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납의 문제와 해석 -믿음과 자연의 동적 평형의 가능성을 찾아서
하 상 용 서울대 철학
序 귀납의 의미: 부정적 귀납법
이 글에서 귀납법을 경험에서 출발하여 경험 위주로 문제에 접근하는 문제접근 방식들에 두루 적용하고자 한다. 귀납법은 문제 해결의 두 실마리인 창조적 상상력의 상관항으로서, 경험 근본주의적 접근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글에서 경험 근본주의적 문제 접근법으로서의 귀납법은 부정적 사례와 친화적이라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특히 흄이 밝힌 귀납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중점적으로 매달릴 작정이다.
흔히 베이컨의 귀납법에서 전제 없는 관찰에서 과학적 탐구가 시작한다는 측면만 강조된다. 문자 그대로의 전제 없는 관찰이 불가능함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베이컨의 귀납적 방법론에서는 자료 수집에서의 "부정적 사례"들에 대한 사심 없는 관찰과 기록이 더 강조되었다. 부정적 사례들은 제한된 자료로부터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방지하고, 신중한 일반화를 유도한다고 볼 수 있다. 베이컨이 본래 의도한 귀납적 방법은 바로 "부정적 귀납법"이다.
起 흄의 문제: <귀납적 주장>과 <반귀납적 주장>
흄은 <귀납의 문제>를 정당화의 관점에서 보았다. 귀납적 추론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미래가 과거와 비슷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귀납 추론의 전제는 언제나 과거에 수집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흄의 물음은 "미래가 과거와 비슷하리라는 믿음은 정당화되는가?"이었다. 이 물음은 3중으로 복합적인 물음이다. (1) 미래가 과거와 비슷한가? (2) 그러한 믿음, 귀납적 믿음은 존재하는가? (3) 그러한 믿음, 귀납적 믿음은 정당화되는가? 흄은 (1)의 긍정이 이성적으로 근거 없음을 보였다. 그리고 (2)는 심리적 사실로서 긍정하였고, (3)에 대해 발생적으로, 나아가 자연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대답했다.
흄은 정당화되지 아니하는 귀납적 믿음의 발생에 대해서 추적하였다. 흄은 내성심리학적으로 마음을 관찰해서, 귀납적 믿음은 "유사함의 반복에 의해 발생한 습관"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포퍼는 유사함의 관찰은 해석 체계를 심리학적으로 전제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습관의 자연 발생 이론을 반박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습관적으로 자연의 규칙성을 보는 성향이 존재한다는 심리적 사실이 부인된 것은 아니다.
흄은 이성주의적 분석과 자연주의적 관찰에 근거하여, 겉보기에 상반된 결론을 내 놓은 듯 하다. <충분 근거율>에 의해 우리의 지식의 대부분은 이성적 근거가 없다는 회의주의적 결론에 도달했다. 나아가 인간 지식의 근본적인 한계로 인해 외부 세계의 대상들에 원천적으로 접근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반실재론으로 경도되었다. 귀납적 믿음은 이성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주장에서 다음의 두 가지 버젼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믿음은 자연에 접근할 수 없다. <강한 반귀납적 주장>
자연의 규칙성에 대한 믿음은 이성적 근거 없다. <약한 반귀납적 주장>
한편 흄은 자신의 곤경을 헤쳐 나가기 위해, 외부 세계에 대한 믿음의 근거를, 이성이 아닌 발생적 차원에서, 나아가 자연적 차원에서 탐색코자 하였다. 만약 이러한 자연주의적 시도가 나름대로 성과가 있고, 그리하여 "자연의 규칙적 운행"이 적어도 일관되게 알려질 수 있고, 또 알려진다면, 통상의 귀납적 예측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습관적 믿음은 자연적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주장에서 다음의 두 버젼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믿음은 자연에 접근할 수 있다. <강한 귀납적 주장>
믿음이 자연에 투사하고 있는 규칙성은 일관적일 수 있다. <약한 귀납적 주장>
承 귀납의 정당화 문제:
포퍼의 문제 재정립과 도전적 투사 전략
포퍼는 귀납의 문제를 <논리적 문제>, <심리학적 문제>, 그리고 <실용적 문제>로 나누고 나서, 다시 <논리적 문제>를 설명 이론의 <입증 문제>, <반증 문제>, <선호의 문제>로 나누었다. <입증 문제>에서 보편 가설은 개별적 증거에 의해 결코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흄의 대답을 그대로 수용한다. 그런데 확증과 반증에는 논리적 비대칭성이 있다. 그리하여 <반증 문제>에서는 보편 가설이 단 하나의 반례에 의해 결정적으로 반증된다. 포퍼는 이러한 잘 알려진 사실을 바탕으로 <반증가능성 논제>를 확립하였다.
포퍼는 <입증 문제>의 부정적 대답과 <반증 문제>의 긍정적 대답에 따라, "귀납은 없다"라고 선언한다. "귀납은 없다"라는 주장은 귀납적 탐구 절차도 없고, 귀납적 정당화도 없다는 복합적 주장이다. 포퍼는 귀납법을 가설주의로 대체했다. 귀납적 탐구라는 신화를 가설적 탐구로, 가설의 정당화 시도를 반증 시도로 대체할 것을 주장했다. 나아가 과학적 탐구에서 대담하고 반증가능성이 높은 가설을 투사하라고 권유하였다.
귀납 추론이 연역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오히려 귀납이 연역적으로 정당화되지 않으므로 귀납은 없다라는 포퍼의 추론이연역적으로 틀렸다. 귀납이 연역적으로 정당화되지 않음에서, 연역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 귀납 추론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고 추론해야 연역적으로 옳다. 포퍼는 내심 "귀납은 없다"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포퍼의 가설주의적 해결책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고, <귀납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하나의 해소책일 따름이다.
포퍼의 <도전적 투사 전략>은 어떤 보편 지식도 경험적 근거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약한 반귀납적 주장>에서 출발하였다. <약한 반귀납적 주장>은 지식의 오류가능성을 함축한다. 포퍼는, 비록 우리의 믿음이 정당화되진 않지만, 오류가능하므로 역으로 개선가능하다고 설파하였다. 포퍼는 이러한 개선가능성에 착안하여, 경험적 테스트와 비판적 토론을 통해 인간의 지식이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경험적 테스트에서 살아남지 못한 가설은 <반증가능성 논제>에 의해 반증되어야 한다. 선임 이론이 실패한 지점에서 후임 이론은 대담한 가설을 수립하여 인간 지식의 성장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의 성장에 대한 관심을 촉구함이 포퍼의 진정한 의도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지식의 성장은 바로 확장적 추론으로서의 귀납의 목표이기도 하다. 따라서 포퍼의 귀납적 방법론은 〈시행과 오류 제거의 이론〉및 대담한 가설을 수립하는 상상력에 주도적 역할을 부여한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지식의 성장>을 위한 포퍼의 길은 다음과 같다.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부정적 테스트를 통과한 상상적 가설은
올바른 확장적 추론이다. <포퍼의 길>
轉 귀납의 새로운 수수께끼:
굿맨의 문제 재정향과 보수적 투사 전략
굿맨은 미래 사례의 진리값이 미결정이므로, 귀납적 예측의 문제를 정당화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 없다고 보았다. 굿맨은 흄의 습관 이론을 본받아, 타당한 투사를 습관적 투사에서 찾고자 하였다. 타당하다는 말은 얼핏 형식적 속성에만 의존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굿맨은 이러한 생각이 오해임을 귀납의 새로운 수수께끼를 통해서 보여 주었다.
주지하다시피, 굿맨의 상상적 예에는 녹청색(grue) 에메랄드가 등장한다. 이 글에서는 굿맨의 이야기에서 "에메랄드"가 나타난 자리에 오직 그 곳에 "바퀴벌레"가 나타나도록 이야기를 꾸며 보겠다. 여지껏 보아온 많은 바퀴벌레들이 모두 검은색이라면, 검지 않은 바퀴벌레들이 있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언어적 상호주관성이 없는 사오정이 '금다'라는 술어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투사하고 있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어떤 것이 금다면, 그리고 그 경우에만,
그것은 2020년 이전에 검다고 관찰되고, 2020년 이후에는 금색이라고 관찰된다.
2020년 이후에 금다고 관측된 바퀴벌레들은 지금 우리가 검다고 부르는 바퀴벌레들일 것이다. 2020년 이전에 금은 바퀴벌레들은, 실제로 보기에 검을 것이다. 사오정은 2020년 이전에 검은 바퀴벌레를 보고, 자신이 확보한 관찰 사례에서 금은 바퀴벌레들만 관찰할 것이다.
모든 바퀴벌레는 검다 <일반적 귀납적 가설>
모든 바퀴벌레는 금다 <이상한 귀납적 가설>
이러한 '잘못된' 술어를 머리 속에 가지고 있는 사오정은 '모든 바퀴벌레들이 금다'라는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살게 될 것이다. 혹시 사오정은 모든 바퀴벌레를 잡아, 바퀴벌레 등의 금박을 떼 내어 팔아 먹을 생각으로, 2020년에 결실을 맺을 야심찬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주어진 증거에 의해서는 결코 사오정을 설득할 수 없다. 행여 사오정이 진짜 바퀴벌레 금박으로 큰돈을 벌어, 당대의 연금술사로 이름을 떨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일반적 귀납적 가설>이 <이상한 귀납적 가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2020년 이후에 진리가 백일하에 드러나, <일반적 귀납적 가설>은 여전히 증거들에 의해 잘 지지될 것이고, <이상한 귀납적 가설>은 반증되리라고 내심 기대할 수는 있다.
위의 "금다" 술어와 굿맨의 "녹청색" 술어가 시간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술어가 아니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시간적" 술어들을 일상적 언어 생활에서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제 제기는 굿맨의 진정한 의도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굿맨의 요점은 동일한 증거를 놓고,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귀납적 일반화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더욱 의미심장한 점은 낯익은 술어와 기생적으로 정의된 임의의 술어는 상호 정의를 통해 시간적 개념의 올가미를 서로 떠 넘길 수 있다는 점이다. 굿맨의 <새로운 수수께끼>가 보여주는 <새로운 난점>은 어떠한 술어에 대해서도 굿맨식의 기생적 술어를 정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낯익은 술어와 기생적 술어를 정확히 가려낼 수 있는 객관적 기준과 근거는 없다면, 우리의 현실적인 술어들이 기생적 술어보다 우월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는 없다. 물론 현실적으로 다수결의 원칙이나 힘으로 해결할 수도 있겠지만, 진리의 문제는 정치적으로 해결되게 할 수는 없다.
굿맨은 문제를 바라보는 지평을 넓히자고 제안한다. 굿맨은 현재의 난처함이 투사의 타당성을 증거 대 가설의 관계에만 국한해서 평가하려고 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귀납의 문제에 대한 기반지식과 역사로의 재정향(Reorientation)을 촉구하였다. 그리하여 타당한 귀납적 투사는 역사적으로 잘 고착된 술어를 채용하고, 다른 잘 고착된 투사들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역사적 고착성에서 투사의 타당성을 찾으려는 보수적 전략은 진리의 관점에서 날카롭게 관찰한다면, 결국은 하나의 정치적 선택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철학이 반성의 학문이라면, 아무리 잘 고착되어온 투사가능한 가설일지라도, 결코 비판과 반성의 대상에서 면제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굿맨의 보수적 전략에는 잘 고착되어온 술어에 대한 신뢰만 있지, 아쉽게도 그것들에 대한 비판과 개선가능성에 대한 고찰이 없는 것 같다.
굿맨은 귀납의 새로운 수수께끼를 통해서 귀납 추리의 형식적, 구문론적 접근법의 한계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또한 귀납적 투사의 의미론적 타당성을 언어적 해석 체계의 역사성에서 해명하였다. 그리하여 귀납적 투사는 관찰된 사례들의 회귀적 특성에 입각해야 함을 명백하게 보여 주었다. 귀납적 투사는 관찰된 규칙성을 미래에 투사할 때, 투사가능한 규칙성만을 투사해야한다. 귀납적 투사는 일반적인 자연의 한결같은 규칙성을 상정할 필요가 없다. 또한 미래가 과거와 유사해야한다는 일반적인 요구도 하지 않는다. 굿맨이 발굴한 이러한 성과는 자연의 규칙성에 대한 언어와 해석 체계의 능동적 역할을 드러내었으며, 귀납적 추론의 가능성 뿐만 아니라 개별적 투사들의 오류가능성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여 주었다. <지식의 경영>을 위한 굿맨의 길은 다음과 같다.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부정적 테스트를 통과한 귀납적 가설은
올바른 확장적 추론이다. <굿맨의 길>
結 온고지신(溫故知新; Reprojection):
믿음과 자연의 동적 평형의 가능성을 찾아
§1 평형 개념 도입
<흄의 문제>가 보여주는 바, 자연이 우리가 지각하고 있지 못한 사이에, 그 모습을 바꿀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으며, 자연의 규칙적 운행에 대한 믿음에는 어떤 이성적 근거도 없다는 점 또한 냉혹한 현실이다. 따라서 자연의 투사가능한 개별적 규칙성들을 투사하고자 한 굿맨의 보수적 투사 전략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귀납적 추론들이 <흄의 발견>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굿맨의 <새로운 수수께끼>가 보여주듯이, 현재까지 우리가 잘해 왔다는 우리의 믿음이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재까지 우리가 잘해 왔으므로 앞으로도 잘 될 것이라는 기대는 아무런 근거도 없으며, 매우 위험한 발상이기도 하다.
<귀납의 문제>가 특히 미래 사례의 예측의 문제와 관련될 때, 사실은 시간의 차원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다. 그러므로 <귀납의 문제>에 대해서 시간의 흐름을 고려한 동적 차원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포퍼의 <전이의 원리>와 <반증가능성 논제>를 시간의 화살이 지배하는 현실에 적용할 경우 실천적 한계를 가지게 된다. 굿맨의 시간의 흐름 안에 있는 기반지식과 역사적 고착성으로의 재정향 전략 또한 시간의 흐름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부정적 귀납의 정신에 입각해서, 자연이 믿음을 반증했을 때, 즉 자연에 의해 믿음의 체계가 깨졌을 때, 어떻게 믿음과 자연의 평형을 회복하는가라는 물음의 중요성이 나타난다. 물론 이 물음 이전에 평형의 개념에 대한 정확한 선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한 체계의 평형(equilibrium)이란 무엇인가? <평형의 개념 문제>
이 문제에 대해 글쓴이는 굿맨의 상대주의적 해석을 곧이 곧대로 원용하고자 한다. 평형의 개념에 대한 해석은 순전히 <이해관심 상대적>이다. 그 체계의 규칙성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체계의 평형이 결정된다. 예를 들어 한 체계의 총체적 붕괴의 직전 상태를 평형으로 볼 수도 있고, 문자 그대로의 완전한 카오스를 평형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체계는 <부분들, 부분들의 특성들, 그리고 관계들>로 이루어 진다고 볼 수 있다. 한 체계는 삼자의 조직화 방식에 따라 특정 구조를 가질 것이다. 한 체계는 체계 밖의 환경과 구분되는 자신의 독특한 개성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특정 시점에서 특정 상태에 가까울 때, 그 상태를 <평형에 가까운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평형에 가까운 상태를 극단화하면, <완전 평형>의 상태를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평형에서 먼 상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평형에 가까운 상태가 어느 정도 존속된다면, 체계는 <항상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통시적 항상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는 상태를 <동적 평형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통시적 관점에서 비교적 평형에 가까운 상태가 유지될 때, <정적 평형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평형이 아닌 상태를 <비평형 상태>라고 말할 수 있고, 평형 상태와 마찬가지로 <동적 비평형 상태>와 <정적 비평형 상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한 체계 대 다른 체계의 평형함에 대해 생각해 보자. 두 체계의 평형을 부분전체론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상위 체계를 고려하지 않는 경우, 즉, 전체 대 전체의 평형을 고려해 보자. 체계 S와 체계 A는 동일한 체계가 아니다. 따라서 평형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제3의 관점이 요구된다. 그런데 제3의 관점은 또 하나의 체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제3의 체계를 고려하지 않는, 체계 전체 대 다른 체계 전체의 평형은 무의미하다. 다음으로 더 큰 체계들의 부분들 사이의 관계, 즉 하위 체계 대 하위 체계의 대응을 고려해 보자. 여기서 대응의 성격을 무엇으로 규정하는가는 순전히 상대적인 관점의 문제이다. 굿맨의 시사에 따라, 규칙성의 파악은 체계 상대적이고 전적으로 임의적이다. 체계 A에서 다른 체계 B에 대한 규칙성의 투사는, 체계 A에서 체계 B로 투사하는 규칙성과 보는 방식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체계들의 부분들 간의 대응은 전적으로 체계 상대적이고, 궁극적으로는 특정 체계가 무엇을 무엇으로 투사하고 있는가 하는 구체적 규칙성과 그러한 규칙성을 투사하는 체계 내의 관심과 기호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체계 대 체계의 평형의 개념에 대한 해석 또한 전적으로 <이해관심 상대적>이다.
해석과 버젼에 따른 다원적 세계를 허용하는 굿맨의 극단적 상대주의의 길을 걷지 않기 위해 모종의 방법론적 조치를 강구해 보자. 체계 대 체계의 대응을 투사할 때 이미 양 체계를 부분으로 거느리는 상위 체계가 상정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여럿 위에 하나>는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부분에서 전체를 다 볼 수는 없다. 다시말해 부분에서 전체로는 접근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부분에서 자신을 포함하는 전체를 방법론적으로 가정할 수는 있다. 만약 부분들에서 객관적 전체로서의 세계를 공유가능한 방식으로 이해가능하다면, 이를 바탕으로 양 체계는 대화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대화의 객관성을 검토할 감독관으로서의 세번째 사람은 필요한가? <세번째 사람 논변>의 문제에 대한 글쓴이 나름대로의 답변 구상은 다시 굿맨의 시사에 따라 상대주의적이다. 현실적으로 감독관 또한 자신의 관점과 해석 체계를 테스트 현장에 도입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체계 대 체계의 대화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일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체계 대 체계의 평형에 대한 규정 또한 이해관심 상대적일 수 밖에 없다. 다만 방법론적으로 감독관으로서의 세번째 사람이 마치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자신을 되돌아 볼 수는 있고, 반성의 결과를 대화에 다시 반영할 수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2 흄의 <반귀납적 주장>의 현실성
흄의 <반귀납적 주장>을 재투사해 보자. <강한 반귀납적 주장>에 의하면, 믿음은 자연에 접근할 수 없으므로, 자연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알 수 없다. 흄이 지적한 바와 같이 자연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끊임없이 변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도, 인간은 핵폭탄을 떠뜨리고, 댐을 건설하고, 우주선을 발사하여 지구의 질량·에너지 보존을 깨뜨리기도 하고, 수많은 전자기파를 우주에 쏘아대는 등 자신의 생존 환경을 변화시키고 있음이 경험적인 보고에 의해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인간의 자연에 영향력 행사하기에 호응이라도 하듯 자연 또한 엘리뇨 현상 등과 같이 대기의 대순환 패턴을 스스로 바꾸는 등의 자기 변신을 최근에 자주 보여주고 있다. 자연은 인간이 파악하고 있는 가장 미시적 세계인 아원자의 차원에서도, 가장 거시적 세계인 우주진화론적 차원에서도, 비교적 가깝고 친근한 그 중간쯤의 세계인 생태론적 차원에서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과 환경의 역동적인 변화는 인간 지식이 불확실할 수 밖에 없음을 함축한다. 우리는 흄의 <강한 반귀납적 주장>을 거부할 어떤 논리적 근거도 현실적 근거로 가지고 있지 않다.
흄의 <약한 반귀납적 주장>에 의하면, 자연의 규칙적 운행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는 어떤 이성적 근거도 없다. 굿맨의 새로운 수수께끼가 보여준 바는, 우리의 현재 지식이 자연을 제대로 투사하고 있다는 보장은 없다는 점이었다. 인간의 투사의 실제 역사를 볼 때, 인간의 투사와 해석 체계는, 미시적 수준인 개별적 술어들의 차원에서도, 거시적 수준인 체계 전체의 차원에서도, 중핵적 수준인 핵심적 가설들의 차원에서도, 그리고 현실적 수준인 경험적 명제들의 차원에서도, 끊임없이 변동하여 왔다. 심지어 지동설의 예에서 보이듯이, 인간은 수천년 동안 일관되게 잘못된 투사를 해 오기도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해석 체계의 오류가능성과 역동적 변화가능성을 동시에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귀납의 문제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된다고 판단된다.
§3 귀납의 동적 문제와 귀납의 현실적 문제(IMF 문제)
<귀납의 문제>에 관한 우리의 처지를 다시 정리해 보자. 우리의 믿음이 지금까지 잘 해 왔고, 믿음의 체계 또한 상당히 안정적이라고 하자.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도 잘해 나갈 것이라는 어떤 보장도 없다는 것이 <흄의 발견>이다. 자연의 규칙성이 존재한다는 보장도, 그러한 규칙성에 대한 믿음도 어떠한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연에 규칙성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자연의 규칙성을 제대로 투사하고 있다는 어떠한 보장도 없다는 것이 굿맨의 <새로운 난제>의 요점이다. 설령 우리가 과거의 역사에 근거한다고 해도, 개별적 규칙성에 대해 투사가능한 투사를 투사한다고 확신해도, 우리의 믿음은 기껏해야 과거의 회귀적 특성에 회귀하고 있으며, 과거의 회귀적 특성들은 미래의 안전을 결코 보장하지는 않는다. 이제 미래를 현재의 바로 다음 순간의 가까운 미래로 여길 때, 흄이 제기한 <귀납의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흄의 진정한 문제 제기는 "지금(시점 t)까지 우리가 잘 해 왔다고 해서, 바로 지금(시점 t+Δt) 우리는 잘하고 있는가?"라는 의구심에 있다. 우리는 현재의 현실적인 문제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흄의 발견>과 굿맨의 <새로운 난제>는 이렇다: 자연의 규칙성에 대한 어떤 보장도 없다. 그리고 우리의 해석 체계가 자연을 제대로 투사하고 있다는 어떤 보장도 없다. 현재의 문제 상황을 믿음과 자연의 평형의 관점에서 읽으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투사 체계와 인간이 투사하고 있는 자연의 체계가 평형을 이루고 있다는 어떤 보장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귀납의 문제와 직면한다.
"투사 체계와 자연과의 평형은 가능한가?" <평형의 원리적 문제>
"투사 체계와 자연과의 평형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평형의 방법론적 문제>
흄의 <반귀납적 주장>을 고려해 볼 때, 현재의 투사 체계와 자연적 체계의 완전 평형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믿음과 자연의 양 체계의 완전 평형이라는 개념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다. 만약 두 체계가 부분전체론적으로 완전히 평형을 이루었다고 치자. 그러면 믿음의 체계에는 새로운 구성 요소, 즉 두 체계가 평형을 이루었다는 투사가 도입된다. 따라서 양 체계의 평형은 깨진다. 투사 체계와 자연적 체계의 완전 평형은 두 체계를 완전히 초월한 신적 예지가 아니라면,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우리는 두 체계의 완전 평형, 이른바 진리에의 도달가능성을 이상적으로 요청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는 위의 문제에서 "평형"이란 말을 "평형에 가까운 상태"라는 말로 바꿈으로써, 다음과 같은 물음을 얻을 수 있다.
"투사 체계와 자연과의 '평형에 가까운 상태'는 가능한가?"
<희망의 물음>
"투사 체계와 자연과의 '평형에 가까운 상태'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진리접근의 방법론적 문제>
그런데 우리는 현재의 투사 체계와 자연적 체계의 평형을 판단할 어떤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지 않다. 말하자면, 우리가 투사하고 있는 현재 상태가 <평형에 가까운 상태>인지 아닌지 여부를 판단할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위의 <진리접근의 방법론적 문제>에 대한 긍정적 답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포퍼의 <진리접근 논제>에 따라, 선임 이론보다 후임 이론이 더 잘 해 낸다면, "회고적"으로 점점 <평형에 가까운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고 희망할 수 있다. 그러한 희망의 근거를 위의 <희망의 물음>에 대한 긍정적 답변에서 단초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희망의 물음>은 칸트의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선험적'이란 말은 '경험 이전'이란 말과 뜻이 같고, '종합 판단'은 '확장적 추론'이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 다시, '경험 이전'은 '경험하지 않고'의 뜻을 가지며, '확장적 추론'은 '기존의 지식에서 더 나아간 지식에 도달하는 추론'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칸트의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은 "어떻게 경험하지 않고 기존 지식 너머의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가?"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물음은 "어떻게 기존 지식에서 기존 지식을 초월한 지식으로 나아감이 가능한가?"로 재기술될 수 있다. 이 물음은 다름아닌 위의 <희망의 물음>이다. 만약 <칸트의 물음>이 올바르게 답변될 수 있다면, 우리는 <희망의 물음>에도 낙관적인 대답을 희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칸트의 물음>이 핵심적인 문제임이 드러났다. <칸트의 물음>이 핵심적인 까닭은, 이 물음이 다름 아닌, 지식 탐구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인 "우리는 무엇을 어느 정도까지 희망해도 좋은가?"에 관한 근본적인 대답을 탐색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글에서는 <칸트의 물음>을 다룰 만한 여력이 없다. 다만 <희망의 물음>이 희망적으로 대답될 것을 희망한다.
이 글에서는 희망의 문제가 아닌,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믿음과 자연이 모두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은 믿음과 자연의 정적 평형의 요구가 사실상 미련없는 짓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앞서서 믿음과 자연의 완전 평형 역시 불가능하고 무의미함을 확인하였다. <평형의 문제>에서 "평형"을 "동적 평형"으로 대체하면, 다음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가 나타난다.
"투사 체계와 자연과의 동적 평형은 가능한가?"
<동적 평형의 원리적 문제>
"투사 체계와 자연과의 동적 평형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동적 평형의 방법론적 문제>
위의 문제를 부정적 귀납의 정신과 지식의 오류가능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라고 부르겠다. 인간 지식의 오류가능성은 소크라테스, 칸트, 흄 등의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일상적 생활에서 숱하게 경험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경험했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다고 해서, 경험이 가르쳐 주는 바를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음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지식의 오류가능성이 인간 지식 활동의 피할 수 없는 사실임은 늘 그리고 꼭 인지되어야 한다. 이것이 흄과 최근의 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의 논의 연속선 상에서 본다면, 현재의 해석 체계의 투사는 투사불가능한 투사들의 체계일 수도 있다는 굿맨의 통찰과 어떠한 보편 진술도 경험적 근거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흄의 발견>을 동시에 고려할 때, 우리는 현재의 지식이 오류가능하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특히 미래에 대한 예측은 더욱 오류가능하다. 중요한 점은 부정적 귀납의 정신이 오류는 제거되어야 하고 반증은 극복되어야 한다고 명령한다는 사실이다.
§4 <귀납의 문제 풀이〉재투사
<흄의 문제>는 자연의 규칙성이 어떤 믿을만한 이성적 근거, 논증적 근거도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였다. 흄의 부정적 해결책은 자연의 규칙성을 알 수 없다는 회의적 진단이었지만, 긍정적 해결책은 자연의 규칙성을 파악하는 마음의 자연적 경향이 마음에 존재한다는 자연적 처방이었다. 흄은 자연의 규칙성의 불확실성에서 출발하여, 자연의 규칙성의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해결의 방향을 잡았다. 말하자면 자연의 자발(自發)적인 <자연의 비평형 가능성>을 자연 주도(主導)적인 <자연의 평형 가능성>으로 극복하고자 하였다.
한편 굿맨은 <귀납의 새로운 수수께끼>에서 나타난 해석 체계의 불확실성에서 출발했다. 굿맨은 현재의 투사를 과거 규칙성의 회귀적 특성과 해석 체계가 조직화된 방식에 의존한다면, 자연의 특정 유형의 규칙성에 대한 타당한 귀납적 예측들이 가능하다는 지평을 열었다. 굿맨도 역시 해석 체계의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는 방식, 즉, 해석 체계의 투사들의 역사적 고착성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잡았다. 말하자면 투사 체계 자체 내의 <믿음의 비평형 가능성>을 투사 체계 자정(自靜)적인 <믿음의 평형 가능성>으로 극복하고자 하였다. 자정
풀이의 실마리는 흄의 해법과 굿맨의 해법을 모사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흄과 굿맨은 <자연과 믿음의 비평형 가능성>을 <자연과 믿음의 평형 가능성> 확보로 <귀납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풀이의 실마리도 똑같은 방식으로 구상될 수 있다. <투사 체계와 자연의 동적 비평형 가능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투사 체계와 자연의 동적 평형 가능성>을 탐색함으로써, <귀납의 동적 문제> 해결의 단서를 찾고자 한다. 먼저, 앞선 <보수적 투사 전략>과 <도전적 투사 전략>의 성과와 한계를 <믿음과 자연의 동적 평형 문제>의 지평에서 다시 한번 살펴 보도록 하자.
§5 보수적 투사 전략(Conservative Projecting Stratagem; CPS)
보수적 투사 전략은 <약한 귀납적 주장>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굿맨의 재정향 전략에 따라 기반 지식과 역사의 자원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투사할 수 있다. 투사의 역사적 고착성에 근거하여, 투사불가능한 가설들의 무분별한 양산을 배제하고, 투사가능한 규칙성만을 기반 지식 체계 내적으로 타당하게 투사함이 보수적 투사 전략의 골격이다. 굿맨은 흄의 심리적 습관 이론을 재투사하여, 언어적 습관 이론을 고안하였다. 이에 따르면, 실제적 투사의 투사가능성은 경험적 자료의 회귀적 특성들과 그러한 특성들의 조직화 방식에 근거하여 얻어진다. 투사가능한 규칙성에 의거한 귀납적 투사는 투사가능할 것이다. 그리하여 투사불가능한 투사의 배제와 투사가능한 투사의 확장으로 투사가능한 투사가 점진적으로 축척되고, 기존의 투사 체계는 차근차근 성장하기를 기대할 수 있다. 따라서 <보수적 투사 전략>은 <약한 귀납적 주장>에서 <강한 귀납적 주장>으로 점진적으로 이행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 투사 체계가 어느 정도의 평형을 자신한다면, <보수적 투사 전략>에 입각하여 과거의 성공 사례의 회귀적 특성을 보수적으로 재투사함으로써 자연과의 동적 평형을 계속 도모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보수적 투사 전략>은 성공적인 투사의 역사를 자랑하는 믿음의 체계에서는 매우 유용하리라 기대된다. 그렇지만 실패하고 있는 연구 프로그램에서는 유효한 전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성공적인 연구 프로그램에서조차, 굿맨 자신의 <새로운 수수께끼>가 보여 주었듯이, 투사불가능한 투사만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플라톤이 이미 보여 주었듯이, 동굴의 죄수들이, 사실은 자신들의 자작극을 보고 있을 뿐인데도, 자신들의 성공적인 보수적 투사(투영)의 환상에 환호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근거는 아무데도 없다.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지난 수천년 간 지동설을 신봉했던 사례와 같이, 자기 기만 속에 빠져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보수적 투사 전략은 자기 기만적 정적 비평형 상태에 안주해 버릴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6 도전적 투사 전략(Venturesome Projecting Stratagem; VPS)
흄의 <약한 귀납적 주장>에 의하면, 어떤 보편 지식도 경험적 근거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우리의 지식은 오류가능하다. 포퍼에 따르면, 우리의 지식은 오류가능하므로 역으로 개선가능하다. 포퍼의 도전적 투사 전략은 <시행과 오류 제거의 이론>과 대담한 가설을 수립하는 상상력에 주도적 역할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포퍼는 과학적 지식의 발견의 논리의 목표가 끊임없이 진리에 접근함(verisimilitude)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흄의 <반귀납적 주장>에도 불구하고, 반증을 수용하되 굴하지 않고, 더 대담한 가설을 구상하여, 자신의 가설을 더 혹독하게 테스트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야 한다. 만약 반증에 즈음한 포퍼의 대담한 도전적 투사 전략이 성공한다면, <약한 귀납적 주장>에서 <강한 귀납적 주장>으로 <박진감있는 진리접근(verisimilitude)>이 가능할 수 있고, 믿음과 자연의 동적 평형 가능성은 회고적으로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포퍼는 동적 평형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담한 상상력의 역할을 강조하는 도전적 투사 전략을 전면에 내세웠다.
물론 도전적 투사 전략에도 한계가 있다. 투사의 대안들이 많이 확보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대담한 투사들에게도 충분한 시험의 기회를 폭넓게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원과 기회가 한정된 상황에서 도박적 투사가 실패했을 경우, 평형에서 멀리 떨어진 패배적 정적 비평형 상태에 장기간 체류할지도 모를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투사 체계가 포퍼의 요구대로 혹독한 경험적 테스트에서 결정적으로 반증되었을 때, 상상력이 제 역할을 못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도전적 투사만 독려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님은 경험적으로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인간의 지식이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고, 또한 인간의 인지 능력에도 한계가 있음을 순순히 인정한다면, 우리는 "문제들"에 대해서 기반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는 "최선의 설명 대안"에 만족해야 하는 경우도 허용하는 성숙한 태도가 필요하다.
§7 와 의 동적 평형 전략
(Dynamic Equilibrium Projecting Stratagem; DEPS)
<보수적 투사 전략>과 <도전적 투사 전략>이 모두 <귀납의 동적 평형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계를 가지고 있다. 몰락하고 있는 연구 프로그램에서 보수적 투사만 일삼는 수구적 전략은 믿음과 자연의 동적 평형 확보하기에 적합치 않다. 그리고 대담한 상상력의 역할만 강조하는 포퍼의 도전적 투사 전략은 결정적 반증과 같은 동적 비평형을 겪은 이후의, 정적 비평형 상태에의 장기간의 체류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그런데 귀납 추론 역시 가설적 추론임을 감안한다면, 포퍼의 가설주의와 귀납주의가 서로를 배제하는 관계는 아닌 듯하다. 그리고 연역적 추론은 확장적(종합적) 추론이 아님이 분명하므로, 경험적 탐구에서, 연역 추론과는 다른 방식의 추론이 필요함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귀납적 신중함과 창조적 상상력은 지식이란 마차의 두 수레 바퀴라고 생각한다. 포퍼의 가설주의는 귀납 추론을 극단적으로 부인했지만, 귀납 추론은 포퍼의 대담한 가설주의에 대해 파트너쉽을 제안할 수 있다. 예컨데, 기존의 귀납 추론이 별로 잘 해내지 못할 때, 대담한 가설을 투사하는 도전적 전략이 구사될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인 <보수적 투사 전략>과 <도전적 투사 전략>을 공히 <귀납의 동적 평형 문제>에 대한 완벽한 방법론적 모델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두 전략의 보안 내지는 대안 전략으로 글쓴이는 <보수적 투사와 도전적 투사의 동적 평형 전략; DEPS>을 제안한다. 새로운 전략은 기개발된 전략들을 병합하여 그 성과를 십분 활용하는 온고지신(溫故之新; Reprojection) 정신이 지도할 것이다.
<동적 평형 전략>의 일반적 방법론은 <보수적 투사 전략>과 <도전적 투사 전략>을 두 축으로 포섭하는 모형일 것이다. 그리고 두 전략에 기반하여 상황과 시점에서 지식 자원들과 전략들을 적절하고 적합하게 투사하고 평가하기 위한 <비판>과 <반성>의 방법론적 장치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성질이 다른 두 전략이 비판과 반성을 공유하기 위한 상호주관성과 합리적 의사소통의 마당(場; Field)이 마련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동적 평형 전략>의 구체적 방법론 역시 포퍼와 굿맨이 개발한 방법론을 주축으로 설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적 평형 전략>을 구사하기 위한 툴과 솔류션들은 문제 상황과 지식 환경에 걸맞게 구축되어야 할 것이지만, 그 골격은 <지식 경영>과 <지식 성장>의 관점에 각각 정향적인 <굿맨의 길>과 <포퍼의 길>의 종합에서 세울 수 있지 않나 하고 기대한다.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부정적 테스트를 통과한 귀납적∼상상적 가설은
올바른 확장적 추론이다. <흄의 길>
§8 진리 정향(Orientation)과 진리 유인(Attraction)
흄 자신은 <반귀납적 주장>을 극복하기 위해 <귀납적 주장>을 제시했다. <인간 과학>을 표방한 흄은 인간의 내부를 관찰하여 <귀납적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준거를 찾았다.
흄의 …관찰 … "인간의 마음은 자신을 외적 대상들에까지 넓혀 그것들과 내적 인상을 결합시키려는 큰 성향(propensity)을 가지고 있다."는 관찰이 그것이다. 흄의 관찰에 의하면 바로 이러한 성향으로 인하여 "우리는 필연성과 힘을 우리의 마음이 아니라 대상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흄의 이러한 설명은 말하자면 내적 인상이 어떻게 필연성의 관념을 낳는지 하는 문제를 자신의 것을 밖으로 투사하고(project) 객체화(objectification)시키려는 인간 마음의 성향에 의거하여 설명하려고 한 일종의 인과적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위의 보고에 따르면, 자연의 신비한 작용이 "우리에게 완전히 숨겨져 있다"는 <강한 반귀납적 주장〉의 가능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인간의 마음이 규칙성을 외부 세계에 투사하고 객체화시키는 성향은 인간의 내부에 여전히 존재한다. 즉, 한 믿음의 체계는 자신이 투사하는 규칙성(필연성)을 자연에 재투사하여 다른 믿음의 체계에서도 그 규칙성을 투사하게끔 하여 자신이 투사하는 규칙성의 객관성을 도모한다. 말하자면, 인간의 마음에는 <약한 귀납적 주장>에서 <강한 귀납적 주장>으로 이행하려는 마음의 성향이 존재하는 것이다. <약한 귀납적 주장>에서 <강한 귀납적 주장>으로 투사하고 나아가려는 마음의 경향을 <진리 정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습관적으로 투사하는 이러한 마음의 성향은, 흄에 의하면, 자연적 성향이다. 자연적 성향이라 함은 자연 현상이라는 뜻이다. 현상이라 함은 나타나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마음이란 현상과 우리가 투사하고 있는 외부 세계의 대상들의 성격은 판이하게 다르겠지만, 사실이라는 점에서는 마음의 현상이나 자연의 현상이나 공히 자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숨을 쉬고 또 느낌을 가지고 하는 것은 절대적이고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필연성에 의해서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참·거짓을 판단하는 것도 그러한 필연성에 의해서이다. … 우리가 깨어 있으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 수 없고, 밝은 햇빛 속에 있는 주변 대상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그 대상들을 보지 않을 수 없듯이, 어떤 대상들이 현전하는 인상과 습관적 연관을 갖는다면 더욱더 강력하고 충분한 빛 속에서 그 대상들을 보지 않을 수 없다. … 자연이 미리 정신에 심어 두고 피할 수 없도록 했던 직능을 …
이러한 자연적 성향은 자신이 확보한 규칙성에 맞는 자연 현상이 발생하면, 유사함에 착안하여, 자신이 확보한 규칙성을 투사하여, 투사가능한 규칙성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자연은 인간의 마음이 공명하도록 작용한다. 달리 말하면 자연은 마음이 습관적으로 투사하도록 인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인력의 방향은 <강한 귀납적 주장>에서 <약한 귀납적 주장>을 끌어들이는 방향으로 봄이 합당하다.
§9 부정적 사례: 진리 유인의 지표와 진리 정향의 계기
<귀납의 동적 평형의 문제>에서 주로 기존의 귀납적 가설들이 부정적 사례들에 의해 반증되었을 때,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촛점을 맞추었다. 한 믿음이 부정적 사례를 만났다면, 그 믿음은 부정적 사례에 의해 반증된다. 현실적으로 부정적 사례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에 따라, 반증 효과는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흄의 <강한 반귀납적 주장>의 신봉자는 회의주의자로 이해될 수 있다. 회의주의자는 믿음이 자연에 결코 접근할 수 없다고 본다. 회의주의자는 부정적 사례를 자신의 믿음에 대한 긍정적 증거로 간주하여, 더욱 강한 반귀납적 주장으로 경도된다. 부정적 증거에 대한 회의주의의 길은 반증 효과를 점점 스스로 강화하여, 마침내 정적 비평형의 상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반면에 <약한 반귀납적 주장>의 지지자는 오류가능주의자로 이해될 수 있다. 오류가능주의자는 자연의 규칙성에 대한 믿음은 원칙적으로 이성적 근거가 없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오류가능주의자는 자신의 지식이 언제든지 틀릴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오류가능주의자에게도 부정적 사례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긍정적 증거로 간주된다. 그런데 오류의 개념은 진리라는 개념의 상대역이다. 그리고 부정적 사례는 믿음의 투사가능한 영역의 바깥에도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점을 반증한다. 그러므로 부정적 사례는 오류가능주의자에게 진리 정향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진리의 정향은 <약한 귀납적 주장>(한 믿음 체계의 일관적 투사)에서 <강한 귀납적 주장>(모든 믿음 체계의 일관적으로 투사)의 지향으로 볼 수 있다. 만약 <약한 귀납적 주장>이 요구하는 지평에 도달하기만 한다면, 믿음은 자연과의 동적 평형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확보케 된다. 특히 대담한 도전적 투사가 성공한다면, 반증이 초래한 위기는 이전 보다 한 차원 높은 진리접근(verisimilitude)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호기가 될 수 있다. 물론 도전적 투사 전략은 기대에 비례하는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함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위기의 극복은 도전적 투사 전략과 보수적 투사 전략의 반성적인 조화를 요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부정적 사례는 오류가능주의자에게 진리 정향을 재인식하게 되는 계기라고 판단된다.
흄의 <강한 귀납적 주장>의 신봉자는 독단주의자로 이해될 수 있다. 독단주의자는 자신의 믿음만이 자연에 접근할 수 있다고 우긴다. 독단주의자에게는 부정적 사례가 독단적 믿음에 대해 아무런 부정적 효과도 주지 않거나, 기껏해야 이상 사례, 변칙 사례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독단주의자는 부정적 사례에도 개의치 않고, 정적 비평형 상태로 자신의 독단적 아성을 지킬 것이다.
반면에 <약한 귀납적 주장>의 지지자는 비판주의자로 이해될 수 있다. 비판주의자는 자신의 믿음이 자연에 투사하고 있는 규칙성들이 일관적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비판주의자는 다른 믿음들도 가능하며, 다른 믿음이 올바를 수 있음을 인정한다. 따라서 비판주의자는 자신의 믿음은 한계를 가질 수 있고, 그러한 한계는 다른 믿음과의 비판적 대결을 통해 검토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비판주의자에게 부정적 증거는 처음에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결정적인 반례로 작용한다. 그러나 비판주의자는 자신의 믿음이 투사할 수 있는 영역의 바깥에, 자신의 체계에서 설명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존재함을 인식한다. 자연은 비판주의자에게 부정적 사례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한다고 볼 수 있다. 부정적 사례는 자연의 유인의 지표로 작용한다고 보인다. 비판주의자는 기존의 습관적이고 안정된 믿음의 체계에서 자신의 유한한 지평에 눈을 돌린다. 한계를 자각한 대목에서 비판주의자가 비관주의자로 전업해 버린다면, 믿음과 자연의 동적 평형 이루기 게임은 끝나게 될 것이다. 다행히 기존의 믿음과 새로운 사례의 비일관성이 다시 일관되게 투사될 수 있다는 애초의 신념을 재확인하고, 비판주의자가 현재의 한계를 넘어 보기로 결심하였다면, 믿음과 투사 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비판 작업을 수행할 것이다. 반성과 비판의 결과 수정·개혁·혁신·혁명과 같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대응책이 나타날 수 있고, 믿음과 자연은 다시 한번 동적 평형의 가능성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부정적 사례는 비판주의자에게 자연의 유인의 지표라고 판단된다.
§10 왜 도전해야만 하는가?
인생에는 수많은 부정적 사례들이 있다. 우리는 부정적 사례와 대면해야 할 뿐만 아니라, 반겨야 한다. 왜냐하면 부정적 사례는 인간의 오류가능성을 각인시켜고, 또한 개선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반증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는 정신이다. 물론 무턱대고 도전만 해서는 안된다. 무모한 "상상력의 비약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라는 흄의 말에 기대지 않더라도, 무모한 도전은 숱한 실패만을 양산함을 경험을 통해서 흔하게 보고 배운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기반 지식, 역사적 사례들 뿐만 아니라, 창의적 상상력이 동시에 요구된다. <귀납의 동적 평평 문제>와 대결하기 위해서는 보수적 정신과 도전적 정신의 절묘한 동적 평형이 요구되고, 방법론적 차원에서는 보수적 투사 전략과 도전적 투사 전략의 동적 평형 전략이 구사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특히 <귀납의 문제>에 있어서 부정적 사례의 긍정적 기능에 주목하고자 하였다. 자연은 자만하는 정신에 부정적 사례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을 좌절시킨다. 거꾸로 자연은 인간이 투사하고 있는 규칙성의 너머에도 무엇인가가 있음을 인간에게 친절하게도 보여주고, 인간을 진리의 더 큰 바다로 유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자연의 친절에 대해 인간은 마땅히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한 자연에 대한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자연에게 줄 선물이 아무것도 없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마음을 주면 되니까. 인간이 자연에게 주는 마음의 선물은 다름이 아닌 진리 정향이라고 생각한다.
진리 유인의 지표이자, 진리 정향의 계기인 부정적 사례들의 의의를 살리려면, 사람의 도전이 요구된다. 만약 도전이 성공하면, 이전보다 한 차원 높은 동적 평형 상태를 회복할 것이다. 도전이 실패한다면, 적어도 투사불가능한 투사가 하나는 제거됨으로써, 동적 평형의 가능성이 좀 더 커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도전도 하지 않는다면, 정적 비평형의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반증과 부정적 사례에 즈음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 <귀납의 동적 평형 문제>에 슬기롭게 대처하는 비판적 오류가능주의자(또는 오류가능한 비판주의자)는 인간의 영원한 노스탤지어인 진리를 향해, 자신의 신념에 따라 도전해야만 하고, 자신의 능력에 따라 도전할 수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진리 정향적 성향에 따라 다만 도전할 따름이다. 이제 실패와 반증의 폭풍우를 뚫고 진리로의 항해를 다시 시작하고자, 그 진리 정향적 기치를 대담하게도 높이 세우도록 하자.
VERITAS LUX MEA!
주요 참고 문헌
○ 주요 참고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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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참고 서적 및 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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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현 《신문법 서설》, 철학과 현실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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