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앙리 베르그송의 <있는 바 그대로의 것 le donné immédiat>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시도

나뭇잎숨결 2024. 11. 26. 08:29

앙리 베르그송의 <있는 바 그대로의 것 le donné immédiat>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시도


박 치 완*한국외대


요 약 문
베르그송의 철학은 다채색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철학영역에서는 물론이고 과학, 종교, 예술 등의 영역에 걸쳐서까지 아주 다양하게 베르그송의 텍스트들이 읽힌다. 베르그송에 관한 국내․외의 논문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다양하게 읽히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베르그송 철학의 원천지(源泉地)라 할 수 있을 <있는 바 그대로의 것 le donné immédiat ; 주어진 것, 소여(所與)된 것>과 관련한 논문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아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베르그송에게 있어 이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이 참구(參究)되지 않고서는 그의 철학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본고에서 우리는 베르그송의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을 화제(話題)로 삼아 보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베르그송이 강조한 대로,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이 결코 해 묶은 철학적 주제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언하면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은 전통의 철학에서와 같이 늘 그렇게 절대․유일의 보편적 철학 체계를 위해 복무해야 했던 서자(庶子)도 아니고 환원의 대상도 아니다. 일시적이고 변하며, 우연적이고 감각적인 그리하여 인식의 근거․근원으로써 연구가치라고는 없는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이와 반대로,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은 그 자체로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접하는 사유의 원질료이자 동시에 모든 인식론과 철학 그리고 형이상학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그런 즉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은 이제까지의 철학적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창의적 정신의 소유자에 의해 새롭게 탐구되지 않으면 안 될 철학의 중요한 新주제가 아닐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해, 이런 이유 때문에 베르그송이 말한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이 갖는 의미와 중요성이 새롭게 사유되어야 한다. 이미 완성된 것과의 비교가 아닌 이제 다시 완성해 가야 할 철학의, 새로운, 본(本)으로.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을 본(本) 삼아 베르그송은 어떻게 그의 ‘다르게 철학하기(le philosopher autrement)’를 모색하고 있는지, 현대 철학의 중심 화두로 떠오른 다른 몇몇 주제들과 이를 연관시켜 가면서 본고에서 우리는 베르그송 철학의 ‘혁명적인’ 측면들을 맛보게 될 것이다.

주제어 : 베르그송, 있는 바 그대로의 것, 지속, 흐름, 양존의 논리, 관계적 이성, 새로운 합리주의.
1.글을 시작하며: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은 단지 해 묶은 주제 에 불과한가?

베르그송은 <흐름>에 천착(穿鑿)하여 서양 철학사 전체를 의문에 붙였다. 그의 철학을 우리가 <흐름의 철학 une philosophie du flux et du reflux>이라 요약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근본적으로, 철학은 <흐르는> 사유-운동이며, 그런 즉, 철학은 그 자체로 살아 꿈틀대는 유기적 생동체(le mouvant organique)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르그송이 재구성하고자 하는 철학은 자체적으로도 변하면서 대상을 변화시키는 유기적 생동체란 점이다. 생명체와 같은 철학인 바, 막히면 뚫고, 파이면 북돋우고, 쓰러지면 일으켜 세울 것이다, 철학과 철학자를 동시에 말이다.
이렇게 볼 때, 베르그송이 말한 <흐름>은 이미 美/醜, 眞/僞, 正/反 등, 이 모든 프로크루테스적 구분법으로부터 이미 ‘초월해’ 있다. 아니, 이런 구태의연한 이원론적 구분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 자재롭게 이들 ‘사이’를 오간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또한 <있는 바 그대로의 것>과의 대화를 통해 철학의 재건을 꿈꾸었던 베르그송의 철학은 이런 이유 때문에 전통의 철학자들과는 전혀 ‘색다른’ 시각에서 철학을 새롭게 일굴 수 있었을 것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베르그송의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은 동일률의 논리를 사유의 유일한 근거로 믿고서 안이하게 인식의 칼을 휘둘러 대듯 참된 것과 거짓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으로 양분한 상태로는 접근되지 않는다. 베르그송은 이런 구분에 따라 전/후자간의 경계를 세워 그 중 하나를 철학적 체계의 푯대로 세우는데 연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있는 바 그대로의 것>과의 직접적 대화를 차단시키는 기존의 경계들을 무너뜨리면서 어떻게 이 둘 사이에 펼쳐져 있는 ‘무한한’ 중간지대, 간계(間界)를 개척할 것인지를, 다각적으로, 지속적으로, 숙고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러한 미개척된 중간, 경계의 사이에 바로 구분짓는 것으로써 철학함에 앞선 우리네 구체적 삶(la vie, 생, 생명)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생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이 구체적 삶이 ‘다소’ 모순적일 수 있음을, 마페졸리처럼, 기꺼이 인정한다. 더 정확히 말해, 바로 여기에서 그는 자신만의 고유한 사유를 촉발시키며, 이를 철학함의 최종 근거로 삼기까지 한다. 모순을 용인하지 않는 삶, 모순을 배척하려는 논리/철학, 그에게는 이는 영원히 실현 불가능한(impraticable, irréalisable) 철학적 환상일 뿐이다. 이러한 습관화된 태도(l'hatitude habituelle philosophique), 그것은 베르그송이 보기에, 문자 그대로, 이미 ‘죽음’을 좇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딜레마에 빠진 현대의 철학이 베르그송을 참조하여 개척해야 할 영역이 있다면 바로 이 <흐름>의 의미와 <있는 바 그대로의 것(眞如實相)>과의 사심 없는 대화(如實知見) 그리고 미지의 중간지대, 즉 사이를, 특히, 논리적․인식론적으로 새롭게 일구어 내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 간과된 부분에 대한 개척 없이 근대적 의미의 도구적 이성과 합리성 또는 최근 데리다나 푸코, 들뢰즈의 영향권 아래 부상하고 있는 무정부적 반이성 내지 합리성에 대한 회의주의적 태도로부터 철학이 결코 헤어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본고에서 베르그송의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을 화제(話題)로 삼았다. 위에서 간략히 살펴보았지만, 베르그송의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은 그래서 이제 전통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바처럼 논의의 가치라고는 없는 해 묶은 주제일 수 없다. 이와 반대로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은 오히려 (현대의)철학이 다시 태어나는데 있어서 중요한 방향타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사유의 원천이다. 이 작업을 통해 우리는 베르그송이 일관되게 합리주의자였으며, 그의 철학은 ‘새로운’ 이성이나 ‘새로운’ 합리성 개념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그 위상을 제대로 평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결론에 이르러, 확인하게 될 것이다.



2. 다른 길, 다른 철학

베르그송의 <흐름>은 이렇듯 우리가 철학사에서 항용 볼 수 있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역전(逆轉)의 철학”이라 할 만큼 가히 “혁명적”인, 그의 철학을 가능케한, 굳이 말해, ‘개념’이다. 베르그송의 <흐름의> 철학이 갖는 의의는 이렇게 서양 철학사가 고질적으로 범한, 이분법적으로 구획지웠던 경계들을 자유 자재로 오가면서 아직 미개척지인 중간지대를 인식론적으로 개척함과 아울러, 철학함의 분분을 현실․실재의 기계적 <공백화> 내지 논리적․이론적 <정교화>에서 찾지 않고 인간의 의식 속에서 대상과 더불어 지속하는(되는) 직접적 <체험-시간>에서 찾았다는데 있다.
대상의 체험, 이의 시간, 즉 체험-시간은, 지속한다. 대상과 사유자 사이에서 지속된다. 주지하듯이 베르그송은, 근본적으로,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이 과학자들이 믿는 바처럼 양적으로 측정되거나 계산되며 재단되지 않고 질적으로 변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지속 자체를 관통하라(pénétrer dans la durée même)”고 우리에게 당부했던 것이다.
들뢰즈의 정확한 해석이 보여주듯, 베르그송의 철학에 대한 이해는 단절이 아닌 흐름, 즉 지속에 대한 이해가 핵심이다 : “보다 정확히 이야기해, 새로운 어떤 것을 현시(顯示)하기 위해 모든 것이 지속”함으로써 우리도 이 “지속 앞에 또는 지속 안에서(devant la durée ou dans la durée)변화하는 실존”을 응시할 수 있다. 이렇듯, 베르그송의 <흐름의 철학>은, ‘흐름’이라는 말이 내포하는 일차적 의미상으로는 물론이고 존재론적으로도, 전통의 존재(의) 철학에서 변화를 고정시켜, 붙들어 양화된 논리나 추상화된 언어로 그것을 고정시켜보려는 것과는 분명 <다른 길>을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바, 결과적으로, 베르그송의 철학은 그 어떤 고정된 기준이나 잣대에 의해서 철학을 하나의 고정된 체계에 가두려 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철학 자체를 가꾸어 간다는 중요한 특징을 보여준다. 그리고 베르그송이 이렇게 일관되게 자신의 철학을 흐름, 지속 또는 변화, 운동 등에 천착했던 것은, 그 어떤 다른 이유보다도, 철학 자체를 “지성의 인식 형식”에서 해방시켜 ‘직관의 형식’을 통해 인테리어상으로는 이를 질적으로 충일화시키고, 아웃테리어상으로는 그 경계를 확장시키고자 고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베르그송이 추구했던 철학은 이미 <흐름>, <지속>이라는 두 핵심개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전통의 철학에서처럼 “사변적인 구조들을 새롭게 짜는 것”과 완전히 변별된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베르그송에게 구조나 체계의 엄밀성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직접적인 경험”이다. 그가 “직접적 경험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에 충실하자”고 했던 것은 그 동안 철학이 얼마나 지성․이성에 기대 폐단과 횡포을 낳았는지를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직접적 경험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에 충실하자”는 것은 근본적으로 철학이 늘 그렇게 언제나처럼 구물(舊物)로 버티고만 있으면 가치가 올라가는 골동품과 같은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탐구하고 일구어 갈 때 진정 가치가 있는 것이란 의미로 해석 가능할 것이다. 그러자면 당연히 철학자는 자신이 발 디딘 땅의 곡직(曲直)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베르그송에게 철학은 이와 같이 변화하는 현실을 참조한 창조행위에 다름 아니며, 사유자의 노력에 의해 새롭게 완성되지 않으면 안 될 어떤 것이다.
이런 시각을 겸비한 덕분에, 베르그송은 기존 철학의 해석이나 재해석에 자신의 철학함의 목표를 두지 않았고, 오히려 어떻게 하면 철학을 근본적으로 <있는 바 그대로의 것>에서 재구성될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흐름의 철학>은 과거를 위해 복무하는, 과거의 텍스트에 종속된 철학이 아닌 현재를 정점으로 미래를 열고자 하는 철학이라는 점을 파악하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철학의 미래를 <있는 바 그대로의 것>에서 열기 위한 베르그송의 노력은 필연적으로 고통(l'effort pénible)을 동반한다. 논리의 ‘폭력’, 이성의 ‘폭력’, 존재의 ‘폭력’, 체계의 ‘폭력’등으로부터. 그래서 베르그송은 말한다 : “이것들로부터 주어지는 고통을 감내하지 않고는 변전의 철학(une philosophie inventive et évolutive)을 일구어 낼 수가 없다”고.
변전의 철학은 무지로 가리어 ‘있는’ 것을 다시 발견하는 과학과 다르다. 베르그송이 철학을 통해 내고자 하는 사유 길(le chemin du penser)은 발견의 길이 아닌 ‘미지-개척의’ 길이기 때문이다. 체계의 감옥에서 허우적거리는 철학이 아닌 자유-체계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이유 때문에 베르그송은 한 사람의 ‘창의적’ 철학자로서 ‘과거의’ 철학들과 부득불 거친 논전(論戰)을 벌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다소 거친 논전은 그의 철학 재건, 열린 합리성 재건에서 그의 소명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성급하게 그를 비합리주의자라고 평가한다거나 - 국내외적으로 이미 이런 평가가 왕왕 내려졌었다. 심지어는 그의 초기저작들이 신학적 ‘모더니즘’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1914년 간행된 카톨릭 교회의 금서목록에 포함되기도 했지만 - 또는 반지성주의자, 신비주의자라고 평가하는 것은 피상적 단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베르그송은 결코 비합리주의자가 아닐 뿐더러 그가 개척한 철학의 길은 철저히 새로운 합리주의(un rationalisme nouveau)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베르그송의 서양 철학사에 대한 비판적 탐문과 문제제기가 합리성의 원리 자체를 위반하는 쪽으로 치닫지 않는다. 그의 과거의 철학들에 대한 비판은, 비유하건대, 희랍적 의미의 합리적 대화의 장, 즉 “아고라에서 사람들의 토의를 거쳐 인정받은 진리”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더 옳을지 모른다.
따라서 베르그송 철학의 독창성에 다가설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재고해야 할 것은 오히려 플라톤 이후 서양에서 근대까지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온 좁은 의미의 합리주의, 즉 옹색한 합리주의(le rationalisme étriqué)인 것이지, 결코 이에 대한 비판을 통해 새로운 합리주의를 개척하려 했던 베르그송에게 문제가 있을 수 없다. 이는 “베르그송을 위해서도 베르그송의 철학을 위해서도 무용한 평가일 뿐”이다. 왜냐하면 베르그송은 결코 고전적 의미의 비합리주의자들처럼 주술에 가까운 사적 ‘신념’으로 철학을 했다거나 작금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노정하고 있는 바처럼 선배 철학자들의 신념을 깨부수기 위해 ‘철학의’ 괘(掛)를 일탈한 적이 없으니 말이다. 이들과 달리 베르그송은 철저하게 철학을 합리적, 지속적으로 재구성하고자 고심했고, 이런 측면에서, 굳이 비교하자면, 차라리 하버마스나 포퍼류의 ‘개량적 합리주의자’에 가깝다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베르그송을 니체(나 데리다)와 같은 과격한 해체적 혁명가라고 평가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베르그송은 전통의 철학(자)과 맞서 싸우는, 까뮈적 맥락에 빗대어 말한다면, 반항아(un révolte)였을 수는 있으되, 그렇다고 철학에 등을 돌리고 니체나 데리다처럼 문자․문학에로 도피한 적은 없었다. ‘시지프스의 운명’에 비유될 수 있을 만큼 철학의 재건을 자신의 운명으로 알고 쉼 없이 정진했던 者였지, 결코 무지․몽매한 이카루스(Icare)와 같이 과학적 공상가는 아니었다. 끝없이 자신이 선 일상과 언어, 전통, 문화를 ‘철학적으로’ 일구려고 했던 ‘지상의’ 철학자였지, ‘말’로 바벨탑을 쌓아 보려는 추상적, 허구적 관념론자는 아니었다.
왜 베르그송이 그의 <흐름의 철학>의 원본적 사유 대상으로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을 택했는지, 또 베르그송은 어떻게 이의 복권을 통해 자신의 독특한 철학의 길을 내고 있는지를 아래에서, 밝혀가면서 우리의 궁금증을 하나씩 해소해 보도록 하자.



3. <있는 바 그대로의 것>과의 대화 재개

베르그송이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을 통해 철학-재건(une reconstruction de la philosophie)에 승부수를 두었던 것은, 이미 서두에서 예시했듯, 그 이유가 그리 복잡한데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오로지 이성의 ‘빛’을 좇으며 이성의 승인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사유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철학적 편견들을 겨냥해서 이다. 이러한 편견이 지배적이었던 결과로 우리 눈앞의, 흐르고 변화는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이 결코 진지하게 고려된 바 없었고, 특히 이들이 계속해서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논리에 목숨을 걸고 있는 한 생성․변화․감각 세계의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이 고려될 수 없다고 베르그송은 보았다.
주지하듯이,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은 고대철학에서 현대철학에 이르기까지도, 근본적으로, 철학의 참구(參究)했던 대상이 아니었다.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은 그저 일시적이고 변하는, 우연적인, 감각적인, 그리하여 인식의 근원으로 연구가치라고는 없는 것이라 하찮은 것으로 평가되었고, ‘고상하게’ 철학을 하는데 있어서 서둘러 건너 초월해가야 할(à dépasser, à transcender, à dialectiser) 어떤 것으로 폄하되기 일쑤였다. 플라톤, 칸트, 헤겔, 훗설 등을 필두로 하여 대부분의 독일의 관념론자들은 이렇게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이 아닌 이른바 시간으로부터도 공간으로부터 <초월적인(선험적, 이상적인) 것>에서 철학함의 본(本, archétype. modèle)을 찾기를 갈망했던 것이고, 이를 지성과 이성에 입각해 토대세우고자 열을 올렸던 것이다.
그뿐 아니다. 역설적으로 이를 근거로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의 세계, 즉 우리의 일상․경험․감각의 세계가 문제가 많음으로, 이상적 본에 맞추어 이 세계가 변형되어야만 한다는 억측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에, 철학사를 아무리 들추어보아도 <있는 바 그대로의 것>과의 직접적 대화(le dia-logue immédiat avec des données)를 심도 있게 시도한 철학자를 발견하기가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모름지기, 전통적(근대적) 의미의 ‘철학자’란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을 직접 ‘보려고’ 하지 않았으며, 더더욱 이것과 직접 대화하기를 원하기보다는 늘 <초월적인 것>과만 소통하기를 원했던 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철학사는 ‘초월적 보편학’이 철학의 전형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러한 경향은 현대에 이르러 가면만 바꾸어 쓴 채 ‘언어(의 유희)’에서 연장되고 있는 듯 하다. 예전보다 훨씬 극단적인 논리로 말이다. 데리다가 그 대표 주자일 것이다. 그는, 주지하듯, 철학함의 의미를, 베르그송적 의미에서 <있는 바 그대로의 것>과의 직접적 대화에서 찾지 않고, 난데없는 <ㄱ, ㄴ, ㄷ 등의 언어-텍스트>의 재해석에서 철학함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데리다의, 다분히, 자가당착적인 <해석에 대한 재해석의 기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실제로, <있는 바 그대로의 것>과 대화하기보다 텍스트 안에 안주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에), 이렇게 함으로써 발생된 문제는 철학함의 범위와 의의를 오로지 언어의 문제, 의미의 문제로 축소시켜 철학을 옥조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데리다의 ‘해체’에 한편이 되고 나면, 철학자는 텍스트의 주석자나 해석가쯤으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변화>는 변화<라는 말이나 기호로> 이동되고 만다. 분명한 것은 데리다의 해석, 재해석은 이렇게 어디까지나 ‘언어의 집’에 갇힌 언어의 유희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은 결국 사적 말놀이 속에서 이중, 삼중의 베일에 가리게 될 것이 뻔하다.
그래서 해석, 재해석은 철학자의 본질적 소임일 수 없다. 철학자는 주석가, 해석가와는 달라야 한다. 철학자의 임무는 말, 언어로부터 촉발되지 않고 자신의 눈앞에 주어진 사물들과 직접적 만남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철학자들에 의해 폄하되고 왜곡된 것은 ‘말’이 아니라(‘말’이어도 좋으나), 다름 아닌, 사물들 자체이니까 말이다. 언어로 파편화되고 조각난 사물들․대상들․현상들, 이를 또 다른 재해석된 언어로 치유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철학자가 재구성해야 할 것은 여전히 <있는 바 그대로의 것>, 사물들이지, 이에 대한 ‘색다른’ 해석, 재해석일 수 없다. <있는 바 그대로의 것>과의 끝 모를 대화를 통해 철학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가 관건이지, 타인에 의해 표현되어 유전(遺傳)된 것들을 재해석하는 일이 철학의 재구성에 도움이 될 리 없다.
베르그송이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이 갖는 의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모든 인식․지각 출발지이자 철학적, 형이상학적 목표점이어야 한다고 필자가 보는 것도, 정확히 이상의 두 맥락에서이다.
그렇다면 베르그송은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있는가? 이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7가지로 요약해 보고자 한다.

i)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은 철학의, 삶의, 철학적 대화의 원질료(l'hylé, le donné naturel)이지 결코 절대-보편적인 철학적 체계를 위해 이리저리 떠도는 서자(le donné inférieur et secondaire)가 아니다.
ii)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은 우리의 직접적 경험 속에서 늘 새롭게 말 건네오며, 바로 우리 자신‘에게서’ 살아 꿈틀대는 것이지, 결코 그럭저럭한 대상으로 사유자를 위해 수동적으로 존재한다거나, 환원의 대상으로 여겨도 되는 그런 반절의 존재(半存, 反存)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 속에서 언제나 같은 목소리, 동일한 의미로(le même donné) 적극 우리의 삶에 개입한다는 특징 때문에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iii) 이런 이유 때문에, 추상적 합리주의, 과학주의(scientisme) 또는 현대의 무정부적 언어제일주의 등에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을 내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 베르그송을 빌은 필자의 생각이다.
iv) 아니, 이런 점에서, 베르그송이 재건립코자 하는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은 우리에게 다시 사유대상으로 주어져야 할 것(le donnable)이라 할 수 있으며,또 이런 점에서 아직 미지의 상태(le donné inédit)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v) 그런 즉,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은 이제까지의 철학적 편견과 선입관으로부터 자유롭고 창의적인 정신의 소유자에 의해 새롭게 탐구되고 숙성시켜 가야야만 할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곧 베르그송이 말한 <있는 바 그대로의 것 자체(le donné même)>이다.
vi) 결론적으로 <있는 바 그대로의 것>과의 대화는 ‘새롭게’ 시작되어야(avec le donné-né et le nouveaux donné)하며, 이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본고에서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베르그송을 방어․옹호하려는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이를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vii) 이상과 같은 이유 때문에, 철학의 본(本)이 <있는 바 그대로의 것>에서 구해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며, 이는 철학의 재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4. 철학의 알파요 오메가인 <있는 바 그대로의 것>
: 설명이 아닌 체험으로 완성해 가야 할 철학의 새로운 본

이상에서 보듯이 베르그송에게 있어서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은 철학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철학이 <있는 바 그대로의 것>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알파요, 늘 이를 참조하여 완성시켜 가야 한다는 점에서 오메가이다.
베르그송의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은, 끌레망 로쎄의 현대적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실재(le réel)’요 ‘현실(la réalité)’이라 재명(再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제까지의 우리의 논의의 방향을 다소 변경시켜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 과연 실재와 현실을 떠나서 철학이 가능할 수 있으며, 이런 식의 철학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는 분명 하나의 우문(愚問)처럼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많은 철학자들이 현실보다는 이상을, 운동보다는 정지를, 시간보다는 공간을, 실재하는 것보다는 실재하는 것의 모순과 부조리를 초월할 수 있는 것에서 철학의 본을 찾아 삼고, 이를 믿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관념론자들은, 다시 강조하지만, 베르그송과 달리 실재나 현실이 철학함 또는 지각함의 단순한 징검다리 역할을 할 뿐 진정한 목표는 될 수 없다고, 이에 전혀 눈길을 주지 않으며, 이로부터 철저히 등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에 따르자면 결국 우리는 대개 가변적인 실재와 부조리한 현실이 전부라고 속고 산다는 역설이다. 그래서 이들은 대개 실재나 현실을 떠나 어딘지 다른 것(곳)에서 사유의 본을 찾았던 바, 이 세상의 ‘안’보다는 ‘밖’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미셸 푸코 같은 이는 아예 “비범주적 사유(une pensée a-catégorique)”를 주장하며, 들뢰즈 같은 이는 “유목론(la nomadologie)"를 설파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바로 이 ‘다른 것(곳)’, ‘밖’이 역설적이게도 실재와 현실의 본이 아닌 사본(寫本)이었다는 게 끌레망 로쎄의 신랄한 지적이다. 그는 이제까지의 철학의 본이 <있는 바 그대로의 것>에 등을 돌린 채로 구성된, 단지 철학자들만을 위한 일종의 공상일 뿐이었다고, 마치 베르그송이 그랬듯이, 비판하고 있다.
이렇게 실재와 현실을 로쎄의 도움으로 다시 정의하고 보면 결국, 이제까지의 철학함의 본과 사본, 현실과 이상이 뒤바뀌어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필자는 “그러하지 않았느냐”고 감히 되묻고 싶다. 그렇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이제 철학의 잘못된 이상향일 뿐이었던 사본이 본이 되기 위해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 아닌가. 역시 “그래야 한다”고 대답하고 싶다. 편집증적으로 계속해서 더욱 높은 곳을 향해 상상의 날개만을 펼 것이 아니라 철학함 속에서 실재와 현실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이것이다. 또한 현대의 ‘위기’에 직면한 철학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배가의 노력을 통해, 되살려내야 할 것도 결국은 ‘우리의’ 실재요 현실일 것이라 생각된다.
계속해서 사본이 절대 진리(la Vérité absolue)의 증거요 기준이라는 허위 믿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사유의 진정한 본인지를 다시 궁구(窮究)해야만 할 것이라는 뜻이다. 철학자들만을 위해 ‘거기(être là-bas)’에 거(居)한 진리, 즉 허위-절대 진리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통탄할 일이 아니다. 실재를 통해서는 도대체 그것의 진미를 ‘맛볼’ 수 없노라고 부정하며 화차-증기시대의 담론을 현대의 메가패스 시대에 필요한 담론과 혼동할 일이 아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철학사에서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연계될 수 있었는지, 필자의 소견으로는,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워 보인다. ‘코페르니쿠스의 전환․혁명’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라고나 할까. 아니, 이런 이유 때문에, 역설적으로, 베르그송은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을 철학함의 알파요 오메가로, 출발점이자 모태로 복원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종래 철학의 환상, 철학자들의 망상을 타파하고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을 철학의 사본이 아닌 본으로 재건해야 한다고 그는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있는 바 그대로의 것>과 함께 세워질 철학의 본은 전통의 그것처럼 논리나 언어로 이미 주어진 것도, 이미 완결되어 있는 본일 수도 없다. 그것은 “고통에 가까운 노력(l'effort pénible)”을 통해 우리가, 이제, 완성해 나가야 할 본이다. 지속적으로 완성해가야 할 본인 바, 그 형식은 아직 명확히 테두리 지워져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테두리 지워져 있지 않으므로 권력을 휘두르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완성해 가야 할 본의 주인이요 근본이다. 예측 불가능한 창조적 본이 기대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예측 불가능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변화와 운동이 실재의 진정한 모습이며, 이 실재의 진정한 모습을 파악하려 노력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 추구해야할 바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완성해 가야 할 ‘미래’ 철학의 본은, 베르그송에 따르자면, 규정된 것(être défini)이 아니라 “무규정된(être indéfini)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 사실 본이 “무규정된 것”이라는 측면에서 반론이 예상된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방법론상으로 베르그송 철학이 갖는 힘과 신선함이다. 충격이자 기회이다. 따라서 우리는 베르그송의 지도대로 이를 마치 황무지를 개간하듯 만들어가야 할지도 모른다. 이러저러한 선견, 편견, 방법, 논리 등으로부터 완전 해방되어 모든 것을 다시 연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이 철학의 사본이 아니라 본이어야 한다는 것은, 마치 철학사에서 감각이 이성을 위해 복무해야했던 것처럼, 그렇게 다루어서는 도대체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동시에 뜻하기도 한다.
베르그송은 ?사유와 생동체?에서 그가 세우고자 하는 철학의 본이 일반적 의미의 철학함을 통해서는 어려울 것이라는 것에 대해 단호히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만일 우리가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을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해 보려고 시도한다면, 이 시도는 필연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베르그송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도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베르그송의 단언이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를 짐작하는데 크게 어려움이 따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바로 우리의 ‘습관적’ 지성(l'intelligence habituelle)에 대한 비판이다. 습관적으로 지성은 설명을 이유로 분리될 수 없는 대상을 쪼갠다. 대상을 쪼개어 놓고 이를 다시 짝짓는다. 베르그송의 단언 그대로 일반적으로 철학자들은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을 ‘설명’한다는 ‘구실’로 기실은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을 직접 체험하여 자신의 인식의 폭을 확대시켜나가려 하기보다는 늘 선대의 철학자들과는 색다른 ‘개념’을 만들어 내 그것이 새로운 이론의 중심이라도 되는 냥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베르그송의 지적대로,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을 직접 체험하려 하지 않고 이렇게 ‘설명’을 빌미로 하여 <있는 바 그대로의 것>과 거리를 취하면 취할수록 그 설명은 주어진 사유대상의 안이 아닌 겉을 배회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에 대한 언어적 변설 또한 장황하게 길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나, 언어, 개념으로는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이 갖는 비분리적, 이질적, 연속적, 생기적 활성(活性) 자체를 파악할 수 없다. 혹시 파악했다면 또는 이렇게 파악되었다면 이미 그것은 <흐름>, <오감>, <운동>, <변화>가 일시적으로 정지된 것에 다름 아니요 언어로 극미한 일 부분을 개념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베르그송이 사물들과의 직접적 체험을 등한시하거나 아예 거부한 언어․개념적 설명에 대해 비판적 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이와 관련하여 다시 ?사유와 생동체?의 한 구절을 더 인용해 보기로 하자 : “스피노자의 실체, 피흐테의 자아, 쉘링의 절대, 헤겔의 이념, 소펜하우어의 의지 등, 이 모든 개념들이 비록 잘 정의된 의미와 함께(avec sa signification bien définie) 아무리 훌륭한 뜻을 갖는다 해도, 사람들이 이것들을 존재하는 것 전체에 적용하려고 하자마자, 개념은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며, 원개념은 이러한 한정된 의미마저 잃고 말 것이다. (…)〔헌데〕바로 이것이 철학적 체계들의 손꼽히는 악습(le vice initial)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결국 이상과 같은 이유 때문에 베르그송은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을 ‘설명’하려고 애쓰지 말고 “직접 체험하라”고 설파했던 것이다.
다시 정리하건대,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은 사유의 근원이요 영원한 모태다. 이에 대한 직접적 체험을 통해 개척해 낸 철학은 이런 이유 때문에 기존의 철학과 같은 색(同色)일 수 없다. 다시 말해, 체험의 질에 따라, 경우와 상황에 따라, 체험-내용의 빛깔이 체험자에 따라 각기 다를 수 있다. 내용적 다채성. 바로 이 다채색의 변주가 곧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지형학이다. 개념이나 언어가 실재나 현실의 연속성을 불연속적인 것의 등질적 다(多)로 쪼개어 버렸다고 한다면, 이와 달리 베르그송은 체험과 체험내용의 이질적 연속성을 강조함으로써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의 생동성을 강조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결국, 이상과 같은 베르그송의 입장에 충실할 때, 철학은 일색이 아닌 여러 색의 조화가 만들어 낸, 마치 생물(生物)과도 같이 나고 죽으며, 수정되고 확대되는, 그런 것이다. 그 자체가 생물과 같은 것이라, 이를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 실현된 것과 잠정적인 것,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현상적인 것과 초경험적인 것 등으로 나누어질 수 없다. 주어진 것은 그 자체로 이것들의 통째(une totalité)이다. (…) 이렇게 통째로 주어진 것을 해체하려 한다(défaire)거나 개념화하려 한다(conceptualiser)면, 이는 이미 통째로 주어진 것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 아닌가. 쟝켈레비치의 적절한 지적대로, 이제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은 결코 “저속한 지각의 원인이 아니라, 되려 우리가 재고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할 만큼, 그 동안 얼마나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이 이성의 그늘에 가려 있었는지,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인지를 진중히 반성해야만 할 시점이라 생각된다.




5. <있는 바 그대로의 것>과의 대화를 위해 요청된 새로운 ‘논리’와 ‘방법’

이상과 같이 우리는 베르그송이 말한 <있는 바 그대로의 것>에 대해 그 동안의 ‘그늘’과 앞으로 우리가 개척해야 할 ‘빛’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어쩌면 사실 이 주제(thème)가 베르그송 철학의 ‘꽃’은 아닐 수 있다. 필자가 이를 모르는바 아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의 독특한 철학이 바로 이 <있는 바 그대로의 것>에 대한 새로운 해석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이 ‘단일’ 주제가 단지 그의 초기의 저작인 ?시론?에 국한되는 것일 뿐이라고 예단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오히려 그의 주저들에서 일관되게 등장하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이 바로 이 <있는 바 그대로의 것>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베르그송에게 있어서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은 그 자체로 구심적 일자가 아닌 원심적 다산성(fécondité)을 특질로 가진, 철학함의 모태요 살아 꿈틀대는 뿌리다. 그것은 모든 철학자가 필연코 그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중요한, 마치 고향과 같은 회귀처이자, 비유컨대, ‘밖’에서 배회하다 언젠가는 ‘돌아올 탕아’들을 위해 늘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향의 부모와도 같은(une véritable matrice du philosopher) 것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베르그송 철학의 중심에 있다. 한마디로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은 베르그송에게 또 우리에게 철학함의 근거와 방향을 지워주는, 필수적인 대차대조표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어떻게 논리적 추상화나 언어적 표현 또는 언어를 빌은 ‘설명’으로 대신할 수 있겠는가? 반복해서 말하지만,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은 이런 수단들로 고착화되거나 결정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이것과 끝없이 대화하며 오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완성해 나가야 할 미래-철학의 장이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철학의 미래는 주어진 모든 것(l'ensemble des données)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던 것 아닌가.
그렇다면 베르그송은 이 통째로 주어진 <있는 바 그대로의 것>에 어떻게 돌입하는가, 이제부터 이를 미시적으로 구체화해 볼 차례가 된 것 같다.
주지하듯이, 베르그송은 이에 직관을 통해 이에 돌입한다. 「철학적 직관 L'intuition philosophique」에서 베르그송은 이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 “직관은 일종의 지적 공감이다. 이런 공감을 통해서 우리는 대상의 입장에 서게 되고, 마침내 대상에게 독특한 무엇, 즉 표현이 불가능한 무엇과 우리 자신이 동일화된다.” 이를 김 진성은, “직관은 사물에 대한 私心이 없는 인식으로서 지성․이성이 파악할 수 없는 것을 파악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즉 직관은 지성․이성으로는 분석․파악 불가능한 세계를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것이다. “분석을 고정된 것을 수술하는 것에 비유한다면 직관은 유동적인 것 내에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우리가 베르그송이 비합리주의자가 아니라 ‘새로운 합리주의’라고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다시 말해, 베르그송이 말한 직관은, “共感(la sympathie), 전체적인 경험(l‘expérience intégrale) 또는 이해관계를 떠난 본능(l’instinct désintéressé)”을 통해 대상에 접근한다.
그런 즉, 베르그송이 말한 직관은 지성․이성의 역할과 기능과 달리 <있는 바 그대로의 것>, 즉 (사유)대상에 있는 독특한 것을 “직접 깨달아 아는 것”이라 할 만큼 대단한 경지가 요구되는 사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지 못한 상태로 대상에, 마치 도구나 무기 다루듯 ‘이해관계’를 갖고, 접근하여 이의 유용성을 따지는 것과 직관은 아주 거리가 멀다. 이를 ‘깨닫지’ 못하고, 베르그송의 직관을 지성․이성과 같이 어떤 대상을 참/거짓, 옳음/그름 등으로 가르고 나누며 측정하는 것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므로, 다시 강조하지만, 베르그송의 직관은 “통째인 주어진 것”의 내부에 관통하여 그 본질적 흐름(연속적 운동)을, 역시 사유자의 연속적인 (사유)운동과 일치시킴으로써 얻어낸 결과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듯 우리는 베르그송의 이러한 ‘방법’으로써 직관을 통한 공감(共感)이 과학주의, 현상학에서 말하는 환원주의적 태도 등과 근본적으로 다름을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베르그송의 직관의 방법은 이들 태도와 다르게 ‘있는 그대로의 대상’과 편견없는 사유자가 직접 연결됨으로써 공감하고, 이러한 ‘본능적 공감’ 속에서 인식의 폭과 그 범위를 넓혀 간다. 다시 말해, 직관은 “변화하는 시간 속에 위치하는 실재를 파악〔하기 위해〕(…) 持續의 相 아래서(sub specie durationis) 성립한다." 부언하면 베르그송의 직관은 한 순간에 정지된 사실성보다, 이의 내적 깊이를 어떻게 확장시켜 나갈 것인가에 물음의 중심을 두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민코브스키 같은 철학자는 베르그송의 사유방식을 일러, “내적 투쟁”이라 했을 것이다. 베르그송에게 있어서는 이렇게 사유자와 사유대상이 <흐름>, <변화>, <운동>이 교직하여 일체화되며, 그런 결과로 특히 사유자가 그가 접하는 대상들의 농밀한 깊이와 두께를 “깨달아 알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언컨대, 베르그송의 사유는 경계로 분리된 사이에서 ‘오가는’, ‘흐르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쟝켈레비치의 통찰력대로, “철학적 탐구의 이론과 방법적 탐구 자체가 일치하는 아주 드문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베르그송의 직관이, 이름하여, <지속>과 짝을 이루고 있음에 주목했다. 지속에 대해서는 이미 본고의 문두(文頭)에서 <흐름>이라고 재정리한 바 있다. 그리고 <흐름>은 끝없이 <오가는> 특징이 있다고도 누차 강조했다. “직관적으로 사유한 것은 지속적으로 사유한 것이다”는 베르그송의 말이 이를 잘 증거하고 있다. 지속과 직관은 이렇게 상의․상관적이다. 직관과 지속은 베르그송에게 있어서 한 뿌리에 근원을 두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변화’이다. 즉 <흐름>, <운동>을 이해해야 한다. 때문에 “지속을 사유하는 것은 지속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라는 쟌 들옴므의 해석도 이해 가능하다.
이를 다시 <있는 바 그대로의 것>과 연관시켜 이야기한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있는 바 그대로의 것>과 지성․이성이 그랬던 것처럼 거리를 취하(려 하)거나 반감을 가지는 법 없이 늘 이것에 ‘본능적으로 다가서서’, 이를 ‘직관적으로 체험’하려고 해야 한다. 이 때 비로소 “‘직관적 인식’은 ‘직접적인 것(l'immédiat)’에 대한 인식”이 된다. 이렇게 <있는 바 그대로의 것>에 대한 본능적․직관적 체험은 지성․이성의 개입에 선행해서 행해진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베르그송은 ?물질과 기억?에서, “철학이 마지막으로 시도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경험을 그 근원에서 찾는 일이다” 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리라
근원을 되찾은 경험은 베르그송이 말한 앞서의 ‘전체적 경험’이다. 그런데 이 전체적 경험이 지성․이성에 의해 “극미한 일부”만이 사유되었거나, 아예 사유되지 않은 채로, 우리에게 문제로 ‘주어져 있다’고 베르그송은 보았다. 단적으로 말해, 지성․이성은 보편학을 건립한다는 미명하에, 우리의 자연적(자연스런) 경험이 새롭게 보충되고 또 늘 새롭게 보충되고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이는 경험이 우리에게 “끝없이 새로운 사실들을 제공” 한다는 기정 사실을 망각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베르그송이 재건하려는 철학은, 직관의 방법에 이어 다시, 경험과 더불어(avec l'expérience) 시작하고, 오직 경험 내에서(dans l'expérience) 새롭게 구축될 수 있다는 점이 함께 고려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식의 근원은 경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일 수 없다.”
그런 즉, “우리는〔철학의 본을 외부인 밖에 두지 말고〕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외부에서 허덕이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외부에 사는 격이 되며〔…〕시간 속에서보다 공간 속에서 살 궁리를 찾게 될 것이 뻔하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외부세계를 위해 사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있는 바 그대로의 것>에 대한 탐문이 얼마나 시급하고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이쯤해서 논의를 접기로 하고, 다음으로, 어떻게(comment)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을 “철학의 알파요 오메가”로 복귀시킬 수 있을지를 방법론적으로 모색해 보기로 하자.


1) 동일률의 논리에서 ‘양존(공존)’의 논리로

베르그송은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을 어떻게 사유의 모태이자 근원으로 건져 올릴 수 있다고 말하는가? <있는 바 그대로의 것>에의(과의) 접점을 마련하기 위해서, 문두에서도 간략히 언급했듯이, 무엇보다도 먼저 전통의 존재-중심의 논리,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일률의 논리(무모순성의 논리, la logique de non-contradiction)를 과감히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동일률에 따르게 되면, 마치 파르메니데스가 ‘존재’를 논하는 자리에서 그랬듯이, 세계를 “주어진 것은 주어진 것이요, 주어지지 않는 것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ce qui est donné est donné, ce qui n'est pas donné n'est pas donné”, 라는 타자 거세의 논리를 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있는 바 그대로의 것>과의 대화가 차단될 수밖에 없으며, 이에 대한 직접적 체험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이원론적 시각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단순화의 오류를 범하는 결과, 기존의 철학자들은 이렇게 “통째로 주어진 것(J.-J. Wunenburger)”의 <일부>를 붙들고 그것이 전부라 우악하게 고민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원론적 시각에 익숙한(결과적으로는 일원론적이지만) 과거의 철학자들은, “주어지지 않는 것은 주어지지 않는 것(불가지론)”이라 여기는가 하면 “주어진 것이 전부이다(경험론)” 또는 “주어진 게 전부가 아니고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관념론)”라 하여 그 반대편에 있는 것들(non-A)을 사유과정에서 제거 또는 도태시켜도 되는 것으로 착각했었다. 굳이 누구랄 것도 없이 플라톤이나 칸트를 언급하는 것만으로 이에 대한 필자의 설명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근대 이후 ‘서구식의’ 기계주의적 합리주의에 이르면 이러한 경향은 극단화되고 있다. 이러한 독단적 사고 패턴은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환원주의적으로 구상(구성)해낸 절대적 진리, 보편적 진리, 과학적 진리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믿었다.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일종의 지적 전쟁이 곧 서양 철학사 자체였던 것이다.
하지만 베르그송이 보기에 이는 어디까지나 일종의 편의적 방편이거나 “안이한 철학(une philosophie facile)”의 전형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설명할 수 있는 것이란 세계의 극히 일부분에 그치며, 이는 근본적으로 ‘공존(l'être-ensemble)’의 논리를 깨닫지 못한데 원인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이 정확히 지적하고 있듯이, 이는 어디까지나 “반쪽 진리”에 심취한 무지의 소치다.
그렇다면 남은 반쪽은 뭔가? 그것은 상대적이요 부분적이며 ‘철학적인(과학적인 진리와 비교하여 모호하다는 측면에서)’ 진리인가? 이에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해 보인다 :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은 이제까지 방기된 전통 철학의 주변들을 재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측면에서, 즉 ‘보편적’, ‘전체적’ 기준으로는 파악이 불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상대적’, ‘부분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편적’, ‘전체적’인 것처럼 타자를 거세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그렇지 않다”. 이 두 가지 가능한 대답은 단지 철학이 ‘만학의 여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시대의 환상, 보편학의 망상으로부터 깨어나서 보면, ‘통째인 철학’의 양면에 불과할 뿐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는 공존의 논리가 필요하다. 공존의 논리는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관계’의 논리다. 여기서 둘은 물론 대립관계가 아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둘이되 동전으로 하나다. 그러기에 둘은 대립하되 배척하지 않고 공존한다.
이렇게 둘이면서 하나, 하나이면서 둘을 동시에 아우러야 하는 <통째인 철학>은 감히 기존의 철학적 토대들을 재사유함으로써 새롭게 토대를 세우고자 하는 철학으로 - 이를, 미셀 메이에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곧 ‘문제제기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제 자신의 새로운 방법론적 기초(une nouvelle base)를 <있는 바 그대로의 것>과 터 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있는 바 그대로의 것>과 터를 닦은 철학은 전통의 철학자들처럼 반-논리를 펴려는 안이한 태도를 지양할 것이며 어떻게 <통째인 하나>를 철학화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이렇게 <있는 바 그대로의 것>과의 끝없는 긴장과 대화를 통해 구축된다. 이에 대한 집중이 이완되면 철학이 한 쪽 괘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철학이 탐구해야 할 ‘온(전한)’ 대상은 이제 파르메니데스나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그의 지적 후계자들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는 것>의 양존/공생을 밝히는 작업이어야 한다. 더더욱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는 것>은 칼로 무 베듯 자를 수 없으며 오히려 공존하고 있으므로 이의 논리를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고자 한다 :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는 것은 명확히 양분되어 있기보다는 실제 양존(兩存)하고 있다”고. 그리고 이렇게 “양존할 때 비로소 양성(兩盛, co-naître)할 수 있다”고.


2) 양존의 논리는 시간 속에서 변전하면서 빈 사이를 채운다

양존에 관한 손쉬운 예는, 앞서 동전의 예를 들었지만,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쉽게 찾을 수 있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노래가사가 있던가! 논리적으로 이는 분명 상반된 것의 병치인 바, 모순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는 이것이 모순/비모순으로 양분되어 있기보다 늘 ‘함께’ ‘섞여’ ‘겹쳐’ ‘있지(l'être-ensemble)’ 않는가.
돌려 말하면, 우리가 사는 일상의 세계 속에서는 공작인의 지성(l'intelligence habituelle de l'homo faber)이나 눈먼, 색맹인 토트(Thoth)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접근 불가능한 심연이 항존하고 있다. 그런 즉, 철학은 이의 빈 사이, 철학자들에 의해 논리적으로 분리된 사이를 지속과 직관을 통해 <있는 바 그대로의 것>으로 채워 넣어야 할 임무가 주어져 있다. 아니, 이 빈 사이는 이미 길항적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지도 모른다. 단지 철학자들이 이를 망각하고 헛되이 간극을 넓히려고 핏대를 세웠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양존적 심연에서 보면 논리적으로 상반되어 보이는 것들이 더 이상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사이가 아니다. 배타적으로 투쟁하는 사이가 아니라 오히려 수소와 산소처럼 상호 침투하고 섞이여 물이라는 제3의 창조물을 만드는 것과 유사한 필연적 관계로 ‘몸’을 섞고 있다. 부언하지만, 이 양존의 관계는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보적 관계다. 그러므로 한쪽의 지배를 위해 다른 한쪽이 종속되거나 제거․손상될 수 없다는 이치와 다름없다. 그리고 상반관계와 달리 상보관계에서는 자기가 아닌 것과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때문에 우리는 <있는 바 그대로의 것>과의 끝없이 대화해야 한다.
물론 대화는, 이미 앞서 언급했듯이, 시간 속에서, 지속되어야 한다. 지속된 대화는 처음부터 대상과의 완벽한 일치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치는 고전적 맥락에서 볼 때 부분적일 수 있지만, 여기서 ‘부분적임’이 베르그송에게 있어서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분적임이 보다 완벽하게, 차차, 보충될 것이기 때문이다.
양존(의 논리, 관계)는 이렇게 무모순성의 논리와 달리 타자를 배제시키지 않는다. 양존의 논리는 오히려 타자에 의해 매개되지 않고는 존립 불가능하다. 새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성년의 남/녀가 있어야 가능한 이치와 같이, 생의 논리인 양존의 논리는 근본적으로 “상호공생(convivialité réciproque)"이 목표인 바 절도와 조화에서 우리는 그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즉, 양존의 관계에서 투쟁은 내적 에너지이지 외적으로 사건 만들기와 구분되며, 여기서 투쟁은 내적 사건인 바, 변화의 핵인 것이지 타자를 배제하려는 권력의 기제가 결코 아니다. 타자(non-A)를 ‘죽임’으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A=A)은 베르그송이 말한 진정한 의미의 ‘양존의 논리’, ‘생의 논리’가 아닌 ‘죽음의 논리’, ‘논리의 극단’일 뿐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현대철학사에서 베르그송이 차지하는 위치 그리고 그의 “새로운 철학(une philosophie nouvelle)”을 구성하기 위한 방법론적 노력은 이제 고전의 논리, 무모순성의 논리가 폐기처분되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음을 예고하고 있다고 보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렇다. 우리가 지혜를 모아, 더욱, 살찌워야 할 삶, 그 속에서 되찾아야 할 ‘논리’는 또는 ‘방법’은 상반된 타자‘들’을 감쌀 수 있는 ‘겹 사고의 가능성(최소한 타자를 배려할 수 있는)’을 타진하는데 있을 것이다. 6. 글을 마치며 : ‘관계적’ 이성 개념의 정초를 위한 시론

예전엔 철학의 고유한 사유대상이 나무, 풀, 꽃, 새, 달, 별 등이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이제 철학의 사유대상은 바뀌고 변색되어 이런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이 아니다. 나무, 풀, 꽃, 새, 달, 별 등이 더 이상 철학의 관심사가 아니다. 아니, 이런 결과로 인해, 현대의 철학은 자신의 디딤돌이자 근거인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을 떠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언어/텍스트 내에 갇히게 된 것이다. 텍스트에 표현된(주어진) 언어가 역으로 언어를 부리는 자신의 주인을 감금한 꼴이라고나 할까. 이것이 현대철학의 역설적인 한 단면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언어중심주의’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유자 스스로가 텍스트를 덮고, 텍스트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다시 세상으로 나와 나무, 풀, 꽃, 새, 달, 별 등과 대화를 재기하는 것이다. ‘레모나드’와 레몬의 맛을 구분하려면. 장작을 태워 놓고서 별을 헤며 연인과 사랑을 나누고 싶으면. 꽃 벙그는 봄기운을 진실로 맛보고 싶으면.
그렇다. 여기에 바로 현대 철학의 위기가 있다. 철학자들이 본래적 소임을 망각한 탓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나무, 풀, 꽃, 새, 달, 별 등과 직접 만나 대화하지 못하고, 이것들과 어울려 삶의 터를 이루지 못하고 철학이 언어에 목숨을 건 결과로 불러들인 화(禍)이다. 철학이 말 그대로 언어에 의해 ‘죽은’ 것이다. 죽임을 당한 것이다. 따라서 철학이 살기 위해, 살아 있기 위해서는 이것들과 철학함이 다시 촉발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사유자가 언어/텍스트로부터 자유인일 때 비로소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은 대화에 응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직접적 대화가 가능할 때 비로소 현대가 요구하는 창의적 철학(philosophie créative) 가능할 것이다.
창의적 철학은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이 재료가 되고 내용을 이룬 철학이다. 우리가 베르그송의 철학을 자유의 철학(philosophie de liberté)이자 창조의 철학(philosophie de création)이라고 평가함으로써 우리에게 근접애 있는, 주변에 존재하는 나무, 풀, 꽃, 새, 달, 별 등과 다시 대화를 시도해야 할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른 것도 근본적으로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철학’이 자유의 철학이요, 창조의 철학일 수 있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서양 철학사에서 보지(保持)하려고 발버둥쳤던 절대이성(la Raison Absolue)의 허상으로부터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또한 이의 조작물인 <하나의 유일한 진리(Vérité unique et exclusive)>만이 존재한다는 존재․신학적 이데올로기로부터도 벗어나야 한다.
절대이성, 하나의 진리, 이것들이 바로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본 <있는 바 그대로의 것>과의 만남과 대화를 방해․차단했던 일차적, 근본적 원인이다. “인류의 공통분모에 대한 관심이 배제된”, 다분히 독백적인, 마치 ‘신앙’과 유사할 뿐인 서구의 합리주의는 그래서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며, 이 위기는 분명 “편협한 인식론에 대한 반성과 전환의 의미를 담고 있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이러한 <유일한 하나의 진리>는 그 어디에도 ‘없다’. 이는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일 따름이다. 있는 것은 오직 <변화>요 <변하는> <있는 바 그대로의 것> 뿐인데도.
따라서 그에게 진리는 ‘이미’ 이데올로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차차’ 만들어 가는 것이 진리란 의미다. 진리는 우리가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을 원재료로 삼아 ‘인간의’ 손으로, 가슴으로, 다양하게, 가꾸어 가야 하는 어떤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있는’ 것은 그 자체가 “존재할 뿐 아니라 쉬지 않고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랭 퀴노의 설명대로, 이것이 바로 과거의 이성이 가면을 벗지 않으면 안 될 이유다. 즉, 변해야 하는 것은 변화를 모르는, 쉬지 않고 활동하고 있는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서 게으름피우고 있는 이성이다. 철학의 본은 바로 이 <있는 바 그대로의 것>에서, 단선적으로가 아니라 복합적으로, 단차원적으로가 아니라 중층적으로 재검토되어야지 이성이 허구적으로 만들어 놓은, 리오따르의 표현대로, ‘황당한 이야기(les grands récits)’에 서 찾아야 할 일이 아니다. 이성이 끝나는 곳에서 베르그송적 의미의 철학이 시작될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철학자들이 이성만을 ‘신앙’해왔던 것이 문제다. 마치 신앙인들처럼 이들은 이성을 신봉해 왔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아무 것도 이성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Rien n'est sans raison).” 이들에게 이성은 곧 존재요, 존재는 또한 이성이다. 이성=존재=형이상학의 토대. 좋은 ‘말’이다. 리꾀르가 하이데거가 해석한 라이프니쯔를 다시 해석한 것에 따르면, 이와 같이 “이성의 원리 속에는 ‘있다(ist)’와 ‘토대(Grund)’ 뿐이다.” 진정 있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이성 때문에 아무 것도 없게 된 것이다. ‘있다’해도 ‘알 바’ 아니다. ‘그것은’ 대개 비가시적인 것, 비감각적인 것이라 어디 있는지,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과연 그런 것이 있는지 이성을 신앙하는 철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른다.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을 직접 사유하지 않고 이렇게 ‘있는 것’의 ‘토대’를 사유한다는 미명 하에 서양의 “관상하는 사유(la pensée méditante et spéculative)”는 숨쉬며 살아 있는 ‘있는 것’을 벌거벗겨 ‘죽인’ 것이다. 죽은 언어에 붙들려 ‘그것’은 있지 않은 곳(le non-lieu)에 있다는 억지까지 이해해야 하는 상황을 접하노라면 입이 벌어질 정도다. 이들은 왜 이리도 이성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일까? 이는 이미 그 자체로 비이성적 행위가 아닌가. 모양이 없는 허상(ce qui est non-sensible, non-visible, non-figurable)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대체 뭔가? 철학, 형이상학이란 게 대체 뭔가? 서양 사유의 본질적 그루터기가 어디에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의 반동이 이해되고도 남는다 :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정당화가 불가능한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하지만 문두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있는’ 것은 닳고 닳은 ‘이성’에 의해서는 접근 불가능하고 오직 <흐름>, <오감>을 이해할 때 접근 가능하다. 꽃은 이성이 없이도 피고 진다. 나무는 이성이 없이도 자라고 열매 맺는다. ‘있는’ 것은 이렇게 <흐름>, <오감>을 통해 나고 죽는다. 남, 죽음은 <흐름>, <오감>의 내화(內化)요 외화(外化)다. 내․외화의 과정에서 다양하게 넘쳐나는 것이 일상의, 지상의, 인간을 위한 진리다. 진리는 이렇게 볼 수 없는 만질 수 없는 ‘하나’가 아니라 “인간 의식의 확대”로 일구어진 것으로, 여럿으로, 사방에 편재(遍在)한다. 편재하는 것들의 어울림,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철학의 본래의 모습이다.
이는 또한 이성이 ‘절대’라는 허울을 버리지 못하는 한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들뢰즈는 이러한 베르그송의 내․외화된 여럿-진리를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가장 덜 이해되고 덜 평가된 측면 중의 하나”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진리가 <하나>가 아니라 편재하는 <여럿-진리>라면 당연히 기존의 파리한, 핏기 없는 ‘순-백의’ 이성은 이제 더 이상 독단적으로 사유의 우위를 점하려는 욕망을 억제해야 할 것이다.
이렇듯 베르그송이 우리의 관심을 <있는 바 그대로의 것>에로 유도함으로써 성취하는 것들이 한둘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전통의 일자(一者)진리론 비판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상에서 간략히 보았듯이, <하나의 유일 진리>를 조작해낸 이성의 역기능에 대한 비판과 이로부터 전환이 불가피함을 지시하고 있다. 그런 즉, 이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와 여럿의 관계, 사유과정에서 이 둘이 어떻게 연결되고 재연결되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바꿔 말해, <있는 바 그대로의 것>과의 ‘대화의’ 재개(再開)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이의 얼개가 될 <관계적 이성(la raison relationnelle)> ‘개념’이며, 이 관계적 이성 개념이 밝혀졌을 때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은 보다 구체적으로 그 내용이 구족․겸비될 것이다.
관계적 이성, 분명 이는 우리에게 낯익지 않은 ‘관계’와 ‘이성’의 결합어다. 베르그송이 이런 용어를 직접 사용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저서들의 도입부에서 베르그송은 기존의 이원론적 습벽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를 모색하면서 “재건해야 할 제3의 부분(la troisième partie à prendre)"이란 용어는 빈번히 사용하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필자가 이와 같은 해석을 임으로 해 보는 것인데, 이는 분명 변화를 변화로 사유할 수 있는, 흐름을 흐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이성>에 대한 요구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이성이 왜 관계적 이성이어야만 하는가? 또 관계적 이성은 새로운 이성인 것인가? 대답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일차적으로, 기존의 도구적 이성에 의해 분리․구별된 것들을 치유하기 위해서 새로운 이성이 요구된다. 두 번째로, 사물은, 대상은, 삶은 분리․구별되어 있지 않고 모두 생생지리(生生之理)로 유기적인, 생동하는 ‘하나’라는 것을 밝혀내기 위해서 관계적 이성이 요구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단적, 도구적 이성과는 다른 이성이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베르그송의 이성은 새로운 이성인 것이며,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이 분리․구별되어 있지 않고, 하나로, 흐르며, 얽혀서 삶의, 철학의 터를 이룬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그 이성은 반드시 ‘관계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정우의 직관이 옳다면, 베르그송의 이성은 분명 “이성의 능력을 보다 고차원적인 것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보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성”인 바, 이성은 이성이되 새로운 이성이면서 관계적 이성이라 이름 붙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다시 정리해 보면, 베르그송과 더불어 우리가 장차 구축해야 하는 이성은, 거의 ‘신격화’되어 있다시피 한 기존의 이성(LA raison)에 대한 과잉 충성도, 현대의 反-이성(une anti-raison), 非-이성(une non-raison, des raisons)에 대한 허무적 치기도 모두 극복한, ‘새로운 관계적 이성(une nouvelle raison relationnelle)’이며, 이 새로운 관계적 이성은 기존의 이성 또는 현대의 反-이성/非-이성으로부터 완전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양존/공생/공성의 이치를 밝혀야 하기 때문에 관계적 이성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또 이러한 과제로부터 베르그송은 결코 자유롭지 못했던 탓에, 방법론적으로 미지의 제3의 길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이렇게 “철학은 〔구성/구성의 해체에 있지 않고〕통합(융화)작업에 그 본분이 있다.” 베르그송에게 있어서 제3의 길로써 이 융화작업은 분리된 사이를 다시 잇는다는 측면에서 또한 겹 사고 (또는 겹침의 사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겹침은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포개는 것이 아니다. 겹침은 결을 살리는 사유다. 살아 있는 결을 결대로 살린 사유다. 결을 살린 사유여야 또한 여럿이 함께 살아 있을 수 있다. 뷔넨베르제의 평가대로, 베르그송의 사유는 “모순된 것들이 사유 속에서 보충성 개념으로 짝을 이루게 함으로써 하나로 결속시키고, 이렇게 함으로써 늘 공통의 근원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과 자연, 신과 인간, 이상과 초월, 감성과 이성, 남과 여 등, 이것들의 공통의 근원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베르그송의’ 새로운 관계적 이성은 이렇게 그 본질적 소임을 철학을 재구성에 두고 있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철학은 배가의 노력을 통해 새롭게 정초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리라. ‘성급하게’ 하나의 대답에 안주하려는 우리가 그에게서 배울 점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 베르그송은 이렇게 오늘날의 니체 정신의 후예들처럼 오직 전통의 이성에 대들기, 해체하기에 그치지 않고 제3의 길을 선택해 이 둘을 늘 아우르려했다는 점에서 돋보이며, 이것이 그의 철학이 과거에 묻히지 않고 우리에게까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베르그송의 철학은 ‘내부에서’ 근원을 찾는 철학으로, 확실한, 분명한 것들만으로 굳건한 하나의 논리적, 철학적 체계를 세워보려는 철학들과는 다르다. 거대한 철학체계를 세워놓고 홀로 고독하게 사는 철학자들과 다르다. 재차 강조하지만 베르그송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외부 <치장>이 아닌 내부와의 <대화>라는 점이다. 베르그송의 시각에 따르자면 그러므로 완벽한 논리적, 철학적 체계는 실현 불가능한, 있을 수도 없는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설사 이것이 환상은 아니라 백 보 양보한다 해도, 이러한 논리적, 철학적 체계는 현실에 대한, 세계에 대한, 인간에 대한 아주 적은 일부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체계는 근본적으로 변화가 아닌 불변, 운동이 아닌 정지에서 가능한 ‘가정된’ 획득물일 뿐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베르그송이 말한 것처럼 분리된 결을 다시 살린 것으로써 제3의 길, 자신뿐 아니라 타자와의 대화가 가능한 사유의 미래틀을 염려하고 고심한다면, 그의 사유도정은 우리가 이성과 비이성에서 보충해야 할 하나의 방법론적 이정표로써 매우 많은 것들을 시사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이런 측면에서, 베르그송의 철학은 이제 그것이 “새로운 철학(E. Le Roy)”이란 평가만으로는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인식론적으로 말해, 새로운 철학이란 평가보다는 어쩌면 ‘변전적(變轉的) 철학’이라 해야 보다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베르그송의 철학이 갖는 <흐름>에 맞추어 <흐르는>, <관계> 속에서 <오가는>, 그러면서 대화가 단절된 공간에 내용을 채우는 측면을 살리기 위해서 말이다. 변전적 철학은 우리가 타파해야 할 것이 바로 기존에 무성(無性, 中性)으로, 무인(無因, 無人)을 위해, 무시간성(無時間性) 속에, 인간의 접근이 불가능한 불가지(不可知)로 범인들이 범접할 수 없도록 베일에 가리어, 제 홀로 고고(孤高)하자고, 가끔씩 껌벅거리며(aletheia), ‘있는’ 그런 것이 철학의 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관습적 태도를 타파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베르그송의 변전의 철학은 모름지기 흐름이 정지된, 변화가 멈춘, 시간이 공간화된, 불변하는 어떤 ‘하나’로 ‘이미’ 고정되어 있지 않고,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같이 숨쉬고 호흡하며 부단히 그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운동한다. 여기서 우리는 베르그송이 말한 진리가 고대의 원자론적 형이상학자들이나 근대의 (과학적) 유물론자들이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베르그송에 따를 때, “모든 것이 결정론적으로 설명되는 순간, 인간의 죽음과 함께 세계의 죽음이〔시작된〕다. 즉 〔이렇게 되면 종국엔〕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게(…)된〕다.” 이것이 베르그송이 “결정론자들에게 한 가장 엄숙한 경고이다.”
결정론자들의 하나-진리와 달리, 앞서 언급한 대로, 베르그송이 말한 여럿-진리는 푸코가 강조했듯 권력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이에 “저항하는 도구”라 할 수 있다. 여럿-진리는 “같음이 같음을 산출하는(le même produit le même) 것과 같은 원리”를 통해서는 밝혀질 수 없기에, 이를 원천 봉쇄하는 하나-진리에 저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저항은 “실재적, 구체적인, 살아 있는 사유(la pensée réelle, concrète, vivante)”를 건립하기 위해서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이런 이유 때문에 또한 여타의 철학들과는 <다른 것>, <색다름>, <차이남>으로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인다.
그런 즉, 우리가 만일 사유의 자유, 자유-사유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철학의 재건을 놓고 고민하고 있다면, 베르그송의 <있는 바 그대로의 것>이 모두(冒頭)가 된 그의 철학 여정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며 <있는 바 그대로의 것>과의 ‘직접적’ 대화를 통하지 않고 어떻게 ‘새롭게 철학하기(un philosopher tout autrement)’가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인지 되집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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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littéraire, n˚394, janvier 2001.




Résumé

L'essai d'une lecture nouvelle sur chez Henri Bergson

- Park, Tchi-Wan -

La philosophie d'H. Bergson a une “porte" très ouverte qui permet d'entrer et de sortir librement. De ce fait, les textes d'H Bergson se présentent en diverses couleurs : philosophique, scientifique, religieuse, etc.
Toutefois, cette tendance trop souvent négligée d‘un philosopher “bergsonien", paraît qu'elle ne porte presque jamais intérêt du . Comme si le , qu‘il soit bergsonien ou non, était conçu toujours inférieur et secondaire, comme “chose" qui doit se soumettre à Un système philosophique prétendu Absolu et Universel.
Cette article a donc pour objet de réintroduire au une “source" renaissante. Selon nous, le qu‘il faut s'adresser à quiconque veut penser une base indispensable à restituer, sans excès ni manque, sans importance ni insignifiance. Cela dit que le est essentiel et primordial pour toute la philosophie et pour toute notre vie.
Notre étude n'est pourtant pas de faire entrer en rivalité “dualiste" entre “ce qui est" et “ce qui n'est pas", mais bien au contraire de restaurer le dialogue interrompu entre ces deux modes de penser bien opposés. C'est là, en fait, le “philosopher autrement bergsonien" qui ne va s'achever, non pas par l'explication logico-philosophique de manière “moderne dogmatique" ou “postmoderne anarchique", mais que par la durée selon laquelle on peut reprendre une méthode nouvelle, méthode qui n'est pas déjà formée, mais qui est formante à la faveur de la raison dialogique et relationnelle.
Seulement dans ce contexte, il n'est pas impossible qu‘une porte ouverte “bergsonienne" puisse servir un rationalisme nouveau, mais c'est encore loin d'être une évidence, si le ne se rend pas ses statuts originels.

※ Mots-clés : H. Bergson, Donné immédiat, Durée, Raison dialogique et relationnelle, Rationalisme nouvea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