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칸트의 오류추리와 실천이성의 요청

나뭇잎숨결 2021. 11. 6. 08:16

칸트의 오류추리와 실천이성의 요청


박 종 식*부산대


요 약 문
우리 인간의 능력 중에서 감성과 오성과는 달리, 이성은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오성범주를 사용하려고 한다. 이성은 끊임없이 오성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인식을 확장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 있다. 이성은 직관의 대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통일하고자 시도한다. 칸트는 이런 이성추리를 통해서 생겨난 선험적 이념은 우리의 인식을 확장시킬 수 없다고 폭로한다. 칸트는 이성의 통일은 단지 사고상의 이념적인 최고의 통일만을 추구한다. 이러한 이성의 이념은 영혼불멸, 자유, 신이다. 칸트는 전통 형이상학에서 이성의 이념인 영혼불멸을 추리하는 방식이 오류라고 한다. 대전제와 소전제에서 사용되는 매개념이 각각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에, ‘매개념 다의의 오류’ 또는 ‘4개 개념의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선험적 주관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인식의 전제임에도, 속성을 지닌 실재적, 경험적 주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류추리를 통해서는 영혼의 불멸을 증명할 수 없다. 그렇다고 마음의 인격성과 불멸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영혼의 불멸과 인격성을 ‘이성의 사실’로서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영혼불멸의 문제는 이제 이론적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이성의 요청의 문제로 이행하게 된다. 이론적으로 인식할 수는 없지만, 실천적 사용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사변이성과 실천이성의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선험적 이념이다.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되, 그것을 넘어서는 또 다른 영역을 마련해 놓은 것이다. 이 두 영역은 구분되지만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 영혼불멸은 도덕의 가능성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며, 만약 영혼불멸이 요청되지 않으면 도덕은 불가능하다. 영혼불멸은 인간의 실천적, 도덕적 삶에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함을 「오류추리」에서 보여준다. 이성의 사변적 사용이 거부한 이념을 이성의 실천적 사용을 통해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주제어: 인식, 선험적 가상, 선험적 이념, 이성추리, 오류추리, 영혼불멸, 실천이성, 요청



1. 인식과 환상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선험적 분석론」의 귀결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인식은 감성과 오성의 결합을 통해서만 비로소 성립한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직관의 형식인 공간과 시간 속에 다양이 주어지고, 이 다양을 오성의 범주를 통해서 종합적으로 통일할 때 비로소 인식이 성립된다. 직관 속에 주어지지 않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전혀 인식할 수 없다. 물론 상상이나 생각은 할 수 있지만, 그런 대상은 가능한 경험적 대상이 아니라, 선험적 대상이므로 범주를 적용시킬 수 없는 영역이다.
우리 인간의 능력에는 감성과 오성 이외에도 이성이라는 능력이 주어져 있다. 그런데 감성과 오성과는 달리 이성은, 직관의 형식에 주어지지 않은 어떤 것에 대해서, 그리고 오성 범주의 적합한 사용인 경험적 사용의 한계를 넘어서서 오성의 범주를 ‘초월적(transzendent)’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오성의 범주를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사용하려는 시도는, 오류의 원천이기는 하지만 쉽게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이성 자체의 자연적인 경향성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끊임없이 오성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인식을 확장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이성의 본성이다.(AVII)
「선험적 변증론」에서 칸트는 「분석론」의 결론을 바탕으로 해서, 이성의 이러한 월권적 행위가 잘못임을 폭로하고자 한다. 감성에 주어진 재료에 오성의 범주를 결합시킴으로써 객관적인 인식이 생기는 것이지, 감성에 주어진 재료와 관계함이 없이, 오성의 범주를 초월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객관적 인식을 확장하기는커녕 우리를 오류에 빠뜨린다. 이성은 인식의 능력이 아니라, ‘원리의 능력’이기 때문이다.(A405) 반면 오성은 규칙의 능력, 즉 인식의 능력이다. 직관의 형식 속에 주어진 것에 대해서만, 제약된 것에 대해서만 오성은 자신의 규칙을 적용하는 것이다. 직관의 형식 속에 주어진 것이 없다면, 오성의 규칙을 적용할 대상이 없기에 그 규칙은 공허할 뿐이다.
그러나 이성은 직관의 대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통일하고자 하는 시도를 한다. 직관의 형식 속에 주어진 대상에 대해서만 적용될 수 있는 오성의 범주를, 직관 대상과 관계하지 않은 채, 오직 오성의 범주를 무제약자에게까지 적용시키고자 한다. 즉 주어진 제약된 것에 범주를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제약을 바탕으로 해서 주어지지 않는 무제약자를 추리해 나가서 절대적 무제약자를 밝히고자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이성추리를 통해서 생겨난 선험적 이념은 우리의 인식을 확장시킬 수 없음을 폭로하는 곳이 바로 「선험적 변증론」이다. 무제약자를 인식할 수 있다는 환상을 깨뜨리면서도, 동시에 그런 환상은 단지 무의미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천이성의 영역에서는 진정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곳이 「선험적 변증론」이다. 따라서 칸트는 「감성론」과 「분석론」에서는 수학과 물리학이라는 진정한 학문을 다루는 반면, 「변증론」에서는 사변적 형이상학이란 사이비 학문(pseudo-science)을 다루고 있다. 아니 오히려 수학과 물리학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하면서, 동시에 전통적 형이상학은 학문으로서 성립될 수는 없지만, 실천이성의 영역에서는 형이상학이 다른 방식으로 수용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2. 선험적 가상

오성과 감성이라는 두 가지 인식 원천 이외의 다른 인식 원천이란 없다. 감성과 오성의 한계를 벗어나면 인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성의 법칙에 완전히 합치하는 인식에는 오류란 있을 수 없다. 가능한 경험의 한계 내에서만 적용되는 원칙은, 즉 범주를 경험적으로만 사용하는 원칙은, 내재적(immanent) 원칙이다. 이러한 원칙만이 객관적 인식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반면 가능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원칙은 초월적 원칙이다. 이런 초월적 원칙으로부터 도출되는 선험적 가상(transzendentale Schein)은 경험의 한계를 부수고 인식을 확장하고자 하는 현실적인 원칙이다.(B352) 이 원칙은 ‘범주의 경험적 사용’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서, 인식을 확장할 수 있다는 환상을 우리에게 준다.
그러나 초월적 원칙은, 범주들의 선험적 사용, 오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B352) 범주들의 선험적 사용이나 오용은, 오성의 한계에 주의하지 않은, 판단력의 과오일 뿐이다. 범주의 선험적 사용은 단지 판단력의 착오, 단지 범주 적용의 착오에서 생긴 것에 불과하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규칙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 지식이나 규칙을 적용할 경우에 오류를 범하기 쉽다. 그것은 그들이 오성이나 규칙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천부의 판단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구체적인 예가 과연 그 규칙의 적용을 받는지 어떤지를 식별할 수 없거나, 또는 실례나 실무를 통해서 판단력을 충분히 숙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과오를 범한 것이다.(B173) 그러므로 ‘선험적’과 ‘초월적’은 동일하지 않다.(B352)
순수오성의 내재적 원칙, 즉 직관의 공리, 지각의 예료, 경험의 유추, 사고 일반의 요청이라는 네 가지 원칙은, 경험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오성이 규칙들에 의하여 현상을 통일시키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이성은 오성의 규칙들을 원리 아래로 통일하는 능력이다.”(B359) 즉 이성은 원리의 능력이다. 그런데 이성의 추리는 직관에 관계하지 않고 개념과 판단에만 관계한다. 이성통일은 가능한 경험의 통일이 아니다. 이 점에서 오성통일과는 완전히 다르다. 또한 이성은 논리적 사용에서 주어진 결론의 보편적 제약을 끝없이 추구한다. 이성의 원칙이란, 오성의 제약된 인식의 무제약자를 찾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오성을 절대적으로 통일한다.
이러한 무제약자를 인식하고자 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지만, 참되지 않은 인식이다. 이렇게 우리를 오류로 이끄는 이성의 무제약자에 대한 인식이 바로 선험적 가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선험적 가상 또는 선험적 기만은 단순히 논리적인 오류나, 궤변적인 가상이 아니라, 이성의 본성 자체에서 생겨난 것이다. 선험적 가상은 무제약자를 인식하고자 추구하는 것을 인간 인식의 확장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감성과 오성의 한계를 벗어난 이성의 무제약자에 대한 추구는 이성의 월권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선험적 가상은, 비판의 모든 경고에 반대해서, 우리 스스로가 범주의 경험적 사용을 넘어서게 하고, 우리를 속여 순수한 오성을 확장할 수 있는 듯한 환상을 갖게 한다.”(B352) 따라서 가상이라는 표현은, 자세하게 살펴 본 후에야 비로소 거짓으로 증명되는 잘못된 인식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러한 선험적 가상을 단지 잘못된 주장으로만 간주하고 폐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러한 선험적 가상을 폭로한 후, 무제약자라는 선험적 이념을 새로운 방식으로 유지시킨다. 칸트는 사변적 이성이 추구하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은 모두 실패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영혼의 불멸, 자유의지, 신의 존재에 대해 긍정하는 전통적 형이상학의 주장들은, 증명될 수 없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부정하는 주장들도 증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전통적 형이상학의 그런 주장들은,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험적 가상이 폭로된 후에는 순수이성의 선험적 이념들이 구성적 의미를 지닐 수는 없지만, 통제적(규제적, regulative) 의미를 지닐 수는 있다. 즉 이성은 우리의 인식이 지닌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측면을, 하나의 전체로서 통일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전체는 결코 우리에게 주어져(gegeben) 있는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에게 부과되는(aufgegeben) 목표점이다. 즉 ‘전체란 끊임없이 진행하는 탐구과정의 소진점(Fluchtpunkt)’이다. 무제약적인 절대적 통일이라는 전체를 인식의 대상이라고 간주할 때, 선험적 가상이 생긴다. 따라서 선험적 이념은 이론 이성의 영역에서는 단지 소극적 의미로, 규제적 의미로만 사용된다. 그러나 실천 이성의 영역에서는 적극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된다. 이론이성의 논증이 아니라, 실천이성의 ‘요청’을 통해서 선험적 이념은 새롭게 규정되고 수용된다. 여기에서 인식에서 실천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진다. 이 점을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서문에서(BXXX)에서 “믿음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인식을 제한”했다고 표현한다.



3. 선험적 이념

대상과 상관없이 오직 개념에만 의한 종합적 인식을 이성의 원리라고 한다.(B358) 원리에 의한 인식은, 오성에 의한 인식과는 완전히 다르다. 오성이 규칙을 매개로 해서 현상들을 통일하는 능력이지만, 이성은 오성의 규칙들을 원리들 아래로 통일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처음부터 경험 혹은 어떤 대상에 관계하지 않고 오성에 관계한다. 이것은 오성의 잡다한 인식에다, 개념을 통해서 선천적인 통일을 주기 위해서이다. 이성은 추리작용을 통해서 오성의 다양한 인식을 최소의 원리로 환원하여, 오성의 다양한 인식들에 최고의 통일을 주고자 한다.(B361) 이러한 시도는 인간본성에 필연적이며 불가피하다. 이것이 바로 형이상학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이다. 칸트는 이성의 원리를 통해서 추리된 대상을 인식의 대상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잘못임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성추리는 첫째, 오성이 범주를 통해 직관을 포섭하는 것과는 달리, 이성추리는 직관과 직접 관계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성의 통일은 가능한 경험의 통일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의 인식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B363) 단지 사고상의 이념적인 최고의 통일만을 추구한다.
둘째, 이성추리는 판단의 조건을 보편적 규칙에 포섭하고, 이 규칙을 보다 보편적 규칙으로 포섭하는 과정을 계속 진행시킨다. 즉 제약된 것의 제약을 추구하는 올라가는 방향을 취하는 전삼단논법(Prosyllogismus)을 통해서 제약의 제약을 가능한 데까지 구한다. 따라서 오성의 제약된 인식에 대해서 무제약자를 발견하고, 제약된 인식의 통일을 완성한다.(B364) 그러므로 ‘제약된 것이 주어져 있으면, 순차로 종속하게 된 제약들의 전 계열도 주어져 있다’라는 순수이성의 이 원칙은 모든 현상을 넘어서 있기에, 경험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이 원칙들은, 경험의 가능성만을 다루는 오성의 내재적 원칙과는 달리, 초월적 원칙이다.(B365)
우리가 판단의 형식에서 범주를 도출했듯이, 범주에 의지해서 이성추리를 할 때 특수한 선천적 개념들이 생긴다. 오성의 순수개념이 범주라고 불리듯이, 이성의 순수개념을 ‘선험적 이념’이라 하며(B368,B378), 이념이 경험 전체에서의 오성사용을, 원리들을 통해서 규정한다.(B378) 이성추리에서 이성의 기능이란 개념을 통해서 인식에 보편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의 선험적 개념, 즉 이념은 하나의 주어진 제약된 것에 대한 ‘제약들의 전체’ 라는 개념이다. 그런데 무제약자만이 ‘제약들의 전체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는 ‘제약들의 전체성’은 항상 그 자체로 무제약적이기 때문에, 선험적 이념은 무제약자의 개념을 통해서 설명될 수 있다.(B379) 제약들의 종합에서 총체성이라는 선험적 이념은, 오성의 통일을 되도록 무제약자에게까지 전진시키기 위한 과제로서 필요하다.(B380) 선험적 이념은 항상 제약들의 종합에서 절대적 전체성만을 지향하고, 단적으로 무제약적인 것에, 즉 ‘모든 관계에서’ 무제약적인 것에 도달하지 않으면 정지하지 않는다.(B382) 따라서 이런 통일은, 현상들에 대한 이성의 통일(Vernunfteinheit)이다. 반면 범주가 표시하는 통일은, 오성의 통일(Verstandeseinheit)이다.(B383) 이성통일은 각 대상에 관한 일체의 오성작용을, 절대적 전체로 개괄할 것을 의도하는 통일이다.
오성개념이 객관을 다루는 것은 구성적 사용이며, 내재적 사용이다. 선험적 이념들은 통제적 사용만이 허용됨에도 구성적 사용을 할 경우 초월적이다. ‘선험적’ 이념을 ‘초월적’으로 사용한 결과가 오류추리이다. 그러므로 ‘초월적’ 이념이란 표현은 잘못이다. ‘선험적’과 ‘초월적’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칸트는 선험적 이념을, 감관 중에서 그것에 합치하는 대상이 주어질 수 없는 필연적인 ‘이성의 개념이라고 한다.(B383) 경험 중에는 선험적 이념에 합치하는 대상이 나타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단지 이념에 불과하다. 따라서 ‘일체 현상들의 절대적 전체’라는 것은 이념에 불과하다. 절대적 전체 같은 이념을 형상 중에 구현할 수 없으므로, 그것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과제이다.(B384) 그러나 그것이 이념에 불과하다고 해서, 쓸모없거나 허무한 것은 아니다. 이념을 통해서 오성은 인식을 확장할 수는 없으나, 오성은 이념을 통해서 인식을 최대한 통일시킬 수 있다. 여기에서 이성의 개념이, 아마 자연개념에서 실천개념으로 건너갈 수 있게 함으로써, 도덕적 이념 자체에 토대(Haltung)를 주고, 이성의 사변적 인식과 조화, 연관시킬 수 있다.(B386)
그런데 이성은 추리하는 능력이다. 삼단논법을 통해서 추리할 때, 대전제와 소전제를 바탕으로 결론을 이끌어낸다. 여기에는 제약들의 계열이 형성된다. 이 계열은 제약들의 편에서나(전삼단논법), 또는 제약된 것의 편에서(후삼단논법) 무한하게 계속될 수 있다. 이 중에서 이성은 현재의 결론을 위해서는, 내려가는 계열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올라가는 방향의 근거의 계열(전삼단논법)만 필요로 한다.(B388)
선험적 이념들은 모든 제약들 일반의 무제약적인 종합적 통일함과 관계된다. 순수이성은, 정언추리에서는 생각하는 주관의 절대적 통일의 이념을, 가언적 추리에서는 주어진 제약들의 계열에서 절대적 무제약자의 이념을, 선언적 추리에서는 모든 존재자의 본질이라는 최고의 이성개념을 반드시 수반한다.(B393) 마음의 인식에서 세계의 인식에로 나아가고, 이것을 매개로 근원 존재, 즉 신으로 나아가는 자연스러운 진행을 취한다. 이성이 추구하는 이러한 무제약자는 볼프(C. Wolf)의 특수 형이상학의 구분에 상응하는 세 가지 이념들이다. 신, 자유, 영혼불멸이라는 세 종류의 이념만을 갖는다.(B395)
그런데 칸트는 여기에서 형이상학의 이러한 이념들을 자연과학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을 넘어서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B395)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이념들을 이론이성으로써 인식할 수 있다는 주장이 바로 가상이다. 따라서 「선험적 변증론」은 가상을 폭로하는 가상의 논리학이다. 그러나 선험적 가상이 목표로 하는 선험적 이념은, 이론이성의 입장에서는 가상에 불과하지만, 실천이성의 영역에서는 가상이 아닌 적극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4. 순수이성의 오류추리

선험적인 오류추리는 추리의 형식은 옳더라도, 원래 거짓된 추리를 할 수밖에 없는 선험적 근거를 지니고 있다. 이런 추리는 인간 이성의 자연적 소질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것이 오류임을 보일 수는 있으나,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그런 환상이다. 선험적 오류추리는 ‘나는 생각한다’에서 ‘생각하는 나’를 추리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한다’는 개념 또는 판단은 모든 개념 일반과 선험적인 개념, 즉 오성 범주의 운반구(Vehikel)(B399)이기 때문에, 모든 사고(alles Denken)를 생각하는 의식(나는 생각한다)에 속하게 만든다. ‘나는 생각한다’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나’로서 내감의 대상이며, 마음(영혼)을 뜻한다. 그러므로 내감의 대상으로서의 생각하는 나는 확실히 심리학의 대상이다.
‘나는 생각한다’의 ‘나(자아)’는 경험적 대상이 아니라, 오직 선험적 대상으로서, 인식을 위한 논리적 전제에 불과하다.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나’라는 표현은, 모든 경험에서 독립해 있는, 모든 사고에 수반되는 논리적인 ‘나’라는 개념으로부터 추리된 것에 불과하다. 자기 자신을 지각함을 표시하는 ‘나는 생각한다’는 명제에서, ‘나’는 내적 경험을 가진다. 이 내적 지각은 ‘나는 생각한다’는 통각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통각은 모든 선험적 개념, 즉 범주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 순수한 통각이 외적, 내적 경험을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 ‘나(자아)’는 단순하고, 전혀 내용이 없는 표상이다. ‘자아라는 표상은 하나의 개념이다’라는 말조차 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개념들을 수반하는 하나의 단순한 의식이다. 생각하는 자아에 의해서 표상되는 것은, 사고의 선험적 주관인 X일 뿐이다. 선험적 주관은 자신의 술어인 사고된 것(die Gedanken)에 의해서만 인식되고, 이런 사고된 것을 떠난다면 선험적 주관에 관해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험적 주관의 주위를 늘 헛되이 빙빙 돌고 있을 뿐이다.(B404) 선험적 주관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란 전혀 없고, 오직 사고된 것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선험적 주관을 추측할 뿐이다. 모든 사고된 것을 가능하게 하지만, 대상이 아닌 무내용의 논리적 주관임을 알 뿐이다. 이런 선험적 주관에 관해서 무슨 판단을 하자면, 우리는 언제나 이미 ‘나’라는 표상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자기 의식 자체는 대상을 인식하는 표상이 아니라, 표상일반의 형식이다.(B404)
선험적 주관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인식의 전제이기 때문에, 선험적 주관만을 따로 떼어서 고찰할 방법이 없다. 어떤 판단이나 사고를 하든지 간에 반드시 그 바탕에 놓여있는 논리적 형식이다. 이 형식이 없다면, 대상에 대한 인식이나 표상은 불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사고에 수반되는 유일한 조건은, ‘내가 생각한다’는 명제 속의 ‘나’이며, ‘나’는 단지 형식적 조건일 뿐이다. 즉 모든 사고된 것(Gedanken)의 논리적 통일일 뿐이다. 그런데 ‘나(자아)’가, 생각되어진 대상으로서, 즉 자아 자체(Ich selbst)로서, 경험적 자아가 행하는 실질적인 통일로서 표상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Ich denke)’에서 나(자아, Ich)를 하나의 학문대상으로 삼는 것은, 논리적 형식인 자아를 마치 인식의 대상처럼 다루는 것이며, 이것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을 같은 차원에 놓고 논의하는 범주착오이다. 이런 칸트의 분석을 통해서 볼 때, 칸트가 자기의식 개념을 취급한 내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철학적 과제를 제시한 것이며, 또한 자기의식의 문제에 대한 경험적 분석을 위해 상당히 결정적인 범위에 대한 제약들을 진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칸트는 오류추리 논의에서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나’라는 실체가 핵심이 되므로, 실체 범주에서 출발하여 범주의 계열을 거꾸로 다룬다. 즉 실체 범주가 포함된 관계라는 범주 강목으로부터 성질, 분량, 그리고 양상 강목을 다룬다. 따라서 이성적 심리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마음은 ‘실체’다. 둘째, 마음은 ‘단순’하다. 셋째, 마음은 그것이 있게 되는 시간이 달라도, 수적으로 동일하다. 넷째, 마음은 공간 속의 가능한 대상들과 관계하고 있다. 만약 이 네 가지 추리들이 맞다면, 영혼불멸을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단순한 실체는 그 정의에 따르면 파괴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넷째 오류추리는 많은 논의가 필요하므로 본 논문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그리고 초판의 종합적 추론과정이 재판보다 오류추리의 일반적 성격에 더 잘 합치하기에, 여기서는 초판의 오류추리만 다룬다.


1) 실체성의 오류추리

대전제 : 한 사물의 표상이 우리 판단의 절대적 주어이며, 따라서 그것 외 의 다른 사물의 규정으로서 사용될 수 없는 그런 사물은, 실체다.
소전제 :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나는, 나의 모든 가능적 판단의 절대적 주어 이며, 이 나 자신의 표상은, 그 외 다른 사물의 술어로 사용될 수가 없다.
결론 : 그러므로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나는, 실체다.

우리는 객관을 인식하기 위해서 전제해야 하는 것 자체를, 객관으로 간주할 수 없으며, 규정하는 자아와 규정되는 자아를 구별한다. 그러나 사고된 것을 종합해서 통일하는 것을, 즉 모든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통각을 마치 사고된 것의 주관 속에서 지각된 통일로, 즉 경험적 통각으로 간주하는 가상보다 더 자연스럽고 유혹적인 것은 없다. 이런 가상이 실체화된 의식의 기만이다.(A402) 실체성의 오류추리는 바로 이런 가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체성의 이성추리는 사고의 지속적인 논리적 주어를, 속성을 지닌 실재적, 경험적 주어라고 생각한 것이다.(A350) 대전제에서 ‘판단의 절대적 주어’와 ‘실체’는 선험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즉 모든 판단과 사고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선험적 통각’을 의미한다. 대전제의 실체라는 표현은 오성범주의 실체가 아니라, 단지 실체 범주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실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무런 내용이 없는 공허한 실체이지, 결코 지속적이고 생성 소멸이 없다는 특성을 지닌 실체가 아니다. 반면 소전제에서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나’는 실재적, 경험적 사물로서 내감의 대상을 의미한다. 이것은 판단이나 사고에서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주어의 역할을 하는 주관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전제와 소전제, 결론에서 언급하고 있는 ‘절대적 주어’ ‘생각하는 나’ ‘실체’라는 동일한 표현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대전제의 ‘절대적 주어’ ‘실체’는 모든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형식적, 논리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소전제에서는 그 개념들이 내감의 대상, 경험적 대상의 의미로 실체화된다. 특히 매개념 ‘절대적 주어’는 대전제와 소전제에서 같은 단어로 표현되었으나, 그 의미가 서로 다르다. 따라서 실체성의 오류추리의 핵심은 모든 사고작용에 동반되는 형식적, 논리적 의식을 객관적 대상과 동일시하여, ‘나는 생각한다(Ich denke)’를 ‘생각하는 나’로 실체화한 것이다.
결국 대전제에서 절대적 주어는 형식적, 논리적 주어이며, 선험적 자아이다. 그런데 소전제에서는 ‘생각하는 나’를 경험적 자아로, 직관의 대상으로서의 자아로 바꾼다. 따라서 절대적 주어로서의 사물은 실체이며, 사유하는 자아는 절대적 주어이기에, 사유하는 자아는 실체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즉 대전제 M-P와 소전제 S-M이기에, 결론은 S-P라는 타당한 형식의 삼단논법이 나온다. 그런데 절대적 주어라는 매개념이 대전제와 소전제에서 다르게 쓰이고 있기 때문에 결국 이 삼단논법은 ‘4개 개념의 오류(quaternio terminorum)’ 또는 ‘매개념 애매(다의)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 이성추리는 통각의 의미에서 자아와 내적 지각의 대상으로서의 자아를 혼동하고 있다. 실체로서의 주어와 사유작용(als denkend)으로서의 주어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같은 것으로 오해하면 사유작용(Ich, als denkend)을, 결국 자아(das Ich)로 실체화하게 된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자아(Ich, als ein denkend Wesen)와 사유작용(Ich, als denkend)은 구별되어야 한다. 전자는 실체화된 자아이며 후자는 모든 사고된 것에 수반되면서, 모든 사고와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형식적 사고작용이다. ‘나는 생각한다’(Ich denke)는 경험적 내용을 전달하는 표상이 아니고, 그 모든 것을 전달하는 형식일 따름이다. 단순한 자아는, 경험적 의미의 실체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단순히 내감의 형식일 뿐이다.
외감의 대상으로서 사물은 공간이라는 감성 형식 속에 주어진다. 내감의 대상으로서 자아는 시간이라는 감성의 형식 속에 주어진다. 그런데 우리를 촉발해서 외감의 대상이 되게 하는 그 무엇이 바로 선험적 대상, 즉 물자체이다. 그것에 대해 우리는 아는 바가 없다. 그런데 시간 속의 경험적인 자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선험적 자아이다. 선험적 자아는 내감의 대상으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내감의 대상으로서의 자아를 가능하게 하는 형식이다. 즉 내감의 형식이다. 이것이 없으면 내감의 대상이 주어질 수 없다. 즉 내감의 대상으로서의 자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내감의 형식으로서 선험적 자아이다. 이 자아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면 선험적 대상과 선험적 자아는 동일한 것인가? 그것에 관해서 우리는 알 수 없다. 인식의 대상이 아니기에 직접 파악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같다고 해서 모순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유하는 나’는 범주의 적용을 받는 직관의 대상이 아닐뿐더러, 직관 대상의 속성은 더욱 아니다. 실체라는 범주가 지속성과 관계되기 때문에, 사유하는 자아도 실체이며 지속한다고 추리할 수는 없다. 사유하는 자아는 실체가 아니라, 실체 범주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다. ‘나는 생각한다’는 표상에서 ‘나는 지속한다’고 착각한 것이다. 결국 자기의식을 나타내는 선험적 자아의 ‘나는 생각한다’는 것으로부터 ‘나는 실체이다’라는 자기인식은 도출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하다. 사고의 논리적 주관을 사고의 경험적, 실재적 주관으로, 형이상학적 실재성을 지닌 주관으로 잘못 파악한 것이다. 이런 오류는 ‘나는 생각한다’를 물화(Verdinglichung)할 때 생긴다. 결국 선험적 오류추리는 ‘매개념 다의의 오류(sophisma figurae dictionis)’을 범하고 있다.(A402)
선험적 심리학의 첫째 이성추리는 사고의 지속적인 논리적 주어를, 속성의 실재적 주어라고 사칭하는 사이비 견해이다(A350). 즉 순수한 예지(Intelligenz)로서의 자아라는 추상적 개념을, 육체로부터 분리된, 즉 실체화된 자아의 실존과 혼동한 것이다. 다시 말해 단순한 개념을 현실적 존재와 혼동한 것이다. 데카르트도 이 둘을 혼동하고 있다. 데카르트의 ‘자아’는 지속적인 논리적 자아임에도, 그는 논리적 자아를 속성을 지닌 실재적 자아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칸트의 오류추리 문제와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에서 나타나는 자아의 문제는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생각하는 나’의 논리적 의미 외에는, 이 주어 자체에 관해서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따라서 마음의 개념이 이념에서의 실체만을, 통제적 의미의 실체만을 의미한다면 정당하지만, 실재적인 또는 직관 대상으로서의 실체를 의미한다면 부당한 것이다.


2) 단순성의 오류추리


대전제 : 어떤 사물의 작용이 많은 사물의 경쟁작용으로 간주될 수 없다면, 그 사물은 단순하다.
소전제 : 마음 즉 생각하는 ‘나’는 그런 사물이다.
결론 : 그러므로 생각하는 나는 단순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오류추리는 첫 번째 오류추리에 의존한다. 여기서도 첫 번째 오류추리처럼 매개념 다의의 오류 또는 4개 개념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런데 첫째 오류추리가 타당하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영혼불멸(immortality)을 증명하기에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두 번째 오류추리가 중요하다. ‘생각하는 나’는 합성된 많은 실체들의 활동이나 작용이 아니다. 합성체의 활동은 여러 실체들의 작용들의 집합이다. 생각하는 자아로서의 내가 단순한 실체라는 것은, 사고하는 자아의 절대적 통일로부터 추리될 수 없다. 나는 단순하다는 것은, 실재적인 술어가 아니라, 선험적 자아에 대한 분석적 설명이기 때문이다. 절대적 통일로서의 사유하는 자아는 단순성의 범주가 적용되는 그런 실재적 대상이 아니다. 생각하는 나는 단순하다는 명제는 대상에 적용되는 범주의 ‘단순성(단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통각의 자기 동일적 명제에 불과하다. 즉 사유하는 자아라는 표상은, 논리적인 의미의 절대적 단일성을 뜻할 뿐이다. 그런데 단순성의 오류추리에서 ‘단순하다’는 표현은 이중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실재적 대상이 합성되지 않고, 경쟁작용이 없다는 경험적 의미와, 생각하는 내가 절대적 통일성이외의 아무런 내용이 없다는 두 의미로 쓰이고 있다.
생각하는 자아가 단순하다는 것이, 생각하는 자아가 합성되어 있다는 것의 반대 개념으로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선험적 자아 표상의 단순성은 아무런 규정을 할 수도 없고, 내용도 없고, 그래서 뭐라고 표현할 수 없어 억지로 ‘단순하다’고 한 것이다. 따라서 단순, 합성의 의미에서 ‘단순성’은 전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주관의 논리적 단일성을 주관의 현실적인 속성으로서의 단일성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모든 사고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의 주관의 이러한 필연적인 단일성을 경험에서 이끌어낼 수 없다. 하나의 생각된 것 전체를 위해서는, 주관인 ‘나’는 분할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고 하는 통각의 형식적 명제가, 이성적 심리학의 모든 기초이며, 이에 근거해 인식 확장을 감행한다. 물론 이 명제는 통각의 형식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형식은 가능한 경험 일반을 위한 인식의 ‘주관적 조건’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A354) 인식의 주관적 조건을 개념이나 범주로 간주하는 것은 부당하다. 범주는 인식의 주관적 조건을 전제로 해서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관의 논리적인, 절대적 단일성 또는 단순성은 나의 주관의 현실적인(wirklich) 단순성과는 다르다.(A356)
그런데도 마음의 단순성을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사이비 명제에 집착하는 것은 마음의 단순성을 통해서 마음을 물질과 구별하고, 물질의 몰락성(Hinfälligkeit)으로부터 마음을 구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은 물질적이지 않다’고 표현된다.(A356) 물질과 달리 생각된 것은 여러 마음의 합성 결과가 아니다. 오직 하나의 절대적 마음의 결과이다. 따라서 마음(영혼)은 단순하다. 단순하기에 더 이상 없어지지도 보태지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영원불멸하다. 단순한 것이 다른 것으로 된다면 그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영혼의 단순성에서 영혼의 불멸성으로 이행하고자 하는 오류추리이다. 그런데 ‘생각하는 자아는 단순하다’라는 명제가, 마음과 물질의 이종성 또는 유사성을 증명하는데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을 밝힌다면, 우리는 이 명제를 ‘이념’의 분야로 추방할 수 있다.(A357)
외감의 술어는 내감의 대상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외적 현상들의 근저에 있으면서, 우리의 감관을 촉발하여, 우리 감관이 공간, 물질, 형태 등에 관한 표상들을 획득하게 하는 것, 즉 가상체 또는 선험적 대상은, 동시에 사고의 주체(das Subjekt der Gedanken)일 수도 있다고 칸트는 생각한다.(A358) 그 자체로서의 선험적 대상에는, 외적 현상에 관한 술어들이 귀속될 수 없지만, 내감의 술어 즉 표상 작용과 사고 작용은 이 선험적 대상과 모순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마음을 현상이라고 할 때, 그 마음 현상의 기체(Substrat)는 역시 물질과 충분히 구별되지 않는다.(A359) 마음이나 선험적 대상에는 외적 현상의 술어를 적용할 수 없으므로, 선험적 자아와 선험적 대상의 동일성이 주장될 수 있다.
만약 물질을 물자체라고 가정하면, 현상으로서의 물질은 합성된 존재이기 때문에, 단순한 마음과 구별될 것이다. 그런데 현상의 기체인 선험적 대상, 즉 물자체로서 물질은 그 어떤 술어에 의해서도 인식될 수 없다. 그러나 물자체로서의 물질은 단순하다. 따라서 우리의 외감의 측면에서 연장성을 소유하고 있는 실체는, 물자체로서의 물질에 고유한 내감을 통해서, 의식과 더불어서 비로소 표상될 수 있다.(A359)
반면 마음을 물자체로 생각한다면, 물자체란 사물의 상태를 규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생각하는 나라는 물자체를, 물질이라는 외적 현상의 근저에 있는 가상체와 비교한다면, 우리는 이것들에 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물자체로서의 마음이 물질의 근저에 있는 가상체와 어떤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른가를 전혀 알 수 없다(A360). 결국 하나는 비공간적이고 하나는 공간적이기 때문에,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관계가 수수께끼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양쪽 모두 오직 ‘현상들’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물자체로서 물질적 육체라는 현상의 근저에 있는 것은, 아마도 정신적인 것, 즉 자아의 근저에 있는 물자체일 것이며, 그 두 가지는 결코 그렇게 다른 종류의 것이 아닐 것이다. 외적 현상으로서는 연장적인 존재가, 물자체로서는 합성적이 아니라, 단순하며, 생각하는 주관이라고 할 수 있다.(A360) 따라서 마음과 물질의 상이성을 밝혀, 마음을 물질의 몰락성에서 구제하고자 하는 시도는 무산된다.
이처럼 생각하는 나의 존재의 단순성으로부터 영혼과 물질의 이종성을 밝히고, 이를 바탕으로 영혼의 불멸성을 주장하려는 두 번째 오류추리도 역시 잘못임이 드러났다.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에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다. 그것을 ‘실체’ ‘영혼’ 등으로 전혀 확장할 수 없다. 그러나 생각하는 나, 즉 내감의 ‘선험적’ 대상에 주어진 명칭인 마음(Seele)이 단순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단순성을 현실적 대상으로 확장할 수는 없다. ‘생각하는 나는 실체이다.’ ‘생각하는 나는 단순하다’는 명제로부터 ‘영혼은 실체이다’ ‘영혼은 단순하다’는 추론은 이제 붕괴되었다. 이성적 심리학은 따라서 그것의 중요한 토대(Hauptstütze)와 함께 무너진다.(A361)

3) 인격성의 오류추리

대전제 : 시간이 다름에도 자기 자신의 수적인 동일성을 의식하고 있는 것 은 그런 한에서 인격이다.
소전제 : 그런데 마음은 시간이 다름에도 수적인 동일성을 의식하고 있다.
결론 : 그러므로 마음은 인격이다.

우리는 모든 시간 속에서, 나의 모든 계기적인(sukzessive) 규정을 수적으로 동일한 자아에 관계시킨다. 모든 변화하는 것 중에서 변화하지 않는 내감의 대상으로서의 마음은 모든 시간 속에서 언제나 동일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시간 속에서 동일한 마음이 바로 인격이다. 이 때문에 마음의 인격성은 추리된 명제로 보이지 않고, 시간 속에서의 자기 의식을 표시하는 명제로 보인다. 즉 내가 내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모든 시간에서, 이 시간은 내 자아의 단일성에 귀속되는 것으로 의식한다. 이 모든 시간은 단일한 자아 속에 있으며, 나는 이 모든 시간에 걸쳐서 수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A362) 따라서 인격의 동일성은 다양한 시간 속에서 내 자신을 의식할 때 발견된다.
의식의 통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모든 시간을 의식하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내적 시간 의식, 즉 내적으로 시간을 의식하는 자아의 의식만이 인격의 동일성을 보증할 수 있다. 의식으로서의 시간을 빼놓고는 시간을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의식과 필연적으로 결합해 있는 동일성은 내 주관의 외적 직관과 결합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모든 시간에서 내 자신을 의식함의 동일성은, 나의 사고된 것을 위한 형식적인 조건이지, 결코 나의 경험적 자아의 인격이 아니다. 즉 내 주관의 수적인 동일성, 분량 범주의 강목에서 하나와 다수 중 하나를 지시하는 동일성이 아니다. 마음의 형식적 동일성은, 인식 내용이 전혀 없는 동일성이다. 이것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면, 수적인 동일성이라는 형식적 조건으로부터 실재적 자아의 수적인 동일성, 인격성을 잘못 추리하게 된다.
결국 이 오류추리에서는 선험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마음의 수적인 동일성으로부터 경험적 의미의 인격성과 그것이 전제하는 지속성(Beharrlichkeit), 따라서 마음의 실체성을 도출하고 있다. 우리가 마음의 실체성을 전제한다면, 현실적 주관에서 지속적인 의식이 도출될 수 있다.(A365) 즉 선험적 의미에서 자아의 지속성은 도출되지 않지만, 경험적 주관에서 의식의 지속성은 도출될 수 있다. 모든 시간 의식에 있어서의 자아의 동일성으로부터는 인격의 동일성이 생기지 않는다. 시간 속의 자아의 동일성은, 형식적 논리적 자아로서의 공허한 동일성이지만, 마음의 실체성, 인격의 동일성은 경험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일성(Identität)을 떠나서는 인격(Person)이 없다. 따라서 인격을 위해서는 자아의 동일성을 필요로 하지만, 그 동일성은 언제나 경험적 자아의 동일성에 머문다. 선험적 의미의 형식적 동일성에 관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의식에 대한 수적인 동일성이라는 형식적 제약으로부터, 나 자신의 객관적, 경험적 지속성, 즉 인격의 지속성을 추론할 수 없다. 우리는 경험적 주관에다가 ‘나’라는 동일한 이름을 부여할 수는 있지만, 이 ‘나’라는 주관은 항상 변화하고 있는 것이지, 항상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인격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인격의 동일성을 자아의 수적인 동일성으로부터 증명하고자 하는 이유는, 인격의 동일성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시간 속에서 다양한 자아가 존재한다면, 이것은 자아의 분열이며, 이중 또는 다중 인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아의 분열이 약간이면 위선자요, 자아의 동일성이 훼손되어 의식의 통일성이 없으면, 인격의 분열이요, 인격의 지속성이 없게 된다. ‘나의 시간’에 대한 의식이 없이는 나의 인격의 동일성이 없다. 자아의 ‘시간’과 ‘통일’을 떠나서는 그 자신의 인격의 ‘동일성’을 확보할 수 없다. 모든 시간 속에서 내 자신의 의식의 동일성은 사고된 것과 그것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형식적 제약일 따름이다. 이것으로부터 객관적 인격의 지속성을 도출할 수 없다.
논리적 의미에서 자아를 실체다, 단순하다, 수적으로 동일하다는 등의 술어를 귀속시킬 수 있으나, 그러나 이것은 실재적, 경험적인 의미로 간주하면 오류가 생긴다. 따라서 첫 번째 오류추리는 나머지 오류추리의 기초가 된다. 자아를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므로, 이 실체를 단순한 실체다, 수적으로 동일한 실체라고 주장하는 것도 당연히 잘못이다. 한 마디로 선험적 오류추리는 선험적 자아에 실체라는 범주를 잘못 적용한 오류이다. 따라서 셋째 오류추리도 역시 대전제와 소전제에서 사용된 ‘시간 속에서 수적인 동일성을 의식하고 있는 자아’란 개념이 표현은 동일하나, 대전제에서는 선험적 의미로, 소전제에서는 경험적 의미로 사용되어서 결국 마음은 인격이라는 잘못된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따라서 인격성의 오류추리도 매개념 다의의 오류를(A402) 범한 것이다.
인격성의 개념은 이론 이성에서는 도저히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마음의 인격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영혼의 불멸과 인격성을 ‘이성의 사실(Faktum der Vernunft)’로서 받아들인다. 현세에서 도덕성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서는 반드시 영혼의 불멸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영혼불멸은 이제 이론적인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순수한 실천이성의 요청으로 이행하게 된다. 이론적으로 인식할 수는 없지만, 실천적 사용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이론이성에서 실천이성으로의 이행이 가능해진다.



5. 오류추리와 실천이성의 요청

인간 이성은 인식의 한계를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그 한계를 넘어설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성적 심리학은 마음은 실체이며, 단순하며, 동일한 인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특히 마음이 물질과는 달리, 불멸한다는 것이 이 증명의 초점이다. 영혼이 불멸해야만 선과 악의 문제, 사후 책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전생과 내세가 인정되기 위해서는, 영혼이 불멸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기억, 의식의 동일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한 인간을 동일한 인간으로 간주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바로 기억과 의식의 동일성이기 때문이다. 만약 동일한 인격, 동일한 영혼이 불가능하면, 생전의 행위에 대한 사후 책임 문제와 최고선을 실현시키기 위한 영혼의 불멸은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성의 사변적 사용은 경험의 분야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우리를 선험적 이념들로 인도한다. 그러나 이런 이념들은 가상임이 드러난다. 결국 이성의 의도는 유익하지만, 이념을 인식하고자 하는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다. 그러나 아직 하나의 시도가 남아있다고 칸트는 말한다. 그 시도란 바로 순수이성의 실천적 사용이 발견될 수 있지 않을까, 이 실천적 사용이 바로 순수이성의 최고목적을 달성하는 이념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의 사변적 관심이 우리에게 철저히 거부한 것을, 이성의 실천적 관심의 관점에서는 인정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B832)
이런 내용을 증명하기 우선 칸트는 순수이성의 소극적인 사용뿐 아니라, 적극적 사용에 주목을 한다. 즉 순수이성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노력하는 것은 단순히 이성의 사변적 관심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관심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성 자신의 궁극 목적들을 가지며, 이 목적들은 이성 본성에 따라 서로 결합되어 있다.(B825) 이성의 선험적 사용에서 귀결되는 궁극 목적은 의지의 자유, 영혼의 불멸, 신의 존재에 관계된다.(B827) 이 세 명제들은 우리의 지식을 위해서는 불필요하지만, 우리의 이성이 절실하게 추천하는 것이라면, 그 명제들의 중요성은 원래 오직 실천적인 것에 관계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세 명제는 그 자체로 보다 깊은 의도를 지니고 있다. 즉 만일 의지가 자유롭고, 신과 내세가 존재한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was zu tun sei)’라는 것이다.(B828) 이것은 원래 궁극 목적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관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 조직에서 자연의 궁극 의도는, 본래적으로 도덕적인 것을 지향하고 있다(B829)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이성의 모든 관심은 첫째,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둘째,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셋째, 나는 무엇을 바라도(희망해도) 좋은가? 라는 세 물음으로 집약된다. 첫째 물음은 전적으로 사변적이다. 따라서 순수 이성이 원래 겨냥했던 큰 목적인 신과 영혼불멸의 문제에서 멀어져 있다. 따라서 지식이 문제일 때에는 그 두 문제에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B833) 둘째 물음은 실천적이며, 순수이성에 속할 수 있지만, 이 경우 선험적이 아니라 도덕적이다. 셋째 물음 즉 내가 해야만 할 것을 내가 할 때, 내가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실천적인 동시에 이론적(B383)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실천이성에 관계한 순수이성의 두 물음 중에서 첫째 물음은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네가 행복한 만한 가치가 있도록 행위하라’는 것이다. 둘째 물음은 ‘내가 행복할 만한 가치가 있도록 처신했다면, 나는 행복에 참여할 수 있음을 바라도 좋은가’라는 것이다. 이 물음에 답할 때, 선천적으로 도덕법칙을 지시하는 순수이성의 원리들 즉 신의 존재나 영혼불멸이, 이런 바람을 필연적으로 도덕법과 결합시키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점이다.(B837) 왜냐하면 감관은 현상계만을 우리에게 제시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이제야 이성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도덕계에 속하는 것으로 표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성계에 있는 우리 행동의 결과로서의 도덕계를, 우리에게 있어 내세라고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감성계는 도덕과 내세와의 결합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과 내세는 순수 이성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책임과 밀접한 두 전제이다.(B839) 도덕성과 행복과의 합치는 전지한 신 아래에 있는 가상적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이성은 이런 신을 내세와 더불어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도덕법은 헛된 환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신이 없다면, 이성에 의해 결합되는 도덕법과 그 필연적 결과인 행복의 관계는 사라진다.(B839)
그러므로 무제약자를 추구하는 순수이성의 선험적 이념은 인식론적으로는 가상이라 할 수 있지만, 실천이성의 도덕적 이념과 연결되어 있다. 이성의 순수한 개념이 단지 이념에 불과하다고 해도, 오성 사용에 대한 ‘규준(Kanon)’의 역할은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념을 통해서 비로소 자연의 인식 문제에서 자유의 실천적 문제로 이행한다(A385). 이성의 사변적 이념과 도덕적 이념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필연성과 자유의 영역이, 그리고 이론과 실천의 영역이 선험적 이념에서 연결된다. 따라서 선험적 이념이 도덕적 이념의 토대가 된다(A385).
칸트에게는 인식으로부터 실천으로, 완전성으로 향하는 선험적 이념이 주어져 있다. 이론 이성의 막다른 골목에서, 즉 현상적인 것이 주어지지 않은 곳에서, 바로 이념을 통해서 도덕, 실천으로 나아간다. 현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뛰어넘는 곳에 도덕과 실천이 있다. 이런 일은 이념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칸트에게 이성 개념, 즉 이념이 없다면, 그의 실천철학은 있을 수 없다. 끊임없이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이성의 숙명은, 이론이성에서는 가상에 봉착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실천이성을 위한 새로운 영역을 드러낸다. 이성의 숙명은 이미 실천과 믿음을 위한 자리를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현상의 영역에서는 선험적 이념의 허구성이 드러나지만, 그렇다고 그 이념의 실천적 가능성까지 부정 당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선험적 이념을 우리가 전혀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실재할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은 열려 있다. 실천적 영역에서는 이런 이념의 논리적 가능성으로부터 이념의 실천적 필연성을 요청하게 된다. 「분석론」에서는 현상을 매달고 함께 다니지만, 이것을 벗어놓았을 때 펼쳐지는 새로운 영역이 이미 예고되고 있다. 도덕 형이상학으로 진입할 수 있는 궤도설정을 이미 「감성론」, 「분석론」에서 해 놓고 있다. 칸트는 경험을 근거로 삼아서 「감성론」에서 실천, 도덕까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사실상 칸트는 넓은 의미의 이성을 ‘오성’과 ‘이성’ 즉 범주와 이념으로 나누어서 실천과 도덕의 자리를 마련해 주고 있다. 이런 구분을 통해서 자연과학의 일방적 지배로부터 도덕의 영역을 확보하고자 한다. 칸트는, 종래의 주요 철학이 경험을 떠나거나 경험에 매몰되어서 철학적 문제에 접근한 것과는 달리, 경험을 매개로 해서 자연과 도덕의 세계를 동시에 정초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성적 심리학은 인식 대상이 될 수 없는 마음을 실체화했기 때문에, 논증이 아니라, 일종의 신념에 불과하다. 이론이성으로 논증할 수는 없지만, 실천이성에서는 오류추리의 내용을 요청을 통해서 수용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항상 변함에도 불구하고,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나의 지속성, 동일성, 불멸성을 기대할 수 있는 이유를, 사변적 근거와는 다른 근거로부터, 즉 실천적 근거로부터 얻을 수 있다.(A383) 이제 우리는 이성의 사변적 사용이 아니라,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앎이 아니라, 삶을 위해서는 인격성과 불멸성의 개념이 요청된다. 사변이성과 실천이성의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선험적 변증론」의 선험적 이념이다.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되, 그것을 넘어서는 또 다른 영역을 마련해 놓은 것이다. 그 영역은 인식의 영역이 아니라, 실천의 영역이며, 요청의 영역이다. 이 둘은 구분되지만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바로 이성에는 이론과 실천이라는 두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칸트철학의 아주 묘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신과 영혼불멸의 이념은 최고선을 이루기 위한 조건들이라고 한다. 즉 영혼불멸은 우리의 순수한 이성의 실천적 사용을 위한 조건이다. 최고선은 영혼불멸의 전제 아래서만 실천적으로 가능하다. 영혼불멸은 도덕법과 불가분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영혼불멸은 순수한 실천이성의 요청(ein Postulat)이다. 비록 이론적으로는 인식할 수 없지만, 영혼불멸이라는 이념은 실천적인 관점에서 가정될 수 있고 또 가정해야만 한다. 실천적 관점에서는 영혼불멸의 이념은 아무런 모순도 없다. 그런데 영혼불멸의 이념은 자유의 이념을 매개로 해서 객관적 실재성이 주어지는데, 이는 실천이성의 요청이다. 이러한 요청은 사변의 임의적인 의도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영혼불멸을 가정해야 하는 법칙적인 요청이다. 영혼불멸이 있어야, 인간 행동의 목적인 최고선이 비로소 생긴다.
물론 사변이성은 신과 자유와 영혼불멸의 가능성을 충분히 증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념들을 이성의 도덕적인 사용 위에서 확립해야 한다. 사변이성은 그 이념들의 객관적 실재성을 부정하지만, 순수 실천 이성에서는 그 이념들의 실재성을 인정할 수 있다. 오직 실천적 관점에서만 이념들의 객관적 실재성이 인정된다. 우리는 이 이념들에 관해서, 사변 이성과는 다른 사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실천이성은 사변이성과 달리, 자유의 인과성 범주에다 실재성을 부여한다. 따라서 사변이성에서는 단지 사고의 대상에 불과한 것이, 실천이성에서는 ‘하나의 사실(ein Faktum)’로서 확증된다. 사변적 이성에서는 생각하는 주관은, 즉 영혼(마음)은 단지 현상에 불과했으나, 실천이성에서는 영혼불멸이 실재성을 인정받는다. 이론적 인식에서는 가상체들의 객관적 실재성이 부정되지만, 실천적인 인식에서는 인정된다. 따라서 신, 영혼불멸, 자유의 이념은 모든 경험론자들에는 걸림돌(der Stein des Anstoßes)이지만, 비판적인 도덕론자들에게는 가장 숭고한 실천원칙들에 도달하는 열쇠다.
행위의 보편적 입법이라는 도덕의 근본법칙에 대한 의식을 우리는 “이성의 사실(ein Faktum der Vernunft)”이라고 하며, 이런 이성의 사실은 거부될 수 없다. 순수한 실천 이성은 도덕법칙(Sittengesetz)이라는 보편적 법칙을 인간에게 부여한다. 그런데 이런 도덕법칙은 바로 영혼불멸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영혼불멸은 ‘이성의 사실’이라고 불릴 수 있다.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서는 영혼불멸의 이념이 객관적 실재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런 영혼불멸을 통해서 칸트는 도덕의 완성을 목표로 한다. 도덕의 완성 즉 최고선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혼불멸이 요청되며, 이승에서 최고선을 실현시키는 것은 도덕법이 규정할 수 있는 의지의 필연적 목표이다.
그런데 의지와 도덕법의 완전한 일치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목표이지만,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서는 필연적인 것으로 요구된다. 현실에서는 단지 의지와 도덕법의 완전한 일치를 향한 무한한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이 무한한 전진은 동일한 이성적 존재자의 무한한 생존과 인격성, 즉 영혼불멸을 전제해야만 가능하다. 따라서 영혼불멸은 도덕법과 불가분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순수한 실천이성의 요청이다. 유한한 이성적인 존재, 즉 인간에게 가능한 일은, 도덕적 완전성의 보다 낮은 단계에서 보다 높은 단계로 점차 향상하는 무한한 전진뿐이다.
비록 이념이란 현실에서는 그것의 완벽한 구현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념 그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념은 인식론적으로는 가상이지만, 실천적으로는 실재해야 한다. 칸트는 현실에서 모범적인 덕있는 사람을 평가할 때, 반드시 덕의 ‘이념’을 근거로 판단한다(B372)고 말한다. 현실에 덕의 이념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덕의 이념에 근거해서 도덕적 가치의 유무와 도덕적 완전성을 언급한다. 따라서 도덕적 선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념의 인도를 받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실현된다. 이념들과 그에 따른 행위가 도덕적 선을 경험 중에서 가능하게 한다. 칸트는 도덕의 분야에서는, 인간의 이성이 진정한 인과성이며, 이념들이 행위들과 그 행위 대상들에 작용하는 원인들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념들이 완전히 경험 중에 표현될 수는 없지만, 선의 이념들이 비로소 선의 경험 자체를 가능하게 한다(B375)고 말한다. 이과 같이 이념이란 경험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기는 하지만, 그 이념을 부정하면 경험의 근거가 상실되는 것이다. 즉 이념과 행위가 경험의 원천이자 원인이 될 수 있다. 칸트는 여기서 자연주의 윤리학을 반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념과 현실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 그러나 그 괴리와 한계를 규정할 수는 없다. 모든 정해진 한계를 넘어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의 자유이기 때문이다.(B374) 따라서 이념이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의 행위를 이끌어가는 목표점으로서 실재한다. 칸트는 모든 것의 기초를 이런 순수한 ‘이념’에 두고자 생각했다. 이념이 있어야만 지표를 삼을 수 있으며, 다른 것들을 이념의 토대 위에 세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천적 이성을 위해서는 ‘선험적’ 이념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무제약자와 자유의 이념은 실천적, 윤리적 영역에서 권한이 있다.
그런데 경험은 자연에 관해서는 진리의 원천이지만, 그러나 도덕법칙들(sittliche Gesetze)에 관해서는 경험은 유감스럽게도 가상의 어머니(die Mutter des Scheins)에 불과하다. 칸트는 내가 해야 할 일(당위, was ich tun soll)에 관한 법칙을, 행해진 일(사실, was getan wird)로부터 이끌어 내거나, 이것에 의해서 제한하려고 하는 것은 가장 배척할 일(B375)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칸트의 윤리적 이상주의와 자연주의 비판을 볼 수 있다. 칸트는 사실과 가치가 구별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가치를 일종의 사실로 보고, 가치판단을 사실판단으로 환원하려는 자연주의적 입장은 도덕의 영역에서는 결코 수용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경험적 검증이 가능한 경험적인, 자연주의적인 사실판단을 근거로 가치판단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오류를 불러일으키는 가상이다. 칸트는 가치속성은 경험적 속성으로 환원할 수 없으며, 자연주의적 용어로 정의 가능하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주의는 규범적 진술과 기술적 진술, 당위명제와 사실명제 사이의 결정적 차이를 부정하기 때문에, 무어(G. E. Moore)가 ?윤리학의 원리(Principia Ethica)?에서 언급한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한 것이다. 따라서 경험을 통해서 이념을 이끌어내려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칸트는 인식의 영역과 이념의 영역, 또는 인식과 도덕의 영역을 구별하면서, 그 둘은 다른 차원에 속하기 때문에, 서로 환원 가능한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도덕은 그 자체로 고유한 영역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선험적 이념을 정확히 분석하는 길만이 존엄한 도덕적 건축물의 지반을 평탄하게, 견고하게 하는 것(B376)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우선 선험적 이념에 근거한 잘못된 형이상학을 하나 하나 붕괴시키면서 어떤 잘못을 범하고 있는가를 밝히고 있다. 이 과정이 바로 도덕체계의 토대를 확고히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실천철학이 비로소 꽃필 수 있다.



6. 결론

이성적 심리학에서 주장하는 마음의 실체성, 단순성, 인격성은 경험의 한계를 넘어선 영역에 관한 이성의 월권적 주장이므로, 우리의 인식을 전혀 확장시켜 주지 못한다. 따라서 무제약자를 추구하는 이성의 선험적 이념은 결국 가상으로 드러나지만, 선험적 가상이 단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론이성에서는 이념은 단지 이념에 그치지만 실천이성에는 이념은 실천적 근거를 지니며, 도덕법칙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칸트는 결국 이성적 오류추리에서 전통적 형이상학이 논증하고자 하는 선험적 이념의 인식 가능성은 부정하지만, 선험적 이념의 존재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전통적 형이상학의 인식적 증명방식이 잘못임을 밝힐 뿐이다. 칸트는 오류추리를 통해서 선험적 이념의 올바른 증명은 실천이성의 요청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선험적 오류추리에서 마음의 인격성에 대한 증명에서 인식대상으로서의 마음의 인격성은 부정하지만, 실천이성의 요구에 의한 인격성은 인정한다. 인격성의 개념은 실천적 사용을 위해서 필요하다.(A365)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칸트는 선험적 오류추리, 나아가서는 선험적 변증론을 이론이성으로부터 실천이성으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하도록 전체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칸트는 이미 ?순수이성비판?의 범위 안에 이성의 이념의 긍정적 사용에 대한 적절한 방식을 제시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는 전통적 형이상학은 이론 이성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논증했다. 따라서 칸트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사람’이라고 불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파괴는 새로운 건설을 위한 하나의 단계이다. 그는 전통적 형이상학을 파괴했지만 새로운 형이상학, 즉 도덕 형이상학을 건설했으며, 인식의 형이상학과 도덕 형이상학을 조화시키고자 했다. 특히 영혼, 자유, 신이라는 선험적 이념들을 통해 과학 만능주의를 비판하면서, 과학의 지배로부터 윤리와 도덕의 영역을 구제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정초하려고 한 것은 아주 큰 의미가 있다. 영혼불멸은 도덕의 가능성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며, 만약 영혼불멸이 요청되지 않으면 도덕은 불가능하다. 영혼불멸을 이론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실천적 삶에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칸트는 영혼불멸을 실천이성의 요청이라고 했다. 그는 「선험적 변증론」의 「오류추리」에서부터 이론이성의 영역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실천이성의 요청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다. 따라서 영혼불멸에서부터 실천이성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을 철저히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연결되는데, 그 연결점은 바로 「선험적 변증론」이다.
그런데 칸트가 볼 때, 실천이성과 관련해서 존재론적으로 우위에 서 있는 것은 가치론적으로는 앞서겠지만, 인식론적으로는 독단적일 수밖에 없다. 즉 실체성, 단순성, 인격성 등을 지닌 마음(영혼)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이론이성을 통해서는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그런 마음을 인식하고, 증명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독단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그런 자아의 존재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인식론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자아는 다른 방식으로 수용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요청’이라는 형식이다. 존재론적으로, 가치론적으로 우위에 있지만, 인식론적으로는 독단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칸트의 철학은 두 차원으로 나누어진다. 인식 차원과 실천 차원이 그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대철학이나 칸트철학의 특징이다. 고대철학은 가치와 인식, 존재와 인식, 행위와 인식이 모두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지만, 이것을 분리하기 시작한 것이 근대요, 이 분리를 선험적 이념을 매개로 해서 연결시키려고 시도한 사람이 바로 칸트이다.
그러나 칸트는 선험적 이념을 정면으로 이론적 이성을 통해서 논증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대신 칸트는 실천 이성의 영역에서 ‘요청(Postulat)’이라는 방식을 통하여 ‘이념’을 확립하는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정면공격이 아닌 측면공격을 통해서 ‘이념’을 확립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선험적인(transzendental)’ 방식을 취하지 않고는 올바로 ‘인식’과 ‘실천’을 근거지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만약 ‘경험’에만 의지하면 보편적인 이념이 성립될 수 없고, ‘초월’에만 의지하면 독단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념’에 근거해서, 이념을 통해서 인식과 실천적 자유를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선험적’ 방식을 제시한다. 이것이 바로 선험적 이념을 매개로 해서 이론과 실천의 영역을 동시에 해명하는 칸트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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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sammenfassung

die Paralogismen und das Postulat der praktischen Vernunft bei Kant

- Park, Jong-Sig -


Es handelt sich in dieser Arbeit um die transzendentale Ideen und ihre praktische Bedeutung in Kants Kritik der reinen Vernunft. In der transzendentalen Dialektik zeigt Kant, daß die Versuche der reinen Vernunft, eine Welt jenseits der Erscheinungen als das wahrhaft Seiende zu erkennen, notwendig mißlingen. Alles Bemühen der bisherigen Philosophie, auf dem Gebiet der Metaphysik Erkenntnisse zu gewinnen, sind grundsätzlich zum Scheitern verurteilt. Die Vernunft kann weder beweisen, daß die Seele unsterblich und der Wille frei ist, noch daß es Gott gibt. Die Argumentationen der traditionellen Metaphysik für den Beweis der Seele, Freiheit und des Gott sind eine transzendentale Täuschung. Die Metaphysik gründet im Interesse der Vernunft, zum Bedingten das Unbedingte aufzusuchen. Die Vernunft sucht die begriffliche Erkenntnis zur höchsten Einheit zu bringen. Die höchste Einheit ist erst mit einer Bedingung erreicht, die selbst nicht mehr bedingt ist; das ist das Unbedingte, d.h. die transzendentale Idee. Die Suche nach dem Unbedingte liegt im natürlichen Interesse der Vernunft. Aber die Vernunft zwar denken das Unbedingte, aber nicht erkennen kann. Also entpuppt sich die Erkenntnis des Unbedingten als vermeintliche, aber nicht wahre Erkenntnis; sie ist nichts anderes als transzendentaler Schein.
In diesen Paralogismen findet die Vernunft die transzendentale Idee des Unbedingte als die absolute Einheit des denkenden Subjekt. Der dialektische Schein der Paralogismen beruht auf einer Hypostasierung. Er wird unbestimmte Begriff eines denkenden Wesens zu einem wirklichen Gegenstand außerhalb des denkenden Subjekte gemacht. Erst die transzendentale Vernunftkritik bietet die Möglichkeit, die Doppeldeutigkeit im Mittelbegriff der rationalen Psychologie zu durchschauen und ihre Erkenntnisansprüche als puren Schein zu entlarven. Deshalb leistet die transzendentale Dialektik mehr als bloß eine Destruktion der Metaphysik. Kant verwirft nicht die transzendentale Ideen, sondern gibt ihnen einen neuen methodischen Sinn. Sie haben zwar keine konstruktive Fuktion für die Erkenntnis, doch haben sie eine regulative Bedeutung. Das Dialektikkapitel hat nicht nur eine theoretische und negative, sondern auch eine praktische und positive Bedeutung. Nach der praktischen Metaphysik sind die Ideen von Gott, Freiheit und Unsterblichkeit keine Erkenntnisse der theoretischen, sondern Postulate der praktischen Vernunft: “Ich mußte also das Wissen aufheben, um zum Glauben Platz zu bekommen" Also muß die transzendentale Dialektik der Brücke zwischen spekulativer und praktischer Vernunft sein.

※ Schlagwörter : Erkenntnis, transzendentale Schein, transzendentale Idee, Paralogismus, Unsterblichkeit, praktische Vernunft, Postul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