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화서
- 이성복
1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에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버리면 그 전제前提를 무시하는 거예요.
3
언어는 때 묻고 상스러운 것이지만,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보고 들을 수 없어요. 언어는 어떤 대상이나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 아니에요. 언어 자체가 대상이고 목적이에요. 언어를 수단으로 사용하면 언제나 결핍감을 느껴요. 글쓰기는 언어 자신의 탈주이며 모험이에요.
16
우리는 시를 쓰면서도 언어를 불신해요. 불성실한 하인쯤으로 여기는 거지요. 언어는 우리보다 위대해요. 언어를 믿어야 언어의 인도引導를 받을 수 있어요.
18
우리의 세계는 언어로 된 세계에요. ‘언어 너머’ 또한 언어이고, 지금 이 말조차 언어예요. 시인은 알몸으로 언어와 접촉하는 사람이에요.
20
머리는 의식적이고 사회적이지만, 손은 욕망과 무의식에 가까워요. 시는 머리를 뚫고 나오는 손가락 같은 거예요. 걸으면 벌어지고, 멈추면 닫히는 치파오라는 중국 치마 같은 거지요.
24
턱수염을 아래서 위로 쓸어 올릴 때의 느낌 아시지요. 그처럼 말에 저항이 없으면 바로 산문이에요. 시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느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35
말은 작고 가볍게 해야 해요. ‘…임에 틀림없다 must’ 보다는 ‘…일지 모른다 may’가 힘이 있어요. 판단 유보의 어조사 ‘의矣’를 즐겨 쓰는 공자에 비해, 단정적 어조사 ‘야也’를 자주 쓰는 맹자를 ‘아성亞聖’이라 한 대요. ‘성인’에는 좀 못 미친다는 것이지요. ‘삼천년뒤 성인이 다시와도 내 말은 못 바꾼다 百世聖人復起 不易吾言’는 그의 말은 너무 도도해서 힘이 떨어져요.
36
시는 빗나가고 거스르는 데 있어요. 이를테면 ‘서재’와 ‘책’대신 ‘서재’와 ‘팬티’를 연결하는 식이지요.
39
항상 입말에 의지하세요. 가볍고 쉽게 사라지기 때문에, 입말이 소중한 거예요. 우리 누구나의 인생처럼……
65
시는 단도직입單刀直入이고 단도직입短刀直入이에요. 짧은 칼 한 자루 들고 적진으로 뛰어드는 거지요. 시는 백미터 달리기에요. 그 짧은 시간에 무슨 말을 주저리주저리 하겠어요. 말수를 줄여야 실수도 적어요.
67
가야금 탈 때 손으로 ‘지그시’ 눌러주어야, 깊고 부드러운 음이 나오지요. 멋진 이미지로 장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이 ‘지긋함’이에요.
85
시는 반전反轉의 힘이에요. 행과행, 연과 연사이에 전환이 있어야 해요. 가령 ‘꽃이 피었다 - 새가 울었다’는 연결보다 ‘꽃이 피었다 - 새가 죽었다’는 연결이 힘이 있어요.
86
'아주머니 속에 주머니가 있다’ 이런 식으로 말을 벗겨보세요. 주머니 속에는 또 머니가 있지요. 그러니까 아주머니의 주머니에 돈이 있다는 거잖아요. 이렇게 양파 껍질 벗기듯이 벗기다 보면 나중엔 아무것도 안 남아요. 시는 대상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99
시적 언어는 치타가 누의 목덜미를 무는 것처럼 대상의 급소를 공격해요. 그 한순간을 위해 '뜨거운 솥을 핥는 개'처럼 자꾸 말을 던져야 해요.
135
멋있는 것, 지적知的인 것, 심오한 것 찾지 마세요. 피상적이고 무의미한 것에서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시예요. 사소한 일상보다 더 잔인한 건 없어요. 죄수를 발가벗겨 대나무밭에 눕혀 놓으면, 나날이 커 올라오는 죽순竹筍에 찔려 서서히 죽어간다고 하지요.
170
시는 천둥벼락이고 집중호우예요. 머뭇거리지 말고 바로 써야 힘이 있어요. 악어가 누의 목덜미를 물고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 보셨지요. '저 미안하지만 손 좀 잡으면 안될까요' 이러지 말고 바로 잡아버리세요. 안 그러면 힘들어져요.
171
항상 보여줘야해요. 내가 왜, 어떻게 우울한지 알려고 글을 쓰는 건데, '나 우울해, 건드리지마!' 이러면 되겠어요. 보이게 쓸 형편이 아니라면 말의 꼬임새라도 만들어야 해요. 그래야 '나'도 살고, '우울'도 살아요.
174
시 쓰기는 봉오리가 피어나거나, 풍선이 부풀어 오르는 것과 같아요. 처음에는 어떤 모양이 나올지 짐작하기 어려워요. 또 시는 재즈 연주와 비슷해요. 과정이 목표이고, 멈추는 곳이 끝나는 곳이에요.
217
시는 침술과 같아요. 문제 되는 부위를 정확히 찔러 통증을 진정시키는 것. 투약이나 수술 없이도, 약간의 아픔만으로 고통을 제거할 수 있다는 거. 시는 한의학과 마찬가지로 오랜 전통이에요.
278
다친 새끼발가락, 이것이 시예요.
307
시는 알고 쓰는 게 아니라, 쓰는 가운데 알게 되는 거예요.
331
막막한 바다에서 어부는 어디에다 그물을 쳐야 할지 알아요. 간절함과 안쓰러움, 부질없음과 속절없음이 시의 포인트이고 기술이예요.
423
시하고 연애하고 같다고 하지요. 더 깊이 들어가면 저절로 빠져나올 텐데, 나오려고 하니까 못 빠져나오는 거예요.
425
이유 없이 상대가 함부로 대하더라도 속상해하지 마세요. 그 대신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세요. 나한테 잘못이 없으면 그 사람 문제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수신하지 않은 편지는 발신자에게 돌아간다 하잖아요.
430
왜 자기 눈에는 자기가 안 보일까?
470
'당랑거철螳螂拒轍'이란 말이 있지요. 사마귀가 겁 없이 수레 앞에 버티고 서서 한번 해보자고 덤비는 것이지요. 참 말도 안 되는 한심한 짓이지만, 시도 그런 것 아닐까 해요. 아름드리 나무 기둥을 뽑겠다고 부둥켜안고 용써보는 것.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에, 실패 안 할 수밖에 없다는 듯. 이 '올 인'하는 것. 그거라도 안 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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