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칸트의 도덕법칙, 자유 그리고 최고선

나뭇잎숨결 2021. 11. 6. 08:15

칸트의 도덕법칙, 자유 그리고 최고선

 

 

김석수(경북대 철학과)

 

 

1. 도덕철학의 정초를 위한 예비 단계 

 

칸트의 이론은 규범(nomos)과 자연(physis)이 동열에 있었던 고․중세의 세계관(실체론적 자연법, 유기체적 자연관, 목적론적 세계관)과 이 둘 사이가 완전히 분리되어버린 근대 초기의 세계관(계약론적 자연권, 원자론적 자연관, 기계론적 세계관)을 고민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그는 이 둘 사이를 통일적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발생하는 주체의 왜소화도 벗어나고(의무lex의 시대), 이 둘 사이를 완전히 분리시켜버림으로써 주체의 거대함도(권리ius의 시대) 거부한다. 그는 주체의 왜소함 속에서 주체의 당당함을 발견하고, 주체의 거대함 속에서 주체의 겸손을 불러들인다. 그것이 바로 ‘비판’이라는 용어이다. 특히 그는 개체적 주체가 각기 비대해짐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무질서 속의 불안을 다시 정립해야 하는 상황을 목격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작업을 하기 위하여 더 이상 근대 이전의 자리로 되돌아가 질서를 인간 주체 바깥에 설정해 놓을 수는 없었다. 그는 근대적 정신을 계승하여 질서를 인간 주체 속으로 가져오되, 주체의 반성과 비판을 감행하였다. 그의 3비판서 속에 담겨 있는 비판 정신은 이성이 할 수 있는 것은 당당하게 수행하고,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겸손하게 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의 이와 같은 태도는 자연의 질서와 도덕의 질서에 대한 새로운 자리 매김을 시도하도록 만들었다. 그 자신이 철학 하는 목적을 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빛과 내 마음에 빛나는 양심의 질서를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듯이, 그는 자연의 질서와 마음의 질서, 사실의 질서와 가치의 질서, 욕망의 질서와 당위의 질서, 이 모두를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있는 사실의 세계를 다루는 학이 어떻게 보편성과 필연성을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한 정당성 문제와 관련하여 자연형이상학을 구축하려고 하였고, 당위의 세계를 다루는 학이 어떻게 보편성과 필연성을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하여 도덕형이상학을 구축하려고 하였다.1)

그는 이런 작업을 통하여 자연의 질서와 도덕의 질서를 인간 주체 쪽으로 귀환시켰다. 그러므로 그는 자연의 형식적 입법자이자 마음의 형식적 입법자를 인간 주체 안에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근대성의 철학자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이 질서의 주체가 결코 자기완성을 하기 위해서는 그 질서의 공허함을 벗어나도록 도움 받아야 하는 타자로서의 물 자체의 존재가 불가피함을 시인하고 있다. 시간․공간이라는 감성 형식과 12범주라는 지성(Verstand) 형식은 이미 그 자신의 생동력을 위하여 그 형식 속에 내용을 제공해주는 주체 바깥의 타자를 필요로 한다. 마찬가지로 실천이성의 순수 의무의 형식은 자신의 생명력을 완성하기 위해서 행복을 제공해주는 타자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칸트에게서 인식의 완성과 의무의 완성은 타자 속에서 온전히 실현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는 근대적 주체의 과도함에 이미 비판적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칸트의 ‘비판의 길’은 중간자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나아가야 할 ‘사이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사이길’은 그저 평탄한 길이 아니고 늘 힘든 과정을 겪어야 하는, 즉 명령을 인지해야 하는 가시밭길이다. 칸트의 주체는 법칙을 입법하면서도 법칙에 종속된다. 그는 자연법칙을 입법하지만 자연법칙에 따르게 되며, 도덕법칙을 입법하지만 도덕법칙에 따르게 된다.2) 그의 이런 관점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는 것이 바로 ‘제삼 이율배반’이다.

칸트의 도덕철학은 『순수이성비판』의 ‘변증론’에서 나타나는 영혼, 세계, 신의 논의와 관련해서, 특히 ‘제삼 이율배반’의 해결과 관련하여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에게서 이율배반이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 창조주적 능력이 아니라 건축가적 능력밖에 없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한데서 비롯되고 있다. 그는 인간 이성의 과욕에서 비롯되는 자연과 자유의 이율배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정립 :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원인성은 그것으로부터 세계의 모든 현상들이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원인성이 아니다. 현상을 설명하려면 그것 외에 자유에 의한 원인성(eine Kausalität durch Freiheit)을 상정하는 것이 필연적이다(KrV., B472).

반정립 : 자유라는 것은 없다. 세계에 있어서의 모든 것은 기꺼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일어난다(KrV., B473).

이 세계와 관련하여 어떤 사람은 세계에는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원래 이율배반이란 동일한 대상에 대해서 동시에 상반되는 주장을 하게 될 경우를 말한다. 따라서 세계라는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동시에 ‘자유가 있다’와 ‘자유가 없다’라는 주장이 성립되면 이것은 이율배반적 상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율배반의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립과 반정립 중 어느 한쪽을 부정하는 상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칸트의 경우 이런 선택은 자신이 자연형이상학과 도덕형이상학을 모두 정초하고자 하는 입장에 배치된다. 그는 이 두 형이상학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둘 다 맞는 주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 이율배반이라는 곤란한 상태에 직면하게 된다. 그는 여기에서 이율배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이 두 차원을 성립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자 한다.

그의 이런 작업은 이미 『순수이성비판』의 ‘감성론’과 ‘분석론’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여기에서 현상과 물자체를 구별하는 초월적 관념론(경험적 실재론)을 강구함으로써 자연법칙은 현상 영역에, 자유법칙은 물자체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것은 그가 도덕신앙의 길을 위하여 과학인식에 제한을 가한 목적과 합치하는 것이다. 그는 현상계에서는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의 기계적 관계 속에서 결정되어 있지만, 물자체 차원에서는 스스로 시작하는 초월적 자유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물론 그가 주장하는 초월적 자유는 현실적 실재 상태가 아니고 우리에게 부과된 이념적 상태이다. 이처럼 그는 세계를 현상계와 예지계로 구별함으로써 이율배반에 빠지지 않으면서 자연필연성과 자유를 동시에 성립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였다.3) 따라서 그의 ‘초월적 관념론’은 자연법칙과 자유법칙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하는 목적을 담고 있다. 이처럼 그는 자연형이상학과 도덕형이상학의 양립론을 주장하고자 한다.

그는 이와 같은 입장을 바탕으로 초월적 자유를 마련하고,4) 이 초월적 자유를 토대로 의지의 자유를 가능하도록 하며, 나아가 이 의지를 자유를 통하여 도덕법칙이 성립 가능하도록 하였다. 즉 스스로 시작하는 그 어떤 자유로운 자를 상정하지 않으면 결국 의지가 스스로 자유롭게 의욕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이 가능하지 않으면 상대에게 도덕적 책임을 묻는 작업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2. 자유, 도덕법칙, 선의지, 정언명법 그리고 형식주의 

 

칸트에 의하면 부과된(aufgegeben) 세계로서의 이념(영혼, 자유, 신)은 이론이성을 통하여 접근될 수 없고, 실천이성을 통하여 접근되어야 한다. 그는 이와 같은 목적 아래서 초월적 이념이 평가 절하되거나 손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의 이론적 인식과 관련하여 그것에 한계를 철저히 긋고자 하였다(KrV., B xxv). 인간의 이성이 요청하는 영혼과 자유와 신이라는 이념은 이론적으로 실재성이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실재성이 확보된다. 특히 영혼과 신이라는 이념은 자유라는 이념을 통하여 확보된다.5) 칸트는 이 점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순수이성의 비판적 원칙들이 지니고 있는 적극적인 유용성들에 대한 바로 이러한 상세한 논의는 이나 우리 영혼의 단순한 본성이라는 개념과 관련해서도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간결하게 하기 위해 이와 같은 개념들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생략하고자 한다. 따라서 나는 사변 이성에 대해서 그것이 엄청난 통찰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권한을 빼앗지 않는다면, 나의 이성의 필연적인 실천적 사용을 위해 신, 자유, 영혼불멸과 같은 것을 단 한번도 가정해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사변 이성은 자신이 이러한 통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가능한 경험의 대상들에만 확장하는 원칙들을 사용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원칙들이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에 적용된다면, 이러한 원칙들은 항시 이 대상을 현상으로 변하게 만들기 마련이며, 따라서 순수 이성의 모든 실천적 확장이 불가능한 것으로 선언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신앙을 위한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지식을 중단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의 독단론, 즉 순수이성의 비판 없이 형이상학에 진전을 가져오려는 편견은 도덕성에 반하는 모든 불신의 진정한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와 같은 기본적인 태도에 입각하여 도덕철학을 개진한다. 그의 도덕철학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도덕성의 기초를 찾는 것으로 실천적 법칙(도덕법칙)에 관한 논의와 그 존재론적 근거로서 자유에 관한 논증을 다루고 있으며, 두 번째 부분은 도덕성을 인간의 궁극적 목적과 관련하여 목적의 왕국, 최고선, 그리고 이성 신앙에 관해서 논의한다. 칸트에 의하면 “자유는 도덕법칙의 존재 근거(ratio essendi)요 도덕법칙은 자유의 인식 근거(ratio cognoscendi)이다.”(KpV. V권, 4쪽) 우리는 지적 직관의 능력을 지니지 못하고 단지 현상적 자연의 기계적 법칙만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자유를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이성의 사실(Faktum der Vernunft)(혹은 요청)로서 주어져 있는 도덕법칙6)으로부터 자유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칸트 철학의 경향은 전형적인 근대적 사고이다. 그의 철학은 ‘존재에 대한 믿음의 시대’가 무너지자 ‘의심의 주체로 등장한 이성 자신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는 계몽(Aufklärung)을 스스로 사유함(Selbstdenken)으로 규정하고, 존재와 당위, 자연(physis)과 규범(nomos)을 구별한 근대 일반의 정신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그는 근대인의 분노와 배반의 열기가 터뜨린 혼란의 세계를 그냥 놓아둘 수 없었다. 당시 그에게는 다시 이성 자신의 힘을 통하여 질서와 통일을 이루어내는 것이 절실한 과제였다. 그는 부정된 자연의 질서와 마음의 질서, 이 모두를 다시 통일로 이끌어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전자의 법칙설정을 통하여 자연형이상학을 설립하고, 후자의 법칙설정을 통하여 도덕형이상학을 설립하고자 했다. 그는 지성의 자연입법과 의지의 도덕입법을 통하여 자연의 질서와 마음의 질서를 다시 기초 놓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전자의 법칙이 후자의 법칙에 침식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 점에서 그는 근대인이면서 동시에 근대인을 넘어서고자 했다.

칸트는 이와 같은 기본적 태도 위에서 도덕법칙을 ‘순수이성의 사실’(Faktum der reinen Vernunft)로서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태도7)는 인간이 인간답고자 하는 자기매질로서의 인간의 숭고성과 존엄성에 대한 절규라고 볼 수 있다(GMS. VI권, 439-440쪽. KpV. V권, 77쪽).8) 칸트는 인간을 자연적 경향성의 노예로부터 탈출시키기 위해서 인간에게 힘든 법칙의 멍에9)를 짊어지게 했다.10) 이 점에서 볼 때 칸트는 경향성과 법칙성11)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을 진정한 인간으로 파악했음을 알 수 있다.12) 인간은 자신의 자연성과 모순을 일으키는 법칙을 자신의 삶의 조건으로 자발적으로 수용할 때, 즉 법칙에 대한 존경13)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태도를 취할 때에만, 참된 인간다움을 구현할 수 있다.14) 칸트는 바로 이 법칙에 대한 존경으로 법칙을 추구하는 주체를 순수실천이성 내지는 실천의지라고 했으며, 특히 이 의지가 오로지 법칙에 대한 존경으로 말미암아 행위 하게 될 때 그 때 그 의지를 선의지15)라고 했다. 이 의지(Wille)16)는 주관적 원칙(준칙)에 따르는 자의(Willkür)와는 달리 객관적인 원칙(명법)을 추구하는 주체이다. 따라서 이 주체는 가언명법을 자신의 삶의 조건으로 받아드리지 않고,17) 정언명법을 자신의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인다.18) 그는 정언명법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고 있다.

정언명법 :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하라.“(GMS., A55)19)

이것은 곧 인간의 인간다움의 조건이 주관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주관적 자유를 통하여 확보될 수 없고, 객관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객관적 자유를 통하여 확보될 수 있다라는 것을 의미한다.20) 즉 이것은 인간다움의 조건이 타율이 아니라 자율(GMS. IV권, 436쪽)을 통하여서만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에게 있어서 인간을 인간이게 해주는 것은 객관적 자유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 자유는 의무21)를 의무로서 이행하는 동기주의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즉 이 자유는 의무에서(aus Pflicht) 나온 행위여야지 의무에 적합한(pflichtgemassig) 행위여서는 안 된다.22) 이 점에서 칸트는 전통적인 행복론, 즉 현세적인 행복이든 초현세적인 행복이든 그것들을 목적으로 고려하는 모든 목적론적 윤리설을 거부한다. 따라서 그는 행복을 획득하는 방법을 안내해주는 영리의 명법이나 처세술도 거부한다. 칸트는 초감성적인 세계만이 진정한 무한성(KpV. V권, 162쪽)을 지닌 세계이므로 도덕법칙에 충실하게 따라 사는 삶을 행복추구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칸트는 행복을 결코 무시하지는 않지만, 한 인격이 지닌 덕과 도덕적 가치는 행복을 위한 최상의 조건이므로, 도덕적으로 무가치하게 삶을 사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보고 있다. 결국 칸트에게서 정언명법은 인간의 숭고성과 위대성의 본질적 조건이다. 즉 정언명법에 따라 사는 삶은 현재와 미래에 누릴 행복과 상관없이 인간이 마땅히 실현해야 할 존엄성에 어울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23) 이렇게 살 때에만 비로소 인간을 다른 존재와 구별지워주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칸트는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너는 해야하기 때문에(Du kannst, denn du sollst)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처럼 그에 의하면 의무를 동반하지 않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인간이 도덕성을 실현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없다.

 

3. 전형(Typus)과 목적의 왕국  

 

칸트는 정언명법으로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도덕법칙이 형식적 원리로서 공허하게 머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개별적 행위가 보편적인 도덕법칙에 위배되는지 안 되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지침서 내지는 전형을 필요로 하였다. 예지계와 감성계, 보편적 원리와 개별적 행위를 매개시켜주는 기능을 하는 실천적 판단력의 전형은 일종의 도식(Schema)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우리 인간의 실천적 판단력은 어떤 행위가 실천이성의 근본법칙에 합당한지 안 한지를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예지적 자연이지 경험적 자연이 아니다)의 법칙(합목적성이지 합법칙성이 아니다)에 비추어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의 법칙은 도덕법칙의 전형이 된다. 이렇게 전형을 매개로 삼을 때 실천이성의 근본법칙에 입각한 판단력의 규칙은 다음과 같다.

만약 네가 하고자 하는 행위가 너 자신을 일부로 삼는 자연의 법칙을 따라 일어난다면, 너는 그 행위가 네 의지를 따라 가능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스스로 물어라.(GMS. IV권 421쪽)24)

너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격에 있어서의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수단으로 대하지 마라.(KpV. V권, 430쪽)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 그 준칙에 의하여 항상 보편적 목적의 왕국의 입법적 성원인 것같이 행위하라.(GMS. IV권, 429쪽)

인간이 다른 존재와 질적으로 다른 점은 인간에게 도덕적 소질(Anlage)이 있기 때문이다(KpV. V권, 131-132쪽). 우리 인간이 선의지에 의거하여 도덕법칙을 존경하여 의무에서 행위 하는 것은 곧 인간이 인격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서 다른 것을 위해 값어치를 지니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는 가격을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GMS. IV권, 428, 434쪽)(MdS. VI권, 434-435쪽). 이런 존재들이 모여 사는 나라가 바로 목적의 왕국이다. 이 때 목적은 사적인 목적이나 질료적 목적과 같은 상대적이고 임의적인 목적이 아니고 객관적인 목적으로서 모든 사람이 다같이 추구해야 하는 목적이다. 즉 이 목적은 행복 추구의 영역에 속하는 주관적 목적이 아니고 도덕성의 영역에 속하는 객관적인 목적이다.(GMS., IV권, 427쪽) 이 목적의 왕국에 존재하게 될 인간 역시 인격으로서의 객관적 목적 자체이어야 한다(GMS. IV권, 428쪽, KpV. V권, 87쪽, MdS, VI권, 434-435쪽). 따라서 이 왕국은 “공통된 법칙을 통한, 여러 이성적 존재자들의 체계적 결합”(GMS. IV권, 433쪽)으로 이해된다. 이 목적의 왕국은 자연의 왕국과는 달리 모든 “예지인의 총체”(GMS., IV권, 462쪽)를 의미한다. 즉 “물 자체로서의 이성적 존재자의 총체”(GMS., IV권, 458쪽)이다. 이와 같은 목적의 왕국은 현실적인 왕국이 아니라 도덕적인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이상적인 도덕적 공동체이다. 이런 왕국에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과된 왕국이다. 이런 “목적의 왕국”의 실현을 통해 우리는 “초감성적인 자연으로서의 지성계라는 형식을, 감성적인 자연으로서의 감성계에게(이성적 존재자에 관계하는 한) 감성계의 메커니즘을 깨뜨림이 없이 부여할 수 있다.”(KpV. V권, 53쪽). 목적의 왕국은 이 세상과는 다른 어떤 곳에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이성적 인간의 도덕적, 실천적 행위를 통해 이 세상에서 실현될 수 있는 세계이고, 이것은 감성계에 “초감성계의 형식”을 부여하는 세계이다. 만일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단지 수단으로 대하지 않고 항상 목적 자체로서 대한다면 그와 같은 “목적의 왕국”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세계로 칸트는 보고 있다.(GMS., IV권, 438쪽)25)

 

4. 최고선과 실천이성의 요청26)-영혼불멸과 신의 존재 

 

칸트에 의하면 덕뿐만 아니라 이성적 존재자들이 추구하는 행복도 최고선에 속한다. 물론 이때의 행복은 의무를 저버리고 오직 자신의 욕구충족으로부터 오는 행복이 아니라 “각자의 덕에 상응하는 행복”을 뜻한다.(KpV., V권, 129쪽) 따라서 사람은 행복하길 바라되 자신의 덕에 비례하는 분량의 행복만을 희망해야 한다. 자연적 인간은 “행복에 대해 가장 강렬하고 가장 깊숙한 경향”(GMS., IV권, 399쪽)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으면서도 도무지 이성적 존재자가 추구하는 도덕법칙의 세계와 조화를 이룰 수가 없다. 이런 모순이 인간의 상황이다. 그러나 칸트는 공평한 이성의 관점에서 볼 때 도덕적으로 선한 삶을 사는 사람은 그 덕에 상응하는 행복을 누릴만한 가치가 있고, 그것을 실제로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정반대이다. 하지만 선한 의지를 가지고 사는 것은 “행복하게 될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와 같은 가치에 상응하는 행복이 보장되어야 한다(GMS. IV권, 393쪽).27)

하지만 칸트는 최고선이 순수의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법칙이 순수의지를 움직이게 한다(KpV. V권, 109쪽). 따라서 도덕법칙이 최고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지 최고선이 도덕법칙을 가능케 하는 것이 아니다. 도덕법칙으로부터 비롯되는 덕에 비례하여 행복이 분배될 때 비로소 최고선이 실현되는 것이다(KpV. V권, 114, 128쪽).(여기에 벌써 그의 도덕신앙 내지는 이성신앙의 단초가 보인다.)

칸트가 말하는 ‘최고선’이라는 것에서 ‘최고’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 즉 최상(supremum)이라는 의미도 있고, 완전히 이루어짐(consummatum)이라는 의미도 있다(KpV. V권, 110쪽). 덕은 최상선(bonum supremum)이라는 의미에서 최고선이지만, 아직 완전히 이루어진 선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덕은 이성적이지만 행복을 추구하는 자연적인 존재로서의 인간 자신이 획득하고자 하는 완전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KpV., V, 128쪽). 적어도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완전선에는 덕뿐만 아니라 행복도 요구된다. 그러므로 완전선은 덕에 비례하여 행복이 이루어져 도덕적이면서 자연적인 존재인 우리 인간의 욕구를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선이어야 한다. 그러나 칸트는 이런 최고선이 인간의 힘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고 신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KpV. V권, 124-25쪽).

하지만 칸트는 이 최고선을 신의 뜻에 따라 수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이 최고선을 인간의 의지를 통하여 현실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선으로 파악하고 있다(KpV., V권, 113쪽). 그는 이 최고선의 현실적 실현가능성을 요청28)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영혼의 불멸성, 신의 존재 및 자유를 요청하고 있다.

그는 덕과 관련하여 이것은 감성의 저항에 대하여 그것을 억누를 수 있는 도덕적 힘 혹은 용기(MdS. VI권, 380쪽)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덕은 우리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노력하여 얻게되는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힘과 용기이다(MdS. VI권, 477쪽). 그러나 이 힘과 용기가 완전히 발현되기 위해서는, 즉 도덕적 완전성의 실현을 위해서는 무한히 진보해야할 의무가 있고,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불멸이 요청되지 않으면 안 된다. 최고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영혼이 불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고선은 도덕적 진보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인격의 불사성을 전제로 할 때에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그리고 칸트는 최고선의 구성 요소 중의 하나인 덕의 실현을 위하여 영혼의 불멸을 요청하듯이, 이 덕이 행복과 일치하기 위해서 이제 신의 존재를 요청한다. 그는 선한 사람은 현재 그 선함에 비례하여 충분히 보상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언젠가는 그것이 가능한 도덕적 질서가 있어야 하며, 악한 사람은 그 악한 행위에 비례하는 처벌이 가능한 도덕적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공평무사한 이성”은 이것을 믿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칸트가 여기에서 주장하는 “보상하는 도덕성(lohnende Moralitaet)"에 대해서 오해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 보상 여기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으로 말미암아 의무를 다한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KrV. B837-838). 세계가 결국은 모두 신이 다스리는 세계일 때만이 덕에 비례한 행복의 분배가 가능하다. 신은 “최고선의 이상”(KdrV. B838)이고 그 자신이 최고선이며, 우리가 도덕적 행위를 통해 지향하는 최고선은 이 근원적인 최고선으로부터 파생된 최고선이다. 따라서 우리가 계속적으로 신을 닮으려고 애쓴다면 신이 가지고 있는 행복을 희망할 수 있다.

적어도 우리 인간에게는 자유를 요청하지 않으면 도덕법칙은 무의미하다(GMS. IV권, 461쪽). 반면에 영혼의 불멸성과 신의 존재는 도덕법칙의 가능조건이 아니라 순수 이성의 최종 목적인 최고선을 위한 가능조건이다.(KpV. V권, 4쪽) 그러므로 최고선이 가능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 자유가 있는 한 정언명법을 따라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영혼의 불멸성과 신의 존재를 요청하지 않아도 도덕법칙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요청되지 않는다면 최고선은 불가능하고 만일 이 최고선이 불가능하다면 균형 잡힌 “목적의 왕국”은 일그러진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도덕적으로 아무리 선하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미래에 대해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 없으며, 결국 도덕적 삶은 희망을 잃은 채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KpV. V권, 143쪽, GMS. IV권, 462-463쪽). 그러므로 최고선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믿음이야말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도덕적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고 칸트는 보고 있다.

순수실천이성의 요청은 이론적 명제이긴 하지만 그것은 실천적인 관심과 관련해서 수용될 수 있는 것일 뿐 객관적 인식(Wissen)의 지위를 지니지는 못한다. 요청은 이론적 명제이면서도 오히려 인간의 실천적 관심과 관련 있고, 이와 같은 의미에서 그것은 믿음(Glauben)의 지위를 갖는다.29) 칸트는 우리가 참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 중30)의 하나, 즉 믿음으로 생각하고 있다(KrV. B850). 물론 이 때의 믿음은 논리적 확실성이 아니라 도덕적 확실성을 의미한다.31) 이런 도덕적 믿음은 인간 이성의 본성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이론 이성의 차원에서 “객관적 실재성”을 증명할 수 없었던 세 가지의 초월적 이념을 실천적 관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5. 나가는 말 - 칸트의 이성 신앙론과 관련하여 

 

칸트가 요청하는 세 존재와 관련하여 그가 내세운 도덕적 믿음은 정당한 믿음일 수 있는가?32) 칸트는 감성적 욕구와 이성적 욕구를 구분하고 전자의 경우는 욕구 한다고 반드시 그 대상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그는 ‘실천이성의 요청들’을 ‘사변이성의 가정들’(KpV. V권, 142쪽)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 요청의 대상들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실천적 객관성을 지닌 사실로 취급하고 있다.

이 주관적인(주체적인), 그러면서도 참되고 무조건적인 이성의 필연성을 표현하는 말로서 ‘요청’이란 말보다 더 나은 표현을 나는 알지 못한다(KpV. V권, 11쪽).

칸트의 이런 이성 신앙은 신의 정체에 대해 전혀 알려줄 수가 없다. 또한 우리의 자유의 출처에 대해서도 전혀 알려줄 수가 없다. 칸트는 은총을 입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덕으로 나아가는 것이 올바른 길이 아니라, 오히려 덕으로부터 출발하여 은총으로 나아가는 것이 올바른 길“33)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도덕적인 신의 백성을 창조한다는 것은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 자신에 의해서 수행될 수 있는 것으로 기대될 수 있는 작업이다.“(DRi., 759-760쪽)

칸트의 이런 이성 신앙은 지식의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영역이다. 그는 신앙을 위해서 지식에 한계를 설정했다.

칸트의 이성신앙론 내지는 도덕신앙론에서는 도덕과 종교34)가 배타적이지 않고 상호 보완적이다. 그러나 카트를 비판하는 사람은 이들의 관계가 대립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고 비판한다. 즉 도덕적 원리에 바탕을 둔 자율성과 신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둔 종교성 사이에 부조화가 자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칸트의 이론은 이 둘 중 어느 하나에 우선권을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에 놓여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칸트는 우리가 “자율이냐 신에 대한 믿음이냐”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이런 양자택일적 태도는 종교와 eejr 중 어느 하나를 우위에 두고 바라보는 관점이다. 적어도 이런 태도는 종교가 도덕의 기초를 이루거나, 아니면 종교는 도덕에 쓸모없고 해롭다라는 잘못된 전제에 의존하고 있다. 이미 고찰되었듯이 물론 도덕적 행위는 도덕법에 대한 존경 이외에 다른 동기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런 행위가 최상의 단계를 넘어 완전의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종교”(VI권, 6쪽)로 나악지 않으면 안 된다. 칸트가 보기에 종교는 도덕의 토대가 아니라 도덕의 결과이다.

사실 플라톤과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의무와 경향성 사이의 갈등은 현세에서만 일어나지 피안에서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칸트에게는 피안에서도 계속하여 이런 갈등은 진행되며, 최고선을 향한 도덕적 정진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단순히 피안에 대한 기대 속에서 현세의 구체적인 과제들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는 몽상적 종말론은 칸트의 이론에서는 허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희망해도 좋은 최고선과 내가 나의 행위를 통하여 실현해야 하는 실천적 선을 구분하고, 또한 피안에서의 행복도 실제로 행한 도덕적 실천에 비례해서만 할당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의 이와 같은 태도는 자기 이성을 스스로 사유함을 표방한 자신의 계몽 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적어도 칸트는 이성의 주체적이고 비판적인 활동을 무시하는 그 어떤 힘도 허용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칸트에게는 이성의 이름으로 신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참된 종교만 있을 수 있다. 인간이 여러 다른 신을 추구한다면 그는 이미 이성의 자기기만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이성에게 무모하게 선전포고를 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결국에는 이성에게 굴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VI권, 10쪽)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칸트는 인간의 이성을 통하여 납득이 잘 되지 않는 초합리적인 종교적 사건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칸트는 종교적 교의들이 “초자연적으로 영감을 받은 사람들에 의하여”(VII권, 6쪽)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며, 이러한 사태가 계시를 통하여 먼저 일어나고 나중에 이것이 이성을 통하여 확인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칸트는 어떤 종교가 참된 종교라면 그러한 종교는 역사적 계시를 사실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계시를 믿지 않고, 또한 눈에 보이는 교회의 신조를 나누어 가지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종교적 인간일 수 있다고 본다. 결국 칸트에 의하면 종교이론은 “순수 이성의 한계 내에서” 유지되며, 모든 종교가 “(계몽 없이) 순수한 이성으로부터” 비롯된다(VII권, 6쪽).

칸트는 철학적 신학과 성서적 신학을 가능한 한 통일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VI권, 12쪽). 우리는 계시와 순수한 이성이 일치할 수 있다라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하게 될 때, 성서에 대한 균형잡힌 이해와 해석을 수행해낼 수 있다. 특히 칸트는 이러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성서의 기본명제들을 도덕적 명제들로 이해하고자 한다. 칸트의 주장에 의하면 신의 아들인 그리스도는 “도덕적 완전성을 구비한 인간”으로서 모든 인간에 자리하고 있는 악의 요소를 근절하는 순수한 도덕성의 실례가 된다.

악을 저지를 수 있는 경향성과 부단히 맞서 싸우는 힘이자 용기인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순수한 요소로서 결코 외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덕의 법칙을 통해서만 규정되는 공동체도 마찬가지로 경험 속에서 발견되는 사회가 아니다. 칸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신의 나라, 목적의 나라는 ‘보이지 않는 교회’,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모두의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주어진 공동체가 아니라 도덕적 의무를 다하는 자가 요청하지 않을 수 없는 이념으로서의 공동체이다.

칸트는 기본적으로 도덕신앙을 추구하는 자로서 순수하게 도덕적인 입법만이 모든 참된 종교의 제일 근거를 형성한다. 도덕적 입법을 통해서만 비로소 “신의 의지가 근원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기록된다.”(VI권, 104쪽) 그러므로 우리가 신의 나라에 접근하는 것은 보이는 교회의 찬란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이성신앙 내지는 도덕적 종교믿음을 통해서 가능하다. 적어도 그는 도덕적 심성으로부터 벗어나서 신의 은총을 기대하는 것을 반대한다. 칸트는 “은총을 입는 것(Begnadigung)으로부터 출발하여 덕으로 나아가는 것이 올바른 길이 아니라, 오히려 덕으로부터 출발하여 은총으로 나아가는 것이 올바른 길”35)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칸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더욱 더 선한 인간이 되기 위하여 각자가 자기의 힘이 미치는 만큼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오직 자기의 타고난 소질을 사장시키지 않을 때에만(누가복음 29 : 12-16), 즉 선을 향한 근원적 소질을 더 선한 인간이 되기 위하여 사용했을 때에만 인간은 그의 능력만으로는 될 수 없는 것이 보다 더 높은 도움에 의하여 보충될 것을 바랄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이 도움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에 대하여 인간이 꼭 알 필요는 없다.36)

결국 칸트는 인간 자신의 존엄성의 근거가 되는 자유를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도덕법칙을 이성 자신의 거부할 수 없는 사실로서 확인하고, 이 사실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자율적 인간으로서의 인간의 위대성을 길러내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위대성은 이성 스스로의 힘만으로 이루어 낼 수 없다. 이성이 아무리 의무의 가시밭길을 걸어가도 자신의 머리 위에 월계관을 쓰게 되는 것은 이성 스스로가 요청하는 타자의 도움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그는 인식이론이나 미학이론에서도 형식과 내용의 일치를 위하여 물자체나 초감성적 기체를 요청하였듯이, 여기에서도 타자를 요청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도덕철학에 대한 비판은 이 요청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달려 있다. 주체와 타자의 대립을 변증법적 지양의 관계로 옮겨가려고 하는 변증법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또 절대적인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는 계시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 요청으로는 결국 이원적 대립 상태를 극복할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은 칸트의 도덕철학이 이원적 상태를 극복하지 못한 미완의 철학으로 비판을 받는다. 또한 요청과 관련하여 결과주의자들, 목적론자들은 칸트의 동기주의, 의무주의가 다시 행복에의 보상을 요구함으로써 자신의 논지의 일관성을 상실하였다고 비판한다.

사실 칸트의 철학은 비판의 철학, 중용의 철학으로서 이런 비판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원래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을 분명히 가르는 구도 아래서는 칸트의 입장은 회색주의자로 몰릴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누차 언급하였듯이 칸트의 입장은 의무에 바탕을 두고 행복을 요청하지, 행복에 바탕을 두고 의무를 계산적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도덕적 의무의 바탕 위에서 종교적 복을 요청하지 종교적 복을 위하여 도덕적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칸트의 요청은 인간의 오만과 굴종의 역사를 청산하고, 인간의 자기 긍지와 겸손의 조화를 요구한다. 칸트의 이와 같은 태도는 오늘의 우리의 모든 삶이 계산적인 이익에 따라 움직이고, 심지어 종교마저 기복성에 따라 작동하는 상황에 여전히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Kant, I., Kritik der reinen Vernunft. 아카데미판 칸트전집 IV권(Berlin : Königlich Prußischen Akademi der Wissenachaften, 1913), 바이셰델판 칸트전집 III, IV권(Darmstadt :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83).

Kant, I., 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ssen Vernunft, 아카데미판 칸트전집VI권(Berlin : Königlich Prußischen Akademi der Wissenachaften, 1913), 바이셰델판 칸트전집 VII권(Darmstadt :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83).

Kant, I.,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nft, 아카데미판 칸트전집 V권(Berlin : Königlich Prußischen Akademi der Wissenachaften, 1913)

Kant, I., Metaphysik der Sitten. 아카데미판 칸트전집 VI권(Berlin : Königlich Prußischen Akademi der Wissenachaften, 1913)

Kant, I., Der Streit der Fakultäten, 바이셰델판 칸트전집 IX권(Darmstadt :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83).

Kant, I.,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아카데미판 칸트전집 IV권(Berlin : Königlich Prußischen Akademi der Wissenachaften, 1913)

Lotz, Johannes B. S.J., Der Mensch im Sein, Herder Freiburg․Basel․Wien 1967

 

Moral Law, Freedom and the Highest Good in Kant's Moral Philosophy

 

 

The negative concept of 'transcendental freedom' which Kant deals with in the theoretical philosophy is known to us positively in 'practical' dimension. He intended to find out the freedom in the autonomy. Autonomy of the will is the sole principle of all moral laws and of duties in keeping with them. Whereas freedom is indeed the ratio essesndi of the moral law, the moral law is the ratio cognoscendi of freedom. Thus freedom and moral law reciprocally imply each other. And the moral law does exist as the fact of the pure reason. This moral law is for us an imperative that categorically bacause the law is unconditional. We are able to be conscious of the freedom by this moral law.

But we can not have the highest good from this condition. The production of the highest good in the world is the necessary object of a will determinable by the moral law. However in such a will the complete conformity of dispositions with the moral law is the supreme condition of the highest good. If this is possible, our souls are to be immortal and God has to exist. Thus we must postulate the immortality of soul and the existence of God. Like this, soul and God are realized practically.

But nevertheless duty must lead happiness, happiness must not duty. The only one who has morality is qualified to possess happiness. But this happiness is to be given from God.

 


1) “형이상학은 순수이성의 사변적 사용의 형이상학과 실천적 사용의 형이상학으로 나누어진다. 즉 자연의 형이상학과 도덕의 형이상학으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단지 개념에 기초한 모든 사물의 이론적 인식에 관한 (따라서 수학을 제외한) 이성의 모든 순수한 원리를 포함한다. 후자는 모든 행동을 선험적으로 규정하고 필연적이게 하는 원리들을 포함한다. 이제 도덕성이란 바로 이 원리들에서 선험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행위의 유일한 합법칙성이다.”(I.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B 870. 앞으로 KrV로 본문에 표기함.)(* 앞으로 인용할 내용은 기본적으로 아카데미판 칸트전집을 기본으로 함)

2) I. Kant,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전집 IV권, 452~453쪽(앞으로 본문에 GMS.로 표기함).

3) “현상 속의 어느 사물(감성계에 속하는)이 어떤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고 해도 그 사물은 사물 자체 혹은 존재 자체로서는 이 법칙에 독립되어 있다는 것은 조금도 모순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을 이러한 두 방식으로 표상하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전자에 있어서는 인간이 자신을 감각을 통해 촉발된 대상으로 보려는 의식에 근거하고, 후자의 경우는 자신을 예지인, 즉 이성 사용에 있어서 감각적 인상들에서 독립된 자 (따라서 지성계에 속하는 자)로 보려는 의식에 근거한다.”(GMS. 전집 IV권, 457쪽) 『실천이성비판』에도 이와 유사한 주장이 나온다(I. Kant,Kritik der praktischen Vernunnft, 전집 V권, 161-162쪽)(앞으로 본문 안에 KpV.로 표기함).

4) “자유를 건져내려면, 시간 안에서 규정될 수 있는 한에 있어서 사물의 존재를, 따라서 자연 필연성의 법칙에 따르는 원인성을 단지 현상(현상체로서의 인간)에만 귀속시키고, 자유는 물자체로서의 동일한 존재자(예지체로서의 인간)에게 귀속시키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KpV. V권, 95쪽)

5) 자유개념은 경험론자들에겐 하나의 걸림돌(KpV. V:7)이지만 비판적 도덕철학자에게는 “순수 이성, 심지어는 사변이성 전 체계의 마감돌(Schlussstein)이요(KpV. V: 3-4) 가장 고귀한 실천원칙의 열쇠이다(KpV. V:7). 이 자유는 도덕법칙을 통하여 확립된다."

6) 이 도덕법칙은 경험적으로도, 개념의 분석을 통하여서도 파악될 수 없다. 그것은 다만 선험적으로 의식될 뿐이다(KpV. V권, 6, 31, 32, 42, 43, 47, 55, 91, 104쪽). (I. Kant, Metaphysik der Sitten. VI권, 252쪽. 앞으로 MS.로 표기함).

7) “도덕법칙은 우리가 선험적으로 의식하고 필연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즉 순수 이성의 사실로서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도덕 법칙의 객관적 실재성은 어떤 연역을 통해서, 이론적․사변적 이성 또는 경험적으로 지원된 이성의 노력을 통해 증명될 수 없다. 따라서 필연적 확실성을 포기하려고 한다고 하더라도 경험을 통해서, 후험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법칙의 객관적 실재성은) 그 자체로 확실하다.”(KpV. V권, 47쪽) 여기서 사실 칸트는 양심의 체험을 통해서 순수의지가 파악하는 도덕법칙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그가 지적 직관을 부정했지만, 여기서는 이것을 인정하는 면이 강하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다. 비록 지적 직관을 통하여 도덕법칙을 파악하였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그 법칙을 따라야 한다는 행위의 필연성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해명되지 않았다. 바로 이 부분을 고민하는 것이 ‘도덕법칙의 연역’이다. 이것은 칸트가 『도덕형이상학기초놓기』의 제2장에서 문제로 제기하고 제3장에서 답변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답변은 만족스럽지 못하다(GMS. IV권, 463쪽). 그는 ‘순수이성의 사실’을 ‘도덕법칙의 연역’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하는데 머물고 있다. 그는 더 이상 연역의 문제에 파고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도덕법칙은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는 것을 입증해준다는 주장으로 만족하고 있다.

8) “따라서 인간을 비로소 인간이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이 도덕성이지 지성이 아니다.”(I. Kant, Der Streit der Fakultäten, A. 122).

9) 칸트는 실제로 이성이 자신에게 스스로 씌운 ‘가벼운 멍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KpV. V권, 85쪽).

10) 칸트는 초기 도덕철학에서는 영국 철학자들의 감정 윤리를 수용하여 1764년경만 하더라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도덕감(moral sens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는 초기에는 도덕적으로 선하고 악한 것도 바로 이러한 도덕감을 통하여 이성이 만들어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1770년 교수 취임논문에서 초기의 이런 입장을 완전히 버리고, 도덕감이 우리의 도덕법칙에 보조적 기능을 수행하지 더 이상 원천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막스 쉘러처럼 순수감정이 가능하다고 보지는 않았다. 즉 그는 “지성적 감정은 모순이다(V권, 117쪽)”라는 입장에서 감각적인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 감정은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제 그는 도덕적 인식과 행위 능력을 도덕감이 아니라 의지(실천이성)에서 찾았다.

11) “정언명령만이 실천적 법칙에 해당하며 이외의 다른 명령은 모두 의지의 ‘원리’이기는 하지만 법칙이라고 부를 수 없다."(GMS. IV권, 420쪽)

12) 칸트는 이 세상의 존재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분류한다 : 권리만 가진 존재 - 신, 의무만 가진 존재 - 노예, 권리도 의무도 갖지 못한 존재 - 광물질, 권리와 의무를 모두 가진 존재 - 인간. 인간에게만 법칙이 의무로 다가온다.

13) 법칙에 대한 존경심도 하나의 감정이지만, 이 감정은 순수이성이 우리의 감성에 영향을 주어 산출한 감정으로 지적인 감정이지 감각적인 감정이 아니다(KpV. V권, 73, 76, 92쪽. GMS. IV권, 460쪽).

14) “지성(오성)은 단지 자연에 속한다. 만일 인간이 이성과 자유 의지 혹은 도덕성은 결핍된 채 지성(오성)만 가지고 있다면, 짐승과 구별되는 것이 없이, 아마도 진화 단계의 꼭대기에 서 있기만 할뿐이다. 그러나 도덕성을 지님으로써,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은 짐승과 본질적으로 구별된다.”(VII권, 70-71쪽)

15) “세상에서, 아니 세상 밖에서도, 제한 없이 무조건 선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밖에 없다”(GMS. IV권, 393쪽). “선의지는 그것이 가져오는 성과나 결과 때문에 또는 미리 설정된 목표 성취를 위한 그것의 적합성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의욕(Wollen) 때문에, 즉 자체로 선하다.”(GMS. IV권, 394쪽)

16) 의지는 일반적으로 무엇을 의욕하고 욕구하는 능력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칸트에 따르면 규칙 혹은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다(GMS. VI권, 412쪽).

17) 물론 칸트는 가언명법에 따라 사는 행복론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이 가언명법을 유용성에 따라 우리에게 ‘권유할 뿐’ 도덕법칙처럼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KpV. V권, 172-173쪽).

18) 칸트에 의하면 신은 거룩하고도 오로지 선한 의지를 지니고 있지만, 인간의 의지는 늘 경향성에 유혹을 받고 있으며 이를 억누르지 않으면 안 된다(KpV. V권, 19-20쪽).

19) 다른 곳에서도 이와 유사한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너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내가 그 준칙으로 인해서 의욕할 수 있는 그러한 준칙에 따라서 행위하라.”(GMS., 51). “동시에 보편적 법칙으로 타당할 수 있는 준칙에 따라 행위하라.”(MdS., VII, 164) 칸트는 정언명법을 덕적 차원에서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법적 차원에서도 주장하고 있다. 그의 법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너의 자의(Willkür)의 자유로운 사용이 모든 사람의 자유와 함께 보편적 법칙에 따라 함께 존재할 수 있도록 그렇게 외적으로 행위하라”(같은 책, 338쪽) 한편 그는 목적을 고려하면서 덕의 원리에 대해서도 주장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법칙이 될 수 있어야 하는 목적의 준칙에 따라 행위하라.”(같은 책, 526)

20) 칸트는 법칙 추구적인 적극적 자유와 경향성으로부터 단순히 독립되어 있는 소극적 자유를 구분한다.

21) Pflicht ist die Notwendigkeit einer Hnadlung aus achtung fuers Gesetz.(GMdS., IV : 400). “의지를 객관적 법칙에 따라 강제로 규정하는 것이 곧 의무이며 구속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의무는 ‘내면적이지만, 지적인 강요(ein intellectuller Zwang)이다.”(KdpV., V, 32). “의무 개념은 그 자체로 이미 법칙을 통한, 자유로운 선택 의지의 강요라는 개념을 담고 있다. 도덕적 명령은 정언적 발언(무조건적 당위)을 통해 이 강제성을 알리며, 이것은 (거룩한 존재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성적 존재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쾌락에 따라 도덕 법칙을 어길 수 있을 정도로 속된, 이성적 자연 존재인 인간에게 적용된다.”(전집, VI, 379)

22) 바로 이 점에서 칸트는 도덕성과 합법성을 구별한다. “행위의 도덕적 가치에서 본질적인 것은 도덕 법칙이 의지를 곧바로 규정한다는 데 있다. 만일 의지 규정이 도덕 법칙에 합당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법칙 때문이 아니라 감정을 (어떤 감정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매개로 이루어졌을 때, 그 행위는 합법성(Legalität)은 갖지만, 도덕성(Moralität)은 가질 수 없다.”(KpV. V권, 71쪽) “따라서 모든 입법은 그것이 의무로 삼는 행위와 관련하여 서로 일치할 수 있으나, 다시 말해서 행위는 모든 경우에 외적일 수 있으나) 동기와 관련해서 구별될 수 있다. 하나의 행위를 의무로 삼고 동시에 이 의무를 동기로 삼는 입법은 윤리적(ethisch)이다. 그러나 이것이 법칙 속에 포함되지 않는, 따라서 의무 자체의 이념 외에 여타의 다른 동기가 허용되는 그와 같은 입법은 법적(juridisch)이다. ... 우리는 동기 그 자체가 전혀 고려되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의 행위가 그 법칙과 완전히 일치하거나 불일치 하는 경우를 합법성(Lgalität Gesetzmäßigkeit)이라고 부르며, 반면에 법칙이나 행위의 동기에 근거하는 의무인 이념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를 도덕성(Moralität)이라고 한다.(MdS. 바이세델판 7권, 324쪽)

23) 따라서 칸트 윤리학의 형식주의는 메마른 형식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인격이 지닌 가치가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음을 강조하는 형식주의이다.

24) (1) 고통을 피하기 위해 행하는 자살은 생명법칙에 위배됨. -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한 의무. (2) 거짓말 약속은 사회의 약속 법칙에 위배됨. - 다른 사람에 대한 완전한 의무. (3)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소일하는 것은 보편적인 자연법에 위배됨 - 자기 자신에 대한 불완전한 의무. (4)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지 않는 것은 자기보존 원리에 위배됨. - 다른 사람에 대한 불완전한 의무. 처음 두 개의 사례는 ‘사유 불가능성’을 명확히 제시하는 것이며, 나머지 두 가지는 “준칙의 일반화가 사유될 수는 있지만 의욕될 수 없다”라는 ‘의욕 불가능성’을 명확히 나타내는 것이다.

25) 물론 도덕형이상학에서는 평화의 왕국으로서, 즉 법의 왕국과 덕의 왕국이 일치하는 왕국이 현실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26) 칸트는 세 가지 요청과 관련하여 인식(지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믿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요청이라는 개념은 이성신앙과 밀접한 연관관계를 지니고 있다. 요청은 “이론적인 명제이지만, 선험적,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실천법칙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인 한, 그 자체로 증명할 수 없는 명제”(KpV. V권, 122쪽)이다.

27) 이런 주장 때문에 칸트는 자신의 이론이 그렇게 경계했던 결과주의에 다시 빠져드는 문제점을 야기하게 되었다고 비판을 받는다.

28) 이 때의 요청은 수학에서 주장되는 명증적인 확실성을 지닌 요청이 아니고, “객관적이지만 실천적인 법칙을 따를 때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즉 주관과 관련해서 명증적인, 따라서 단지 필연적인 가정”으로서의 요청이다(KrV. V권, 11쪽).

29) “앞에서 언급한 사변 이성의 세 이념은 그 자체로는 아직 아무런 인식이 아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이념은 초월적인 생각들이며 이 가운데서 불가능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이념은 이것들을 대상으로 삼도록 명령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인 절대적 실천 법칙을 통해서 객관적 실재성을 얻는다. 다시 말하면 비록 그 이념들의 개념이 어떻게 대상에 관계하는지를 지시하지는 못하지만, 실천 법칙은 그 이념들이 대상을 가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대상들을 인식하는 것은 아직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에 의해서는 그 대상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아직 종합적으로 판단을 내릴 수 없고 그 적용을 이론적으로 규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 대상들에 관해서 본래 이성의 모든 사변적 인식의 본질인 이론적 이성 사용을 우리가 전혀 할 수 없기 때문이다.”(KpV. V권, 135쪽) “그러나 경험적으로 무제약적인 원인성이라는 개념은 이론적으로는 확실히 (그 개념에 들어맞는 직관이 없어) 공허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것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고 확실히 규정되지 않은 대상에 관계한다. 그러나 이것은 도덕법칙에 대해서, 따라서 실천적 관계에서 의미를 가진다.”(같은 책 V권, 56쪽)

30) Wissen :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 충분한 조건을 가진 참, Meinen :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 모두 불충분한 경우, Glauben : 주관적으로는 충분하나 객관적으로는 충분하지 못한 것.

31) “도덕적 필연성(신의 존재를 믿어야 할 필연성)은 객관적, 즉 의무가 아니라, 주관적, 즉 욕구라는 것을 여기서 지적해 두어야 하겠다. 왜냐하면 어떤 사물의 존재를 수용해야 할 의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KpV. V권, 125쪽).

32) 토미즘에서 칸트의 이런 이론에 대해서 많이 비판함. 토미스트는 칸트의 이러한 믿음을 비합리적인 믿음이라고 비판한다(Johannes B. S.J. Lotz, Der Mensch im Sein, Herder Freiburg․Basel․Wien 1967 참조).

33) I. Kant, 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ssen Vernunft, 바이셰델판 7권, 879쪽(앞으로 DRi로 표기함).

34) “종교는 (주관적으로 보아) 신적인 사명으로서 우리의 모든 의무에 대한 인식이다.”(VI권, 153쪽)

35) DRi., 879쪽. 칸트의 이와 같은 입장은 도덕이론에 있어서 결과론(행복론)을 비판하고 동기론(의무론)을 옹호하는 입장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종교철학에 있어서도 기복론을 비판하기 위하여 도덕신앙을 주장하고 있다.

36) DRi., 703쪽(“Auch ist es nicht schlechterings notwendig, daß der Mensch wisse, worin diese beste”). “숭고한 그러면서도 결코 완전히 실현될 수 없는 윤리적 공동체의 이념은 인간의 손 안에서는 매우 왜소하게 된다. 그것은 기껏해야 겨우 윤리적 공동체의 형식만을 순수하게 표상할 수 있을 뿐이며, 그와 같은 전체를 건설하는 수단에 관하여서는 감성적인 인간 본성의 여러 조건들 밑에 심히 제약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구부러진 나무로부터는 꼿꼿한 것을 만들어 낼 것을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적인 신의 백성을 창조한다는 것은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 자신에 의해서 수행될 수 있는 것으로 기대될 수 있는 작업이다.”(DRi., 759-760쪽)

[출처] 칸트의 도덕법칙, 자유 그리고 최고선 (철학의 세계) |작성자 빛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