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해석학과 해체주의 : 가다머와 데리다의 논쟁

나뭇잎숨결 2024. 11. 26. 08:30

해석학과 해체주의 : 가다머와 데리다의 논쟁

 

 

 

정기철

 

 

1. 들어가는 말

 

해석학사에서 가다머와 관련된 논쟁사를 정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논쟁사를 정리하다보면 해석학에서 논의되고 있는 주요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쉽게 알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가다머와 관련된 주요 논쟁은 서너 번 있었다. 제일 먼저, 해석학의 객관적 요청을 주장한 베티와 “해석학은 더 이상 방법론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가다머 사이에 60년대 초반에 있었다. 그 다음 “전승된 전통에 대한 비판과 수용” 문제로 하버마스와 가다머 사이에 이데올로기 비판과 해석학 논쟁1)이 60년대 말에 있었다. 그리고 80년대에 들어서도 “이해의 통일과 이해의 다름”에 대한 논쟁이 데리다와 가다머 사이에 있었다.

 

이미 여러 해석학자들에 의해 고전 해석학이 성서 해석학, 문헌 해석학 그리고 법률 해석학에 뿌리를 두고 있음이 설명되었다. 슐라이어마허는 문법적 그리고 기술적 이해에 기초한 보편 해석학을 구축했다. 딜타이는 정신과학을 정초시키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해석학을 체계화했다. 하이데거와 가다머는 해석학을 더 이상 방법론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존재론적 해석학 그리고 철학적 해석학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리꾀르는 해석학의 여러 분과에의 적용 타당성을 논증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무엇보다 리꾀르는 60년대부터 해석학의 문학과 역사학과 성서 해석학에로의 적용 타당성에 대한 논증을 했다. 그리고 60년대에 하버마스는 해석학을 사회과학을 위한 방법론으로서 체계화했다.

 

이러한 해석학사의 와중에서 타자 이해 문제가 중심 소재로 등장하게 된 것은 리꾀르에게서이다. 그는 ;시간과 이야기(1983-5) 그리고 ‘남으로서의 자기 자신’(1990)에서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그리고 해석학은 해체주의와의 만남을 통해 타자이해의 문제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 레비나스가 말한 절대적 타자에 대한 이해 불가능성은 해석학에 큰 도전이었다. 데리다도 레비나스의 영향 하에 있기 때문에 해석학적 타자 이해에 반기를 들고, 타자는 가다머가 말하는 것처럼 이해 지평에서 통일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해의 통일, 곧 이해의 지평융합 속의 통일보다 이해의 차이를 데리다는 강조한다.

 

본래 가다머와 데리다와의 논쟁은 프랑스 해체주의와 독일 해석학 사이의 만남을 주선한다는데 주최 측의 의도가 있었다. 또는 독일 해석학을 프랑스에 소개하는데 있었다고 말해야 옳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1981년 4월 25일 파리에 있는 괴테 인스티튜트에서 가다머가 텍스트와 해석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고 그 다음날 데리다가 질문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가다머는 1985년에 ‘파괴와 해체주의’를 1987년에 ‘초기 낭만주의, 해석학, 해체주의’를 그리고 1988년에 ‘해체와 해석학을 발표했다. 이런 논문들을 통해 가다머는 해체주의가 해석학의 근본취지를 부정한 것에 대해 분명하게 잘못되었다고 반박한다. 그리고 해체주의의 주장, 예를 들면 다양한 삶의 영역들을 하나의 체계 속에 통일시킬 수 없다는 주장이 전적으로 부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비판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들은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 버렸을 뿐 아니라, 긍정적인 대안을 누구나 인정하게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 만남의 영향은 계속되었다. 예를 들면 하버마스와 데리다의 관계가 그 예이다. 하버마스는 해체주의가 주창한 삶의 형식들의 복수성과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 복수성과 차이를 통일시킬 이성을 버리면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며 데리다를 비판한다. 이에 데리다 또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궁극적 정초가 형이상학적 전통에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는 자칫 독일과 프랑스와의 대립, 즉 독일 철학에 대한 프랑스 철학자들의 주요 공격으로 비춰지기까지 한다.

 

이 만남에 대한 평가도 여러 가지이다. 가다머와 데리다의 만남에서 강연된 것들을 책으로 편집했던 포제(Forget)는 이 논쟁을 “있음직하지 않는 논쟁”이라 했다. 그리고 킴메를(Heinz Kimmerle)은 심지어 이 논쟁을 “끝이 없는” 논쟁이라고 까지 했다. 가다머와 하버마스 사이의 논쟁에 대해 각자 서로 다른 입장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따라서 결론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듯이, 가다머와 데리다의 논쟁도 결국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다머의 입장에서 데리다의 비판을 문제 삼아 데리다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와 반대로 데리다의 입장에서 가다머의 논지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역시 많이 있다.

 

이 글은 두 사람사이에 논쟁과 만남을 통해 제기된 문제거리를 또는 그 만남을 통해 얻은 결실을 해체주의적 입장에서보다는 해석학 일반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그리고 해석학을 통해 지적하고자 한다.

 

더구나 이 논쟁과 만남은 그 과정과 결과에서 긍정적 요소들뿐 아니라, 부정적 면들까지도 함께 드러났다고 여겨진다. 그런 뜻에서 상호 간에 오해가 있었음을 지적하고 한다. 그리고 서로의 주장과 질문들의 정당한 근거도 더불어 논구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글은 분명 무엇보다 이 논쟁을 통해 드러난 문제점을 해결하려는데 그 본뜻을 둔 게 아님이 분명하다.

 

오히려 새로운 개념을 제안하고 한다. 그 새로운 개념을 해체주의적 해석학이라 칭하고자 한다. 이 새로운 개념을 통해 해석학의 새로운 탐구영역인 그리고 이 만남과 논쟁을 통해 해명되어야 할 것으로 제기된 타자 이해 가능성을 논구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새로운 개념을 제안한 이유이다. 이 새로운 개념을 통해 진정한 타자 이해 가능성을 해명해 보겠다라는 말은 그들이 아닌 우리, 즉 유럽 문화권이 아닌 한국 문화권을 이해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며, 그 이해가 올바를 수 있는가를 논구해보겠다는 뜻과도 관계된다.

 

 

2. 가다머와 데리다 논쟁의 공통적인 출발점

 

2-1. 하이데거의 니체해석

 

가다머와 데리다 사이의 공통적인 출발점은 무엇보다 하이데거의 니체해석에서이다. 가다머와 데리다를 까뿌토(John D.Caputo) 는 “우-좌 하이데거주의론자”라고 까지 했다. 그러나 가다머와 데리다 논쟁의 공통적 출발점을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가다머는 후기 하이데거 철학에 기조하고 있는 반면, 데리다는 니체해석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가 후설과는 늘 대립하지만 하이데거의 영향을 초기에 받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를 출발점으로 했다는 의미에서 가다머는 데리다와 같은 선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먼저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살펴보자. 그러고 나면 하이데거의 그러한 형이상학을 가다머와 데리다는 어떻게 수용, 발전시켰고, 그리고 비판, 배제했는지가 분명해질 것이다.

 

하이데거는 니체를 서구 “형이상학을 완성한 사유가”로 규정한다. 이때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을 “전체 속에서의 존재자” 에 대한 통일성의 사유를 추구함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니체의 힘에의 의지를 하이데거는 “동일자의 영원회귀의 인식원리”라 했다. 더 나아가 니체의 영원 회귀를 하이데거는 “전체 속에서의 존재자의 양식”으로 보고, 이 존재자의 전체성을 힘에의 의지로, 영원회귀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이데거는 니체 자신의 동일자 자체에의 영원한 회귀를 추구했다고 해석한다. 이 동일자의 영원회귀는 니체에게 있어서 여러 다른 단어들과의 상호관련 속에 있다. 즉 동일자의 영원회귀는 힘에의 의지의 존재방식이고, 모든 가치 전도가 곧 힘에의 의지이고 초인은 힘에의 의지의 수행자라는 것이다. 이런 니체해석에서 하이데거는 니체의 동일자의 영원회귀를 사실 논리-신학주의 전통 선상에서 이해한다.

 

노리-신학주의란 논리 중심주의를 그리고 로고스 중심주의를 뜻한다. 이를 철학사에서는 전통의 형이상학이라 칭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을 “존재-신-론”이라 하여 수행했던 존재물음을 하이데거가 존재의미 물음으로 대행한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렇다고 하이데거는 결코 신학적 물음을 그의 철학의 주제로 다루지는 않았다.

 

하이데거가 1921-22년 겨울 학기에 종교 현상학이란 이름 하에 종교 문제를 특히, 기독교의 문제를 강의하긴 했다. 그러나 이 강의도 반학기나 지난 크리스마스 이후에 강의에 참석했던 학생들이 학장에게 항의했기 때문에 하는 수없이 데살로니가 편지의 주석을 다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절“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이란 구절을 통해 비록 ‘존재와 시간’에서는 아직 정확하게 모사되고 있지는 않았지만, ‘존재와 시간’에서의 현존재의 미래성을 곧 현존재의 존재를 특징화하는 현재가 아닌 미래에 대한 강조를 하이데거는 논증했다. 이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하이데거의 철학은 분명 존재 신학이라 할 수 있는 존재 형이상학이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파괴에 대해 말한다. 형이상학의 극복은 “형이상학의 형이상학적 해석의 포기”를 뜻한다. 이는 무엇보다 전통 서양 형이상학으로부터 완전히 새로운 방향인 “존재 사유에로의 도약”을 뜻한다. 가다머에 따르면 이때의 형이상학의 극복은 데리다가 이해한 것처럼 결코 파괴로서가 아니라 형이상학의 은폐의 철거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의 위기중의 위기가 사유하는 존재인 인간이 더 이상 사유하지 않는데서 온다고 보고, 이 같은 총체적 위기를 극복해야 할 필요가 절실해 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바로 서양 형이상학이 극복되어야 할 필연성이 있는 것이고, 이는 바로 또 다른 존재 사유의 과제가 설정되어야만 될 이유가 된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속에 오성개념의 도식주의를 다룬 장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이 보여주는 바는 형이상학의 극복이다. 칸트는 이미 범주들과 그 범주들의 통일을 영원하고 변화하지 않는 원칙으로보다는 시간 속에서 그리고 시간을 통하여 변화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어떻게 존재가 변화하는 시간 지평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가지는가이다. 다시 말해서 사유의 끊임없는 관점에 따른 변화, 곧 시간 속에서 늘 변화하는 관점의 변화를 말하는 것 자체가 형이상학의 극복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칸트와 관련한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의 극복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칸트와 관련한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의 극복에 대한 생각이다.

 

하이데거는 니체에게서 형이상학의 완결을 보았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니체 철학의 존재 역사적 위치를 존재 역사로서의 형이상학에 두었다. 하이데거는 니체가 존재의 통일성을 추구했다고 보았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에 대한 가다머와 데리다 사이에 평가가 어떤지 살펴보자.

 

2-1-1. 가다머의 하이데거 니체해석의 수용-존재의 형이상학

 

가다머 자신 또한 자신의 해석학 개념이 자기 스승인 하이데거에게서 온 개념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초기의 선험 기초 존재론적 의미가 아니고, 후기 하이데거, 곧 예술 작품과 시적언어 해석과 관련되어 있다. 특히 후기 하이데거에게서 밝혀진 휄더린의 ‘우리가 대화라는 사실’ 개념은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제3부에서의 언어 해석학의 존재론에로의 전환을 가능케 한 모티브이다.

 

가다머는 후기 하이데거의 니체해석과 일치한다. 하이데거의 니체해석이란 니체의 힘에로의 의지를 동일성에로의 영원회귀라 본 것이다. 가다머 또한 하이데거의 니체해석처럼 니체의 힘에로의 의지를 일자와 동일성에로의 의지라 보았다. 그리고 이 동일성 철학이 존재의 전통적 형이상학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가다머에 따르면, 물론 데리다도 마찬가지이지만, 고대 철학사로부터 지금까지 전통 형이상학은 존재 문제를 형이상학 안에서 다루었으며, 동일성 문제로 환원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하이데거의 니체해석 곧 니체는 존재의 형이상학자라는 하이데거의 규정에 대한 가다머의 긍정을 뒷받침하는 논지이다.

 

2-1-2. 데리다의 하이데거 니체해석의 비판- 현재의 형이상학

 

그러나 데리다는 이러한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을 반대한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에 대한 가다머의 수용과 긍정을 반대한다. 그리하여 결국 하이데거나 가다머의 니체 해석을 해석학의 증후로 이해한다. 데리다는 니체의 영원회귀가, 하이데거에게서처럼, 전체성 사유 속에서 불가능하다고 본다. 데리다는 니체의 힘에로의 의지가, 하이데거가 이해한 것처럼, 일치성보다는 관점의 복수성을 뜻한다고 본다. 관점은 끊임없이 스스로 변화한다. 즉 이해지평의 다양성이다. 그런 뜻에서 데리다는 지평융합, 이해 통일성, 해석 통일성 등을 부정한다. 이와 반대로 그는 해석의 원근법을 주장했다. 따라서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 곧 전통적 형이상학에 기초하는 동일성 철학을 반대한다. 동일성 철학보다 차이와 차연의 철학을 말한다. 따라서 다름이나 여러 가지가 동일에로 환원되는 것을 거부한다.

 

하이데거가 ‘동일성과 차이’에서 밝힌 일자와 동일성 철학을 데리다는 거부한다. 왜냐하면 데리다에 따르면 “차이가 존재 자체보다 더 나이를 먹었는데도” 동일성 철학이 이것을 잊어버리고 존재 문제에 집중했으며, 더 나아가 차이나 여러 가지임을 일자와 동일성안에서만 파악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데리다에 따르면 가다머 역시 전통 존재 형이상학의 일맥에 서 있다. 그래서 데리다는 ‘목소리와 현상’에서 가다머의 해석학을 하이데거에게 있어서처럼 로고스 중심주의 그리고 소리중심주의라 했다.

 

가다머는 그러한 비판을 잘못된 비판이라 보고 오히려 데리다의 기호 이론을 “현재의 형이상학”이라 보았다. 그리고 이 현재의 형이상학을 “순수한 오해”라 했다. 왜냐하면 데리다는 문자는 읽혀져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서도 해석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언표화되어야 하다는 사실을 분리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이해가 ‘이해’라는 낱말 자체 안에 ‘누구를 보증하다’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이해의 차이를 이미 가다머가 ‘진리의 방법’에서 강조했고 더 나아가 “이해하는 자는 그가 대체로 이해하고자 원할 때 다르게 이해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는데도 동일성 또는 통일성을 추구한 전통 형이상학으로 자기의 철학을 규정지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데리다가 이해하듯이, 해석의 통일성의 이념이 지평융합 속의 공통의 이해 개념에서 찾아 질 수 있으나, 이 지평융합은 데리다가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게 통일화가 가능한 하나에서가 아니라, 계속되는 대화 속에서 일어난다고 가다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정신(geist)이란 낱말의 형용사인 geistg를 형이상학적, 존재신학적 차원에서 강요했고, 그리고 트라클(Trakl)에 대한 담론에서 “정신의 불꽃” 이라는 낱말과 더불어 사용했다. 데리다가 ‘정신’이란 개념과 더불어 밝힌 것은 이 개념이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특히 ‘존재와 시간’이후로 정신이란 개념을 피하면서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즉 ‘존재와 시간’에서 늘 인용부호와 더불어 정신적 그리고 정신성 개념을 사용하나, 정신을 순수한 내면세계의 영역으로만 여기지 않으면서도 , 이 정신이 “시간성의 근원적 시간호로 실존한다.”라고 보았던 것이다.

 

하이데거는 정신을 초기에 인용부호와 더불어 사용하면서 시간과 관련하여 이해했으나 ‘언어의 도상에서’부터는 인용부호 없이 “정신의 불꽃”을 말하면서 정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정신의 불꽃”을 통해 하이데거는 정신이 독일대학의 자기긍정과 독일 민족의 역사 그리고 독일 민족의 정신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러한 정신개념의 사용은 초기의 구분을 무시하고 혼용하여 사용되어 왔다는 것이다. 기독교적 의미를 가지는 이 단어를 하이데거는 기독교적 의미와는 다른 뜻에서 그리고 근대 철학적 의미와는 다른 뜻에서 존재론적 존재 물음과 연관시킨다. 그리고 인용부호없는 정신을 불꽃이라 하였다. 이렇듯 비기독교적인 Geidtlichkeit와 물질과 감각에 반대되는 의미의 Geistigkeit가 합쳐짐을 통해 독일 민족의 역사적 정신적 힘이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이데거가 독일의 국가 사회주의(Nazi)를 정신화했다는 비판을 가할 수 있다고 본다.

 

하이데거는 프라이브르그 대학의 1929-1930 년 겨울학기 강연에서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것을 정신이라 했다. 따라서 데리다는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것이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정신이라면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밝히려고 했던 세계 안에 있는 존재는 결국 정신적 존재가 아니냐고 묻는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이데거의 철학은 정신철학이 될 수 잇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동물이 가지고 있지 않은 정신을 인간만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정신을 주제로 한 그의 철학은 인간 중심적 철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때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정신이란 공통정신이고 근원적으로 하나이게 하는 통일이다. 정신이 불꽃이라 할 때 정신이 스스로를 불사르면서 불붙인다는 것을 스스로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데리다는 이러한 정신 개념에서 자기 분열을 본다. 즉 하이데거처럼 정신의 공통성 또는 모음(Versammulung)보다는 정시의 차이를 본다. 다라서 데리다의 비판의 주요요지는 하이데거가 특히 트라클에 대한 담론에서 “정신의 불꽃”을 탈 기독교적 입장에서 정신개념을 사용했다. 하지만, 여전히 정신 개념을 사용한 정신의 형이상학자라는 것이다.

 

2-2 현상학의 해석학에로의 전환

 

데리다 역시 리꾀르처럼 해석학적 현상학- 마치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현상학처럼-에 대한 논구를 시발로 그의 철학 탐구 작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내 그는 후설 현상학의 비판과 더불어 그의 철학적 작업을 시작한다. 그의 후설에 대한 비판은 주로‘목소리와 현상‘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며,’문자학에 대하여‘와 ’문자와 차이‘에서도 부분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데리다는 후설의 ‘논리연구’에서의 표현과 의미의 통속적 고착화를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후설은 결코 표지일수 없는 표현이 이상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의식체험 속의 근원적 의미를 구성하는데 관심을 가졌던 후설은 목소리에서 나오는 표현과 표지를 구분했다. 표현은 의식의 내면적 독백, 곧 “영혼의 고독한 생명”으로서 의미와 관계한다. 이 내면적 독백을 데리다는 “현상학적 목소리”라 불렀다. 목소리 현상은 현재의 표현이고, 그 표현은 관념적 의미를 가진다.

 

현상학적 의미 표현은 언표된 진술에서 일어나고 , 이 언표된 진술이 말하는 것이기에 의미해석은 읽기에서가 아니고 듣기에서 일어난다. 말은 소리로 표현되고 그 소리는 “세계의 부재 속에서도 말하며 자기 현존과 스스로 듣기를 계속”한다. “자기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는” 내면적 독백은 의식 안에서 일어나며 의식안의 내면적 소리는 영혼의 고독한 생명을 가능케 한다. 다시 말해서 표현은 의미를 가지는데 의미는 스스로 말하고자 함이고 결국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이다. 이 자기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는 것 또한 나의 의식에서 형성된 것 밖에는 스스로 말하거나 듣지 않기 때문에 이를 데리다는 “자기-애정”(I'auto-affection)이라 했다.

 

데리다에 따르면 표현은 외면화의 속성을 지니는데도 후설은 그저 내면화로만 이해하여 표현을 내면의 음성으로 보아 이 음성을 스스로 듣는다는 식으로 몰고 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설에게 있어 목소리 현상은 일상적인 말과 구분된다. 그리고 의식 속에서 구성된 대상이 목소리와 일치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관념화와 목소리의 상호 연관성이 추구된다. 후설이 기호라는 낱말이 어떻게 이중 의미를 가지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표현과 표지를 나누었지만, 데리다는 모든 기호는 관념적 내용과 표지적 기능을 동시에 갖는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중 의미의 성격을 강조한다.

 

데리다는 후설의 현상학의 이념이 “살아있는 현재의 선험적”에 기초하고 있다고 본다. 이 선험성은 “의식 내부에서 세계에 있는 대상들의 존재를 관념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더 나아가 데리다는 이 후설의 현상학의 이념을 의식의 동일성 속에 보편적 진리를 구하려고 하는 유아론으로 보고, 이 유아론이 “타자를 중성화”시켜 버렸다고 후설의 현상학을 비판한다. 물론 후설도 타자를 말하나 데리다는 그 타자를 결국 “자아의 의식이 구성하는 지평에 불과하다”고 본다.

 

데리다가 궁극적으로 이해하는 후설의 철학은 전체성만을 추구하는 동일성의 철학으로서 “관념성의 형식 속에 담겨있는 현재의 형이상학”이다. 이러한 형이상학 안에는 영혼의 고독한 생명인 독백만이 있다. 즉 현실과의 상호 소통은 없어지고 내면적 자기의식의 소리만을 스스로 듣는 현상학적 목소리만 있다. 이 현상학적 목소리는 내면적이어서 타자와의, 사회와의, 문화와의, 역사와의, “상호소통”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영혼의 고독한 생명이 내적 독백이라 할지라도, 그 내적 독백이 사회나 문화, 문맥과 선이해 없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데리다는 현상학적에서 벗어나 해석학에로 전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현상학적의 해로의 전환이 뜻하는 것은 어쩌면 리꾀르가 말한 바대로 현상학적이 참으로 현상학적답게 되려는데 그 뜻이 있다. 현상학적은 그 안에 해석학적 요소를 이미 내포하고 있으며 해석학은 현상학으로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현상학적 환원을 거쳐 남은 것은 영혼의 고독한 생명뿐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후설에게서의 영혼의 고독한 생명이 해석학이 말하는 것처럼 세계, 역사, 타인 등에 의해 매개된 것이라는 것이다. 데리다의 표현을 따르자면 그것은 흔적으로서의 여러 요소들의 복합이 삽입된 독백이다. 해석학에서는 이를 해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단지 속으로 혼자서 말할 뿐이지 그 내용은 이미 여러 요인들에 의해 해석되어야 할 복합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설에게 있어서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이 가장 순수한 내면성이지만 흔적 없는 순수한 내면성이란 없다는 것이다.

 

이 때 흔적이란 데리다에게 있어 텍스트의 짜깁기이다. 텍스트 개념은 해석학의 주제 개념이다. 여기서 현상학의 해석학에로의 전환의 또 다른 요소를 우리는 데리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데리다에게도 가에게서처럼 현상학의 해석학에로의 전환이라는 공통적인 출발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2-3 관념론과 의식철학에 대한 비판

 

가다머나 데리다의 또 다른 철학적 출발점은 관념론과 방법론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가다머는 자신의 대화 속의 언어의 근원 현상에 대한 이론을 하이데거에 의해 수행된 주체 개념에 대한 비판과 관계시킨다. 관념론과 의식철학의 주제였던 주체 개념에 대한 비판이 가다머나 데리다의 출발점이었다. 이점에서 해석학과 해체주의는 동일성을 가진다.

 

헤르더 이래로 우리는 이해에서 주어진 의미를 밝히려는 방법론적 수행이념을 잘 알고 있다. 해석학 역시 낭만주의 시대에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이해되었다. 심지어 딜타이도 정신과학의 방법론으로서의 해석학을 체계화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기존의 인식론이 대상 인식에 그 기반을 두는 반면, 해석학은 텍스트 해석에 그 기반을 둔다. 텍스트 해석은 그러나 인식론과는 달리 물리적 대상이 정밀 지각과 별도로 존재하느냐 등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인식론이 확실성의 기초를 추구한 반면, 해석학은 절대적 의미 불가능성을 밝힌다. 기존의 인식론이 그 확실성을 플라톤 이래로 말과 목소리에 둔 반면, 해석학은 문자와 읽기에 둔다. 관념론과 의식철학이 해석과 무관한 순수자아나 확실성을 추구한 반면, 해석학은 자기해석과 자기이해 없는 순수성 또는 궁극적 정초는 없다고 말한다. 해체주의 역시 이런 점에서 해석학과 동일하다.

 

데리다의 관념론과 의식철학에 대한 비판은 주체성의 해체에서 시작한다. 그는 관념론과 의식철학에서의 자기의식을 자기 동일성보다는 자기현존으로 이해한다. 즉 자기 동일성보다는 차이를, 궁극적 자기 초월성보다는 자기 현재를 추구한다. 그렇다고 해석학과 해체주의가 관념론과 의식철학을 비판하는 과정과 그 비판의 정도에 있어서까지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3. 가다머와 데리다 논쟁의 주요 문제점

 

지금까지는 주로 가다머와 데리다 논쟁의 공통 출발점에 대해 논했다. 그들은 하이데거의 니체해석에서 출발했다. 비록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에 대한 긍정과 부정 양면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출발점이 하이데거 니체 해석에 있었다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그들은 현상학을 벗어나 해석학에로 그 진로를 바꾸었다. 그렇다고 데리다가 해석학자라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는 데리다가 논한 여러 사상들 중에 해석학과 동일한 점들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더 나아가 관념론과 의식철학에 대한 비판에 그들의 공통점이 있다.

 

그러면 이제 가다머와 데리다 논쟁의 주요 문제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는 가다머의 보편 해석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데리다의 해체주의가 무엇인지가 분ㄴ명하게 밝혀져야 될 것이다. 그러한 각각의 주장들에 대한 상호 질문들과 대답들이 해명되는 게 순서라 생각된다.

 

 

3-1. 해석학의 보편성과 해체주의의 텍스트주의

 

3-1-1 가다머의 해석학- 해석학의 보편성

 

가다머는 결코 해석학을 통해 정신과학의 방법론을 체계화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정신과학의 고유한 방법은 없다.” 자연과학이 고유한 방법론에 기초하듯이, 정신과학도 “정신과학적 인식의 진리요청”을 위해선 나름대로의 고유한 방법에 정초해야 한다는 생각은 “근대 과학의 방법론 이념”에서 기원한다고 가다머는 생각했다. 가다머는 자신의 해석학에서 이해를 결코 방법론 개념으로 보기 보다는 “인간 삶 자체의 근원적 존재 특성”으로 본다.

 

이해는 철학적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 &31에서 말한 바처럼 “실존적 존재”의 양태이다. 그래서 가다머는 이해를 “인간 현존재의 범주적 근본규정”이라 했다. 이해는 근대과학 방법론 이념의 종착점이었던 주체성의 행위가 아니라, “전승 사건에로 들어감”이다. 이는 이해가 더 이상 방법이기 보다는 존재론적 사건임을 말한다. 이 점에서 그는 해석학이 소위 정신과학의 방법론적 토대라기보다는 “철학의 보편적 면”임을 제시했다.

 

해석학의 보편적 면이란 해석학이 철학적 해석학임을 뜻한다. 쟝 그레시는 철학적 해석학이 보편 해석학일 수 있는 근거를 가다머가 “모든 인간의 태도 방식”에 연관시켰다고 설명한다. 이는 결코 “하나의 절대적 입장” 이를테면 보편타당성이나 절대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절대적 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절대적 진리가 우리에게는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철학한다. 따라서 보편 해석학이란 “인간의 보편적 세계 이해”를 말한다. 그리고 인간의 보편적 세계이해를 “형식적 논증 일반의 진리요청”에 따라 세우는 것이다.

 

우리가 텍스트를 이해하려 애쓴다는 말은 “타자가 말한 것”의 사실성을 타당화하려 애쓰는 것을 뜻한다. 즉 저자의 정신적 파악이라기보다 타자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관점에로 진입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늘 대화에서 새롭게 바뀌고 또 새로운 관점을 수용하면서 계속 변화 발전해 가는 것이다. 새로운 관점을 수용하고 발전시킨다는 말은 “완성된 이해”에서보다는 “가장 고유한” 이해를 해석학적 순환속에서 추구한다는 것이다. 해석학적 순환속의 ‘가장 고유한’ 이해는 텍스트의 “완전한 진리” 또는 완전한 이해보다는 이해의 다름 또는 타자의 이해를 강조한다. 텍스트의 진정한 이해는 어느 점에서 결론지어지기 보다는 “끝없는 과정” 속에 있다. 끝없는 과정이란 인간의 역사 경험과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이해는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의식하는 경험, 곧 전통에의 귀속 경험에서 출발한다. 역사에의 귀속경험은 모든 의미 경험의 유한성과 관계하고 무엇보다 하이데거 해석학의 중심개념인 유한성과 관계한다. 이해도 마찬가지로 유한성과 관계한다. 그럼에도 이해의 능력은 인간의 근본적 소질 안에 있다. 인간의 근본적 소질이란 타자와 공종의 삶을 영위하게 하거나 무엇보다 대화의 서로 함께함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다. 이것이 해석학의 보편적 요청이다.

 

달리 말하자면 해석학의 보편적 요청은 “이해 사건의 언어성”이다.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 제3부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과 시학 등을 들어 존재를 언어성으로 파악했다. 가다머 자신이 직접 “이해 언어성”의 “보편성“ 또는 ”언어의 보편성“ ”인간 언어성의 보편적 현상“ 등을 ”보편적 해석학“과 관련하여 말했다. 이는 우리의 세계경험의 언어성에 우위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가다머에게 있어서 언어는 해석학의 보편성의 요청지이며, 그리고 존재론에로의 전환을 가능케 하는 매개이다.”이해될 수 있는 한 존재는 언어이다. 해석학적 현상이 보편성을 보편적 의미에서 언어로서 규정하고 그리고 존재자와의 고유한 연관을 해석으로서 규정하는 동안, 해석학적 현상은 자신의 고유한 보편성을 이해자의 존재파악이게끔 만든다. “2)

모든 이해가 단순한 보편 인간적 선 이해에 기초한다는 불트만의 실존적 해석과는 달리 가다머는 계속되는 영향사 속에서 수행되는 그리고 늘 어떤 영향사적 속에서부터 나오는 특정한 역사적 선 이해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가다머는 하이데거의 선이해 개념에서 하이데거의 해석학의 시초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이데거의 사유가 예술작품과 존재 역사에로 행할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해석학이 된다고 보았다.

 

즉 ‘존재와 시간’에서 해석과 관련된 단어 -이를테면 interpretieren, Interpretation, interpretatorisch- 가 대략 300회 가량 나타나는데, 이는 현존재가 해석될 수 있다는 뜻이고 그런 뜻에서 철학이 진정한 해석학이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푀겔러는 이러한 전환을 즉하이데거의 전환을 해석학적 전통의 극복이라고 볼 수 없느냐고 생각한다. 이 때 철학에서부터 기대되는 보편화는 가다머에게 있어서 영향사적 고통성과 관계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성과 관계하는 해석학적 보편성은 또한 동사에 또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또 다른 면이란 해석학적 보편성의 근거인 근원적 이해 사건의 수행은 절대적 자기이해보다 다양한 해석 속에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서 해석학에서 루터에 의해 확립된 조요개혁 정신에 따르면, 성경은 스스로 해석한다.(sola scripture) 여기에 성서 해석학의 보편성이 근거한다. 그러나 이 해석학의 보편성은 적용되는 다양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가다머는 따라서 소위 구약 성서는 유대인을 위해서든 기독교인을 위해서든 종교 사회학자를 위해서든 매 다른 세계에 적합할 뿐 아니라, 다양하게 말한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여러 방식에서 들을 수 있는 목소리는 영향사적 해석 과정과 관계하는 것이다.

 

가다머와 데리다 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가다머가 이해지평 속의 융합은 곧 타자 이해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반면, 데리다는 이해 차이성을 강조한 데 있다. 가다머는 이해의 보편성을 말한다. 그 이해의 보편성 안에는 자기 이해뿐 아니라, 타자 이해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데리다에게서 타자는 타자이다. 데리다는 타자의 이해가 이해 사건 속에서 일어난다고 하는 이해지평의 융합보다, 하나의 이해에로 종합될 수 없는 이해 차이를 강조한다. 따라서 데리다는 가다머의 변증적 대화보다는 현재의 지평에 의해 지배받는 개념인 루소에게서 빌어온 보충(supplementarite)개념을 그 대안으로 제시한다. 루소의 보충적 논리는 차연의 또 다른 도식화이다. 그러나 이 보충논리에 의한 이해, 곧 여러 문맥 속에서 동일한 사태를 이해하는 작업이나 지평융합은 결국 같은 작업이 아닌가?

 

3-1-2. 데리다의 해체주의- 텍스트주의

 

데리다 철학의 특징은 한마디로 사유나 문화의 철저한 복수성에 있다. 복수성이란 완전히 다른 그리고 다양한 삶의 양식들, 지식개념들 그리고 가치규범들의 이질성과 관계한다. 따라서 복수성은 관점의 다양성과 깊은 관계에 있다. 그러나 이 관점의 다양성은 임의성이나 상대성과는 다른 것이다. 어떤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ㅡ 여러 시대와 형식과 문화 차이에서 오는 요소들의 조화이고 양식들의 섞임이다. 복수성은 분명 방법의 다양성을 , 원칙과 이념의 여러 가지임을 그리고 여러 양식- 존재 양식, 삶의 양식, 건축 양식, 문화 양식 등등- 들의 결합 등을 포함한다.

 

데리다도 료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메타 이야기의 종말’이라는 규정에 동의한다. 케타 이야기의 종말은 역사이해에서 해석학적 포괄적 이해를 부정하는 것과 관계한다. 메타 이야기의 종말은 전체적 또는 영향사적 지평융합 속에서 얻어진 이해의 파괴를 뜻한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나 개인의 여러 가지 또는 개인의 복합성이 강조된다.

 

데리다에게 있어서 해체주의 정신은 무엇보다 철저한 텍스트 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면 데리다에 있어 과연 텍스트란 무엇인가? 데리다는 책과 텍스트를 구분한다. 책이란 “내가 내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책은 백과사전처럼 의미체계성과 전체성을 가진다. 고“ 질서 정연한 세계는 신에 의해 쓰여진 책”이다. 책은 영혼의 대화이고, 진리를 담고 있으며, 저자가 있으며, 그리고 영혼을 모방한다.

 

텍스트는, 스스로 집을 짓는 지은이가 있는 책과는 달리, “저자가 부재한다.” 저자의 부재를 데리다는 “우리는 씀으로서만 씌여진다”고 했다. 책과는 달리 텍스트에는 “내면성이나 자기 동일성”으로 꽉 찬 안이 없다. 또한 “텍스트 바깥도 없다. “ 우리는 ”이미 하나의 텍스트 안에 존재하고 있다. “ 텍스트 바깥이 없을 뿐 아니라,”텍스트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다“ 단지 상호 텍스트, 텍스트 연합만이 있다.

 

텍스트는 “직물 조직”이고 “천”이기 때문에 텍스트 연합으로 존재한다. 텍스트는 따라서 “직물을 짜는 것”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해석되기 때문에 책처럼 의미 전체성이나 체계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질성과 이중성 그리고 상호성을 내포하고 있다. 텍스트의미의 “절대적 출발점을 정당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산종으로서의 반주체성만이 있다. 결국 데리다는 텍스트의 중심 되는 통일적 의미를 부정하고 만다.

 

그에 반해 데리다는 텍스트의 보충을 말한다. 텍스트의 논리는 “보충 논리”이다. 보충 논리란 “바깥이 안이고, 타자와 결핍은 모자람을 대체하는 보충으로, 어떤 것에 덧붙여지는 것은 그 어떤 것의 부족을 대신하고 그 부족은 안의 바깥으로서 이미 안에 있음”을 뜻한다. 이런 뜻에서 보충이란 같음과 다름의 종합이라기보다 한 개의 “이음조각”이다. 즉 안과 밖의 차이가 대립관계에서라기보다 보충의 관계에서 서로 뒤섞여 있다. 보충 개념은 루소에게서 온 개념인데, 루소에게서 보충이란 말은 생명이고, 문자는 죽음인데 말과 문자는 서로 다르면서도 상호의존관계에 놓여있음을 뜻한다.

 

가다머의 보편적 해석학과는 달리 데리다의 “철저한 텍스트주의”가 밝혀주는 것은 텍스트는 기호 이론적으로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데리다는 텍스트주의라는 낱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테스트 중심주의를 부정한다. 그럼에도 ‘철저한’이라는 낱말을 사용한다면, 그 의미는 텍스트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데리다의 텍스트는 모든 것이 텍스트이다. 인간도, 사물도, 나무도, 우주도, 다 텍스트이다. 따라서 철저한 텍스트주의란 모든 것이 텍스트이고 이 텍스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며, 텍스트의 고정되고 최종의 원본적 의미는 없다는 뜻이다. 데리다에게서 텍스트 개념은 언어개념에서 출발하는데 언어는 기호라기보다는 오히려 읽을 수 있는 흔적이다. 이는 그가 ‘문자학’(1967)에서 소쉬르에게서처럼 음소 대신에 문자소를 언어의 가장 기초구성 요소로 보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문자는 도장의 음각과 양각과 같다. 음각만 있어도 안 되고, 양각만 있어도 안 된다. 음각과 양각이 다 같이 있어야만 도장이듯이, 문자는 도장과 같다. 언어는 분절화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우~우~우~하는 음절의 소리만 계속내면 그 뜻을 모른다. 명확하게 발음하고 분절되어야 그 뜻을 명료하게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언어는 분절되고 관절처럼 사이를 연결한다. 즉 언어는 흔적이다.

 

흔적을 읽는다는 것은 기호를 해석하거나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무엇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텍스트주의이다. 언어는 기호라기보다 읽을 수 있는 흔적이다. 사람은 언어로 자신을 드러낸다. 사람은 또한 역사 속에 있으면서 쓰여진 텍스트인 자신의 역사와 대화함으로써 자신을 올바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 자신의 이해방식인 언어는 자신을 이해하게하는 다양한 흔적 속에서 스스로 드러난다. 따라서 데리다는 문자를 더 이상 기호로 보지 않고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흔적으로 본다. 즉 쓴다는 것은 읽을 수 있는 흔적을 뒤에 남김이다. 데리다의 흔적 개념은 레비나스의 흔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레비나스에 있어 흔적이란 우리가 자신의 흔적보다는 늘 타인의 흔적과의 관계를 우선으로 하는 흔적이다.

 

데리다는 문자(l‘ecriture)을 원흔적이라 하였다. 즉 같음 속에 다름을 포함하는 흔적이다. 이렇듯 흔적으로서 원문자는 차연이다. 데리다의 차연의 철학은 유럽중심의 철학에서 로고스 중심주의의 극복과 관계하며 그리고 새로운 사유 형식과 진술 형식들을 추구한다. 데리다는 이 로고스 중심주의 또는 말 중심주의 철학을 소리중심주의라고 규정하였다.

 

그가 로고스 중심주의를 소리 중심주의라 했을 때 그가 단순히 후설만 비판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음성학의 모델로부터 모든 과학이 구조적으로 건축되었던 것 일반을 비판하려는데 그의 목적이 있음을 간파해야 한다. 이러한 전통에 의하면 말은 씀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데리다는 문자를 읽을 수 있는 흔적의 남겨짐이라고 본다. 즉 그는 문자를 말의 보충으로 이해한다.

 

 

3-2. 선의지

 

 

가다머와 데리다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에서 논쟁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선의지(Guter Wille)개념이다. 이 개념이 왜, 상호 논쟁의 주요 대상이 되었는지부터 분명해져야만 한다.

 

가다머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를 이해의 선의지라 했다. 데리다의 질문의 요지는 가다머가 선의지에 대한 개념을 칸트에 의존하고 있지 않은지, 따라서 결국 형이상학 내에 머물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우선 칸트에게서 선 의지 개념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보자.

 

칸트는 ‘도덕 형이상학 원론’에서 선의지 개념을 말한다. 도덕의 형이상학은 가능한 순수 의지의 이념과 원칙, 곧 윤리성의 최고 원칙을 탐구한다. 그 최고원칙을 ‘도덕 형이상학 원론’ 첫 구절에서 무조건적으로 선한 것 곧 선의지라 분명하게 말한다. 이 선 의지는 보편적이고 합목적이게 하는 것이다. 이 선 의지는 그것이 가져오는 성과나 결과 때문에 또는 그것의 적합성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선하다.

 

선의지는 그것자체로서 높이 평가되어야 하고, 다른 의도가 없어도 자체로서 선하다. 그 자체로 좋은 것이 의지이다. 곧 인격과 관계하는 의지이다. 인격과 관계하는 그 자체로 선한 의지는 존엄성을 가진다. 따라서 선이라 불리 운다. 어떤 의지를 선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선의지이다.

 

데리다는 이렇듯 선의지와 존엄성의 연관성을 말한 칸트의 의미에서, 가다머가 선의지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느냐고 비판한다. 다시 말해서 의지를 무조건적인 것의 형식으로 보고 있을 뿐 아니라 이는 결국 의지의 형이상학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다머는 데리다가 전적으로 자기를 잘못 이해했다고 말한다. 가다머 자신이 말하고 있는 선의지는 칸트의 의미에서가 아니고, 플라톤의 “eumeneis elenchoi" 곧 타자의 진술을 ”분명하게 이해됨“(Einleuchtendes)의 의미에서라고 말한다. 가다머는 자신의 전집 7권에서 플라톤의 이념 이론 자체가 선으로부터 복수적 방식에서 해석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가다머가 말한 선의지란 이미 언급한 바처럼 이해의 선의지이다. 이때 선 의지란 낱말이 뜻하는 것은 보다 올바른 새로운 이해를 뜻한다. 칸트처럼 무조건적인 것 그리고 그 자체로 좋은 것인 선의지보다, 상대방과 대화 속에서 이해내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산출하는 선의지를 가다머는 말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플라톤처럼 선의지 그자체가 복수적 방식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다머는 자신의 해석학 이론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칸트의 개념이 도덕적인 반면, 가다머의 개념은 존재론적이다라는 사실을 통해 또 다른 근거를 우리는 제시할 수 있다.

 

 

3-3 정신분석학적 이해

 

데리다는 가다머의 이해가 정신분석학적 이해 또는 심리적 이해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데리다는 가다머가 정신분석가가 환자로 하여금 그 자신 스스로를 잘 이해하게 하고 그의 복잡한 여러 상황과 억압을 벗어나게 해주는 정신분석학적 해석학을 추구했다고 본다. 그러나 가다머는 그러한 데리다의 비판에 정신분석학적 해석이 완전히 다른 방향에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부여주려 했다고 말한다. 가다머가 말하는 정신분석학적 해석이란 누군가 그 자신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데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려고 할 때 사용된다는 것을 뜻한다. 가다머는 이 둘 사이를 갈라짐으로 보았다. 이러한 갈라짐이란 “갈라짐이 없는 타자 이해”란 대체로 없다는 것을 뜻한다.

 

가다머는 데리다의 이러한 비판에 리꾀르를 들어 자신의 이론의 정ㅅ당성을 대신한다. 가다머는 리꾀르가 정신분석학적 해석이 해석학에서 어떻게 정당하게 취급되어져야 하는 지에 대해 올바르게 논했다고 말한다. 리꾀르에 따르면 프로이드가 우리에게 인식의 가장 확실한 최후의 근거인 의식이 왜곡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의미를 왜곡된 무의식적 충동에로 환원시킴으로써 ;의심의 해석학‘에 귀 기울일 것을 환기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의 해석학을 프로이드뿐 아니라 니체와 맑스도 수행했다는 것이다.

 

다라서 이러한 의심의 해석학자들의ㅜ 논지를 무시하고 버릴 것이 아니라, 해석학에서 수용하자는 것이 리꾀르의 생각이다. 그리고 리꾀르는 이 의심의 해석학 저편에서 ‘신뢰의 해석학’을 세운다. 리꾀르는 이 신뢰의 해석학자로서 하이데거와 가다머를 든다. 신뢰의 해석학은 특히 존재나 텍스트의 의미신뢰와 관계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의미의 신뢰정초는 잘못되고 왜곡된 의식에서 보다는 존재 저편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존재의식에서 가능하다. 가다머에 의하면 왜곡된 전승의식보다는 올바른 해석학적 의식에서 산출되는 텍스트의미에의 신뢰가 가능하다.

 

리꾀르는 이 두 해석학 곧 “의심의 해석학‘과 신뢰의 해’의 변증법적 상호성을 주장한다. 리꾀르에 의하면 이 상호성에 기초한 해석학은 잘못된 의식의 환상을 비판하고, 진정한 참 의식과 관련된 텍스트의 의미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다머는 리꾀르의 이러한 상호성에 기초한 해석학이 정당하다고 보면서 데리다의 비판에 답변한다. 그러면서 가다머는 자신의 말을 덧붙인다. 즉 정신분석학적 해석의 진정한 정신은 자신이 말한 대화 속의 이해 이념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들에 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총체적 동의에 이르기 위해서는 인간들을 서로 묶고 그리고 대화 파트너이게끔 만드는 연대성이면 충분하다고 내가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을 위해선 결코 끝나지 않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자신과의 내적 영혼의 대화를 위해서도 똑같이 중요하다.

 

 

4. 상호오해

 

 

4-1 가다머의 데리다 오해

 

 

가다머는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단순히 본질적으로 부정적 작업과정으로 이해했다. 다시 말해서 해체주의의 근본 의도를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해체주의가 가져온 영향에 무조건 반대한다. 해체주의가 주장하는 가장 근본된 문제거리는 지금까지의 서양철학사가 특별히 형이상학이 모든 것을 통일원리에 귀속시키고 그 원리의 근거인 이성과 논리를 맹목적으로 신봉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통일원리를 부정하고 이성과 논리를 해체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다머는 그러한 해체주의의 본질을 어쩌면 이해 못하겠다는 것이다. 아니면 어쩌면 가다머가 생각하기에, 해체주의가 형이상학의 근본을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에 잘못된 부정적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가다머는 데리다의 차연의 논리를 동일 논리로 받아들였다. 다시 말해서 불변의 타자 존재는 동일성과 관련하며, 따라서 그 동일성 속에서 그 타자 존재가 타자로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차연은 데리다에게 있어서 결코 다양도 통일도 아닌 불연속성의 모든 류ㅡ, 곧 복수주의의 고유한 형식이다. 데리다에 있어 차연은 결코 동일성 속에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4-2 데리다의 가다머 오해

 

데리다의 가다머에 대한 오해 중 제일 먼저 말 할 수 있는 것은 데리다가 하이데거의 철학이해를 가다머의 철학이해와 동일시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다머의 해석학이 데리다가 본 것처럼 단순히 형이상학 로고스 중심주의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데리다가 이해한 대로 그리고 가다머 자신이 스스로 인정한대로 자신의 철학은 하이데거와 뗄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을 가다머가 그대로 수용하였다는 데리다의 안목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옳다.

 

그러나 가다머의 해석학을 형이상학적 로고스 중심주의라 규정하기에 그리 쉽지 않은 많은 다른 면들이 있다. 물론 데리다는 해석학이 유일하고 고유한 텍스트의 의미를 추구하는 이상, 해석학은 전체성과 통일성을 추구한 형이상학과 같다고 비판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해석학은 형이상학의 아류이다. 그러나 가다머는 이러한 데리다의 비판에 대해 오히려 거꾸로 질문한다. 데리다가 해석학을 오해하고 있다고 그리고 더 나아가 데리다는 진리나 사회상황과 관련된 질문들에 대해서는 도외시했을 뿐 아니라, 데리다의 해체주의로 진리나 사회상황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없다고.

 

더 나아가 데리다가 이해한대로 전통적 형이상학의 진리주장이나 인식 결정 불가능성이 곧바로 해석학에서의 이해불가능성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다머의 해석학이 저자의 의도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그 목적을 두지 않는 이상, 해석학의 목적은 새로운 타당한 이해규범과 적용 정당성 그리고 삶에의 전환, 더 나아가 삶 속에서의 변화를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즉 객관적이고 순수한 절대적 진리 인식기준을 해석학이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해의 다양성, 곧 삶의 형식들의 복수성과 차이에 근거하는 이해의 복수성을 해석학도 주장하는 한, 이해의 다양성과 복수성이 어떻게 이해 불가능성에로 연결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데리다가 가다머의 해석학, 특히 정신분석학적 이해에 기초한 이해이론을 비판했을 때, 그는 가다머의 정신분석학적 이해 양식을 잘못 이해했다. 가다머는 리꾀르를 들어 그에 대해 답변하고 있다. 이미 리꾀르는 정신분석학적가 어떻게 해석학에서 정당한가, 그리고 어떠한 문제가 있으며, 그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는가를 밝혔기 때문이다. 이미 리꾀르는 의심 해석학의 대리인으로서 프로이드의 무의식적 충동에로의 의미 환원을 논거했다. 의미 신뢰와 의심의 파괴 사이의 연관을 의심의 해석학과 신뢰의 해석학 사이의 상호관련 속에서 새롭게 재구성했다.

 

데리다의 가다머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데리다가 가다머의 선의지, 곧 이해와 의사소통에로의 의지를 칸트의 선의지로 이해하여 전통적 형이상학에 머물고 있지 않느냐고 질문한 대서 볼 수 있다. 가다머 자신이 밝혔듯이 그것은 분명한 데리다의 오해이다. 가다머는 선의지 개념을 칸트적 의미에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플라톤의 의미에서 사용했다.

 

데리다에게 있어서 듣는 현상은 목소리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독백 속에서 들을 수 없다는 데리다의 논지를 해석학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 인간은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소크라테스는 내면의 양심의 소리를 들었다. 인간은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자기 목소리를 듣는다. 데리다는 목소리의 듣는 현상을 부정하고 문자개념을 중요하게 취급했다. 그러나 문자는 독자의 읽는 행위를 통해서만 구체화된다. 데리다가 말한 바처럼 문자는 스스로 말하는 것을 스스로 듣지 않는다. 그러나 문자는 해석되어야 하고 언표화되어야 한다. 따라서 텍스트 해석을 그리고 언어를 전제하고 있다. 그가 주창한 문자주의는 해석학을 전제한다. 즉 그의 무자주의는 해석과 언어를 매개로 해야만 가능하다.

 

가다머는 언어에 기초한 해석학의 보편성을 포괄적 이해 사건에 정위시켰다. 다시 말해서 해석학의 보편성은 근원적 이해 사건 속에 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가다머는 해석학의 보편성 요청이 언어의 이해됨에 기초하며, 이해의 지평융합 속에서의 일어남에 근거한다고 보충 설명하였다. 가베 아이젠스타인에 따르면 데리다는 가다머의 이러한 언어 해석학을 다른 차원, 곧 기호론적 차원에로 전치시킨 것뿐 아니라 데리다가 이해한대로 해석학이 올바른 의미를 확정할 수 있는 방법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둘 사이에 또 다른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5. 마침말

 

가다머와 데리다사이의 논쟁에서 배운 가장 커다란 점은 데리다가 가다머의 이해통일성에 대해서만 비판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비판이 해석학적 이해불가능성을 말한 것에 끝난 것이 아니다. 현상학적 철학의 유산 그리고 더 나아가 철학적 전통 일반에 대한 비판이 아니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쩌면 데리다는 가다머에 대한 비판을 통해 지금까지의 형이상학 전체를 비판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 이유는 데리다가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에 대한 가다머의 수용이 존재의 형이상학이 아니냐고 꼬집으면서, 형이상학사 전체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을 한마디로 현재의 형이상학이라 했다. 이는 가다머의 용어사요이다. 이는 어쩌면 가다머가 데리다도 형이상학을 비판하나 형이상학 안에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한 말일 것이다. 결국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을 통해 가다머와 데리다 사이의 논쟁의 공통적인 출발점이 있으면서도 이 공통의 출발점은 사실 가장 커다란 차이를 드러냈고 말았다.

 

또한 현상학의 해석학에로의 전환이라는 면에 있어서 해석학과 해체주의의 공통점이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분명 이점에서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러나 이것이 만나는 점이면서 동시에 갈라짐의 점이었다.

 

그리고 가다머와 데리다는 관념론과 의식철학을 비판한다. 이 점이 바로 이들의 공통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공통점뿐 아니라 그 공통점 속의 내용적 차이를 중시해야만 한다. 관념론과 의식철학에 대한 극복이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해 수행되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관념론과 의식철학을 대하는 태도도 두 사람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가다머와 데리다 사이의 논쟁의 주요 문제점으로서 해석학의 보편성과 해체주의 텍스트주의를 비교 논했다. 가다머에 있어 해석학의 보편성이란 근원적 이해사건속의 자기 이해이다. 데리다에 있어 해체주의가 말하는 가장 주요문제는 텍스트주의이다. 가다머는 궁극적으로 이해가 어떻게 가능하며, 이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그의 철학의 근본으로 했다. 그러나 데리다는 텍스트의 의미는 짜깁기에 따라 달라지므로 결국 의미 불가능성으로 요약되며, 더 나아가 텍스트의 의미에 대한 이해 또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두 사람 사이에 논쟁에서의 문제거리는 선의지에 대한 것이었다. 데리다의 질문의 요지는 가다머의 선의지는 칸트에게서처럼 결국 형이상학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데리다의 질문에 가다머는 대답한다. 자기가 사용한 이해하려는 선의지는 칸트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플라톤에게서처럼 타자의 진술을 분명하게 이해하게끔 하는 것이다.

 

가다머와 데리다 사이의 논쟁의 또 다른 문제점은 정신분석학적 이해에 대한 것이다. 가다머의 이해는 정신분석학적이라고 데리다는 비판한다. 그에 대해 가다머는 정신분석학적 이해가 해석학에서 무리 없이 이야기될 수 있음을 리꾀르를 들어 대답했다. 어쩌면 데리다는 가다머를 들어 해석학 전체를 비판하고 있는지 모른다. 즉 해석학에서 말하는 이해란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심리적 이해가 아니냐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에서부터 해석학에서 이해문제는 결국 심리적 이해문제였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가다머에 있어서도 이해는 심리적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만약에 아니라면 어떻게 가다머는 이 문제를 대답할 것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가다머는 리꾀르를 그 답으로 든다.

 

그러면 이 논쟁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그것을 타자이해문제라 보고 싶다. 가다머는 해석학을 통해 이해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러나 데리다는 그러한 가다머의 해석학에 대해 이해 불가능성을 말했다. 그렇다고 해체주의가 이해의 불가능성을 마랬다고 해서 이해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오히려 이해 자체라기보다 이해의 차이를 해체주의가 강조했는데, 이는 결국 타자 이해의 문제가 아니냐는 것이다. 이는 가다머가 자기이해를 궁극적인 관심사로 둔 반면, 데리다는 타자이해를 더 중시하지 않았냐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타자이해 문제는 해석학의 본래 영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타자이해의 문제를 더 논해보고자 한다.

 

이해에 있어 차이가 있다라는 데리다의 논지는 가다머의 이해보편성을 부정하는 데에 목표가 있었다. 분명 이해의 보편성은 이해의 차이성의 문제를 극복했다 말해야겠지만, 해석학사에서 타자이해 문제는 가다머에게서처럼 그리 쉽게 처리될 수 없는 영역이다. 따라서 타자이해의 길을 논구해 보고자 한다.

 

 

6. 타자이해의 길: 해체주의 해석학

 

새로운 타자이해의ㅜ 길을 해체주의적 해석학이라 하고 싶다. 해체주의적 해석학이라는 용어를 통해 해석학과 해체주의의 참된 논지가 상호관련 속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한다. 이는 진정한 해체주의의 정신은 해석학에서 출발하면서 동시에 해석학에서 찾아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석학의 참된 논지를 실현한 것이 해체주의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해체주의적 해석학은 동일성 속에서 차이를, 차이 속에서 동일성을 동시에 찾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해석학은 동일성 ㅁ나큼이나 차이를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체주의는 차이만큼이나 동일성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해석학은 차이가 동일성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동일성이 괄호 안에 묶어버린 차이를 버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해체주의는 동일성이 차이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차이 때문에 배재된 동일성을 다시 소환해야만 한다.

 

해체주의적 해석학은 해체주의와 석학 사이의 상호성에서 출발한다. 해석학의 의미 생성 활동은 해체나 산종 때문에 고유한 자신의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비록 해체와 산종이 완전 해석 작업의 복합성과 결정적 의미, 이해불가능성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하더라도, 해석학은 궁극적 또는 절대적 이해를 추구해본 적이 없는 이상, 해석학은 해체와 산종의 작업과 더불어 새로운 해석학의 임무에로 나아가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해석학이나 해체주의가 완성된 절대적 이해를 추구하지 않는 이상 출발점이 같다고 말 할 수 있다.

 

다라서 새로운 해석학의 방향은 해체주의적 해석학과 관계한다고 보여진다. 이ㅏ는 자기에게만 타당한 그리고 자기에게는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는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대화에서 일어난 의사소통을 뜻한다. 텍스트를 읽는 자는 텍스트가 말한 바를 타당하게 이해하는 것과 텍스트저자가 말한 바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과를 구분해야 한다. 저자의 의도와의 해체주의는 텍스트가 말한 세계에 관심 갖는다. 이런 의미에서 해석학과 해체주의의 상호성과 일치성이 있다.

 

해석학이 학인 이상 해석이론의 타당성을 근거 지워야 하고, 그 근거를 올바로 제시해야 한다. 해체주의가 단순한 방법론이 아닌 이상-물론 방법론으로 이해하는 이들도 많지만- 해체주의의 학적 이론의 정당성을 찾고, 그 정당성을 제시해야 한다. 해석학이 학문의 영역에서만 갇혀있는데서 벗어나, 사회적 구체적 삶의 영역- 예를 들면 신학, 문헌학, 고고학, 법학, 문학, 역사학 등― 에로 되돌아가는 일을 이미 체계화했듯이, 해체주의도 방법론 영역에서 벗어나, 구체적 삶의 영역-예컨대, 건축학 음악, 사회학, 문학, 미술 등- 에로 확장되었다.

 

모든 해석이 다양한 주장들의 진리를 포함하면서도 그것들의 유용서ㅇ, 영향력, 적용범위 등의 여러 요소들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이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해석학이 추구하는 바가 자기이해일진대 그러면서 해석학이 절대적으로 자기이해를 부정하는 한, 해석학에서 말하는 자기이해는 새로운 자기이해를 말해야 한다. 여기서도 해석학과 해체주의의 같은 점이 있다. 즉 절대적 자기이해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자기이해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해석학에서 말하는 자기이해는 그러나 절대적 자기이해도, 초월적 자기인식도, 궁극적 자기투명성도, 통일적 전체도 아니다. 자기이해는 자기제한에 근거한다. 즉 이해의 역사적 귀속 경험에 근거하는 유한성에 기초하고 있다. 이해의 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 종착점을 향한 중도 지점에 있음 또는 완성적 이해를 향해 열려있음을 강조한다. 이해는 소위 해석학적 순환 속에 내재한다. 해석학적 순환속의 이해는 자기이해를 가지며 또한 동시에 또 다른 자기이해를 향해 나아간다, 자기이해는 자기를 변화시킨다. 완성된 자기이해가 없듯이, 완성된 자기변화도 없다. 끊임없이 열려있는 자기변화만이 있다. 늘 새로운 자기변화를 추구하는 자기이해만이 있고 늘 새로운 자기이해를 추구하는 자기변화만이 있다.

 

또 다른 해석학과 해체주의가 사실은 같은 뿌리에 서있음을 우리는 다음에서 알 수 있다. 해석학이 총체적 이해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의 차이, 해석의 다름, 더 나아가 타자이해를 추구하는 한, 그리고 해체주의가 이 다름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aneignen)작업의 능력을 말하는 한 해석학과 해체주의는 같은 뿌리위에 있다. 다른 이해나 다른 해석 가능성은 고정된 관점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체계나 삶의 구성 방식사이에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니체의 해석의 원근법은 해석학이나 해체주의의 좋은 준거이다.

 

만약 해체주의가 관점의 다양화를 강조하고 다양화를 체계화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다면, 이는 해체주의가 해석학과 다른 배를 타고 있다. 왜냐하면 해석 방법의 여러 가지와 해석의 여러 가지는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해석학은 이미 하이데거 이후, 특히 가다머에게 있어서 방법론을 취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수적 해석은 방법이 복수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해석대상 자체가 그리고 해석 현상 자체가 복수적인 데 더 많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획일적 의미해석 또는 의미이해를 반박한다고 해서, 획일적 의미해석이나 이해가 가지는 올바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한 이해 현상이 다양한 이해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해석학이 분명하게 밝혔다. 그 어느 부분에 강조점을 둔 점- 예를 들면 슐라이어마허의 심리적 해석, 딜타이의 역사적 해석, 하이데거의 실존적 해석, 가다머의 존재론적 해석, 리꾀르의 상징적 해석, 하버마스의 사회적 해석 등-은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모든 이해요소를 종합한 그런 이해가 실제로 행해지는가? 그런 뜻에서 해석학은 선 이해를 그리고 제한적 이해를 말하고 있다. 자기 이익 관심에 따라 자기 자신의 가치관, 종교관, 세계관에 따라 해석하고 이해한다.

 

해체주의나 해석학이 해석방법이 여러 가지임을 강조한 이유는 통일된 텍스트이해가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해석학은 어쩌면 통일적 텍스트 이해를 요청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해체주의는 통일된 텍스트 이해 불가능성 보다는 문맥에 대한 강조에 더 중점을 둔다.

문맥성에 대한 강조는 의미본질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문맥에 따른 해석은 의미 해석의 차이를, 그리고 의미 접근에의 다양성을 뜻하지, 의미 자체의 다양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문맥성은 문맥에 따른 의미규정을 정당한 것이라 하겠지만, 또한 그 스스로 문맥성을 넘어선 그 문맥성을 포괄하는 의미규정이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문맥성을 부정해서도 안 되지만, 문맥성에 의존해서도 안 된다. 이런 뜻에서 문맥성은 올바른 의미해석을 위한 타자 이해를 위한 조건이면서 타자이해에서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유럽인들이 한국인을 보다 잘 이해한다는 취지로 한국인의 문맥성을 강조하는 데는 여러 문제점이 있다. 그들의 사유, 이해 구조 없이 어떻게 한국인의 문맥성을 말할 수 있는가? 한국인의 문맥성이지만 결국 그들의 이해 구조 안에서의 문맥성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을 인정한다면 그들의 이해 구조와는 다른 우리의 삶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즉 다른 이해 구조들끼리 어떻게 이해가 일어나는가? 다른 이해 구조들끼리 그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 구조의 본질적 차이에 근거한 이해차이를 지적하면서 그에 따른 상호이해를 추구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상호이해는 다른 이해구조가 있음이 무엇보다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 그 다음 다른 이해 구조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해 구조자체를 존중해야 상호이해가 가능하다고 본다. 올바른 이해구조에 따라 올바른 이해가 나온다기 보다- 사실은 그래야하지만- 나에게만 올바른 이해구조이어서만은 안되고, 나에게는 올바르나 타인에게는 잘못될 수 있는 이해구조에 대한 인정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하다고 본다. 필자는 이 정신을 직접적으로는 리꾀르에게서 간접적으로는 칸트에게서 배웠다.

 

즉 리꾀르에 따르면 인간 이성 그자체가 스스로 자명하고, 자명하다 논증 받는 것이 아니라, 한계 속에 있으며, 이성 밖의 영역을 그렇다고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고 요청하는 그런 태도가 철학자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해석의 복수성을 주창한 이론들에 따르면 타자이해가 가능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해석의 복수성에 근거한 타자이해는 불가능하다고 보여진다. 진정한 타자이해란 따라서 요청으로서의 타자이해 속에 있다고 본다.

 

 

 

 

 

1) 참고. 김 영한, ‘가다머와 하버마스 사이의 논쟁’, ‘하이데거에서 리꾀르까지, 박영사, 1987; 최종욱,’가다머-하버마스의 해석학 논쟁에 대한 비판적 소론‘,’해석학과 사회철학의 제 문제‘, 일월서각, 1990, 115-146. 그리고 拙稿,’가다머와 하버마스 사이의 논쟁‘, 사색 9집, 1991, 225-243.

 

2) 장 그롱딘이 이에 대해 우리에게 유익한 가다머와 자신과의 대화를 소개한다. 그는 가다머에게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그러나 그의 고백에 따르면 과연 가다머에게서 해석학적 보편성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6년 뒤인 1998년 늦은 가을 하이델베르그에서 가다머와 이 문제를 놓고 다시금 대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때 그롱딘은 가다머에게 물었다고 한다. 도대체 해석학의 보편적 면이 어디에 있느냐? 가다머는 한마디로 대답했다고 한다. im verbum interius. 그러나 그런 말은 ‘진리와 방법’에도 그리고 다른 문헌에도 없었지 않는가? 해석학적 보편성이 “내적 말”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사람이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은 자기 마음에 가지고 있는 바의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언어는 모든 것을 위해 표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은 언어여야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