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고요한 필담 / 김선우

나뭇잎숨결 2021. 12. 19. 18:19

고요한 필담 / 김선우

 

 

무언극 배우처럼 그들은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7번 국도가 천천히 흘러가고

반쯤 눈을 감은 구멍가게 반백머리에 한가롭게 매달린 햇살들
뽀얗게 먼지 앉은 과자봉지들이 구시렁거리며 떠오른다
먼지털이를 들고 고개를 까닥거려주던 할머니가 졸리운 눈 속으로 들어가더니
연둣빛 바구니에 복숭아를 담아 온다
눈이 침침한 할머니의 지팡이를 따라 더듬더듬 밝은 길이 만들어지고
한쪽이 기운 평상에 앉아 가끔씩 다리를 긁으며 파리를 쫓던
할아버지와 파리는 실은 놀이에 집중한 듯 아주 천천히 잡는 시늉을 하고
아주 천천히 도망가는 시늉을 한다
제삿날 생율을 치거나 어느 저문날 발뒤꿈치의 굳은살을 깎아내는 데 쓰였을
나무손잡이 달린 반달칼을 들어 할아버지가 복숭아를 가른다
복숭아 살을 조금씩 베어물고 아주 오래 씹는다 가끔씩 파리가 주름진 얼굴에 앉고
그들은 꼭 복숭아 한개씩만 반쪽으로 갈라 나누어 먹는다 마주 앉아서
이것은 동쪽으로 뻗은 가지에서 딴 것이 분명하다는 둥 이것은 서쪽 가지의 것이라는 둥
바람 많이 분 날이 너무 많았다는 둥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법한
연둣빛 바구니를 사이에 두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파리 한마리가 복숭아 씨앗에
아로새겨진 요철 점자를 읽는 사이
뒤꼍 복숭아나무 시름시름한 가지를 매만져주면
물관 속 깊은 곳을 지나는 도톰도톰한 말들이 만져진다
아직 덜 여문 복숭아 열매 속에서
복숭아나무와 노부부와 나와 파리 한마리가 고요한 필담(筆談)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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