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張載의 心統性情論

나뭇잎숨결 2020. 12. 25. 12:23

張載의 心統性情論


이 종 흔*

[한글 요약]


이 논문은 張載의 心統性情論이 중국 유학사에서 어떠한 위치를 점하며, 어떠한 특징을 지니는가 하는 점을 고찰해 본 글이다. 즉 장재가 心統性情論을 정립함에 있어 先秦과 漢唐 유학의 心て性て情의 견해를 어떻게 수용て발전시키며, 그리고 송대 신유학의 집성자인 주희를 비롯한 후대의 학자들이 장재의 心統性情論을 어떻게 수용하고, 평가하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선진유학과 한당유학에도 心て性て情의 문제에 관한 학자들 나름의 견해는 많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장재가 중국 신유학의 心て性て情 개념의 전개 역사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이들에 대한 단편적인 견해들을 하나의 종합적인 구도에 의거 정합적 체계를 이루어냄으로써 신유학의 이론적 기초를 잡은 데에 있다.

장재에게 있어 인간은 본질적으로 善한 존재일 수밖에 없으나 후천적으로 惡行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선천적 善性을 그대로 발현시키거나 또는 惡의 진전 징후를 사전에 감지하여 善의 방향으로 되돌리기 위한 방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장재는 性て情의 개념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心과 性て情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구하게 되었다. 그는 心에 대해서 "性과 知覺을 합쳐 心의 이름이 있다"라고 하여 心을 선천적 도덕성과 지각능력의 합작물로 보았다. 性에 대해서는 "사람이 天에 품부한 것이 性이다. 仁義禮智는 사람이 따라야 할 道로서 소위 性을 일컫는다"라고 하여 인간의 타고난 선천적 至善性의 근원을 性에서 찾았다. 情에 대해서는 "情은 실제의 일이니 곧 喜怒哀樂을 이른다"라고 情을 비가시적 性이 氣質이라는 형체적 매개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것으로 보았다. 心과 性て情의 관계에 관해서는 "心이 性과 情을 통섭한다"라고 하여 心은 性て情과 統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한다.

장재의 이러한 心統性情論은 心의 統의 논리에 의거 후천적 氣質의 情과 本然의 선천적 性을 결합시켜 병론함으로써 孟て筍 이래의 性善て性惡의 상반적 논리와 동중서 이후의 性善情惡의 이분법적 사고를 동시에 해결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侯外廬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이학의 수많은 명제들이 장재의 학설에 이미 갖추어져 있으며 맨 먼저 그 단서를 마련한 바 적지 않기 때문에 理學의 기초를 세운 인물 혹은 理學의 1차 集成者로 평가한다.


주 제 어 : 心統性情, 仁義禮智, 喜怒哀樂, 氣質의 情, 本然의 性


Ⅰ. 문제제기


송조 六賢의 한 사람인 張載에 대한 그 동안의 국내 연구는 주로 氣哲學, 易哲學, 心性論, 天人合一論, 道德哲學 등 철학체계의 설명과 해석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 결과 인간의 도덕적 본성의 내원이 무엇이며, 그의 본체론과는 어떠한 연결 구도 속에 놓여 있는가 하는 점들에 대한 나름의 연구성과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신유학 心性論의 정립 과정에서 지대한 공헌을 했던 장재의 心て性て情에 관한 연구와 그에 걸맞는 평가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같다. 즉 天地之性과 氣質之性 등 性論 자체에 대한 탐론은 많이 있지만 心과 性 및 情의 구체적 의미 그리고 心과 性て情의 유기적 관계에 관한 논의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같다. 하지만 이러한 장재의 心과 性て情의 개념과 관계에 관한 견해는 신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며, 그것은 구체적으로 心統性情論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들 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心統性情論은 주희의 이론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또한 주희의 心統性情論에 관한 연구는 많이 있다. 心統性情論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朱熹를 배제하고 心統性情論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朱熹와 心統性情論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으로 인지되고 있다. 이에 반하여 '心統性情'의 개념과 구절을 최초로 언급한 사람이 장재라는 점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을 하고 있지 않는 것같다. 하지만 주희 자신도 장재의 심통성정의 논리에 대해서는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또한 퇴계도 성학십도의 하나로 심통성정도를 포함시키고 있음을 볼 때 장재의 심통성정론이 기철학이나 역철학 등 다른 여러 부분에 비해서 신유학사에서의 그 이론적 중요성이 뒤진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본 논문은 이러한 점에 주목하고, 그 연구의 한 방향으로 新儒學 心性論 형성의 개조라 할 수 있는 張載(생존 연대 1020∼1077, 號는 橫渠, 字는 子厚)의 '心統性情'論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물론 송대의 신유학의 형성과 정립 이전에도 이들에 대한 나름의 이론은 있었다. 즉 선진유학과 한당유학에도 心과 性情의 문제에 대한 학자들 나름의 견해는 많이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장재가 중국 신유학의 心て性て情의 사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이들에 대한 단편적인 견해들을 하나의 종합적 구도에 의거 정합적 체계를 이루어 낸데에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心統性情'論으로 불리는 장재의 心의 統割論이 유학사에서 어떠한 위치를 점하며 그리고 어떠한 특징을 지니는가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한다. 즉 장재가 자신의 心統性情論을 정립함에 있어 先秦과 漢唐 유학의 心て性て情의 견해를 어떻게 수용て발전시키며, 그리고 송대 신유학의 집대성자인 주희는 장재의 心性情論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끝으로 후대의 학자들이 心統性情論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는지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2. 張載의 心觀


장재의 心統性情의 논리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心觀을 살피는 일이 긴요하다. 왜냐하면 心은 心과 性의 관계, 心과 情의 관계, 性과 情의 관계, 心과 性て情의 관계 등을 고찰하는 데 있어 중핵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유학사에서 心論에 관한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해 볼 수 있다. 그것은 '以仁識心'과 '以智識心'이다. '以仁識心' 계통에서 心은 양심[良心]て본심[本心]て적자지심[赤子之心]て심본체[心本體]て천심[天心]て양지본체[良知本體] 또는 도덕심[道德心]て덕성심[德性心] 등으로 불린다. '以智識心' 계통의 心은 형기심[形氣心]て기질지심[氣質之心]て인심[人心]て성심[成心] 또는 인지심[認知心]て정식심[情識心] 등으로 불린다. 전자는 맹자가 개창자로서 후에 정명도를 거쳐 육상산과 왕양명 등에게로 계승되어 心學으로 체계화된다. 후자 계통의 心論은 순자에서 시작되어 정이를 거쳐 주희 계열로 이어지는 心論이다. 중국의 전통에 있어 心을 논한 학자가 위에서 거론한 몇명의 유학자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양웅, 동중서, 왕부지, 대진 등의 학자들도 각기 나름의 心論을 세웠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말하면, 전통 유가의 心論은 비록 각 개인 간에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기본 입장에 있어서는 순자의 노선 아니면 맹자의 노선, 즉 '以智識心' 아니면 '以仁識心'의 양대 노선 가운데 어느 하나에 귀속된다.

그러면 이러한 중국 유학의 心論史에서 장재가 기여한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 두 노선을 자신의 이론적 구도에 맞추어 외적 체제와 내적 내용의 형식으로 조합한 데에 있다. 실제로 내용의 세부적인 점을 보면 장재의 心論과 孟て筍의 心論 간에는 서로 다른 점이 상존한다. 그렇지만 장재와 순자의 心論의 관계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말하면 그 類는 같으나 그 種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고, 장재와 맹자의 心論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 種은 같으나 類는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장재의 心論에서는 맹자의 '以仁識心'的 성격과 순자의 '以智識心'的 성격의 양 요소를 모두 찾아 볼 수 있다. 그의 心論은 외면상으로는 '以仁識心'의 특성을 보이지만, 속 내용에 들어가서는 '以智識心'의 성격을 나타낸다. 이러한 점은 장재의 다음의 언급에서 찾아 볼 수 있다. "虛와 氣를 합하여 性의 이름이 있고, 性과 知覺을 합하여 心의 이름이 있다." 장재는 心을 太虛本體에 내원을 두는 性과 인간이 구체적 형체를 지니게 됨으로써 갖게되는 知覺의 합일로 보았다.

그는 이 구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有와 無가 하나가 되고 안과 밖이 합하는 곳 바로 여기서 人心이 由來한다"라고 말한다. '有와 無가 하나가 된다'와 '안과 밖이 합한다'는 양 구절은 바로 '性과 知覺을 합해 心의 이름이 있다'는 문장을 가리켜 설명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전자의 구절은 性에 관한 설명으로, 후자의 구절은 知覺에 관한 설명으로 파악할 수 있다. '有와 無가 하나가 된다'는 구절의 의미는 "有와 無, 虛와 實이 하나의 사물로 통하는 것이 性이다"라는 구절을 통해 그 뜻을 명확히 읽어낼 수가 있으며, '안과 밖이 합한다'는 구절의 의미는 "사람들이 자기가 지식을 지녔다고 말하는 것은 귀와 눈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이다. 사람이 받게 된 것은 안과 밖이 합쳐지는 데서 연유한다"라는 구절을 통해 그 뜻을 분명히 알아낼 수가 있다. '有와 無의 통일'은 性의 본질적 속성을 지칭하는 것이고 '안과 밖의 合'은 知覺의 기본적 공능을 가리키는 것이다.

서양철학의 인식론적 견지에서 볼 때 '안과 밖을 합한다'는 것은 객관과 주관의 이원성을 이론적으로 상정하거나 인정한다는 뜻이다. 객관은 인식의 대자적 대상이며 주관은 인식의 즉자적 주체이다. 인식 주관은 인식 대상인 객관계를 見聞的 차원에서부터 德性的 차원에 이르기까지 알고자 하는 앎에의 지향성을 내재적 특성으로 한다. 그런데 天人論의 관점에서 볼 때 지각의 문제는 人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구체적 형체를 지니지도 않으며 안팎 구분의 논란 소지가 전혀 없는 天에 대해서는 心의 지각 기능의 문제를 논할 수가 없다. 心의 지각 기능에 관한 논의는 실제적 감각기관을 지닌 인간에게만 해당될 수 있는 것이다. 세계는 心을 이정표로 삼아 주관과 객관의 이원적 세계로 나누어진다. 장재는 이 점을 두고 "天은 心이 없다. 心은 모두 사람에게 있어서의 心이다"라고 말한다.

요컨대 그는 心에 두 가지의 고유한 특성을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 첫 번째는 지각의 능력이고, 두 번째는 도덕성이다. 인간이 만물의 靈長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만물에 비하여 도덕성과 선악시비 판단의 지각능력을 지녔다는 것이다. '性과 知覺이 합해져 心의 이름이 생겼다'는 말은 선천적 善端으로서의 性만 있고, 선악시비 판단 능력으로서의 知覺 기능이 없다면 心이 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心이 단순한 知覺 기능만을 지니고, 도덕적 본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인간은 생물이거나 동물에 지나지 않을 것임을 함의한다. 사람의 의식활동은 구체적인 지각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선천적인 도덕본성의 결정과 지배를 받지 않는 지각의 활동 방향이란 있을 수 없다. 장재는 두 측면이 합쳐질 때 사람의 온전한 心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한 것이다.



3. 張載의 心統性情論의 내용


장재는 先秦儒學과 漢唐儒學의 心て性て情論을 계승함과 동시에 송대 신유학의 전반적 구도에 따라 본체론적 토대위에 그것을 정초시킨다. 그런데 心의 본체론적 정초의 노력은 性て情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진행된다. 우주 본체론과의 연계구도에 의거한 心て性て情三者 관계 설정의 노력은 구체적으로 '心統性情'의 논리로 전개된다. 그러면 그의 心統性情論의 내용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1) 性의 體用的 이해


性의 문제는 선진으로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전유학사에서 중요한 논의 주제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는 송대에 접어들면 획기적 전환점을 맞는다. 그것은 바로 우주 본체론과의 유기적 연계구도 속에서 性의 개념 정립을 모색하는 것이다.

장재 역시 이러한 신유학적 경향으로부터 예외라기보다는 오히려 開祖的て主體的 입장에 서있다. 왜냐하면 그는 性을 우주본체론적 조망하에서 파악하려는 이론적 체계화의 차서에서 선구자에 속함과 동시에 또한 그러한 신유학적 경향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즉 그는 性을 현상의 존재론적 근거이자 인간의 작위적 노력에 의해 규정하거나 변형시킬 수 없는 선험적인 형이상학적 실체로 파악하며, 그 性의 현상적 존재 양식의 형태로서 氣質之性을 말한다. 요컨대 그는 인륜성과 도덕성의 현실적 擔持體로서의 性을 본체와 현상의 유기적 연계 관계, 즉 氣一分殊의 體用論의 관점에서 보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생각은 天地之性과 氣質之性의 '一而二的' 性論으로 제시된다.

먼저 장재에 의하면 天地之性은 '太虛卽氣'의 우주본체가 지니고 있는 본원적 性이다. 즉 그것은 太虛에 근본을 두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太虛 자체가 실제로 지니고 있는 내적 본질이기도 하다. 장재는 그것을 일러 天地之性이라 명명한다. 그런데 도덕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天地之性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으로서 至善性을 함의하며, 또한 그것은 태허본체로서의 천으로부터 품수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성를 갖는다. "인간이 天에서 품부받은 것이 바로 性이다." 나아가 그가 이르는 천지지성을 덕의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세목해서 말하면 仁義禮智를 가리킨다. "仁義禮智는 사람이 따르고 실천해야 할 道로서 소위 性을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장재의 견해는 성론에 있어 그가 유가적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陰陽未分의 氣一의 天地之性은 응결되지 않은 비가시적 太虛에 근본하는 性으로 헤아릴 수 없는 미묘한 작용성을 지닌다. "氣의 性은 본래 텅 빈 듯하고 미묘하니 곧 神과 性은 氣가 본래 지니고 있는 바이다." 性은 太虛에 근본하므로 氣가 性을 속에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은 셈이며, 따라서 性은 氣를 초월할 수 없고 氣를 떠나서는 性이라고 할 수도 없다.


"하늘의 性이라고 하는 것은 道에 완전하게 통하여, 기질의 혼탁함과 청명함으로서 그것을 가릴 수 없다. 하늘의 命이라고 하는 것은 性에 완전하게 통하여, 우연히 겪는 길함과 흉함으로 그것을 소멸시키기에는 부족하다. … 性은 氣를 넘어 통하고, 命은 氣 내에서 운행한다. 氣에는 內外가 없으니 형체 있음에 의거하여 말할 뿐이다."


모든 사물은 氣가 응취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전부 氣一 본체의 性을 품부해 자신만의 개별적 性으로 삼으며, 바로 이것이 天地之性이다. 그것은 비록 개별적 性의 형태로 있지만 본원적으로는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유기적 일체인 우주본체의 본질이며, 총괄적이고 통일적인 性으로 사람이 지닌 본연의 性도 여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天地之性은 온갖 사물의 본래적 근원이며 또한 하늘의 性이므로 실제로는 형체의 氣 밖으로 통달해 있다. 이 性은 氣의 본체이며 언제나 변화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장재에게 있어 氣質之性은 어떠한 특성의 것일까. 太虛는 氣의 본래 상태이며 氣一의 性은 이 본래의 상태가 지니고 있는 性이다. 그런데 氣가 모이면 사물로 되면서 개별의 형체를 지니게 되고, 그 개별적 형체에 따라 특수한 각각의 성질을 지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氣質之性이다. 이를테면 氣一의 상태로 존재하던 天地之性은 구체적 형체를 얻음과 더불어 分殊의 性으로 나뉘어 개별적 만물에 내재화되면서 氣質之性의 상태로 존재하게 된다. 사람과 사물마다 드러남과 드러나지 않음의 차이가 있다. 또한 소통하고 가려지고 열리고 막히고 하는 것의 차이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것은 모두 氣質之性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氣質之性은 天地之性에 비하여 제약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인간은 우주의 유기적 작용의 결과 만물의 하나로 태어나면서 우주통체의 본질을 자신의 본래적 性으로 품부했지만, 반면에 太虛로부터 품부한 보편성[天地之性]을 그대로 발현하지 못하는 장애에 부딪히게 된다. 현상계에 만물로 생성된다는 것은 구체적 형상을 지닌다는 말이며 구체적 형상은 氣質의 제약성을 의미한다. 우주통체의 性이자 氣一의 性인 太虛의 性은 形狀인 氣質이 없이는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다. 그리하여 氣의 性은 氣質 속에 안착하게 되지만, 이 안착은 동시에 국한성이라는 한계를 지니게 된다. 사람은 우주의 보편적 性을 부여 받아 자신의 道德性て至善性의 근거로 삼지만, 이와 동시에 그 보편적 性은 특수한 형체의 제한으로 말미암아 보편성의 제약을 의미하는 氣質의 性을 지니게 되며, 보편성의 제약은 分殊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天地之性과 氣質之性의 전체적 관계는 서로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개별적인 性이 아니다. 氣一과 分殊의 구도에서 본다면 天地之性은 氣一에 해당하는 性이고 氣質之性은 分殊에 해당하는 性이다. 天地之性은 우주전체를 반영하는 性으로 '太虛卽氣'의 본체론적 차원의 性이며, 氣質之性은 응취한 결과 어떤 구체적 사물로 태어난 후 그 개별적 형체로 말미암아 가지게 되는 현상론적 性이다. 天地之性은 총괄적인 하나의 性으로 존재 일반이 공유하는 氣一의 太虛의 性이고, 氣質之性은 사물과 사람이 서로 다르게 지니고 있는 分殊의 性이다. 그러나 양자는 똑같이 太虛에 근본하는 性이므로 性은 氣質을 초월해서 고원한 존재로 있는 것은 아니고 氣를 떠나서는 그 존재 근거를 보여줄 수가 없다. 氣一의 性과 分殊의 性은 현상계에서 현상화할 때는 서로 상이한 性으로 드러나지만 본질면에서 동질의 性이다. 즉 만물로의 응취와 동시에 下貫되어 氣質 내에 자리 잡은 것이 天地之性으로 그것은 氣質之性으로 불릴 따름이다. 氣質之性 중에서 氣質에 의하여 가리워진 부분만 걷어내면 그것이 바로 太虛의 본연성[天地之性]이다. 이처럼 氣一分殊의 구도에서 볼 때 天地之性과 氣質之性은 본체와 현상에 걸쳐 하나의 일관적 연속성 속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장재가 말한 天地之性과 氣質之性의 구별은 정이와 주희가 말하는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의 구별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장재의 구별은 理와 氣의 구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는 氣의 性이 존재 일반에 공통적으로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氣가 모여서 형체를 이룬 뒤에 지니는 性으로 개별 사물마다 서로 다른 것이다. 이에 반해 程朱에게 있어 두 가지 性이 서로 다른 까닭은 理와 氣의 의미가 서로 다른 데서 기인하기 때문에, 그들은 天命의 性은 理이고 氣質의 性은 氣라고 한다. 그러므로 장재와 二程이 비록 똑 같이 性二元論을 주장했으면서도 이원이 되는 원리는 서로 같지 않다.


2) 心과 性의 주체와 대상적 관계


장재는 心과 性의 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보았을까. 이 점에 대하여 그는 "心이 性을 다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사람은 능히 道를 넓힐 수 있다는 말이다. 性이 사람의 心을 살필줄 모른다는 것은 道가 사람을 넓힐 수 없다는 말이다"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 心은 有知覺的이며 有意識的인 주관적 사유 작용을 하는 것으로 생각된데 반하여 性은 無知覺的이며 無意識的인 객관적 존재로 파악되었다. 즉 사람의 心은 의식을 지니고 있어 주관적 사유를 능동적으로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능히 盡性할 수 있는 반면에 性은 虛와 氣의 합작의 산물로 의식이 없기 때문에 知心과 察心할 수 있는 功能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心은 단지 구성의 측면에서만 性과 知覺을 합한 것이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자기의 활동을 통해서 본성의 요구를 실현하거나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心은 능히 性을 다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心은 見聞의 감각적 기능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자연적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능동적 지각 공능을 지니고 있기에 見聞의 제약과 한계를 뛰어넘어 太虛본체의 본질인 天地之性을 직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는 心을 性의 반영과 담지체로 보아 사람이 도덕적 心의 측면과 자연적 心의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또한 자연적 본성과 도덕적 본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心은 지각 공능의 발현을 통해 자연적 心의 사욕화의 경향을 지양하고 인의예지의 도덕적 본성에로의 지향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즉 心은 性을 다하여[盡性] 道를 넓히고자[弘道] 하는 인간의 유의지적 노력의 주체 이며, 性은 道의 본질로서 心의 盡하고 弘하는 공능의 객관적て이념적 대상이라는 것이다.


3) 性과 情의 一元的 관계


性과 情의 관계를 고찰하기에 앞서 장재가 情에 대해서는 어떠한 관점을 지니고 있을까 하는 점을 간략히 살펴보자. 장재의 情의 개념 역시 자기 이전의 견해를 받아 들여 性과의 연계구도 속에서 파악한다. 유학에서 情 자체를 나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情은 음식, 색, 재화 등의 욕망과는 다른 기쁨, 성냄,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워함, 두려움 등의 감정을 말한다. 평가의 문제는 이러한 감정을 얼마나 잘 부리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이러한 情의 내적 성격에 대한 유학적 견해를 가장 포괄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中庸}이다. {中庸}에서 "기뻐하고 성내고 즐거워하는 情이 드러나지 않은 것을 中이라 하고, 드러나서 모두 절도에 알맞은 것을 和라고 한다. 中이란 천하의 근본이며, 和란 천하의 통달한 道이다. 中과 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온갖 사물이 육성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으면 기쁠 것도 없고 성낼 것도 없으며 슬퍼할 것도 없고 즐거워할 것도 없으므로 中이라 칭한다. 하지만 일단 그러한 情이 밖으로 표출되면 절도에 맞아서 조화를 이루고 이치에 어긋남이 없는 和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순자는 "사람의 타고난 감정을 교정하고 바르게 하여, 순화시켜 인도할 것을 주장하여" 감정의 절제를 강조한다. 이러한 {中庸}과 {筍子}의 견해는 드러나지 않는 것을 중시하는 도가와는 달리 표출되지 않는 情의 中보다는 드러나서 절도에 알맞는 和의 유지를 강조하는 유가적 관점을 잘 보여준다.

장재의 情의 성격에 관한 견해 역시 기본적으로 이러한 전통 유학적 노선과 동일 선상에 서 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우주 본체론적 조망에 의거하여 性과의 유기적 연계관계 속에서 情을 보고자 한다. 그는 非可視的 天地之性이 氣質이라는 형체적 매개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것을 情이라 하며 구체적 내용으로 喜怒哀樂을 말한다.


"情은 곧 실제의 일이니 喜怒哀樂을 일컫는다. 기뻐하고자 하면 이와 같이 기뻐하고 화내고자 하면 이와 같이 화를 내야한다. 슬퍼하고자 하거나 즐거워하고자 하는 자가 이와 같이 즐거워하고 슬퍼하면 이것은 性이 맞아들어 실제의 일로 드러난 것이다."


이를 두고 볼 때 그의 情에 관한 생각은 인간 본성을 전제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喜怒哀懼愛惡欲의 七情은 그가 말한 氣質之性의 실제적 내용을 의미한다. 또한 七情 자체는 긍정과 부정의 잣대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평가는 그 七情이 어느 방향으로 표출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사람은 절도에 맞아든 中節의 본연의 상태에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에게 中節의 상태란 {中庸}의 中과 和를 아우르는 우주본연의 속성을 뜻하는 것으로, 그는 이것은 天地之性이라 칭한다. 變化氣質과 大心의 수양론은 天地之性이라는 본연성의 유지와 회복에 힘쓰는 情의 中節化의 노력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면 장재는 性과 情의 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보았을까. 그는 性과 情을 利와 貞의 개념에 대비시켜 설명하고 있다.


"利와 貞은 性과 情을 말하며 利는 性으로 이해할 수 있고 貞은 情으로 이해할 수 있다. 利는 流通을 의미하고 貞은 實을 의미한다."


여기서 流通과 實은 性과 情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流通은 두루 흘러 통하되 분명한 실체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를 말하고, 實은 충분히 흘러 통하여 무언가의 뚜렷한 실체로 드러난 상태이다. 性은 고요함을 내재적 특질로 하면서 현상으로 드러난 구체적인 것의 근원이 되며, 情은 움직임을 내적 특성으로 하면서 분명한 형체를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그는 "利는 性이고 貞은 情이다"라고 말한다. 情은 性이 움직인 것으로 마음 깊은 곳 이면에서 밖으로 발산되어 나온 것이다. 사물과의 접촉으로 밖으로 뿜어져 나온 것이 情이다. 고요하여 아무런 움직임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것이 性이며 감촉되어 마침내 이루다 통하게 되는 것이 情이다. 이렇게 볼 때 性論에서와 같이 장재는 性과 情의 관계에 대해서도 본체와 현상의 體用論的 논리를 적용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體用論的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당시에 만연했던 性善情惡的 경향으로부터 탈피하여 性과 情을 하나의 일관된 연속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정립할 수 있었다.

性과 情을 유기적 관계 구도에 의거해 보려는 이러한 장재의 견해는 이후 신유학사의 주된 흐름으로 정착된다. 대표적으로 주희는 이러한 性과 情의 一元的 파악의 노력에 대하여 "性은 情을 상대로 말한 것이며, 心은 性情을 상대로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性이며 動處는 情이고 主宰는 心이다. 橫渠의 心統性情이란 말은 지극히 훌륭하다"라고 하여 性情의 體用論的 논리에 대하여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4) 心의 性て情에 대한 '統'의 논리


장재는 心의 性て情 과의 관계에 관하여 "心은 性과 情을 통섭한다"는 '心統性情論'으로 답한다. 사실 장재 이전까지는 三者의 관계에 대하여 존재론적으로 입체적 설명을 한 사람이 없었다. 주희는 이 점에 대하여 "그 전에 五峰[胡宏]의 설을 보았는 데 그는 心을 性에 대비시켜 말함으로써 情字는 제 위치가 없었다. 그 후에 橫渠의 '心統性情'의 說을 보았는 데 그것이 큰 공로가 있음을 알았다"라고 하였다. 장재는 이와 같이 心性情의 상호관계를 '統'의 구도를 통해 해결한다. 통섭(統)은 합(合)의 의미를 지니고, 性은 내재적인 도덕적 본성을 뜻하며, 情은 그것의 지각과 발현을 의미하고, 心은 도덕적 본성과 지각활동의 두 측면 모두를 統轄한다.


"心이란 性情을 통할하는 것이다. 形이 있으면 곧 體가 있고, 性이 있으면 곧 情이 있다. 性에서 나오면 情으로 나타나고, 情에서 나오면 色으로 나타나니, 이는 類로서 응하는 것이다."


心統性情論의 '統'의 관점에 볼 때 性과 情을 어떻게 統轄하느냐 하는 점은 人心 영역의 문제이다. 인성의 선악 여부 역시 人心을 어떻게 統御하느냐에 달려 있다. 장재의 '心統性情'의 명제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가 '統'字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러나 장재 자신은 '心이 性과 情을 統한다'는 구절을 말했지만, 이것에 대하여 직접적이고도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고 사상의 전체적 문맥에 맡기고 있다. 그렇다고 그의 이런 태도가 자신의 사상체계에서 統이라는 개념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을 낮게 평가한 데서 연유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후에 주희나 퇴계는 이런한 점에 주목하고 직접적 해석을 가하여 사상체계의 중요한 부분으로 삼는다. 장재의 統에 대한 생각을 전체적 문맥 속에서 파악하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을 것같다. "心이란 性情을 統하니 形이 有하면 體가 有하고, 性이 有하면 情이 有하다. 性에서 發하면 情으로 見하고 情에서 發하면 色으로 見하니, 이것은 類로서 應하는 것이다"는 앞의 구절을 통해서 장재의 統의 의미를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밖에 없다. 이 문구에서 形과 體, 性과 情, 情과 色의 명사 개념은 상호 대비적 직접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직접관계는 有, 發, 現의 동사에 의해서 이루진다. 心 안에서 心의 작용과 활동에 따라 形과 體, 性과 情, 情과 色이 각각의 대비 관계에 의거 서로 연관을 맺는데, 이 기능과 활동을 전체적으로 관리하고 통할하는 心의 종합적 기능을 '統'字라고 본 것이다. 心의 통합적 기능은 '類로서 應한다'라는 마지막 구절에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이러한 '類로서 應한다'는 心의 統轄 功能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中節의 和의 상태이다.


"맹자가 말한 性과 情은 모두 하나이다. … 情이 반드시 惡한 것은 아니다. 哀樂喜怒가 發하여 모두 節度에 잘 맞아든 상태를 和라 하며 節度에 잘 안맞아 든 상태를 惡이라 한다."


즉 心은 性이 情으로 진전됨에 있어 조화를 이끌어 내는 統轄의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性이 情으로 발현됨에 있어 기뻐해야 할 때 기뻐하며,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하고, 화를 내야 할 때 화를 내면서도 정도에 지나치지 않는 상태를 지향할 수 있도록 조정하는 것이다.

心統性情說의 '統'에 주목하고 그것에 대하여 체계적인 직접적 해석을 가한 이는 역시 주희이다. 주희의 사상체계와 장재의 사상체계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주희의 생각을 장재의 해석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형식과 내용의 관점에서 볼 때 형식의 차원에서 統字의 字意的 의미만을 가져와 장재의 統字를 해석하는 데 참고로 하는 것은 그의 본지를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주희는 '統'字를 네 가지 정도로 해석하고 있다. ① '兼'으로 해석하고 있다. "심통성정에 있어 統은 兼과 같다." ② '包'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心은 性情을 兼하여 말한 것이다. 性情을 兼하여 말한다는 것은 곧 성정을 포괄한다는 것이다." ③ '具'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性은 별다른 일물이 心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心이 이 性情을 갖추고 있을 따름이다." ④ '主宰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심통성정에서 '統'은 무슨 뜻입니까 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통은 主宰이니 마치 백만대군을 통솔하는 것과 같다. 心은 혼연한 것이며 性은 이 理를 가지고 있으며 情은 발동하는 곳이다." 주희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대체적 의미는 心이 性て情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면서 통할한다, 또는 총괄하여 다스린다는 뜻이 된다. 즉 그는 장재와 마찬가지로 統의 구도에 의거해 心て性て情을 유기적 일체 관계로 파악하고자 한다.

퇴계는 {聖學十圖}에서 장재의 '心統性情'論에 대한 주희의 이러한 의도와 논지를 잘 설명하고 있으며, 이러한 퇴계의 견해를 살펴 보는 것 또한 장재의 統字 의미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마음이 性과 情을 거느린다고 하는 말은 올바른 것이다. 마음이 性을 거느리기 때문에 仁義禮智가 性이 되며, 또한 仁과 義의 마음이 있는 것이다. 마음이 情을 거느리기 때문에 惻隱, 羞惡, 辭讓, 是非가 情이 되며, 또한 惻隱, 羞惡, 辭讓, 是非의 마음이 있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性을 통제하지 못면 未發之中에 이를 수 없어서 性이 뚫어지기 쉽고, 만약 마음이 情을 통제하지 못하면 中節의 조화에 이를 수 없어서 情이 방탕해지기 쉽다. "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퇴계에 있어서도 心統性情의 논리가 중요하다. 그는 {孟子}의 四端과 {中庸}의 七情의 내용을 성리학적 심성론과 연계하여 心統性情의 논리를 더욱 구체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퇴계의 이러한 논리를 수용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없으나 心て性て情의 구체적 관계에 관한 내용까지 받아 들이는 것은 부적합하다. 왜냐하면 장재의 太虛卽氣論과 퇴계의 性卽理論의 사상 내용이 서로 많은 차이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장재의 경우에 있어서 心이 情을 직접 통할하는 것은 가능하나 性에 대한 有意志的인 관리는 불가능하다. 心과 性은 단지 상호 밀접한 간접적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 이유는 心은 형이상학적 실재인 性을 직접 통할할 수는 없으며, 단지 情을 통할함으로써 性이 자연히 발현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장재의 心統性情論에서 '統'은 이러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統轄한다'말은 다음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統'은 ①心이 性을 統轄하는 경우와 ②心이 情을 統轄할 경우의 두 가지 의미로 나눌 수 있으며, 그리고 양자의 統轄 양상은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먼저, 心이 性을 統轄할 경우이다. 心의 기능은 자체의 능동적 功能을 발휘하여 본질상 純粹 至善의 형이상학적 실재인 性을 드러내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장재는 맹자의 전통을 받아들여 性이 心에 선천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파악했으며, 후천적으로 습득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의 心안에서 潛在て潛存의 의미로 상존한다. 潛在て潛存이란 말은 存在て實存에 대비시켜 하는 말이다. 실존이란 顯現된 有를 가리키고 潛存이란 아직 顯現이 안된 有를 가리킨다. 天地之性은 氣質之性을 안착처로 삼아 실질적 자리는 잡았지만,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氣質의 장애 때문에 현실적으로 자체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하고 잠재태의 상태로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 한계를 지니게 된다. 心 역시 氣質의 장애로 雜念과 邪意에 가리어 지각의 靈明性을 발하지 못하고 막혀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우선 수양을 통해 心的 지각의 靈明함을 회복해야하고, 이어서 心은 자체의 인지적 공능의 능동적 발휘를 통해 性이 발현될 수 있도록 하는 이중적 노력을 해야 한다. 心이 性을 직접적 방식으로 통할하는 것이 아니라, 心의 기능의 발휘를 막고 있는 氣質의 邪意를 걷어내어 心 자체가 虛明한 상태에 놓이게 되면 性體는 자체의 본래적 빛을 발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心의 영명한 지각력은 본래적 性인 天地之性을 직관하여 이것을 선악과 시비 판단의 근원적 원리로 삼게 된다.

다음으로 心이 情을 통할하는 경우로서 心의 기능은 情을 직접 통할하는 데 맞추어 진다. 본체의 至善的 본질인 性이 현상 쪽으로 한 단계 진전되어 나온 상태가 情이며 여기서 더 나아간 상태가 色이다. 본체적 性은 현상 쪽으로 한단계 다가옴으로써 현실적 안착 기반을 잡음과 동시에 至善性을 그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불순성을 필연적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지선성과 불순성이 불안한 동거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情이다. 情은 내재적 특성상 반드시 이치에 부합되고 절도에 맞아드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心은 항상 動을 기본적 속성으로 하는 情의 움직임을 살펴 色의 상태로 진전되지 않도록 적극적 견제와 통할에 힘써야만 한다. 心은 情의 구체적 내용물인 희노애구애오욕이 절도에 맞는지, 過不及의 상태는 아닌지, 이치에 부합하는지 등을 살피는 적극적이고도 직접적인 기능을 다해야 한다.

지금까지 살펴 보았던 것처럼, 장재의 心統性情論에서 心의 性에 대한 統轄과 心의 情에 대한 統轄은 내용적으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心의 性에 대한 統轄은 간접적 성격을 갖는 데 반해 心의 情에 대한 統轄은 직접적 성격을 지닌다. 心의 性에 대한 주재て통할 면에서는 맹자적 요소가 순자적 요소보다 위를 점하는 것 같고, 心의 情에 대한 주재와 통할 면에서는 순자적 요소가 맹자적 요소보다 더 강조되고 있는 것 같다. 전자는 수양을 통해 心의 靈明함을 드러냄으로써 心에 내재된 天地之性을 아무런 장애 없이 발하게 하는데 그 목적이 두어지는 우회적 성격을 지니지만, 후자는 心의 情에 대한 직접적인 統轄에 의해 情의 상대적 惡性에로의 진전 가능성을 사전에 막고 절대적 善性에로 유도하는 데 그 지향점이 두어진다. 心의 性에 대한 통할은 認知的 성격은 지니지만 心이 情을 통할할 경우와 같이 적극적인 察識의 기능을 하지는 않는다. 양자의 이러한 차이는 性과 情의 고유한 특성에서 비롯한다. 장재에게 있어 天地之性은 인간의 의지가 개입될 수 없는 외재적 절대성을 의미하는 반면에 情은 선천적 보편성과 후천적 상대성 그리고 至善的 단초와 불순한 惡性을 동시에 함유한 양립적 성격의 것이다. 따라서 心은 절대적 성격의 性에 대해서는 작위적 행사를 가할 수 없으며, 단지 性의 본래적 모습이 그대로 발할 수 있도록 제반의 장애를 없애주는 역할을 하는 정도에 그친다. 반면 상대성과 절대성 그리고 선천성과 후천성이 병존하는 情에 대해서는 心의 인지적 의지를 개입시켜 절대적 善端으로서의 天地之性이 상대적 過不及의 惡性에 의해 가리지 않도록 직접적인 작위적 행사를 가한다고 보는 것이 장재의 기본 논지이다.



4. 결 어


이제까지 장재의 '心統性情'論을 心과 性 및 情의 구체적 의미와 三者 간의 관계 그리고 心의 性て情에 대한 統의 논리로 나누어 고찰해 보았다. 이러한 장재의 견해는 대략 다음의 네 가지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①性과 知覺을 합쳐 心의 이름이 있다[合性與知覺, 有心之名], 有와 無를 하나로 하고 內와 外를 합하는 것이 心의 유래한 바이다[有無一, 內外合, 此人心之所自來], ②사람이 天에서 품부받은 것이 性이다. 인의예지는 사람이 따라야할 道로서 소위 性을 말하는 것이다[人受於天則爲性. 仁義禮智, 人之道也, 亦可謂性], ③情은 실제의 일이니 곧 喜怒哀樂을 일컫는다[情則是實事, 喜怒哀樂之謂也], ④心은 性과 情을 統攝한다[心統性情]. 이 네 구절에서 장재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善한 존재일 수밖에 없으나 후천적으로 惡行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선천적 善性을 그대로 발현시키기 위한 방책을 강구하거나 또는 惡과 不中節으로의 진전 징후를 사전에 감지하여 善과 中節의 방향으로 되돌리기 위한 대책을 세우는 데 있어서 性て情의 문제에 대한 검토가 요구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性과 情을 통할하는 것이 心이기 때문에 心統性情의 논리가 요청되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그의 心論이 순자의 認知的 心으로 맹자의 仁의 道德心을 궁구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心은 德性之知의 인식적 공능으로 窮理て盡性하여 仁의 도덕지식을 추구하는 데에로 지향되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도덕적 실천에로 이어지고, 이 모든 활동은 心이 지닌 主宰的 功能에 의해 統轄된다. 그는 心이 天地之性의 순수 至善的 측면 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갈고 닦아야 할 氣質의 情요소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그가 心て性て情의 탐구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맹자의 성선설을 받아들였기에 순자의 성악설과는 다른 견해를 갖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맹자 성선설의 불충분함을 자각하여 性을 논할 때 氣質과 情의 문제를 함께 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부지불식간에 순자적인 발상법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장재는 心의 統의 논리에 의거 氣質과 情을 性과 결합시켜 병론함으로써 맹순 이래의 性善て性惡의 상반적 논리와 동중서 이래의 性善情惡의 이분법적 사고를 동시에 해결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점에서 侯外廬는 理學의 수많은 명제들이 장재의 학설에 이미 갖춰져 있었으며, 맨 먼저 그 단서를 마련한 바 적지 않기에 이학의 기초를 세운 인물로 평가한다. 또한 박경환도 장재를 송명이학의 1차 集成者로 평가한다. 필자도 候外廬와 박경환의 견해에 동의를 한다. 물론 장재의 견해들이 완전한 독창물은 아닐 것이다. 그의 견해를 뒷받침 해주는 많은 방계의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集成者란 말이 의미하듯 당시 제시되었던 다양한 견해들을 종합적으로 체계화하는 집성자로서의 역할을 장재만큼 잘 수행한 인물을 찾아 보기 힘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