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생성과 가상에 근거한 니체의 미학

나뭇잎숨결 2024. 11. 26. 08:29

 

생성과 가상에 근거한 니체의 미학

 

 

 

 

 

 

심 재 민(연세대)

 

 

 

 

 

1. 들어가면서

 

니체는 역사를 문화의 관계망 속에 끌어 들여 파악하며, 문화는 다시금 삶을 그 중심점에 두고서 모든 문제를 풀어 나간다. 니체의 현대 비판은 삶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있는 문화에 대한 비판과 궤적을 같이한다. 비판 대상은 학문과 예술, 종교와 도덕뿐만 아니라 광의의 의미에서 전통 형이상학이라고 볼 수 있는 존재중심적 사고까지 포함한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 (Wille zur Macht)’라는 개념을 가지고 삶의 본질을 도덕적 善惡이라는 이분법적 기준을 넘어서 설명해 나간다. 그는 ‘고통 (Schmerz)’ 내지는 ‘고뇌 (Leiden)’와 ‘쾌감 (Lust)’이라는 두 개념을 중심으로 전통 철학으로 풀 수 없는 현대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그의 미학이론 역시 이런 관점에서 이해된다. 니체가 삶, 힘에의 의지, 에너지 (Kraft), 충동, 고통, 쾌감 등의 개념들을 가지고 자기의 미학이론을 전개해 나가면서 궁극적으로 ‘예술의 생리학 (Physiologie der Kunst)’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 미와 몸의 관계에 대한 그의 학문적 관심과 천착을 읽어 낼 수 있다.

 

본 논문은 니체의 핵심 개념들을 중심으로 전통 미학에 대한 니체의 비판과 동시에 그의 미학에 대한 이해를 추구한다. 제 2장에서는 전통 형이상학의 ‘진리’ 개념에 대한 니체의 비판을 다루는 가운데 존재 및 생성 개념에 대한 그의 이해를 알아보고자 한다. 제 3장에서는 생성 개념을 심리적 경험에서 출발해서 이해하려는 니체의 시도를 알아 보면서 그의 ‘아폴로적 예술 충동’ 및 ‘디오니소스적 예술 충동’을 더욱 근본적으로 연구한다. 동시에 니체 스스로 고백하는 ‘디오니소스적 세계관’을 조명하는 일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제 4장은 힘에의 의지와 美의 관계를 근거로 한 니체의 칸트 비판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힘에의 의지가 가진 윤리적 측면 역시 고려해 본다. 니체가 ‘예술가적 잔인성 (Künstler-Grausamkeit)’이라는 개념으로써 힘에의 의지의 생산적 변형을 통한 인간의 ‘자기 억압 (Selbstvergewaltigung)’을 강조한다면, 이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끊임없는 자기 발전 및 성장을 옹호하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의 미학은 역시 삶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 본 논문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부터 니체의 현대 비판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2. 존재(Sein)에서 생성(Werden)으로: 전통 형이상학의 진리인식에 대한 비

 

서구의 전통 형이상학은 실존을 허구라는 의미에서의 ‘가상’으로 이해한다. 진정한 존재는 여기서 초감각적 세계일 뿐이다. (니체는 이 세계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에서 ‘뒷세계(Hinterwelt)’라고 지칭한다.) 니체는 진리라는 개념의 뿌리를 ‘진리에의 절대적 의지’에서 찾는데 이 개념에 대한 니체의 거부에서 우리는 그의 철학 이해를 위한 전제 조건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관련 맺고 있는 세계가 ‘위조’, 즉 ‘사실이 아니다’라고 니체가 말할 때 그는 인간의 “관찰의 빈약한 전체 합계를 땜질하고 둥그스럼하게 만들어서” 나온 세계를 의미한다: “이 세계는 어떤 생성하는 것으로서, 항상 새롭게 위치가 바뀌며 결코 진리에 접근하지 않는 허위로서 ‘흐름 속’에 있다: 왜냐하면 진리란 없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전통 속에서 진리는 본체 개념에서 출발한다. 니체에게서는 그에 반해 존재의 세계는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존재와 사유의 동일시라는 파르메니데스 (Parmenides)의 ‘존재론적 증명’은 니체에 의해 거부당한다.) 우리가 현실로 느끼는 실존의 세계는 니체에게는 하나의 가상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 가상의 세계에 우리가 실재성을 부여함으로써, 다시 말해 하나의 현실을 창조하고 논리화함으로써 그것은 우리에게 현실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통 형이상학에서 실존의 세계를 단순한 현상으로 보면서 본질세계와 구별되는 허구라고 생각하는 데 대하여 니체는 단호히 맞서 싸운다. 니체는 가상 이야말로 사물의 실제적이고 유일한 현실이라고 말하면서 이 가상을 전통 철학에서 말하는 ‘논리적 진리’, 즉 “상상에서 나온 ‘진리세계’”와 대치시킨다. 이 진리세계는 니체의 관점에서 볼 때 상상에 불과한 본질적인 존재를 추구한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존재 지향적 진리세계에 등을 돌리고 헤라클리트 (Heraklit)의 “영원하고 유일한 생성”에 동조한다. 헤라클리트에게서 “생성과 소멸의 본래의 진행과정”은 “양극성의 형태”를 지니게 된다. 즉 하나의 힘이 한편으로는 성질상 상이하고 대립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또다시 합일을 추구하는 두 개의 활동으로 나타난다. 하나의 성질은 지속적으로 둘로 나눠지고, 나눠진 것들은 서로 대립적으로 구별되지만 이 대립된 것들은 다시금 하나가 되려고 계속 노력한다. 여기서 양극성은 바로 생성의 세계의 전제가 된다. 그러므로 생성의 세계에는 이미 생성과 소멸이 내포된다.

 

생성의 이러한 성격에 근거해서 니체는 생성의 ‘순진무구 (Unschuld)’를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세계의 그 어떤 도덕적 산입도 없는 놀이가 영원히 작동되고 있다는 것이다: “생성과 소멸, 짓고 부숨은 그 어떤 도덕적 산입도 없이 늘 같은 순진무구함을 가지고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예술가와 아이의 놀이에만 있다.” 니체는 어린아이가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았다가 허물 때 거기에 아무런 존재적 집착을 가지지 않은 놀이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술가와 아이의 시각에 의해서만 이 놀이가 가능하다는 것은 그들이 생성의 진리를 대변하면서 존재를 단순히 생성 내의 존재로만 이해한다는 뜻이다. 존재가 생성에서 연유할 때 이는 운동을 전제로 하는 ‘다양성 (Vielheit)’을 변호한다.

 

경험과 무관하면서도 ‘순수인식’에 불가결하다고 주장되는 순수사유는 니체에 의해 거부당한다. 그의 칸트 비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진다. 칸트에게서 하나의 사실로 통용되는 인식에 대한 믿음에서는, 니체에 따르면, 언제나 ‘합법칙성’이 전제되어진다:

 

 

칸트는 인식을 사실로 믿는다: 그가 원하는 것: 인식인식은 순진함이다! ‘인식이란 판단이다!’ 그러나 판단이란 어떤 것이 이렇고 이렇다는 하나의 믿음이다! 그리고 인식이 아니다!

 

경험과 무관하게 선험적으로 실행되는 순수인식이라는 것을 니체는 극복하려고 애쓴다. “인식기관들 (Erkenntnis-Organe)”은 그에 따르면 단지 “삶의 보존 및 성장 조건들 (Erhaltungs- und Wachstumsbedingungen des Lebens)”에 이용된다. 그러므로 니체는 무엇보다도 전통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주체 (Subjekt)’니 ‘본체적 통일체 (substantielle Einheit)’니 하는 개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대신 니체는 주체를 “어떤 꾸며내 덧붙인 것 (etwas Hinzu-Erdichtetes)”으로 간주한다. 그가 주체를 다양성으로 받아들이면서 “주체원자들 (Subjekt-Atome)”이 없다고 단언할 때, 그 까닭은 “영향을 미치는 원자들의 세계”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체는 주체라는 개념을 ‘주체의 국면 내지 체계’로써 대체해 버린다. 그는 “주체의 국면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거나 감소하면서” “체계의 중심이 지속적으로 위치가 바뀐다.”고 말한다. 반면에 전통적인 주체 개념은 본체 개념의 근간을 이룬다. 그러므로 전통철학적인 의미의 주체가 없다면 본체의 전제가 사라지게 되고 따라서 전통적인 의미의 ‘존재자’라는 개념도 성립될 수 없다. 세계는 결국 ‘흐름 속’에 있다. 즉 본래부터 고정된 것으로서의 현실은 니체에게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같은 맥락에서 본체가 전제하는, “행위 (Tun)”뒤에 있는 “행위자 (Täter)”라는 개념도 실효성을 잃게된다. 니체는 여기서 오로지 행위만을 인정하는데 이 행위란 바로 “충동, 의지, 영향”의 전체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행위는 일정량의 에너지(Kraft)를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이 에너지는 ‘일정량의 충동, 의지, 영향’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에너지의 느낌은 생명감과 더불어 “우리에게 ‘존재’, ‘현실’, ‘비가상 (Nicht-Schein)’의 정도를 부여한다.” 존재(자)의 정도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니체는 전통 철학에서 주장하는 존재 개념을 허물어 버린다. 즉 존재는 “존재에의 의지 (Wille zum Sein)”라는 ‘생명감’ 및 ‘힘의 느낌’의 정도에 따라서 제각각 다른 크기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전통 형이상학의 진리가 존재 개념을 바탕으로 세워진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니체 식의 존재론은 분명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아닐 수 없다. 니체가 전통 철학적 진리 개념을 문제 삼을 때 이것은 그러므로 ‘물 자체’나 ‘실재 자체’를 내세우면서 고집하는 ‘무조건적 진리 추구’ 내지는 설정을 겨냥한 것이다. 여기서 전통 철학은 존재자에 대한 믿음에 근거해서 논리, 그리고 과학이 가능해지며 과학은 “인식자와 인식 대상의 일치”에 근거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전통 철학의 논리는 진리를 창조하기 위해서 존재자를 이미 실재자로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 개념에서 나온 진리는 우리에게 동일한 것을 동시에 긍정하고 부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동일한 것을 긍정하고 부정한다는 일은 우리에게 실패로 돌아간다: 이는 하나의 주관적인 경험법칙이며, 그 안에는 어떤 ‘필연성’이 표현되지 않는다. 다만 무능력만이 표현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논리라는 개념에 대한 니체의 이해의 윤곽이 드러난다. 즉 그는 논리를 ‘필연성’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고 ‘명령 (Imperativ)’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마땅히 진정임을 의미하는 세계를 우리가 설정하고 생각해낸다”는 데서 니체는 출발한다. 즉 “형이상학적인 세계를 구상하기” 위해서 우리는 “논리에서부터” “진정한 존재의 기준”을 만든다. 그리고 이 형이상학적인 세계는 진리를 꾸며낸다. 그러므로 니체에게는 본래 물 자체도 없고 실재사실 자체도 없으며, 무조건적 진리 역시 없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는 생성의 세계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도식부여 (Schematisieren)”라는 개념을 가지고 전통 철학에서 말하는 인식 (Erkennen)이라는 개념을 대체해 버린다. 즉 도식부여를 통해서 세계라는 “카오스에 규칙성과 형태를 부여한다.” 세계의 수동적 의식이라는 자리에 도식부여의 적극성을 앉힐 때 그 바탕에는 힘에의 의지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니체의 다음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만든 세계만을 이해할 수 있다.”도식부여를 통해서 인간이 현실을 장악하게 될 때 힘에의 의지는 늘 작동하고 있으며 동시에 이 의지를 결정하는 충동 - “선점충동 (Aneignungstrieb)”과 “제압충동 (Überwältigungstrieb)” - 의 중요성을 니체는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니체는 진리를 필요로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니체는 진리를 이해하는 방식이 다를 뿐 진리 자체의 필요성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는 진리의 기준에 대한 전통 철학의 이해 방식을 수정한다. 그가 보기에 진리는 “일종의 오류”이지만 인간은 진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인정한다. 다만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삶을 위한 가치”이다. 그러므로 삶이란 기준 앞에서 진리는 창조되는 것이다. 그리고 삶은 바로 힘에의 의지가 가지는 끊임없는 성장에의 충동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할 때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결국 니체는 과학으로 하여금 스스로 추구하는 진리를 논리적 진리라는 이름 하에 만족하게끔 만드는 가운데, 전통형이상학의 무조건적 진리에 맞서 싸운다. 그가 보기에 바로 이러한 맹목적 진리 추구에서 “유럽적 허무주의”의 싹이 자라는 것이다.

 

3. 假象을 통한 실존의 美的 변호

 

니체의 가상 (Schein) 개념은 전통 형이상학의 가상 개념과 구별된다. 즉 가상은 더 이상 ‘거짓’ 내지는 ‘가짜’라는 말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오히려 실존은 가상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이미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ödie)?에서 이 견해에 대한 언급이 발견된다:

 

내가 말하자면 자연에서 저 전능한 예술 충동들과 그 안에서 가상에의, 가상을 통한 구원받음에의 열정적인 동경을 더 많이 지각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나는 형이상학적 가설의 독촉을 받는 것을 느낀다: 진정한 존재자인 원일자 (das Wahrhaft-Seiende und Ur-Eine)는 영원히 고뇌하며 모순에 차있는데, 동시에 황홀한 비전 (Vision), 즐거운 가상을 자기의 끊임없는 구원을 위하여 필요로 한다. 그 가상에 완전히 사로잡히고 그 가상으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우리는 그 가상을 진정한 비존재자로서, 즉 시간, 공간 그리고 인과성 안에서 지속적인 생성으로서, 달리 표현하면 경험현실로서 느끼도록 강요당한다.

 

니체의 가상 개념은 생성의 세계를 전제로 해서만 가능해진다. 전통 철학이 형이상학이라는 회전축을 존재 지향적으로 돌린다면 니체는 이것을 거꾸로 돌리면서 가상을 지향한다. 즉 가상에 의해서만 존재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한다. 그렇다면 니체에게서 존재의 참모습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원일자’이면서 동시에 ‘진정한 존재자’라는 표현 하에서 니체는 존재를 ‘영원히 고뇌하며 모순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원일자의 본질을 모순, 즉 ‘고통이면서 동시에 쾌감’이라고 본다. 따라서 원일자는 쾌감을 주는 가상을 이미 자기의 모순적 본질 안에 담고 있다. 가상은 원일자를 고통으로부터 구원한다. 니체는 가상을 ‘영원한 비존재자’요 ‘시공과 인과성에서의 지속적 생성’으로 느끼게 된다고 밝힌다. 여기서 니체는 존재의 참모습을 존재자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가상이 없는 고뇌는 실존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즉 실존은 매 순간 원일자를 표상하는 가운데, 가상이 실존을 가능하게 한다. 다시 말해 원일자의 고통 내지 고뇌는 가상의 쾌감과 모순되지만 쾌감에 의한 고통의 구원이 있고, 이러한 원일자를 매순간 표상함으로써 실존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니체는 도대체 왜 진정한 존재자와 원일자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위해서 우리는 모순에 의해 각인된 원일자의 본질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물론 고통이라는 니체의 개념은 함께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생성 안에 고통의 비밀도 놓여 있음이 틀림없다. 순간의 세계가 매번 새로운 세계라면 느낌과 고통은 그 순간 어디서 오는 걸까?

원일자로 되돌려야 할 것이 우리 안에는 하나도 없다.

의지는 가장 일반적인 현상형태이다: 즉 고통과 쾌감의 교체이다: 순수직관의 쾌감을 통한 고통의 지속적인 치유로서의 세계를 전제함. 홀로 있는 것은 고뇌하며 치유를 위해, 순수 직관에 도달하기 위해 의지를 투사한다. 사물들의 원천으로서의 고뇌, 동경, 결핍. 진정한 존재자는 고뇌할 수 없다? 고통이 진정한 존재이다, 즉 자기지각이다.

고통, 모순은 진정한 존재이다. 쾌감, 조화는 가상이다.

 

고통은 의지에 기인한다. 그러나 예술 창작의 출발점이 되는 ‘최고창조정신 (Genius)’의 의지는 ‘순수 직관’에 근거해서 쾌감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 의지가 스스로 “완전히 바깥면이 될” 때, 그러니까 최고창조정신이 원일자에 직면해서 “현상을 순수하게 현상으로 볼” 때, 의지는 쾌감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의지는 자기 스스로를 직관하면서, 즉 자기를 대상으로 보면서, ‘현상형태(Erscheinungsform)’가 된다. 이처럼 의지가 가진 고통은 표상 안에서, 가상이 낳는 쾌감을 통해서 부서져 버린다. 그리고 이 표상은 생성에 의해 지배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니체 스스로도 제기한 질문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어떻게 생성이라는 가상이 가능한 것인가?” 이 질문은 다시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어떻게 의지 안에서 쾌감이라는 가상이 고통이라는 존재 옆에 있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니체는 다음의 대답을 준다:

 

의지가 스스로를 직관하면, 그것은 언제나 동일한 것을 봄에 틀림없다, 즉 존재와 마찬가지로 가상은 있음에 틀림없다, 불변하며 영원히 [...] 세계는 오직 그 하나의 의지만을 위해서 완전히 현상으로 인식 가능하다. 그 의지는 그러니까 고뇌할 뿐만 아니라, 잉태한다: 그 의지는 매번의 최소 순간에 가상을 잉태한다: 그 가상은 비실재자로서 역시 비일자이며 비존재자이고 생성자이다.

 

최고창고정신의 의지가 존재의 고통 앞에 있을 때, 가상은 그로부터 의지를 구원을 해준다. 그리고 가상은 예술적인 가상으로서만 고려된다. 그럼으로써 “최고창조정신의 창작”인 예술 작품은 두드러진 역할을 하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가상은 여기서 ‘피안에 놓여있는 존재’와 반대되는 의미로서의, 그러니까 존재와 대립적인 의미로서의 ‘허구적 가상’이 아니라, “존재의 가장 순수한 휴식순간들”이 된다. 그러므로 니체가 의미하는 존재는 이미 현세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존재에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경험적인 실존은 ‘가상에 대한 본래적 욕구’를 ‘진정한 비존재자’인 예술을 통해서 채워나가게 된다. 그런데 니체의 가상 개념이 실존을 가능하게 해준다면 예술은 이 가상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예술을 통해서 가상은 실존과 또다시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가? 고전문헌학자로서 니체는 ‘예술충동’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가상의 구체적 실례를 신화적 및 역사적 차원에서 찾아낼 뿐만 아니라, 한 단계 더 나아가 개념의 상징화 내지는 이미지화를 통해서 독자적인 미학적 견해에 도달한다. 예술충동은 인간에게 가상의 행복을 허락하면서 동시에 실존의 행복을 허락하는 것이다. 니체는 인간의 최고창조정신 이 행하는 창작 역시 실존 자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표상 (Vorstellung)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실존이라는 模寫 (Abbild)에 근거해서 만들어지는 예술작품은 ‘모사의 모사 (Abbild des Abbildes)'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니체는 플라톤의 입장에 동조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니체는 플라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플라톤이 예술을 허구라고 보면서 그 의미를 폄하시키는 데 반해서 니체는 존재의 최고 고통이 가장 순수하게 휴식하는 순간이 바로 이 모사의 모사인 예술작품이 주는 최고의 쾌감이라고 본다. 즉 존재는 가상에 의해서만 만족되는 것이다. 여기서 존재는 플라톤에서처럼 피안 - 니체의 표현대로 ‘뒷세계’ - 에 있는 존재와 구별되며 이미 실존 속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니체는 두 가지 예술충동을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구별한다. 아폴로적인 것과 비교해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영원하고 근원적인 예술권능으로 나타난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역사적 맥락에서는 야만적인 티탄거인족의 비아폴로적 세계에서 찾는다. 이 세계의 특징은 ‘자기 과시와 지나침’으로 압축되며, 역사적 아폴로 문화에 대한 끔찍한 위협으로 작용한다. 아폴로 문화는 도리아 국가와 그 예술에서 발견되는 데 무엇보다도 그 ‘경직성과 위엄’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리고 디오니소스적 축제와 아폴로적 시편 낭송의 예술에서 두 집단의 대립적 성격이 잘 나타나며, 이 두 예술 충동 내지 문화는 결국 서로서로 자극을 주면서 상호 모순 관계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서로의 생명력을 고양시키게 된다.

 

니체는 아폴로적인 것을 설명하면서 쇼펜하우어로부터 차용한 개념인 ‘개별화원리 (Individuationsprinzip)’를 내세운다. 개별화원리란 무엇보다도 개인의 한계 고수와 절제를 신격화하면서 자기인식을 최고 미덕으로 강조한다. 즉 “네 자신을 알라”와 “지나치지 마라”는 요구로 그 덕목이 압축된다. 니체는 아폴로적인 예술의 예로 조형예술을 드는데 여기서는 원일자가 가진 고통은 “아름다운 외양 (der schöne Anschein) ”에 의해서 가려진다. 즉 가상의 미와 더불어 “가상의 쾌감과 지혜”는 영원화 된다. 가상이라는 지속적 생성은 여기서 부정되며 현상은 영원화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고통은 어떤 의미에서 자연의 특질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기만당한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아폴로적인 예술을 “가상의 가상 (Schein des Scheins)”이라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원일자의 모순과 직면할 때 실존을 가능하게 하는 가상이라는 지속적 생성이 고정되어 버리고 영원화되어 버린다면, 원일자의 고통은 처음부터 무의미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즉 고통에 대한 가상의 일회적 승리를 영구한 기념비로 만들어 버리는 예술품은 또 하나의 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폴로적인 것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형상과 한도”를 줌으로써 자기 본래의 능력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아폴로적인 것의 미덕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어떤 틀 속에 넣어서 모습을 가지게끔 하며 또한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자제하게끔 해주는 데 있다.

 

니체는 그의 사유 속에서 본질적으로 ‘디오니소스적-비극적인 것’에 대한 신앙 고백을 한다. 하지만 디오니소스적인 것 내지는 그 세계관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 비극에 사용되는 신화적 맥락을 간과할 수 없다. 우리의 관심사는 여기서 “비극적 신화”의 상징 의미이다: “비극적 신화는 디오니소스적 지혜를 아폴로적 예술 수단을 통해서 상징화한 것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이 신화는 현상 세계를 그 한계까지 이끌고 간다. 여기서 현상 세계는 자기를 부정하고는 다시금 유일한 참현실의 품 안으로 도피하려고 시도한다.” 니체는 비극적 신화의 상징 의미로부터 디오니소스적 예술의 상징 의미를 유도해 낸다.

 

비극의 주인공의 죽음 앞에서도 “비극적인 것에 대한 디오니소스적 기쁨”을 가진다는 것을 니체는 “형이상학적 위로”이며 “디오니소스적 지혜”라고 표현한다. 동시에 그는 형이상학적 위로를 디오니소스적 세계관의 본질이라고 칭한다. 주인공을 “의지의 최고 현상”으로 보지만 이 의지조차도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됨으로써 우리는 실존이 무한한 생성의 바다 속에서 가상의 도움에 의해서만 가능해 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의지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가상의 도움을 언제나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실존은 가상의 구원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의지가 낳은 최고 현상이 부정되는 순간까지도 절망하지 않는 것이 디오니소스적 지혜라고 해석된다. 니체는 이러한 디오니소스적 상징 의미에 근거해서 자신의 철학을 구축하면서 자신을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최후의 제자”라고 칭한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무리 이상하고 어려운 문제들에 처하더라도 삶을 긍정하는 것; 삶의 최고의 실현유형들이 희생되더라도 삶의 무한함을 기뻐하며 삶에의 의지를 가지는 것 - 그것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이라고 칭했다. [...]” 그 결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에서의 가상은 “존재의 가상 (Schein des Seins)”을 의미한다: “실존에서의 행복은 가상에서의 행복으로만이 가능하다.” 이처럼 삶에 대한 디오니소스적 긍정은 니체 철학의 근본 사상을 형성한다.

 

‘1885년 가을-1886년 가을’의 시기에 쓰여진 유고집에서는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ödie)?에 대한 회고가 발견된다. 이 회고에서는 니체의 “곡예사 형이상학 (Artisten-Metaphysik)”과 관련된 사상이 서술된다. 니체는 여기서 생성과 존재라는 개념들을 소위 “심리적 기본경험”과 연결함으로써 실존을 미학적으로 변호하고자 한다: “생성으로 인해 고뇌하는 자의 허구로서의 ‘존재’ [..] 가장 고뇌하는 자는 가장 깊이 美를 찾는다 - 그는 미를 만든다.” 니체는 여기서도 ‘고뇌’라는 문제를 등한시하지 않으면서, 생성으로 인해 고뇌하는 자의 문제해결 방법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미 언급한대로 두 가지 해결 방법을 제시한다: 즉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바로 그것이다. 동시에 니체 스스로는 디오니소스적인 해결 방법을 선택한다.

 

생성으로 인한 고뇌를 디오니소스적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생성을 “적극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즉 창조자의 “엄청난 쾌락 (Wollust)”을 의미하며 이러한 창조자는 동시에 “파괴자의 통분”을 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기본 경험의 근저에는 욕망 (Begierde)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 욕망이 바로 생성에게로 밀려드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욕망은 “생성하게끔 하는 쾌락”, 즉 “창조와 파괴의 쾌락”에게로 밀려들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욕망’과 관련하여 생성, 존재 그리고 가상 등의 개념들이 가지는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부로부터 느끼고 해석한다면 생성이란 어떤 불만스러운 자, 너무 부유한자, 끝없이 긴장하고 재촉받는 자의 지속적인 창조일 것이다, 존재의 고통을 단지 끊임없는 변화와 교체를 통해서만 극복하는 어떤 신의 지속적인 창조일 것이다: 가상은 그의 매순간 달성되는 잠시의 구원일 것이며, 세계란 가상에 있는 신적 비전 (Visionen)과 구원의 연속일 것이다.

 

이 단락에서 니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보다 생성에 대한 이중적 긍정이다. 즉 창조뿐만 아니라 파괴 역시 긍정하는 데서 생성 개념의 디오니소스적인 이해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이중적 긍정을 받쳐주는 것은 다름아니라 바로 의지이다. 이 의지는 현상을 순수하게 직관하면서 가상의 쾌감을 경험하는 가운데 그 스스로 이미 현상 속에 있는 것이다. 의지의 순수한 직관은 그러므로 창조와 파괴가 모두 ‘생성하는 현상’에 속한다는 것을 보장한다. 이런 방식에 의해 생성은 니체가 강조하듯이 “적극적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니체는 그의 세계관과 생성 개념을 연결해서 이해한다. 즉 생성의 본래적인, 내면적인 세계를 그는 힘에의 의지의 세계라고 표현한다. 디오니소스적인 능력은 바로 이 힘에의 의지에 근거한다. 힘에의 의지가 가진 역동적인 성격은 결국 영원한 생성에 대한 긍정에서 출발한다. 즉 창조와 파괴, 쾌감과 고통에 대한 긍정에서부터 그의 성격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성에의 의지 (Wille zum Werden)’는 여기서 가상에의 의지가 된다. 왜냐하면 가상은 실존이라는 현상에서부터 출발해서 존재에의 의지를 포함하면서 동시에 넘어서기 때문이다. 즉 디오니소스적인 능력은 이 실존에 근거해서 하나의 ‘의미지평’을 창조하면서 실존을 수용한다. 그러나 이 의미지평은 다시금 디오니소스적인 능력에 의하여 ‘즐겁게 부정된다’.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부정으로부터 디오니소스적인 능력을 통한 실존의 끊임없는 ‘지평확대’의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4. 삶의 기준에서 본 ‘힘에의 의지’와 예술

 

니체는 삶의 바탕은 바로 힘에의 의지이며, 이 의지는 충동, 격정 그리고 열정 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본다. 그 중에서도 특히 충동이라는 개념은 삶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니체가 세계의 해석은 힘에의 의지에서 나온다고 볼 때 결국 그 근간은 충동이 된다. 다시 말해 지배적 충동에 의해서 세계가 해석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 지배적 충동은 선점충동 및 제압충동이 된다. 이 충동은 다른 충동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하나의 규범 역할을 하면서 자기의 시각을 관철한다. 니체는 모든 충동들이 다 충족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보며 충동들이 지나치게 오랜 시간동안 충족되지 않을 때는 고사한다고 확언한다. 이처럼 충동들이 신경계를 해석하고 신경계의 욕구들에 따라 그 원인을 정하게 된다고 본다. 결국 충동들이 신경계를 지배하며 가치평가에 이르게 되는 더 큰 “에너지양 (Kraftmengen) ”을 가져오게 된다. 니체는 에너지 (Kraft)와 가치 (Wert)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가치의 성장은 에너지 눈금의 상승이고 반대로 하향은 가치의 감소”라고 이해하지만, 여기서 이 세계의 에너지의 유한성은 이미 전제된다. 에너지의 크기는 유한하지만 그러나 그 본질은 “유동적이며 팽팽하고 강요적”이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와 에너지의 상관관계를 인식하면서 힘에의 의지를 “에너지의 내면 세계”라고 표현한다. 힘에의 의지는 결국 삶의 토대가 되며 그 토대 위에서 삶은 더 많은 힘을 추구한다. 다시 말해 삶은 바로 힘에의 의지인 것이다.

 

삶은 그런데 전통 형이상학에 근거한 선악구분의 이분법적 도덕과 긴장 관계에 놓이게 된다. 이 도덕은 니체에 따르면 삶이 의존하고 있는 에너지와 충동의 약화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이런 도덕이 하나의 고정관념 (fixe Idee)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삶을 부정하는 본능으로서의 도덕을 부수어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에너지와 충동의 도움으로 삶과 성장이 주어지는데, 이 모든 에너지와 충동은 도덕에 의해 파문 당한다: 삶을 부정하는 본능으로서의 도덕. 삶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도덕을 파괴해야만 한다.” 행위에 대한 도덕적 해석 내지 도덕은 세계를 영원한 존재의 세계로 이해하면서 니체가 말하는 생성 개념을 알지 못한다. 그로 인해서 도덕에 의해 “죄과는 영원한 고문으로써 처벌된다”.

 

이제 우리는 니체가 ‘삶’이라는 개념으로써 의미하는 바를 보다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삶과 충동과의 관계를 고려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쓴다:

 

삶 자체는 본질적으로 낯선 자와 더 약한 자를 불법탈취하고, 상처 입히며 제압하는 것이다. 억압하고 강경하며 자기의 형식들을 강요하는 것이다. 합병하고 아무리 적고 아무리 부드러워도 착취이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예로부터 모욕적인 의도가 새겨진 바로 이런 표현을 항상 써야만 할까?

 

니체는 이 단락에서 삶을 ‘선악을 넘어서서’ 바라보고자 하며, 이러한 삶을 바로 힘에의 의지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삶과 본능의 바탕에는 힘에의 의지가 작동하고 있다. 힘에의 의지는 그러므로 전통적인 도덕적 평가 기준을 넘어서는 성격을 지니게 된다.

니체는 본능을 도덕과 대립시키는 가운데 美뿐만 아니라 醜까지도 포함하는 미학적 질문을 제기한다. 미학과 관련한 니체의 도덕 비판은 무엇보다도 칸트의 미 규정 - “무관심한 만족 (interesseloses Wohlgefallen)” - 의 거부에서 잘 드러난다. 니체는 미는 관심과 결합되어 행복 (das Glückliche)과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칸트에 대한 반대와는 달리 니체는 스땅달의 미에 대한 입장 - “행복의 약속 (une promesse de bonheur)” - 에 동조한다. 뿐만 아니라 니체에 따르면 행복은 충동의 실현을 전제로 한다:

 

칸트에 대한 반대. 물론 나는 내 마음에 드는 아름다운 것과도 관심을 통해서 결합된다. 그러나 이는 노골적으로 주어지지는 않는다. 행복, 완전함, 고요함이라는 표현, 심지어 예술작품의 침묵하는 것 및 스스로를 판단하게 하는 것 -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충동들에 말을 한다. - 결국 나는 내 자신의 충동들의 이상 (‘행복한 것’)에 일치하는 것만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예를 들어 富, 영광, 경건함, 힘의 발산, 복종은 상이한 민족들에게 ‘아름다움’ 이라는 느낌이 될 수 있다.

 

도덕 - 특히 칸트에서 - 은 미와 추의 가치 평가에서 절대성을 요구하는 가운데, 취향 (Geschmack)은 예지적인 것 (das Intelligible)과 관련되어 고정된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의 정서는 “인륜성의 상징으로서의 미 (Schönheit als Symbol der Sittlichkeit)”를 감각적인 자극에 의한 쾌감의 단순한 수용을 넘은 어떤 고상한 것으로 의식하게 되므로, 바로 이런 점에서 취향을 예지적인 것과 관련시킨다. 왜냐하면 취향은 “주관적 (subjektiv)”이지만 “보편적 (allgemein)”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여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취향은 감각적 자극 (Sinnenreiz)으로부터 어떤 억지 비약이 없이 습관적인 도덕적 관심으로 어느 의미에서는 이행할 수 있게 한다. 여기서 취향은 상상력이 자유롭게 움직이면서도 오성 (Verstand)에 합목적적이라고 표상하며, 심지어는 감각의 대상에서조차 감각적 자극이 없이도 자유로운 만족을 느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상상력은 칸트에서는 오성과 관련해 합목적적이 된다. 그 반면 니체는 취향도 변화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 미적 대상의 가치 평가와 관련해서 취향이 어떤 절대적이고 불변 고정된 요구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니체가 표현하는 이른바 “도덕적 취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취향변화의 근원을 “생리학적 사실”이라고 규정하면서 “예술의 생리학 (Physiologie der Kunst)”적 접근을 시도한다. 생리학적 변화는 그러나 생명체에 언제나 유용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니체는 취향의 역사는 하나의 독립적인 것이고 그러므로 “건강한 취향”이니 “병든 취향”이니 하는 말은 잘못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취향의 진행 가능성은 오히려 무수히 많다고 말한다. 건강하다니 병들었다니 하는 판단은 단지 하나의 ‘이상 (Ideal)’이라는 가치 판단 기준을 고려할 때만 성립된다. 하지만 이 이상이라는 것도 니체가 보기에는 늘 변화무쌍하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의 다음 글은 이해된다:

 

美나 역겨움 등은 더 오래된 판단이다. 이 판단이 절대적 진리를 요구하는 즉시 미적 판단은 도덕적 요구로 급변한다. 우리가 절대적 진리를 부인하는 즉시 우리는 모든 절대적 요구를 포기하고 미적 판단들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이것이 과제 - 다양한 동등권을 가진 미적 가치 평가들을 창조하는 것 - 이다: 각각의 가치 평가는 개인에게 사물들의 최종 사실이며 척도이다. 도덕의 미학으로의 환원.

 

이 글에서는 칸트의 구호 - ‘인륜성의 상징으로서 미’ - 에 대한 거부뿐만 아니라 선악적 이분법이 배제된 니체의 ‘관점주의적 미학 (perspektivische Ästhetik)’이 읽혀진다. 그런데 여기서 니체가 말한 미적 판단의 이상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다시 말하면 그의 관점주의적 미학을 변호하는 포괄적 판단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니체는 미와 추를 ‘힘’이라는 관점 하에서 대립시키면서 미적 판단을 “힘의 느낌 (Machtgefühl)”에 종속시킨다. 힘의 느낌 - 불어난 힘, 충만의 느낌 - 이 사물과 상태에 대하여 ‘아름답다’라는 발언을 하게 되는 반면, 동일한 상태와 사물에 대하여 “무기력한 본능 (der Instinkt der Ohnmacht)”은 추하다고 폄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미적 판단의 생리학적 출발은 바로 여기서 명료해진다. 그리고 이 힘이 가진 양가성 - 예를 들면 유용성과 위험성 - 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미의 더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유용함은 편안함과 연결되어 니체의 미 개념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아름다움: 누구나 자기에게 편안한 것 (유용한 것)의 가시적 표현이나 그런 회상을 일깨우는 것 또는 익숙하게 그와 연결되어 보이는 것을 아름답다고 부른다.” 칸트의 “편안함” - 감각적 느낌에 호감을 주는 것 (“Angenehm ist das, was den Sinnen in der Empfindung gefällt.”) - 과 아름다움에 대한 구별의 노력은 여기서 수포로 돌아간다.

 

이미 말한 대로 힘의 느낌의 창조적 사용, 즉 ‘생산적 변형 (produktive Transformation)’의 에너지 활용은 미 개념 구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니체가 비극에서 인식하는 “비극적 잔인성 (tragische Grausamkeit)”은 이 생산적 변형 위에 기초하면서 고뇌를 쾌감으로 느낀다. 이런 근거에서 니체는 비극의 새로운 이해를 시도한다. 비극을 통해 “윤리적 세계 질서의 승리”, “실존의 무가치에 대한 가르침” 그리고 “체념에의 촉구”등을 받아들이는 데에 대해 니체는 근본적으로 반대한다. 그 대신 비극적 잔인성에 처해서도 자기 스스로를 긍정하는, 즉 고뇌를 쾌감으로 느끼는 영웅적 정신을 가진 인물들을 기대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극적 잔인성의 의미는 ?도덕의 계보학 (Zur Genealogie der Moral)?에서 ‘예술가적 잔인성’으로 의미폭을 넓히게 된다. 여기서 니체는 醜의 美에로의 창조적 전환을 관철하는 방식을 명료하게 서술한다. 한 인간의 잔인성은 타인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동물적이고 낡은 자아”에 겨냥된 것임을 강조한다. 예술가적 잔인성이 가진 적극적 에너지는 선악의 기준을 넘어서 스스로에게 가해지는 ‘자기 억압’이다. 자기 억압에 기초해서 인간은 “힘들고 저항하고 고뇌하는 대상으로서의 자기에게 하나의 틀을 주고 자기의 의지, 자기에 대한 비판, 반대, 경멸 그리고 부정에 불을 지르는 것이다”. 이 작업을 니체는 “끔찍하고 경악스러우면서도 즐거운 작업”이고 “능동적 양심의 가책”이라고 표현한다. 이에 근거해서 인간은 고통을 쾌감으로 생산적 변형하며, 자기 부정을 통한 자기 긍정이 가능해진다. 아름다움이란 이런 과정을 거쳐서만 가능하다고 니체는 가르친다. 그러므로 니체의 다음 글은 이런 의미망 속에서만 파악할 수 있다: “자기에 대한 반대가 자기에게 명확해지지 않았다면, 醜가 자기에게 ‘나는 추하군’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아름다움’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5. 맺는 말

 

니체가 전통 형이상학 그리고 더 나아가 전통 철학 전반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결국 ‘유럽적 허무주의의 극복’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자기의 철학 체계 전반을 구축하였다. 다시 말해 전통비판을 통한 전통해체를 시도하고 한 발 더 나아가서 전통과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모색하였다. 이런 목적의 실현을 위해서 니체는 계보학 (Genealogie)적 입장에서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였다. 본 논문은 니체의 이러한 광범위한 시도 중에서 특히 미학의 핵심을 이루는 개념들에 대한 천착을 통해서 니체 미학이 전통 - 특히 칸트의 - 미학과 다른 점을 알아보는 데 주력하였다. 니체의 미학은 결국 삶의 문제를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가운데 삶과 예술의 관계를 힘에의 의지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해 나간다. 따라서 삶이 가치의 전면에 등장하는 가운데 전통적 의미의 도덕 개념과 당연히 긴장 관계에 놓이게 된다. 니체는 선악 구별의 이분법적 도덕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善에서 출발하는 전통 미학의 입장을 역시 비판한다. 그 대신 힘에의 의지와 관련된 ‘충동’ 개념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시도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니체의 세계관의 핵심이 되는 ‘생성’ 개념에서 출발한다. 결과적으로 디오니소스적-비극적 세계 인식에서부터 그의 미학은 형성된다.

 

 

참고 문헌

 

1차 문헌

 

Nietzsche, Friedrich: Kritische Studienausgabe in 15 Bden. Hg. von Giorgio Colli und Mazzino Montinari. Berlin, New York 1988. Zweite Auflage.

 

2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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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ssenkuhl, Wilhelm: Schönheit als Symbol der Sittlichkeit. Über die gemeinsame Wurzel von Ethik und Ästhetik bei Kant, in: Philosophisches Jahrbuch 1992. S. 91-104.

Wohlfart, Günter: Artisten-Metaphysik: ein Nietzsche-Brevier. Würzburg 1991.

 

Zusammenfassung

 

Nietzsches Ästhetik aufgrund des

Werdens und Scheins

 

Shim, Jae-Min (Yonsei Univ.)

 

Nietzsche zielt schliesslich auf die ‘Überwindung der europäischen Nihilismus’ ab, indem er nicht nur die okzidentale Metaphysik, sondern auch die traditionelle Philosophie überhaupt kritisiert. Zu diesem Zweck hat Nietzsche im ganzen sein eigenes philosophisches System aufgebaut. Dies bedeutet, dass er aufgrund seiner Kritik der philosophischen Tradition Auflösung der Tradition und weiterhin neue Beziehung zur Tradition bezweckt. Zur Verwirklichung seiner Absicht hat Nietzsche das Wesen der betreffenden Problematik immer in Hinsicht auf die Genealogie überlegt. Die vorliegende Arbeit konzentriert sich vor allem auf das Herausarbeiten der Unterschiede zwischen der Ästhetik Nietzsches und der traditionellen - besonders der Kants - , wenn sie bohrende Beschäftigung mit den Kernbegriffen seiner Ästhetik versucht. Nietzsche stellt ins Zentrum seines Gedankens den Begriff des ‘Lebens’ und davon ausgehend beleuchtet den Zusammenhang zwischen Leben und Kunst, wobei der “Wille zur Macht” immer die Grundlage des Lebens bildet. Daraus resultiert, dass das Leben im Vordergrund seines Wertsystems und selbstverständlich im Spannungsverhältnis mit dem Begriff der Moral im traditionellen Sinne steht. Nietzsche kritisiert sowohl die Dichotomie von ‘Gut und Böse' in der traditionellen Moral als auch jene traditionelle Ästhetik, die auf dieser ‘Gutheit’ basiert. Stattdessen versucht Nietzsche in bezug auf den Begriff des Willens zur Macht den des ‘Triebs’ positiv zu bewerten. Und diese neue Bewertung hängt mit jenem Begriff des ‘Werdens’ zusammen, der den Kernpunkt der Weltanschauung von Nietzsche darstellt. Infolgedessen ergibt sich seine Ästhetik eben aus seiner ‘dionysich-tragischen Welterkenntn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