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박멸 / 박정대
어떤 영화감독은 시나리오도 없이 촬영에 들어간다/ 훌륭하다, 어떤 시인은 제목 없이 시를 쓴다/ 역시 훌륭하다, 그러나 제목만으로 완성되는 시가 있듯/ 제목만으로 완성되는 삶도 있다/ 제목이 부실하다는 것은 삶이 부실하다는 것/ 오늘은 그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삶의 제목으로 삼아라/ 삼나무에서 삼나무 이파리 자라듯/ 제목으로부터 삶이 자란다/ 고독이 분란을 일으키는 삶은/ 선반 위에 올려두어라/ 싸늘한 겨울 오후/ 난롯가에서 그대 시를 쓴다면/ 제목을 커피와 담배라고 하자/ 그 모든 성분은 삶으로부터 온 것일지니/ 커피와 담배의 시는 삶의 시다/ 담벼락과 마주한 그대 삶의 시를 보아라/ 처음부터 완성된 시는 없나니/ 모든 시는 끝내 미완으로 남으리니/ 커피를 마신 심장에 담배 연기를 풀어 시로 만들라/ 설령 그것이 사제폭탄이 되더라도/ 그대가 폭탄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니/ 커피와 담배가 만드는 시/ 침묵이 만드는 열렬한 고독작렬의 시를/ 그대는 오늘도 세상의 창가에 두고 가느니/ 세상에 창궐한 시인이 사라지면/ 새로운 종족의 시인이 탄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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