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몸의 철학적 담론

나뭇잎숨결 2021. 9. 29. 09:23


몸의 철학적 담론



노양진 (전남대․철학 교수)


몸은 ‘이성중심주의’ 또는 ‘정신주의’라고 불리는 서구의 지배적 지적 전통 안에서 무시되거나 간과되어 왔던 불운한 역사를 갖고 있다. 몸과 마음이 분리된 이원론적 전통 안에서 몸은 인간의 독자적 능력인 마음의 활동을 위한 도구적 존재로 인식되었으며, 나아가 마음의 활동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어 정신주의에 대한 철학적 도전이 심화되면서 몸은 새로운 담론의 주제로 재등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지나치리만큼 성행하는 몸의 담론에도 불구하고 몸은 여전히 우리에게 불분명한 어떤 것으로 남아 있다. 몸에 관한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몸의 작용에 관한 해명이라기보다는 ‘선언적’인 차원에서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몸에 관한 새로운 논의의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체험주의’(experientialism)이다. 체험주의는 최근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의 경험적 성과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우리의 사고와 경험에 있어서 ‘몸의 중심성’의 회복을 주장한다.


특히 20세기 후반에 들어 다양한 경험과학의 공동 작업으로 수행되기 시작했던 인지과학이 출발점으로 받아들였던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마음의 핵심적 소재가 우리 몸의 일부인 ‘두뇌’라는 사실이다. 두뇌에 대한 경험적 탐구를 통해 마음의 실체를 해명하려는 인지과학적 탐구의 성과는 그 자체로 마음에 관한 철학적 이론을 구성해 주는 것도 아니며, 또 마음의 모든 작용을 해명하기에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마음에 관한 전통적인 철학적 견해들이 그릇된 가정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에는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마음에 관한 새로운 해명은 완전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수렴되는 경험적 증거들과 양립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여기에서는 전통적인 몸과 마음의 이원론의 핵심적 난점들을 살펴보고, 이러한 이원론을 넘어서서 전개되고 있는 체험주의의 견해를 중심으로 새로운 몸의 담론 가능성을 검토할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몸의 복권’이라는 시각에서 몸에 관한 새로운 발견들이 함축하는 논의의 가능성을 몇몇 철학적 문제들을 중심으로 검토할 것이다.


2 몸과 마음의 이론

• 이원론의 난점: 플라톤과 데카르트
몸과 마음의 ‘이원론’(dualism)은 서구 지성사의 지배적 견해다. 그러나 이원론의 핵심적 난점은 구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분 이후에 제기되는 구분된 것들의 상호작용 문제에 있다.
몸과 마음의 이원론을 처음으로 철학적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다루었던 철학자는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인간을 구성하는 두 중심적 요소로 몸과 영혼을 나누고 있으며 이것들은 존재론적으로 다른 존재일 뿐만 아니라 각각의 인식 대상도 다르다고 주장했다. 즉 몸은 감각적 세계인 ‘현상계’를 인식하는 한편, 정신은 이데아(idea)의 세계를 인식한다고 생각했다. 몸과 마음이 획득하게 되는 지식은 대상도 성질도 다르다. 즉 몸이 감각을 통해서 현상계에 관해서 얻게 되는 것은 ‘의견’(doxa)일 뿐이며, 정신이 이데아의 세계에 관해 갖는 지식이 ‘참된 지식’(episthēme)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몸은 영혼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며, 나아가 몸은 참된 지식을 가로막는 장애물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후기의 ?파이드로스?(Phaedrus)에서는 ‘영혼’을 현상계와 이데아계를 연결하는 중간적 존재로 설정함으로써 몸과 마음을 연결시키려고 시도하지만 결과적으로 영혼은 두 세계 사이를 오가는 불분명하고 애매한 수수께끼로 남게 된다.
데카르트(R. Descartes)의 ‘실체 이원론’은 몸과 마음을 두 개의 분리된 ‘실체’(substance)로 본다. 즉 몸과 마음은 서로 의존하지 않고서도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는 몸이 물리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물리적 실체인 반면, 마음은 이러한 몸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별개의 실체라고 주장한다.
이 두 실체의 관계 문제는 플라톤이 겪게 된 것과 동일한 난문이다. 데카르트는 우리의 두뇌 어디인가 ‘송과선’(pineal gland)이라고 불리는 지점이 있으며, 여기에서 몸과 마음이 교접한다고 말했다. 근세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위대한 철학자 데카르트의 답변이라기에는 너무나 궁색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몸과 마음의 관계 문제가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가를 여실히 보여 준다. 그리고 이 문제가 실제로는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라일과 범주 오류
라일(G. Ryle)은 ?마음의 개념?(The Concept of Mind)에서 몸과 마음의 이원론의 비판을 통해서 새로운 심신 이론을 제시하기보다는 심신 문제에 관한 논의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는 그래서 자신의 작업이 “정신에 관한 기존의 지식을 확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미 알고 있는 지식들의 논리적인 지형도를 올바르게 그리려는 데 그 본연의 의도가 있다”고 말한다.
라일은 데카르트가 몸과 마음의 이원론을 제시하면서 ‘범주 오류’(category mistake)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몸과 마음을 별개의 실체로 간주하는 것은 마치 ‘전남대학교’와 ‘도서관’을 별개의 동등한 범주처럼 간주하는 오류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린아이가 전남대학교의 도서관, 본부, 학생회관 등을 다 구경하고서 “그런데 전남대학교는 어디 있지?”라고 묻는 것과 유사한 오류이다. 말하자면 전남대학교는 본부, 도서관, 학생회관, 인문대 등의 구체적인 건물들이 모여 이루어진 하나의 범주일 뿐이며, 따라서 전남대학교 자체가 도서관처럼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대상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데카르트가 몸과 마음을 대등한 범주라고 보았던 것은 착각일 뿐이다. 데카르트가 몸과 마음을 동등한 범주라고 간주한 것은 마치 도서관과 전남대학교를 동등한 범주인 것처럼 착각한 결과라는 것이다.
라일의 비판에 따르면 ‘몸’과 ‘마음’은 별개의 범주가 아니라 정신은 다만 우리가 접촉하고 관찰하는 몸의 활동들의 결과 또는 양상일 뿐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라일은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다만 신체적 활동이 없는 독립적인 정신 현상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라일은 데카르트적 이원론의 구도 안에서 정신을 ‘기계 속의 유령’(ghost in the machine)이라고 부른다.
라일의 데카르트 비판은 몸과 마음이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며, 적어도 몸의 존재 없이 마음이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물론 이러한 가정을 새롭게 받아들인다고 해서 몸과 마음의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라일의 권고를 따라 몸과 마음의 이원론적 이해를 포기함으로써 이 문제의 탐구에 있어서 전적으로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 김재권의 수반 이론
오늘날 영어권의 심리철학적 논의에서 가장 집중적인 논란을 불러온 이론들 중의 하나는 김재권의 ‘수반 이론’(supervenience theory)이다. 수반 이론은 우선 마음이 고유한 존재 영역을 갖는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정신은 신체적 활동에 ‘수반’해서 발생한다는 것이 이 이론의 주된 주장이다. 김재권은 자신의 ‘수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심신 수반] 모든 물리적 속성들이 똑같은 두 사물(대상, 사건, 유기체, 사람 등)들이 심적 속성에서도 다를 수 없다면 심적인 것은 물리적인 것에 수반한다. 즉 물리적 식별 불가능성은 심리적 식별 불가능성을 필함(entail)한다.

물론 수반 이론은 심리적으로 동일한 것이 물리적으로도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생물학적으로나 화학적으로 우리와 전혀 다른 구조를 가지면서도 우리와 동일한 심리를 공유하는 외계인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말하자면 수반 이론은 다만 “물리적 차이가 없으면 심적 차이도 없다”고 주장한다. 수반 이론에 따르면 신체적 활동이 주어지지 않은 정신의 독자적 존재는 인정되지 않는다. 이러한 측면에서 적어도 수반 이론은 비물질적 실체인 정신을 인정하는 데카르트적 이원론과는 양립할 수 없다. 수반 이론은 분명히 오늘날 성행하는 유물론적 성향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수반 이론은 수세기 동안 난문으로 남아 있었던 몸과 마음의 전통적 이원론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며, 동시에 새로운 대안적 이론이다. 그러나 수반 이론이 우리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해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수반은 다만 물리적인 것과 심적인 것의 원리적 관계를 말하고 있을 뿐, 이 두 영역 사이의 구체적인 작용 방식은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경험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수반 이론에 대해 제기되는 가장 강력한 비판은 수반 이론이 ‘환원주의적 물리주의’라는 것이다. 그것은 수반 이론이 모든 정신적 현상을 물리적 현상으로 환원시키려는 시도라는 비판이다. 이러한 비판에 직면해서 김재권은 자신의 수반 개념을 ‘강수반’과 ‘약수반’으로 구분하고, 스스로 약수반 쪽으로 입장을 정리해 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약수반의 입장을 취할 경우 정신적 현상이 물리적 현상에 수반된다는 주장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이 물리적 현상으로 완전히 환원된다는 주장을 거부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 김용옥의 희망, 기철학
김용옥은 서구의 이원론이 불러온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탁월한 문제 의식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대안처럼 제시되고 있는 기(氣)철학은 실체가 없이 하나의 불투명한 ‘철학적 희망’으로 남아 있다. 김용옥은 몸에 대한 탐구가 그 대안적 방향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옳지만, 그의 작업은 2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진전을 보이지 못한 채로 미궁에 빠져 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그 대안적 가능성을 ‘한의학’(漢醫學)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한의학에는 김용옥은 물론 우리가 원하는 몸의 이론이 없다.
잘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김용옥이 생각하는 ‘기’가 몸과 마음을 아우르는 것이든, 몸과 마음 사이의 어떤 중간적 존재든 그것은 여전히 플라톤적 난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기가 몸과 마음의 이분법적 구분을 와해시키는 데 부분적 기여를 할 수 있겠지만 제3의 존재의 설정은 문제의 해결보다는 더 많은 문제를 불러올 것이다. 김용옥의 난점은 자신의 고백처럼 실증적 탐구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이 난점이 경험과학에 의해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앞으로 지적하려는 것처럼 경험적 지식과 사실을 도외시하는 철학적 논의는 거의 예외 없이 선언적인 것으로 머물게 된다.

• 잊혀진 몸의 복권
몸은 서구 지성사를 통해 오랫동안 무시되거나 간과된 영역이다. 몸은 ‘철학적’인 것이 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고 평이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몸에 대한 몇몇 도전적인 주장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완고한 정신주의에 의해 간과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니체(F. Nietzsche)는 일찍이 몸의 중심성에 대해 매우 강력한 주장을 했지만 그의 주장은 철학사에 대한 ‘반역’ 정도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전적으로 [몸]일 뿐 그 밖의 아무 것도 아니며, 영혼이란 몸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붙인 말에 불과하다.” 그러나 니체는 이러한 주장을 위해 아무런 경험적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있으며, 니체가 원했다 하더라도 당시의 경험과학적 수준은 그것을 뒷받침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금세기 이르러서 메를로 퐁티(M. Merleau-Ponty)와 듀이(J. Dewey)의 철학을 통해서 몸의 중심성은 훨씬 더 체계적인 방식으로 옹호되었다. 이들은 경험 과학, 특히 심리학적 성과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이러한 주장에 이르게 되었다. 이들은 니체와는 달리 경험과학적 탐구의 성과를 통대로 몸의 중심성을 옹호하려고 했으며, 이들의 자연주의적 탐구는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고도 유용한 탐구의 방향을 열어 두었다.


3 인지과학과 마음의 탐구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은 1950년대 말에 출발해서 급속히 성장해 가고 있는 학제적 탐구다. 인지과학은 심리학, 언어학, 철학, 인류학, 신경과학, 컴퓨터과학 등 다양한 경험과학 분야가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우리의 정신 활동의 핵심적 소재가 우리의 몸의 일부인 ‘두뇌’라는 생각을 공유한다. 몸으로부터 분리된 신비로운 마음이 비로소 몸의 특수한 활동이라는 시각에서 탐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터너(M. Turner)는 이러한 새로운 탐구의 중요성을 “다가오는 시대는 인간의 정신이 발견된 시대로 알려지고 기억될 것”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레이코프와 존슨은 인지과학적 탐구를 ‘제1세대 인지과학’과 ‘제2세대 인지과학’으로 나눈다. 제1세대 인지과학은 195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주로 기능주의나 계산주의 모형을 중심으로 수행되었다. 여기에서 마음의 작용 방식은 컴퓨터와 유사한 어떤 것으로 가정된다. 마음은 추상적 기호를 산술적으로 조작하는 능력으로 이해되며, 따라서 마음의 작용에는 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확정된 알고리즘이 존재한다고 가정된다. 레이코프와 존슨은 이 시기의 인지과학을 제1세대 인지과학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넘어서 새롭게 구성되어 가고 있는 제2세대 인지과학의 핵심적인 발견들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제로 요약한다.

마음은 본유적으로 신체화되어 있다.
사고는 대부분 무의식적이다.
추상적 개념들은 대부분 은유적이다.

• 신체화된 마음
마음의 작용은 몸의 활동의 특수한 형태이거나 그 산물이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가정했던 순수한 마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마음은 본성적으로 신체화되어 있다. 마음의 작용은 몸의 활동으로부터 비롯되며, 몸의 활동에 의해 제약된다. 마음의 활동을 대변하는 서구적 이성 개념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미 또한 모두 신체화되어 있다. 우리가 추상적 또는 정신적이라고 부르는 모든 현상은 몸을 통한 물리적 경험이 확장되는 방식으로 주어진다.

• 무의식적 사고
우리의 사고는 대부분 의식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 이러한 무의식은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S. Freud)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억압된 것으로서의 무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사고와 행위에 있어서 의식의 영역에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의식이다. 나는 강의를 하면서도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두뇌 작용을 의식하지 못한다. 내가 말하는 적이 무작위적인 발화가 아니라면 그것은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그리고 문단과 문단이라는 구조를 갖는다. 그러한 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해 나의 두뇌는 일정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겠지만 나는 그 작동 방식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것은 구조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하다. 일상적 경험의 틀이 되는 개념체계들 또한 무의식의 영역에서 작용한다.

• 개념들의 은유화
고전적인 이론들은 은유가 단순히 언어를 비유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적 기술의 일종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체험주의의 탐구에 따르면 은유는 단순히 언어적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사고와 행위를 지배하는 매우 광범위한 인지 작용이다. 매우 제한적인 인지 활동을 제외한다면 우리의 대부분의 인지적 작용은 은유적으로 이루어진다.
문자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개념들은 매우 제한적이다. 외부 세계의 대상들을 가리키는 개념들은 문자적이다. 그러나 추상적인 개념들은 모두 은유적으로 형성된다. 즉 그것들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들을 투사함으로써 형성된다. 예를 들면, ‘사랑’, ‘자유’ 등과 같은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고 가르치는 방식을 보라. 구체적 경험들을 알려지지 않은 어떤 것에 은유적으로 투사함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개념이 생겨난다. 이 때 은유화는 A의 ‘관점에서’(in terms of) B를 이해하는 방식을 말한다. A는 이미 주어진 경험이며, B는 새롭게 형성되는 추상적 개념이다. 그래서 그것은 사실상 ‘기호화’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은유 작용은 개념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사고와 행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발견 이외에도 최근 신경과학은 두뇌의 작용에 관해 매우 중요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려 준다.

• 두뇌의 성장
아마도 두뇌에 대한 최근의 탐구를 통해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두뇌가 성장하며, 또한 두뇌가 분업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 관한 전통적인 생각과는 달리 두뇌는 미분화된 잠재적 능력을 갖고 있으며, 두뇌의 능력은 외부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점차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오감과 같은 기초적인 지각 능력들도 마찬가지다. 어린아이의 지각 발달은 지속적인 외부의 자극을 필요로 하며, 그러한 자극에 의해 반응 능력을 형성해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단순히 일차적인 지각 능력에 국한되지 않고 추상적이고 정교한 사고 작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를 들면 사회학에서 다루어지는 고립아들의 행동 특성은 적정한 성장기에 형성되지 못한 지각 또는 행동 구조가 정상적인 환경 안에서도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예를 들면 통사 구조의 학습은 유아기 때 가장 용이하며 그 이후로 지속적으로 쇠퇴한다. 반면에 단어를 암기하는 능력은 평생 매우 완곡하게 감소한다. 다양한 능력들이 가장 성공적으로 습득되는 나이가 있다.

• 두뇌의 분업
두뇌는 부위별로 서로 명확히 구분될 수 있는 역할을 갖는다. 신경과학자인 다마지오(A. Damasio)는 “두뇌는 어디에서나 똑같은 일을 하는 뉴런들의 덩어리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오늘날 두뇌의 분업은 신경과학 분야의 상식이 되었다.
다마지오가 제시했던 엘리엇 사례는 이성과 감정 사이의 고전적 구분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엘리엇은 뇌종양 수술로 인한 전두엽 손상으로 인해 다른 모든 능력이 온전한 채로 감정 능력이 상실되었지만, 그 결과 사회적 생활에 있어서 합리적 판단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즉 감정 영역의 손상은 우리가 흔히 ‘이성’이라고 부르는 영역의 작용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즉 이성과 감정은 전통적 구분이 가정하는 것처럼 독립적이지 않다.


4 철학적 함의

제2세대 인지과학의 경험적 발견들은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이해, 나아가 이 문제들과 관련된 철학적 논의에 많은 변화를 요구한다. 그 중 중요한 것들은 몇 가지만 열거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 정신주의의 거부
‘원하는 것’의 철학에서 ‘우리의 것’에 대한 해명으로의 전환은 인간의 경험적 조건에 대한 반성적 탐구로 이어진다. 듀이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원론의 핵심적 문제는 몸과 마음의 구분 자체가 아니라 그에 수반되는 ‘선택적 강조’(selective emphasis)이다. 그것들은 넓은 경험 개념 안에서 동등한 영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 미완의 철학
철학은 경험과학과 함께 성장하는 탐구의 형태로 이해된다. 철학은 경험적 증거들을 포괄하는 가설을 구성해야 할 것이다. 이 때 다양한 경험과학들이 제공하는 수렴적 증거(convergent evidence)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철학적 이론들은 지속적으로 경험적 증거들과의 상보적 관계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철학은 결코 확정적이고 완결될 이론에 이를 수 없다.

• 천진성(innocence)의 끝
인지과학의 성장과 함께 우리가 알게 된 경험적 사실들은 철학적 탐구에 너무나 많은 중요한 귀결들을 불러온다. 레이코프와 존슨은 인지과학의 성장으로 인해 2,000년 동안 지속되었던 ‘사변철학’은 끝났으며, 철학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것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경험적 지식의 부재를 앞세운 사변철학의 천진성은 더 이상 자리가 없다. 경험적 발견들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제시되었던 선험적이거나 초월적 가정들은 더 이상 정당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 이성
순수한 정신 능력으로서의 이성 개념은 하나의 ‘철학적’ 개념이다. 이성은 어떤 실제적 능력을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는 인식론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좋은 것’을 묶어서 부르는 이름일 뿐이다. 이성의 초월성이나 선험성은 거부되며, 이성과 감정의 이분법적 구분도 거부된다.

• 진리
진리는 개념체계에 상대적이며, 따라서 절대적 진리 대신에 ‘~에게 있어서의 진리’가 가능하다.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는 것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의 이름이다. 절대적 진리 개념을 거부한다고 해서 우리는 아무런 진리도 없다는 허무주의를 선택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다수의 진리들을 인정하는 다원주의(pluralism)가 열려 있는 가능성으로 주어진다.

• 실재론과 반실재론
몸에 대한 탐구를 통해 소박한 유형의 ‘실재론’(realism)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러한 실재론은 우리를 넘어선 세계의 존재를 인정하는 ‘형이상학적 실재론’과 입장을 달리한다. 우리는 우리의 밖에 우리의 몸과 유사한 물리적 대상들이 우리의 몸과 유사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사고는 이러한 실재론적 차원에서 국한되지 않으며, 은유적 방식을 통해 추상적․정신적 차원으로 확장된다. 이러한 확장 과정에서 인식 주체인 우리의 역할이 점차 커지며 여기에서 점차 증가되는 변이를 드러낼 것이다. 즉 우리의 인식에는 실재론적 차원과 반실재론적 차원이 공존한다. 몸에 관한 새로운 해명은 실재론과 반실재론이 우리의 경험에 대한 부분적인 해명들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 도덕적 실재
도덕은 인간의 삶을 위한 도덕이다. 도덕적 명제들은 자연적 삶으로부터 비롯되는 추상적 사고의 산물이며, 따라서 은유적 사고의 산물이다. 우리를 넘어선 도덕적 진리를 추구하는 도덕적 실재론은 도덕적 희망의 표현이다. 도덕적 진리는 객관적인 사물도 아니고 객관적인 원리도 아니다. 특정한 도덕 이론의 체계들은 특정한 은유들의 체계다. 절대적 도덕 원리는 적어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 객관주의/상대주의 대립을 넘어서
보편성과 객관성의 근거가 되는 ‘이성’의 본성은 경험적인 것들에 의해 해명될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객관성은 유기체적 종(種)으로서의 인간이 공유하는 경험의 공공성 정도로 한정될 것이다. 객관주의나 상대주의는 이러한 경험을 적절하게 설명하는 이론들이 아니다. 우리의 경험은 이 두 측면의 공존으로 이루어지며, 따라서 그것에 대한 해명은 객관주의/상대주의 이분법적 대립을 벗어난 제3의 길이 된다.

• 이론의 본성과 크기
우리의 현재의 조건에 부합하는 이론들의 모색이 필요하다. ‘원하는 것’에 관한 이론들을 통해 너무나 많은 ‘좋은 것’이 제시되었다. 말하자면 유토피아적 이론들은 여전히 어떤 형태의 유용성을 갖게 되겠지만, 적어도 그것들이 우리 자신과 세계를 해명하는 데 적절한 크기의 이론들이 아니라는 것이 지적되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에 대한 탐구에서 ‘우리의 것’에 대한 탐구로의 전환을 제안할 수 있다.

• 현대와 탈현대의 대립을 넘어서
이성, 진리, 자아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현대성(modernity)의 철학에 대한 반발은 ‘탈현대’(postmodern)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체계적 이론 구성을 거부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들의 강한 해체론적 성향은 이론 구성의 정당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체험주의가 제안하는 ‘경험적으로 책임 있는 철학’(empirically responsible philosophy)은 객관주의적 체계 건설을 거부하는 동시에 대안 없는 해체도 거부하는 제3의 길을 의미한다.

• 인간의 우월성
‘좋은 것’에 관한 편향된 정신주의적 과장이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다른 동물들보다 우월하다. 마음의 능력을 통해 인간의 위대함은 여전히 인정될 수 있다. 이러한 위대함은 마음의 배타적 위상과 능력에 의해 인정되는 것이 아니다. 좋은 것에 관한 과장된 담론은 우리를 우월한 종이라는 생각으로 이끌어 갈 수는 있겠지만 우리를 우월한 종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5 맺으며

대부분 피상적이고 선언적인 몸의 담론들은 우리에게 마치 ‘철학적’이라고 불리는 특권적인 담론 영역이 경험 영역과 아무런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들은 ‘철학적’이라는 특수한 장르가 아니라 경험적 내용을 간과하고 있거나 도외시한 선언적 주장들로 이루어지고 있다. 즉 그러한 주장들은 경험적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체험주의의 몸 이야기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다. 즉 몸에 관한 실질적인 철학적 담론의 가능성을 열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몸에 관한 최근의 담론이 궁극적으로 겨냥해야 할 것은 정신주의에 의해 간과되거나 무시되어 왔던 몸의 복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복권을 통해 우리는 완결된 이론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경험적 증거들이 수렴되는 지점들을 중심으로 우리 자신과 세계를 기술할 수 있으며, 그것은 우리 자신과 세계에 관한 비교적 편향되지 않은 안정된 기술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해체인가, 건설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미해결의 물음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채로 새로운 세기를 맞게 된 철학적 논의의 현주소를 되돌아볼 때, 철학의 갈 길에 관해 진지하게 묻는 우리들에게 체험주의의 제안은 새로운 출구를 위한 중대한 제안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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