 이런 신의 목소리이다. 그에게서 개체적 자아란 무의미하며, 그러기에 그의 삶은 단지 신속에 잠겨진 삶이며, 신은 그의 심정에 직접적으로 현현하고 있다.

또한 양심에게 들려오는 신적인 목소리는 보편적인 법칙이므로, 그것은 모든 개인들에게 공동적인 법칙이다. 그러므로 각자가 벌리는 고독한 신의 봉사는 '공동체의 봉사'이기도 하다. 공동체의 성원들은 서로의 단언을 통해서 “서로의 양심성과 선한 의도를 확신하며, 이런 상호의 순수성에 대해 환호하고 그들의 양심적 지와 언표의 경건성, 그들의 탁월성의 보호와 양육에서 활기를 얻는다.“27)

이렇게 하여 이른바 심정종교라는 낭만주의의 의식형태가 출현한다. 낭만주의의 최고 형태로 등장하는 심정종교에서, 그의 행위는  더 이상 대상적 존재를 가지지 않는다. 그의 행위는 단순한 말 잔치에 지나지 않으며, 이 말의 반향은 단지 그에게로만 되돌아오는 것이며, 그러기에 심정 종교는 ‘자신을 사물로 만드는 힘, 존재를 견디는 힘과 같은 외화의 힘’을 결핍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헤겔이 말하는 ‘아름다운 영혼’의 개념이다.

 

“그는 그의 내면의 경건성을 행위나 현존에 의해 오염시킬지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의 심정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현실과의 접촉으로부터 도피하여, 자만에 가득 찬 무기력 속에 머물면서 그의 최종적으로 절대화된 자아를 거부하거나 그에게 실체성을 부여하거나 그의 사유를 존재에로 변화시키거나 자신을 절대적 구별에 맡기지 못한다. 그가 산출하는 공허한 대상을 그는 단지 공허의 의식으로써만 채우며, 그의 행위는 동경일 뿐이다. 이런 동경은 자기 자신의  비본질적인 대상으로 생성 속에서 자기를 잃어버리고, 이런 상실을 넘어서 자기에로 되돌아오면서 자신을 다만 상실된 것으로서만 발견한다.  이러한 철저한 순수성에 불행한 소위 아름다운 영혼이 있다. 그것은 자체 내에서 소멸해가며  허공 속으로 날라 가는 형태 없는 연기로 사라져 버린다.”28)

 

헤겔은 낭만적 소설의 세 번째 유형 즉 무한한 동경에 사로잡히는 인물을 이처럼 낭만적 양심 개념이 현실에 부딪혀 자기 실현에 한계에 이름으로써 나타나는 ‘아름다운 영혼’으로 설명하고 있다.

 

4. 양심의 비판 제2 계기; 양심의 위선과 범죄적 충동

① ‘근원적 동경’으로서 자유의지 

‘악의 가능성’은 근대철학에서 독특한 문제이었다. 쉘링은 이 문제에 관해 매우 독특한  관점을 제시했다. 쉘링은 인간을 이루는 두 가지 원리, 즉 생산적 힘의 원리와 빛의 원리의 독특한 관계 가운데 악의 가능성을 간취했다. 자연의 생산적 힘은 자기를 대립과 분열로 정립한다. 그러나 이 힘은 빛의 원리를 발동시키면서 그것을 지향하며 그것에 규정 당한다. 그러나 생산적 힘이 빛의 원리에 필연적으로 종속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독특한 관계 때문에 쉘링은 생산적 힘을 ‘어두운 동경’이라고 규정했다. 그것은 빛의 원리를 끊임없이 지향하지만, 그것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는 없다.  쉘링은 생산적 힘의 내적인 균열에서 악의 가능성이 성립한다고 본다.  대립과 분열의 힘과 빛의 원리 사이에 넘지 못하는 균열이 존재하므로, 양자 관계의 전도가 일어날 수 있다. 즉 대립과 분열의 힘이 빛의 원리를 지향하고 동경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압도하고 규정하게 되면, 이때 악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생산적 힘은 선악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쉘링은 자발적 의욕이 어떤 경우에 선을 지향하고, 어떤 경우에 악의 원천이 되는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쉘링에서 자아는 외부적인 우연에 따라서 선의지와 범죄적 충동 사이에 전전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쉘링에서 악에 대한 죄와 책임의 추구가 불가능하게 된다. 쉘링은 죄와 책임을 고의성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하는 주관성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하지만 쉘링에게서 악을 저지른 인간은 자연의 잔인한 희생물이며, 악마의 저주 때문에 핍박받고 있는 존재이다.그러므로 그는 죄와 책임을 지지 못한다.  이런 죄에 관한 독특한  관점은 1921년 독일 학생운동의 역사에서 일어났던 코제부에의 살해 사건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낭만주의 법철학자 프리스 교수는 심정의 순수성 속에서 일어난 행위에는 죄가 없다고 선언하면서 살해자인 학생동맹원 잔트의 전적인 무죄를 주장했다.

 

② 양심의 위선과 범죄적 충동

헤겔은 ?법철학?에서 프리스 교수의 주장을 격렬히 비판했다. 헤겔에서 선악은 객관적 규정이다. 특수한 것의 의욕이 악이며, 보편적인 것의 의욕이 선이다. 전자는 인륜적 사회를 분열과 대립으로 이끌며, 후자는 통일과 조화로 이끈다. 헤겔에서 행위자가 자기 행위의 선악을 알지 못한다고, 그의 죄와 책임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죄와 책임의 규명은 어디까지나 인륜적 사회의 권리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헤겔은 악이 외적인 우연에 의해 등장한다는 낭만주의의 주장에 대해 이는 실상 위선을 은폐하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헤겔은 ?법철학?에서 낭만적 자아에게 나타나는 다양한 방식의 위선과 교만의 형태들을 분석했다. 

ⓐ개연주의; 어떤 행위에서나 선한 이유를 어느 정도(개연성) 찾을 수 있으므로, 다른 악한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그 선한 이유만을 들면서, 그 행위가 정당한 것이었다고 합리화하는 위선이 개연주의이다.  모든 행위에 어느 정도 선한 이유를 찾지 못할 바는 없다. 그러므로 타인에게 양심적이라고 위장할 수 없는 행위는 없을 것이다. 

ⓑ추상주의; 이것은 추상적인 의도로부터 행위의 정당성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의도는 그것이 추상화되는 만큼 더욱 더 선하게 된다. 그런데 낭만주의처럼 의도가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이라면, 의도가 추상적 의도인 한, 어떤 행위도 순수한 의도로부터 도출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행위가 합리화될 수 있다.

‘목적은 수단을 신성시한다’는 주장도 이 같은 낭만주의적 추상주의에서 나온다. 이 경우 목적은 매우 추상적으로 제시된다. 그런 만큼 어떤 행위도 그 목적에 적합한 수단으로 제시될 수 있다. 그러므로 행위자는 자신의 행위를 추상적인 목적인 선한 의도로 위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주관적 확증; 이것은 행위가 보편적 양심에 따랐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자기 내면의 충실성에 의존하는 경우이다. 행위의 의도가 선한 것이었음을 자기 마음속에서 스스로 충실하게 느껴진다면 그의 행위는 정당화된다. 그런데 아무리 악한 행위라도 하나의 선한 이유는 찾을 수 있으므로,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오직 이 이유에만 집념한다면 이는 충실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런 마음의 충실성은 끝내 행위의 본래 의도조차 잊어버리게 만들고 스스로를 교만하게 만들 것이다.

ⓓ이로니: 앞에서 설명했듯이 낭만적 이로니는 모든 특수한 내용을 부정하고 공허한 형식적 주관성 속에 머무르는 것이다. 헤겔은 공허한 주관성에 만족하는 것을 위선의 최후형태로 본다. 이로니는 악한 행위를 해 놓고도 그것은 마치 자기의 일이 아닌 것처럼 자기 자신은 순수하게 그 행위 밖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것은 비단 타인에게 그렇게 위장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악한 행위를 이제 악마의 저주나 마법의 약에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순수무구한 존재로 믿어 버린다. 

양심의 위선 즉 자기 기만이 낭만적 소설에서 범죄적 충동에 사로잡힌 인물이 양심과 범죄 사이에서 전전반측하는 이유가 된다. 헤겔은 낭만주의 소설이 외부적 우연에 의거하는 것으로 설명한 것을 양심 개념에 내재하는 필연성에 따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법철학?에서 유형적으로 제시된 위선의 형태들과 달리 ?정신현상학? 「양심」 절에서는 낭만적 양심이 범하는 위선이 과연 완전하게 성공할 수 있는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헤겔은 낭만적 자아의 위선은 스스로 폭로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제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 보자. 

 

③ 행위하는 자아에서 위선의 폭로

본래 양심의 의식에는 두 가지 계기가 있었다. ‘자발적 의욕’으로서 행위하는 개체적 자아와 보편적 양심을 의무로 삼는 ‘순수지’가 그것이다. 헤겔은 그의 계기와 형태의 변증법의 원리29)에 따라서 이제 이 두 가지 계기, 즉 개체적 자아와 보편적 의무라는 계기가 서로 대립되는 두 자아의 형태로 등장한다고 말한다.

개체적 자아는 행위를 중시하여, 자신의 행위가 특수한 의욕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내면에는 여전히 두 가지 계기가 존재하는데, 다만 각 계기는 서로 다른 비중을 부여받는다. 그에게서 개체적 자아가 주요한 것이며, 반면 보편적 의무는 단지 개체적 자아의 목적을 실현하는데 쓰이는 수단일 뿐이다. 반면 이에 상반된 자아에게서는 보편적 의무가 주요하다. 그는 여전히 보편적 의무를 존중하며, 그것에 대한 구속력을 느낀다. 그에게서 개체적 자아의 행위란 단지 그것을 수행하는 계기, 즉 ‘지양된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헤겔은 전자를 행위하는 자아라 규정하고 후자를 보편적 의식(의무 의식)이라 규정한다.

이런 보편적 의식에서 볼 때 특수적 욕망을 추구하지만 겉으로는 양심을 수행한다고 말하는 행위하는 자아는 ‘자기 비동일성’으로서 악이며, 그 자체가 위선이다. 행위하는 자아는 보편적 의식이 악이라고 비판하는 것을 자기의 양심 따른 행위로 가장하려 한다. 심지어 그는 타자를 속일뿐만 아니라 그 자신조차 속이려 하면서 이런 비판에 대응한다.

그러나 헤겔은 철저하게 자기를 속이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기 기만은  양심을 수단으로서 사용하므로, 오히려 양심에 대한 경멸을 포함한다. 따라서 양심인 것처럼 자기를  가장하려 할수록, 이미 그 속에  양심에 대한 철저한 경멸이 들어 있으므로, 그는 이런 가장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며, 따라서 그 스스로를 속일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행위하는 자아는 타자인 보편적 의식을 속이는 것은 가능할까?  헤겔에 따르면 이것도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타자는 그를 믿지 않고, 따라서 그의 행위는 인정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적 의무는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것이어야 하므로, 그것은 개체의 자의가 아니고, 따라서 내적인 것일 수는 없다. 즉 그것은 객관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행위하는 자아가 행위를 자신의 내적인 법칙에  따른 것이며, 양심이라고 아무리 강변해 보아도, 이미 내적이라는 말속에 그것이 개체의 자의임이 누설되고 만다.

결국 행위하는 자아에게서 위선은 불가능하다. 위선은 스스로 누설되거나 심지어 불필요하게 느껴지며, 여기서 행위하는 자아는 솔직히 자신을 즉 자신의 사악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④ 보편적 의식의 감추어진 위선

헤겔의 설명에 따르면 행위하는 자아는 행위를 하는 가운데 일찌감치 자기의 위선을 인정하지만 보편적 의식은 타자를 위선이라고 비판하는 가운데 자기의 위선은 은폐하고 있다고 본다. 사실 보편적 의식에서 그가 행위하는 자아를 비난할 때 의존하는 법칙 역시 그 자신의 것, 즉 특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법칙은 행위하는 자아의 법칙에 비해 탁월할 것도 없으므로, 그것은 오히려 행위하는 자아를 정당화시켜 줄뿐이다. 그러므로 보편적 의식은 자기가 하고자 했던 바와는 반대의 것을 하고 만다.

더욱이 현실적으로 행위하는 자아와 달리 보편적 의식은 스스로 현실적으로 행동하기를 포기한다. 만일 행위에 나아가면 그 역시 개체적 자아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으므로, 보편적 의무에 충실하려 하는 한 그는 행동에 나갈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그는 항상 ‘사상의 보편성’ 속에 머무르면서 평가하는 자로서의 태도만을 취한다. 그의 행위라고는 타자에 대한 평가 밖에는 없다.

원래 양심은 의무의 자발적인 의욕이며, 따라서 직접적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의식은 그 순수성을 사유 속에서 보존하며, 행위하려 하지 않는데, 그러므로 보편적 의식은 행위하는 자아와 마찬가지로 위선이다. 다만 행위하는 자아가 행위를 통해 위선을 드러내지만, 보편적 의식은 평가만을 행동으로 간주하고, 탁월한 신조의 표현을 통해서 위선을 감추는 자일뿐이다.

 

“양자에게서 마찬가지로 현실은 말과 구분된다. 그런데 행위하는 자아에게서 행위의 이기적인 목적이 말과 구분되며, 반면 보편적 의식에서는 의무가 행위 없이는 의미가 없으므로, 의무를 말하는 것 가운데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행위의 결핍을 통해서 구분된다. ”30)

 

일반적으로 구체적 행위는 한편으로는 의무로 여겨지는 보편성의 측면을 가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정한 현존에 속하는 특수한 측면을 가진다. 그런데 평가하는 보편적 의식은 행위하는 자아의 행위 가운데 보편적 측면을 보지 않는다. 그는 특수한 측면만을 보면서, 특수한 측면이 그의 진정한 의도라고 간주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어떤 행위가 명성을 결과적으로 동반하게 된다면, 평가하는 의식은 이 행위를 명예욕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한다. 또 행위가 자기 실현을 통해 즐거움의 느낌을 동반하게 되면, 그것은 행복에의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된다.  칸트가 말하는 바 의무를 의무를 위해 수행하는, 즉 순수한 목적이란 성립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떤 행위도 특수한 현존의 측면을 가지는 한, 이와 같은 평가를 벗어날 도리가 없다. 하지만 “시종에게 영웅이 없다면, 그것은 그가 영웅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시종이 시종이기 때문이”31)듯이, 보편적 의식에게는 행위의 특수한  측면만이 항상 보이는데, 그것은 행위에 보편성의 측면이 없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 ‘도덕의 시종’이기 때문인 것이다.  결국 보편적 의식은  행위하는 자아에 못잖은 비열하고 사악함이 드러난다. 

 

5) 양심 비판의 세 번째 계기; 죽음에의 충동, 양심의 유희.

이상에서 설명된 것처럼 행위하는 자아와 보편적 의식은 외면적으로 대립하지만, 그 각각은 이미 자기 내에 타자를 함축하고 있어서, 사실 이런 외면적 대립은 실상 각 자아의 내부적인 자기 대립이다. 보편적 의식은 행위하는 자아 속의 자기 비판의식, 또는 죄의식을 의미한다. 보편적 의식에게서 행위하는 자아는 공허한 주관의 형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실체적 내용을 얻으려는 의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외면적 대립에서 이루어지는 서로에 대한 비판은 사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의 비판에 해당된다. 이런 외면적 대립을 내면적 대립으로 끌어들이고, 그럼으로써 자기를 초월하고, 마침내 외면적 대립조차 해소하는 과정이 헤겔의 의식의 변증법적 경험의 과정이다. 이를 통해서 자아는 보다 근원적이고 포괄적인 자아에 이르게 된다.

 

①. 행위하는 자아의 고백

이미 보았듯이, 보편적 의식은 행위보다도 행위 없는 공허한 말, 도덕적 평가를 우위에 놓는 한, 행위하는 자아에 못잖은 위선이다.

그런데 행위하는 자아는 이미 보편적 의식의 비판 앞에서 자신의 위선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그 스스로를 악한 존재이라고 인정한다. 동시에 그는 보편적 의식도 그에 못지 않은 위선임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보편적 의식에 의해 여전히 ‘낯선 자’로서, ‘그와 동일하지 않은 자’로서 파악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보편적 의식의 냉담함에 전율하면서, 보편적 의식에게 자기를 고백하고, 보편적 의식도 그의 고백에 응답하여, 자기와 동등함을 인정하기를 기대한다.

그의 고백은 결코 타자, 즉 보편적 의식을 격하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고백은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니며, 자기가 보편적 의식과 다름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자신과 보편적 의식이 마찬가지임을 언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고백 속에서 서로의 동등함을 표현하는 것인데, 그는 보편적 의식도 그 자신을 진정으로 고백해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② 죽음에의 충동

행위하는 자아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 나는 악한 사람이다. 그러나 여기에 보편적 의식으로부터의 동등한 고백이 응답하지 않는다. 보편적 의식은 행위하는 자아의 고백 앞에서 자부심에 가득차서 뻣뻣하게 목을 치켜 들고 있다. 보편적 의식은 ‘냉담한 심정(das harte Herz)’이다. 

보편적 의식은 고백의 거부를 통해 여전히 개체적 자아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행위하는 자아가 고백 속에 이미 내던진 것을 여전히 비밀히 감추고 있으며, 그가 범한 모순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내면 속에서 그리고 단지 언어적 현존 속에서 자기를 확신하는 가운데,  행위하는 자아에 대한 자기의 비난을 진정한 비난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황폐한 의식’이며,  이 같은 경직성을 때문에 자아의 내적 분열과 자아들 사이의 상호대립을 여전히 지속시킨다.  이런 대립이 너무나 극단적이기에, 이런 대립 속에서 양자의 통일은 보편적 의식에게 다만 부정적으로만 다가온다. 통일성은 정신이 결여된 존재로서 죽음에서나 가능하다.  그러므로 보편적 의식은 ‘소멸에의 동경’에 사로잡혀, 존재의 비정신적 통일, 곧 죽음만을 산출할 뿐이다.

낭만주의의 최후의 형태가 죄의식(보편적 의식)에 기인하는 죽음에의 동경이다. 낭만주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죽음의 아름다운 매혹은 이렇게 보편적 의식의 감추어진 위선에서 나오게 된다.

그러나 헤겔에서 죽음에의 동경은 단지 부정적인 의미만을 지니지 않는다. 그의 의식의 변증법적 경험의 과정에서 죽음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자기부정이 오히려 의식의 새로운 전환의 계기로 된다.  즉 보편적 의식에서 나타나는 죽음에의 동경으로부터  낭만적 양심 개념의 근본적인 극복이 일어나게 된다. 

 

③ 아름다운 영혼의 화해

행위하는 자아는 자기 고백을 통해서 이미 의식의 분열을 극복하였다. 그는 자기 행위의 악함을 스스로 인정함으로써, 자기 내로 복귀하며, 행위에서의 개체성의 측면은 이제 ‘직접적으로 소멸하는 것’으로서 즉 전체를 위한 계기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동시에 그는 이제 타자와의 동등성을 즉자적으로는(an sich) 확보하였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런 고백을 통해 행동하는 자아의 “상처는 아무 흉터 없이 치료되었다”32) 고 말한다.

문제는 경직된 심정인 보편적 의식이다. 이 보편적 의식도 행동하는 자아처럼 그의 평가 속에 감추어진 일면적인 개체성을 분쇄하여야 하며, 행동하는 자아가 현실에 대해 정신의 힘을 보여주었듯이 그도 은닉된 개체성을 지배하여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만 비로소 이미 행동하는 자아에 의해 즉자적으로 마련된 타자와의 동등성이 실제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경직된 보편의식의 자기극복이 가능한가? 그러나 죽음에의 동경을 느끼면서, 보편적 의식은 자기를 극복하게 된다. 죽음의 동경을 떨치고 일어나면서, 보편적 의식의 자기 극복이 일어난다.

이제 보편적 의식은 자기 분열을 극복하여 경직된 심정을 버리고, 행동하는 자아를 용서하게 된다. 자신의 비현실적인 본질에 대한 집착을 포기함으로부터,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로부터 타자 즉 행동하는 자아에 대한 용서가 나오게 된다. 이렇게 행동하는 자아가 자신의 개체성을 포기하듯이 보편적 의식은 자기에게 특정한 집착을 포기하면서, 마침내 양자의 진정한 통일, 양자의 상호인정이 이루어진다.

낭만적 양심을 극복하고 진정한 화해에 이르는 헤겔의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주요한 것은 자신의 악에 대한 고백이며, 타자에 대한 용서이다. 이제 근대적 자아의 내적 분열이 극복된다. 즉 근대적 자아에는 사유의 보편성과 의지의 개별성 사이에 내적 균열이 있었다. 자기 고백을 통해서 실천적 의지가 자기의 특수성을 인정하면서, 마침내 진정한 보편성에 이르게 됨으로써 이런 균열이 사라진다. 타자에 대해 용서를 통하여 개체적 자아들의 외면적인 대립은 사라진다. 개체적 자아들은 보편적 통일성에 이르러 서로를 인정하는 조화에 도달한다.

근대적 시민사회에서 통일은 외적 강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기계적 통일이었다. 낭만주의는 진정한 보편적 통일의 이념을 제시하고 미적 주관성을 통해 이것에 직접적으로 도달하고자 했지만 실제로 이런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헤겔은 낭만주의에서 보편적 통일의 이념을 받아들이면서, 역사적으로 등장하는 의식의 경험을 통해 실제로 이런 보편적 통일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백과 용서의 개념은 사실 루터적 프로테스탄티즘의 근거가 되는 개념이었다. 루터가 종교적으로 도달한 경지에 헤겔은 철학적으로 도달했다. 즉 그는 개념의 엄격성과 사상(事象)의 내적 필연성에 따라 도달한 것이다.

 

4장. 결론

필자는 헤겔의 낭만주의 비판을 특히 양심 개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필자가 여기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헤겔과 낭만주의 사이의 관계이다. 이념적으로 헤겔은 낭만주의와 동일한 지반 위에 있다. 그러나 헤겔은 낭만주의가 미학적 원리에 의해 도달하려는 방식을 믿지는 않았다. 그에게서 그것은 공허한 말 잔치에 불과했다. 헤겔이 그 대안으로 제시했던 것은 개념의 엄격성과 사상의 내적 필연성에 따라 전개되는, 역사적 실천과 그것을 통해서 발견되는 모순과 대립 앞에서 겪는 정신의 고투를 통해서 얻어지는 자아 해방의 과정이었다. 

 

필자는 헤겔의 관점이 최근의 사상적 혼란에 어떤 희미한 빛을 비추어 주지 않을까 기대한다. 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불어 닥쳤다. 어떤 측면에서 낭만주의의 이념을 근거로 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아마도  7,80년대 우리 사회의 계몽주의와 과학적 유물론에 대한 반발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낭만주의의 출현과정과 역사적으로 닮았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수용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낭만주의에 대한 헤겔적 관점 즉 그 이념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방법을 비판하는 관점은 사상의 새로운 종합으로 이끌어갈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겠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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