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개념을 중심으로

나뭇잎숨결 2022. 1. 19. 18:30

법적 판단의 합리성에 관한 연구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개념을 중심으로  

 

 

엄 순 영




Ⅰ. 법적 판단의 합리성에 대한 모색

1. 법률적 삼단논법
법률조문(대전제)에 사안(소전제)이 결부되면 자동적으로 판결(결론)이 획득된다는 법률적 삼단논법은 실무법률가들의 의식을 소박하게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법률적 삼단논법은 우선 '당해 사건에 맞는 법률을 찾아내어 그 사실관계에 법을 적용하면 된다'는 것, 즉 법적 추론과정에 대한 형식적인 틀을 알려 준다. 이는 모든 사실관계에 적합한 법률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고, 법적으로 중요한 사실관계만을 찾아내면 나머지 사실관계들은 법적 판단에서 쓸모 없는 것으로 배제해 버린다. 그리고 사실관계는 법의 독특한 도그마틱 원리에 따라 정비되고 순위가 부여된다. 이러한 방법적 태도는 오늘날에도 포섭실증주의(包攝實證主義) 또는 포섭(包攝)도그마로 불리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법학의 소임은 법적 용어의 분석과 법적 명제의 논리적 연관을 연구하고, 이를 개념의 피라미드로 완성시키는 것이며, 법관은 삼단논법에 입각해서 입법자의 결정을 충실히 발음하면 된다. 오늘날에도 사법실무의 밑바탕에는 이러한 포섭실증주의가 두텁게 깔려 있다. 실제로 법적 판단의 정당화작업에 있어서 그 결론이 그 법률에 그렇게 규정되어 있다는 식으로 논지를 전개하는 것보다 더 간명하고 쉬운 길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판결과정을 살펴보면 대전제, 소전제, 결론이라는 간결한 삼단공식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다. 대전제를 적용하기 충분한 규준으로, 그리고 소전제를 포섭가능한 사태로 변형하는 데에 수많은 해석명제(법률적 다단논법)들이 필요하다는 점이 밝혀진다. 이런 연유로 법률적 삼단논법만으로는 법적 판단과정의 방법론으로 불충분하다는 인식이 널리 공감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법적 판단에 법관의 자의가 개입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즉 재판은 법관의 도덕감과 세계관 등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예컨대 절도를 당한 경험이 있는 법관의 절도범에 대한 형량은 다른 법관들보다 높다고 한다. 어쨌든 법률실증주의에 의해서만, 즉 판결은 법률텍스트에서 도출된다는 허구를 통해서만 법적 판단을 정당화하려는 태도는 법관의 부정의와 자의를 은폐하는 역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최근의 법학에서는 법의 흠결이나 법자체의 불확정 개념, 가치개념, 일반조항 등은 법관의 재량에 문을 열어두는 것이므로 이러한 문제영역에서 법적 판단의 합리성을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는 길을 찾자는데 의견일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새로운 법해석 방법(제도적 법실증주의, 법현실주의, 비판법학, 권리이론, 법해석학, 대화이론 등)이 모색되고 있다.

2. 새로운 합리성
1) 법적 판단: 인식인가 실천인가?
법적 판단의 합리성 문제를 접근할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법적 판단의 합리성이 의미론(Semantik)의 차원에 속하는가 아니면 화용론(話用論; Pragmatik)의 차원에 속하는가 아니면 그 두 차원에 동시에 속하는가이다. 왜냐하면 이에 따라 법적 판단의 합리성에 관한 설명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합리성의 문제를 거론하는 경우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學)에 대한 분류까지 올라 간다. 즉 그는 학을 episteme와 phronesis로 구분하였다. episteme(scientia)는 진리를 추구한다.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가를 탐구한다. phronesis(prudentia)는 이성을 추구한다. 어떠한 행위 규칙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 이성적인가를 탐구한다. 이러한 분류에 따르면 법학은 phronesis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근대자연과학의 승리는 이러한 구분을 철폐하였고, 그래서 실천학(實踐學; phronesis)은 과학화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과학의 요구에 복종해야 했다. 법학도 이러한 경향에 지배당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소송과정에서도 쉽게 드러난다. 소송법은 실체적 진실발견을 가장 큰 이념으로 하고 있다. 이때 소송과정에서 작동하는 이성은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는 하나의 도구, 즉 실체적 진실을 인식하는 인식도구로만 여겨지게 된다. 그래서 발견된 진실이 법률요건에 포섭되는가 여부를 판단하고, 연역과 귀납의 논리에 따라 법규를 사태에 적용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이성은 인식도구로만 다루어진다. 즉 이론이성(理論理性)만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법적 판단은 인식적인 요소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창조적 정의적 요소도 존재한다. 따라서 정당화 과정은 법규를 적용할 수 있도록 사안을 확정하는 과정과 법규해석에 있어서 전제된 것들의 정당화과정이라는 두 가지로 구성되는데, 이러한 정당화 과정은 이론이성의 작용만으로는 할 수 없다. 흄(D. Hume)이 지적한대로 이러한 이성의 작용은 부차적인 것이다. 이론이성은 결론을 전제에서 단지 확인할 뿐이다. "궁극적인 규범적 전제들은 이성적인 것이 아니고 논리적 추론 과정의 산물도 아니다." 법적 판단의 합리성은 한가지의 구체적인 사안에서 하나가 확실히 존재하고 있어서 그것을 이론이성의 규칙에 따라 확인하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가능한 합리적 결정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더 흔하다고 할 수 있다. 법적 판단은 다수의 가능한 합리성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결단이다. 그래서 법적 판단은 인식이 아니라 실천이라고 할 수 있으며, 모름지기 실천이어야 한다. 이론이성에 근거한 인식론적 접근방법으로만 법적 판단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2)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기초한 법적 판단의 합리성
법적 판단의 합리성의 문제를 접근할 때 인식적인 태도에서 실천적인 태도로의 전환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인간 이성을 칸트가 주장한 의식철학에 근거한 인식하는 이성이 아니라 언어철학에 근거한 실천하고 행동하는 이성을 근거로 하버마스가 주장한 의사소통적 합리성 개념을 법적 판단의 합리성과 관련하여 연구해 보는 것이 더욱 의미 있을 것이다. 의식철학으로부터 언어철학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강조하면서, 촘스키(N. Chomsky)의 언어학 이론과 오스틴(J. L. Austin)과 서얼(J. Searle)의 언어행위이론를 재구성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행위 이론은, 인간 이성의 인지적이고 도구적인 측면을 보다 포괄적인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일부분으로 이해하고 있다. 기존의 법적 판단의 합리성은 하버마스에 의해 지속적으로 비판된 도구적 이성(instrumental reason)의 맥락에서 운위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사소통적 합리성(communicative rationality) 개념을 통해서 법적 판단의 합리성의 문제를 다시 검토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특히 법철학 분야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로서는 첫 번째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그의 최근 저작인 [Faktizit t und Geltung(1992)]을 중심으로 하버마스의 법이론을 정리해 보고 법학에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어떤 방식으로 논의될 수 있으며 그 역할은 무엇인지 검토하기로 한다. 특히 기존의 법률적 삼단논법의 문제를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 관점에서 정립해 보고, 법적 판단의 합리성과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관계를 재판과정 분석과 관련하여 분석하려 한다.


Ⅱ. 절차적 합리성 - 민주주의의 실현절차

1. 의사소통적 합리성
하버마스는 인간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인간으로 전제하고 이러한 인간의 이성능력에 의해서 근대의 미완의 기획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때 인간의 이성은 칸트가 주장한 의식철학에 근거한 인식하는 이성이 아니라 언어철학에 근거한 실천하고 행동하는 이성이다. 또 하버마스 이전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날카롭게 비판한 도구적 이성이 아니라 도구적 이성까지도 포괄하는 의사소통적인 이성, 즉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인식적-도구적 합리성 측면, 도덕적-실천적 합리성 측면, 미학적-표현적 합리성 측면을 모두를 감싸는 포괄적인 합리성과 같은 개념이다. 따라서 인식적-도구적 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 개념을 대립시키는 것은 인식적-도구적 이성계기를 포괄적인 이성개념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잘못된 시도의 결과이다. 하버마스는 역사적 과정 속에 실현되어 왔던 이성 즉 역사 속에서의 이성을 경험적으로 밝혀보면 그 속에 해방적 가능성이 서양 근대화 과정 속에서 점차적으로 실현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의사소통 자체에 해방적 가능성이 선험적으로 내재해 있기 때문이라고 하고, 이를 재구성적 과학을 통해 밝힘으로써 구비판이론(舊批判理論)에 결여되어 있던 이성의 규범적 기초와 실천적 힘을 확보하려고 도구적 이성을 포괄하는 의사소통적 합리성 개념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2. 의사소통행위
이러한 확신에 힘입어 그 다음에 문제는, 왜곡되지 않은 의사소통행위가 어떤 조건에서 성취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즉 하버마스에게 있어 의사소통적인 행위(kommunikatives Handeln)는 주로 목적지향적 행위(zweckorientiertes Handeln)보다는 전략적 행위(strategisches Handeln)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상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목적을 수행하려는 전략적 행위와 달리 의사소통행위는 언어적 상호이해를 통한 합의가 그 수행의 조건이 되는 행위이다. 따라서 의사소통행위는 다음의 네 가지 점에서 다른 종류의 행위들과 구별된다. 첫째, 대화는 대화 당사자간의 '상호이해'를 조건으로 한다. 대화 과정을 거쳐 도달하게 된 합의는 원칙적으로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거나 독백으로 도달될 수 있는 지식과 다른 효과를 갖는다. 설혹 내용이 같더라도 효력이 다르다. 둘째, 대화에 참여한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균등한 논증부담'을 갖는다. 대화 참여자들은 각자에 대하여 상대에게 그의 주장을 정당화할 것을 요구할 수 있지만, 이때 상대가 원할 경우에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서도 같은 수준의 논증을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전제할 경우에만 상대방에게 그의 주장을 정당화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셋째, 대화에서 도달된 합의는 행위에의 '구속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화 참여자 갑이 합의된 행동을 하지 않았을 때 상대방 을은 다음부터 갑이 합의사항을 지킬 것인지를 확인하려 할 것이고 갑과 더 이상 진지한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또 갑이 합의한 사항을 이행하도록 하는 다른 장치를 - 가령 증인을 세우거나, 합의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에는 벌금을 물리는 조치를 - 할 것이다. 넷째, 대화과정에서 이루어 진 합의는 대화 참여자들의 행위에 '합리적인 동기'가 될 수 있다.

3. 의사소통능력의 보편실용성
그렇다면 도대체 의사소통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버마스는 인간의 언어능력이 보편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의사소통능력도 보편적 개념으로 정립할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하버마스가 의사소통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촘스키의 언어수행과 같은 개념이다. 하버마스는 촘스키와 달리 일상적인 언어 수행에 초점을 맞춘다. 비트겐슈타인도 일상적인 언어 수행에 초점을 두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초기 이론인 언어의 본질은 실재를 묘사한다는, 언어그림이론에 내재된 본질주의를 스스로 비판하고 언어에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공통된 특성은 없고, 오직 일상적 문맥에 따라 언어가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또 언어현상도 놀이처럼 상호주관적인 어떤 규칙에 따르는 것이고 이러한 규칙을 상호주관적으로 따름으로써 언어사용자들은 합의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하버마스는 이와 같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이론을 수용하고 의사소통행위에는 상호주관적인 규칙들이 내포되어 있다고 하고 이를 성찰하였다.
그리고 하버마스는 일상언어행위를 더 자세히 분석한 오스틴(J. Austin)과 설(J. Searle)의 언어행위이론을 통해서 의사소통행위의 보편실용론을 전개한다. 언어적 의사소통의 기본단위는 언어행위이며, 단어나 문장이 아니라, 말이 기본단위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언어행위는 "명제적 내용(propositional content)"과 "비언표적 행위(illocutionary acts)"라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즉 어떤 것을 말할 때에는 말하는 내용과 말함으로써 무엇인가를 하게 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때 말함으로써 무엇인가를 하게 되는 측면이 바로 언어행위의 "비언표적인 힘(illocutionary force)"이다. 비언표적인 힘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말하는 사람이 의도한 상호적인 인간 관계를 성립시키는 능력을 의미한다. 오스틴과 설은 언어행위가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이유의 핵심이 비언표적인 힘에 있다고 보았다.
하버마스는 "듣는 사람이 언표된 문장의 뜻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말하는 사람이 의도한 상호관계 속에 진입하는" 상황을 언어행위가 성공하는 상황이라고 정의한다. 즉 듣는 사람이 말하는 사람을 신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언어행위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듣는 사람에게 말하는 사람을 신뢰하게 할 수 있는 것인가?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이 상호 이해관계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하는 비언표적인 힘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 힘의 근거는 제도적으로 제한된 언어행위의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다르다. 제도적으로 제한된 언어행위의 경우에는 이미 성립되어 있는 행동 규범이나 관습이 비언표적인 힘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제한되어 있지 않은 언어 행위의 경우에 그 근거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하버마스는 이성적으로 근거 지울 수 있다고 한다. 비언표적인 행위를 통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타당성요구(Geltungsanspr che)를 제기하면서 이를 상호 검증하려 할 것이고, 이러한 검증과정을 통해서 상호이해와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효력주장을 위해서 다음의 네 가지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첫째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이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문법적으로 타당하고(이해가능성), 둘째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말한 것이 외적 실재에 비추어 볼 때 진리이며(진리성), 셋째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적 의도를 정직하게 말해야 하고(성실성), 넷째 규정적인 언어행위에서는 말하는 사람은 규범 및 가치에 따른 정당한 발언을 하여야 한다(정당성). 따라서 의사소통행위는 위의 네 가지 효력 주장에 대한 자유로운 상호검증과 조사가 가능할 때에만 성공할 수 있다.

4. 이상적 담화상황과 그 현실적 의미
위와 같은 위의 네 가지 타당성 요청에 근거한 합의가 진정한 합의가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버마스는 이상적인 담화상황을 다음과 같이 상정하고 있다.
1. 모든 잠재적인 대화참여자는 의사소통적 언어 행위를 수행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갖고서 언제든 대화를 시작하고, 발언을 하고 그 말에 응답하고 묻고 답하고 하는 대화를 계속할 수 있어야 한다.
2. 모든 대화참여자는 해석, 주장, 권고, 설명, 정당화를 하고 그것의 효력을 문제삼고 근거를 제시하거나 반박하거나 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갖고 있어야 하므로, 계속적으로 문제삼지 않은 채 비판받지 않는 어떤 편견도 없다.
3. 대화 중에 발언자에게만 표출적인 언어행위(repr sentative Sprechakte), 즉 자신의 태도, 느낌, 희망을 표현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가 허용된다.
4. 대화 중에 발언자에게만 규제적인 언어행위(regulative Sprechakte), 즉 명령하거나 반발하거나, 허락하거나 금지하거나 약속을 하거나 거절하거나, 변명을 하거나 요구하거나 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가 허용된다.
그러나 이상적 대화 상황은 현실에서 그대로 실현될 수 없다. 이상적 대화상황은 하나의 이념이며 관념물이고 이상화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상적 대화상황의 가치가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이념에 근거해서 왜곡되어 있는 의사소통을 비판할 수 있고 현실에 대한 비판 척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척도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미래에 대한 생할형식이 될 수 있다.

5. 의사소통적 합리성과 민주주의
결국 하버마스가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통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현대의 인간소외 등의 병리현상은 마르크스적인 방식이나 구비판이론의 비판만으로는 치유될 수 없으며, 그렇다고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주장하는 이성의 해체 등으로도 치유될 수 없다고 한다. 이 치유방식은 모더니티의 부정이 아니라 미완의 모더니티 계획을 이성을 통해서 다시 실천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성은 모더니티에서 주장했던 목적지향적인 이성뿐만이 아니라 이것을 포괄하는 의사소통적 이성을 통해서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소통은 인간의 언어능력과 같이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것으로서 우리 모두는 상호이해를 통한 진정한 합의에 도달 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합의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바람직한 사회를 건설해 나가자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사소통행위를 통한 합의가 구속력을 갖기 위해서는 규범적인 타당성을 지녀야 하는데, 규범적인 타당성을 지니는 합의를 얻기 위해서는 이상적 대화상태에서 위에서 설명한 네 가지 타당성의 요구들이 상호 검증되고 조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버마스 이론의 최후의 종착점은 '민주주의'이고, 실질적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 절차적인 과정을 연구 검토하고 있으며, 절차적인 정당성이 정당성의 출발점이자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Ⅲ. 하버마스의 법적 대화이론

1. 하버마스의 법적 대화
1) 루만과 토이브너
하버마스는 법의 자율체계를 부정한다. 특별한 대화 방식을 거부하며 일상어로 매개될 수 있는 의사소통행위에서 법적 대화가 성립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버마스의 이러한 태도는 그가 루만(N. Luhmann)의 체계이론과 토이브너(G. Teubner)의 이론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하버마스는 루만의 체계이론이 법의 자율적인 독자성을 시종일관 주장한 이론이라고 하면서, 그의 이론을 비판한다. 즉 루만은 법을 단지 예상되는 행위들의 안정화라는 기능적인 관점에서 파악한다.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 법도 특화되어, 발생된 갈등상황을 적법과 불법이라는 두 가지 코드로 나누고, 이에 대한 강제적인 해결을 할 수 있도록 예상되는 사건들을 일반화하고 있다고 한다. 법체계는 법의 시각에서 구성된 모든 의사소통을 포함한다. 즉 법이 일상의 의사소통을 그대로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해 제도화된 의사소통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법체계가 갖고 있는 자체의 특별한 대화 방식과 개념에 따라 일상의 의사소통내용을 포섭하고 법 자체의 기호에 따라 이를 해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법체계는 일반 의사소통 구조와 분리되어 독자적이고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존재하고 법 자체의 기호로 다시 이러한 법체계를 정립하고 재생산한다고 하였다.
하버마스는, 위와 같은 루만의 체계이론이 법의 자율체계를 주장함으로써 법은 자신이 설정해 놓은 법적인 문제에만 반응할 수 있을 뿐이고, 사회체계 전체의 문제들을 지각할 수도 없고 이에 어떤 참여도 할 수 없게 되고, 정치과정과 정치문화와 공적 영역은 법체계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세계를 형성한다고 비판하였다. 하버마스는 루만에 대한 이러한 비판을 통해서 법이 도덕이나 정치와 무관하게 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루만의 비판에 이어, 루만과 달리 법의 자율체계를 반대하고 일상과의 연결을 주장한 토이브너의 법이론을 설명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토이브너는 "모든 법률행위는 일반적이고 사회적인 의사소통이다. 의사소통은 늘 두 개의 상이한 사회적 대화와 연결되어 있다. 즉 의사소통은 늘 특수하게 제도화된 법적 대화이면서 동시에 일반적인 의사소통이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토이브너는 법체계의 대화 방식은 일반적인 의사소통 방식과는 다른 특별대화의 방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법이 일상의 의사소통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면서도 법논리는 자기 생산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하버마스는 토이브너의 법이론에서 법체계를 자기생산적인 것으로 전제하지만 이는 경험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또 일상과 법과의 연결을 법의 특별대화 방식을 인정하면서 연결시키려고 한 토이브너의 시도는 실패하였고 토이브너와 같이 법의 특별대화방식을 인정하면 결국 법안에서 일상과의 연결은 단절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토이브너는 법의 특별대화와 생활세계의 일반대화를 법의 특별 대화 안에서 구성하려는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이와 같이 토이브너가 생활세계를 법의 공통된 대화로 법안으로 끌어 들이려고 했지만 토이브너가 전제한 법의 자율체계 안에서 생활세계는 들어올 수 없다고 비판한다.
결국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행위론에서 법체계와 생활세계를 통합시키고 관련시키려고 한다. 토이브너가 주장한 것처럼 법체계의 특별대화와 일상의 의사소통행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행위 안에 법체계와 일상의 의사소통행위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토이브너의 시도는 하버마스가 볼 때 의사소통행위 구조 안에서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토이브너와 같이 법을 체계와 생활세계의 연결고리로 보고, 법적 대화로 그것을 담아내려고 하다보면, 법은 권력과 돈에 의해 지배받을 수밖에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즉 하버마스는 법의 자율체계를 부정하며 법의 특별한 대화 방식을 거부한다. 일상어로 매개될 수 있는 의사소통행위구조에서 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2) 롤즈의 정의론 보충
이를 위하여 학제간의 연구를 해야 하며, 사회를 기능별로 분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자체 전부를 주제화해서 사회전반의 문제를 다루고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방식을 찾고 있는 사람으로 하버마스는 롤즈를 꼽고, 롤즈의 이론을 모두 긍정하면서 자신의 이론에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롤즈의 정의론이 "정의의 규범적 이론이 문화와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표명하였다"고 하였다.
로티(R. Rorty)는 롤즈의 이론이 철저하게 역사적이고 반보편주의적이며, 도덕적 정치적 문제를 공평하게 판단하기 위한 절차적 합리성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고,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미국 정의직관을 역사적 사회학적으로 서술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면서 롤즈의 정의론이 결코 특정한 자유주의 문화에만 적용될 수 있는 이론이 아니라 보편적인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롤즈는 이론구성의 처음단계에서부터 추상적인 정의의 근본원칙에 따라 법치국가를 제도화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롤즈가 정의의 근본원칙에 따라 법치국가를 제도화하는 문제를 다루었다고 해서 정의감에만 호소할 수 있는 도덕과 법을 혼동하지 않았다. 강제법은 도덕과 달리 수범자와 관련해서 외부적으로 국가의 인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롤즈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롤즈의 경우에 실정법과 정치적 정의의 관계가 여전히 불명확하게 남아 있다고 하버마스는 주장한다. 법과 정치와의 밀접한 순환관계는 하버마스 법이론의 핵심적인 내용이기도 하다. 롤즈는 법의 정당성 문제를 제도적인 법의 형식을 다루지 않고 고찰한다. 따라서 법자체 내부에 있는 현실과 타당성(즉 현실세계와 규범세계)의 긴장, 즉 법효력(Rechtsgeltung)에 있는 특수성을 고찰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사회적 현실과 법의 정당화 시도간의 외부적 긴장을 감소시키지 않고 그대로 진실되게 다루지 못하였다. 롤즈 자신도 현실과 타당성간의 긴장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롤즈 논의의 두번째 단계인 반성적 평형과정에서 롤즈는 타당성과 긴장되는 현실을 정의이론을 준비하기 위한 문화적인 조건정도로 축소하고 있다. 롤즈는 정치적인 전통을 지니고 있고 현대의 다원주의적인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공적인 의사소통 문화 속에서 정의원칙이 얼마나 납득할 만한 것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이론에서 정의원칙이 실제로 제도화되는 과정과 사회 정치적으로 발전되는 경향들을 다루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행위규범의 원천이 되는 대화원칙이 도덕과 법과 정치적 민주주의로의 제도화 과정과 그로 인한 사회정치적 법적 발전 과정을 다루고 있다.
하버마스는 롤즈가 '중첩적 합의'를 받을 수 있는 양립가능한 정치 문화적 조건에 대한 반성적 평형의 숙고과정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되고 법치국가의 역사적 실현과 그 실현의 사회적 토대를 규범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참가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하버마스는 롤즈가 자신의 이론에서 "중첩적 합의"를 전제하기만 하고 이러한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연구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면서 자신은 이러한 합의과정을 연구하여 정의이론과 제도에 의한 정의론의 실천과정까지도 연구하겠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3) 법적 대화 - 법세계와 생활세계의 통합구조
결론적으로 하버마스가 법적 대화에 대하여 취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법적 대화를 법실증주의자들처럼 사회, 문화구조와 독립된 자율체계로 보는 것에 반대하였다. "법이라는 행위체계는 반성을 통해서 형성된 정당한 질서로서 생활세계의 사회적 구성요소에 속한다." 따라서 생활세계의 성격을 법질서도 갖게 된다. 생활세계의 사회적 구성요소들을, 문화와 인격을 지닌 개인들이 일련의 의사소통행위를 통해서 재생산하는 것처럼 법제도도 이와 동시에 재생산된다. 이때 법제도 재생산에 관여하는 구성요소는 간주관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법전통과 법규를 해석하고 고려할 수 있는 주관적인 능력이다. 법으로 모아지는 모든 의사소통은 법에 속한다. 그때 법규는, 제도화과정에서 바로 이루어지는 사회통합과 또 다시 관련이 있다. 즉 사회통합을 위한 제도화 과정에서 법이 생기고, 이렇게 해서 생긴 법이 다시 사회통합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코드(Rechtskode)가 일상어와 관련될 뿐만 아니라, 생활세계에서의 사회통합적인 이해작업은 일상어를 훨씬 뛰어넘는다. 즉 법은 일상어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일정한 형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법의 일정한 형식 안에는 권력을 통제하는 행정과 금전을 통제하는 경제라는 특별 코드를 위해서, 생활세계에서의 사회통합적인 이해작업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이러한 내용이 법코드에 나타난다. 결국 법코드는 일상어와 다른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사회통합적인 이해작업을 위한 일상어가 법형식 안에 들어 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한도 안에서 생활세계 영역으로만 제한 된 도덕적인 의사소통과는 달리 법이라는 말은 생활세계와 체계사이에 있는 사회적인 의사소통의 순환구조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2. 법의 정당성근거는 내용이 아니라 합의
1) 하버마스 법이론의 기초
하버마스는 오스틴이나 하트 등과 같이 법을 명령으로 이해하지도 않고, 하트를 상대로 법과 도덕에 관한 논쟁을 펼쳤던 풀러(L. Fuller)나 칸트 그리고 라드브루흐(G. Radbruch)와 같이 법을 어떤 도덕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태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는 실증주의자나 법도덕주의자들과는 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동의의 측면이다. 그는 사람이 힘에 굴종하고 항복하는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약한 존재라는 측면에 관심을 갖지 않고, '사람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논리적이다'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간사회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치와 자율이라고 여긴다. 인간이 바라고 도달해야 할 세상은 인간 해방과 인간 존엄이 이룩된 세상이라고 보고 이러한 세상은 인간의 자치와 자율이 실질적으로 실현된 사회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세상은 곧 민주주의가 실현된 사회이다. 결국 하버마스의 사상의 목적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민주주의를 완전히 실현할 수 있는가' 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사회 정치생활은 민주주에 의해서 정당화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현대에 대한 진단이다. 그러면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관하여 여러 가지 견해가 가능한데 하버마스는 그 이유를 의사소통형성과정의 왜곡화로 보고 이러한 의사소통형성과정의 왜곡화를 치유하는 문제에 그의 온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기본태도는 그의 법이론에 기초가 된다. 앞서 하버마스의 법개념론에서 밝힌 바대로 그는 법을 합의에 의해서 도출한 규범체계로 보는 것이다. 규범의 내용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보다 사람들이 합의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에 촛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법의 정당성 근거도 사람들의 합의에 근거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얼핏보면 새로울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근대법이론에서 모든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고 국회의 입법활동은 주권원리에 따라 자기입법원리가 되고, 결국 자기 입법원리에 의거해서 법은 사람들이 스스로 동의한 것으로 간주되고 이것이 법의 정당성의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근대법이론에서 법의 정당성은 국민주권의 원리에 근거한 입법절차에 있었다. 개인의 사적 영역의 권리를 정치적 자치 행사를 보장하는 국민주권에 의거해서 정당화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정당성 주장이 합당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자치 행사를 보장하는 국민주권과 각 개인의 사적인 자유영역을 인정하는 모든 권리와의 관계가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 하버마스는 근대법 이론에서 이 관계가 불분명하고 미해결로 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이는 이성법 전통의 내부에서는 인권과 국민주권원리 간의 해결되지 않은 경쟁관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국민주권과 인권 사이의 내적 관계는 "정치적 자치 행사 방식(Modus der Aus bung politischer Autonomie)"의 규범 내용 속에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또 이러한 정치적 자치 행사 방식은 일반적인 법률형태를 통해서가 아니라 의견과 의사를 대화에 의해 형성하는 의사소통에 의해서 보장된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서 하버마스는 그 동안의 법체계만으로는 법이 외적 장식물로 단순히 여겨질 수 있고 목적을 위한 기능적인 필요물이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고 하고, 법이 외적 장식물로 전락하거나 정치적 힘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법체계를 정치적 자치 입법을 위해 필요한 의사소통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합법적으로 구조화하는 조건으로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 권리담론의 한계
하버마스의 위와 같은 결론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그가 법체계를 논의한 순서대로 같이 따라가 보면서 검토해 보자.
사비니(F. C. v. Savigny)에 따르면 법률관계(Rechtsverh ltnis)는 "각각의 사람들에게 귀속되어 있는 힘"이라 하고, 사람들은 그 범위 내에서 자신의 의지가 관철되고 그것에 사람들의 동의가 있는 것으로 된다고 하였다. 하버마스는 위와 같은 사비니의 법률관계에는 주관적인 행위자유(subjektive Handlungsfreiheiten)와 법구성원의 간주관적인 승인과의 관계가 여전히 강조되어 있기는 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비니의 법률관계를 계속 고찰해 보면 본질적인 가치는 사법(Privatrecht)에 놓여 있다고 한다. 따라서 주관적 의미를 지닌(im subjektiven Sinne) 사법은 개인적인 의지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의 불가침성의 영역 이외의, 독립적인 지배영역을 보장하기 때문에 주관적 의미의 사법은 그 자체로 정당화되고 있다고 한다.
사법은 법주체의 사적 자치의 근거를 사람의 도덕적 자치에서 찾는 한 저절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인식은 19세기에 훨씬 더 확고하게 되었다. 그런 정당화 능력은 자의의 자유(Willk rfreiheit)와 인격의 자율의지(autonome Willen der Person) 사이를 법원칙들로 연결한 칸트의 그러한 연결고리만으로 되어 있었다. 실증주의적 상황에 의해서 이러한 연결고리가 풀린 후에 사법은 특정 결정과 권한에 사실적 구속력을 부여하는 형식으로만 주장될 수 있게 되었다. 빈트사이트 이후로 주관적 권리는 법질서의 반사라고 하고, 법질서가 법질서 내에서 객관적으로 구현된 의사력(Willenmacht)을 개인에게 양도한 것이라고 하였다. 마침내 이때부터 권리는 법질서에 의해 부여된 의사력(Willenmacht) 혹은 의사지배(Willensherrschaft)가 된다.
그후 예링의 공리주의적인 주장이 있게 되고, 이때 권리의 본질은 이제 더이상 의사가 아니라 이익으로 된다. 이런 주장은 사법을 법 일반으로 확장할 수 있게 했다. 마침내 한스 켈젠은 권리란 보통 객관적이고 법적으로 보장된 이익이며 객관적이고 법적으로 보장된 자의의 자유(Willk rfreiheit)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예링과 달리 켈젠에 따르면 권리는 명령자의 의지에 의해 부여된 것일 뿐 아니라 당위적인 효력이 있다. 그러나 켈젠에 있어서의 당위는 의무론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켈젠에 이르러서 권리는 도덕적인 견지에 따라 사적 자치 범위 내에서 보장되던 사람의 자유로운 의지나 지배력이라고 하던 도덕적인 기반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켈젠은 인격의 법적 개념을 도덕적인 사람뿐 아니라 자연인과도 명백히 분리시켰다. 켈젠에 이르러서 완전히 자동화된 법체계는 법자체가 생산해 낸 법적 의제들(Fiktionen)에 의해 운영되게 된다. 결국 도덕적인 사람뿐 아니라 자연인을 법체계에서 추방함으로써 법도그마틱에서 권리를 순수하게 기능주의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치시대에 법질서의 타락을 겪은 후, 1945년 이후에 법질서를 다시 도덕적으로 근거지우려는 반격이 발생했다. 그러나 사적이고 도덕적인 자율과 관련된 자연법적인 재구성은 계속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이러한 자연법적 재구성은 그저 권리들을 개인주의로 축소해서 새롭게 이해했을 따름이었다. 즉 사법과 법적 보호는 결국 사회에 존재하는 개개인들의 자유를 보장하며, 개인의 자유가 사법이 존재하는 근본이념이라고 생각했다.
권리 개념에 대한 이제까지의 기능주의적인 해석에 반대하고 라이저(L. Raiser)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사회법적인 것으로 수정하고 이런 방식으로 사법(Privatrecht)에 도덕적인 내용을 다시 부여하려는 시도를 했다. 라이저는 시민법의 핵심영역을 사회국가적인 것으로 구체화함으로써 고전적인 행위자유로 변함없이 지속되어 온 권리개념을 제한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전처럼 기본권들이 사회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자기주장과 자기책임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기본권들은 사회권들에 의해서 보충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라이저의 주장이라고 하버마스는 말하고 있다. 이제 사법은 분명히 시민적 형식적 권리에서 실질적인 사회국가의 권리로의 패러다임 교체(Paradigmenwechsel)를 통해서 재해석되게 되었다고 한다. 라이저는 끊임없이 개인주의적인 이해방식을 통해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권리의 간주관적인 의미를 상기시키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라이저가 주장하는 대로 사회권의 부가적인 첨가만으로는 권리의 간주관적인 구조를 분명히 하는데 불충분하다고 하버마스는 지적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이처럼 지금까지의 권리에 관한 대화의 흐름들을 살펴 본 후, 이러한 권리대화들은 권리의 중심적인 문제를 은폐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이러한 권리담론들은 실정법이 어디서 정당성을 찾을 것인가의 문제를 밝히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모든 정당성의 근원은 민주적인 법제정절차에 놓여 있으며 이것은 다시 국민주권원리와 연결된다. 하지만 법실증주의는 국민주권원리를 권리에 있는 고유한 도덕적인 내용(코잉에 의해 강조된 개인 자유의 보호)을 보장하는 것으로 다루지 않는다. 이러저러한 방법에 의해서 법적으로 인정된 주체의 행위자유들의 간주관적 의미와, 개인의 행위자유와 사적이고 시민적인 자치와의 관계(사적이고 시민적인 자치 속에서 개인의 행위자유와 사적이고 시민적인 자치라는 두 가지 동기들은 서로 손상되지 않은 채 효력이 있게 된다)를 놓치게 된다고 한다.

3) 인권과 주권의 내적 연관
앞서 주장들을 살펴 본 결과 하버마스가 권리의 간주관적 의미를 중시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법체계의 목적이 행위자유보장에 있다는 점과 사적자치 안에서 행위자유실현과 그로 인한 사법의 정당화를 일응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그 다음으로 앞서 지적한대로 법실증주의가 권리의 간주관적인 의미와 사적 자치와 개인 행위의 자유와의 관계를 놓치고 있다면, 국민주권과 인권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이해함으로써 이를 해결할 수 있는가를 살피게 된다.
하버마스는 인권과 국민주권원리만으로는 근대법이 정당화될 수 있는 이념을 구축하는데 충분하지 않다고 한다. 칸트의 경우 도덕원칙들을 "외적 관계( u ere Verh ltnisse)"에 적용하는 곳에서 법의 일반원칙을 얻는다. 또 칸트는 자신의 법론을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귀속되어 있는 강제권 있는 평등한 주관적 자유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시원적 권리가 "내부의 나의 것과 너의 것(innere Mein und Dein)"을 규율하고, "외부의 나의 것과 너의 것( u ere Mein und Dein)"을 적용하는 곳에서 권리가 발생한다고 한다. 이러한 칸트의 권리체계는 모든 사람들이 잃을 수 없고 자신이 원해도 포기할 수 없으며 공법의 형식에서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도덕의 기본원칙들에 의해서 정당화되며 사회계약을 체결한 국민의 정치적 자치와도 독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법의 기본원칙들은 이미 자연상태에서 도덕적인 권리로서의 효력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인간의 사적 자치를 보장하는 자연권들은 또한 주권적인 입법자들의 의지에 앞선다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주권은 인권에 의해 제한된다고 한다. 칸트는 어느 누구도 국민의 자치를 행사하면서 자연법으로 보장된 사적 자치를 침해하는 법에 찬성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국민주권을 인권에 구속시키는 것을 제한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칸트는 국민주권과 인권과의 내적 관계에서부터 정치적 자치를 밝혔어야 했다고 하버마스는 주장한다. 사회계약의 구성이 위와 같은 것을 제공했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칸트는 자신의 법이론을 형성할 때 도덕에서부터 법까지 논거를 진전시키면서도 사회계약의 중심적인 역할은 거부하고 있고, 반면 루소는 실제로 사회계약의 중심적인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루소는 국민의 자치를 구성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면서 국민주권과 인권과의 내적 연관성을 더욱 강하게 하고 있다. 칸트가 개인의 평등한 주관적 자유권에서 출발하고, 이러한 자연권이 주권자인 입법자의 의지에 앞섰다면, 루소는 칸트와 정반대로 주권적 의지에서 출발하여 개인의 주관적 자유권은 주권적 의지에 구속되게 된다. 따라서 루소에게 있어서 정치적 자치를 행사할 때 천부권의 유보하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인권의 규범적 내용은 국민주권의 집행 형태 자체에 존재한다. 국민의 통합의지는 어떤 구속이나 제한이 없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법률들에 의한 민주적인 입법절차에 얽매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입법절차가 평등한 자유권을 보장하고 있는 것이라는 식으로 루소는 생각한다. 평등 자유권의 보장 방식에 관해서 사뭇 칸트와 다르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루소가 위와 같은 사고 방식을 명확하게 일관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알다시피 루소는 국민주권의 사회계약 체결을 사회화의 실존적 행위(existentielle Akt)와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사회계약체결을 통해서 개별적이고 성공지향적인 행위를 하는 개인들은 윤리적인 공동체의 공익지향적인 시민으로 바뀌게 된다고 한다. 개별적이고 성공지향적인 개인들은 집합체의 구성원으로서 입법실천이라는 거대한 주제 속에서 녹아 없어진다. 여기서 입법실천의 거대한 주제란 법률에 복종하는 개인들의 개별적인 이해들과 무관하다. 루소는 국민들에게 공화주의적인 공동사회개념에 존재하는 윤리적인 요구를 지나치게 강요한다. 루소는, 전망할 수 있고 공통적인 문화적 전승에 통합되어 있으며 동질적인 사회의 에토스에 근거하고 있는, 정치적인 미덕(politische Tugenden)을 고려하고 있다.
"그러나 자기입법실행이 가치지향에 관해서 이미 선이해하고 있는 국민들의 윤리적 실체에 근거해서 시행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루소는 시민에게 가정된 공익지향을 사회적으로 다른 개인들의 이해상황과 어떻게 억압 없이 조정될 수 있는 지와 규범적으로 구성된 일반의지(Gemeinwille)가 개개인의 자의와 어떻게 억압 없이 조정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고 하면서 하버마스는 루소의 이론적인 한계를 아주 잘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이러한 루소의 이론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루소식으로 국민들이 선이해하고 있는 윤리적인 실체를 그저 전제하고 있어서는 안되고 "진정한 도덕적인 관점이 필요하다"고 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이러한 도덕적 관점은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 시도되고 그에 대한 끊임없는 공박이 있게 되고 합의되고 다시 비판되면서 계속 형성해 나간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견해이다. "진정한 도덕적 관점에서부터 모두에게 평등한 이익으로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우리들을 위한 선을 고려하면서 타진해 볼 수 있게 된다."
하버마스는 위와 같이 루소의 이론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것의 극복 방식을 위와 같이 주장하고 결론적으로 루소식으로 "국민주권개념을 윤리적으로 파악하게 되면 법원칙들의 보편적인 의미는 결국 없어지게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인권 본래의 규범적 내용을 루소가 믿고 있는 것처럼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법률그라마틱(Grammatik)으로만 분명히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루소에게 있어서도 문제가 되었던 근대법의 정당화요구에 함유되어 있는 법의 실질적 평등의 뜻은 일반법률의 논리적 의미만으로는 충분히 밝혀지지 않는다." 하버마스의 이러한 비판은 법실증주의자들에게도 해당된다고 여겨진다. 하버마스는 "주권과 인권과의 내적 관계는 정치적 자치 실행 형태의 규범적 내용에 존재하며, 일반법률형태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장들과 의지를 담론적으로 형성하는 의사소통의 형식을 통해서 보장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버마스의 주장에서 우리는 그가 실천적이고 실질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면모를 볼 수 있다. 쉽게 말해서 그는 주권과 인권의 내적 연관을 실현시키려면 일반법률의 형태의 논리적 의미만으로는 실현될 수 없고, 실질적인 정치적 자치실행에서만 실현될 수 있으며, 정치적 자치는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고 의지를 형성하는 의사소통을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버마스가 볼 때 루소와 칸트는 인권과 주권의 위와 같은 내적 연관성을 밝히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칸트와 루소는 의식철학의 전제 아래에서 이성과 의지를 가치개념 속에서 함께 작용시켜 버리고 만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이러한 태도에 반대하면서 이성적인 의지가 각각의 주체들에게 형성될 수 있게 하려면, 칸트와 루소처럼 이것을 그저 의식으로 전제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도덕적 자율은 모두의 통합의지인 정치적 자치를 통해서 관철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모두의 사적자치를 당연히 보장하기 위해서도 그러하다. 결국 루소와 칸트가 주장한 주권과 인권은 하버마스에게 와서 정치적 자치형태(Modus der Aus bung politischer Autonomie)라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이다. "이성적인 의지들은 국민들이 관심을 갖고 토론하는 거대한 주제 안에서만 형성될 수 있다면, 정치적 자치는 도덕적 존재들의 자기 의식의 실천으로서 이해되게 된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정치적 자치의 구체적 실현 방식도 주장한다. 즉 "이성과 의지라는 개념만으로는 대화상의 주장과 의지의 형성을 정당화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므로 이성과 의지를 함께 작용시키고 모든 사람들이 강제 없이 일치할 수 있는 확신을 끌어내기 위해서 이해를 향한 언어사용의 비언표적 결합능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그의 생각을 발전시켜 그는 이상적 대화상황의 조건들을 연구하고 이를 세워나간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법학에서 법의 실질적 평등을 실현하는 실천 방식으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장에서 이와 같은 역할을 하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법적 판단의 합리성과 어떻게 연관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Ⅳ. 법적 판단의 합리성과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관계

1. 법해석의 재구성
지금까지의 논의과정에서 하버마스의 법에 대한 태도는 과학적 인식주의적 실증적인 태도와는 다르다는 것이 완연히 밝혀졌다. 법률적 삼단논법과 같은 법의 형식논리적 의미만으로는 법적 판단이 합리적으로 정당화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판사들은 자신들의 법적 해석들을 법적으로 확증된 기준들 즉 법적 도그마로만 정당화할 수 없다. 관찰자의 관점에서 그와 같은 기준들은 저절로 정당화되는 직업 윤리적인 법제도였지만, 이제 참여자의 관점에서 볼 때 법적 효력의 근거가 되는 절차상의 모든 원칙들을 유효한 것으로 받아드리기 위해서는 이런 식의 자기 정당화로는 충분하지 않다. 절차상으로 정당화된 재판실무 결과의 유효성을 보장하는 절차상의 원칙들에는 내부의 논거가 필요하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따르면 법해석은 법이론과 법도그마틱으로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해석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부담을 안고 있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론 즉 법학에서의 대화이론은 기존의 법률적 삼단논법처럼 법적 논의에 대하여 논리적-의미론적 접근만으로 한정될 수 없다. 법률적 삼단논법에 의하면 규범적 판단의 타당성을 진리대응설(眞理對應說)의 의미에서 설명하였지만, 이제 대화이론에 따르면 규범적 판단의 타당성을 진리대응설의 의미에서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법은 진리대응설에 따라 사실로 구상화될 수 없는 사회구조이기 때문이다. 타당성이란 합리적인 것, 즉 올바른 근거에 따라 수락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판단의 타당성이란 자신의 타당성의 조건(Geltungsbedingung)을 충족하고 있다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한 조건에 충족되는지 여부를 법률적 삼단논법에서는 경험적 증거나 이념적인 시각에서 얻은 사실 파악으로 된다고 여겼지만 이제 대화이론에서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대화와 논증을 통해서 관철된 근거들을 통해서 해명되게 된다. 이제 법률적 삼단논법에서처럼 실제 근거가 논리적 의미의 추론관계나 적절한 증거에서처럼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결코 될 수 없다. 그 때문에 법률적 삼단논법에서처럼 실제 가능한 이유들의 연쇄고리에서 당연한 것으로 되는 끝은 없다. 또 새로운 정보와 더 나은 이유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선험적으로 배제해 버릴 수 없다. 형이상학에 따른 배타적인 이론의 절대적 이념이 이제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되지 않는다. 이제 유일하게 올바른 결정을 위한 규제적 이념은 아주 엄격한 이론의 도움으로도 해명될 수 없게 되었다.

2. 합의를 통해 보충되는 절차적 합리성
어떻게 법적 판단의 합리성을 해명할 것인가? 하버마스는 귄터의 적용대화이론을 수용하여 이 문제를 해명하고 있다. 즉 법과 관련한 정당화는 법률자체의 성립과정에 관한 정당화와 법적용의 정당화로 구별된다. 이는 각기 '규범창설대화(Begr ndungsdiskurse)'와 '규범적용대화(Anwendungsdiskurse)'로 지칭된다. 따라서 '대화이론(Argumentationstheorie)'은 이 두가지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 대화이론은 '대화의 질(Qualit t der Argumente)'과 '대화절차구조(Struktur des Argumentationsprozesses)'에 의존한다. 대화이론은 절차적 합리성개념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대화이론에 의해서 법적 판단의 타당성은 법률적 삼단논법으로 이루어지던 논리적 의미론적 차원과 사실성과의 관련뿐 아니라 화용론적 차원의 규범창설절차(pragmatische Dimension des Begr ndungsprozesses)와도 연관되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주장하는 법적 판단의 합리성개념에서 절차적 합리성이 중요한 개념으로 작용하게 된다. 현대는 형이상학에 근거해서 이루어 진 어떤 배타적 이론의 절대성이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되지 않으므로 유일하게 올바른 결정을 엄격한 이론으로 해명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는 일관성을 갖고 있는 어떤 이유들이 일시적으로 구성되지만 그 이유들은 지속적으로 비판받으면서 질서가 유지된다. 하나의 극한값으로 수렴되는 끝없는 대화과정이 있고 대화과정에서 타당한 이유들이 설명된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대화를 통해서 진보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올바른 이유는 이제 사실성과의 대응이나 형이상학적인 절대이론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대화활동의 결과로 수락할 수 있다고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라고 하버마스는 설명한다. 즉 절차적 합리성 개념은 합의를 통해서 보충되고 있다.

1) 규범창설대화
규범과 가치결정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하버마스는 누구나 납득하고 억압없이 지지할 수 있는 규범과 가치결정을 생각한다. 이러한 결정이 있기 위해서는 억압이나 불평등이 없는 이상적인 대화과정을 상정하고 있다. 제안자와 반대자들은 문제되는 것을 논의하고 행위와 경험에 대한 어떤 억압도 없게 하고 제안자가 주장하는 근거들의 가설적 관점에서 제안자의 주장이 적절하게 존재하는지 조사한다. 강제력은 없지만 대화과정에서 이론의 여지가 있는 의견에 관한 최선의 정보와 더 나은 이유들의 논증을 하고 보편적인 청중들에게서 찬성을 얻기 위한 대화기술들이 의도적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규범창설대화로 설명하고 있다.

2) 규범적용대화
규범창설대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규범적용의 문제는 관여자들의 세계와 자신의 이해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적용대화에서 이미 통용되고 있는 규범들은 가능한 모든 관계자들의 이익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규범이 주어진 상황에 적절한가를 결정할 때 규범을 직접 적용하는 당사자 이익을 뒤로 미루고 그 규범과 관련해서 가능한 모든 관계자들의 이익을 고려해야 한다. 이때 참여자와 관여자들이 당사자 이익을 고려하지 않지만 주어진 상황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느냐는 참여자와 관여자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종속되어 있다. 결국 규범이 적용될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 그 자체가 규범적인 것을 함유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규범적용대화에서는 규범창설대화에서 유효하게 내재해 있는 규범들이 함께 존재하게 된다고 하버마스는 주장한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서 규범적용대화에서는 정합성 개념이 의미를 갖고 논리적인 전제로 있게 된다는 것이다.

3) 의사소통과정으로서의 소송절차
하버마스는 법적판단의 합리성을 알렉시나 귄터(K. G nther)처럼 도덕적 대화의 특별한 경우로 파악하는 것은 오류라고 지적한다. 정치적 입법은 도덕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것 뿐 아니라 다른 류의 것에 근거한다고 한다. 절차이론에 의거할 때 법규범의 정당성은 도덕적 규칙이나 이성규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입법의 민주적 절차의 합리성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이점에서 하버마스는 칸트, 알렉시, 귄터와 입장을 달리 한다. 하버마스는 정치와 법의 연결구조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법의 정당성은 도덕적 판단의 정당성에 의해서 정해질 뿐 아니라 다음의 것들에 의해서 정해진다. 정보의 처분가능성, 적절성, 중요성선택, 풍부한 정보처리능력, 상황의 의미와 문제설정의 타당성, 선택결정의 합리성, 평가의 권위적 확증성, 의도했던 타협의 공정성에 의해서 법의 정당성은 정해진다. 이처럼 법규범이 지닌 복잡성으로 법적 결정의 정당성은 도덕적 판단의 타당성과 같은 것이 될 수 없고, 그런 면에서 법적 대화는 도덕적 대화의 특수한 경우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알렉시나 귄터처럼 법적 대화를 도덕적 대화(창설대화이든 적용대화이든)의 특별한 경우로 보는 것은 인식에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오도된 것이라고 한다. 대화원칙에 의해 전제된 합리적 대화는 한편 도덕적인 대화로 다른 한편 정치적 법적 대화로 분화되고 그것들은 법형식으로 제도화되고 도덕적인 문제를 법규범의 관점에서만 결정하는 것이다. 사적이고 개방적인 권리의 향유와 자율성을 동시에 보장하고 있는 법체계는 민주적인 입법절차와 공정한 법적용의 절차로 해석되고 형성된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주장이다. 하버마스는 법적 대화의 논리적 범위의 제한 방식을 도덕적 내용으로 한계지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법적 대화는 본래 민주적으로 제정된 법과 관련이 있으며 법적 도그마틱을 반성하는 일에 관한 것이 아닌 한 그 자체가 합법적으로 제도화된다. 그와 동시에 법적 대화는 법규범과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법체계 내에 있는 법적 대화의 의사소통형식 자체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입법에서 민주적 절차처럼, 법적용에서 재판절차의 질서로 오류와 재판의 불확정성이 치유되기 때문이다. 합법성과 법의 실증성 간의 긴장은 실질적이고 정당하면서 일관되는 재판으로 극복된다. 그러나 이러한 긴장은 실용적인 분야인 판사의 재판실무에서 다시 되풀이된다. 소송법이 규범적이고 정당한 대화를 규정하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시간과 사회적 사실의 관점에서 자유로운 의사소통과정에 관한 제도적 틀을 보장하고 이 틀은 규범적용대화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고 한다. 기존의 소송법에 대한 설명은 권리실현절차규정 내지 실체적 진실발견 절차규정으로 이해해 왔지만, 하버마스는 소송법을 의사소통과정을 규정한 제도로 이해하고 소송법이 규범적용대화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과정에 관한 제도적 틀을 독일의 민사소송법과 형사소송법을 참고로 해서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우선 절차과정의 시간적 사회적 제한을 보자. 소송의 종료에 관한 법정제한기한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도 다양한 기한규정(특히 항소법원과 상고법원의 심급)은 다툼이 지연되지 않고, 확정력있게 결정되도록 배려하고 있다. 그후 절차에서의 사회적 역할의 배분을 통해서 형사소송에서는 검찰측과 변호인측 간의 균형과 민사소송에서는 원고와 피고 간의 균형이 수립된다. 동시에 법관은 (적극적으로 입증을 촉구하거나 중립적으로 관찰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론수행에 있어서 공정한 제3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증거조사동안에 절차의 참가에 관한 입증책임이 다소 명백하게 규정되어 있다. 증거절차자체는 (형사절차에서보다 민사절차에서 더욱 강하게) 자신의 이익을 쫓는 당사자들 사이의 경쟁으로 설정되어 있다. 비록 형사소송에서 법원은 "진실을 찾기 위하여 결정을 위해 중요한 모든 사실과 증거수단을 직권으로 조사하여야"(독일 형사소송법 제244조 제2항) 함에도 불구하고, 절차참여자의 역할을 살펴볼 때, 증거조사가 협동적 진리추구라는 의미에서 철저하게 담론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영미법상의 배심절차에서와 유사하게 전략적 행위공간도 사실관계 구성과 관련 있는 모든 사실들이 표출되도록 조직화되었다. 법원은 이러한 사실들을 증거판단과 법적 가치판단의 기초로 삼는 다는 것이다.
전체절차의 핵심은 소송진행을 규율하는 사실상의 제약사항의 관점 하에서 드러난다. 즉 이것은 규범적용대화에서 그 근거들의 자유로운 전개를 위한 내적 공간을 제도적으로 외부에서 경계지우는 역할을 담당한다. 공판준비절차는 소송물을 규정함으로써 공판절차가 특정한 사례에 집중될 수 있도록 한다. 사실문제와 법률문제를 분리하는 방법론적인 가정 하에서 사실확정과 증거수단의 확보를 위하여 현재의 사실문제와 법률문제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는 증거조사가 실행되고 있다. 흥미롭게도 법원은 소송유형에서 증거평가와 법적 판단을 별도의 절차에서가 아니라 "내부적으로" 처리한다. "증명되고" "진실로 인정된" 사실을 규범적으로 평가하는 법적 논의는 판사가 자신의 판단을 절차참여자들과 공중 앞에서 그 판단을 "논증하고" "증명"하는 한도 내에서만 사실의 관점 하에서 소송법상 규율된다. 정당화는 다음과 같은 구성요소와 결정이유들로 이루어진다: "법원은 판결이유에서 사실적, 법적 측면에서 결정에 반영된 중요한 고려사항들의 요지를 밝힌다.(독일 민사소송법 313조 3항). 여기에 법리 설시 이외에도 증거평가도 나타난다." 소송법들은 또한 허용할 수 있는 이유들이나 논증의 진행에 관한 준칙을 규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송법은 단지 결과적으로 소송법의 대상에 작용하게 되는 법적 대화의 활동영역을 보장한다. 그 결과가 재심사의 심급절차에서 나올 수 있다.
법의 제도적인 자기반성은 구체적 정의와, 법적용과 법발전의 통일성이라는 이중적인 관점에서 개인의 권리보호에 이바지한다: "우선 상소의 목적은 이미 이루어진 판결의 재심사를 통해서 정당하고 합법적인 결정을 얻으려고 하는 당사자의 이익에 있다. 재심사의 단순한 가능성 때문에 이외에도 재판은 주도면밀한 근거에 따라서 하게 된다. 그 외에도 심급절차는 상급심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나의 최고법원에만 집중시킴으로써 절실히 필요한 법통일성과 법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법의 통일성의 공적 이익은 재판의 논리에 관한 중요한 특징을 드러낸다. 판사는 개별적인 모든 사건을 전체적인 법질서와 정합성을 유지하면서 판결을 내려야 한다. 요약하자면 소송법은 사실에 집중되어 있는 증거조사를 비교적 엄격하게 규율하고, 당사자에게 법에 대한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전략적인 태도를 용인한다. 그러나 법원의 법적대화는 절차법적 진공상태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판결의 성립은 오로지 판사의 전문적인 능력에만 맡겨지게 된다: "법원은 증거조사의 결과를 변론의 전취지로부터 형성된 자유로운 심증에 따라 결정한다(독일 형사소송법 제261조). 법적 대화는 고유한 절차 밖에 위치하게 됨으로써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처럼 소송절차가 의사소통과정이므로 법체계와 일상의 의사소통행위가 이 구조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일상어로 매개될 수 있는 의사소통행위의 구조에서 법체계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하버마스의 주장은 소송법의 절차에서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이다.


Ⅴ. 맺으며

하버마스의 법이론을 통해서 재판의 정당화는 기존의 실증주의처럼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실체적 진실은 객관적 사실로 존재하여 그것을 우리가 발견하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매개로 해서 설명하고 상호 이해를 구하고 납득하는 역동적 구조 속에서 합의된 것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재판절차도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고 법률 규정에 담겨있는 의미를 확인하는 절차가 아니라 의사소통을 통해서 상호 이해하고 납득하는 과정이며 법률의 해석 적용은 여러 가능한 것 중의 하나의 선택이며 결단이다. 그러한 결단은 판사가 하게 되고 이는 자유심증주의에 근거해서 이루어지므로 그 동안 어렵고 복잡하게 주장해 온 그의 이론이 결국 판사의 직업윤리에 맡겨져 버리는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며, 바로 이 점이 그의 이론의 현실적 실천력을 약화시키는 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재판절차는 이제 판사의 진실 발견을 주축으로 한 절차가 아니라 상호 의사소통이 가능한 구조로 이해되어야 한다. 결국 그의 이론을 통하여 소송당사자의 재판과정의 참여권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따라서 재판 절차를 제도화할 때도 참여권의 확장과 보장의 방향으로 구축되게 될 것이다. 또 판사의 재판에 대한 태도도 독단적인 인식이나 선언이 아니라 상호의 합의를 구하는 태도로 바뀌게 될 것이다. 이런 면이 그의 이론의 중요한 성과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