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슐라이어마허까지의 독일 해석학적 전통

나뭇잎숨결 2021. 11. 16. 13:12
슐라이어마허까지의 독일 해석학적 전통*
- 그리스 인문정신에서 성서해석학, 그리고 보편적 해석학으로


김 용 일(계명대학교)

Ⅰ. 들어가는 말

철학과 문학은 고대의 인문 정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재해석된 과거의 정신세계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예측하고 창출하는 새로운 힘을 부여한다. 따라서 철학과 문학에 있어서 고대인들이 남긴 정신적인 유산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마르지 않는 풍요한 정신적인 양식을 제공한다. 그들의 삶과 고뇌, 그리고 이념과 희망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삶에서 외적인 조건과 환경은 역사의 변화에 따라서 변해 가지만 그들이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이념과 살아가면서 고뇌하는 삶의 고민은 늘 동일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역사가 문제되고 항상 재해석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서양철학의 전통은 오늘날 인류 정신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현대의 독일 정신으로 대변되는 독일 관념론과 낭만주의, 그리고 현대 해석학적인 전통으로 연결된다. 이 사실은 탈레스 이래로 인간이 자연과 자기 존재에 대하여 물어온 물음들이 오늘날까지 여전히 이어져, 달라지는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기이해와 자연이해, 그리고 세계이해를 위하여 되풀이하여 물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렇게 볼 때 현대인들이 자기와 세계를 어떻게 해석하며 그 가운데 삶의 의미를 어떠한 방식으로 찾을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탐구하기 위해서는 고대인들의 사유 대상은 무엇이었으며, 사유 방식은 어떠하였고, 그 전통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수용되며 발전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 관점에서 현대 서양적 사유의 한 정점에 독일 해석학이 자리잡고 있다면 독일적인 인문정신의 뿌리는 어디이며 그 뿌리들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를 살펴보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 이유는 독일정신으로 대변되는 현대 해석학은 서양 인문정신의 전통 자체를 한 점에 수렴하여 현대적인 인간이해의 가능근거를 제시해 주며 동시에 이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정신적인 토양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인간은 자기와 세계를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하는가? 고대의 정신은 어떻게 역사적인 흐름으로 이어져 오늘날 수용되는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이들의 정신을 어떻게 수용하고 발전시키며 현대의 정신세계를 창출하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을 집대성하며 독창적인 철학을 정립해 낸 플라톤의 담론 변증법을 탐구의 단초로 삼으려고 한다. 그 이유는 플라톤 철학이 고대 소크라테스 이전 사상가들의 사유내용을 단순히 종합한 것이 아니라, 그 이후 서양의 사유체계에서 생각되어질 수 있는 인간과 사회의 거의 모든 주제들을 심도 있게 다루어 후대 사람들의 인간이해와 세계이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 구체적인 예로 플라톤은 주체적인 관점에서 앞선 사상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철학, 정치학, 그리고 윤리학 등 학문의 독자적인 사유체계를 완성하여 그 이후 학문의 전형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점은 플라톤의 철학적 영향이 플로티누스의 존재론과, 아우구스티누스의 객관적 역사 해석, 그리고 루터의 성경의 문자적 해석 등을 거쳐 슐라이어마허의 보편적 해석학으로 연결되어 오늘날 서양의 핵심적인 사유방법인 해석학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양 인문정신의 핵심적인 사유내용은 도대체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사유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가?

Ⅱ. 그리스 인문정신

플라톤 사상의 정점을 이루는 것은 이데아(Idea) 이론이다. 플라톤은 이 이데아 이론을 정립하기 위하여 앞선 철학자였던 피타고라스와 파르메니데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론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의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가 제시한,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인 대화술을 변증법으로 수용한다.
피타고라스는 세계를 하나의 아름답고 조화로운 우주로 해석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형상의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수의 이론과 현실적인 삶을 윤리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영혼윤회사상을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수는 변화하는 물질의 세계가 아니라 불변하며 조화로운 형이상학적 세계를 구성하는 만물의 근본 존재 원리이다. 따라서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근원적인 요소는 세계를 질서 지우는 수이고, 세계는 수의 일정한 결합에 따라서 조화롭게 구성되어 있다. 만물 생성의 원리는 따라서 수의 결합과 분리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존재 역시 수적인 질서로 구성되어 있다. 육체와 정신이 조화로운 상태에 있는 인간은 자기와 세계에 대하여 이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조화가 깨트려 질 때 인간은 이기적이고 육체적인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어 결국 영혼의 평화로운 상태를 잃어버리게 된다.
피타고라스에 따르면 수의 세계는 영원히 불변하는 이념의 세계이다. 이념의 세계는 인간의 감각적인 판단에 의하여 도달되는 물질적인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정화된 맑은 영혼, 즉 가장 논리적인 정신에 의하여 통찰될 수 있는 이성적인 사유의 세계이다. 따라서 영원한 진리는 육체적인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합리적인 사유에 의하여 인식된다. 따라서 피타고라스는 감각적인 현실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초감각적인 정신의 세계 속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있는 정신의 세계만이 영원히 불변하는 참된 진리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파르메니데스는 피타고라스와 마찬가지로 진리의 영원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운동이 불가능한 정지된, “사유와 존재가 일치”하는 존재의 세계를 제시한다. 변화는 무에서 유로, 그리고 다시 유에서 무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그러나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생긴다던가 혹은 있는 것이 없어진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하여 인식하는 운동은 우리의 감각기관이 우리를 속이는 기만에 불과하다. 매순간 변화하는 현상 세계와는 달리 존재의 세계는 불변한다. 불변하는 세계만이 참된 진리의 세계일 수 있다. 그러므로 세계가 불변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 인식과 일치하는 존재만이 진리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파르메니데스는 인간존재의 변화하는 현상들을 거부하고 오로지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만이 참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하여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불변의 진리는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사실뿐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처럼 모든 것은 매 순간 변화하고 그 변화 속에서 우리는 참된 존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변화 자체야말로 만물의 근본적인 존재방식이며 변화를 통하여 만물은 생성하고 발전한다. 변화하는 현실의 세계야말로 참된 세계이고 불변의 세계는 하나의 이념으로 존재할 따름이다. 인간의 존재도 이와 마찬가지다. 인간은 외형이 변할 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모습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변화하는 인간존재를 이해하기 위하여 모순의 원리에 따라서 운동하는 인간의 이해방식이 필요하다.
사물 자체의 운동을 강조한 헤라클레이토스와 달리 소크라테스는 진리의 보편성과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으로서 대화의 기술을 도입한다. 대화는 거짓된 자신의 신념 체계에 대하여 비판하고 반성하게 하여 자기를 부정하고 진리를 수용할 수 있게 하는 개방된 자아발견의 방법이다. 대화상대자는 대화를 통하여 자신의 이념을 검증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올바른 앎인가를 반성할 수 있다. 또한 대화는 인간이 타자의 정신세계 속으로 이행하게 하여 자기의 사유내용을 반성할 수 있게 하며, 타자와의 관계맺음을 통하여 사유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 이유는 대화가 자기 속에 내재해 있는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기 때문이고, 동시에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앎을 비판하고 새로운 지식을 갖게 하는 개방된 인식지평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화를 통하여 습득된 앎만이 참된 앎일 수 있고 참된 앎만이 올바른 행동을 유도할 수 있다. 앎과 행위가 일치하는 소크라테스의 지행일치설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제기되었다.
플라톤은 이들 앞선 철학자들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수렴한다. 그는 피타고라스로부터 만물의 불변성과 조화의 이념, 그리고 현실세계의 영원한 원형으로서 이데아의 이념을 수용한다. 그러나 그는 피타고라스가 제시한 순수 형상으로서 수의 이념을 순수 형상으로서의 이데아의 이념으로 받아들여 불변하는 초월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설정한다. 동시에 이 사상을 피타고라스의 영혼불멸과 영혼윤회 사상과 결합시켜 현실세계와 영원한 이념의 세계라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정립한다. 이러한 이원론적 세계관은 한편으로 진리는 물질적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념의 세계에 있다는 사실과 인간이 영원히 자기의 고향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정신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다른 한편으로 진리의 세계는 우리의 몸이 살아가는 물질적인 세계가 아니라 영혼이 출생 전부터 살고 있었던 이데아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진리의 세계인 이데아의 세계와 이로부터 분리된 가상의 세계인 현실세계를 분리한 플라톤은 인간이 영원한 진리를 인식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상기설’을 제기한다. 상기의 기술은 인간이 잊혀진 자기의 본질과 앎의 내용을 깨달아 가는 자기이해의 기술이다. 여기에서 자기이해는 진리를 찾아가는 “대화의 유도술”인 변증법을 통하여 가능하다. 이렇게 볼 때 변증법은 인간이 허구적인 사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동시에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로부터 불변하는 이념의 세계인 존재의 세계와 변화하는 가상의 세계인 현실세계라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수용한다.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영원한 세계는 불변의 세계이어야 한다. 따라서 진리의 세계는 피타고라스와 마찬가지로 영원히 불변하는 이념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 변화하는 세계는 단지 하나의 가상의 세계일 뿐이다. 인간과 존재에 대한 이해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매 순간 변화하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시간의 제약을 초월하여 항상 동일할 수 있는,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존재와 인간의 모습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올바로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다른 관점에서 플라톤은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감각적인 현실세계의 해석가능성을 찾아낸다. 그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 유전설’에서 영원히 생성 변화하는 가시계(可視界)의 세계를 현실세계로 수용하지만 동시에 감각적인 판단에 의존하는 가시계의 세계로부터 영원히 불변하는 이념의 세계에로의 이행을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주장한 변화하는 세계로서의 가시계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시도하여 현상의 세계를 가시계의 세계로 규정한다. 동시에 변화하는 가운데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본질의 세계인 로고스의 세계에 착안하여 불변하고 운동이 없는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이러한 사상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종합하여 플라톤은 자신의 독자적인 이데아 이론을 정립하게 된다. 이데아 이론은 영원히 불변하는 이념세계와 이에 대응하는 현실세계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동시에 그는 영혼의 본질과 앎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이론을 제시한다. 그러나 세계와 이념, 그리고 자기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은 현실적으로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 자기파악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확하게 자기를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 대화술로서의 변증법이었다.

1.

플라톤의 관심은 영혼의 탐구에 집중된다. 그에 따르면 이해되어야 할 대상은 인간의 영혼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는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자기이해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해석학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이 물음이 해석학적인 이유는 물음의 핵심적인 방법이 인간의 자기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변증법이고, 탐구의 목표가 인간의 자기이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탐구를 위하여 플라톤은 인간의 진리이해 방식인 대화의 변증법을 제시한다.
대화의 변증법에서 대화를 진행하는 가장 중심 되는 매개는 언어이다. 모든 인간의 사유는 언어활동을 통하여 진행된다. 따라서 사유의 내용과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언어의 구조와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언어는 대상을 설명하기 위한 단순한 약속기호는 아니다. 오히려 언어는 진리의 세계인 이데아를 드러내는 가장 본질적인 사물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사물에 대한 이해는 언어에 대한 이해이고 언어에 대한 이해는 사물에 대한 이해이다. 언어만이 사물의 본래적인 모습, 즉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게 한다.
대화는 정확한 언어의 이해를 시도한다. 개념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를 수정하면서 언어가 갖는 본래적인 의미를 찾는 것이 대화이다. 언어에 대한 이해는 언어의 의미 이해이고, 언어의 의미 이해는 그 언어가 지칭하는 대상의 이해를 의미한다. 따라서 언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이해된 언어에 대한 동의는 자기와 세계에 대한 올바른 앎, 즉 진리의 이해와 진리에 대한 동의를 의미한다.
가다머는 플라톤의 담론 이론을 해석하면서 인간의 사유를 언어로 진행되는, “자기자신과 나누는 영혼의 내적인 대화”라고 보았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플라톤이 대화를 인간의 영혼이 선천적으로 알고 있는 진리체계를 자기자신에 대한 사유와 자기와의 대화를 통하여 언어로 명료화하고 해명하는 작업이라고 보았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유는 언어로 구성되고 언어는 사유의 내용을 구체화시키는 기능을 갖는다. 이렇게 볼 때 언어는 “대화 상대자와 의사소통을 수행하고 사태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 내는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언어를 통하여 자기를 이해하고 자신의 의사를 타인에게 전달한다. 또한 인간은 자기자신과의 대화를 통하여 자기 속에서 망각된 진리를 상기하며 타자와의 대화를 통하여 자기 자신에 내재한, 아직 기억되지 못한 보편적인 진리를 깨닫게 된다. 여기에서 대화는 인간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대화를 통하여 잊혀진 자아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기술이 바로 담론의 변증법이다. 대화자가 변증법적인 상호작용을 통하여 도달하는 인간이해는 결국 잊혀진 인간의 본질이해, 즉 자기이해이다. 따라서 플라톤의 변증법은 인간이 진리를 인식하고, 진리의 담지자인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그러나 플라톤이 말하는 진리는 인간의 존재 이전에 이미 초월적인 이데아의 세계에 내재해 있다. 동시에 그 진리는 사유하는 인간의 영혼에 인식되는 한에서 인간의 자기이해와 관계한다. 이렇게 볼 때 진리는 인간에게 상기된 의식의 내용이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며, 변화된 삶을 통하여 인간의 영혼이 영원한 진리와 관계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결국 인간은 대화를 통하여 진리를 인식하며 진리 속에 거할 수 있고, 허구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서 참다운 앎의 세계로 이행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하나의 진리(이데아)와 일치하는 자기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

2.

이미 살펴본 것처럼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방법론을 담론의 기술에서 찾았다. 담론의 기술은 이성적인 판단과 추론을 통하여 진리를 찾아가는 해석의 기술이고, 해석의 기술은 진리와 자기존재를 분석하고 종합하면서 진리의 의미를 이해하는 대화의 기술이다.
가다머는 플라톤의 변증법 해석에서 플라톤의 변증법을 대화자가 해석학적인 상황 속에서 자기 해석의 운동을 통하여 자기를 이해하는 자기이해의 방식이라고 보았다. 가다머가 포착한 플라톤의 자기이해의 운동은 첫째, 표현을 통하여 고정된 자신의 이념을 부정하며 수정하여 새로운 자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기변화의 운동이며 둘째, 대화의 상대방을 인정하여 또 다른 타자의 세계를 인정할 수 있는 타인에 대한 긍정의 운동이며 셋째, 이 양자의 한계를 ‘지양’시켜 새로운 진리를 경험하고 그 진리를 향하여 자기를 개방할 수 있게 하는 개방적인 운동을 의미한다. 자기부정과 타인에 대한 긍정 및 개방성이 진리를 영원히 사모하는 에로스의 개념과 연결되면서 담론은 인간이 자기이해를 위한 변증법적인 운동의 단초를 제공한다.
플라톤이 볼 때 진리의 세계는 영원히 불변하는 참된 세계이고 단 하나의 원형만이 존재하는 정지된 이데아의 세계이다. 이에 반하여 현실의 세계는 변화하는 세계이고 다양한 세계이다. 변화하는 세계는 그것이 끊임없는 변화에 의존하는 한 본래의 참 모습은 결코 이해될 수 없다. 이성적인 사유가 아니라 감각적 판단에 의존하는 사유는 변화하는 세계의 변화되는 일시적인 대상의 모습만을 파악하게 한다. 그러나 인간이 감각기관에 의하여 대상세계를 인식하는 한 인간의 모든 사유활동은 감각적인 판단에 의존하여 변화하기 전의 일시적인 상, 즉 허구적인 상을 구성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비록 인간이 출생하기 전에 이미 진리를 인식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감각기관이라는 인식수단에 의존하게 되면서 영혼이 대상을 올바로 인식하는 것을 방해받기 때문이다. 인간이 감각적인 인식 수단으로부터 벗어나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이성에 의존하지 않는 한 그는 더 이상 올바른 판단력을 가질 수 없다. 올바른 인식에 도달하기 위하여 인간은 감각적인 경험세계가 제공하는 판단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진리의 세계인 이데아의 세계를 직관할 수 있는 이성적인 사유능력을 획득해야 한다.
담론의 기술은 합리적인 이성의 추론과 판단을 통하여 불변하는 세계를 인식하는 기술이다. 또한 자신 속에 아직 상기되지 못한 진리를 상기해 가는 과정이고 상기를 통하여 자기의 존재방식과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는 자기이해의 기술이다. 그 가능성을 나와 대화를 나누는 타자가 제공해 준다. 타자는 나 자신이 지금까지 나와는 다른 각도에서 나를 반성하고 비판하게 하는 교사의 역할을 감당한다. 또한 나를 타자라는 또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도 감당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진리라고 믿었던 인식의 내용이 허구일 수 있다는 자기부정을 가능하게 하고, 또 다른 세계에 대한 개방적인 사유를 보장한다.

3.

플라톤에 있어서 변증법은 자기 속에 잊혀진 진리를 찾아가는, 허위의식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 활동이다. 그리고 변증법은 인간이 자기가 확신하고 있는 지식의 허구성을 비판하게 하며, 항상 동일한 기준으로 대상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기준인 이데아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를 인식하는, 진리에 대하여 영원히 식지 않는 열정이 바로 ‘에로스’이다. ‘에로스’가 진리를 갈망하며 이성적인 사유를 통하여 영원한 진리에 도달하려는 진리에 대한 열정이라면, 풍요와 빈곤, 앎과 무지와의 관계 속에서 잊혀진 본래적인 자아를 찾아가는 방법이 에로스를 통하여 승화된 담론이다.
담론은 담화의 두 주체가 서로의 생각을 교환한다는 의미에서 이미 변증법적이다. 담론은 한 사람의 주장을 다른 사람이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의 잘못 된 생각들을 수정해 가며 하나의 합의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담론을 통하여 화자는 자기가 개진했던 주장을 스스로 부정하고 제 삼의 합의를 도출하여 새로운 생각을 이끌어 내게 된다.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한 전제가 바로 타자와 세계를 향하여 자기를 여는 개방성이다. 플라톤 변증법의 성립 조건을 가다머는 “경험의 본질 속에 놓여 있는 개방성”에서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플라톤의 담론 변증법은 현상적인 나 속에서 경험적인 나 이전의 선험적인 나를 발견하는 것이며, 너 속에서 잊혀진 이데아의 원형을 발견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나 속의 너, 너 속의 나를 발견함으로써 나 속에 내재한 본래적인 나의 이념을 찾아내며, 너 속에서 미쳐 깨닫지 못했던 나의 삶의 진리들을 자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담론은 두 사람이 자신들의 의견을 단순히 개진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경험을 통하여 얻은 지식들을 부정하며 이러한 부정을 바탕으로 최상의 긍정을 찾아내는 구체적인 자기변화의 운동이다. 이처럼 플라톤의 변증법은 참다운 자아를 발견하기 위하여 자기부정의 원형을 확보함으로써 가장 이상적인 진리의 모형과 이에 걸맞는 인간의 모습을 정립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다.
이렇게 볼 때 플라톤의 담화 변증법은 바로 언어이해를 통한 인간의 자기이해의 기술이다. 자기 이해의 기술은 담론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상기해 가는 자기발견의 기술이다. 이 자기발견의 기술을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으로 수용한다.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을 자신에 대한 친숙성과 타자에 대한 생소성 사이를 헤치면서 진리를 찾아내는 방법이고 “규정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규정된 것으로의 이행”이며 “문법적이고 심리적인 해석의 관계에서” 전체 텍스트의 이념을 해석해 내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렇게 볼 때 해석은 자기가 알고 있는 이해된 사유의 내용과 알지 못하는 새로운 것에 대한 선이해의 작용이다. 해석되어야 할 담화 역시 이해에 선행하는 선이해의 정확성을 검토하며 동시에 선이해를 수정하면서 이해의 영역을 확장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4.

플라톤에 필적하는, 또 하나의 그리스 철학의 사상적 주류는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형성된다. 플라톤은 이념계와 현상계를 구분하여 참된 진리의 세계는 현상계를 초월한 이념의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이념세계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이데아 이론을 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참된 진리로서의 이데아는 이념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세계 속에서 존재한다. 과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세계를 분석하여 구체적인 자연현상에서 참된 실재를 찾았으며 탐구의 대상과 진리의 주체는 인간이며 동시에 인간이 그 속에서 살아가는 자연일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상의 근거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논리학을 정립하였으며 세계의 근거를 이해하기 위한 학문으로서 형이상학을 탐구하였다. 또한 그는 플라톤의 변증법에 대응할 수 있는 수사학의 이론을 정립하였다. 오늘날 철학이 수사학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올바른 언어 사용기술이 올바른 철학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신념에서 언어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였고 텍스트와 자연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해석에 관한 기술을 남겼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해석은 논리학의 기초로서 진술에 관계하며 Text의 표현과 이해의 행위를 동시에 포함한다. 진술과 표현, 그리고 이해의 관점에서 텍스트 해석을 시도하는 그의 해석술의 목표는 “말하여진 바의 것에 대한 의미해석”으로서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부터 분리하여 확인할 수 있는 이해의 기술을 정립하는 것이다. 진리는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없는 것을 없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의미를 해석하며 해석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때 성립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있는 것에 대한 이해의 기술이 바로 진리론이었다.
이해의 기술에 따라서 그는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원리로서 ‘질료형상설’을 주장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는 지금 있는 상태로의 현실태와 앞으로 되어야 할 가능성으로서의 가능태로 구성된다. 현실성과 가능성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인간은 시간성 속에서 자기 존재를 규정하고 되어야 할 자기존재를 이해하고 만들어 간다. 따라서 ‘지금 그리고 여기’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는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가능적인 이중적인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이중적인 존재방식에 대한 이해가 이념과 현실, 현재와 미래,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종합적 현존하는 하나의 대상에 대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자들의 존재방식을 이러한 관점에 따라서 존재의 ‘4가지의 원인설’로 구체적으로 체계화한다.
모든 존재자는 구체적인 존재의 실질적인 내용을 규정하는 질료인과 이 질료에 작용을 가하는 작용인, 그리고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운동인과 운동의 최종목표인 목적인으로 구성된다. 존재를 분석하는 4가지 방식으로 존재자의 존재방식을 해명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질료로부터 순수형상에로 이르는 존재계의 체계를 정립한다. 이렇게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해석의 대상은 존재하는 구체적인 존재자였고 해석의 목표는 존재자의 존재방식의 해명이었다. 따라서 그의 해석술은 단순히 자연과 인간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기술이 아니라 이들을 해석하는 해석의 틀을 만들고 이 해석의 틀에 따라서 존재자를 구체적으로 재구성하는 실천적인 해석학의 성격을 띤다. 이렇게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학적인 관점은 자신의 신념체계를 독단적으로 정립해 가는 폐쇄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서 사실세계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그 자에의 의미를 부여하려는 개방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가는 것이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플라톤이 체계화한 이데아의 이념과 자기이해의 변증법적 사유방식은 그 이후 플로티누스를 거쳐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를 정점으로 한 교부철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와는 달리 현실분석을 통하여 인간존재를 해명하려고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현실 중심적인 사유의 가능성을 제시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쳐 그 이후 스콜라철학이 부흥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전체 본성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수용하여 “실존하는 능동성”의 존재로 이해하여 신과 인간의 관계를 재조명하는 자신의 신학체계를 정립하게 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학파와 교부철학, 그리고 스콜라철학의 인간과 자연, 그리고 신에 대한 해석의 기술은 중세 후기 마르틴 루터로 이어지면서 성경중심의 해석 원리를 정립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으며 아울러 슐라이어마허로 이어지는 근대 독일정신이 태동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게 된다.

Ⅲ. 그리스 인문정신에서 성서해석학으로

플라톤의 이데아 해석에 관한 관점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체계에 관한 입장은 그 후 스토아학파에 전승되면서 좀 더 구체적인 해석학적인 성격을 제시하게 된다. 스토아학파는 해석되어야 할 텍스트를 설정하고, 설정된 텍스트를 단어나 문학적인 의미가 함유하고 있는 비유를 통하여 해석하려고 시도한다. 스토아학파는 이 방법을 신화해석에 적용하여 신화를 인간이 자신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세계관으로 간주하고 신화를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한다. 신화를 해석할 때에 해석자는 신화를 단순히 신화로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표현된 인간의 이념과 세계관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신화 해석은 읽어야 할 텍스트(Text)로서의 신화가 표면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만을 해석하는 단조로운 작업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겉으로 드러나는 견해와는 ‘다르게’, 그리고 신화가 형식적으로 전달하려는 의도를 초월하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 내지는 ‘그 이상’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신화를 기록한 문자가 단어와 문장이 드러내는 원칙적이고 형식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면 문자 뒤에 숨겨져 있는 상징적인 의미체계는 이러한 원칙적인 의미를 넘어서 있다. 따라서 해석의 기술은 텍스트의 문맥 사이에 숨겨져 있는 컨텍스트를 읽어내는 기술을 필요로 한다. 이 기술은 신화를 창조하고 기술한 사람들의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정신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기술로서 신화 읽기의 방법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서 그들은 해석학적인 원리를 첫째, 신화적 방식에서 탈신화하는 작용으로, 둘째 종교적인 사유방식에서 세속화하는 작용으로, 그리고 셋째, 관념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방식에서 역사화하는 작용으로 수용한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서 그들은 신화 해석의 3중적인 동기를 제시한다. 그 첫 번째 동기가 비경건성에 대한 치료수단으로서 도덕적인 방법이다.
이들은 신화를 역설적으로 읽어 낸다. 즉 신화 읽기를 통하여 신화의 세계가 보여주는 파렴치한 비윤리적인 요소들을 배제하고 새로운 도덕적인 인간의 이념을 창출해 내는 것이 신화해석의 핵심적인 과제이다. 그리고 로고스의 보편적인 정신을 인정하여 이성적인 세계해석을 신화 읽기로부터 도출해내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합리적인 텍스트 해석의 동기를 신화 읽기에서 찾아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도덕적인 바탕 위에서 그들은 전통을 보존할 수 있는 공리적인 동기를 새로운 신화 읽기를 통하여 이끌어 낸다.
스토아 학파의 신화 해석 방법을 루터는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그는 성경 해석에서 비유와 은유의 위험성을 강조하여 성경을 쓰여진 그대로 이해할 것을 주장한다. 이를 위하여 그는 복잡한 해석보다는 단순한 의미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1.

마르틴 루터는 복음의 재발견을 위하여 당시 사상적인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던 스콜라 철학을 비판하였다. 그는 교부철학자들이나 스토아 철학자들에 의하여 체계화된 교리가 성경의 권위 위에 군림하며 성경의 의미를 형식화시키고 왜곡시키는 점들을 간파하고 이를 해석학적인 차원에서 비판한다. 원래의 텍스트보다 해석된 내용이 더 권위를 갖는 모순을 루터는 인정할 수 없었다. 루터에 따르면 성경 해석자는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의 의미를 재발견하기 위하여 단순히 성경으로 되돌아 갈 것을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의 해석에 의존하시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자체로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따라서 성경 해석은 인간의 이해의 기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와 은총을 통하여서만이 가능하다. 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루터는 “오직 믿음만으로, 오직 은총만으로, 오직 성경만으로”라는 모토를 내걸어 진리의 이념적인 기준을 성경에 설정하고, 성경을 올바로 읽을 수 있는 방법으로 성경자체의 내재적인 이해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는 성경을 독자적으로 읽을 수 있는 능력인 신앙과, 읽힐 수 있도록 쓰여진 성경의 관계를 먼저 해명한다. 루터의 이러한 입장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성경 해석자간에 파생하는 오해의 문제를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하여 해결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하여 존재한다. 그러나 성경을 읽기 위하여 사람들은 성경의 본래적인 목적과 의도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루터에 따르면 성경은 다른 책들과는 달리 인간에 의하여 쓰여진 책이 아니라 영감에 의하여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성경 이해를 위해서는 특별히 신에 의하여 주어지는 은총과 신을 믿을 수 있는 신앙이 필요하다. 이러한 전제들을 바탕으로 성경 해석자는 자기와 자기와의 대화, 내지는 자기와 신과의 대화를 성경을 통하여 진행하여야 하며 그 대화의 결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성경의 올바른 이해이다.
루터에 따르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의 뜻을 가장 명료하게 전달케 하기 위하여 기록한 텍스트이다. 따라서 성경해석을 위해서는 비유나 은유 등의 복잡한 인위적인 텍스트 읽기 방식과 주석 읽기를 통한 텍스트 이해방식은 피하여야 한다. 루터는 다의적인 해석의 가능성이 오히려 텍스트를 읽는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린다고 주장한다. 성경을 읽을 때 문자적인 단순한 의미해석이 성경해석의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단순한 성경 읽기가 필요한 이유는 “성경은 성경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성경의 해석 기준은 해석자가 살아가는 시대적인 상황은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자체 내에 이해될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어서 읽는 동안 저절로 이해되며 “스스로 해석”된다. 따라서 성경을 읽기 위하여 복잡한 이해의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읽을 때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성경이 이해되지 않는 이유를 루터는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세의 갖지 못했다는 사실과, 그들이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언어와 문법의 지식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고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쓰여진 진리라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하며 동시에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 또한 인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제들 위에서 루터는 성경의 정확한 해석을 위하여 저서들과 문학적인 작품들을 이해할 수 있는 해석학의 두가지 원칙인 “해석학적인 능력의 이념”과 “성서해석학의 자율성”의 이념을 도출해 낸다.
해석학적인 능력의 이념에서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자신의 능력으로 읽고 이해하며 그리고 해석할 수 있는 천부의 힘을 가지고 있다(오직 믿음만으로의 원칙: Sola-fides Prinzip)”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면 인간의 의식 속에는 처음부터 신에 대한 본능적인 앎이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성경말씀을 읽고 해석하는 사람들은 자신 속에 이미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읽으려는 사람들은 교부들의 권위에 의존하던가 혹은 다른 성경해석의 원칙들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교부들의 해석에 의존하여 성경을 읽게 된다면 그들은 성경이 아니라 교부들의 의도를 읽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때 성경은 읽히면서 사람들에게 이해되어야 하는 본래적인 속성을 상실하게 된다.
성서해석의 자율성 원칙에서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방법으로 교회 위에 있다”는 원칙을 제시한다. 이 말은 말씀의 본문 내용이 해석자의 해석보다 우위에 있음을 의미한다. 텍스트의 의미는 해석자가 텍스트 속으로 들어가서 저서가 의도하고 있는 내용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할 때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서 자체가 가지고 있는 포괄적인 의미들을 이해할 때 비로소 파악되는 것이다. 따라서 해석자는 성경을 해석할 때에 이미 제시된 다른 성경 해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말씀의 의미들을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오직 성경만으로의 원칙: Sola-scriptura Prinzip). 이러한 원리에 따라서 루터는 성경의 해석학적인 지주를 저서의 논리적인 맥락을 명료화 할 수 있는 방법에서 찾는다.
논리의 명료성은 단어 자체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해석에서 찾아진다. 그러나 단어에 대한 지식은 단어가 가지는 의미에 대한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역사적인 이해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루터는 성경해석을 위하여 단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단어에 대한 문자적인 올바른 이해로부터 저서의 정신이 충분히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루터는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의미와, 역사적으로 변형된 새로운 의미들을 체계적으로 추적하여 “역사적이고 문법적”인 성경 이해를 시도한다. 그리고 그는 문장들의 의미를 이해하고 성경 전체가 전하고자 하는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문맥을 이해하여 궁극적으로 성경의 바른 정신을 찾아내려고 노력하였다. 이를 위하여 도입된 방법론이 해석학이다. 루터의 문자 중심적인 해석학은 그 후 일리리쿠스에 비판적으로 수용되면서 단어의 구체적인 의미와 문법적인 체계를 강조하는 해석학적인 입장을 강화하게 된다.

2.

루터의 해석학은 플라시우스 일리리쿠스의 성경의 근대적 해석론에 영향을 미친다. 일리리쿠스는 성서의 열쇠(Calvis scriptuae sacrae)에서 개신교 성경의 기술적 해석을 위하여 문법적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방법적으로 문학작품의 내적인 연관성에 대한 수사학적인 학문이해방식을 이용한다. 성경에 쓰여진 철자와 성경을 기록할 당시의 문법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성경의 보편적인 해석을 위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단순한 언어 의미의 이해나 형식적인 문법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해석의 한계에 부딪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성경해석의 오해는 성경 해석자가 성경의 문법에 대한 빈약한 지식과 오해에서 비롯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따라서 성경 해석을 위해서는 해석자의 문법 수준을 높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문장의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문법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석자는 언어가 지시하고자 하는 사태자체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여기에서 언어는 “대상이해의 수단”으로서 혹은 대상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수단”으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해석자는 문법의 이해를 통하여서만이 성경의 본래적인 정신을 찾아내고, 성경이 지시하는 구체적인 사건들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성경이 의도하고 있는 내재적인 해석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의 다양한 문장들을 비교하고 대조하는 비교의 방법을 통하여 성경해석의 방법을 확립할 수 있다.
일리리쿠스의 해석학은 단하우어의 “보편적인 해석학의 시도”를 가능하게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했던 해석의 방법처럼 단하우어의 해석학도 언어로 표현된 단어나 명제에 대한 의미해명에서 출발한다. 논리학에서 올바른 사유의 법칙과 이에 따르는 진술사이의 형식적인 관계가 중요하다면 해석학에서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나 말에 대한 이해가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해석학은 쓰여진 단어나 문장에 대한 정확한 해석, 내지는 상징되어지는 의미의 해명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 해석자는 명제의 애매성을 배제하고 사상적인 의미내용을 명료화하여 저자가 원래 의도했던 내용들에 가장 가까운 의미들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하여 해석자는 언어로 표현된 모든 진술의 의미들을 체계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단어와 문법의 정확한 이해를 시도했던 이러한 해석학적인 관점은 이후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으로 수렴되면서 현대적인 학문의 새로운 방법론으로 정립된다.

Ⅳ. 성서해석학에서 보편적 해석학으로

슐라이어마허는 플라톤의 변증법을 중심으로 위에 언급된 학자들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흡수하여 현대해석학을 정립한다. 따라서 그의 해석학은 처음부터 사유와 언어의 관계를 해명하는 변증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변증법은 “순수한 사유의 영역에서 기술적인 대화의 유도를 위한 원칙들의 진술”이다. 변증법은 쓰여진 텍스트를 사유의 내용으로 간주하고, 대화가 진행되는 상황을 텍스트 해석의 상황으로 변환시킨다. 저자와 해석자, 텍스트의 문법적인 면과 심리적인 면, 텍스트의 전체의미와 부분들의 의미들은 이러한 관계에 따라서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끊임없는 변증법적 상호작용 속에서 텍스트 전체의 의도를 구성하고 드러낸다.
슐라이어마허는 플라톤의 변증법과 앞선 선행자들의 입장을 수용하여 해석학에서 변증법적 상호작용의 중요성과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둘을 언어해석의 방법론으로 승화시켜 자신의 독특한 해석학 이론을 정립한다. “언어적인 진술의 이해와 해석”이 그의 핵심적인 과제라면 그의 해석학의 출발점은 언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이다.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해석되어야 할 텍스트도 언어이고 해석하는 수단도 언어이다. 왜냐하면 언어는 단순히 인간들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총체적인 삶이 구체화 되어 표현된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사유의 내용을 구성하고 사유는 언어를 통하여 진행된다. 언어에 대한 정확한 해석만이 텍스트를 구성하는 텍스트 자체의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텍스트를 기술한 저자의 의도를 정확히 읽을 수 있게 한다.
언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는 변증법을 언어와 사유, 부분과 전체, 그리고 저자와 해석자의 상호작용으로 환원시킨다. 그리고 해석자는 이러한 작용을 통하여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이해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변증법은 언어와 사유, 부분과 전체, 저자와 해석자 간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할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상호관계 속에서 저자보다 저자를 더 잘 이해하게 하는 해석학적 순환론으로 정립된다. 이러한 순환논리를 바탕으로 정립된 그의 텍스트 해석의 방법론을 언어로 기술된 텍스트를 방법적으로 이해하는 “이해의 기술”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
한편으로 슐라이어마허는 또한 루터의 성경해석 기술을 수용하여 일차적으로 텍스트를 텍스트 자체로서 해석하려고 시도한다. 동시에 그는 루터가 성경해석의 원리로서 거부했던 비유적인 해석방식 역시 거부한다. 왜냐하면 비유적인 해석방식은 루터가 염려했던 것처럼 “텍스트의 본래적인 의미 이외에 비 본래적인 의미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신앙과 은총에 의하여 성경을 읽으려고 했던 루터의 입장을 강하게 비판한다. 성경은 사람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진 책이다. 따라서 성경 해석을 위해서는 신앙과 은총이 아니라 문법적이고 심리적인 해석방식이 필요하다. 신앙에 따른 해석은 신앙자체를 객관화시킬 수 없는 한 항상 주관적인 해석에 그칠 수밖에 없다. 슐라이어마허는 루터식의 주관적인 해석의 편협성을 극복하고 보편적 이해의 가능성을 추구하려고 시도한다. 주관적인 이해는 항상 독단적인 오해의 가능성일 수 있다.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는 이해만이 해석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루터 비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슐라이어마허는 일리리쿠스와 단하우어의 언어에 대한 관점을 수용하여 언어의 변증법적인 활동성에 주목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변증법적 해석학을 정초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당시 사상계를 지배했던 헤겔의 운동 변증법에 반대하여 지속적으로 독일 정신에 영향을 미쳐왔던 플라톤의 담론의 변증법을 수용하고 확장한다. 헤겔의 변증법 역시 끊임없는 자기부정을 통하여 새로운 합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절대정신의 자기운동이라는 차원에서 플라톤의 자기이해의 변증법을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헤겔 철학의 핵심 근저에는 모순과 매개를 근저로 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운동의 변증법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슐라이어마허는 모순과 매개가 아니라 언어 자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하여 텍스트 이해의 지평을 넓혀 가는 관계의 변증법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렇게 볼 때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은 고대 그리스에서 발생한 인간과 세계이해의 방법을 현대의 해석학적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재구성한 학문의 방법론이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심리적인 해석의 방법은 그 후 딜타이에 의하여 비판된다. 딜타이에 따르면 심리적인 해석은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해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심리적인 현상은 삶을 구성하는 한 부분일 뿐이기 때문이다. 딜타이는 해석의 문제를 “이론적인 앎과 실천적인 삶의 확실성에 관한 관계문제”로 확장하여 이해되어야 할 텍스트의 범위를 협의의 저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의 삶과, 이 삶이 표현된 역사로 확장되게 된다.

Ⅴ. 나가는 말

자연과 인간을 이성적인 사유방식으로 탐구하였던 그리스 인문정신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이르러 인간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인간과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술인 변증법을 창안하게 된다. 그 이후 변증법은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진리이해의 방식으로서, 동시에 자기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자기이해의 기술로서 받아들여졌다.
변증법적 자기이해의 기술은 그 후 서양 사상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인간의 자기이해의 방식으로 수용된다. 그러나 루터는 인간의 자기이해 방식을 인간의 존재근거인 신과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최초의 독일적인 인문정신은 신 중심적인 인간이해에서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는 신 중심적인 텍스트 읽기를 거부하고 인간 중심적인 텍스트 읽기를 시도한다. 인간 중심적인 텍스트 읽기는 신 중심적인 텍스트 읽기와는 달리 모든 텍스트가 인간에 의하여 쓰여진, 인간을 위한 텍스트임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그는 텍스트와 텍스트 해석자의 보편적인 관계를 설정하고 이 관계에 따라서 해석의 보편성을 확보하려는 해석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텍스트가 이해되기 위하여 쓰여졌다면 그 텍스트는 처음부터 인간의 합리적인 사유방식에 의하여 동의될 수 있는 텍스트 읽기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
텍스트 읽기의 방법에 따라서 읽혀진 텍스트는 방법의 보편성과 내용의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 해석학에서 심리적인 이해는 딜타이에 의하여 비판받는다. 딜타이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총체적이고 포괄적이기 때문에 심리적인 이해만으로 인간이해는 충분하지 못하다. 오히려 인간의 이해는 총체적인 삶의 이해에서 가능하다. 이 삶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역사이다. 따라서 인간의 이해는 역사의 이해를 통하여 가능하고, 해석되어야 할 텍스트는 인간의 총체적인 삶과 역사로 확장된다.

이상에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의 사상이 중세를 거쳐 독일정신으로 정립되기까지의 과정을 해석학적인 틀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기이해도 점점 심화되며 풍부해 진다. 그 발전의 원동력이 바로 고대인들의 사유라면 현대인들은 그들의 사유를 현대적인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미래 주도적인 인간의 이념을 창출해 낸다.
독일적 사유에 있어서 미래에 대한 사유의 가능성을 구성하는 하나의 축이 합리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하는, 칸트로부터 이어지는 관념론적 전통이라면 그 이면에 또 다른 하나의 축으로서 삶의 역동성을 인정하고 변화하는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슐라이어마허, 딜타이 그리고 쉴러를 중심으로 하는 해석학과 낭만주의를 들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독일적인 정신은 그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자기와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론을 제공한다.
이렇게 볼 때 독일정신이 제시하는 사유의 방법과 내용, 그리고 이러한 독일정신에 대한 이해와 비판적인 반성은 정보화, 산업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우리의 삶을 이해하고 반성하며 정립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독일정신을 총체적으로 해명해야 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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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sammenfassung

Die hermeneutische Tradition Deutschlands bis Schleiermacher
- Vom griechischen Humanismus über Bibelexegese Luthers bis zur Universalhermeneutik

Yong-Il Kim(Keimyung Uni.)

Diese Studie verfolgt die Entwicklung der Hermeneutik von der griechischen Antike über Martin Luther bis zur Universalhermeneutik von Schleiermacher, und untersucht, wie sich die Hermeneutik als ein großes wissenschaftliches System gebildet hat. Hermeneutik als Beschreibungstechnik und ihr Inhalt enthalten das Selbstverständnis von Menschen und den Sinn des menschlichen Daseins. Platon versuchte die Dialektik als Beschreibung des Diskurses zu enfalten, und nach der dialektischen Methode die Wahrheit und den Menschen zu verstehen. Schleiermacher jedoch stellte den in Sprache ausgedrückten, zu verstehenden Text auf, und suchte auf dialektische Weise auszulegen und zu verstehen. Die Wissenschaftstheorie des späten 19. Jahrhunderts ordnet das Problem des Verstehens der Geisteswissenschaft bei Dilthey zu und stellt es der kausal erklärenden Methode in den Naturwissenschaft gegenüber.
Der erste Teil dieser Studie konzentriert zunächst auf die frühere Phase der Hermeneutik, nämlich die von griechischen Antike über die Lehre von der Auslegung der Heiligen Schrift bis zur Universalhermeneutik Schleiermachers. Martin Luther wußte im Zusammenhang mit der Interpretation der Heiligen Schrift die Verstehensweise des Menschen nur auf die Beziehung zum Gott beschränkt zu verstehen. Schleiermacher aber erweiterte diese beschränkte Hermeneutik zur Kunstlehre des Verstehens des geschriebenen oder gesprochenen Wortes überhaupt. Das anthropozentrische Textverstehen, anders als das theozentrische setzt es voraus, daß jeder Text von Menschen und für Menschen geschrieben ist.
Während Kants Philosophie und ihre idealistische Tradition das Leben aus der rationalen Seite aufzufassen suchte, so verstanden es die hermeneutische und romantische Lebensphilosophie von Schleiermacher und sein Nachfolger in seiner Vitalität und Totalität. Die neue, von Schleiermacher ausgehende Hermeneutik gilt bis heute für die wichtigste Methodologie, die den Menschen von sich aus und die je eigene Welt verstehen kann. In diesem Sinne bietet uns diese Studie eine neue Möglichkeit, um das zur Sackgasse gelaufene Leben an dem alten Denken zu adaptieren und neu gestalten zu könn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