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메를로-뽕띠 현상학에서 세계의 축으로서의 신체에 대한 연구

나뭇잎숨결 2024. 11. 26. 08:30

메를로-뽕띠 현상학에서 세계의 축으로서의 신체에 대한 연구



김 병 환*부산대 철학




이 글은 나의 것인 나의 신체가 세계의 열기와 가역성의 존재이고 세계의 축과 원초적 표현으로서 세계 표현의 축임을 밝히는 데에 있다. 현상학적 존재론의 길을 위한 메를로-뽕띠의 철학적 탐구는 과학적 인식과 이론적 작업이 그 활동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그것들의 기원을 망각한다는 사실에 대한 비판을 나타내고, 그러한 탐구는 신체의 인식에 관한 지성주의적 인식에 대한 비판이다.


메를로-뽕띠에 있어서 나의 실제적 신체는 항상 나의 행동들에 나타나지 않는 심층적인 실존의 양상을 가리키고 있다. 나의 행동들의 실재성은 나의 경험과 분리될 수 없다. 나의 신체적 운동은 객관적 영역 속에 위치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현상적인 것의 질서 속에 위치지워진다. 게다가 이러한 운동은 모자이크식의 운동이 아니다. 예컨대 신체적 지각은 어떤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감각들의 모자이크가 아니다. 그래서 신체는 그 기능에서 맹목적 기계 장치, 즉 독립적인 인과적 연속들의 모자이크로서 정의될 수 없다. 모든 신체적 활동은 신체의 신체화이다. 또한 나의 신체의 부분들 사이에서 나의 신체화는 나 자신의 신체적 실존을 드러낸다.


세계의 축인 신체는 어떤 세계의 힘이다. 메를로-뽕띠의 관점에서 신체와 세계의 상관관계는 연루이고, 신체가 신체화하는 실존은 이론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실천적인 의미화를 가진다. 우리는 촉감의 경우에서 신체와 세계 사이의 관계들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근접성이 있음을 말할 수 있다. 특히 우리는 신체의 부분들에 있어서 촉감하는 기능과 촉감되는 기능 사이의 가역성을 말하고자 한다. 더욱이 신체의 차별적 부분들에 대한 유일한 통일의 영역이 있다. 이 통일은 같은 세계의 펼침에 대한 신체의 탐구적 작용들의 다양성을 일치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신체의 모든 사용은 '신체'-'세계'라는 도식 아래에서 이미 원초적 표현이고, 그것은 의미의 생성이다. 의미들을 형성하는 이 신체는 '나는 할 수 있음'으로 간주될 수 있고, 신체화된 의식은 순수 '나'가 아니다. 이러한 의식은 근원적으로 '나는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체-주체의 코기토는 신체적 삶의 코기토이고 암묵적 코기토이다. 또한 우리는 신체의 자아란 모든 삶의 존재론적인 실재적 가능성을 함축하는 신체화된 자아임을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신체의 자아를 초월론적 신체화된 자아로 부르고자 한다.

※ 주요어 : 신체, 세계, 신체화, 나는 할 수 있음, 초월론적 신체화된 자아


Ⅰ. 들어가는 말

메를로-뽕띠가 세계와 신체의 상호 침투적 관계와 신체의 역동성에 대한 의미를 참되게 밝혀 보고자 함은, 그의 철학의 전체적 흐름에서 현상학적 존재론의 길임을 보여 준다. 이러한 길에 대한 그의 철학적 탐구는 경험과 지식, 언어와 사고, 자연과 세계, 예술 등의 영역에서 이론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세밀히 구성된 것들에서 우리가 존재들과 사물들을 형성하는 원초적인 지각적 경험, 우리의 환경 세계와 신체의 상호 침식 및 신체적 지향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반성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일은 과학적 인식과 이론적 연구를 비난하는 것이 어떠한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학적 인식과 이론적 연구가 삶의 활동에서 불가피하게 그것들의 기원들을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신체의 객관적인 과학적 인식에 신체의 주관적 경험을 대립시키면서, 신체의 인식에 관한 지성주의적 인식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지성주의에 있어서 신체의 객관적인 과학적 인식이 기계론의 총체로서 신체의 표상에서 중단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주관적 신체에 의한 반성이 총체적 유기체인 신체의 실재 속에서 그 닻을 내리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적 사고로부터 세계에 대한 체험으로 돌아가야 하는 데에 있는 반성을 불러일으켜, 신체화의 세계 속에서 철학의 참된 출발점과 본질적 의미를 찾아야 한다.


신체의 전반성적인 원초적 사용은 아직 의미를 갖지 않은 세계, 즉 가능적 의미 세계 속에서 의미를 고취한다. 우리의 신체가 여는 세계는 신체와 세계의 공존적 관계들과 간격들의 활동으로 의미화하는 세계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세계는 인간 신체가 자신의 삶을 살기 시작할 때에 의미들로부터 싸여지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신체의 삶이 자신의 고증과 같이 있는 감각 세계에 대한 지시 없이는 기술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신체의 삶과 관계 없이는 세계를 생각할 수 없다. 세계와 신체 사이의 사슬관계는 파기가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끊어질 수 없는 '신체와 세계'의 사슬관계에 있어서 신체의 모든 활동에 대해 말해 보자면, 신체의 활동은 그 자체로 무엇인가를 형성하거나 무엇인가를 나타낸다. 무엇을 형성함은 의미를 형성함이요, 무엇을 나타냄은 의미를 나타냄이다. 그러므로 메를로-뽕띠의 신체 이론에서 신체의 활동은 이미 원초적 표현 활동이 된다. 원초적 표현은 그것이 일어나는 순간에 없어지기는 커녕, 어떤 질서의 시작을 알리고, 과학의 세계, 언어의 세계, 예술의 세계, 문화의 세계 등을 기초지우는 일을 형성하는 것이다. 실제로 원초적 표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선행하는 표현을 인용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모든 사회에서 현존하는 표현들의 분절된 언어 체계들, 사상의 체계들, 예술 작품들의 형태들을 시작함과 동시에 그것들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적으로 신체의 표현이란 기호들의 의미와 기호들의 사용 규칙과 더불어 주어진 기호들로부터 발생하는 표현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우리는 이러한 표현의 세계에서 의사소통이나 담론을 행한다. 대체로 우리의 삶의 세계는 기호의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표현의 세계는 이 기호의 세계로부터 펼쳐진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엄격히 말하자면, 이 기호들은 원초적으로 신체의 운동들과 지각들의 활동에 의해서 어떤 의미가 발생하고, 그 의미가 의미화로 이행함으로써(혹은 상장화됨으로써) 이루어지며, 기호들 간에 어떠한 질서가 자리매김됨으로써 기호의 사용 규칙이 성립하고 기호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래서 기호 세계 이전의 신체적 삶에 있어서 신체의 모든 활동들은 이미 원초적 표현임을 간과해서는 안 되고, 또한 기호의 영역 속에서 신체의 각 활동들은 소여된 기호들과 더불어 항상 새로운 의미화를 형성하는 원초적 표현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신체와 함께 세계는 "감각함과 감각됨이라는 말의 이중적 의미에서 나타나는 감각적 세계이고, 이러한 세계는 정확히 메를로-뽕띠가 존재(l'Etre) 또는 살(la chair)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계는 신체의 운동에 의한 신체화된 세계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신체의 모든 기관들이 각각 어떤 방향으로 운동하고 그 기관들의 운동이 총체적으로 통일성을 이루는 운동 그 자체의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체의 주체성은 세계 속에서 모든 존재의 계기가 되고 있음을 말할 수 있다. 이 글에서 나의 것인 신체가 세계의 열기와 가역성의 존재이고 원초적 표현으로서 세계 표현의 축임을 고찰하면서, 신체가 존재론의 기반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러한 일은 메를로-뽕띠 신체 이론의 본질적 의미를 나타내고, 이를 근거로 그가 추구해 온 신체의 본질적 특성에 대한 현상학적인 존재론적 길 가운데 새로운 어떤 형태를 제시하고자 하는 뜻이고, 신체-주체에 대한 존재 이해를 더 높이고자 하는 뜻이다.


Ⅱ. 나의 것인 나의 신체

우리는 신체의 물질적 특성에 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신체는 우리가 감각들을 느끼고 몸짓들을 수행하며 대상들에 대한 촉각적 혹은 시각적인 체험 양상들의 지각과 그 대상들에 대한 파악을 통해 우리의 세계를 탐구함으로써 형성하는 경험의 기능에서 기술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나는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공간의 부분, 물질적인 다른 것들 가운데 있는 하나의 물질적인 것, 그리고 우리의 생물학적 삶을 보증하는 유일한 특수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또한 내가 세계에서 현존하고 생각하며 투사들을 실재화할 기초적이고 구체적인 가능성을 가리킨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메를로-뽕띠에 있어서 나의 신체는 나의 행동들의 실재성이 나의 경험과 분리되는 객관적 영역 속에서 위치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과 더불어, 항상 나의 행동들에 나타나지 않는 심층적인 실존의 측면을 가리키고 있다. 실제로 나의 신체는 환경 세계에서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고, 보거나 촉감하는 것과 같은 신체적 활동들에 의해 나의 현존에 어떤 방향을 새겨 놓는 신체이다. 게다가 나의 "신체적 운동은 객관적 영역 속에 위치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현상적인 것의 질서 속에서 위치지워진다." 신체의 체험을 고려한 상태에서 신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신체에 대한 해부학적이고 생리학적인 연구에 반대하여 주관적 심정을 권장하는 데에 이르지 않는다." 신체에 대한 이러한 연구는 실질적으로 신체의 세부적 특징들과 신체적 운동들의 특징들을을 잘 밝혀 주고 있다. 그렇지만 "메를로-뽕띠의 의도는 이러한 연구가 체험에 상응하는 의미화들을 함축한다는 것보다 오히려 그러한 의미화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신체의 체험에 있어서, 환경의 자극에 대한 반사 작용은 단순한 자극-반응의 방식으로 자극의 기계적 결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신체의 반사 작용이 기계적인 환원의 방식에 의해 전적으로 자극으로 돌아가질 수 있다면, 신체의 모든 체험적 운동은 모자이크식의 점적인 자극들에 완전히 일치하는 반사적 운동들이 되어 버릴 것이다. 즉 수치적으로 말하자면, 점적인 자극1과 점적인 반사 운동1은 동일하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의 신체적 운동은 자극-반응의 방식을 띠지만, 그 운동은 모자이크식의 운동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신체적 운동에 있어서 신체적 지각은 "어떤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감각들의 모자이크가 아니다." 메를로-뽕띠에 의하면, "신체는 그 기능에서 맹목적 기계 장치, 즉 독립적인 인과적 연속들의 모자이크로서 정의될 수 없다."


또한 세계 속에서 우리의 신체적 운동은 자극과 반응의 방식을 넘어선 세계적 상황의 의미를 요구한다. 이 말은 우리의 신체적 운동이 세계적 상황에 좌우되지만, 신체의 현재 상태와 관련되어 총괄적으로 그러한 상황의 의미를 함축한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의 신체적 운동은 세계적 상황이라는 자극들에 적합한 반응을 할 뿐만 아니라, 그 자극들의 총괄적 형태에서 의미를 발생시킨다는 뜻이다. 자극-반응의 방식을 넘어서는 신체의 삶은 환경 세계와 자신의 총체적 관계에서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일군다. 그래서 우리의 신체적 삶에 있어서,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반작용들, 신경 충동이나 근육 수축들의 행로, 그리고 "알파 운동신경세포와 골격근 섬유 사이에서 시납스적 소통을 지시하는" 신경-근육 전달과 같은 생리학적 과정들, 폭넓게 말하자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의 소재지인 신체에 포착되는 객관적인 모든 물질적 소여들은 신체의 관계적 상황과 신체적 방식으로부터 고립될 수 없다.


인간의 유기적 신체에 대한 연구는 신체의 기관들과 그것들의 기계적 구조에 대한 분석에 의해서 행해져야 하지만, 주체적으로 체험되는 신체의 계산에 의한 파악을 제거할 수 없다. 우리는 내가 나의 신체를 체험한다는 바로 그러한 '나의 신체', 즉 '주체로서 신체'와 해부학과 생리학이 연구하는 '대상으로서 신체'를 구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별을 신체에 대한 실제적 분리로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 신체의 유기적 삶은 우리 신체의 주관적 경험에 연합된다. 이 주관적 경험은 감각적 정보들로부터 시작하여 공간과 시간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신체를 자리매김하도록 하고, 우리 신체의 차별적 부분들 사이에서 관계들의 의미를 가지도록 한다. 말하자면, 유기체의 일반적 작용은 단지 물리적 인과성에 종속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가 지향하는 환경 상황에서 나타나는 대상의 상태에 의해서 신체-주체에 의존한다. 이러한 사정에서 보자면, 신체의 지향이란 우리가 이것 혹은 저것을 형성하는 지향들을 가지는 경우와 같이, 의지의 결과들이라는 의미에서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에 나타나는 것과 더불어 신체의 관계들이 결정되고 수행되는 방향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의 신체가 세계의 한 부분에 불과하지만, 세계의 중심에 놓여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나의 신체는 물질적인 유기적 신체임과 동시에 주체로서 아직 가능적인 의미의 세계에 신체 자신을 투사하면서 그 대상들을 취한다. 이 대상들은 나의 신체에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측면으로 주어진다. 이를테면 "앞으로 내가 대상들의 주변을 선회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대상들이 여러 측면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나의 신체의 방식에 의해서 세계에 대한 의식을 가진다." 그렇지만 우리가 신체의 매개에 의해 세계에 알려진다면, 신체는 의식 그 자체로 신체적 조건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을 어떤 의식의 배치에 대한 어떤 도구적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메를로-뽕띠는 "신체는 세계에서 존재의 전달자이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세계는 내 앞에 혹은 나의 주변에서 나의 저편에 있는 모든 경우에서 펼쳐진 것들의 다수성이 아니며, 그것은 한결같이 바탕에서 모양들이 부각되고 특질화된 방향들이 부과되는 현상들로 조직된 총체이다.


물론 이러한 총체는 변경될 수 있지만 (예를 들면 어떤 바라봄의 총체는 그 바라봄의 방향 이동과 함께 변경됨), 그 총체는 의미화들이 없는 물질적 요소들 그 자체들의 새로운 총합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다. 의미화들이 없는 물질적 요소들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들은 세계의 요소들로서 신체에 의해 의미로 돌출될 수 없는 것들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객관적 요소들로 위치지워져 있고 의미의 가능성의 영역 속에 있는 것들이다. 어떤 환경 세계에 접근하는 신체는 의식을 위한 외적인 도구이기는 커녕, 형태들과 방향들 즉 의미화하는 영역을 나타낼 수 있어야만 한다. 신체가 항상 의미화의 영역을 갖고 있다는 것은 신체 자신이 어느 곳으로 지향함을 표현해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표현내는 우리 신체의 가장 요소적인 작용들(예를 들면, 봄, 들음, 말함, 이동함, 붙잡음 등)은 사물의 환경 세계에서 방향들을 나타내고, 덜 한정된 영역들과 주변들을 구별하며, 의미를 가지는 한에서 세계를 설립하는 데에 있다.


메를로-뽕띠가 중요하게 다루고자 한 점은 신체가 그 자신에 어떻게 관계되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나는 나의 신체를 가지고서 환경 세계 속의 대상들을 관찰하지만, 나는 나의 신체 자체를 관찰하지 못한다. 물론 나는 나의 신체의 부분들을 관찰할 수 있다. 내가 나의 신체 자체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이 일은 '나에 있어서' 나의 신체 자체를 관찰하는 '새로운 나'(즉 나에 있어서, 의식이 아니라 관찰이 불가능한 새로운 존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식에 있어서' 의식이 의식 그 자체를 파악하기 위해, 반성적 의식이 그에 앞선 의식을 파악해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신체의 존재 양식을 고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고찰해야 할 상황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신체의 이중 감각들의 현상 문제와 이 현상에 대한 신체 자신의 관계 문제이다. 신체의 이중 감각들의 현상이란 신체 자신의 부분들 간의 직접적 접촉에 의한 그 부분들의 상호적 감각 현상이다. 예를 들면, 내가 나의 왼손으로 오른손을 누를 때, 오른손은 왼손에 의해 촉감되고, 왼손은 오른손을 촉감한다. 즉 오른손은 촉감되는 것이고 왼손은 촉감하는 것이다. 이 점은 두 손이 상호 간에 따로따로 대상으로서 '촉감되는 것'과 주체로서 '촉감하는 것'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가 이렇게 두 손을 촉감 대상과 촉감자로 규정한다고 하더라도, 두 손은 나의 신체의 손으로서 서로 동등한 자리를 취하고 있다는 것은 명증적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촉감되는 손(오른손)은 나에게 그 자체 촉감할 수 있는 것으로서 나타나고, 반대로 촉감하는 손(왼손)은 촉감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동시에 반대로 되고 동시적이 되는 두 감각들이 일어나는 것 없이는, 하나의 감각에 대하여 촉감하는 기능과 촉감되는 기능 사이에 양자택일적 가능성의 경험만이 있을 뿐이다. 메를로-뽕띠에 의하면, "우리가 이중 감각들을 말함으로써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다른 기능에 대한 한 기능의 이행 속에서, 나는 촉감되는 손을 곧 촉감할 수 있을 것과 같은 것으로 인식할 수 있다. 즉 나의 왼손에 대해 나의 오른손이 존재하는 근육과 뼈의 덩어리 속에서, 나는 지금 둘러쌈 혹은 내가 대상들을 탐구하기 위해 그것들을 향하여 내뻗는 그 다른 민첩하고 살아있는 오른손의 신체화를 알아챈다. 신체는 인식의 기능을 실행하는 가운데 그 자체 외부로부터 간파된다."


여기서 메를로-뽕띠의 주장은 《나의 두 손은 동시적으로 능동성과 수동성을 함께 내포하는 것이 되고, 이와 더불어 신체-주체인 나는 나의 두 손이 서로 촉감자임과 동시에 촉감되는 것임을 알며, 나의 두 손은 나의 신체를 촉감한다는 것이다.》로 간주된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사항을 말하고자 한다. 즉 신체-주체인 나는 나의 두 손이 서로 '촉감함-촉감됨'('신체화함-신체화됨')의 양식을 가진다는 것을 통각함과 동시에 나의 두 손의 접촉이라는 사태 그 자체를 통각하고, 이 모든 활동 자체가 '나화'이다. 게다가 나의 신체들 간의 '나화'는 나의 자기 신체적 실존이다.


이와 같은 우리의 신체가 우리를 세계로 여는 양식이란 무엇인가? {지각 현상학}과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에서 세계에 대한 신체의 특징적 양식에 관한 메를로-뽕띠의 주장은 우리의 신체 그 스스로 세계로 지향하여 자기를 펼치는 열기이다는 것이다. 이러한 열기는 환경 세계 속에서 항상 방향지워진 신체가 그 자신 자기를 파악하고, 신체의 기관들과 더불어 지각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신체 그 자신에 직면한 대상과 같은 방식에서 자기를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몸짓을 수행하거나 저러한 기능을 실행하는 능력과 신체의 부분들 상호간에 형성되고 신체화되는 능력으로서 자기를 지각한다. 이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메를로-뽕띠의 견해에 따르는 리쉬르가 "메를로-뽕띠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에서 아주 강하게 주장했던 감각과 사고의 근원적 비분리"를 지적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체험의 세계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신체는 말없는 표정들, 몸짓들, 행동들, 침묵, 그리고 언어 활동 아래에서 항상 자기 자신을 지속시켜 고양하는 존재이고, 또한 그 자신에 대한 인식은 해부학, 생리학, 생물학 등과 같은 과학의 객관적 분석에서 철저히 규명되지 않으며, 주관적 감정에서 출발하여 형성된 관념도 아니다. 이러한 신체는 그 환경 세계로 지향하는 유기체적 삶의 다양한 방식들에 의해서 방향지워지고 의미의 두께를 갖는 존재이고, 지성의 반성적 활동에 앞선 반영으로 말미암아 그 자신에 관계될 수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존재는 항상 현실에서 체험하는 차별적 세계의 다양한 연결고리에 참여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Ⅲ. 세계의 축인 나의 신체

이제 우리는 세계에 대한 신체의 본질적 특성에 관한 또 하나의 문제에서, 메를로-뽕띠는 왜 신체가 세계의 축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신체는 "어떤 세계의 힘"이다. 메를로-뽕띠에 의하면, "신체를 가진다는 것은 살아있는 존재에 있어서 한정된 환경에 결합되고, 어떤 투사들과 뒤섞여지며, 계속적으로 그 환경에 참여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신체가 연장 속에서 펼쳐진 대상이 아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신체가 세계와 관계하면서 어떤 목표를 가리키고 어떤 내부성을 표출하며, 세계를 나타내도록 한다는 것이다. 신체가 세계와 관계한다는 사실에 관해 바르바라는 메를로-뽕띠의 관점에서 "신체와 세계의 관계는 인식이 아니라 연루이고, 신체가 신체화하는 실존은 이론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실천적 의미화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자면, 신체는 세계에서 사물로 있지 않고, 목표의 원천이며, 자신의 역동성과 일치하면서 그 역동성에 의해 세계와 결합한다. 그래서 주체로서 신체는 이미 세계 속에 있으면서 항상 세계로 지향하는 존재로서 세계에 대한 선객관적(pr objective) 시각으로 특징화되어야 하고, 이러한 시각으로 말미암아 그 신체는 본질이 아니라 현존에 다다르고 의미를 발생시킴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신체가 사물이 아니고 세계를 투사하는 한에 있어서, 순수 수동성의 계기나 순수 능동성의 계기를 독립적으로 고립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언급할 수 있고, 신체의 모든 감각적 내용이 항상 이미 의미의 잉태물이라는 점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말은 앞에서 언급한 신체의 세계에 대한 열기라는 것과 같은 맥락을 가리킨다.


우리의 환경 세계 속에 있는 대상들과 신체 사이에는 존재적 차이가 있고, 또한 대상들의 영속성과 신체의 영속성 사이에 차이가 있다. 그래서 신체화된 대상, 즉 지각된 대상은 변화하는 투시법들을 통해 항상 그 자체를 나타내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지각적 장으로부터 사라질 수 있다. 그렇지만 반대로 '나의 신체'는 같은 각도 아래에서 나에게 항상 현존적이고, 대상들이 결코 부분적으로만 나에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결정한다. 이 '나의 신체'의 영속성은 어떤 투시법에 항상 의존하는 지각에 고정된 주체의 영속성이다. 신체는 운동능력이고, 자신의 이동에 의해 대상들의 새로운 측면들과 상황의 새로운 양상들의 발견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장소의 변화에 의해 획득된 것은 결코 새로운 투시법 밖에 되지 않고, 세계의 나타남 자체와 대등할 모든 투시법들의 통합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은 세계의 열기만큼 세계의 가둠이 아닌가? 이 문제에 대한 어려움은 실제로 오해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사람들은 마치 개별적 신체에 낯설 수 있는 그 스스로 있는 세계와 그러한 신체가 선결되고 분리되어 있었던 것과 같이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투시법으로 있는 지각들이 주관적 표상들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는 개별적 신체가 어떻게 그러한 세계와 결합할 수 있으며, 어떻게 외부적 소여들에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가를 보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개별적 신체와 세계의 관계 사이에서 지각의 본질에 대하여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지각의 본질은 개별적 주체에 고유할 수 있을 표상들을 공교로이 만들어내는 데에 있지 않고, 그것은 사물들의 성질들과 나의 신체의 감각적 기능들이 서로 침투하는 연결이고, 인격적 영역과 외부적 실재에 있어서 모든 구별을 선행하는 연결이다. 물론 감각적 경험은 항상 부분적이고, 어떤 장에 할당된다. 이 장 안에서 신체의 유기체적 삶의 점착은 감각되는 것을 둘러싸는 것에서 멈춤이 없이 일어나고 전인격적(pr per- sonnel) 관계의 그물을 형성한다. 이와 같은 신체의 유기체적 삶에 대하여 메를로-뽕띠는 감각적 의식과 지성적 의식을 구별하면서 세계 속의 신체적 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이 의식은 감각 작용과 지각 작용이 일어나는 가운데 열려지는 특성을 지닌다.

내가 책을 이해하거나 나의 삶을 수학에 바치기로 결정한다는 것을 말하는 의미에서 나는 내(je)가 하늘의 푸름을 본다는 것을 말할 수 없다. 나의 지각은 내적으로 알려지는 경우조차 주어지는 상황을 표현하고, 즉 내가 색깔들에 감각적이기 때문에 나는 푸름을 보고, 반면에 인격적 작용들은 상황을 창조한다. 즉 내가 이 일임을 결정했기 때문에 나는 수학자이다. 그래서 내가 정확하게 지각적 경험을 해석하고자 한다면, 그(on)가 나에 있어서 지각한다는 것을 말하게 될 것이지 내가 지각한다는 것을 말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지각적 경험에 대해 '내가 지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on)가 나에 있어서 지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내가 지각하지 않는다면, 누가 지각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나 이외의 다른 존재가 지각한다는 것도 아니고, 반성적 의식이 지각한다는 것도 아니다. 또한 어떤 숨은 존재가 지각한다는 것도 아니다. 지각적 경험의 동등적 주체로서 '그(on)'가 지각한다는 것이다. '그가 나에 있어서 지각한다'는 것은 나에 있어서 그가 지각적 경험의 능동자로서 지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나에 있어서 '나'가 아니라, 나에 있어서 '신체', 즉 나의 '신체'이다. 결국 우리는 지각 활동에 있어서 나인 신체가 항상 세계에 대한 지각적 경험을 향한다고 말해 본다. 더불어 의식에 대한 결정에 의존하는 작용들이나 방향들에 대해 독립적으로 세계의 양상들을 나타내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의 신체는 세계의 축이다."는 것이 드러난다.


우리는 감각과 지각이 익명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감각은 부분적이기 때문에 익명적일 수 있고, 지각은 신체의 운동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다향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익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메를로-뽕띠는 이 감각과 지각의 익명적임을 우리의 태어남과 죽음의 익명성에 비유하면서, 감각적, 지각적 주체의 익명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최초의 감각, 최후의 감각, 그리고 그러한 종류에 있어서의 유일한 감각은 출생과 죽음이다. 그것을 경험하는 주체는 그것과 함께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 감각은, 마치 나의 태어남과 죽음이 익명적인 출생과 사멸에 속하듯이, 그것보다 앞서고 오래 살아 남을 감성으로부터 발생한다. "


여기서 메를로-뽕띠는 경험적 주체가 감각과 함께 시작하고 끝난다는 전제로부터 주체 역시 익명적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태어남과 죽음은 전인격적인 지평들(les horizons pr personnels)로 간주되고, 신체-주체는 이미 익명적 존재가 된다. 즉 익명적 존재로서 신체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익명적인 감각과 더불어 익명적으로 존재한다. 이 익명적 존재는 세계의 그물 속에서 신체화된 존재이고, 신체화된 의식을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존재는 세계와 함께 자기의 통일성을 지속하는 신체화된 존재이고, 또한 이 존재의 자아는 신체화된 의식인 '신체화된 자아(l'ego incarn )'로서 '초월론적 신체화된 자아'(l'ego incarn , transcendantal)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초월론적 신체화된 자아'는 이후에 신체적 운동과 의식의 관계를 통해 드러날 것이다. 이에 덧붙여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감각과 지각의 익명성 때문에 지각적 경험의 종합과 다양성의 통일이 부정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감각과 지각의 익명성과 더불어 지각적 경험의 종합과 다양성의 통일은 우리 신체의 본질적 특성을 드러낸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세계의 어떤 것을 나타내는 신체의 능력에 대해서 촉감된 손은 또한 역으로 촉감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는 점을 상기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촉감 대상으로서 손이 동시에 촉감주체로서 손이 되고, 거꾸로 촉감 주체로서 손이 동시에 촉감 대상으로서 손이 된다. 이러한 측면은 메를로-뽕띠가 신체의 의미에 대한 풍부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신체의 이러한 특징적 측면을 통해 촉감적인 촉지에 있어서 신체의 운동들과 그것들이 탐구하는 것 사이에 가족유사성이 나타내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가시적인 영역은 그 자체 눈의 운동들에 의존하고 가시적인 것에 대한 모든 경험은 항상 우리에게 바라봄의 운동들의 맥락에서 주어졌다. 이러한 영역에서 보는 자와 가시적인 것 사이에는 간격이 있고, 이 간격 속에서 보는 자와 가시적인 것은 분리되지 않으며, 상호 침투적 이행 속에 있는 것이다. 간격은 봄 자체이고 가시적인 것 자체이며, 실제로 지각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원리상 지각에 벗어나는 바탕과 모양의 차이이다.


그렇다면,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실제로 우리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을 분리하지만,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나의 눈은 가시적인 것이지만, 내가 가시적인 것을 볼 때, 보고 있는 나의 눈 자체는 비가시적인 것이다. 이와 같이 봄 속에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이 분리되지 않는다. 이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에 대해 잘 지적하고 있는 레포르에 따르면, "실제로 가시적인 것과 실제로 비가시적인 것은 분할되지만, 가시성과 비가시성은 분할되지 않는다. 절대적 가시적인 것은 무조건적으로 비가시적인 것이다. 가시적인 것의 제한 속에서 가시적인 것, 즉 바탕 위에 나타나는 모양과 비가시적인 것의 제한 속에서 비가시적인 것, 즉 모양 아래에서 침하하는 바탕은 봄의 제한 속에서 봄을 함축한다."


또한 우리는 가시적인 영역이 촉감할 수 있는 영역과 결부되어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 메를로-뽕띠는 {지각 현상학}의 맥락에서 더 나아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것}에서 가시적인 영역 자체와 촉감할 수 있는 영역 자체의 상관관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 즉 "가시적인 광경은 촉감적 성질들보다 더도 덜도 아닌 촉감에 귀속한다. … 모든 가시적인 것은 촉감할 수 있는 것 속에서 재단되고, 모든 촉감적인 존재는 이를테면 가시성에 약속되며, 촉감되는 것과 촉감하는 것 사이 뿐만 아니라, 촉감할 수 있는 것에 새겨지는 가시적인 것과 촉감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도 침식, 침해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촉감의 경우에서 신체와 세계 사이에 가장 근원적인 근접성이 있음을 주지해 볼 수 있고, 촉감하는 기능과 촉감되는 기능 사이에 가역성(la r versibilit )이 있음을 말할 수 있다. 이 가역성은 신체의 자기에 대한 관계에 의해서만 체험될 수 있는 가역성이다. 다시 말하자면, 촉감하는 손이 그 주변에서 즉 자기 신체의 다른 신체 부분에 촉감될 수 있다면, 이것은 촉감하는 손이 그 운동들을 통해 그 자체가 탐구하는 영역에 귀속된다는 것이고, 또한 반대로 그 손이 탐구의 영역이 되어 자기 신체의 다른 부분에 귀속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촉감하는 손이 감각들의 형태 아래에서 개시하는 것은 세계와 단절된 주관적 인상이 아니라, 자기 신체의 부분들 간의 접촉에 있어서 존재의 어떤 양태이고 존재의 참된 양상이다.


더 나아가서 보자면, 자기 신체의 각 부분들은 차별적인 존재의 양태들과 그 양상들로서 독립적으로 따로따로 기능하여 끝이 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 신체의 각 부분들은 모자이크식으로 작용하고 각각 완전히 고립된 섬나라로서 그 자체만의 존재의 양태나 양상을 가질 뿐이고, 어떠한 소통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신체의 각 부분들 간의 소통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를테면 시계의 톱니바퀴들에 있어서 맞물고 있는 톱니바퀴의 각 날이 그 기능을 수행하지만, 톱니바퀴들 전체의 영역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과 같이, 신체의 각 부분들이 각각의 고유한 기능을 수행하여 그 자체의 고유한 존재 양태와 의미를 가지지만, 신체의 전체적 영영 속에 이루어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왜냐하면 나의 신체의 각 기관들, 더욱이 각 부분들은 유기체적으로 하나의 전체로서 나라는 신체 속에서 그물같이 조직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체-주체에 있어서 신체의 기관들은 그 자체들의 그물 속에서 자기 신체에 대해 그 각각 자체의 고유성을 여는 '존재의 양태'이다. 전체로서 나의 신체는 각 부분들이 어디로 지향적 작용을 행하여 그 고유한 의미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신체 자체 속에 본질적으로 내포하면서 종합적으로 통일한다. 내가 나의 두 손을 맞잡을 때, 각 손은 촉감되지만, 거기에는 두 손에 대하여 촉감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 있고, 내가 무엇인가를 볼 때, 나의 각 눈은 보지만, 거기에는 같은 봄에 대하여 가시적인 유일한 영역이 있다. 하물며 내가 나의 두 손을 맞잡고서 맞잡고 있는 두 손을 볼 때, 두 손이 촉감할 수 있는 것에 열리고 두 눈이 가시적인 것에 열리지만, 여기에는 나의 신체의 차별적인 부분들에 대하여 감각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 즉 통일의 영역이 있다.


이를테면 이러한 통일의 영역이 본질적으로 신체의 공동작용적 영역일 수 없다면, 그러한 통일의 영역은 이해될 수 없을 것이고, 신체의 통일은 같은 세계의 펼침에 대해 탐구하는 신체적 작용들의 다양성을 일치하도록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신체의 각 부분들의 통일은 하나의 전체라는 신체 속에서 본질적으로 신체의 공동작용에 의해 이루어지고, 신체는 감각적 장들과 운동들의 차별적 유형들의 통일을 형성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메를로-뽕띠는 촉감하고 보는 능력과 촉감하고 보여지는 사실 사이에 앞에서 언급한 그 이상의 신체적 특성인 가역성을 주장한다. 내가 촉감하고 보는 능력과 나에게 촉감되고 보여지는 사실 사이의 가역성은 나의 의미들이 사물의 성질들과 세계의 특성들에 도달하는 것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러한 가역성은 나의 것과 같이 촉감하고 보는 다른 신체들에 나의 열기를 보증하고, 나의 지각적 장 속에서 타자의 속함이 결코 대상의 현존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신체에 의해서 세계에 열려지는 다른 주체의 뜻을 가진다. 실제로 우리는 자신에 있어서 감각자가 감각될 수 있다는 것, 예컨대 오른손을 촉감하는 왼손이 역시 오른손에 의해서 촉감되어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한다면, 두 손의 상호 접촉에서 혹은 그 손의 신체의 눈 앞에서 역전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는 촉감하는 왼손에 대해 오른손이 꽉 쥐고 촉감하는 힘인 한에서 오른손으로 꽉쥐고, 또한 두 눈이 보는 힘인 한에서 눈으로 본다.


나의 신체의 활동을 불러일으키는 반사성은 타자의 지각적 명증을 기초지우고, 그러한 반사성은 타자가 지각된 사물도 아니고 나의 것의 내부에서 재구성하는 사고도 아니고 지각하는 신체로서 나에게 나타난다는 결과가 된다. 그렇다면 세계로 지향하는 나의 신체의 열기 속에서 타자의 현존을 함축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그 자체 지각하는 주체로서 있는 다른 신체를 지각할 때마다, 나 자신으로서는 내가 감각하는 저편에 나의 경험과 일치하는 감각할 수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한 함축은 세계로 나의 신체의 열기를 감소시킨다. 나의 신체는 지각하는 다른 신체를 지각할 수 있으므로, 세계는 무한히 열려진다. 또한 작용 중인 다른 지각의 개입은 내가 지각하는 세계에 나의 속함을 확실하게 하고, 또 그것을 강조한다. 즉 다른 지각자를 본다는 것은 다른 지각자 자신이 가시적인 것으로서 알려진다는 것이고, 실제로 이것은 다른 지각자에 의해서 보여진다는 것이며, 아뭏든 그것은 내가 감각적 기관들로 경험을 공교히 형성하는 영역 속에 빠뜨려진다는 것이다.


우리 신체의 삶이 우리에게 세계를 드러내는 데에 있다면, 그 삶은 항상 일반적으로 말하는 체험들의 부분적 특성, 생리학적 기능들에 대한 감각적 내용들의 관계성, 지각되는 것의 주관적 구성들, 궁극적으로 유기적인 결핍들과 같은 것들을 연합시키는 습관이 우리에게 있다는 모든 한계들과 더불어 단순히 세계를 향한 우리 신체의 던짐이 아니다. 물론 세계에 대한 의미 발생은 우리 신체의 투사로 말미암아 일어남은 사실이다. 우리 신체는 자기가 지각하는 이 세계의 것으로서, 즉 가시적인 보는 자 또는 감각할 수 있는 감각자로서 붙잡혀지는 가능성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 신체는 모든 반성 이전에 실제적으로 우리가 어떤 세계 속에 있고, 그 세계에 의해서 밝혀질 어떤 척도 속에 있다는 보증을 가질 수 수 없다. 만약 우리 신체가 이 세계의 내부에 관계하고 있다면, 우리 신체는 오로지 세계의 축일 수밖에 없다.


세계의 축인 신체는 고립된 섬나라가 아니라 열려진 섬나라로서 항상 이미 감각 세계와 교착하고 있음과 동시에 자기 자신과 교착하고 있음을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신체의 활동 자체는 그 신체와 감각 세계의 상호 침투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동시에 그 신체는 자신의 활동의 장에서 그 자신을 통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의 신체의 봄의 경우, '나의 신체'와 '나의 신체가 바라보는 세계'는 '스며들어감'과 '스며들어옴'이라는 상호 작용에 의해 뒤섞여 '스며듦' 자체가 있고, 나의 신체는 스며듦 자체인 봄의 장에서 그 자신(원리적으로 가시적인 그 자신)을 통각한다. 신체는 봄의 장에서 파악된 그 자신(원리적으로 가시적인 그 자신)을 통각한다. 왜냐하면 신체가 사물들을 보는 점은, 사물들이 보여지고 감각되는 되돌아감의 결과로서 가시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여진 것과 감각된 것은 일종의 기초지움의 주체로서 여겨진 '나의 신체'에 의해서 결단코 구성된 하나의 광경이 아니라, 이와 같은 신체가 지각하기 시작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내적 변경이다. 그리고 지각은 제각기 이 신체에 배타적으로 뿌리 내려진 작용들의 한 유형 혹은 하나의 작용이 아니라, 그것은 감각적인 것에서 감각하는 존재에 감각적인 것이 일부분을 이루는 과정과 감각된 세계에서 감각자가 나타나는 환경을 확립하는 과정 사이에서 교차의 결과이다.


메를로-뽕띠는 그의 후기 작품들인 {기호들}, {눈과 정신},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에서, 마치 신체에 나타나는 세계와 신체가 일반적으로 같은 종류의 존재의 두 가지 양상들인 것과 같이, 감각한다는 사실과 감각 세계에 의해서 파악된다는 사실 사이에서 이러한 얽힘을 일컫기 위해서 '살'(chair)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또한 감각적인 것은 감각함과 감각됨 사이의 차이성에 의해서 신체 자체에 나누어짐과 동시에 동여매어진다고 일컫고 있다. 이러한 상황들의 조건들에서 내가 나의 것이라고 부르는 현재의 실제적 신체가 의미화하는 영역의 유일한 시작이라고 하는 것은 확실한 것처럼 여겨진다. 또한 이러한 시작은 우리의 신체가 여는 세계가 신체의 성질들과 그 성질들이 유지하는 관계들에 의해서 지각적 경험에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결코 우리 신체의 근본적인 표현 능력에 대한 관념을 폐지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 신체의 열기의 힘이 신체가 탐구하고 해독할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에 의존한다면, 우선 우리 신체는 자신과 관계하는 측면에서 거리를 취하기 때문이고, 다음으로 세계와 단절함이 없이 세계에 선행하는 것에 대한 간격을 줄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보는 자는 가시적인 것이고, 촉감자는 촉감할 수 있는 것이지만, 보는 자와 가시적인 것 혹은 촉감자와 촉감할 수 있는 것은 항상 일치하는 중에 있다면, 가장 하위의 지각이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신체 그 자체가 보는 자임과 동시에 가시적인 것이거나 일반적 양식으로 말하자면 감각자임과 동시에 감각할 수 있는 것인 것과 같이, 간격, 비일치는 단지 세계와 신체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내부에 있다. 달리 말하자면 간격과 비일치는 주체로서의 신체가 객체로서의 대상의 관계적 측면에서 주체와 객체 사이의 간격, 주체와 객체 사이의 비일치가 아니라, 신체가 세계 속에서, 세계로 향하여 감각 지각 활동을 하는 가운데 신체의 주체적 측면에서 간격과 비일치가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신체는 그 자신에 관계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 신체는 그 자체의 다른 모든 고유성들 사이에서 하나의 고유성만을 취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참으로 신체의 존재 양식에 대한 구성적 측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Ⅳ. 세계 표현의 축인 신체

지금까지 세계의 축인 신체가 '신체'-'세계'라는 도식 체계에서 드러나고 있음은 메를로-뽕띠의 철학이 전반적으로 이러한 도식 체계를 토양으로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는 이 도식 체계를 기초로 하여 언어, 예술, 역사 등에 관한 의미의 세계를 신체-주체의 운동에 의해서 펼치고 있다. 신체와 세계의 관계에 있어서 각각은 서로 얽혀서 침전되는 양식을 가진다. 이 점은 신체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 사이에 역동적 변증법이 흐르고 있음이다. 게다가 신체-주체에 있어서 신체와 정신의 의사소통은 세계-속에로의-존재 양식 속에서 "정신주의적 의식으로 돌아감을 의미하지 않는 실존의 변증법"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신체는 항상 자기 투사의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달리 말하자면, 인간 존재는 세계로 항상 자기를 투사하는 존재인가? 인간 존재는 다른 모든 존재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연 세계의 한 부속물에 불과하지만, 그를 다른 모든 존재자들과 동등한 존재의 위치에 놓아 둘 수 없다. 그 이유로서는 인간 존재가 다른 모든 존재자들과 같은 존재적 자연성을 가지지만, 그는 신체-주체로서 항상 신체화되는 자기에 대하여 있고, 자기 동일성을 지속하며, 또한 기호적 의미의 세계를 실재적 의미의 세계로 신체화하면서 존재의 의미를 들추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존재는 항상 여기-세계 또는 저기-세계에서 이미 그러한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관계맺고 있음은 바로 자신을 세계에 침투시키고 있다는 것이요, 이것은 자신을 세계로 향하여 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이러이러한 상황이나 그러그러한 상황에서 어떤 이러한 의미나 어떤 그러한 의미를 생성하고 지평적 삶의 세계의 의미를 쌓아가며 존재를 드러내고 그 자신을 신체화한다.


그래서 세계로 자신을 투사하는 신체의 활동은 이미 자기 표현의 운동이고 의미 생성의 운동이다. "모든 지각, 지각을 전제하는 모든 활동, 요컨대 신체의 인간적 모든 사용은 이미 원초적 표현이고, 기호들의 의미와 기호들의 사용 규칙과 더불어 달리 주어진 기호들의 표현된 것에 대체하는 파생적 활동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기호들에서 기호들을 구성하는 최초의 작용이며, 기호들의 내용과 기호들의 배치의 유일한 힘에 의해서 표현된 것을 기호들에 살도록 한다." 이러한 신체의 활동 자체가 의미 발생의 원초적 표현임을 밝히는 메를로-뽕띠의 깊은 철학적 뜻을 음미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신체가 환경 세계로 끊임없이 자기를 투사하고 있다면, 신체의 자기 투사는 어떤 힘에 의하여 일어나는가? 물론 신체는 자신의 신체적 힘에 의해서 자신을 투사한다. 신체가 자신을 투사한다는 것은 신체 자신이 하고자 한다는 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신체의 투사는 신체의 '하고자 함'으로부터 일어난다. 그래서 신체의 투사에는 이미 신체의 '하고자 함'이 함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내가 모니터 화면에 뜬 정보 자료들을 볼 때, 나의 봄은 이미 나의 '보고자 함'을 함축하고 있다. 더욱이 내가 앉아서 눈을 감고 명상을 할 때에도, 나의 신체는 안으로나 밖으로나 투사를 하고 있으며, 이 투사함에는 안으로나 밖으로나 나의 신체의 '하고자함'이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나의 신체의 '하고자 함'과 메를로-뽕띠의 나의 신체의 '나는 할 수 있음'을 연관지워 볼 때, 그것들을 같은 연결선상에 놓을 수 있다. 왜냐하면 나의 신체-주체의 '할 수 있음'과 '하고자 함'은 신체적-정신적 운동에 관한 원천적 힘으로서 신체-주체의 신체화에 대한 동일적 위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신체-주체의 능동적 힘이지만, 신체-주체의 신체화의 발생적 측면에서 보면, 인과성의 원리에 따라 다가올 결과, 즉 실재성에 대한 가능성으로 있지만, 신체-주체 자체에 있어서는 실재성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삶의 존재론적 영역에서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할 수 있음'이 '하고자 함'보다 앞서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가능성과 실재성을 내포한 능동적 힘으로서는 동일한 양식을 지니지만, 실재성에 의한 가능적인 힘의 발생 영역에서는 신체-주체의 적극적 가능성(가능적 힘)의 의미에서 이 둘을 비교할 때, '할 수 있음'이라는 가능성(가능적 힘)이 그 자체보다 더 적극적 가능성인 '하고자 함'보다 논리적으로 앞선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체-주체의 '행동할 수 있음'에서 가능성의 적극적 의미로 나아감은 신체-주체의 '행동하고자 함'으로 된다.


이 '할 수 있음'과 '하고자 함'의 신체에 대한 세계는 현상으로서의 세계이고, 그 신체는 현상으로서의 신체이다. 현상으로서의 신체, 즉 "현상적 신체는 나의 지향들과 나의 투사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용하는 사실성이다." 메를로-뽕띠에 있어서 이러한 신체의 능동성은 변천의 통합을 실행하는 '나는 할 수 있음'의 통일에서 끌어와진다. 신체화된 주체의 근본성은 정신적 연금술이나 '나는 생각함'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인 감각적 존재와 분리되지 않는" 세계의 살(la chair du monde)의 기초를 이루고 그 살을 가능하게 하고 실제화하는 총괄적인 '나는 할 수 있음'으로부터 나온다. '나는 할 수 있음'으로서 신체-주체의 신체적 운동에 있어서, 주관성은 신체화를 배제하지 않는 자기에 대한 현존의 양태를 가리키고, 주관성과 신체성은 함께 신체-주체에 위치지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메를로-뽕띠에 있어서 주관성이란 '나는 할 수 있다'로 간주됨을 말하고자 한다.


이에 반해 앙리는 메를로-뽕띠와 다른 입장에서 주관성을 규정하고 있다. 바르바라에 따르면, "미쉘 앙리의 본질적 결정은 주관성을 '나는 할 수 있다'는 것(주관성을 근원적으로 신체화된 것)으로 정의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코기토의 존재에 의해서 '나는 할 수 있다'는 것의 존재를 정의하는 데에 있다." 자아의 존재와 주관성의 존재를 동일시하고, 자아는 '할 수 있음'이고 코기토는 '나는 생각한다'가 아니라 '나는 할 수 있다'를 의미한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는 비랑(Maine de Biran)의 입장에 대해 앙리(Michel Henry)는 비랑의 그러한 견해에 대한 깊이란 "코기토를 '나는 할 수 있다'로 결정한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존재, 행동의 존재, '할 수 있음'의 존재가 정확하게 코기토의 존재이다는 긍정에 있다."고 하면서, "근원적인 신체의 존재는 자아의 주관적 존재이고," "신체의 근원적 존재가 절대적 주관성과 동일시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앙리에 있어서 주관성은 절대적 주관성인 자아이다.


메를로-뽕띠에 있어서 '나는 나의 신체이다'는 신체의 존재가 근본적 내재로서 자격을 지닌 '나'의 존재와 뒤섞여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나'는 신체를 의식 앞에서 대상으로 위치지우는 반성적 의식을 의미한다. '나는 나의 신체임'은 '나'라는 존재자가 그 존재자의 신체라는 것('나'는 신체임을 멈추지 않음)을 뜻하고, 주관성의 존재가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초월로서 신체의 존재라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신체화되지 않은 '나'는 같은 '나'가 되지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신체화되지 않는 '나'는 신체를 특성화하는 세계에 대한 침식이 없기 때문에 '어떤 것으로 지향하는 의식'이 되지 않는다.


앙리는 '나는 나의 신체이다'는 것에 대한 해명을 통해 나의 신체의 근원적 존재에 대한 본질적 특성을 밝히면서, 메를로-뽕띠의 애매성의 철학을 벗어나고자 한다. 물론 신체에 대한 그의 철학은 메를로-뽕띠의 현상학적 탐구 가운데에 있다. 이 신체의 근원적 존재에 대한 앙리의 견해는 어떠한가? 앙리는 "'나는 나의 신체이다'는 것은 아주 정확하게 다음을 의미한다. 즉 나의 신체의 근원적 존재는 초월론적인 내적 경험이고, 잇달아 이 신체의 삶은 자아의 절대적 삶의 양태이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나는 나의 신체이다'고 말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신체가 '나는 존재한다'는 내재적 경험과 뒤섞여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말은 '나'는 신체의 양태에 대하여 있고 신체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신체가 나의 것일 것이라는 점은 신체가 나에게 동일적일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앙리의 이러한 입장은 신체적 체험들이 가능적 체험들의 부분이기 때문에, 신체와 자아는 절대적으로 동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앙리는 메를로-뽕띠의 애매성의 철학을 극복하고자 하지만, 그는 메를로-뽕띠와 근본적으로 다른 측면에서 존재적 전제를 깔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메를로-뽕띠는 인간 존재를 신체와 정신의 총체적 존재로 규정하면서, '신체'-'세계'의 관계 속에서 주체로서 신체, 즉 신체-주체를 중심으로 교착배어법적 신체의 요소적 특성을 드러내는 신체적 존재론인 살의 존재론을 나타내고 있음에 반하여, 앙리는 존재론적으로 이원론을 전제하고 있다. 자아의 존재가 절대적 주관성의 존재와 동일시하는 앙리는 신체의 모든 의미들이 귀속하는 자아를 중심으로 한 신체 이론을 묘사하면서, 신체와 자아의 존재론적 대립을 제시한다. 이러한 사실에서 앙리의 신체 이론은 절대적 존재가 의식 내재적 존재라는 방식에서, 절대적 주관성인 자아에 기초하는 신체에 대한 이론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속에로의-존재의 실존적 양태를 드러내는 신체에 있어서 신체화된 주체를 밝히는 메를로-뽕띠의 입장에 서고자 한다. "비랑(Maine de Biran)은 절대적 객관성과 절대적 주관성을 동일시한다. 바로 이 주관성에 앎의 객관성이 기초지워진다. 본체적 주체는 실증되지도 증명되지도 않는다. 즉 이러한 주체는 나를 총괄하는 어떤 것으로서 항상 나의 뒷면에 서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사실과 보편적 가치를 비교하는 이 절대적 주체를 믿을 수 있다." 그런데 "비랑은 심리학을 넘어서고 주체의 경험이 로고스에 대한 단순한 작용이 아니다는 것을 제시하고자 하였지만, 그는 특수를 살리고 그 특수의 이해와 변천을 보편에 제시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비랑에 대해 비판을 가한 메를로-뽕띠의 신체 이론에 대한 앙리의 입장은 한편으로는 다시 비랑주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나는 나의 신체이다'에 관해 앙리의 견해보다는 메를로-뽕띠의 입장에 서서 신체적 운동과 의식의 상관관계를 통해 '초월론적 신체화된 자아'(l'ego incarn transcendantal)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신체의 신체화와 의식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신체는 항상 세계 속에서 이미 여기에 또는 거기에 있는 존재이다. 이와 같은 신체는 "세계의 매개자로서" 세계 속에서 무엇으로 지향하면서 그 무엇을 신체화하고 자기를 깨닫기 때문에, 신체화는 의식을 세계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 신체는 의미의 가능적 세계와 대화하면서 의미를 발생시키고 형태화한다. 이 신체의 신체화는 세계 속에서 형태화되는 의미가 있는 한에서, 의식의 의미적 활동을 보증한다. 그럼으로써 세계-속에로의-존재의 한도 안에서 신체화된 의식은 전적으로 순수 '나'가 아니다. 메를로-뽕띠는 "이러한 의식은 근원적으로 '나는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할 수 있다'는 것이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순수 '나'가 아니라 '나는 할 수 있음'으로서 의식은 세계 속에서 그 자신의 밖으로 지향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이 의식은 신체적 운동에 의해 세계로 지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신체적 운동의 운동성과 의식은 어떠한 상관관계에 놓여질 수 있는가? 신체적 운동은 단순히 표상의 운동이나 의식의 운동이 아니다. 신체는 운동 가능한 세계의 일부이지만, 그 세계와 차이나기 때문에, 그 세계로 그 자신을 항해해 갈 수 있다. 신체가 운동가능한 세계로 항해할 때, 신체로 '운동함'은 '신체의 운동'과 결코 분리될 수 없고, 그 운동에 점착되어 있다. 예를 들면, 항해사가 산호초를 볼 때, 항해사의 '봄'은 그의 '눈 운동'과 결부되어 있다. 메를로-뽕띠는 이 운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즉 "나의 운동은 정신의 결정이 아니고, 주관적인 밑바닥으로부터 연장 속에서 기적적으로 실행된 장소의 어떤 변화를 명령하는 절대적 향함이 아니다. … 나의 운동은 스스로 펼쳐진다. 나의 운동은 자기에 대하여 무지에 있지 않고, 자기에 대하여 눈이 멀지 않으며, 자기로부터 빛난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가 운동 자체와 결부되어 있음과 자기는 자기 자신의 운동임을 지적할 수 있다. 바르바라에 따르면, "자기는 운동에 외부적이 아니라, 반대로 운동을 경과한다. 즉 운동은 바로 자기의 범위 안에서 움직인다. 그런데 운동은 자기로부터 시작하고 능동적으로 초월된다." 궁극적으로 세계 가운데에서 신체의 운동은 바로 신체-주체에 의한 세계의 펼침이고, 그 운동은 신체와 세계의 상호 침투 속에서 세계에 대한 신체-주체의 자기 운동이라고 말해 본다. 이와 같은 신체적 운동에 있어서 운동성은 현상성의 새로운 의미를 드러내는데, 이 운동성은 신체적 지향성과 동의적이다. 또한 '나는 생각함'이기 이전에 '나는 할 수 있음'으로서의 의식은 신체화되는 한에서, 순수 자동-감정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탈존이고, 그것은 신체적 지향성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신체-주체의 실존적 양식으로서 세계-속에로의-존재라는 범위 안에서 신체적 운동과 더불어 운동성과 의식은 존재론적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


이상에서 신체적 지향성은 고유한 신체의 본질적 특성으로 드러나고, 그 신체의 실존은 신체와 의식 사이의 중도에서 이 신체적 지향성의 표현이 되며, 신체적 운동성과 신체화된 의식은 존재론적인 동일적 상관 관계가 되고 있음으로써, 신체-주체에 있어서 코기토의 존재는 운동의 존재가 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체-주체의 코기토는 신체의 지향적 운동과 점착되어 있는 것으로서, 세계와 교착하는 신체의 삶과 함께 나아가는 코기토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측면에서 메를로-뽕띠가 말하고자 하는 코기토는 신체적 삶의 코기토이고, 이러한 코기토는 암묵적 코기토이다. "암묵적 코기토는 자기에 대한 자기의 현존이고 실존 그 자체이다." 신체적 삶의 코기토는 순수 의식으로서 존립하는 코기토가 아니다.


또한 신체의 자아는 신체의 지향적 운동과 함께 하는 신체적 자아로서 절대적인 순수 의식이 아니다. 그 자아는 지속적으로 세계와 교착하는 신체의 운동에 의한 신체적 삶이라는 지평에 뿌리를 두는 자아이고, 그것은 신체 자신과 그 자신의 삶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신체화된 자아'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신체의 자아는 우리의 모든 삶(모든 지각, 모든 경험, 모든 의미 등)에 대한 존재론적인 실재적 가능성을 함축하는 '신체화된 자아'이다. 이상과 같은 근거에서 우리는 "철학의 중심은 더 이상 자립적인 초월론적 주관성이 아니다."고 하는 메를로-뽕띠의 말을 제시하면서, 신체의 자아란 순수한 절대적 자아가 아니라 '초월론적 신체화된 자아'라고 말하고자 한다.


궁극적으로 신체적 삶의 지평 속에 근거하는 신체-주체에 있어서, 신체와 의식의 지향적 작용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음은 사실성 그 자체이다. 나는 항상 이미 세계 속에서 세계로 나아가 나 자신을 세계화하고 신체화된 세계의 존재가 되고, 동시에 세계는 나에게 침투된 존재로서 '나화'(나의 신체화)된다.


Ⅴ. 맺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신체'-'세계'라는 도식 체계 아래에 기초하고 있는 메를로-뽕띠의 현상학적 신체 이론에 있어서, 신체와 세계의 상호 침투적 그물 관계 속에서 신체가 세계의 축, 세계 표현의 축임을 밝혀 왔다. 우리의 신체는 끊임없이 자신의 모든 기관들을 환경 세계로 펼쳐서, 그 기관들에 상응하는 자극들을 신체화하여 의미로 형성한다. 이러한 자극들은 단순히 모자이크식 신체화의 의미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각 신체 기관들의 기능에 적합하게 수용된 자극들은 그 기관들의 상호 작용과 신체 자신에 의해 총체적으로 신체화되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세계는 우리의 신체에 대한 세계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의 신체는 정보에 대한 기관임을 지지하는 것이 허용되는 이 가능적 신체가 아니라, 내가 나의 것이라고 부르는 이 실제적 신체, 즉 나의 말과 행동에서 침묵으로 자기를 지키는 파수꾼"에 대한 세계이다.


그래서 우리의 신체는 '우리의 것인 우리의 신체'로서 항상 세계로 지향하여 의미를 생성하는 존재이다. 게다가 신체의 이중 감각들에 대한 메를로-뽕띠의 견해는, 나의 신체의 부분들 간의 접촉에 있어서 각 신체의 부분은 서로 감각자임과 동시에 감각되는 것의 존재이고, 나는 접촉하고 있는 신체의 부분들이 감각하고 있음을 안다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우리는 이 신체의 부분들 간의 접촉이라는 사태 그 자체와 '능동성-수동성'의 존재를 통각하고, 이 모든 활동 자체가 '나화', 즉 '나'가 되는 신체화이며, 나의 신체들 간의 '나화'는 나의 자기 신체적 실존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나의 신체는 세계의 축으로서 고립된 섬나라가 아니라, 끊임없이 나의 감각 세계와 교착하는 열려진 섬나라이다. 세계를 열고 자신이 열리는 섬나라의 모든 삶은 언제나 자기의 삶의 세계를 펼치는 원초적 표현이요 의미 생성의 운동이다. 그렇지만 이 섬나라에는 자신의 측면에서 항상 고유한 특성으로 있는 간격과 비일치가 존재한다. 그래서 세계로 자기를 투사하는 신체는 현상적 신체로서 간격과 비일치 속에서 지향적 삶의 세계의 의미들을 형성한다. 이러한 신체는 자신의 능동적 힘인 '할 수 있음'과 '하고자 함'을 드러내는 신체이다. '할 수 있음'과 '하고자 함'으로서 신체의 코기토는 세계와 교착하는 신체의 지향적 운동과 더불어 운동하는 신체적 삶의 코기토이고, 절대적인 순수 의식이나 절대적인 순수 자아가 아니다. 또한 신체의 자아는 절대적인 순수 자아가 아니라, '할 수 있음'과 '하고자 함'으로서 신체화되는 신체적 자아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체의 자아를 '초월론적 신체화된 자아'로 간주하고자 한다. 이 '초월론적 신체화된 자아'와 '하고자 함'에 관련된 문제는 앞으로 더욱 연구되어야 할 과제임을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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