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트라서의 대화적 현상학 연구
김성동 호서대 철학교수
1. 현상학과 상호주관성
1.1 슈트라서의 현상학
현상학의 흐름을 역사적으로 정리했던 스피겔버그(Herbert Spiegelberg)는 그의 책 {현상학 운동}의 제3판 서문에서 슈트라서(Stephan Strasser)를 "그 나름대로의 현상학자"(a phenomenologist in his own right)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스피겔버그의 서술은 슈트라서의 현상학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를 엿보게 한다. 즉 그의 철학은 현상학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의미의 현상학에 속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슈트라서 자신도 스피겔버그식의 이러한 평가를 받아들인다. 즉 자신은 전통적인 의미의 현상학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수용은 그가 현상학의 방계에 속한다는 사실을 자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현상학이야말로 전통적 의미의 현상학보다 더욱 현상학적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의 요지는 기존의 현상학은 결코 현상학의 본질을 제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 소위 주류 현상학자들이 취하는 태도를 현상학을 "법전화"(canonize)시키는 것이거나, 현상학에 대하여 "역사적인 태도" (historical attitude)를 견지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이는 물론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후설의 현상학을 자귀적으로 고수하려는 현상학자들과 스피겔버그와 같이 현상학을 역사적으로 정리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반론이다.
그러므로 슈트라서는 이제 그들에게 "현상학적 철학함의 원래적인 열정"이 무엇이었든지를 반문하고자 한다. 그것은 법전화도 역사적 정리도 아니다. "문제를 적절하게 다루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개념적인 도구를 언제나 변형시킬 수 있다는 이념 아래 문제를 원본적으로 생각하는 일"(IDP, 2)이 현상학의 가장 본질적인 정신이라고 그의 주장이다. 이런 까닭에 그는 자신의 '대화적 현상학'(Dialogal Phenomenology)이야말로 바로 이러한 현상학적 철학함의 정신과 가장 일치하는 작업이며, 이런 의미로 자신의 작업이 진정으로 현상학적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입장표명은 현상학 내부적인 논의이다. 현상학이 철학의 유일한 형태가 될 수 없는 것이기에 어떤 사람의 철학이 현상학이냐 아니냐는 사실 현상학 바깥의 입장에서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어떤 철학적 입장이 철학에 제기되는 문제에 대하여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느냐 여부가 더 중요하다. 슈트라서의 철학은 슈트라서가 주장하는 현상학의 본질이라는 점에서 볼 때 현상학적이며, 그러기에 또 현상학을 넘어서서 문제에 대한 적절한 철학적 대응이라는 일반적인 기준에서 볼 때에도 대단히 전망있는 철학이라 할 수 있다.
1.2 상호주관성의 문제
일상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고, 나의 생각과 그의 생각의 같고 다름을 구분한다. 우리는 혹 오해할 수도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러한 오해가 있다는 사실까지도 나와 그가 서로 이해하고, 오해를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없다거나 나의 생각과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처럼 일상적으로 명백한 사실이 철학적으로는, 적어도 사유하는 독립적인 주체에 기반하는 데카르트적인 철학적 전통에서는, 대단히 풀기 어려운 문제가 된다.
현상학이야말로 이렇게 일상적으로 명백한 사태를 철학적으로 복잡한 사태로 만들고만 대표적인 입장이다.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transcendental phenomenology)은 내가 보고 있는 빨간 색이 남이 보고 있는 빨간 색과 동일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명증성을 확보하기 위해 수행하는 현상학적 환원이 이루어진 다음에 있게 되는 의식내재적인 현상 중에는, 내가 보고 있는 것과 비교할, 남이 보고 있는 것이 배제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후설이 지적하고 있는 대로 "우리는 내 속에서 그리고 나 자신에 의지해서 의미와 타당성을 갖는 세계 이외의 어떠한 다른 세계 속에도 들어가 살고 경험하고 생각하고 평가하고 행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 선험적 현상학은 독아론(solipsism)이다. 그러나 이러한 독아론은 후설의 현상학만의 특징이라기보다는 데카르트적인 주관주의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예를 들어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private language)에 대한 논의에서도 우리는 나만의 세계를 나만의 언어를 통하여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사적인 언어의 옹호자들이 곧 사유하는 독립적인 주체라는 데카르트적인 명제의 옹호자들이며, 결국 그들의 세계는 독아론적인 세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독아론적인 사유방식이 궁극적으로 좌초하게 되는 곳은 이른바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라는 문제에서이다. 슈트라서의 말대로 독아론적인 철학은 자아와 타아에 공유된 상호주관을 해명해 내지 못함으로써 "인간실존의 사회적 차원"(the social dimension of human existence)을 설명하는 데 실패하게 된다.(IDP, xii) 일상에서 확인되는 상호주관적인 세계가 특정한 철학적 패러다임으로 해명되지 못한다면 그 패러다임은 수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상호주관성의 문제는 근세적인 사고방식을 특징짓고 있었던 데카르트적인 패러다임 즉 사유하는 독립적인 주관이라는 패러다임의 수정을 요청하고 있다. 슈트라서가 현상학을 개혁함으로써 답하고자 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2. 선험적 현상학과 대화적 현상학
2.1 선험적 현상학에 대한 이의제기
상호주관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선험적 현상학과 같은 데카르트적인 철학이 안는 문제점에 대하여 슈트라서만이 대안적 입장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슈트라서는 쉘러(Max Scheler), 라이나하(Adolf Reinach), 샤프(Wilhelm Schapp),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뢰비트(Karl Lōwith), 사르트르(Jean-Paul Sartre),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리쾨르(Paul Ricoeur) 등이 이미 데카르트적인 전통에서의 이러한 어려움을 인지하고 새로운 방향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특히 툴러망(Rene Toulement), 슈츠(Alfred Schutz), 토이니센(Michael Theunissen), 비어링(R. F. Beerling) 등은 후설철학 자체를 반성함으로써 자신의 작업의 선례가 되었다고 열거하고 있다.(IDP, xi)
그렇지만 슈트라서에게는 후설의 정신적 계승자로서 이러한 논의를 시도할 특별한 권리가 있다. 그것은 그가 후설전집의 제1권인 {성찰}의 편집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성찰}에서는 다른 사람이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지적하기도 전에 후설 스스로가 이미 선험적 현상학과 상호주관성 문제와의 심각한 대립성을 지적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현상학적 해결을 꾀하고 있다. 실제로 후설의 이 논의야말로 "상호주관성"이라는 주제가 현대 철학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첫 번째 논의이자, 이후의 모든 상호주관성 논의의 실마리가 된 논의이다.
슈트라서에 따르면 "{성찰}의 다섯번째 성찰의 서두에서, 후설은 그의 특징적인 냉혹한 정직성으로써, 그의 선험적 관념론은 지향적 분석의 방법으로 상호주관성의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에 따라 성립하거나 붕괴한다고 선언하고 있다."(IDP, xii) 그런데 스피겔버그의 지적대로, 여기에서의 후설의 상호주관성에 대한 해명에 만족해 하는 현상학자는 거의 없다. 그렇다면 후설의 선험적 관념론은 이제 붕괴된 셈이다. 이러한 붕괴에 즈음하여 이제 남아있는 일은 후설의 패러다임을 수정하는 일이다. 슈트라서는 이러한 수정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정은 여전히 "후설의 정신을 쫓는" 하지만 후설의 "법전"에는 얽매이지 않는 "현상학의 근본적인 명제들에 대한 비판적 개정"(a critical revision of the fundamental theses of transcendental phenomenology)이다. 그의 개정은 그가 현상학의 근본계기라고 분류한 네 계기에 대한 재평가로부터 시작한다.
2.2 선험적 현상학에 대한 재검토
첫째로, 슈트라서는 "후설 현상학의 환원적 성격은 직관적 성격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IDP, 8)라고 지적한다. 현상학은 자신이 직관(Anschauung)의 철학이라고 주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오히려 환원(Reduktion)을 더 앞세우고 있다. 후설은 '모든 원리 중의 원리'로서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직관이 바로 인식의 권리원천'이라고 선언하였으며, 이같은 선언은 갈릴레이로 상징되는 수학적 과학의 인식론 즉 실제적 대상은 지각된 자료로부터 출발하여 수학적 조작에 의해 비로소 밝혀진다는 입장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후설에게서 이같은 직관은 피히테와 헤겔에서처럼 그저 출발점으로서의 역할을 가질 뿐이며 오히려 환원적 반성이 더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이에 따라 직관내용은 괄호쳐지고 상대화되고 만다.
둘째로, 환원의 방법론은 결코 제거될 수 없는 내적 긴장을 포함하고 있다고 슈트라서는 본다. 후설은 우리가 선험적-현상학적 환원을 완전히 수행하면 세계를 쳐다보기는 하지만 관심없이 쳐다보는 무관심한 관찰자(uninteressierter Zuschauer)의 입장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데, 이는 우리 모두의 지각경험과 맞지 않으며, 관심이 없다면 우리는 실제로 어떤 것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무관심한 관찰자라는 말은 내적 상충을 가지는 표현이 된다. 슈트라서는 이러한 후설의 환원적 방법론의 결함은 "그의 [환원적] 변증법이 직관을 따라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IDP, 11)
셋째로, 슈트라서는 후설의 의식에 대한 규정이 때론 지향성으로 때론 폐쇄성으로 이루어짐으로써 후설의 의식규정은 본질적인 애매성을 가지게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IDP, 13) 지향성(Intentionalität)이란 무엇에로-향해-있음으로 즉 무엇을 목표로 함으로 특징지워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은 폐쇄된 내재, 즉 단자적 내부성으로 서술되고 있다. 후설에서 의식은 언제나 무엇에 대한 의식(Bewußtsein von etwas)이며, 따라서 그는 이같은 체험의 특성을 "무엇에 대해 의식해 있음 즉 지향성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은 "자기폐쇄적인 존재연관, 그 안으로 아무 것도 들어갈 수 없고 그것으로부터 아무 것도 빠져나올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연관"으로 또한 간주된다. 이러한 단자성은 바로 후설의 데카르트적인 특징이 극적으로 부각되는 지점이라고 하겠다.
네째로 의식규정의 본질적인 애매성은 공간적인 측면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측면에서도 또한 그러하다고 슈트라서는 지적한다. 발생적 철학으로서 현상학은 의식과 의식세계의 무엇으로-되어-감(coming-to-be)을 서술하고자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현상학은 모든 의식 내용의 불변성과 의식구조의 선천적 성격을 고집하고 있다. 후설의 현상학에서는 모든 체험이 지각가능하며, 일단 의식 내에 들어온 것은 비록 다른 방식으로라도 언제나 의식 내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슈트라서는 어린이의 의식과 어른의 의식을 비교하면서 지각의 가능성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또 어린이의 의식의 생산적 해체, 즉 구조적 변경없이는 어른의 의식이 성립할 수 없다는 점도 또한 지적한다.(IDP, 17)
선험적 현상학의 이러한 상호간섭적인 계기들을 어떻게 변경시킴으로써 현상학의 아킬레스건이 되었던 상호주관성의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는 새로운 현상학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슈트라서는 여기서 데카르트적인 두 편견을 배제할 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현상학이 자아론(egology)으로 시작할 수 없다는 사실과 둘째로 반성(reflection)이 주된 방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IDP, 19) 그렇다면 그의 대안은 무엇인가? '사유하는 자아'라는 데카르트적인 인간상에 대립하여 그가 제시하는 것\은 '대화하는 타자'라는 대안이다.
결국 그의 제안은 현상학이 독백(monologue)적인 사유 양식을 포기하고 대화(dialogue)적인 사유양식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자아를 의식할 때 항상 자아보다 오래된(older than I) 존재로서 우리에게 말을 먼저 걸어주었던 이로서 드러나는 타자라는 현상학적 소여를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슈트라서는 이같은 입장 즉 타자를 경험의 가장 원본적인 소여(the other as the most original datum of experience)(IDP, 22)로 받아들이는 비독백적인, 대화적인 입장의 현상학 즉 '대화적 현상학'이 상호주관성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전망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주장한다.
2.3 대화적 현상학에로의 전환
일단 이러한 새로운 비데카르트적인 접근방식 즉 '선존재하는 타자와의 대화'라는 통로를 채택하면, 현상학의 근본계기들은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나타난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처럼, 칸트가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처럼, 슈트라서의 대화하는 타자에로의 전환도 전통적 현상학과 그 사유방식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하나의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우선 직관에 대한 환원이 중지될 뿐만 아니라, 직관의 주된 대상도 자연에서부터 타자에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직관의 주체 또한 바뀌게 될 것인데, 이제 직관은 '나'만의 직관일 수 없으며 타자와 더불어서 하는 직관이 될 것이다. 또 이러한 '우리'의 직관내용은, 출발점에 불과하며 선험적 환원을 통하여 부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인식의 전체과정에서 권리원천이 될 것이다.
변증법적인 환원과 관련해서도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자아와 타자가 관계를 맺는다면, 이같은 관계의 결과로 자아와 타자는 모두 변화를 겪게 될 것이며, 나아가 그들의 주변세계 또한 변화시킬 것이다. 변증법적 환원은 자아세계로만의 침잠이라는 축소지향적인 환원이 아니라 공유세계의 확장이라는 확대지향적인 변경을 가질 것이다.
타자와의 대화를 통하여 변화하는 의식이라는 제대로 된 직관에 근거하여 의식의 지향성도 이제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의식은 끊임없는 변화과정에 놓여지게 될 것이며, 지향성과 관련하여 이제 자아는 타자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관계를 맺을 것이며, 자아의 폐쇄성은 소멸될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지향작용은 취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내가 나로 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경험, 지각, 이해의 과정이 된다.
이제까지 보아진 대로 우리의 의식이 타자의 의식에 의해 깨쳐지는 것이고, 또 자족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과정의 해명은 글자그대로 변증법적인 대화를 통하여 생성되고 변화되고 해체되는 의식에 대한 만족스런 발생적 견해로서 또한 제시될 수 있다.(IDP, 20-21)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시야의 새로움은 후설의 현상학과 대비될 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후설의 현상학이 근원하고 있는 데카르트적인 사유 일반과 대비된다. 이런 까닭에 슈트라서는 대화적 현상학을 통하여 선험적 현상학의 변경을 넘어서서 전통적 사유방식 전체의 변경을 촉구하고 있다. 그가 제안하고 있는, 그래서 우리가 채택을 고려해야 할, 새로운 사유방식의 전모는 우리 경험의 가장 원본적인 내용인 타자에 대한 슈트라서의 해명을 뒤쫓아 감으로써 더 자세히 파악할 수 있다.
3. 절대적인 주체로부터 상호적인 주체에로
3.1 모두에게 하나인 세계와 많은 세계
슈트라서는 타자를 경험의 가장 원본적인 소여로 받아들임으로써, 선험적 현상학을 괴롭혀왔던 상호주관성의 문제를 단숨에 제거해 버린다. 데카르트적인 철학에서는, 즉 독립적인 사유하는 주체를 원본적인 소여로 하는 철학은, 그러한 자아의 세계에 타자가 어떻게 등장하게 되는가를 정당화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어 왔다. 슈트라서가 출발점으로 삼은 후설의 논의가 이러한 어려움의 전형적인 경우이다.
슈트라서는 '어떻게 타자가 자아의 세계에 들어오게 되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직접 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물음의 전제, 즉 타자는 자아의 세계의 바깥에 있다는 전제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슈트라서는 이 물음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타자는 애초부터 자아의 세계 내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실로 "하나의 자아가 갑자기 자신의 세계 가운데서 타자를 의식한다는 … 서술은 현상학적이라고 볼 수 없다"(IDP, 52) 그러한 서술이 가리키고 있는 상황은 어떤 실제적 경험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나의 세계는 언젠지 모르게 시작되었으며, 타자의 흔적을 배제시킨 나의 세계는 그려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의 세계는 결코 나의 창작물이 아니라 인류와 나의 공동창작물이기 때문이다.
나의 세계와 더불어서 인류의 세계가 시작되고 끝나지 않는다. 나의 세계는 바다위의 한 파도처럼, 냇물위의 한 포말처럼 다른 여러 세계들과 더불어 그리고 어떤 전체로서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진다. 타자가 이미 자아에 앞서서 자아의 세계 내에 들어와 있다는 이러한 명제의 의미는 이른바 자아나 타자가 등장하는 "세계"라는 이 말의 의미를 좀 더 구체화함으로써 보다 명백해질 수 있다.
우리는 쉽게 각자가 각자의 세계를 가진다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들이 공통되는가라는 질문에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선험적 현상학에 따른다면 이 각각의 세계들은 모두 하나의 세계로 귀착된다. 하지만 슈트라서의 대화적 현상학은 이 각각의 세계들을 각각의 세계로 남아있게 한다. 대화적 현상학은 하지만 이 각각의 세계들이 다른 종류의 한 세계를 지평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자면, 각각의 자아가 가지는 세계는 두 차원의 것이 있는데, 그 하나는 자아에게 드러난 것의 존재 전체로서의 세계로서, 이러한 세계는 주관이 여럿인 만큼 세계도 여럿이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개개의 세계가 드러나는 자아까지를 포함하여 글자 그대로 모든 존재를 포괄하는 보편적 지평(universal horizon)으로서의 세계로서, 이러한 세계는 모든 주관들에게 보편적이므로 하나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대화적 현상학의 성격을 보다 잘 시사해 주는 것은 전자의 세계 즉 개개인들이 소유하는 세계는 개개인들의 주관을 제외한 주관의 대상물들의 세계로서 대상화되는 세계이나, 후자의 세계 즉 개개인과 그 대상들을 모든 포함하는 세계는 전자의 세계가 가능하게 하는 지평으로서 대상화될 수 없는 세계(IDP, 37-38)라는 점이다.
이러한 지평으로서의 세계 내에 나와 타자가 같이 놓여져 있으며, 이러한 지평으로서의 세계는 나와 타자, 즉 "모두를 하나의 공통의 띠로서 함께 묶고 있다."(IDP, 52) 그러므로 타자는 이러한 세계지평에로의 공속성에 의해 우리의 세계에, 그리하여 나의 세계에 주어져 있으며, 이러한 타자는 개별적 세계에서의 타자와는 그 종류가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세계의 이러한 타자는 나의 대상화를 넘어서 있는 것이며, 많은 세계의 타자의 대상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근원적인 타자이다.
3.2 자아와 타자의 상호성
나아가 슈트라서는, 타자는 나에게 주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주어진 타자를 내가 지향한다는 점을 또한 아울러 지적한다. 왜냐하면 나는 수많은 세계중의 한 세계를 가진 유한한 존재(a fintite being)로서 "나의 제한된 존재를 확장하려고 한다면 타자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IDP, 53)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은 타자에로의 정향이다." 타자는 나아닌 존재,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가진 존재,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을 아는 존재로서 유한한 나의 부족함을 보충해 줄 수 있다. 이런 의미로 나는 타자에 의존적인 존재이며 타자는 나의 보충적 존재이다.
이러한 자아보충적인 타자에로의 나의 지향은, 그 지향된 것이 나에게 현전(presence)할 때, 충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지향의 대상인 타자는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나 이전에 이미 있는 것으로서 나와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나의 지향에 대하여 저항하게 마련이다. "우리의 경험에 따르면, 모든 구체적인 활동은 그 활동에 저항하는 어떤 것을 요구한다."(IDP, 55)
바로 이 점이 대화적 현상학을 선험적 현상학과 특징적으로 구분하게 하는 또다른 지점이다. 선험적 현상학은 타자의 이러한 저항을 결코 용납하지 못한다. 지향하는 의식은 지향받는 대상에 대하여 전적으로 원심적(centrifugal)인 것으로 간주된다. 후설의 이러한 이념을 계승했던 "사르트르의 "쳐다봄"(look)의 변증법은 지향성의 원심적 성격에 따르는 그같은 교설의 궁극적인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IDP, 55) 선험적 현상학에는 절대적 원심성으로서의 가학증(sadism)이나 구심성으로 위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결단코 원심적인 피학증(masochism)이 있을 수는 있지만 참된 구심성(centripetality)은 없다. 그러므로 "선험적 현상학은 선험적 주체와 구성되는 객체를 도입함으로써 주체와 객체 간의 거리를 꾸준히 증가시켜온 서양철학의 경향을 극단으로 몰고갔다고 우리는 말해야만 한다."(IDP, 55)
슈트라서는 나로부터 비롯되지 않으며 나보다 오래된 타자의 나의 지향에 대한 저항 때문에 우리의 지향에 따른 현전에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원칙이 적용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첫째로, 하나의 존재가 나에게 현전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것에 현전할 수 없다. 둘째로, 이러한 존재론적 규칙에 상응하는 하나의 양상적 규칙으로서, 내가 하나의 존재에 현전하는 방식은 보편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이같은 존재가 나에게 현전하는 방식에 의하여 조율된다. 셋째로, 마찬가지로 상응하는 동태적 규칙으로서, 내가 하나의 실제적 존재를 "다루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이같은 존재가 나를 "다루는" 방식에 의하여 조율된다. 슈트라서는 부버의 용어를 쫓아 이러한 규칙들에 "상호성의 원리"(the principle of reciprocity)라는 이름을 붙인다. 물론 이러한 상호성이 대칭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또 이러한 상호성이 인간실존과 인간실존 사이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이제 슈트라서는 데카르트적인 사유에서 특권적인 위치를 누려왔던 절대적 원심성으로서의 주체의 의미를 변경할 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절대적 주체와 이같은 주체에 근거하여 존재하는 객체라는 생각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같은 생각은 자신에 대한 그리고 다른 실제에 대한 우리의 모든 경험과 모순된다. 우리는 무엇이든 순수한 능동성이나 전적으로 비저항적인 수동성이라는 경험을 가지지 못한다. 구체적인 존재들과 나의 존재가 역동적인 관계에 있는 한, 그같은 관계는 능동적-수동적 상호작용(an active-passive interplay)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같은 상호작용은 때때로 주체와 객체의 역할이 서로 바뀌어질 수 있는 그러한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상대적인" 주체(the relative subject)란 특정한 관점에서는 우선 능동적이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객체가 될 수 있는 그러한 주체이며, "상대적인" 객체(the relative object)란 특정한 관계에서는 우선 수동적이기는 하지만 또한 상대적으로 주체가 될 수 있는 그러한 객체이다."(IDP, 57) 결국 슈트라서에서 자아든 타아든 그것은 모두 원심적이자 동시에 구심적인, 상대적으로 주체이면서 상대적으로 객체인 그러한 존재가 된다.
3.3 오래된 타자와 유한한 자아의 대화적 구성
그러나 지향에서 이처럼 상호적이라는 것이 타자와 자아의 동등성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에게 내가 있듯이 그렇게 사실적으로 주어져 있고 내가 그자를 지향하듯이 그자도 나를 지향하는 즉 상호적으로 지향하는 타자에 대하여 슈트라서는 그것이 대상화될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대상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근거로서 나에 앞서며 나를 있게 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당신'은 대상과 같은 방식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당신'이 완전히 당신일 수 있는 만큼 '당신'은 대상화하는 경험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당신'은 '믿어지는 것'이다."(IDP, 61) 물론 이때 '믿는다'는 말은 종교적인 의미에서 사용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객관화하는 지식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그것의 실재를 긍정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되는 것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당신'는 모든 의심을 넘어서는 것이며, 나의 모든 대상화하는 사유가 근거하는 일차적인 억견(Urdoxa)이고, '당신'과의 관계로써 나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가 유의미함을 알게 되고, '당신'에로의 향함이 나의 지향성을 일깨우는 가장 근본적인 지향이 된다. "간단히 말해서, 바로 '당신'만이 나를 '나'로 만든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항상 '나'보다 오래된 존재라고 말하는 이유이다."(IDP, 61) 그러므로 슈트라서에게는 "너는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 주는 자이다."(IDP, 62)
그러므로 이제 나의 의식(cogito)은 자율적으로 모든 것을 구성하는 절대적인 주권을 가질 수 없다. 어디까지나 "의식은 무엇을 필요로하는 의식(the needy consciousness)이다." 이처럼 무엇을 필요로 하는 의식인 나의 의식은 무한한 의식이 아니라 유한한 의식일 수 밖에 없다.
슈트라서는 이러한 의식의 유한성을 세 계기로서 설명하고 있다.(IDP, 63) 첫째로, 이같은 유한성은 의식들이 보편적 지평으로서의 세계를 가진다는 데서 나타난다. 이러한 지평 안에서 자아의 개별적인 존재는 결코 보편적인 존재가 될 수가 없다. 개별적 존재는 무수한 존재들 중의 하나로서 결코 절대적인 보편적 지평은 초월할 수 없으며 그러한 지평 내의 유한자로서 남게 된다. 둘째로, 코기토의 유한성은 자신의 존재를 타자에 의존하고 있음에 근거한다. 사유는 타자에 대한 반응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타자의 사유가 행해지고 나의 사유를 촉발하기 전까지 나의 사유는 가능하지도 의미있지도 않다. 셋째로, 나의 코기토는 필연적으로 세계를 "당신"과 더불어서만 계속 구성해 가기 때문에 유한하다. 보다 조심스럽게 표현한다면, 이는 나는 나의 생각을 "당신"의 생각에 조율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렇지 않다면, 나와 당신은 결코 "우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공동적인 구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존재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거나, 무의미한 질료에 유의미한 형상을 가하는 것일 수 없다. "그 반대로 구성한다는 것은 좀 더 명확한 의미를 계속적으로 부여하는 과정이다."(IDP, 66) 그러므로 구성한다는 것, 즉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절대적인 의미로 즉 절대적인 무(無)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로 즉 기존의 의미를 개선하는 것(a promotion of meaning)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절대적인 의미구성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자아에 대한 반성에서도 사실 우리는 무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내가 나 자신을 생각할 때, 나는 내 자신의 영상을 모든 종류의 인상, 표상, 사유들을 종합하는 형태로 형성하고자 한다. 게다가 나는 이러한 온갖 종류의 표상과 사유들 속에서 나를 나의 신체, 주변세계, 동료들 내의 인격적이고 사회적인 자아로 파악한다." 나는 나를 이미 주어진 의미들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이전의 의미 부여 과정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부터만 나를 바라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이전의 의미 부여 과정에서 타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타자중심적인 사전적인 의미부여과정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살펴볼 것이다.
후설이 '자아'의 고유영역을 확보하고 그곳에서 '타자'를 구성적으로 대립시킴으로써 '세계'를 구성해 내었듯이, 슈트라서도 이제 '타자'를 확보하고 그에 상대적인 '자아'를 대립시킴으로써 '세계'를 구성해 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후설과 슈트라서가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지시적인 의미는 극단적으로 대립된다. 그러한 대립은 궁극적으로는 데카르트적인 사유전통의 수용이나 거부에, 다시 말해 내재적이고 반성적인 오래된 철학적 전통의 계승이냐 타파냐에 달려 있다. 슈트라서의 표현대로, "대화적 전망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하여 지불해야만 하는 댓가는 깊이 배여있는 사유습관의 포기이다."(IDP, 62) 데카르트 이후 근대적 사유습관에 깊이 뿌리 박힌 우리의 사유방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러한 전환에 슈트라서는 "현상학의 탈신화화"(demythologization of phenomenonology)(IDP, 67)라는 표현을 붙혔다. 여기서 '신화'란, 다른 자아는 결코 제대로 알 수 없는, 어떤 자아의 신비한 내부에서의 일을 가리킨다. 선험적 현상학은 바로 이러한 곳을 자신의 작업영역으로 삼았다. 그러나 대화적 현상학은 이제 더 이상 이러한 신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초점을 우리의 눈 앞에 드러나는 것, 육체적이고 정신적이며,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우리 삶의 밝은 햇빛 속으로 돌려야 한다. 그러므로 대화적 현상학은 또한 생리학, 심리학, 사회학, 인간학, 그리고 역사학과의 공동작업을 또한 제안한다.
물론 이러한 탈신화화가 탈신비화(demystification)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셀(Gabriel Marcel)에서 일반화된 신비의 의미, 즉 "우리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진리가 아니라, 우리를 포함하는 진리"로서의 신비는 오히려 대화적 현상학의 요점 자체이다. 그러므로 슈트라서는 이렇게 말한다. 대화적 현상학의 "우월성은 아마도 그같은 신비가 더 이상 세계 뒤편의 세계에 있지 않다는 점, 다시 말해 실제적인 신체들, 감각자료들, 그리고 사회적-역사적 과정들 뒤에 숨지않는다는 점에 있다. 신비는 우리들 중에, 우리 가까이에,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를 통하여 일어난다. 자신이 보는 것을 믿고, 자신이 믿는 것을 반성하는 자는 신비 또한 본다. 반면에, 자신이 보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고, 이론과 체계와 모형을 믿는자, 그리고 자신의 사유가 만든 것만을 반성하는 자는 결코 신비와 조우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만나는 것들은 무의미한 것이다."(IDP, 68)
4. 의식과 자유와 믿음에 대한 새이해
슈트라서는 우리의 존재론적인 상황에 대한 오래된 인식의 변경을 되풀이하여 요구하고 있지만, 실증주의적인 세례를 받은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변경의 근거를 먼저 경험적으로 확인하기를 원한다. 타자가 자아보다 언제나 오래된 존재이며 보편적인 지평 내에서 이미 자아와 함께 하고 그런 까닭에 자아와 함께 삶을 구성해 가고 있다는 슈트라서의 해석에 대하여, 비록 간접적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경험적인 논의가 가능하다면, 기존의 전통적인 존재론적 입장을 변경할 것을 결심하기가 보다 용이할 것이다. 슈트라서는 이처럼 존재론적 위상과 경험적 현실이 만나는 애매한 지점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과거 신비주의적인 대화철학의 한계점을 현상학적으로 보완하고자 한다.
물론 이렇게 경험적으로 정당화되는 명제들을 철학적인 논의에 수용하는 일에 대하여 반대하는 견해도 있다. 경험적인 방법에 의해 정당화된 것이 철학적 논의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라는 입장은, 그것이 이른바 19세기의 "심리주의"(psychologism) 즉 심리학이 철학과 논리학을 포함하는 모든 과학 전체를 기초하는 근본적인 학문이라는 등의 견해들을 거부한다는 의미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심리학적 연구의 결과를 철학적 반성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결코 안된다는 의미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 현대철학사에서 많은 철학자들이, 예컨대, 쉘러, 메를로-퐁티, 리쾨르, 부이텐디크, 그리고 플레스너 등이 심리학적 통찰을 철학적 반성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다른 한편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칸트, 그리고 후설이 그 시대의 경험적 통찰을 또한 철학적 반성의 대상으로 삼았다.(IDP, 75- 76)
4.1 의식의 자람
슈트라서는 발달심리학자들의 연구성과를 학문공동체적인 입장에서 인용하면서 의식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여러 발달심리학자들의 영아와 유아 그리고 청소년에 대한 심리적 관찰결과를 인용하면서,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 명제를 도출하고 있다.
1. 의식은 기능과 행위와 지향의 "실체적" 주체가 아니라 자아의 존재 방식이다.
2.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존재방식은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것으로서,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할 수 있다.
3. 자아는 명백한 자기에 대한 의식없이도 의식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경우 자아는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4. 자아는 대상에 지향적으로 정향하지 않고서도 대상에 대해 의식할 수 있다.
5. 비지향적이고, 비대상화하는 의식이 발생적 관점에서 볼 때 의식의 가장 오래된 형태이다.
이러한 슈트라서의 명제들의 경험적 의미들은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세계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어떻게 그러한 관계를 변화시켜 나가는지에 대한 서술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태어난 지 2-3개월된 어린아이가 최초로 알아채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물어봄으로써 우리는 의식의 출발점, 의식의 가장 오래된 형태를 물을 수 있다. 어린아이가 최초로 의식하는 것은, 성인인 우리와는 전혀 다르게, 어떤 자연적 대상도 어떤 문화적 대상도 아니다. 그러한 것들에 앞서 파악하는 것은 바로 '어머니'이다. 안락함과 기쁨과 만족과 안전을 주는 사람으로서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최초로 등장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같은 어머니가 어린 아이에게 현전하는 방식이다. 슈트라서는 이 시기의 현전의 방식을 '느낀다'(feel)라는 말로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느낌은 성인인 우리의 느낌과는 다른 어떤 것이다. "어린 아이는 자신의 상태를 어머니와의 접촉 중에서 또는 접촉을 통해서 느낀다."(IDP, 83) 어린 아이는 그의 어머니를 느낄 때 안전함을 느끼고, 어머니와의 접촉이 없어지면 불안해 진다. 이렇게 보면 유아와 어머니는 그들 자신이 하나라고 느끼는 셈인데, 물론 이는 다른 주변세계를 가진 어른들의 정서적 일치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를 통하여 자신과 더불어 주변세계까지 함께 느낀다고 하겠다. 어린 아이는 그의 어머니를 느낄 때 자신이, 나아가 주변세계가 평화롭고 즐겁고 안전하다고 느낀다.
이같은 느낌이라는 현전의 방식은 그러므로 "대상과의 거리없는 일치감"(distanceless coherence with the matter)(IDP, 83)이라고 표현될 법 한데, 이런 의미에서 언제나 지향하는 주체와 지향당하는 객체 사이의 거리를 포함하는 지향적 현전 또는 공현전의 방식과 대립된다고 하겠다. 물론 이같은 거리는 반드시 공간적으로 이해될 필요는 없을 것이며, 오히려 현전 또는 공현전의 매개가 없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느끼는 주관은 다른 주관을 느낌으로써 자신을 느낀다 … 다른 주관이 느끼는 주관에 현전하게 되는 것은 느끼는 주관이 자신을 느낀다는 사실에 의해서이다."(IDP, 84)
이런 유아에게 자의식이 있을 수 없다. 어린 아이는 '나'로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주변세계와의 연대 속에서 '우리'로서 살고 있다. '나'와 '너'는 '우리-경험'이라는 분화되지 않은 전적인 통일체에 포섭되어 있다. 어린 아이는 자신에 대한 의식 없는 의식(awareness without ego-awareness) 즉 비자의식적인 의식 속에서 자신의 의식을 시작한다. 이러한 상태는 한동안 지속되는데, 아이들이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나 젖었을 때 우리처럼 "내가 배가 고프다" 또는 "내가 축축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배고픔 혹은 축축함이 있다고만 생각한다.
어린 아이가 타자들 속에서 말을 배우게 될 때, 우선 이름을 배우게 된다. 이같이 이름을 배우는 것이 어린 아이가 타자로부터 세계의 의미를 배우는 방식이다. 사물에 이름을 부여할 수 있게 됨으로써 어린 아이는 느낌의 단계 등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된다. 어린 아이들이 대상을 가리키면서 어떤 이름을 댈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지향적인 경험이다.(IDP, 93) 이럴 경우 어린 아이들은 이름이 대상 그 자체보다 더 실제성을 갖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름을 앎으로써 그는 대상을 알았다고 생각하고, 계속하여 이것저것의 이름을 묻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때를 특징짓는 표현은 '이게 뭐야?'이다. 그러나 이름이 실제를 마술적으로 설정한다고 보는 이같은 객관성은 아직 합리적인 성질의 것은 아니다.
세 살 정도가 되었을 때, 어린 아이들은 비로서 세계를 의식하는 것으로 보인다.(IDP, 94) 어린 아이들은 이제 자신을 대상들에 대하여 지향적으로 정향시킬 수 있다. 다른 사람과의 계속적인 언어 사용 경험을 통하여 언어를 보다 논리적으로 정확히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부모와의 조화로운 관계도 이제 끝나게 된다. 느껴지기만 했던 것이 이제는 표현되어지게 된다. 대화적인 관계는 이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게 되는데, 그것은 어린 아이들이 이제 자신을 중심으로 파악할 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중심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이때에 강조되고 자주 사용되는 표현은 '싫어!'이다.
이같은 단계를 거치면서 어린 아이들의 언어는 점차 구체적인 것을 넘어서서 추상적인 것에까지 이르게 된다. 물론 이같은 이전은 매우 느리게 진행된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여섯 살에서 열 살 정도까지에 이르는 동안 어린 아이들은 세계에 대하여 보다 객관적이고 보다 실제적인 개념을 발전시킨다. 즉 객관화의 수준에 이르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과정에서 어린 아이들은 이제 자신의 부모에 대해서도 그같은 발전을 보게 된다. "유일무이하고 삶의 지평이었던 '존재'가 이제는 '어머니'가 되고 나중에 어머니는 '한 어머니'가 된다."(IDP, 95) 친구들의 어머니와 자신의 어머니를 비교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어린 아이가 언어를 사용하게 됨으로써 자아와 타자 사이에 "거리를 창조하고 그 거리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IDP, 96)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언어를 사용하는 자는 멀리 떨어져서 대상의 이름을 말하자는 자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대상을 타자와 공유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어린 아이는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들이 포함되는 자신의 세계를 비로소 구성한다.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과정의 결과로 자신을 독립적 중심으로 파악하게 될 때 이는 "과거의 의식 형태를 불가능하게 만듬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의식을 가능하게 만든다"(IDP, 96)는 점이다. 이는 의식이 곧 존재방식이며, 의식의 전환이 존재방식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혁명적 전환의 결정적 동기가 바로 타자와의 대화라는 점이다. "낡은 세계의 환원과 새로운 세계의 탄생은 '당신'과의 대화, 타자와의 대화, 타자들과의 대화로부터 나온다."(IDP, 97) 대화 속에서는 변화시키면서 또 변화당한다. 이같은 상호적인 변화의 결과가 낡은 것의 환원과 새로운 것의 창조로 나타난다.
데카르트적인 사유에서 당연시되는 반성적 자의식은 열세살이나 열여섯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등장한다. 이 때에 이르러서야 청소년들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가지며 다른 사람의 내면세계와 구분시킨다. 이제야 "그는 자신이 자신에 대한 세계의 주관으로서 세계 내의 그밖의 모든 것들, 사물들과 사람들로부터 섬처럼 분리된 존재라는 것을 발견한다."(IDP, 97-98) 그들은 이제야 자신을 가족의 일원이나 동무들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으로서 파악할 수 있다. 데카르트나 후설의 자아는 바로 이같은 수준 이후의 자아이다.
4.2 대화와 현전적 믿음
인간의 의식을 위와 같이 이해할 수 있다면, 무엇보다도 인간의 자기이해에 우선 근본적인 변경을 가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자아가 놓여져 있는 상황은 큰바다 위의 섬과 같은 것이 아니라 마디에 마디를 물고 내려오는 산맥과 같은 것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이러한 역사적 요소를 고려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와 아울러 반성적 자의식의 소유자가 현재 타자와 가지는 공시적인 관계 또한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슈트라서는 이러한 공시적인 관계의 전형으로 인간의 대화와 믿음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중에서 가장 전형적인 관계인 대화에는 세가지 요소, 즉 대화하는 쌍방 둘과 대화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놓치기 쉬운 것은 대화의 두 상대방 각각이 그 자신이 아닌 어떤 것에 적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1. 말하고 들을 때, 나는 나와 대화하고 있는 '당신'에 내자신을 맞추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대화자는 대화에서 듣고, 답하고, 긍정하고, 부정하고, 의심하고, 동의함으로써 대화상대방에 적응해야 한다.
2. 알고, 평가하고, 추구할 때, 나는 나의 대화의 대상이 되는 일에 또한 내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 즉 나는 어떤 판단이 푸른 색이라거나, 어떤 색깔이 반도덕적이라는 등의 주장을 해서는 안된다. 이런 의미로 대화의 대상에 적응해야 한다.
3. 알고, 평가하고, 추구할 때, 나는 나와 대화하고 있는 상대방의 방식과 형식적으로 같은 방식으로 토론 중인 일에 접근해야만 한다. 이는 대화 당사자들간의 이해나 일치가 선험적으로 배제되어서는 안되는 방식으로 대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경제적 효율을 기준을 말하고, 어떤 사람은 도덕적 정당성을 기준으로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결국 대화의 관점에 적응해야 한다.(IDP, 102-103)
이로부터 우리는 대화에 참여하는 자의 자유는 세가지 방식으로, 즉 타자의 자유에 의해, 토론 중인 대상의 존재방식에 의해, 그리고 대상에 관하여 타자에게 말하는 방식에 의해 한정되어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IDP, 103-4) 이러한 한정이 우리의 의식에 대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의식이 결코 절대적인 자유(absolute freedom)를 가질 수 없으며, 오직 상대적인 자유, 유한한 자유(finite freedom)를 가질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절대적 자유를 자유로운 인격체의 행위와 결정과 존재의 배타적인 기원이 되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러한 절대적 자유는 절대적인 자율성, 불가침의 주권, 전체적인 자족성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앞의 논의와 해명에 따르면 그러한 절대적 자유를 가진 존재들은 서로간에 의사소통을 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들은 사회적 존재로서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서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르트르가 인간이 자신을 선택함으로써 타자를 선택한다고 말한 것은 그 반대의 것이 먼저 말해진 다음에야 타당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먼저 타자에 의해서 선택되지 않고서는 자신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선택당하면서 선택하는 것, 이것을 통해서만 자유로운 관계가 수립된다. 왜냐하면 관계는, 부버에 따르면 "선택하는 것이자 동시에 선택당하는 것이며, '수동'이자 '능동'"이기 대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인간의 자유란 결코 절대적일 수 없으며, 상대적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슈트라서는 대화(diaglogue)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공시적인 타자의존성을 밝혀 보여주고 있지만, 믿음(faith)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그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의 타자의존성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믿음을 일반적으로 종교적 의식이나 철학적 신념으로 즉 외부로부터 은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나 내부로부터 스스로에 의해 우리가 가지게 된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전통적인 사유방향의 전환이 필요하다. 슈트라서에 따르면 믿음은 사실 인간의 보다 일반적인 태도(general attitude)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반적인 태도로서의 믿음에 구분되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는 사실이다.
한가지 종류의 믿음은 신뢰할 만한 상황증거로부터 성립하는 믿음이다. 예컨대 피고와 아무런 연관을 가지지 않는 증인이 피고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한 증언을 할 때 우리는 그 증언에 대하여 믿음을 가진다. 만약 증인이 피고와 어떤 연관을 가진다면 우리는 그 증언에 믿음을 부여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믿음은 그 피고가 처한 상황에 의존하게 된다.
다른 종류의 믿음은 신뢰할 만한 상황증거가 오히려 믿음으로부터 성립하는 믿음이다. 증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믿는 것이며, 믿기 때문에 그 진술이 증거가 되는 경우이다. 아버지는 온갖 상황증거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무고함을 피력할 때 그 무고함을 믿는다. 그 무고함을 믿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증거들이 오히려 무력해진다.
슈트라서는 이러한 종류의 믿음을 우리가 어떤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런 경우에 내가 부여하는 믿음이라고 지적하고 있다.(IDP, 122) 이러한 경우에 우리는 어떤 객관적 증거로부터도 믿음의 가부를 판정지을 근거를 마련하지 못한다. 모든 자료, 모든 상황, 전체 주변 세계가 타인격체를 사랑한다는 성격에 의해 채색되어 버린다. 부버의 표현대로, "그밖의 모든 것은 그의 빛 속에 산다"에서 타자의 빛이 여기에 적합하다. 그러므로 타자의 존재를 주변세계의 존재의 도움을 받아 결정하려는 나의 시도는 거의 허사가 되고 만다.
이제 이러한 구분의 의미에 주목해 보자. 이 두 가지 믿음을 갈라 놓는 것이 무엇인가? 전자의 믿음과 관련하여 증인의 진술은 그것이 판사를 설득시키는 데 성공하든 실패하든 사실을 바꾸어 놓지는 못한다. 그러나 후자의 믿음과 관련해서는 어떤 진술이 받아들여지느냐 마느냐에 따라 사실이 바뀌어진다. 그것은 오스틴적인 용어로 발화수반적 행위(illocutionary act)이며, 부버적 용어로 근본어(Grundwort)에 해당한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공시적 관계 또한 우리의 통시적 관계와 마찬가지로 타자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최초의 순간에 한없이 허약하며 '어머니'에 대한 믿음에 우리의 온 삶을 걸고 산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그 이후의 우리의 삶의 곳곳에서 비록 그 범위나 강도에서 다를 지라도 같은 방식으로 되풀이 된다. 결국 우리 삶의 가장 우선적인 범주는 타자에 대한 믿음이며, 이처럼 우리의 삶이 타자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나머지 모든 삶에서 우리는 타자와 결코 독립할 수 없는 상호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5. 대화적 현상학과 21세기
5.1 데카르트의 20세기
20세기는 그 이전 세기들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이러한 전통을 한마디로 모더니즘(modernism)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알고 있듯이 이러한 모더니즘에 저항하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는 새로운 운동도 유행을 지나 이제 어엿한 하나의 전통으로 등장해 있다. 20세기의 가장 일반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할 모더니즘을 여러 가지로 특징지울 수 있겠지만, 이 글에서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더니즘은 바로 데카르트적인 사유전통의 표현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모더니즘이 절정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20세기, 오늘 우리는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제일의 가치기준으로 삼으며,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이념은 사실 과거의 데카르트적의 철학 이념 속에서 이미 실마리를 가졌었고, 후설에서 그 이론적인 절정에 다다랐으며, 사르트르에 이르러 실존주의라는 이름아래 제시된 실천적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동전의 양면이라는 진부한 표현처럼, 이러한 데카르트적인 삶의 방식은 그것이 강조하는 삶의 어떤 일면 때문에 나머지 일면을 소홀히 하게 된다. 데카르트적인 삶의 방식은 자아를 세계의 중심에 놓음으로서, 타자에 대하여 부당한 자리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듯이, 자아가 세계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데카르트적인 사유의 타자에 대한 이러한 비친화성(inaffinity)은 이제 20세기를 마감하는 이 시점에서 반성의 대상이 된다. 데카르트적인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 중에 가장 드라마틱한 것은 환경으로부터의 반발이었다고 생각된다. 타자인 생태학적 환경에 대한 홀대에 대하여 환경은 자아의 타자의존성을 깨우쳐 주기기에 충분할 정도로 응대해 주었다. 모더니즘이 환경을 이야기하게 된 것은 그 나름대로는 상당한 발전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생태주의자(ecologist)들은 환경주의자(environmentalist)들의 그러한 대응이 본질적인 변경을 포함하지 않음으로써 비슷한 문제들을 언제든지 일으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환경이라는 주제처럼 극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천재적인 이념가들에 의해 포착되어 포스트모더니즘을 예고했던 것은 바로 소외라는 문제였다. 마르크스는 소외가 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에서 비롯된다고 보았지만, 이 글에서의 논지에서 보면, 소외는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또는 그 어떠한 것이든, 그것이 데카르트적인 사유전통 위에 설 때 언제든지 출현하게 되는 결과, 즉 타자에 대한 존재론적 위치부여가 잘못됨으로 인해서 생기는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관심을 그 이념으로 하는 종교운동조차도, 예컨대 기독교가, 그 전파과정에서 다른 인간에 대한 고통을 증대시켰다는 역사적 사실도 바로 이러한 소외의 일반성을 말해주고 있다.
5.2 전통의 전환: 21세기
이러한 반성에 입각할 때 이제 우리가 본질적인 전환을 이루어야 할 영역은 분명하다. 그것은 타자문제에 대한 데카르트적인 사고전통을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타자에 대한 새로운, 제대로 된 존재론적 위치를 부여함으로써 타자친화적인 그래서 운명의 인과율을 작동시키지 않는, 나와 세계 사이의 낯설음에 몸서리치며 무엇인가를 해야하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는 그러한 사유방식을 조성해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만이 우리는 환경의 반발이나 소외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슈트라서의 대화적 현상학이 이러한 전환에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데카르트적인 사유의 한계성에 대한 슈트라서의 다양한 지적과 그러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된 대화적 현상학의 기본명제들은 타자에 대하여 어떤 존재론적 위치를 부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하나의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오래된 타자"(an older other)와 "유한한 자아"(a finite ego)라는 이념으로 요약될 수 있는 슈트라서의 대화적 현상학의 성과는 새로운 전환을 재촉하는 새로운 세기를 준비하는 우리들이 어떠한 전환을 시도해야 하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슈트라서의 모범은 그가 후설의 법전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의 법전으로 인정할 필요는 없다. 그는 하나의 예이며, 비트겐슈타인의 사다리이며, 불경의 뗏목이다. 그는 우리의 대화상대자로서만 유효하다. 우리는 계속하여 보다 적합한 사유전통을 구성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심리학자들과 경영학자들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인간을 IQ(Intelligent Quotient)가 아니라 EQ(Emotional Quotient)로서 측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인간을 어떤 지수로 가늠한다는 것이 가능한가하는 본질적인 질문이 여전히 남아있겠지만, 이러한 전환은 오늘 우리가 놓여져 있는 시대적인 상황을 엿보게 하는 하나의 좋은 예이다. 그들은 현대사회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능력은 대인기술(people skill) 즉 공감하고, 남과 잘 어울리며, 타자와의 관계를 읽어내는 힘이며, 그러기에 우수한 경영인이란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IQ만 높은 독불장군이 아니라 전자우편에 잘 답하고, 동료들에게 인기가 있는 마음편한 공동작업자, 즉 EQ가 높은 사람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IQ에서부터 EQ로의 이러한 전환이 시사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세계를 대상화하는 생활방식이 이제 그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사회과학자들이 인지했다는 것이다.
역사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철학적 이념이 그 실제적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그러한 이념의 사회과학적인 반영이 필수적이다. 이 글의 전체적 맥락은 사회과학적 대상화와 관련하여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쪽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결론은 데카르트적인 사고전통에 근거하여 오직 "대상화"만을 유일한 이념으로 하는 그러한 사회과학에 대한 반대명제로서의 역할을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까지의 논의에서 드러났듯이 '대화'라는 이념이 '대상화'라는 이념이 가지는 일면의 진리를 보충하는 상보적인 이념이 기 때문에, 대화와 대상화라는 두 이념을 동시적으로 고려하는 사회과학적 작업이 추천될 수 있을 것이다. EQ에 대한 주목은 이러한 작업의 한 예로서 제시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사회과학적 작업의 지평의 전환은 슈트라서가 요청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지금 나름대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한 전환은 이제까지 우리 사회가 시도했던 것들과는 다소간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러한 전환의 다양한 측면을 관통하는 철학의 부재가 노출되고 있으며, 또 그러한 현실 때문에 상호 대립적인 전환조차도 공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존의 삶의 방식에 대한 반성에 기인하는 이러한 전환에는, 현존하는 삶의 지평에 대한 개정이 우선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지평의 전환없이 이루어지는 정책적인 전환은 생태주의자들이 환경론자들에게 가하는 비판과 동일한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 글은 이러한 지평의 전환을 요청하고 하나의 예를 제시하고자 하는 바램에서 씌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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