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즘과 하이데거의 존재사유
이 선 일*서울시립대
요 약 문
휴머니즘은 인간의 인간다움을 추구한다. 휴머니즘은 인간이 인간다워지고자 하는 간절한 바램이다. 그러나 종래의 휴머니즘은 인간의 고유한 본질을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을 고작해야 이성적 동물로서 규정할 뿐, 존재와의 관계 안에서 인간의 고유한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다. 서구의 형이상학적 휴머니즘은 인간의 본질을, 다시 말해 인간과 존재의 공속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하이데거는 종래의 휴머니즘을 퇴락의 역사로 간주한다.
이에 반해 하이데거가 그려내는 인간의 고유한 본질은 탈-존이다. 탈-존은 인간과 존재의 공속을 의미한다. 즉 인간이 존재와의 가까움 안에 탈-자적으로 거주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탈-존은 존재를 위한 파수군의 역할을 떠맡는다. 인간은 존재의 목자로서 존재를 염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보자면, 즉 존재 자체 쪽에서 보자면, 존재가 인간을 존재의 진리를 파수하기 위해 탈-존하는 자로서 존재의 진리 자체에로 생기하게 하는 한에서만, 탈-존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기묘한 휴머니즘을 만나게 된다. 하이데거의 휴머니즘은 인간을 위한 휴머니즘이 아니라 존재를 위한 휴머니즘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자신의 휴머니즘을 ‘빛이 스며들지 않는 숲’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존재를 위한 휴머니즘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존재의 진리와의 공속을 회복함으로써 인간다움이 참으로 구현될 수 있는 새로운 역사의 시원을 열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존재를 위한 휴머니즘은 인간을 위한 휴머니즘으로 귀환한다.
그런데 혹자는 하이데거의 존재사유 역시 인간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난 것은 아니라고 비판한다. 물론 하이데거의 존재사유도 넓은 의미에서는 인간중심주의에 해당한다. 인간만이 존재를 이해함으로써 하나의 세계를 열고 있기에 존재자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존재사유는 결코 인간을 존재자의 주인으로 놓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에게는 존재의 목자로서의 책무가 주어진다. 존재의 목자로서의 인간이 인간과 자연 그리고 신까지 조화롭게 공존할 세계를 열어 나가야 함은 물론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존재사유를 좁은 의미에서의 인간중심주의로 폄하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하이데거의 존재사유는 인간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는 새로운 휴머니즘을 추구한다.
* 주요어 : 휴머니즘, 존재, 탈-존, 거기에 있음, 예술, 몰아세움.
I. 여는 말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인문학의 교실이 하나씩 문을 닫고 있다. 하지만 거리에서는 인간다움이 오히려 비싼 값으로 거래된다. 휴먼드라마, 휴먼다큐, 휴먼테크가 고품격 생활장식품으로 등장한 지는 이미 오래 전이다. 상품으로 조작된 휴먼이 마치 우리 시대의 상징적 기호인냥 활개친다. 비록 인간다움은 소멸해가고 있지만, 휴먼의 상업적 가치는 나날이 커져만 간다. 얼른 보아도 참으로 이율배반적 현상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역사는 휴머니즘의 역사였다. 유가(儒家)가 충서(忠恕)를 근간으로 인간 사이의 사랑(仁)을 실천하고자 했다면, 서구의 형이상학은 이성의 도덕적 권위가 구현된 합리적 사회를 추구했다. 하지만 오늘날 휴머니즘은 분명히 위기에 봉착했다. 물론 우리는 계산적 이성의 능력을 효율적으로 발휘함으로써 그 어느 시대에도 비교될 수 없는 물질적 풍요로움을 누리고는 있다. 그러나 ‘인간성의 파괴’라는 섬뜩한 경고가 오히려 시시콜콜한 잡담 정도로 치부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휴머니즘은 자기 모순의 역사였다. 도덕적 이성의 권위는 추락했고 계산적 이성의 효율성은 번뜩인다. 종교적, 민족적, 국가적, 지역적, 그리고 정파적 분쟁은 재론할 필요도 없다. 현대 자연과학 기술의 과실 속에서 생활의 편리함을 만끽하면서도 우리는 결국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일그러진 자화상을 바라보며 개탄한다. 인간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유전자 지도가 부풀려 놓은 희망 속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인간도 백사장에 그려진 얼굴처럼 그렇게 사라진다는 말인가!
이제는 우리 시대의 의미를 되돌아볼 시점이다. 인간다움을 열망했으면서도 인간다움이 흔적 없이 사라지는 우리 시대의 숨겨진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 왔는가? 우리가 추구해 온 인간다움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이 펼쳐지는 지평 속에 감추어진 의미는 무엇인가? 다가오는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우리가 새롭게 추구해야할 인간은 어떤 모습인가? 이러한 물음을 통해 우리는 이제 20세기 철학의 거장인 하이데거를 만나게 된다.
휴머니즘에 대한 염원은 아직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비록 휴먼이 상업적으로 계산되고 조작되어 거리의 상품으로 진열되었어도, 그 화려한 쇼윈도우의 이면에는 인간다움에 대한 염원이 숨쉬고 있다. 아마도 그러한 염원은 참다운 인간다움은 인간들만의 모듬살이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 인간과 자연 그리고 신(神)까지도 공존하는 새로운 보금자리 안에서 실현될 것이라는 절박한 바램일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러한 소중한 불씨를 살려 내고 있다. 우리가 살아 왔던 삶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그는 우리에게 잊혀져 왔던 소중한 보금자리를 일깨우고 있다. 그의 철학은 귀향(歸鄕)의 철학이다. 그렇다면 귀향의 노래는 어떻게 불리는가?
II. 서구의 전통적 휴머니즘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
휴머니즘이란 인간의 인간다움을 지키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이다. 그런데 전통적 휴머니즘의 역사는 다양하다. 얼른 눈을 돌려보아도 우리는 서구 휴머니즘의 역사 속에서 명멸했던 각양각색의 휴머니즘을 손꼽을 수 있다. 후기 그리스의 인간을 모델로 한 로마적 휴머니즘, 인간의 영혼을 구제하고자 했던 기독교적 휴머니즘, 기독교도의 이상을 실천하고자 했던 르네상스적 휴머니즘, 인간의 도덕적 권위를 실현하고자 했던 계몽주의적 휴머니즘,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뚫고 참다운 사회적 인간을 구현하고자 했던 마르크스적 휴머니즘, 그리고 저주받은 자유 앞에서 불안에 떨면서도 이상적 공동체를 위해 인간의 책임을 다하고자 했던 사르트르의 휴머니즘... .
그런데 개개의 휴머니즘은, 서로간 색깔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공통적 지반 위에서 성립한다. 모든 휴머니즘은 우선 인간을 그것에 가장 가까운 류(類) 안에 분류한 뒤 그 안에 소속된 종(種)들 사이에서 인간만이 갖는 차이점을 근거로 인간의 본질을 규정한다. 인간의 본질은 최근류(最近類)와 종차(種差)의 결합을 통해 이성적 생명체(혹은 이성적 동물)로서 규정된다. 따라서 인간은 신(神)을 제외하고서는 최고의 존재자로 간주된다. 이성이란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인간이 이러한 영광을 누리는 것은 당연시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런 식의 본질 규정이 과연 인간의 고유한 본질을 드러냈는가를 문제삼는다.
전통적 논리학은 최근류와 종차의 결합을 통해 존재자의 본질을 규정한다. 그런데 이런 식의 본질 규정은 형이상학의 특정한 존재이해를 전제한다. 서구의 전통적 형이상학은 존재자의 존재를 있음(existentia)과 임(essentia)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한다. 있음과 임은 존재자의 차원에서 존재자가 갖는 존재성격을 두 가지로 분절한 이름에 해당한다.
앞서의 예로 돌아가자. 인간도 우선은 생명체들 안에서 해석된다. 생명체란, 적어도 숨을 쉬고 있는, 다시 말해 영혼을 지닌 존재자를 의미한다. 비록 데카르트이래 동물의 영혼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긴 하나, 여하튼 생명체로서 있음이라는 관점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존재가 동일하게 해석된다. 인간과 동물의 있음의 방식은 동일하게 규정된다. 따라서 인간과 동물의 있음의 방식이 갖는 차이성은 무시된다. 다만 인간은 동물들 중에서 이성이라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생명체로서 규정된다. 인간은 이성적 생명체(혹은 이성적 동물)임이라는 관점에서만 다른 생명체들과 구별된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이러한 형이상학적 존재이해를 존재자라는 보편적인 류(類)에 까지 확장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있음을 무생물의 있음과 동일한 차원에서 해석하는 가능성에까지 이르게 된다. 인간은 분명히 존재자로서 있긴 하되 다만 그 중에서 이성적 생명력이라는 차별성을 갖춘 존재자로서 이해된다. 그렇다면 인간과 동물의 있음의 차이는 물론이거니와 인간과 무생물간의 있음의 차이도 무시된다. 인간의 있음이나, 혹은 동물의 있음, 혹은 돌(石)의 있음은 모두 동일한 차원에서 해석된다. 이처럼 전통적 형이상학은 자신의 존재이해를 존재자 전체 영역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함으로써 개개의 존재자가 갖는 있음의 차이를 무시한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적 형이상학을 사물존재론(Dingontologie)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까닭은 전통적 형이상학에서는 인간의 있음도 사물의 있음과 동일하게 해석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놀라운 결과에 도달한다. 일반적으로 휴머니즘이란 인간의 인간다움을 추구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확고히 다지려는 노력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서구의 전통적 휴머니즘에서 바라본 인간은 다른 생명체들(즉 동물들)과 있음의 방식에서 동일하다. 극단적으로는 무생물의 있음의 방식과도 구별되지 않는다. 다만 이성이라는 탁월한 능력을 갖추었다는 점에서만 다른 존재자들과 구별된다.
인간을 존재자의 차원에서 해석하는 한, 이성적 생명체라는 인간의 본질 규정은 올바르다. 분명히 인간은 동물과 유사한 육체를 지니고 있고 동물보다 뛰어난 이성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본질 규정은 생명체들 사이에서 인간이 갖는 차이점을 고려하여 인간의 본질을 규정한 것일 뿐, 인간의 있음이 다른 생명체들의 있음과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가라는 관점에서는 인간의 본질을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즉 인간의 존재를 전체 안에서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이성적 생명체라는 본질 규정을 올바른 것(das richtige)이긴 하되 참다운 것(das wahre)은 아니라고 평가한다.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의 본질에 관한 형이상학적 규정은 인간의 본질을 해명하기에는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체 안에서 바라본 인간의 고유한 본질은 무엇일까?
적어도 인간에게는 자신의 있음 자체가 문제시된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 이러한 물음이 소위 이성적 물음이다. 그런데 이성적 물음이 가능한 까닭은 인간에게는 이미 자신의 존재, 타인의 존재,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자의 존재, 그리고 자신이 거주하는 세계의 존재가 어슴푸레 나마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즉 이성적 물음을 묻기에 앞서 인간은 이미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저마다의 이해를 가지고 있는데, 비록 이러한 존재이해가 존재론적으로 개념화되기 이전의 막연한 이해에 불과하지만, 다시 말해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진행되는 선(先)이해에 불과하지만, 우리의 모든 사유와 행동은 이러한 존재이해에 근거한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요즈음 항간에 화제가 되는 것은 단연 미국의 아프간 공격이다. 이 사태에 대해 우리는 저마다의 관점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견해를 늘어놓는다. 어떤 이는 보수적 관점에서 또 어떤 이는 진보적 관점에서 이 사태를 분석한다. 또 어떤 이는 제법 진지하게 이 사태의 진행과정을 추론해 가며 인류의 장래에 대한 전망을 개진하기도 한다.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이러한 사유가 모두 이성적 사유에 해당한다. 이성이란 사태를 분석하고 추론하며 개념화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성적 사유는 아무 것도 없는 허공 안에서 진행되지 않는다. 이성적 사유는 어떤 관점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 안에는 이미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저마다의 막연한 이해가 녹아 들어가 있다. 예를 들자면, 미국, 아프간, 테러, 빈 라덴 등에 대해 우리가 의식 이전에 가지고 있는 막연한 존재이해가 미국의 아프간 공격을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우리의 관점을 구성한다.
이처럼 인간 속에서는 존재이해의 사건이 긴장되게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미 어떤 상황 속에 던져져 있다. 이 상황 속에서 우리는 존재자에 대한 각종 정보를 접한다. TV, 잡지, 신문, 영화는 물론 이거니와 학습을 통해 혹은 귀동냥을 통해 우리는 존재자에 대한 각종 정보를 접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정보를 의식적으로 취사 선택하기 이전, 우리는 이미 우리가 살아온 환경, 교육, 역사적 전통, 이해관계, 삶의 태도 등에 따라 어떤 분위기에 조율된 채 존재자의 존재를 이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이해가 존재자에 대한 우리의 관계맺음의 방식을 결정한다. 즉 우리가 어떤 존재이해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사유와 행동은 그 방향을 달리 한다. 이성적 사유도 이렇게 열어 밝혀진 존재이해의 지평 안에서 움직인다. 이성적 사유의 근거는 존재이해의 사건이다.
인간은 단순히 존재자 전체의 영역 안에 거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존재자의 존재가 이해되는 사건 안에 거주한다. 이러한 사건을 하이데거는 ‘거기에’(Da)라고 명명한다. ‘거기에’는, 인간의 근원적인 거주 영역으로서, 인간의 실존의 터전이 된다. 더욱이 인간이 ‘거기에’ 어떻게 참여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실존은 본래적 양상을 갖기도 하고 비본래적 양상을 갖기도 한다. 여하튼 인간은 ‘거기에’ 참여하고 있기에, 인간에게는 저마다의 세계가 열리고 이 세계 안에서 존재자와 관계를 맺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있음은 다른 존재자의 있음과 구별된다. 무생물의 있음이나 동물의 있음이 존재자의 영역 안에 한정되어 있다면, 인간의 있음은 이미 존재 일반이 밝혀지는 ‘거기에’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때문에 하이데거는 인간만의 독특한 있음의 방식을 ‘거기에 있음’(Dasein)이라 규정한다. 인간의 고유한 본질은 ‘거기에 있음’이 된다.
참다운 휴머니즘은 인간의 고유한 본질이 회복되었을 때 가능하다. 그러나 서구의 전통적 휴머니즘은, 형이상학적인 존재이해의 지평 안에서, 인간의 본질을 다른 생명체들 사이에서의 종적인 차이점에 의해 규정할 뿐 인간의 실존이 펼쳐지는 근원적 사태인 ‘거기에’를 망각한다. 이 점에서 서구의 형이상학적 휴머니즘은 스스로 자신의 본질유래로부터 벗어난다. 우리는 인간을 이성적 생명체(혹은 동물)로 규정하는 서구의 형이상학적 존재이해조차, 근본적으로는, 인간, 생명, 이성 등에 대한 근원적인 - 다시 말해 존재론 이전의 - 존재이해가 펼쳐지는 ‘거기에’의 영역에 근거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서구의 형이상학적 휴머니즘의 역사를, 『존재와 시간』의 언어를 빌어, 소위 퇴락(Verfallen)의 역사로 규정한다. 즉 서구의 형이상학적 휴머니즘은 인간의 본질을, 다시 말해 인간과 존재 일반의 공속 관계를 망각한 존재 망각의 역사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결론이다.
III. 하이데거의 존재사유에서 추구되는 휴머니즘
인간의 고유한 본질은 ‘거기에 있음’이다. '거기에 있음‘은 인간과 존재의 공속 관계를 의미한다. 실로 하이데거의 사상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축은 인간과 존재의 공속 관계다. 하이데거의 후기 사상에서 등장하는 탈-존(Ek-sistenz), "존재의 열려 있음(Offenheit)에로 나아가 섬”, 혹은 에어아이크니스(Ereignis)까지도 실상은 동일한 사태를 지시한다. 이제 하이데거는 인간과 존재의 공속 관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휴머니즘을 모색한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휴머니즘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그의 존재사유의 변화를 주목해야 한다. 전기 사상에서의 존재사유는 인간의 실존적 삶의 터전인 ‘거기에’가, 다시 말해 나의 존재, 타인의 존재,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자의 존재 등에 대한 존재이해가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해명한다. 그러나 후기 하이데거의 존재사유는 이제까지 각 시대를 정초해 왔던 형이상학적 근본개념들이 ‘거기에’ 안에서 어떻게 구성되어 왔는가를 주목한다. 그의 후기 사상은 각 시대마다의 형이상학적 존재이해를 철저히 조율하는 존재 그 자체를 사유함으로써 인간의 역사적 실존이 터하고 있는 일종의 역사적 운명을 드러낸다.
돌이켜 보건대 형이상학은 존재자에 대한 특정한 해석을 통해 하나의 시대를 정초한다. 형이상학이 존재자를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즉 이데아로서, 혹은 피조물로서, 혹은 대상으로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각 시대는 그것의 의미를 달리한다. 이로써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은 - 예컨대 이데아, 창조자와 피조물, 주체와 대상, 절대정신, 권력에의 의지,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 그때마다 각 시대의 의미를 철저히 규정한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존재이해를 각 시대의 사유가에 의한 작품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적어도 하이데거에게 사유가는 존재의 부름에 응답하는 자로 규정된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각기 상이한 형이상학적 근본개념들도 역사적으로 그때마다 자신을 다르게 드러내는 존재를 개념적으로 포착한 결과로서 해석된다.
일면 신비로운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근본기분에 젖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예를 들어 얼마 전 지상(紙上)에 스티븐 호킹 박사의 발언이 보도된 바 있었다. 발언의 요지는, 컴퓨터에 의한 인간 지배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으며 그렇기에 이제 인간은 유전자도 조작하고 인간의 두뇌와 컴퓨터를 연결시켜서라도 컴퓨터의 발전 속도를 따라 잡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발언에 대해 둔감해 하신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사유가는 현대 문명이 치닫고 있는 광란의 질주에 대해 소스라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인간의 역사적 실존을 진지하게 되돌아보는 가운데 우리를 엄습해 오는 운명의 그림자를 감지할 것이며 그 안에서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할 것이다. 아마도 하이데거의 존재사유는 이러한 근본기분 안에서 성립한다. 근본기분에 젖은 채 그는 인간에게 다가오는 존재의 운명을 보고 있으며 존재로부터 건네 받은 개념을 가지고 인간의 역사를 꾸려온 형이상학의 궤적을 더듬어 가는 것이다.
여하튼 하이데거는 존재의 역사를 근거로 형이상학의 역사를 파악한다. 형이상학적 존재이해는 존재와 인간 사이의 공속 관계 속에서 해명된다. 존재는 ‘던짐’이고 인간은 ‘거기에 던져져 있는 자’가 된다. 존재는 ‘부름’이고 인간은 ‘응답하는 자’가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존재의 부름 안에 인간은 던져져 있으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거기에’ 기투함으로써 비로소 그 부름을 자신의 것으로 포착한다. 여기에서 바로 형이상학적 존재이해가 성립한다. 형이상학적 존재이해는 던져져 있음과 기투라는 인간의 실존론적 구조의 통일 속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존재이해를 바탕으로 존재자와 구체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존재자를 그 무엇으로 탈은폐한다. 이로써 형이상학의 역사는, 아니 인간의 역사는, 존재의 역사로서 규정된다.
그런데 존재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하이데거의 시각은 다분히 종말론적이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서구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존재자에 대한 인간의 지배 욕구가 점증해 온 역사다. 존재자에 대한 경이로움에서 비롯된 서구의 역사는 인간의 이성이 존재자를 완전히 장악하는 현대 자연과학적 기술 문명의 자기 모순 속에서 대단원의 종말을 맞이한다. 그의 이러한 종말론적 시각은 이성적 주체가 존재자를 지배하는 방식을 추적해 나감으로써 구체화된다.
하이데거는 우선 근대 형이상학적 주체가 존재자를 대상으로서 정립하는 표상행위를 주목한다. 표상행위는 이성적 주체가 자신의 관점에서 존재자를 자기 앞에(vor) 세우는 행위(stellen)를 의미한다. 인간과 존재자의 관계는 주체와 대상으로 정립된다. 그런데 이성적 주체의 지배 욕구는 더욱 강화된다. 마침내 이성적 주체는 현대의 기술적 인간으로 변모한다. 현대 기술적 인간은 자신의 욕구가 즉각 처리될 수 있도록 존재자를 자기 곁에(be) 세운다(stellen). 현대 기술에 의한 주문 요청의 행위(bestellen)는 근대 이성적 주체에 의한 표상행위(vorstellen)보다 존재자에 대한 지배력이 더 강화된 형태에 해당한다. 여하튼 이제 존재자는 대상이 지니고 있던 최소한의 고유성마저 빼앗긴 채 부품(Bestand)으로 탈은폐된다. 더욱이 현대 기술의 극단적인 주문 요청에서는 이성적 주체까지도 부품으로 흡수된다. 인간도 기술적 의지의 지배 욕구에 봉사하는 부품으로 탈은폐된다. 인간이 총동원체제의 소모품이나 임상실험용 자원으로 전락한 것은 벌써 오래 전이다. 이제는 복제인간과의 만남을 어떻게 설정해야할지를 고민하는 형국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자기 모순을 발견한다. 모든 존재자를 장악하고자 했던 이성적 주체의 꿈은 깨어졌다. 이제는 이성적 주체도 없고 주체와 객체의 관계도 사라졌다. 남은 것은 고작해야 기술적 의지의 주문 요청과 그에 대한 응답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공허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또한 이성적 주체가 사라진 시대에 휴머니즘은 어떻게 회복되어야 하는가?
하이데거에게는 언제나 인간과 존재의 공속 관계가 문제시된다. 하이데거는 이성적 주체마저 부품으로 소멸되는 공허한 현실을 주도하는 존재이해를 통찰한다. 고심 끝에 그는 현대 기술문명을 주도하는 존재론적 사건을 몰아세움(Gestell)으로 규정한다. 몰아세움이란 인간과 존재의 오늘날의 공속의 형세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를 부품으로 세우도록(stellen) 인간을 집약(Ge)하는 존재의 역사적 운명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역사적 과업은 명백하다. 우리의 역사적 과업은 오늘날의 존재의 역사적 운명을 극복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이 펼쳐질 수 있도록 존재이해의 새로운 시원(始源)을 놓는 일이 된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러한 역사적 과업이 실현될 가능성을 예술에서 발견한다. 본래 예술은 한편으로는 기술의 본질과 가깝게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영역이기에 현대 기술시대를 극복할 가능성을 간직한다.
하이데거가 꿈꾸는 예술은 현대를 주도하던 미학과 구별된다. 예술작품의 본질을 도구적 존재이해의 차원에서 ‘형상화된 질료’로 파악하는 미학은 이미 현대 기술문명의,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몰아세움이라는 존재의 역사적 운명의 산물에 불과하다. 오히려 하이데거는 예술을 새로운 역사를 주도할 존재론적 사건으로 파악한다. 즉 그에게서 예술이란 몰아세움이란 존재의 역사적 운명 안에 감추어져 있는 존재의 진리를 기투함으로써 대지를 비로소 대지로서 정초하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역사의 시원을 여는 존재론적 사건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술은 이행적(移行的) 인간을 요구한다. 이행적 인간이란 현실적 삶의 모순을 깨닫고 존재의 감추어진 진리를 찾아 나서는 도상(途上)의 나그네를 의미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인간과 존재의 공속 관계다. 존재가 스스로를 전향하지 않는다면 도상의 나그네는 아무런 목적지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몰아세움 속에서는 존재 자체의 본질도 철저히 망각된다. 몰아세움에 철저히 조율된 인간은 존재자를 부품으로만 주문 요청한다. 인간에게는 부품의 조정과 안전한 확보만이 주요하게 고려된다. 이로써 존재자를 부품으로 탈은폐하도록 인간을 조율했던 존재의 역사적 운명은 망각된다. 존재의 부름과 인간의 응답을 통해 이루어졌던 탈은폐 사건은 은닉된다. 오히려 몰아세움 속에서는 인간과 존재가 서로를 몰아세우는 도발적 사건이 긴장되게 펼쳐진다. 따라서 몰아세움 속에서는 존재 자체까지도 자신의 본질로부터 떨어져 나와 극단적으로 왜곡된다. 때문에 존재는 자신의 본질을 회복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존재의 전향이다. 그런데 인간과 존재는 공속하므로, 존재의 전향은 인간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존재 진리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자가 된다. 따라서 인간 쪽에서 보자면 인간의 구원인 것이, 존재 쪽에서 보자면 존재의 전향이 된다.
우리에게는 질곡의 시대를 이겨나갈 참다운 인간이 요구된다. 앞서 언급한 도상의 나그네가 이러한 인간의 모습이다. 이제 나그네는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길을 떠나야 한다. 목적지는 물론 존재의 진리다. 그러나 나그네의 도정(道程)은 험난하다. 존재는 스스로를 무화(無化)한다. 존재 안에서는 밝힘과 감춤의 투쟁이 벌어진다. 이러한 투쟁은 구원(das Heil)과 분노(der Grimm)의 투쟁에도 비유된다. 아마 존재의 분노로 인해 구원의 진리는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또한 설령 존재가 자신의 진리를 회복하기 위해 전향할 때에도 존재의 도래는 번갯불처럼 번뜩일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나그네에게 존재의 전향을 맞이할 수 있는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을 요구한다. 초연한 내맡김이란 끊임없는 인내를 통해 존재의 새로운 도래를 기다리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제 나그네는 존재를 위하여 존재를 파수해야 한다. 존재의 분노를 아우르며 나그네는 존재의 목자로서 존재의 진리를 염려(Sorge)해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참다운 인간다움을 구현할 휴머니즘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휴머니즘은 기묘한 휴머니즘이다. 역설적이게도 하이데거의 휴머니즘은 인간을 위한 휴머니즘이 아니라 존재를 위한 휴머니즘이 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사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탈-존<<은 ... 존재와의 가까움 안에 탈-자적으로 거주함을 의미한다. 탈-존은 존재를 위한 파수군의 역할을 떠맡는 것이다. 즉 존재를 염려함이다.” 따라서 “ 본질적으로 보자면, 즉 존재 자체 쪽에서 보자면, 존재가 인간을 존재의 진리를 파수하기 위해 탈-존하는 자로서 존재의 진리 자체에로 생기하게 하는 한에서만, 탈-존은 중요하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자신의 휴머니즘을 “빛이 스며들지 않는 숲(lucus a non lucendo)"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역설적이게도 “빛이 스며들지 않는 숲”이야말로 참다운 휴머니즘이 된다. 존재의 진리와의 공속을 회복한 인간이야말로 몰아세움이라는 존재의 역사적 운명을 극복하여 새로운 역사의 시원을 여는 인간다운 인간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의 존재사유가 추구하는 새로운 휴머니즘이다.
IV. 닫는 말
하이데거의 휴머니즘은 존재를 위한 휴머니즘이다. 그러나 존재를 위한 휴머니즘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존재의 진리와의 공속을 회복함으로써 인간다움이 참으로 구현될 수 있는 새로운 역사의 시원을 열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존재를 위한 휴머니즘은 인간을 위한 휴머니즘으로 귀환한다. 따라서 혹자는 하이데거의 존재사유 역시 인간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난 것은 아니라고 비판한다. 물론 하이데거의 존재사유도 넓은 의미에서는 인간중심주의에 해당한다. 인간만이 존재를 이해함으로써 하나의 세계를 열고 있기에 존재자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존재사유는 결코 인간을 존재자의 주인으로 놓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에게는 존재의 목자로서의 책무가 주어진다. 존재의 목자로서의 인간이 인간과 자연 그리고 신까지 조화롭게 공존할 세계를 열어 나가야 함은 물론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존재사유를 좁은 의미에서의 인간중심주의로 폄하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하이데거의 존재사유는 인간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는 새로운 휴머니즘을 추구한다.
이런 관점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사유는 장자(莊子)의 사상과 연관된다. 둘 사이에는 너무도 많은 유사점이 있다. 장자는 인간의 참다운 본질을 감추어진 도(道)와 관련지어 사유했다. 하이데거는 인간과 존재의 참다운 공속을 회복함으로써 인간의 인간다움을 사유했다. 이 점에서 하이데거와 장자는 일치한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역사성을 사유했다. 그런데 과연 장자에게 도의 역사성이 문제가 되는지는 의문이다. 하이데거가 태국의 승려에게 초연한 내맡김이야말로 우리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라고 강조한 것은 이런 까닭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열어 놓겠다. 여하튼 장자가 말하는 보광(葆光)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 그는 도를 깨닭은 인간의 모습을 은근한 빛에 비유했다. 인간만의 모듬살이에만 몰두한 사람은 은근한 빛을 모를 것이다. 그에게는 해(日)만이 유일한 빛을 될 것이니까. 하이데거도 우리 시대의 새로운 휴머니즘을 “빛이 스며들지 않는 숲”에 비유한다. 아마도 하이데거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의 욕구를 자제하는 것만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도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은근한 빛이 그리워진다.
참 고 문 헌
I. 하이데거의 저술
1) Sein und Zeit, (GA 2)
2) Holzwege, (GA 6)
3) Vorträge und Aufsätze, (GA 7)
4) Wegmarken, (GA 9)
5) Die Grundbegriffe der Metaphysik, (GA 29/30)
5) Beiträge zur Philosophie, (GA 65)
6) Die Technik und die Kehre, 7 Aufl., Pfullingen, 1988.
7) Gelassenheit, 3 Aufl., Verlag Günther Neske Pfullingen, 1959.
II. 다른 저자의 글
1) 신상희, ?시간과 존재의 빛? , 한길사, 2000.
2) F. W. von Herrmann, "Der Humanismus und die Frage nach dem Wesen des Menschen", in: Daseinsanalyse, Bd.5, Basel,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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