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에서의 세계의 의미
-하 만 웅
1. 우리의 물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오늘 날 우리는 세계의 종말을 이야기한다. 몇 년 전 ‘휴거파동’이 있었으며, 1999년에 세계가 멸망한다고 예언한 유명한 예언가도 있었다. 환경파괴는 결국 세계의 종말을 초래할 것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세계의 종말을 논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세계’라는 말에 주목하고자 한다. 하나의 말은 그 말에 맞갖는 사태가 있을 것인데, ‘세계’라는 말이 나타내는 그 사태는 ‘어떠한’ 것일까? 그것을 ‘어떻게’ 어떠한 것이라고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물음은 괜한 물음인가? 그냥 심심풀이로 이렇게 물음던지기를 하고 있는가? 이미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것을 묻고 대답하지 않았는가? (서양)철학의 시초라고 불리는 탈레스에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수많은 이들이 ‘세계’를 묻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우리는 또 묻고 있는가? 도대체!
세계에 ‘대(對)’해 물었던 이들, 형이상학자들은, 특히 데카르트를 위시한 근대 형이상학자들은 세계를 개념적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개념 속에서 파악되는 것만을 ‘세계’로 보고, 거기에 질서를 지우고 있었다. 이러한 방식은 세계를 하나의 상으로 파악하는 인식의 대상으로서 파악함이다.1) 이것은 세계를 ‘눈앞에 있는 것(Vorhandenes)’2)으로서, 즉 주체인 내 앞에 가져다 세워놓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자들마다 각각 자신이 세워놓은 것을 ‘세계’라 주장할 수 있었다. 즉 각자가 각기 그때마다 눈앞에 있는 것에 대해 정립해 놓은 인식의 내용이 ‘세계’였으며, 눈앞의 존재자들에 대한 정립적인 입장표명이라는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철학은 하나의 ‘세계관’이다.3)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각기’, ‘그때마다’라는 말에 주목하고자 한다. 철학이 하나의 세계관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앞서, 이미 ‘우리가 세계를 보고 있음’이라는 세계를 보는 자와 보이고 있는 ‘세계’ 사이에 ‘관계 맺고있음’이 놓여있다. 그리고 관계맺음은 추후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앞서 있는 것이다. 즉 ‘보고 있음’은 우리가 먼저 있고 추후적으로 세계를 봄이 아니라, ‘세계를 보면서 있음’이다. 그렇다면 이 봄은 세계를 하나의 대상으로 보고 있음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능과 관련 맺고 있는 그런 바라봄이다. 우리는 이를 ‘둘러봄(Umsicht)’이라 말한다. 그리고 둘러봄은 현존재의 존재가능에 그 초점이 맞춰진 바라봄이기에, 세계는 현존재의 존재가능과 관련되어 있으며, 따라서 “세계관은 그 의미상 그때마다의 오늘날의 현존재와 관련되어”4)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물음은 현존재와의 관련맺음의 계기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따라서 ‘세계’를 하나의 대상으로 묻는 ‘세계’에 ‘대(對)’한 물음은 이제 ‘세계’를 현존재와의 관련에서 묻는 세계에 ‘관(關)’한 물음으로 바뀌어야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세계에 대한 물음은 현존재의 ‘세계 의미’에 관한 물음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왜 ‘대’라는 말과 ‘관’이라는 말에 주목하는가? 도대체 어떤 사태를 주목하는 것인가?
우선 ‘~대(對)’의 의미는 ‘마주보는 짝’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계에 대한 물음’은 세계를 마주 보이는 짝으로 묻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주체인 내가 대상인 세계를 묻는 것, 즉 주-객 도식에서의 대상이라는 의미로 묻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체는 대상에 대해 어떠한 영향도 행사하지 못하며, 또한 영향받지도 않는다.
반면 ‘~관(關)’의 의미는 ‘마주한 것의 문’이다. ‘문’이라 함은 집안과 밖을 연결하는 왕래의 통로인데, 세계에 관한 물음은 이렇듯 세계를 묻는 사람이 하나의 문을 통해 왕래하며 묻는 그런 것이다. 따라서 ‘세계에 관한 물음’은 세계를 세계와 왕래하는 자의 ‘문’을 주제적으로 물으며, 세계와 왕래하는 자의 소통을 주제적으로 삼는다. 즉 세계를 주-객의 하나의 계기에서, 즉 주체와 객체는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게 하며,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그런 의미에서 세계는 물어진다. 다시 말하면 ‘세계’는 ‘세계를 마주한 자’와의 관계에서만 물어질 수 있는 그런 것이며, 세계를 마주한 자가 이미 앞서 세계와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 세계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세계와 마주한 자는 주-객의 대립으로 각각 세워져 있음이 아니라 그것은 ‘안에 - 있음(In - sein)’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는 마주한 것이 아니라 왕래하며 있음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세계와 관계한 자, 즉 ‘현존재’를 함께 묻지 않을 수 없다.
2. 세계의미의 열쇠 - 현존재
인간의 있음이 현존재 안에 놓여있는 것이라면, 현존재가 거기에 있을 수 있기 위한 조건이 필요한데 그것이 그의 ‘있음’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5) 또한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함 자체가 문제되는 그런 존재이다.6) 우리가 존재물음을 던질 때, 존재물음을 던지는 이 한가운데에서도 우리는 존재와 연관 맺으면서 존재에 대해 묻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존재물음을 던지는 자는 바로 현존재이지 않은가? 우리는 ‘있는’ 것이지 않은가? 동시에 이 있는 것의 ‘있는’의 의미를 묻고 있지 않는가? 다시 말해 현존재의 존재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존재는 다른 존재자보다 우위에 있으며, 존재와 모종의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존재물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왜인가? 수많은 물음들이 있을 수 있는데, 유독 우리가 존재물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우연이거나, 자의적인 관심의 발로에서가 아닌가? 그러나 이것은 우연적이거나 자의적이지 않다. 오히려 하이데거의 지적처럼 존재물음의 우위성에 근거하고 있다.
학문은 한 존재자의 행동관계로서 그 존재자의 존재양식을 갖고 있으며, 이 존재자를 현존재라 파악한다. 따라서 학문은 현존재의 행동관계이며, 현존재의 존재양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은 근본개념들에 의한 확고한 체계가 있어야 성립하는데, 이 개념들은 그 개념들에 걸맞는 사태영역(Sachgebiet)을 갖으며, 이 사태영역은 다양한 존재자 영역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이 다양한 존재자 영역에 대한 탐구가 실증 과학적 학문이 되는 것이다. 가령 물리학, 수학, 역사학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각각의 이러한 학문들은 ‘수학이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등의 각각의 학문자체의 ‘무엇임’이 문제된다. 이 각각의 존재자의 무엇임에 대한 물음을 우리는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물음, 즉 존재론 자체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를 우리는 존재물음의 ‘존재론적 우위(ontologischer Vorrang)’라 이름한다.7) 하이데거의 지적대로 “만약 모든 존재론들이 먼저 존재의 의미를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또한 그러한 해명을 자신의 기초적인 과제로서 개념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들이 아무리 풍부하고 꽉 짜여진 범주체계를 구사하고 있다 해도, 그 근거에 있어 맹목적이고 자신의 고유한 의도에 있어 전도되어 있는”8)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존재론적 우위만이 유일한 우위는 아니다. 학문적인 탐구는 현존재의 존재양식 중 하나이다. 따라서 존재론 역시 현존재의 존재양식에 근거한다. 현존재는 어떠한 방식에서건, 명확성에서건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고 있으며, 이러한 존재이해가 현존재 자신을 규정하는 규정성의 하나이다. 현존재는 이처럼 존재이해와 관계 맺으며 이렇게, 혹은 저렇게 있는데, 이렇게 ‘어떻게’를 관계 맺고 있는 존재 자체를 우리는 실존(Existenz)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현존재는 언제나 자기자신을 그의 존재에서부터, 즉 실존에서부터, 그 자신으로 존재하거나 그 자신이 아닌 것으로 존재하거나 할 수 있는 자신의 한 가능성에서부터 이해한다. 따라서 학문이, 존재론이 현존재의 존재양식에 근거한다면 존재론은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에서 탐구되어야 한다.
이처럼 현존재는 다른 존재자에 우위를 간직하며 존재론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우리는 이를 현존재의 삼중적 우위라 파악할 수 있는데,9) 첫째, 현존재는 자기자신을 묻고, 자기 연관관계를 맺는 존재자라는 것, 즉 존재적(ontischer) 우위다. 가령, ‘망치’의 있음과 현존재의 ‘있음’이 다른 차원의 있음이며, 현존재의 있음이 망치의 있음에 우위를 갖는다. 둘째, 현존재는 그가 실존하는 한 존재를 이해하면서 있는 존재자이기에 그 자체 ‘존재론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론적(ontologischer) 우위를 갖는다. 따라서 현존재는 존재론이 현존재의 존재방식인 한 그는 존재론의 존재적 가능조건이다. 즉 존재론이 존재를 이해하는 현존재가 실존할 때만 가능하기에 현존재는 존재론의 가능 조건이기도 한데 이를 존재적-존재론적 우위라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현존재는 삼중적 우위를 갖는데 존재물음이 실존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라면 존재물음 역시 존재적 우위를 가지는 것으로 파악된다.10) 따라서 현존재는 존재물음의 가능근거이며 존재와 모종의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물음은 ‘물어지고 있는 것’에 의해 방향잡혀져 있는데, 즉 이해하고 있는 것에 의해 방향잡혀져 있다. 이를테면 “그 사람 누구니?”라고 물었을 때, 우리는 이미 ‘그 사람’이 ‘있음’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니’는 ‘누구이니’인데 이 때 ‘이니’는 ‘이다’의 활용태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다’의 의미를 개념적으로 명증적으로 파악하고 있지는 않더라도 어떤 이해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 속에 우리는 “그 사람 누구인가?”라고 물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물어지고 있는 것’, ‘그 사람’에 방향 잡혀져 있는 것이다. 이와 같다면 현존재는 어떠한 방식(Weise)과 명확성에서건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고 있다. 즉 ‘현존재의 존재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우리는 물어지고 있는 것, 현존재에 의해 방향 잡혀져 있으며, 또한 ‘무엇이냐’의 ‘이냐’, 즉 ‘이다’를 이해하고 있다.11) 이것이 현존재의 고유한 점인 것이다. 현존재에게는 그의 존재가 열어 밝혀져 있는 것이며, 즉 현존재는 존재의 밝힘의 자리이며 존재자의 한 가운데서 존재가 존재로서 거기에 있게되는 장소이다. 즉 현존재는 존재의 ‘거기에(Da)’ 이다.12)
현존재의 현, 즉 ‘거기에’는 ‘각각 그때마다’의 ‘거기에’이다. 현존재의 열어 밝혀져 있음이 곧 ‘거기에’라면 이것은 ‘각각 그때마다’의 ‘열어 밝혀져 있음’이다. 현존재, 현-존재, 거기에-있음은 그때마다 있음이다. 즉 현존재는 ‘지금, 순간적으로 있음’을 뜻한다.13)
그런데, 하이데거가 현존재라는 이름으로 나타내려고 한 것은 존재가 인간과 맺는 관련을 표현하려 한 것이다. 즉 현존재로서 존재의 진리의 자리로 자리 매김 되어 있음을 지칭한다.14) 따라서 존재는 현존재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존재이해는 그 자체가 현존재의 규정성의 하나이다. 다시 말하면 “현존재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그의 실존에서부터, 즉 그 자신으로 존재하거나 그 자신이 아닌 것으로 존재하거나 할 수 있는 그 자신의 한 가능성에서부터 이해한다. 현존재는 이러한 가능성들을 그 스스로 선택했던가 아니면 그 가능성들 안으로 빠져들게 되었던가 아니면 각기 이미 그 안에서 성장해왔다.”15)
이처럼 현존재는 사물이나 도구와는 다른 존재방식을 갖는 것이며, 즉 현존재의 존재방식은 실존이며, 현존재의 ‘본질’은 그의 실존에 있으며, 또 그 자신에게 그때마다 각기 그 자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존재이다.16) 그런데 현존재는 각기 그때마다 이런 저런 존재함의 방식에서 나의 현존재이기에, 현존재는 각기 그때마다 나의 존재함을 결정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존재함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며, 그렇게 자신의 존재에 그의 고유한 가능성으로 관계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존재는 자신의 가능성을 구현한 삶과 구현하지 못한 삶이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보지 못하고 무차별적인 일상성 속에 놓여있는 삶인 비본래적인 삶과,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실현한 본래적인 삶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본래성과 비본래성이 가능한 것은 앞서 지적되었던 것처럼, 현존재가 각기 그때마다 나의 존재함, 즉 각자성(Jemeinigkeit)으로 규정되어 있기에 그러하다.17)
그런데 우리는 현존재의 존재를 탐구하는 길에 있어서 우리에게 우선 일차적인 것에서 현존재의 존재와 만나야 하는데, 그것은 현존재의 열려있음에 근거하는 것이다.18) 현존재는 존재의 열려있음에로 나가 끝까지 견뎌냄으로써 그 열려있음 속에 서 있는데, 이러한 나가 견뎌냄은 ‘염려’라는 이름으로 경험된다. 즉 “현존재에 대한 접근양식(Zugangsart)과 해석양식(Auslegungsart)은 이 존재자가 스스로를 그 자신에 있어 그 자신에서부터 내보여줄 수 있게끔 그렇게 선택되어야 한다. 분명 그 양식은 존재자를 그것이 우선 대개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 즉 그것의 평균적인 일상성에 있어 제시해 주어야 한다”.19) 이것은 이성의 범주를 갖고 사태(Sache)를 덮어씌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내보이는 대로, 다시 말하면 현존재의 일상성에서 우선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그것은 “현존재가 그에 속해있는 존재양식에 따라, 자신의 고유한 존재도 그가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우선 관계 맺고 있는 그 존재자 에서부터 즉 ‘세계’에서부터 이해하려는 경향(Tendenz)을 갖고 있다. 현존재 자신 안에, 그리고 그로써 그의 고유한 존재이해 안에, 우리가 나중에 세계이해가 현존재 해석에 존재론적으로 되반영 된다고 제시하게 될 그것이 놓여있다”.20) 따라서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이해 안에 세계이해가 속해 있는데, 우리는 이를 세계-내-존재라 이름한다. 그렇다면 ‘세계’ 역시도 세계-내-존재와의 관련을 통해서 고찰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우리의 주제적 문제인 세계까지 다다랐다.
3. 세계-내-존재
우리는 앞서에서 현존재를 세계-내-존재라 파악했는데, 이는 그가 존재하면서 자신의 존재와 관계 맺으면서 그 안에 세계 이해가 속해 있는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앞서 보았듯 세계를 대상으로 살펴볼 수 없는 것은 세계가 세계-내-존재에 속해있는 하나의 계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를 주제적으로 묻고 있는 우리로서는, ‘세계’를 밝히 보기 위해서 세계-내-존재를 밝혀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세계-내-존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구조계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21) 1. 세계-내(in-der-Welt): 이 계기와 관련지어서 ‘세계’의 존재론적인 구조를 탐구하고 세계성 그 자체를 규정해야 할 과제, 2. 각기 그때마다 세계-내-존재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 존재자가 누구인지 즉 자기자신으로 있는지, 평균적 일상성 속에 있는 것인지를 밝혀야 할 과제, 3. 내-존재(in-Sein): ‘안’ 자체의 존재론적 구성을 끄집어내야 하는 과제, 이상의 세 가지이다. 우리는 이제 세 가지 구조계기를 차근히 살펴볼 것이다.
3-1. 내-존재
현존재는 각기 그때마다 ‘거기에’-존재한다. ‘거기에-있음’에 해당하는 것은 ‘내-존재’이다. ‘내-존재’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내’는 어떤 것 안에 무엇이 있음인가? 혹 현존재는 세계라는 공간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인가?
현존재는 세계내부에 있는 존재자들과 접촉하고 있다. “망치를 가지고 못을 박는다”고 했을 때 못을 박을 그는 망치와 접촉하고 있는 것인데, 이런 접촉하고 있음은 망치가 ‘곁(bei)’에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곁에 있음은 무엇인가? 망치를 가지고 못을 박을 때 망치와 못은 접촉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망치 곁에 못이 있는가? 정말 그러한가? 현존재의 망치의 곁에 있음과 못의 망치의 곁에 있음은 같은 ‘곁에 있음’인가?
우리가 ‘망치를 가지고 못을 박을 때’ 망치의 곁에 있음은 망치를 도구로 사용하고 있음이다. 즉 망치의 곁에 있음은 벽에 못을 박기 위해서다. 그럼 왜 못을 박으려 하는가? 그림을 걸기 위해 망치를 다루고 있다. 그럼 왜 그림을 걸려고 하는가? 그 그림은 집안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다. 그럼 왜 집안을 아름답게 하려 하는가? 그것은 아름다운 집안 꾸미기를 통해 편안한 집안을 가꾸기 위해서다. 왜 편안한 집안을 가꾸려고 하는가? 그것은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고, 편안하게 쉬기 위해서다. 그럼 왜 스트레스를 풀고 쉬려 하는가? 그것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다. 그럼 왜 열심히 일하려 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이상을 왜 실현하려 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존재 가능 때문이다.
우리는 이상에서 곁에 있음은 ‘위하여(Um-zu)’의 연관(Bezug)과 ‘때문에(Um-willen)’의 연관을 가짐을 볼 수 있다. 현존재의 망치의 곁에 있음은 이렇듯 현존재의 ‘그 때문에’의 성격을 갖는다. 다시 말해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가능을 ‘염려(Sorge)’하며 망치와 못의 곁에 있다. 그러나 현존재는 곁에 있으면서 항상, 직접적으로 자신의 존재가능을 염려하며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그 망치와 못의 직접적 쓰임새, 즉 ‘벽에 못을 제대로 박을 수 있을까’를 염려한다. 이와 같이 현존재가 망치와 같은 다른 존재자와 맺는 관계를 ‘배려’라 한다.22) 이와 같다면 현존재의 망치의 곁에 있음은 배려하며 관계하고 있음이다. 그렇다면 망치는 못의 ‘곁에’ 있는가? 물론 아니다. 망치는 못과 배려하며 관계 맺고 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존재의 안에 있음은 우선적으로 이렇게 곁에 있음이다. 이것은 ‘곁에 있음’이 ‘안에 있음’에 근거함을 이르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존재자가 세계내부에 있는 존재자를 건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존재자가 그 본성상 안에-있음의 존재 양식을 갖고 있을 때뿐이다. 즉 그의 거기에-있음과 더불어 이미 세계와 같은 어떤 것이 그에게 함께 발견되어 있고, 그 세계에서부터 존재자가 접촉 속에 드러날 수 있을 때에만, 그 존재자가 그것의 눈앞에 있음에서 접근가능하게 될 것이다.”23) 또한 “다른 존재자가 현존재와, 마주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존재자가 하나의 세계 내부에서 스스로를 그것 자신에서부터 내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24) 그렇다면 현존재와 마주치는 그 존재자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앞에서 우리는 망치를 가지고 못을 박고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망치는 못이 아닌 손가락을 박지 않았는가? 순간 “악”하는 외마디 소리와 동시에 망치는 내동댕이 처진다. 손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얼굴이 일그러진다. 욕이 튀어나온다. “에이 누가 못 박자고 그랬어. 그림 좀 안 걸면 어때. 괜히 피곤한 사람 못박게 해서는 이 지경을 만들어? 응?” 순식간에 돌변해 버렸다. 집을 아름답게 꾸미려는 그의 꿈은 사라지고 아름다운 집을 꾸미려던 망치는 흉기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아름답고 사랑스럽기만 하던 아내는 원수가 되어버린다. 직장에서 피곤해 지쳐 돌아온 남편을 들볶은 악처가 되어버린다. 편안한 집안은 갑자기 열악한 노동 현장이 되어버린다.
그럼 왜 망치는 흉기가 되어버렸는가? 사랑하던 아내는 순식간에 왜 원수가 되어버렸는가? 편안한 안식처는 왜 열악한 노동현장이 되어버렸는가? 그것은 망치를 가지고 못을 박지 않고 손을 박았기 때문인가? 그렇긴 하다. 그가 망치로 손을 박지 않았다면 아내는 원수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뿐인가? 순전히 망치로 손을 박았기 때문인가?
망치로 손을 박았다. 그리고 손가락이 빨갛게 달아오르듯, 얼굴이 일그러지듯 마음도 함께 달아오른다. 일순간 기분을 확 잡쳤다. 집안을 아름답게 꾸민다는 기대감에서는 망치가 하나의 도구였다. 그러나 기분을 잡친 그에게 망치는 도구가 아니다. 또한 아내도 더 이상 사랑스런 아내가 아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잡쳐버린 기분은 순식간에 그의 세계를 바꿔버렸다. 기분은 순식간에 그를 덮쳤다. 물론 그는 망치로 손을 박고서도 기분을 조절할 수도 있다. “그래 집안을 아름답게 하는 일인데 이까짓 일로, 저 사람(아내)도 오죽 힘들겠어. 아이들 보랴, 집안 살림하랴.” 이렇게 기분을 조절해 본다. 그리고는 아내가 끓여준 된장찌개로 저녁을 먹는다. 냄새가 구수하다. 맛이 그만일 것 같다. 찌개를 한 숟가락 뜬다. 순간 아까 그 손가락이 아려온다. 일순간 맛있는 된장찌개를 앞에 둔 포만감은 사라진다. 된장찌개가 맛이 없어진다. 왜 이렇게 맛이 짠지, 아니 싱거운지. 어쨌든, 기분은 어떻게든 그를 조율하고 있다. 이렇듯 기분 잡혀 있으면서 그 세계 속에 처해있다. 그는 물론 또 다른 우리다. 즉 현존재다. 현존재의 거기에 있음은 이러한 기분 잡혀있는 처해있음을 통해 드러난다. 기분은 이처럼 단지 눈앞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현존재의 거기에-있음의 근본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25) 즉 기분은 인간의 있음에 속하며,26) 거기에서 세계가 드러나고 있다.
하이데거는 이와 같은 기분 잡혀있는 처해있음의 본질성격을 이렇게 정리한다. “첫 번째, ...... 처해있음은 현존재를 그의 내던져져 있음(Geworfenheit)에 열어 밝히며, ......두 번째......처해있음은 세계, 함께 거기에 있음(공동현존재, Mitdasein), 실존 등이 동일 근원적으로 열어 밝혀져 있는(있음의) 실존론적 근본양식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실존자체가 본질적으로 세계-내-존재이기 때문이다......세 번째 본질규정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세계의 세계성을 더 철저하게 이해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이다.”27)
사실 처해있음에서 현존재는 끊임없이 ‘세계’에 내맡겨져 있는 것이다.28) 그렇다면 내맡겨져 있음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현존재가 세계에 짐으로 짐 지어져 있다는 의미인가? 아니다. 오히려 현존재가 세계에 내맡겨져 있다는 것은 현존재가 세계를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는 의미이며, 세계가 현존재의 선험적 조건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처해있는 현존재로서 각기 이미 특정한 가능성 안에 휘말려 존재하고 잇는데, 우리는 이를 내던져져 있는 존재로 파악한다. 따라서 현존재가 세계에 내맡겨져 있음은 내던져진 가능성(geworfene Moglichkeit)이다. 현존재는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에 대해 열려있는 그런 가능성이다. 따라서 현존재가 각기 그때마다 세계를 이해하며 있는 자신의 존재가능을 이해하며 있음이며, 이해는 현존재 자신이 어디에 처해있는지를 열어 밝히고 있음이다.29) 즉 이해는 현존재의 본질 규정적인 것인데 그것은 일종의 존재자에 대한 행동관계이며, 이 행동관계는 무엇이 무엇에로 관련맺음이다.30)
또 이해함이란 실존하고 있는 세계-내-존재 가능에 관련되어 있기에, 실존함의 근본규정이다.31) 따라서 이해는 가능성으로서의 자신의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현존재의 존재양식인데, 자신의 가능성에서, 바로 그때마다 각기 그 가능성으로 존재하게 함을 ‘기획투사’라 이름한다.32) 기획투사의 현상에는 이중적인 것이 놓여 있는데, 첫째 현존재가 자신을 거기에로 기획투사하는 것은 바로 자기자신의 존재가능이며, 둘째 어떤 것에로의 기획투사는 어떤 무엇을 기획투사함이다. 현존재가 자신을 하나의 가능성에로 기획투사하는 한 현존재는 자신을 이러한 존재가능성으로서 자신을 기획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이해함은 “자신을 하나의 가능성에로 기획투사함, 기획투사하는 가운데 자신을 그때마다 어떤 가능성 속에 견지함”33)을 뜻한다. 그리고 이해함은 현사실적으로 실존하고 있는 세계-내-존재에 관련되어 있는 한 타인들과의 특정한 가능적인 더불어 있음과 세계 내부적인 존재자에로의 특정한 가능적인 향해있음이 기획투사 되어 있다. 현존재란 본질적으로 세계내부적 존재자 곁에 있음이며, 타인과 더불어 있음이다. 우리는 앞에서 ‘곁에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럼 타인과 더불어 있음이란 무엇인가?
3-2. 더불어 있음과 빠져있음
“현존재는 그때마다 각기 나 자신인 그런 존재자이며, 존재는 각기 나의 존재이다”34) 그렇다면 이 때 ‘나’는 누구인가? ‘나’는 사유하는 하나의 개인적 주체인가? 우리는 이에 답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현사실(Factum)에서 출발해 보자.
우선, 현존재는 세계-내-존재이며, 거기에-있음이며, 내-존재이다. 그리고 내 존재는 우선적으로는 ‘곁에-있음(Sein-bei)’이다. 곁에-있음이란 우리가 ‘망치를 가지고 못을 박을 때’ 망치의 곁에-있음이며, 이는 곧 도구를 사용하고 있음이다. 또 도구를 사용하고 있음이 ‘위하여’의 연관과 ‘때문에’의 연관을 갖기 때문에 곁에-있음 또한 그러한 연관을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도구 사용에서 드러나는 것은 단순히 두 가지 연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도구의 사용사태 안에서 드러나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것을 사용할 자가 지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35)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망치가 사용되기 위해선 제작된 망치가 있어야 한다. 망치는 나무와 쇠가 필요하다. 나무는 목공소에서 구하고 쇠는 철공소에서 구한다. 불을 지피고 풀무질을 한다. 뿔꽃이 일고 쇠가 물렁해졌다. 큰 망치로 그 쇠를 이리치고 저리치고, 그리고 물에 담궈 담금질을 한다. 망치머리가 만들어졌다. 손잡이를 만들어 보자. 나무를 알맞은 크기로 자른다. 그리고 망치 머리가 들어갈 부분의 홈을 만들고 전체를 매끄럽게 문지른다. 손잡이가 다 만들어졌다. 이제 망치머리를 손잡이에 끼우자. 망치가 다 만들어졌다. 이제 망치가 필요한 사람이 망치를 산다. 그리고 짐에서 그림을 걸기 위해 망치로 못을 박는다.
앞의 예에서 보듯, 망치라는 도구의 사용사태에는 도구의 사용자뿐만 아니라 그 도구를 만드는데 참여한 이들이 있다. 이들은 도구를 통해 우선적으로 지시되어 있는데, 이렇게 손안에 있는 주위세계적인 도구 연관에서 도구를 사용하는 ‘나’ 아닌 ‘타인’들을 만나게 된다. 이는 단지 눈앞에 있기만 한 사물에 추가로 생각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러한 사물들이 주위세계적인 도구 연관에서 타인들과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타인들이란 누구인가? 그냥 단순히 ‘나’아닌 다른 이를 지칭할 뿐인가? ‘현존재’가 각기 나의 현존재라면 타인들 역시 타인에서는 각기 자신의 현존재가 아닌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타인’은 단순히 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의미하지 만은 않는다. 오히려 타인들은 사람들이 대개는 자기자신과 타인들을 구별하지 않고 그 곳에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현존재는 이렇듯 타인과 더불어 있음(Mitsein)이며, 이러한 것을 ‘함께 거기에 있음(Mitdasein)’이라 한다.36) 그리고 이때의 ‘더불어’는 현존재적인 어떤 것이며 둘러보는 배려하는 세계-내 존재로서의 존재의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배려함의 존재성격이 더불어 있음의 고유함일 수는 없는데, 배려함은 세계 내부적인 존재자와 현존재의 관계성격이지 또 다른 현존재인 타인과 나의 관계성격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존재자는 배려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려(Fursorge)의 대상이 된다.37) 따라서 더불어 있음은 심려로 파악된다. 이때 사람들이 타인들과 함께 있을 때, 삶들은 타인과는 다르다는 ‘차이(Differenz)’에 대한 염려가 깔려있다. - 가령 이 시대에 철학 공부를 한다는 것은 타인들과는 다르다는 ‘차이’에 대한 염려를 극복하지 않으면 힘든 일이다. - 그러기에 사람들은 자신과 타인의 ‘차이’를 좁히려고 하고, 거리감을 좁히려하는데, 이것은 평균성(Durchschnittichkeit)을 배려하면서 평준화(Einebnung)하려는 본질적 경향을 갖는 것이다. 우선 대개 ‘거기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렇다. 우리는 이를 일컬어, 즉 일상적인 서로 함께 있는 이들을 일컬어 ‘그들(das Man)’이라 한다.38)
이와 같이 일상적 함께 있음에서, 우선, 현존재는 이렇듯 ‘그들’이고 대개는 그렇게 머물러 있는데, 이를 본래적인 자기와 구별해서 ‘그들-자기’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실존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본래적인 자신은 ‘그들’의 실존적인 변양태의 하나이다. 이러한 일상성의 존재양식을 우리는 ‘빠져있음(Verfallen)’39)이라 이름한다. 그러나 이 빠져있음은 단순히 우리가 부정해야만 할 바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빠져있음에서 세계-내-존재와 일차적으로 만나고 있지 않은가? 빠져 있음은 세계-내-존재의 존재양식이기에 세계를 나름대로 지시하고 있다. 세계-내-존재는 우선 대개 배려된 세계, 즉 세계 내부적인 존재자 곁에 존재하는데, 빠져있음은 이러한 배려된 세계에 빠져있음이다. 즉 일상적인 세계-내-존재가 자기자신에서부터 떨어져 나와, 자신에 속해 있는 세계에 빠져있다.40)
이렇게 현존재가 빠져있을 수 있는 것은 이해하며 처해있는 세계-내-존재 가능이며, 따라서 빠져있음은 우선적으로 세계-내-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우선 우리에게 밝혀져 있는 것에서 우리의 탐구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현존재의 일상성, 빠져있음은 우리 탐구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즉 현존재의 평균적 일상성을 통해 우리의 길은 열려져있다. 즉 우리는 ‘세계’를 주제적으로 물음은 이러한 일상성의 자리에서 우선 만나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나는 우선 대개의 그 ‘세계’는 무엇인가?
3-3. 주위세계 - 도구
현존재는 여러 존재들과의 왕래를 통해 세계와 관계 맺고 있다. 이 왕래는 추후적인 것이 아닌데, 즉 현존재는 이미 앞서 세계와 관련맺으며 존재하는데, 여러 존재자와의 왕래는 일상적 차원의 왕래이다. 이 때 만나는 존재자들을 우리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innerweltliches Seiendes)’라 이름하며, 이 때 이 왕래를 우리는 ‘주위세계(Umwelt)’라 이름한다.41) 따라서 지금 우리는 주위세계를 묻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세계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우선, ‘주위세계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우리는 망치로 못을 박는다. 이는 주체인 우리는 대상인 망치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루며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 명명했듯이 ‘배려함’인데, 배려하는 이러한 존재자는 사용된 것, 제작된 것 등이다. 여기서 사용된 것, 제작된 것을 일컬어 우리는 ‘도구’라고 이름하며 그것의 도구성격을 ‘손안에 있음’이라 한다.42) 데카르트가 보았듯이 그렇게 세계는 우리에게 눈앞에 있는 것으로 만나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손안에 있는 것으로, 그것의 도구 성격인 손안에 있음으로 만나지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선 우리의 물음이 향하고 있는 곳은 손안에 있음의 성격을 가진 도구이다.
도구는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이다. 이 도구를 ‘가지고 어디에’ 사용할 수 있다. 가령 망치를 가지고 못을 박는 데에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망치는 ‘하나의’ 도구일 수는 없다. 가령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한 것이며, 또한 이것은 의자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또 이것은 내가 편안하게 쉬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망치는 그 망치의 하나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구의 전체성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우리는 ‘도구전체성(Zeugganzheit)’이라 이름한다.43)
이런 도구전체성에서 이해된 도구는 ‘무엇을 가지고 어디에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이라 정리할 수 있으며, 이러한 도구가 쓰이는 쓰임새를 그 도구의 ‘사용사태(Bewandtnis)’라고 이름한다. 사용사태는 ‘무엇을 가지고 어디에’라는 일종의 구조를 갖는다. 가령 망치는 그것을 가지고 못을 박는 데에, 못은 의자를 만드는 데에, 그리고 그 의자는 내가 편안하게 쉬는 데에 사용된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망치의 사용사태가 못의 사용사태와, 그리고 이것은 의자의 사용사태와 관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용사태의 전체연관을 ‘사용사태 전체성(Bewandtnisganzheit)’이라 할 수 있다.44)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손안에 있는 존재자인 도구가 ‘무엇을 가지고 어디에’가 곧 ‘무엇을 위한’ 것임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이라는 전체연관은 어디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가? 그것은 도구의 사용사태 전체성에서, 즉 무엇을 위한 것의 쓰임새에서 ‘무엇을 위하여’가 현존재의 존재에 상관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을 위하여’는 세계-내-존재의 ‘그 때문에’에로 소급됨을 본다. 결국 도구의 ‘무엇을 위하여’의 연관은 세계-내-존재의 ‘그 때문에’에 근거하고 있는 셈이다.
‘그 때문에’는 현존재의 존재가능이라는 의미의 도구의 궁극 목적이다. 망치를 가지고 못을 박기 위한 것은, 또 의자를 만들기 위한 것은, 그리고 또 편안히 쉬기 위한 것은 궁극적으로는 현존재의 존재가능 때문이다. 이처럼 존재 가능으로서의 ‘그 때문에’는 도구를 사용하는데, 이러한 도구를 가지고 어디에 사용케 하는 ‘그 때문에’는 이해함(Verstehen)에 근거하고 있다. 가령 망치를 가지고 못을 박는 데에 사용케 함은 망치를 못박기 위한 것으로 앞서 이해함이다. 이처럼 이해는 현존재가 그가 만나는 존재자를 자기 자신의 ‘그 때문에’에서부터 포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언급한 연관들을 하나의 선행적인 밝혀져 있음 안에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해하며 사용사태에서 존재자를 만나게끔 하는 그곳이 세계 현상이다.45)
사용사태 전체성에서 도구는 그 도구를 가지고 어디에 사용하는 지를 현존재의 존재 가능에서 살펴보았는데 이때, ‘도구연관(Zeugzusammenhang)’에서 보여지는 것은 하나의 ‘지시연관(Verweisungszusammenhang)’이다. 가령 망치를 가지고 못을 박는 데에 사용함은 의자를 만드는 데에 사용함이며, 내가 편하게 쉬는 데에 사용함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현존재의 존재가능 때문인데, 이것은 존재가능에서부터 각각의 사용사태를 ‘지시함(Verweisen)’이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시는 현존재의 존재 가능 때문에 각각의 도구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가령 망치를 가지고 못을 박는 데에 사용함은 현존재의 존재 가능에서부터 의미 부여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 부여의 연관전체를 우리는 ‘유의미성(Bedeutsamkeit)’이라 칭한다.46) 그리고 바로 이 유의미성이 세계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그것이다.
세계는 유의미성 속에 있는 세계-내-존재가 하나의 세계 안에서 사용사태의 존재 양식 안에서 만나게 되며, 그렇게 자신을 그것의 자체로 있음에서 알려올 수 있는 그런 존재자를 발견할 수 있는 존재적 가능조건이다.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로서 그때마다 각기 이러한 존재자로서 존재하는 그의 존재와 더불어 본질적으로 이미 손안의 것의 한 연관이 발견되어 있다. 현존재는 그가 존재하는 한, 그때마다 이미 하나의 만나게 되는 ‘세계’에 의존한다.47)
이제 세계내부적 존재자와 만나는 주위세계는 의미 부여된 것의 총체라 할 수 있으며, 세계는 의미부여 할 수 있는 근거로서의 그곳이며, 그것은 사용 사태 전체성에서 이해되는 그곳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앞에서 우리는 세계가 눈앞에 있는 것으로 파악될 수 없음을 보았다. 그리고 우선 가까이 만나게 되는 주위세계는 현존재의 존재 가능에서부터 이해됨도 함께 보았다. 그것은 도구의 ‘무엇을 가지고 어디에’가 ‘무엇을 위하여’이며, 궁극적으로는 ‘그 때문에’ 임을 본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세계가 ‘연관(Beziehung)’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연관’은 현존재가 세계 안에 있음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이 세계 안에 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현존재가 세계 안에 ‘처해있음(Befindlichkeit)’이다. 그리고 이 처해있음은 언제나 ‘기분잡혀 있음(Gestimmtsein)’이다.48)
기분은 현존재가 어떤 상태에 있으며 어떤 상태로 되는가를 드러내 보여준다. 현존재는 언제나 기분에 따라, 현존재가 그의 존재에 따라 생존하면서 존재해야 하는 그 존재로서 떠맡겨진 그런 존재자로서 열어밝혀져 있다. 이러한 현존재의 처해있음의 기분 잡혀있음이 실존적으로 현존재의 세계개방성을 구성한다. 즉 현존재의 처해있음의 기분 잡혀있음에서 세계가 열어보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계는 기분 잡혀있음 속에서 그때마다 각기 세계를 열어밝히고 있다.49) 그런데 이렇게 현존재의 각기 그때마다의 기분 잡혀있음에서 세계가 열어 밝혀진다면, 다시 말해 현존재의 존재하는 존재방식으로 존재한다면 그 세계는 주관적인 어떤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이에 “그렇다”고 인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계가 주관적이라는 말은 “현존재가 세계-내-존재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한, 세계가 이 존재자에 내 존재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한 세계가 이 존재자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50)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를 사유하는 인식의 대상으로 두고 그 대상을 인식주체의 주관에 따라 아무렇게나 하나의 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세계를 순전한 눈앞의 것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현존재가 실존하는 한 그에게는 자신의 존재와 함께 어떤 세계가 앞서 던져져 있다. ‘실존함’이란 무엇보다도 ‘자신의 세계를 미리부터 던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현존재가 세계에 처해있으면서 자기자신을 이러저러한 가능성들 속으로 던지는 것이다. 따라서 처해있음은 자신의 가능성들에로 내던져져 있는 것이며, 동시에 이 가능성들에서 그때마다 자신으로 있을 가능성을 내던지는 것이다. 이러한 내던짐을 우리는 ‘기획투사(Entwurf)’라 이름한다.51)
이로써 이제 세계는 기획투사하는 현존재와 함께 열어밝혀져 있다. 이렇게 현존재가 실존하는 경우에만, 그리고 그런 한에서만 세계는 존재하고, 또한 현존재는 자신의 세계를 추후적으로나, 혹은 이따금 앞서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의 앞서 던짐의 현존재의 존재에 ‘속해’ 있다.52) 즉 현존재는 자신의 그 세계와 ‘함께’ 있다.
4. 세계 형성
우리는 지금 세계를 주제적으로 묻고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물음은 ‘세계’를 하나의 ‘정의’의 형태로 얻고자 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물음을 통해 철학의 본래적 물음을 현실적으로 전개해 나가기 위함이다. 철학이란 ‘철학’이란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철학함으로 존재한다. 좀 더 정확히 하자면 철학은 철학함으로 ‘형성된다’. 이러한 철학은 인간의 고유한 활동이다.53)
이렇듯 철학이 철학함이라면, 그것도 당연하게 현존재의 철학함이라면, 철학은 하나의 ‘행동관계(Verhalten)’인데, 이때 행동관계라 함은 무엇과 무엇의 관계이며, ‘무엇에로 향해 있음(Ausgerichtetsein-auf)’의 구조를 갖을 텐데, 우리가 전체 쪽을 향해 내몰려 있도록 한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일종의 ‘내몰려 있도록 함(Getriebenheit)’이다. 이는 우리가 전체 안에 존재하려는 데에로 내몰려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 ‘전체 안에(im Ganzen)’와 이 ‘전체 안에’의 ‘전체적인 것들(Ganze)’을 우리는 ‘세계’라 지칭한다”54) 일반적인 의미로 신적인 존재자가 아닌 존재자 전체라고 우선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인간도 그렇게 이해된 세계의 한 토막인 셈이다. 그러나 인간은 단지 세계내부에서 발견되는 세계를 함께 이루고 있는 세계의 한 토막으로서만 간주되는 게 아니라, 세계를 마주하고 서 있기도 하는데, 이러한 ‘마주 서 있음(Gegenuberstehen)’이란 일종의 ‘세계를 갖고 있음(ein Haben der Welt)’이며 곧 세계를 그 안에서 인간이 움직이고 있고 그것하고 대면하고 있는 인간이 지배하면서(beherrschen) 동시에 복종하고(bedienen) 있고 그것에 인간이 떠 넘겨져 있는 바로 그러한 것으로서 가지고 있음이다. 그런데 인간 외에 여타의 존재자들 동물, 식물, 물건 등과 같은 경우는 어떠한가? 그러한 존재자들은 세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이데거는 이러한 물음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논제로 논제화한다. 1. ‘돌은 세계 없이 존재한다’(der Stein ist weltlos) 2. ‘동물은 세계빈곤으로 존재한다’(der Tier ist weltarm) 3. ‘인간은 세계를 형성하며 존재한다’(der Mensch ist weltbildend)가 그것이다. 우리는 이 논제를 통해 ‘세계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을 전개해 나갈 수 있으며, 그 길은 일종의 비교고찰이며, 각각 즉 인간, 동물, 돌의 세계에 대한 그때마다의 연관이다. 이러한 연관의 차이는 ‘세계’를 부각시킬 것이다.
4-1. 동물의 세계빈곤으로 있음과 돌의 세계 없이 있음
우리는 다음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의 현상과 만나려고 한다. 동물인 곰은 겨울잠을 자기 위해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곰은 겨울잠을 잘 때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 때문에, 미리 생명유지를 위해 많은 먹이를 미리 먹어둬야 한다. 그래서 곰은 계곡으로 간다. 마침 알을 낳기 위해 계곡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던 연어를 만난다. 곰은 연어를 넙죽 넙죽 잡아먹는다. 겨울잠을 자기에 충분할 만치 잡아먹는다. 그리고는 잠자기에 좋은 안전한 동굴 하나를 골라서는 몇 달이고 잠에 골아 떨어진다. 곰이 동굴에서 이렇게 잠을 자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에게 발견된다. 그들은 마취제로 곰을 마취시킨 뒤 곰의 몸무게를 달고 발의 크기를 측정한다. 그리고 곰이 자고 있던 동굴의 형태와 동굴의 크기를 측정한다.
곰은 계곡과 연어를 접촉했고 동굴을 접촉했다. 곰은 계곡에서 연어를 잡아먹는 데 관심을 가지고, 동굴에서 겨울잠을 자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곰에게 연어가 왜 상류로 올라오는지는 관심 밖이다. 그리고 그 동굴이 풍화작용에 의해 생성되었는지, 석회암이 녹아 형성되었는지 역시도 관심 밖이다. 다만 배부르게 잡아먹을 수 있는 연어일 뿐이며, 잠자기에 좋은 동굴일 뿐이다. 이렇듯 곰이 접촉하는 존재자는 한정되어있다. 이런 의미에서 “곰은 세계를 덜 가지고 존재한다.” 연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연어는 무슨 힘에 사로잡혀 강의 상류로 올라간다. 그리고 곰이란 놈에게 재수없이 잡혀 먹이가 되고 만다. 연어가 접촉하는 것은 거친 물살과 곰뿐이다. 연어 역시 세계를 덜 가지고 존재한다. 이때 ‘덜 가지고 있음’은 단순히 보다 많음, 보다 적음이라는 양적 의미만은 아니다. 오히려 곰은 연어를 연어로서는 알고 있지 못함이다. 또한 연어는 곰을 곰으로서 알고 있지 못함이다.55) 바로 이런 의미에서 동물은 세계를 덜 가지고 존재한다.
그럼 동굴은 어떠한가? 동굴은 곰을 접촉하고 있는가? 동굴은 곰을 곰으로서 알고 있는가? 곰은 동굴에 몸을 누이고 잠들었다. 동굴의 표면과 곰의 살갗이 맞닿았다. 그럼 이런 접촉은 곰의 연어와의 접촉과, 곰의 동굴과의 접촉과는 어떻게 다른가?
곰은 배가 고파서 강으로 갔다. 그리고 연어를 잡아먹었다. 잡아먹다 배가 불러 수많은 연어를 놔두고 돌아선다. 곰은 동굴로 향한다. 곰은 자신의 배부름을 느끼며, 동굴로 방향을 돌리고 있다. 그리고 동굴에서 잠을 잔다. 그리고 동굴은 거기 가만히 곰의 잠자리가 되면서 있다. 곰은 강으로, 동굴로 향해 있다. 이처럼 동물은 ‘....에로 향해’ 있다. 이 ‘....에로 향해있음’은 무엇인가? 곰은 강을 강으로서 알고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습관화 된 어떤 것이다. 이렇듯 ‘....로 향해있음’이 습관화된 어떤 것이라면 도대체 ‘....에로 향해있다’는 것인가? 단순히 곰이 동굴로 돌아서 있다는 의미에서만 인가? 그리고 ‘습관화 된’이란 무슨 의미인가? 어떤 인간이 아침 7시에 일어나는 것이 습관화되었다는 그런 의미인가? 동굴은 습관적으로 곰의 잠자리가 된다고 할 수 있는가?
‘....에로 향해있음’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어야 한다. 곰이 동굴로 향해있는 것은 향해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언뜻 단순한 말장난으로 비춰질지 모르겠으나 이것은 중요하다. - 그리고 향해있을 수 있다는 것은 ‘해낼 수 있음’에 근거하는데, 즉 하나의 ‘행동(Benehmen)’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곰이 동굴로 향해있음은 하나의 행동이며, 이렇게 행동하기에 곰일 수 있다. 즉 곰이 곰일 수 있는 것은 곰이 동굴로 ‘방향잡힌 행동(als Fahigsein zum Benehmen)’이기에 그런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곰의 행동은 인간의 행동과 어떻게 다른가? 이에 대한 대답이 ‘습관화된’의 의미이다. 여기서 ‘습관화’란 회사에 8시까지 출근하기 위해서 7시에 일어나는 인간의 행동과는 구별되는 일종의 ‘충동(Trieb)’속에 동물 자신을 간직함이며, 이러한 충동질(Treiben)의 와중에서 동물은 그 자신으로 존재한다.56) 따라서 습관화된 이런 충동질 속에 있는 동물의 행동을 우리는 ‘행태(Benehmen)’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동굴은 애시당초 ‘습관적’일 수도 없다. 동굴은 애시당초 충동질 속에 놓여있지 조차도 않다.57)
이렇듯 동물은 ‘....에로 방향잡혀 있음’인데. 이는 ‘사로잡혀있음(Benommenheit)’에서58) 이해 될 수 있다. 그것은 행태가 충동질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로잡혀 있음은 무엇인가?
곰은 겨울잠이라는 충동에 충동질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의 경우처럼 반성적인 행위(Handeln)가 아니라 충동질에 붙잡혀있다. 이렇게 붙잡혀 있을 때 동물은 자기자신으로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충동질에 붙잡혀 있음은 동물을 동물로서 있게끔 하는 것이다. 이렇게 붙잡혀있는 동물은 충동질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박탈되어 있다. 가령 곰이 겨울잠이라는 충동에 충동질되어 있을 때, 곰이 겨울잠이라는 충동질을 반성해보고 충동질을 거슬러 나갈 수 없는데, 이렇듯 동물은 충동질에 압도당하여 있다(Hingenommensein). 다시 말하면 충동질에 의해 ....에로 압도당하여 있다. 가령 곰은 충동질에 의해 겨울잠에로 압도당하여 있으며, 동굴로 향해있도록 압도당하여 있다. 이렇듯 곰은 자신의 충동에 압도당하여 그것을 따를 뿐이다. 곰이 동굴로 가도록 압도당하여 있는 것은 곰이 충동에 사로잡혀있기에 가능하다.
우리는 여기서 혹 이런 의문에 빠질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도 무엇인가에 사는가? 가령 하난 남자는 사랑하는 한 여자에 사로잡히지 않는가? 최소한 우리는 ‘사로잡혀있다’라고 우리 인간 자신에도 적용시켜 말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인간도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한다. “갑돌이는 길을 가다 지나치는 한 여인을 보고 한 눈에 반해버렸다. 그날 도서관에 앉은 그가 보고 있는 책에서는 글의 내용이 아닌 그녀의 얼굴이 보이고, 잠자는 그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는 그녀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버렸다’.”
우리는 앞서에서 인간의 행동을 행위(Handeln)라고 하고 동굴의 그서을 행태(Benehmen)라고 했었다. 이제 우리는 이 차이를 드러내야 한다. 인간의 행위는 염려에 근거하고 있는데,59) 이러한 염려에 근거해서 즉 자신의 존재가능 ‘때문에’ 배려하고 심려한다. 가령 갑돌이가 그녀에게 사로잡힌 것은 근원적으로는 자신의 존재가능 때문이지 않은가? 갑돌이가 그녀에게 사로잡힐 때, 그때서야 비로소 갑돌이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반면 행태는 어떠한가? 곰은 겨울잠에 사로잡혀 있을 때, 곰일 수 있는데, 이처럼 사로잡혀 있음, 즉 충동질에 사로잡혀 있음은 곰의 근거가 되지만, 인간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곰이 충동질에 사로잡혀있는 행태라 하더라도 하나의 행동이라면 다른 것을 향해 ‘열려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행동이란 ....와의 관계에서 가능한데, 그렇다면 이것이 열려있어야 관계할 수 있으며, 행동이 강하게 된다. 그렇다면 곰에게 열려있는 것은 무엇인가? 곰은 자신의 열려있는 것을 가진다. 곰은 그 열려있는 것에서만 ....을 해낼 수 있다. 우리는 이런 해낼 수 있는 곰의 영역을, 거기에서 자유로이 해낼 수 있는, 그리고 거기에서만 해낼 수 있어야 하는, 그런 울타리(Umring)를 갖는다. 이 울타리는 동물의 자기 보존(Arterhaltung)의 영역이 되는데, 이를 우리는 ‘억제를 푸는 울(Enthemmungsring)’이라 한다.60) 이 안에서 곰은 자신을 보존하며,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이 사로잡혀 있음은 곰의 자기 근거가 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동물의 이러한 사로잡혀 있음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61)
1. 사로잡혀있음은 붙잡혀있음(Genommenheit)이다. 하나의 동물의 움직임은 습관화된 행태일 뿐, 결코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곰은 연어를 연어로서 이해할 수 없다. 2. 사로잡혀있음은 충동질(Treiben)에로 붙잡혀 있음이다. 이 충동질 속에서 동물은 다른 것과의 연관 속으로 개방되어 있다. 동물은 충동질로 ....에로 압도당하여 있다. 곰은 먹이에 사로잡혀있다. 그것은 충동질에 압도당해 있음이다. 3. 사로잡혀있음은 서로서로 내모는 충동질 전체 안으로 붙잡혀 있음(Eingenommenheit)이다. 곰은 연어가 연어로서 이해되지 못하듯 자신을 자신으로서 이해하고 있지도 못하다. 4. 사로잡혀있음은 다른 것에로 향해 있음이다. 곰은 먹이에, 잠에로 향해있다. 5. 사로잡혀있음은 다른 것을 향한 열려있음과 더불어 하나의 울타리를 함께 가져온다. 이 울타리를 치면서 동물은 자신을 보존한다. 곰은 연어와 접촉하며 있으면서 자신의 충동질에 잡혀있으면서 행동하는 영역을 가진다. 6. 사로잡혀있음은 행태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 조건이다. 곰은 사로잡혀있기에 연어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동굴은 사로잡혀있지 조차도 않다. 사로잡혀 ....에로 향하고 있지 조차도 않다. 동굴은 ....와 접촉할 수 없다. 동굴은 그 자신 동굴로 있으면서, 다른 존재자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없기에, 다른 것 자체에 다다를 수도 없고 다른 것 자체를 소유할 수도 없다. 동굴은 다른 존재자에로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없음(Zugangslosigkeit)’이 속한다.62) 따라서 우리는 곰의 접촉할 수 있음과 동굴의 접촉할 수 없음을 본다. 그리고 우리가 앞에서 동물은 세계빈곤으로 있음, 인간은 세계를 형성하며 있음, 돌은 세계 없이 있음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잠정적이나마 세계를 “각기 그때마다 접근할 수 있고 왕래할 수 있는 존재자이다”63)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곰은 세계를 가지고 있다. 곰은 연어와 동굴과 접촉하고 있기에 그렇다. 그런데 ‘세계 빈곤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다시 곰에게로 눈을 돌려보자. 곰은 연어를 잡아먹었다. 다시 말해 곰은 연어에 접근했다. 그런데 어떻게 접근했는가? 곰은 배가 고파서 접근했다. ‘그래. 내가 90일간 잠을 자야 하는데, 하루에 필요한 열량은 1만 2천 cal야. 그러니까 나는 90일간 108만 cal가 필요해. 그런데 나는 잠을 잘 때 2천 cal만 소모하니까 내 가 실제로 필요한 cal는 18만 cal인 셈이지. 연어 한 마리에 1천cal가 있으니 180마리를 잡아먹으면 되겠군. 아차 내가 연어를 잡아먹고 동굴까지 돌아가는 길을 계산에 넣지 않았군......’ 곰은 이렇게 연어에 접근하는가? 물론 아니다. 오히려 곰은 그냥 접근한다. 그것은 하나의 행태이다. 그것은 사로잡혀 있는 행태이다. 곰은 연어에로 접근하도록 충동질되어 있는 것이다. 곰은 접근하도록 충동질에 압도당해 있음이다. 곰에게는 연어를 연어로서 인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박탈되어 있다. 그것도 곰에게 추후적으로 박탈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앞서 박탈되어 있다(Genommenheit).64) 이것은 동물 행태의 사로잡혀있음이다. 곰은 연어를 잡아먹는 데 사로잡혀있고, 동굴 속에서 겨울잠을 자도록 사로잡혀있다. 이렇게 동물은 사로잡혀 있는 가운데 다른 존재자에로 접근한다. 이 접근은 그 존재자를 그 존재자로서 접근함이 아니다. (접근 가능한 존재자를) 존재하는 것으로서 경험할 수 있고 개방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들뿐이다.
사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계와 동물의 세계가 질적으로 다르게 잇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동물이 도대체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서, 어떤 것을 어떤 존재자로서 인지(Vernehmen)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하다.65) 가령 곰은 과연 연어를 연어로서 보고 있는가? 그리고 인간은 어떠한가?
4-2. 인간의 세계를 형성하며 있음
과연 인간은 연어로서 보고 있는 것인가? ‘....로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은 연어를 먹는 것으로, 물고기로서 그리고 동물의 귀소본능 연구의 자료로서 이해하고 있다. 즉 인간은 무엇을 어떤 것‘으로서’ 이해하고 있다. 이해에서 밝혀진 것, 이해된 것은 이미 그것 자체에서 있어 ‘무엇으로서가’가 두드러지게 부각될 수 있는 방식으로 접근가능한데, 이것은 해석(Auslegung)을 구성하고 있다.66) 이러한 ‘....로서’는 ‘....을 위한’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즉 연어를 먹는 것으로서 이해함은 먹기 위한 것으로, 또 동물회귀본능 자료로서 이해함은 연어를 연구하기 위해서 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해서’는 현존재의 ‘....때문에’에 즉 ‘염려’에 근거한다. 그러나 곰은 어떠한가? 곰은 연어를 자신의 ‘....때문에’에서 만나는가? 물론 아니다. 곰은 충동질에 사로잡혀 있음에서 연어와 만난다.
그렇다면, “‘세계가 다른 무엇보다도 존재자의 접근가능성이다’이라는 세계 개념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는 존재자의 접근가능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는 다른 무엇보다도 ‘존재자의 존재자로서의 접근가능성(Zuganglichkeit von Seiendem als solchem)’을 뜻한다고 말해야만 한다.”67)
그런데 접근가능성은 존재자가 그 자체로서 개방될 수 있는 경우에만 일어나는데, 즉 접근가능성은 개방가능성에 근거하는데, 그렇다면 ‘존재자의 존재자로서의 접근가능성’으로서의 세계는 그 존재자의 개방가능성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세계가 개방가능한 존재자를 뜻하는 것인가? 아니다. “세계는 오히려 사실적 개방가능한 존재자의 개방가능성이다(sondern die Offenbarkeit des je faktisch offenbaren Seienden)”.68) 그리고 이 개방가능성은 존재자와 함께 일어나는 그런 것인데, 개방가능성이 하나의 세계성격이라 할 경우 세계와 같은 것이 없다가 새로 생겨나는 그런 것인가? 그리고 존재자는 세계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래서 인간이 세계를 형성하며 있다고 하는 것인가? 도대체 인간이 세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없던 세계가 인간에 의해 있게 된다는 것인가?
우리는 앞서에서 잠정적으로나마 세계를 존재자 자체의 개방가능성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개방가능성은 인간에게 열려 있는 개방가능성이다. 물론 그것은 -무엇이 무엇으로서 열려있는 개방가능성이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에게 어떻게 열리는가? 이처럼 그것은 하나의 기분에서 드러나고 있다. 망치는 기분에서 못을 박는 도구로서 때로는 흉기로서 드러나고 있으며, ‘아내’는 사랑하는 아내로, 미운 원수로 드러나 있다. 이렇듯 세계는 근본기분에서 ‘일어나고’있다. 즉 세계는 일종의 ‘일어남(Geschehen)’이다. 따라서 세계는 단순히 세계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각기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는 세계형성에 속해있다(Welt ist zugehorig der Weltbildung)”69)고 할만 하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형성하고 있는데, 반면 “세계가 기분에서 드러난다면 동물에게는 세계도 주위세계도 없는 것이다.”70) 그리고, 이 말은 인간이 세계를 추후적으로 형성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형성이 일어나는데 근거해서만 비로소 인간이 실존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이다.71) 즉 인간이 세계를 형성하면서 존재한다는 말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인간일 수 있는 가능적 근거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는 인간의 한 객체로서 인식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는 인간과의 한 계기에서 함께 물어지고 있는 것이다.72) 그리고 이를 위해 앞의 곰 이야기에로 돌아가 보자.
곰이 동굴에서 이렇게 잠을 자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에게 발견된다. 그들은 마취제로 곰을 마취시킨 뒤 곰의 몸무게를 달고 발의 크기를 측정한다. 그리고 곰이 자고 있던 동굴의 형태와 동굴의 크기를 측정한다. 그들은 곰에게 관심이 있다. 그리고 동굴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그 관심은 곰이 연어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왜냐하면 인간은 곰을 곰으로서 보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곰은 연어를 연어로서 보는 데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이러한 ‘로서’는 동물에게는 근본적으로 닫혀있다.73)
인간이 곰을 곰으로서 관심을 가짐은 인간이 곰과 관계 맺고 있음이다. 따라서 ‘로서’는 어떤 관계다. 또한 ‘로서’는 전체와 관계 맺고 있음이다. 인간이 곰의 무게를 달고 발의 크기를 재는 등의 관찰은 곰의 한 부분이 아닌 곰 전체를 알려함이기에 그렇다. 인간은 곰을 곰 그 자체에서 그리고 그 전체에서 알려한다. 인간은 곰이 어디에서 살며, 어떤 먹이를 먹는지에 대해서 안다. 그러나 인간은 아직 곰들만의 독특한 버릇들을 다 알고 있지는 못하다. 인간은 이렇듯 동물을 동물 그 자체로 그리고 그 전체에서 알려 하며, 알아가고 있다. 우리가 곰에 대해서 알아가는 만큼 우리가 곰과 맺는 관계는 조금씩 달라진다. 그것은 인간의 세계가 조금씩 달라짐이다. 만약 앞에서 규정했듯이 세계는 존재자가 그 자체로 그리고 전체 안에서 개방되어 있음이라면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세계를 형성하며 존재한다.
인간이 세계를 형성하며 있음은 ‘로서’로 관계맺음이다. 이 관계맺음은 현존재가 세계 안에 있음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이 세계 안에 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현존재가 세계 안에 처해있음이다. 그리고 이 처해있음은 언제나 기분 잡혀 있음이다.74) 기분은 현존재가 어떤 상태에 있으며 어떤 상태로 되는가를 드러내 보여준다. 즉 현존재의 처해있음의 기분 잡혀있음에서 세계가 각기 그때마다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현존재가 실존하는 한 그에게는 자신의 존재와 함께 어떤 세계가 앞서 던져져 있다. ‘실존함’이란 무엇보다도 ‘자신의 세계를 미리부터 던지고 있음’을 의미한다.75) 이것은 현존재가 세계에 처해있으면서 자기자신을 이러저러한 가능성들 속으로 던지는 것이다. 따라서 처해있음은 자신의 가능성들에로 내던져져 있는 것이며, 동시에 이 가능성들에서 그때마다 자신으로 있을 가능성을 내던지는 것이다. 이러한 내던짐을 우리는 기획투사라 이름하는데, 인간이 세계를 형성하며 있음은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이 세계를 형성하며 존재함은 이렇게 기획투사하며 존재함이다. 따라서 이렇게 현존재가 실존하는 경우에만, 그리고 그런 한에서만 세계는 존재한다. 세계를 형성하며 존재함이 인간에게 추후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인간이 세계를 형성하며 존재할 때 인간은 인간일 수 있는 것이다.
5. 하늘-사람-땅의 관계맺음으로서의 세계
- 우리의 과제
우리의 첫 물음은 ‘세계가 무엇인가?’였다. 그것은 다시 우리에게 있어서 “세계의 의미 물음”으로 정리될 수 있었다. 세계는 저 멀리 천상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지금 여기의 세계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서 세계를 만나면 , 그 세계에서 우리 자신을 만난다. 현존재가 자기 가능성의 실현이라면, 바로 실현의 지평은 세계이며, 그리고 마찬가지로 세계가 ‘일어나고 있음’이라면 그 근거는 현존재의 가능에서다. 현존재가 세계-내-존재이며, 시간적이고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 가는 역사적 존재이기에, 현존재가 세계 의존적 존재이기에,76) 동시에 세계는 세계-내-존재의 세계이며, 세계 역시 시간적이고 일어나고 있는 세계-내-존재에 의존적이다.
세계는 현존재의 처해있음의 기분 잡혀있음에서 열어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현존재가 이미 기분 잡힌 채 세계 내에 실존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는 현존재의 실존에 함께 던져져 있는 셈이며, 현존재는 이미 자신의 세계를 미리부터 던지고 있음이며 자신을 이러저러한 가능성 속으로 던지고 있다. 따라서 처해있음은 현존재가 자신의 가능성들에로 내던져져 있는 것이며, 동시에 이 가능성들에서 그때마다 자신으로 있을 가능성을 내던지는 것이다. 이렇게 현존재는 기획투사하며 있음이다.77) 이러한 기획 투사하는 현존재와 함께 세계는 열어 밝혀져 있으며, 그러함에 세계는 형성하며 존재하고 또한 현존재 자신 또한 자신을 형성하며 존재하고 있다. 세계는 결코 ‘그 자체에 있어서’의 세계가 아니며, 현존재의 근본기분에서 열려지는 것이며, 기획 투사하는 형성함의 있음이다. 그리고 이미, 앞서 현존재와 관련 맺고있음 그것이다. 그 관련 맺고있음에서 세계는 인간에게 있어서 “존재자의 열려있음의 사건”이다.78)
하이데거에 따르면 “땅과 하늘, 신적인 것과 죽을자 이 넷의 단일성(Holon)을 사방(Geviert)이라 칭하고 이것을 세계라 하였다.”79) 이 때 ‘사방’이라 함은 넷 중 어느 것도 다른 셋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으며 그 각각은 거울이 반영하는 방식으로 다른 것들과 결속되어 “넷의 각각은 개개의 다른 것 안에서 거울에 비치듯이 비쳐 나온다.”80) 따라서 우리는 세계를 개념 속에 비춰지는 것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거울을 보듯, 거울 놀이- 우리 자신의 세계를 거울이 비추이는 대로 보고, 그것을 다시 거울에 되 비추면서 우리자신에 대한 숙고가 필요한 것이다.81)
우리말에는 ‘터’라는 말이 있다. ‘터’는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트여있는 공간이다. 또는 현존재가 실존하고 있는 삶의 공간이다. ‘터’는 우리가 ‘잡고’, ‘닦고’, ‘다지고’한다. 터를 잡음은 1) 터를 골라 정하다 2) 밑자리를 만들다 는 것을 의미하며, 터를 닦음은 1) 건물은 세울 자리를 고르고 다지다 2) 토대를 굳게 다진다는 의미이며, 그리고 터를 다짐은 무게가 있는 물건으로 터를 단단히 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하나의 계기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건물을 세우기 위해 ‘터’를 필요로 한 것이다. 따라서 ‘터’는 건물을 세우기 위한 ‘트여있는 빈 것’이며, 건물을 세우기 위해 ‘잡혀 다져져 있어 꽉 차 있는 것’이다. 또한 건물이 다 지어졌을 때, 그 건물은 삶의 ‘터’가 되는데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건물 터에 건물을 세워야만, 즉 터를 없애야만 우리는 새로운 터를 잡을 수 있다. 즉 터는 터의 없앰과 터의 있게함이 함께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터에서 ‘트여있음’과 ‘차있음’을 함께 보며, ‘터를 없앰’과 ‘터를 있게 함’을 함께 본다. 이러한 터는 세계이며, 현존재의 근거이다. 세계에 근거해서 현존재는 실존하며, 또한 현존재에 근거해서 세계는 형성된다. 또한 현존재는 세계에 근거해서 실존하면서도 끊임없이 세계를 없애고 세계를 있게 한다. 즉 ‘세계’는 우리가 트여있는 즉 자유로울 수 있는 빈 거기이며, 동시에 우리의 삶의 세계가 될 수 있게 차 있는 집 지워진 거기이다. 또한 세계가 존재자의 열려있음의 사건이라면, 세계를 없애고 세계를 있게 하는 형성의 사건이다. 현존재는 이처럼 세계에 의존하면서 세계를 열어 밝히고 있으며, 또한 그 세계를 세계로 형성하고 있다. 동시에 이럴 때만 우리는 실존할 수 있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는 현존재를 현존재로서 밝혀내고 있는 ‘거기’이다. 또한 세계는 현존재가 ‘밝혀내고 있음’ 그것이다. 왜냐하면 세계는 현존재 의존적이며, 현존재에 의해 세계가 의미있기 때문이다.
우리말의 모음의 기본글자는 ‘․, ㅡ, l’ 인데, 이것은 각각 하늘, 땅, 사람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는 다시 ‘․, l, ㅡ ’로 자리바꿈 할 수 있는데, ‘․’는 ‘l’와 관계 맺고 있으며, ‘ㅡ’도 ‘l’와 관계 맺고 있다. 우리의 세계는 이렇게 인간이 하늘과 땅과 관련 맺고 있음이다. 인간이 하늘과 땅과 관련 맺고 있을 때 인간은 인간이며, 동시에 어떻게 관련 맺고 있는냐가 곧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세계는 무엇이다’는 ‘인간의 하늘과 땅의 관련맺음이 어떠하다’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사방은 우리말 天, 地, 人의 관계맺음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탐구는 세계에 대한 하나의 ‘개념’을 제공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개념’에 의한 ‘세계’를 해체시켜 놓았으며, 어찌보면 혼란스럽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를 애초부터 개념으로 파악하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세계를 해체해 세계를 들여다보고자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계’에 어떤 개념을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음의 길을 제공해 주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세계 의미 물음’으로 길을 잡았으며, 그 길은 각기 그때마다의 우리의 세계가 우리의 물음이 닿아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현재 우리가 이고 있는 하늘과 발붙이고 있는 땅과 우리 자신, 인간, 현존재의 모습을 반성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남은 과제가 될 것이다.
하이데거가 <<진리의 본질>>82)에서 동굴의 비유로 암시하고 있음이 그것이다. 동굴 안의 사람들이 동굴 밖의 빛에 의해 형성된 그림자만을 보고, 그 그림자를 있게 하는 빛을 알지 못할 때, 그리고 그 그림자를 있게 하는 그것을 보지 못할 때, 빛을 알았던, 그림자를 있게 하는 바로 그것을 보았던 선각자는 동굴 밖의 빛에 대해 동굴안 사람들에게 목숨을 걸고 알려준다. 동굴안 사람들에게 세계는 그림자의 세계라면 그 선각자에게서의 세계는 빛의 세계인 것이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세계의 의미를 새로이 묻는 것은 세계를 빛의 세계에서 우리의 세계를 열어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나 자본의 눈에 의한, 혹은 기계의 눈에 의한 세계가 아니라 세계를 비추이는 그 빛에 의해, 오히려 빛나고 있는 그 세계를 빛나고 있는 데로 보기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의 숙제는 세계를 빛 가운데 자리 매김하는 데 있다. 자리 매김한다는 것은 세계를 형성한다는 것의 또 다른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를 빛 가운데 드러나도록 형성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가능을 그 빛에 따라 내던지는 것이다.
참 고 문 헌
1. 하이데거의 글
Sein und Zeit, (Frankfurt a.M., 1975). 이기상 옮김, <<존재와 시간>>, (까치,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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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Zeit der Weltbildes, Holzwege(숲길), (Frankfurt a,M. 1977). 최상욱 옮김, <<세 계상의 시대>>, (서광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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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른 저자의 글
2-1. 외국 저자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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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Heidegger, Die Zeit der Weltbildes, Holzwege(숲길), (Frankfurt a,M. 1977), S.108-109, 최상욱 옮김, <<세계상의 시대>>, (서광사, 1995), 83-85쪽. (앞으로는 <<세계상의 시대>>로 인용함)
2) ‘눈앞에 있는 것’은 ‘눈앞에 있음’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손 안에 있음(Zuhandenheit)’의 상대개념인데, ‘손안에 있음’은 도구의 사용사태, 즉 ‘위하여-연관’에서의 바라봄을 의미한다. 반대로 ‘눈앞에 있음’은 ‘위하여 연관’에서가 아니라 순전한 관찰의 대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3) Martin Heidegger, Die Grundproblems der Phanomenologie, (Frankfurt a.M. 1975), S.238. 이기상 옮김, <<현상학의 근본문제들>>, (문예출판사, 1994), 245쪽. (앞으로는 <<현상학의 근본문제들>>로 인용함)
4) <<현상학의 근본문제들>>, 7(25).
5) Martin Heidegger, Einfürung in die Metaphysik, (Frankfurt a.M., 1983), S.90, 박휘근 옮김, <<형이상학 입문>>, (문예출판사, 1994), 142쪽. (앞으로는 <<형이상학 입문>>으로 인용함).
6) Martin Heidegger, Sein und Zeit, (Frankfurt a.M., 1975), S.12, 이기상 옮김, <<존재와 시간>>, (까치, 1983), 28쪽. (앞으로는 <<존재와 시간>>으로 인용함).
7) <<존재와 시간>>, 8-11(24-27).
8) <<존재와 시간>>, 11(27).
9) <<존재와 시간>>, 13(29-30).
10) <<존재와 시간>>, 11-15(27-32)참조.
11) <<존재와 시간>>, 12(28). 이처럼 우리는 앞선 이해에 따라 물음의 방향을 잡는다. 그런데 이 이해는 아직 사태가 돋워진 것은 아니며, 그것은 해석을 통해서 돋워지게 된다. (한자경,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존재이해>, 계명대 철학연구소, <<해석학과 현대철학>>, (철학과 현실사, 1996), 참조.
12) 이기상, <<하이데거의 실존과 언어>>, (문예출판사, 1991), 56쪽. (앞으로는 <<실존과 언어>>로 인용함)
13) <<존재와 시간>>, 385(503). 이에 대해 페겔러의 설명을 따르자면 “현존재는 현사실적 실존으로서 이미 세계 내에서 시간 내에 있는 존재자 옆에 있음으로서만, 시간의 시간화일 뿐이며, 순간적이며, 세계건립적 역사적이다. 역사성과 병행하여 시간내재성(Innerzeitigkeit)이 성립한다. 시간 내재성은 시간자체의 시간화로 이해되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시간 내에 있는 존재자에로 방향을 잡고, 그래서 시간의 근원성을 놓치고 만다.” 페겔러, <<하이데거 사유의 길>>, 이기상, 이말숙 옮김, (문예출판사, 1993), 69쪽.
14) Martin Heidegger, Was ist Metaphysik?, (Frankfurt a.M., 1969), 이기상 옮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서광사, 1994), 14쪽. (앞으로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로 인용함).
15) <<존재와 시간>>, 12(28).
16) <<존재와 시간>>, 41-42(66-67).
17) <<존재와 시간>>, 42-43(66-69).
18) 우리는 현존재의 존재를 실존으로 파악했는데, 이것은 ‘존재의 열려있음’에 대해 열린 채 서 있는 그러한 존재자의 존재를 의미한다.<<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15.
19) <<존재와 시간>>, 16(34).
20) <<존재와 시간>>, 15-16(32-34).
21) <<존재와 시간>>, 53(80-81).
22) <<존재와 시간>>, 67-71(98-105). 배려(Besorgen)는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가 자기 자신의 존재가능 때문에 세계내부적 존재자의 존재에다 마음 쏟음이다. 따라서 배려는 ‘위하여’ 연관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배려와 관련하여 심려와 염려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연관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우선 심려는(Fursorge) 자기자신의 존재가능 때문에 타인의 존재에 대해 마음씀이다. 그리고 염려(Sorge)는 현존재가 자기자신의 존재가능 때문에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마음졸임이다. 이것은 배려와 심려의 근거가 된다.(이에 관해 상세하게 정리를 원한다면 다음을 참조. 이기상, 구연상, <<존재와 시간 용어 해설>>, (까치, 1998), 86-87(배려)/ 167-170(심려)/ 210-215(염려)).
23) <<존재와 시간>>, 55(83).
24) <<존재와 시간>>, 57(86).
25) Martin Heidegger, Die Grundbegriffe der Metaphysik, (Frankfurt a.M. 1983), S. 100-101. (앞으로는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로 인용함).
26)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96.
27) <<존재와 시간>>,136-137(189-191).
28) <<존재와 시간>>, 139(193-194).
29) <<존재와 시간>>, 144(200-201).
30) <<현상학의 근본문제들>>, 391-392(389-390), 228-231(220-222).
31) <<현상학의 근본문제들>>, 395-396(393-394).
32) <<존재와 시간>>, 145-146(201-203).
33) <<현상학의 근본문제들>>, 394(392).
34) <<존재와 시간>>, 114(160).
35) <<존재와 시간>>, 117(164).
36) <<존재와 시간>>, 118(165-166).
37) <<존재와 시간>>, 121(169-170).
38) <<존재와 시간>>, 126-127(175-176), 370(485-486).
39) <<존재와 시간>>, 175(240).
40) <<존재와 시간>>, 175-176(240-241).
41) <<존재와 시간>>, 66(97).
42) <<존재와 시간>>, 68(100).
43) <<존재와 시간>>, 83-85(119-122).
44) <<존재와 시간>>, 83-85(119-122).
45) <<존재와 시간>>, 86-87(124-125).
46) <<존재와 시간>>, 87(125).
47) <<존재와 시간>>, 87(125).
48) <<존재와 시간>>, 134(183).
49) <<존재와 시간>>, 136-138(189-192).
50) <<현상학의 근본문제들>>, 239(246).
51) <<존재와 시간>>, 144-145(200-202).
52) <<현상학의 근본문제들>>, 241(248), 249(256).
53)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6.
54)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7.
55)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284-286 참조.
56)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340.
57)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374-379 참조.
58) 조사 ‘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 째는 사물이 움직이고 있는 처소를 나타내는 부사격 조사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곰이 동굴에서 잔다’고 할 때이다. 둘 째는 움직임의 출발점을 나타내는 보조사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곰이 강에서 동굴로 간다’고 할 때이다. 마지막으로는 주어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이번 경기는 우리학교에서(가) 이겼어’라고 할 때다. 그런데 여기서의 ‘에서’는 다음과 같이 확장된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여기서는 ....에로 향해있음이 사로잡혀있음에 근거한다. 또한 ....에로 향해있음은 사로잡혀있음의 장(場)에서만 활동가능하다. 따라서 사로잡혀있음은 ....에로 향해있음의 근거이자 동시에 처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물의 본질규정을 위해서는 사로잡혀있음을 물어야 한다.
59) <<존재와 시간>>, 192(260)이하 참조.
60)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377.
61)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374-378.
62)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290.
63)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289.
64)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360.
65)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377.
66) <<존재와 시간>>, 149(207).
67)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390.
68)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405.
69)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413.
70) <<형이상학 입문>>, 48(84).
71)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414.
72) 함께 물어진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같은 시각에 물어진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두 가지의 물음은 서로가 서로를 근거 지우고 있다는 의미에서다. 다시 말해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세계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근거함으로서만 가능하며, ‘세계가 무엇인가?’라는 물음도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근거함으로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두 물음은 해석학적 순환의 관계에 있다.
73)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397.
74) <<존재와 시간>>, 134(187).
75) <<현상학의 근본 문제들>>, 239(246).
76) 이기상, <새로운 보편 문화논리의 모색 - 해석학, 화용론 그리고 사건론>, <<인문학연구 제 1집>>,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6), 14-15쪽. (앞으로 <새로운 보편 문화논리의 모색>으로 인용함).
77) <<현상학의 근본문제들>>, 239(246). <<존재와 시간>>, 144-145 (200-202).
78) <새로운 보편 문화논리의 모색>, 43. 이기상, <형이상학에 대한 현대적 접근, 하이데거의 존재사건학 - 형이상에 대한 동서양의 철학적 접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8), 192쪽.(앞으로는 <하이데거의 존재사건학>으로 인용함)
79) M. Heidegger, Bauen Wohnen Denken(건축 거주 사유), Vortrage und Aufsatze(강연과 논문모음집), S.144. <하이데거의 존재사건학>, 191 재인용.
80) M. Heidegger, Ding(사물), S.172. <하이데거의 존재사건학>, 191 재인용.
81) <하이데거의 존재사건학>, 201-205 참조.
82) M.Heidegger, Vom Wesen der Wahrheit, (Frankfurt a.M.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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