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가을 유서/류시화

나뭇잎숨결 2021. 8. 31. 03:56

가을 유서

 

 

류시화

 

 

가을엔 유서를 쓰리라

낙엽되어 버린 내 시작 노트 위에

마지막 눈 감은 새의 흰

눈까풀 위에

혼이 빠져 나간 곤충의 껍질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차가운 물고기의 내장과

갑자기 쌀쌀해진 애인의 목소리 위에

하룻밤새 하얗게 돌아서 버린

양치식물 위에

나 유서를 쓰리라

 

파종된 채 아직 땅 속에 묻혀 있는

몇 개의 둥근 씨앗들과

모래 속으로 가라앉은 바닷게의

고독한 시체 위에

앞일을 걱정하며 한숨짓는 이마 위에

가을엔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장 먼 곳에서

상처처럼 떨어지는 별똥별과

내 허약한 폐에 못을 박듯이

내리는 가을비와

가난한 자가 먹다 남긴 빵껍질 위에

지켜지지 못한 채 낯선 정류장에

머물러 있는

살아 있는 자들과의 약속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을이 오면 내 애인은

내 시에 등장하는 곤충과 나비들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큰곰별자리에 둘러싸여 내 유서를

소리내어 읽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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