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마스의 사회이론
정철희 (전북대 교수, 사회학)
일찍이 리히트하임이 하버마스를 평하면서, 하버마스의 동년배들이 자기 전공분야의 한 구석을 힘겹게 정복하고 있을 때 과학론, 지식사회학, 형이상학 등 방대한 서구의 고전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이들을 하나의 새로운 지적 체계로 재구성한 데 대해 경탄해 마지 않은 적이 있을 만큼 하버마스는 근 40년간 유럽과 세계의 인문사회과학 연구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 중의 하나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Bernstein, 19 85: 1).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연구는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에 대한 과도한 예찬이나 일방적 폄하를 지양하고 그 성과와 문제점을 동시에 검토하려 한다. 본 연구에서 필자는 하버마스의 연구 중 물화와 비판의 근거에 관한 연구는 하버마스의 업적으로 평가받을 가치가 있으며 공영역에 관한 연구도 생활세계제도에 관한 연구에 의해 보완된다면 역시 중요한 업적으로 인정받아야 함을 주장한다. 하지만 하버마스의 현대성에 관한 이론은 포스트모던 연구의 중요성을 부당하게 무시하여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음 역시 지적한다. 이와 같이 하버마스가 모든 면에서 고른 성취도를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하에 이 글은 그의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시도한다.
1절에서는 루카치 이후 서구 맑스주의의 중심 테마였으면서도 이론적인 자가당착에 빠져 있던 물화론을 체계화하고 그 극복의 대안을 밝힌 것은 하버마스의 중요한 공헌이라는 점이 주장된다. 2절에서는 사회비판의 근거를 찾지 못해 비관주의의 길을 걷게 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와는 달리 일상적 상호작용 속에서 비판의 근거를 발견한 점도 하버마스의 의미 있는 업적임을 제시한다. 그 다음 절에서는 하버마스가 이룩한 또 다른 성과로서 공영역 연구를 통한 민주주의론에의 기여를 논의하며 이러한 연구의 완성을 위해서는 코헨과 아라토의 생활세계제도 연구에 의해 하버마스 이론의 약점이 보완되어야 함을 지적한다. 그 다음 절에서는 하버마스의 현대성에 관한 테제가, 보편적 범주에서 배제되고 이질적이며 대표되지 못한 세력을 배려하려는 포스트모던 사회이론을 일방적으로 무시했고 포스트모더니티라는 사회현상의 등장을 간과하였다는 비판을 개진한다. 하버마스의 이러한 약점은 그의 뒤를 잇는 호네트나 켈너와 같은 차세대 비판이론가들에 의해 보완되어야 할 것임도 주장될 것이다.
1. 물화와 그 극복
루카치 이래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물론이고 푸코와 초기의 보들리야르(1981)에 이르기까지 서구 맑스주의 연구자들의 중심주제 중의 하나는 물화에 대한 개념화와 그 대안의 모색이었으며 하버마스 역시 후기자본주의사회의 물화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 루카치(1971)는 맑스의 상품의 물신성이라는 개념과 베버의 형식적 합리성이라는 개념을 조합하여 물화라는 개념을 고안해 낸다. 예술활동에서 전형적으로 발견되는 질적이고 자발적인 인간의 활동이 자본의 운동에 의해 균일화되고 통제되어 화석화된다는 것이 루카치의 물화론의 핵심이다. 루카치의 창조적인 개념은 서구 맑스주의의 중심주제가 되지만 가장 물화된 프롤레타리아가 역사적 진실을 자각하여 물화를 극복한다는 루카치의 대안은 만족스럽지 못한 채로 남겨진다(Chung, 1996). 루카치를 계승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1972) 등은 루카치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과도한 낙관과 헤겔적 맑스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보다 사회심리학적인 연구에 몰두하지만, 그들의 물화론인 문화산업론 또한 문화산업이 대중의 비판의식을 마비시키고 자본주의체제의 과잉생산을 해결한다는 '급진기능주의'적 시각에 머문 채 '총체적 관리'체제를 극복할 이론적 방안을 모색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Horkheimer and Adorno, 1972; Habermas 1984). 그렇다면 하버마스는 그의 선배학자들이 만족스런 결과를 내지 못한 물화 연구에 있어서 물화의 개념을 어떻게 설정하고 극복하는가와 그 문제점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버마스(1989)의 원초적 물화론은 뒤에서 논의할 {공영역의 구조적 변동}에서 이미 부분적으로 제기되었으며 초기 하버마스는 공영역이 거대조직과 국가에 의해 압살될 것이라는 전망을 한 바 있다. 이 당시 물화론은 그의 선임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 후 생활세계의 식민화라는 개념으로 후기자본주의사회의 물화를 개념화하면서 물화에 대해 조금은 더 낙관적 전망을 한다. 베버의 합리화론이 도구적 합리성의 증대만을 강조하였는 데 비해 하버마스는 근대 이후 사회체계의 분화가 이루어지면서 경제와 정치적 영역뿐 아니라 생활세계도 탈인습적 도덕성이 재생산되는 구조를 갖추게 되어 쉽게 물화되지 않는 체제를 정비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베버로 하여금 자본주의문화가 급속도의 합리화과정을 밟고 있는 경제와 관료제의 위력에 무력하다는 가정을 비판하여 물화과정의 가역반응이 가능함을 주장할 수 있게 한다. 하버마스는 사회체계를 체계와 생활세계로 구분하고, 체계는 돈과 권력이라는 매체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며 생활세계는 문화, 사회통합, 인성을 재생산하는 영역으로서 체계의 미디어와 구별되는 상호이해에 이르려는 의사소통행위가 일어나는 곳으로 개념화한다. 생활세계의 식민화는 체계의 유지를 담당하는 미디어가 생활세계에 침투하여 민주적 규범수립의 절차를 무시하고 이를 돈과 권력의 교환관계에서 발생하는 논리로 대체하는 상황을 말한다.
생활세계의 식민화가 진행되면 돈과 권력의 유입에 의해 사회성원의 규범의 부재가 발생하게 된다. 의사소통행위에 의해 달성되는 규범적 근거가 장애를 받게 되는 것이다. 돈과 권력이라는 매체는 비판 가능한 타당성 주장(validity claim)에 의존하지 않는다. 주장의 타당성에 대한 담론 없이 효용과 효율이라는 기준을 지향하고 있을 뿐이다. 그 결과 사적 영역과 공영역에 병리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사적 영역에서는 베버가 일찍이 예견했던 "심장 없는 감각주의자, 영혼 없는 전문가" 현상이 퍼져 의미상실이 팽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공영역에서는 관료제의 팽창에 따라 도덕 실천적 요소들이 제거된다. "정치행위는 정당한 권력의 획득과 행사를 위한 투쟁으로 축소되고 말아" 정당성의 기반은 윤리 아닌 적법성에만 기초하게 되어 현대정치체제는 정당성의 기반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Habermas, 1987a: 311-312, 324).
하버마스의 이러한 물화론은 루카치가 자본과 관료제의 문화영역에의 침투에 대하여 생철학에 기초한 인간주의적 비판을 한 것에 비해 사회이론의 틀 속에서 물화현상을 접근했다는 면에서 이론적 세련화를 보인 것이다. 또한 이미 근대 이후 생활세계의 자율적 발전을 가정함으로써 생활세계의 유지 기제가 전적으로 체계의 매체에 의해 대체되거나 말살되지는 않으리라는 시사를 하고 있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총체적 관리론에 비해 후기자본주의 문화영역의 가능성에 보다 낙관적 전망을 투사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물화과정을 극복하는 사회제도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으며 그 가능성을 부르주아 가족내의 탈인습적 사회화, 체제순응과 동시에 체제비판을 그 내적 생리로 하는 대중매체의 이중성, 그리고 신사회운동에서 조심스럽게 모색하고 있다. 그는 신사회운동이 분배의 문제보다는 "삶의 형태에 관한 문법(grammar of forms of life)"을 겨냥하고 있으며 삶의 질, 평등한 권리, 개인의 자기실현, 참여, 인권 등을 그 쟁점으로 한다고 간주한다. 신사회운동은 사적 영역에서는 서비스, 인간관계, 시간에 대한 금전화에 대항하고 있으며, 공적 영역에서 또한 관료제가 자원적 조직의 요구에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며 궁극적으로 자원적 조직과 같은 참여를 수용하는 형태로 재조직화되도록 노력하여 생활세계의 탈식민화를 모색한다는 것이다(Habermas, 1987a: 395). 하버마스(1987a: 382)는 또한 최근까지 가족은 거대사회체계내의 하나의 제도에 불과하다고 여겨졌던 점을 비판한다. 근대부르주아사회에서 평등한 인간관계, 개인주의적 교호관계, 자유화된 육아방식을 갖춘 가족제도가 의사소통행위의 하부구조를 형성하고 있어 체계의 매체가 유입되는 것으로부터 생활세계를 방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버마스는 대중매체에 잠재한 탈식민화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대중매체가 중앙집중형 단방향의 통신경로를 가지고 있어 사회통제를 강화하는 면이 있지만 해방적 잠재력 또한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대중매체가 돈과 권력과 같은 체계의 매체가 아니라 의사소통의 일반화된 형태에 속하기 때문이다(Habermas, 1987a: 390). 이러한 원칙론에 덧붙여 그는 대중매체가 다음과 같은 속성 때문에 비판적 기능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Habermas, 1987a: 391).
방송은 이해갈등에 노정될 수밖에 없어 일사불란하게 대중을 조작하지 못한다.
스튜어트 홀이 제시했듯이 시청자는 입력된 부호를 의도된 대로 해석하지 않고 자신이 속한 하위집단의 판단기준에 의해 해독한다.
오락 프로그램조차 비판적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뉴미디어와 같은 기술발달로 인해 탈중심화된 매체가 등장하고 있다.
물화에 대안 없는 비판이론은 생각하기 힘들다. 현대사회가 끝없는 의미상실의 과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대안적 사회질서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하버마스는 루카치의 엄밀성을 결여한 낙관론이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비관론을 극복하고, 엄밀하면서도 낙관적인 비판이론을 재건할 수 있었다. 물론 위의 하버마스의 연구가 물화를 극복할 매우 성숙한 논의를 개진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버마스 자신이 생활세계의 식민화의 장래에 관해 대단히 낙관적인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단지 비판이론의 전통에서 볼 수 없었던 물화 극복의 가능성이 특정한 사회제도 속에 존재함을 밝혔을 뿐이다. 어쨌든 하버마스의 이러한 시도는 위대한 업적은 아니지만 의미있는 이론적 진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
2. 비판의 근거
하버마스의 작업 중 물화에 관한 연구만큼이나 주목해야 할 것은 하버마스가 사회비판의 근거를 모색하였으며 그 근거를 제시했다는 사실이다. 비판이론의 출발이 이성이 가진 비판능력을 발굴하여 비이성적 실재를 극복하는 것이었다(Calhoun, 1995; Horkheimer, 1972). 그러나 비판이론의 1세대는 인간의 이성 자체가 인류의 생존을 위한 도구적인 목적에 주로 사용되어 비판의 기능을 상실했음을 주장한다. 아도르노는 인간이 자기보호를 위해 자연과 타인을 지배하게 되면서부터 도구적 이성만이 발달하고 실질이성은 망각되었다고 간주한다. 이에 따라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비관주의에 빠지게 되고 타락하지 않은 원초적 이성을 재기억하기 위해 하이데거의 주장과 같이 시(詩)를 연구해야 한다는 주장에 이른다. 하버마스(1984: 396)는 이들의 이러한 입장을 이성을 의식철학적으로 접근하는 데서 빚어진 당연한 귀결로 간주한다. 유아론(唯我論)적 선험적 자아라는 개념에는 오직 도구적 이성만이 존재하며 실질이성은 복수의 행위자들의 상징적 상호작용을 연구할 때 비로소 그 속에 존재함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주장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 존재하는 이성이 의사소통합리성이라 명명된다.
이와 같이 하버마스는 독일의 고전철학자들과는 달리 비판의 근거를 선험적인 것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찾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하버마스는 일련의 사회학적 연구를 통해 비판이성이 사회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자신의 주장의 타당성을 강화하고 있다. 허버트 미드와 일상언어 연구를 통해 인간의 상호작용, 보다 구체적으로, 당연시된 일상적 의사소통내에 비판이론의 규범적 근거가 자리잡고 있다고 밝힌다. 이 규범적 근거는 규범의 내용을 미리 제시하는 것은 아니며 사람들이 대립하는 쟁점에 관해 민주적 담론이라는 절차상의 규범을 준수하는 데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담론과정을 거쳐 합의된 규범에 근거하여 사회적 관행과 제도를 비판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비판이론의 요체이다. 하버마스(1987a)는 또한 뒤르켐의 성과 위에, 비판이라는 개념이 철학자의 머리 속에 존재하는 상념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와 구별되는 성스러움의 영역을 확보하고 이를 재생산하기 위한 의례 속에 배태되어 온 것임을 밝혀 비판이론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결국 비판은 만족할 줄 모르는 불평분자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짜임의 일부로서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1984)는 베버의 합리화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바, 근대화가 진행될수록 규범의 영역이 경제 행정의 영역으로부터 독립해 이상적 담화 상황이 현실에서 실현될 수 있게 하는 문화의 역량을 증대시켰다고 주장하여 문화의 진화에 의한 비판의 가능성의 증대를 주장한다.
하버마스의 비판의 근거 설정의 특징은 비판의 선험적 근거를 거부하고 생활세계내에 내재한 비판의 근거를 제시하지만, 그 근거가 구체적인 사회 역사적 조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황을 초월한 보편성을 가진다는 주장이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상호작용에 내재한 시공을 초월한 합의를 도출하는 구조가 존재함을 밝힌다. 하버마스는 경제적 정치적 이해를 떠나 상호이해에 도달하려는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합의를 도출하는 구조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보편적 근거가 없으면 상대주의에 빠져 비판이 가능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하버마스의 이러한 보편성에 대한 강조는 많은 포스트모더니스트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지만 하버마스에게 있어서는 양보할 수 없는 비판이론의 보루이기도 하다.
하버마스의 작업은 그의 주장에 대한 많은 회의에도 불구하고, 제1세대 비판이론가들이 봉착했던 비판적 이성의 소멸과 그에 따른 비판이론의 실패라는 위기상황에서 의사소통합리성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켜 비판의 근거에 관한 이론을 재구성했다는 의의를 지닌다.
3. 공영역의 발견과 민주주의
공영역의 성립에 관한 하버마스의 중심된 질문은, 공적 쟁점에 관해 지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토론에 의해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기 위한 사회적 조건은 무엇인가이다(Calhoun, 1992: 1). 하버마스가 찾아낸 이 사회적 조건이란 바로 근대적 가족의 등장과 문학적 공영역이다. 경제적 생산이라는 기능에서 벗어나 사람간의 친밀한 관계라는 순수하게 인간적인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영역, 즉 근대가족이 탄생하게 되었다. 근대가족은 인간관계가 경제적 이해나 지위에 따른 명령과 복종의 관계가 아닌 자유, 사랑, 인격함양에 기초할 수 있다는 사실을 관념 아닌 제도로써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순수하고 친밀한 관계는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초월한 상호이해에 도달하려는 참여자의 의도가 요구되는 공영역의 기초적 조건을 만족시켜 주게 되었다고 하버마스(1989: 48)는 주장한다. 한편 문학적 공영역은 회합장소, 잡지, 사회적 관계망과 같은 정치적 공영역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런던에만 3천여 개의 커피하우스가 있었는데 이 커피하우스는 애초에 문학작품에 관해 토의하고 뉴스레터를 돌려 보는 장소였지만 신분의 고하에 관계없이 논쟁을 벌이던 제도는 정치적 공영역의 모태가 되었다(Calhoun, 1992). 공영역의 구조적 변동은 바로 가족과 문학적 공영역에 기초하여 형성된 정치적 공영역이, 거대사업조직과 국가의 등장에 의해 본래에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토론이 이루어지던 곳에서 사적 이유추구와 이익집단의 권리를 주장하는 상황으로 쇠락함을 가리킨다. 하버마스의 공영역의 구조변동의 중심적 주장 중의 하나는 공영역의 발전 못지 않게 쇠퇴이다. 이런 의미에서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는 루카치의 물화론이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의 주제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는 초기의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비판이론과 결별하여 초역사적이고 반직관적인(counter factual) 의사소통이론으로 전환하였다.
{공영역의 구조적 변동}은 1962년에 출간된 이후 하버마스 자신도 계속 개작을 시도했으나 결국 30년 뒤에 하버마스 자신이 아닌 코헨과 아라토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최근에 {공영역}의 영문판 번역에 맞추어 이에 관한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지만, 하버마스가 개진한 사회이론을 수정해야 공영역에 관한 보다 의미있는 논의가 가능하다고 판단된다(Calhoun, 1992). 후기자본주의사회의 공영역이 그 구조변동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지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하버마스 자신보다는 차세대 비판이론가들에 의해 제시되었다.
하버마스의 체계와 생활세계 구분과 그의 일차원성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인해, 물화과정 속에서 어떻게 생활세계의 민주적 규범을 재생산해 내며 확산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를 시원스럽게 해결하지 못하였다. 물화에 저항할 수 있는 공영역의 가능성에 대해 그는 이미 그의 초기 저작에서 포기해 버렸던 것이다. 하버마스 연구의 가장 대표적 강점은 하버마스에 의해 개발되지 못했고 코헨과 아라토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버마스에 있어 서로 단절된 영역으로 상정된 체계와 생활세계의 구분은 코헨과 아라토에게는 반직관적인(counter-intuitive) 개념으로서 전략적 행위와 의사소통행위의 배합의 연속선의 기준으로 제시되고 있다. 두 비판이론가들의 하버마스에 대한 불만의 핵심은 "오래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차원성에 관한 테제가 아직도 하버마스의 실재하는 사회 경제 정치적 제도들의 접근에 망령처럼 떠돌고 있다"(Cohen and Arato, 1992: 527)는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망령 때문에, 즉 시스템에 관계된 것은 물화시키는 것이라는 경직된 사고 때문에, 하버마스가 스스로 암시하고는 있으면서도 생활세계의 제도적 측면에 관한 연구를 발전시키지 못하여 현대 사회운동의 소극적 측면밖에 보지 못했다고 코헨과 아라토는 비판한다.
두 차세대 비판이론가에 따르면 존재하는 대부분의 사회제도는 전략적 요소와 의사소통적 요소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들 중 사회화제도, 시민사회, 문화적 제도로 대표되는 생활세계제도는 주로 의사소통행위에 지배를 받고 있어 체계의 미디어와 구별되는 생활세계적 규범을 생산한다. 그와 동시에 단순한 방어 아닌 민주적 규범의 실현을 위해 전략적이고 문화적인 정치를 펼쳐 정치사회와 경제사회가 점차 이러한 규범하에 작동하게 하여 체계의 매체인 돈과 권력의 공격에 반격을 가한다는 것이다. 생활세계제도는 하버마스가 발견한 정체성의 정치와 같은 방어적 실천 이외에도 영향의 정치와 포괄의 정치와 같은 공격적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코헨과 아라토의 주장이다. 정체성의 정치는 문화적 규범과 개인적 집합적 정체성, 적절한 사회적 역할(appropriate social roles), 해석의 양식 등을 재정의하는 일과 관련된다. 또 영향의 정치는 설득을 통한 상대방의 동의를 끌어내는 소위 담론과정을 통해 사회적 규범과 정치문화의 변경을 도모한다. 포괄의 정치는 돈과 권력이라는 매체가 지배하는 정치 및 경제사회에 생활세계적 가치를 이식하기 위한 전략적 활동들에 관한 것인데 이러한 활동에는 타협, 협상, 로비과정 등이 포함된다. 포괄의 정치는 제도내의 진입을 겨냥하여 정치사회에 새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인정을 받고 이들이 대표하는 사람들이 이익을 얻도록 도모하는 활동이다(Cohen and Arato, 1992: 504, 526). 코헨과 아라토의 생활세계제도에 잠재된 민주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의 발견은, 공영역의 구조적 변동이 이루어진 후기자본주의사회에서도 공영역이 생활세계제도를 통해 유지 및 재생산될 뿐 아니라 확장될 수 있음을 밝혀, 하버마스의 공영역 연구를 완성시키는 한편 당대의 민주주의 연구에 공영역과 생활세계 개념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공영역의 구조적 변동}은 근대 서구민주주의에 관한 보고서라 할 수 있다. 하버마스의 공영역 연구는 자본주의는 현대라는 시대의 도래의 한 국면이며 현대성은 자본주의보다 더 다양한 내용을 가진 과정이라는 점을 인식시키는 데 공헌했다. 공영역의 존재를 통해 현대성의 중요한 국면이 민주주의의 하부구조 성립이라는 점을 지적하였으며 따라서 하버마스는 현대성은 폐기보다는 완성시켜야 하는 기획이라고 믿게 된다. 거대조직과 국가에 의해 지탱되는 후기자본주의사회의 공영역의 제도적 기반이 무엇인가를 그는 정확히 밝히지 못했지만, 이러한 점은 코헨과 아라토의 생활세계제도 연구에 의해 보완되었다. 이와 같이 비판이론이 자본주의 체제내 민주화 확산의 가능함을 주장하는 입장은 쉐보르스키, 뤄시마이어, 스카치폴, 로드차일드-위트 등 많은 사회민주주의자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혁명 이후의 근대국가는 강력해지며 무너지지 않으므로 혁명이 가져다준 다른 부산물인 정치적 참여 기회의 확장을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스카치폴(1981: 308-309)의 주장에서 보듯이 비판이론의 공영역과 민주주의에 관한 테제는 현실적합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4. 포스트모더니즘과의 대결
하버마스 연구의 가장 큰 취약점 중의 하나가 탈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라고 생각된다. 하버마스(1987b)는 근대성은 미완의 프로젝트이며 계몽주의가 추구한 보편성을 담지한 이성은 앞서 지적한 물화를 초래하여 인간을 억압하는 데 이용된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의사소통합리성이라는 개념의 수립에 의해, 이성의 왜곡을 극복하고 미완에 그친 계몽적 기획을 완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장춘익 1996: 282). 그는 의사소통의 확산을 현대성의 낙관적 국면으로 확신하지만 포스트모던한 시각에서 볼 때 이상화된 합의라는 개념은 개인을 조종하고 차이를 억누르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비춰진다. 하버마스가 강조하는 보편성은 보편화되지 않는-여성, 제3세계, 유색인종, 동성애자 등의-잔여를 배제하고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데 이용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포스트모던 사회이론의 대표자격인 료타르(19 84)는 억압과 조종을 극복하기 위해 차이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또한 푸코의 관점에서 보면 하버마스가 신뢰하는 계몽주의는 다른 담론체계를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간주하여 억압하고 배제해 버리는 하나의 특수한 담론체계에 지나지 않는다(윤평중, 1990: 233). 하버마스의 현대성의 잠재력에 대한 맹목적 지지는, 본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는 이상적 사회질서를 강조하여 현실에 존재하는 불협화음을 합의라는 멍석으로 덮어 버리려는 위험성이 존재한다.
하버마스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태도는 매우 하버마스답지 못한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실증주의, 해석학, 체계이론 논쟁 등 수많은 논쟁을 통해 애초의 과도한 비판을 넘어 상대방의 입장을 자신의 이론틀내에 합성하는 입장을 취해 왔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만은 양보하지 않는 자세를 보이는데, 그것은 논리적이라기보다는 그의 독일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죄책감이라는 이중적 심리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버마스(1981)는 소년시절인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나치가 저지른 참상에 대한 영화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왜 독일과 같은 수많은 지성을 배출한 문명국에서 그러한 야만적인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의문을 평생토록 가슴 속에 간직하게 되었다고 한다. 독일인으로서 하버마스의 이러한 입장은 계몽주의와 서구문명에 대한 신뢰를 고수하게끔 하고, 철학과 문학을 평준화시키고 지식의 기초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나치즘을 연상시키게 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그의 스승들이자 유태인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1972)만 해도 독일문화를 포함한 유럽문명 자체에 보다 냉소적이었으며, 하버마스와 같이 계몽주의와 나치즘에 대해 명확한 구획선을 긋기보다는 둘의 유관성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초기 비판이론가들의 연구를 보더라도 계몽주의를 지지하는 것과 비판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파시즘과 가깝다고 주장하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최근의 비판이론 내부에서 포스트모던 윤리학을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는 사실과 포스트모던 사회이론이 적실성 있는 현대사회이론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상황을 살펴보면 하버마스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우려는 상당 부분 기우임을 발견할 수 있다. 비판이론과 포스트모더니즘과의 극한 대립은 비판이론가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이 자신들과 전혀 다르지는 않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면서 완화되는 움직임을 보인다(Agger, 1992; Best and Kellner, 1991; Outhwaite, 1994: 136). 특히 하버마스의 위치를 공식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악셀 호네트 같은 차세대 비판이론가들 조차도 하버마스의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일방적인 거부에서 벗어나 특히 윤리적인 면에서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음을 지적한다. 호네트(1995)는 료타르와 데리다 등의 저술에는 비판이론이 그동안 무시했던 새로운 윤리의 측면이 있음을 주시한다. 하버마스의 담론윤리는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상황하에서 각자가 토론에 참여할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상호적 의무를 강조한다. 이와 같은 하버마스의 토론에 참여하기 위한 평등한 대우에 대한 강조는 캐롤 길리건과 같은 여성주의와 포스트모더니스트로부터, 상대방에 대한 배려(care)라고 불리는 자애, 협력, 박애와 같은 공감과 애정이라는 감정의 작동을 원초적으로 차단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Honneth, 1995: 316). 하버마스와는 달리 이질성을 존중하는 윤리학을 모색하고 있는 료타르는 실정법과 경제합리성은 현대사회에서 우월한 담론의 장르가 되었지만 다른 언어게임들은 영구히 배제되어 버렸으며, 침묵을 강요받은 '논쟁'을 구출하기 위해서 새로운 정치적 입장이 요구됨을 역설한다. 데리다는 그의 최근 연구에서 하버마스가 강조하는 평등한 대우와 그동안 하버마스가 등한시했던 고유성에 대한 존중을 접목하려는 시도를 한다. 데리다는 우정이라는 개념은 상대의 고유성에 대한 배려와 동시에 상대에 대한 의무감을 동반한다는 면-바로 이 점이 우정과 사랑이 구별되는 점이다-을 지니고 있어 평등한 대우와 배려의 원칙이 통합될 수 있음을 제시한다. 료타르와 데리다의 연구는 쉽게 풀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생산적인 긴장관계에 있는 '동등한 대우'와 '배려'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원칙의 존재를 제시함으로써 유럽의 현대성이 표방하는 일면적 도덕성으로부터 중요한 진전을 가져 왔다. 호네트의 이러한 연구는, 하버마스의 과도한 비판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제기하는 도덕에 대한 중요한 공헌을 무시하는 것이며 이미 비판이론 내부에서 하버마스의 입장에 대한 시정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탈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에 입각한 포스트모던 사회이론도 하버마스가 우려하는 것과는 달리 기존 사회이론의 지평을 넓혀 주고 있다. 알튀세, 푸코, 데리다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라클라우와 무페의 연구에서 보는 것처럼 포스트모던 사회이론이 경험적 사회연구에 적용되었을 때 보수주의적이거나 비이성적이기는 커녕 새롭고 의미있는 현실분석을 해낸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연대와 정치적 변혁을 모색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정철희, 1996; 칠코트, 1992; Chinchilla, 1994; Slater, 1985, 1994; Laclau and Mouffe, 1985). 푸코나 데리다의 유용성, 부동하는 기표, 라클라우와 무페와 함께 이들에게 영향을 받은 라틴아메리카 연구자들의 보다 역사적이고 경험적으로 지향된 작업을 보면, 보편성의 틀 속에 포함되지 못하거나 그로부터 배제된 사회적 영역을 인정하는 것이나, 민주주의와 같은 기표가 고정된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사회 역사적 문맥에서 그 의미가 잠정적으로 결정된다는 시각이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이 외에도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하버마스의 태도의 문제점은 이것이 사회적 현상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니체와 하이데거를 추종하는 일단의 프랑스 철학자들의 지적 착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포스트모더니즘을 신봉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적 조류에 대한 지적인 대응은 필요하지 않은가? 버겁게 포스트모더니즘을 맑스주의 전통과 결합시키려는 제임슨이나 혹은 하비와 같은 태도에 견주어 하버마스의 입장은 안이하게까지 보인다. 제임슨(1989)이 제시한 미학적 대중주의, 의미의 해체, 비판적 거리의 사멸과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은 모두 실재적 문화변동에 관한 분석이 아닌 공염불인가? 하비(Harvey, 1989)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생산체제에서 도시, 문화에 이르는 다양한 사회현상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새로운 사회적 조류로 간주하고 있다. 포스트모던한 사유를 비판하더라도 적어도 포스트모던한 조건들-도심과 교외, 인종이라는 이질성의 존재, 미술, 건축에서의 포스트모던한 조류들 등-을 현실로서 인정하면서 이와 정면대결을 시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하버마스의 입장을 독일의 정치적 문맥에서 십분 이해하더라도, 그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이 보편성을 갖는가라는 질문이 뒤따른다. 이상적 의사소통공동체와 보편적 규범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냐, 지배적 담론으로부터 배제된 목소리를 찾을 것이냐라는 두 가지 대안 중 하버마스는 명백히 전자를 취했으며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하버마스의 이러한 입장 자체가 독일적인 특수한 상황, 즉 독일 정치문화의 정체성을 수립하려는 의도로서 이해될 수 있다(Pensky, 1995). 이러한 선택에 관한 초역사적 입장에서 선택이 가능한가가 문제이며 만약 가능하지 않다면 식민, 냉전 등의 경험을 가진 제3세계의 지식인이 하버마스와 같은 판단을 할 수 있을까? 필자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맑스주의를 전적으로 무시한 규범적 보편주의는 제3세계의 입장에서 경계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라 판단한다(정철희, 1996).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제 비판이론을 포함한 사회이론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대응이나 수용 없이 적합한 이론으로 성립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고 자체가 새로운 시각이어서 일 뿐 아니라 우리 주위에 탈현대적 조건이 성숙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5. 맺음말
맑스의 유토피아적 사회질서에 대한 열망과 그 비판정신을 계승하면서 한편으로는 유럽의 고전과, 다른 한편으로는 20세기 후반의 새로운 인문사회과학의 연구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현대의 변화된 지적 역사적 상황에 맞게 비판이론을 재단해 온 하버마스의 노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여러 분야에 걸친 그의 연구가 동일한 성취를 이룬 것은 아니어서 하버마스 연구에서 취할 점과 극복할 점을 짚어 보았다. 하버마스의 모든 연구를 도매금으로 찬양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비서구사회에 관심을 가진 필자와 독자의 하버마스에 관한 독해는 특히 비판적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하버마스 이론의 가장 약한 부분은 규범의 보편적 근거를 설정하려는 시도이다. 이 점을 무리하게 변호하거나 역으로 이 점만을 부각하여 하버마스를 폄하하는 것은 그에 대한 균형잡히지 못한 평가에 머물고 말 것이다. 그의 공적은 비판적 이성이 일상의 사회적 행위 속에 배태되어 있음에 대해 논증했다는 점과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동력이 사회제도 속에 내재하고 있음을 암시한 사실, 그리고 물화의 극복이 절망적인 것은 아니며 이론적으로 가능하고 현실적으로 사회성원의 사회제도를 매개로 한 집합적 노력에 달려 있음을 주장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헌은 이미 한 사람의 사회철학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는 것이다. 나치즘에 관한 외상과 독일인으로서의 자부심, 죄의식이 의식 속에 깊이 각인된 그에게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균형잡힌 대응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는지 모른다. 하버마스는 실증주의 논쟁 이후 수많은 이론적 도전들을 슬기롭게 극복했지만 포스트모더니즘만은 예외인 것으로 보이며 그것이 바로 호네트나 켈너 등과 같은 3세대 비판이론가의 몫으로 여겨진다(Agger, Best and Kellner, 1991; Honneth, 1991; Hoy 1995; Kellner, 1995).
이미 약간의 시도가 있지만 결국 한국사회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하버마스 연구의 사회이론적 유용성은 경험적 연구를 통해 확인되어야 할 문제이다. 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필자는 한국사회에 하버마스의 이론을 적용함에 있어 영역에 따라서는 최근의 포스트모던 사회이론 연구와 종합이 시도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회의 공영역의 기원에 관한 연구는 하버마스의 이론을 따르는 것만으로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 직후의 정치적 대립이나 한국전쟁 이후의 민주화 과정 속에서 여러 세력간의 대립과 연대를 연구할 때는, 차이와 연대의 조화를 모색하고 기표의 비고정성을 주장하는 포스트모던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Laclau and Moffe, 1985; Laclau,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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