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법철학』의 구조논리에 대한 비판적 고찰 ─ '추상법'에서의 상호주관성 문제를 중심으로 (Eine kritische Untersuchung uber die Strukturlogik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 ─ In besonderer Hinsicht auf das Problem der Intersubjektivitat im abstrakten Recht)
-김준수
주제분류: 법철학
주요어: 헤겔, 법철학, 상호주관성
요약문
본 논문은 헤겔의 『법철학』이 가진 구조논리와 방법론을 분석함으로써 『법철학』의 근본 의도를 해명하고 이에 내포되어 있는 방법론적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밝히려는 시도이다. 『법철학』에 대해 극단적으로 상반된 해석들이 상존하고 있는 상황은 『법철학』이 과연 '법의 규범적 이론'인가 '법현실의 기술적 이론'인가, 혹은 '법개념의 논리학'인가 '법의식의 현상학'인가와 같은 기본적인 물음들을 재검토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은 『법철학』의 논리적 방법론에 대한 해명 없이는 불가능하다. 『법철학』의 암묵적 전제인 법개념의 발생론적 정당화, 법주체의 승인상태, 철학적 법학의 방법론으로서의 논리적 서술방식 등의 분석은 헤겔 자신이 법의 토대인 상호주관성의 문제에 대해 이중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고 이것이 『법철학』의 구조적 이중성의 원인이 됨을 보여준다. 또한 『법철학』이 실제로 채택하고 있는 서술방법을 추출하여 이를 『논리학』과의 체계적 연관 속에서 고찰하면, 『법철학』 내에 '법개념의 논리학적 서술방식'과 '법의식의 정신현상학적 서술방식'이 혼재해 있음이 드러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이 논문은 본질적으로 규범적 이성법론인 『법철학』이 그 뛰어난 원리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상이한 서술방식의 혼합으로 인해 상당 부분 법의식의 발달에 관한 기술적 이론에 머물게 되었고, 이 때문에 법이론의 전개에 있어서 상호주관성의 원리에 반하여 개인주의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헤겔 『법철학』의 구조논리에 대한 비판적 고찰
─ '추상법'의 근거로서의 상호주관성 문제를 중심으로 ─
1. 문제설정
헤겔의 『법철학』이 의도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1) 『법철학』이 헤겔의 여러 저서들 중 가장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 온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원론적인 질문은 아직 만족스러운 답변을 얻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동안의 많은 연구와 분석을 통해 우리는 『법철학』이 어떠한 역사적·정신사적 배경으로부터 탄생했으며, 또 어떠한 법적·정치적 제도들을 지지하였는지에 관해 비교적 상세한 지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쟁들은 대부분 『법철학』을 단지 하나의 정치철학적 저서로 다루어, 여기에 서술된 사회정치제도가 당시 프로이센 제국에서 시행되었던 제도들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가, 혹은 헤겔의 국가론이 후대 파시스트 정권의 권력정치와 얼마만큼의 이론적 친화성을 가지는가를 밝힘으로써 『법철학』의 보수적인 혹은 진보적인 성격을 포괄적으로 규정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쟁의 학문적 의의는 충분히 인정되어야 하지만 그 자체로는 헤겔 외적인 시각에서 비롯된 비판이나 옹호에 그치는 것이어서, 『법철학』이 다루고자 하는 본질적인 문제를 내재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러한 결함은 특히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에서 잘 드러난다.
첫째로 우리는 『법철학』이 일차적으로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국가에서 실제로 적용되고 있는 사실적인 법에 대한 기술적(記述的) 이론으로 이해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역사적 우연성과 특수성을 초월하여 보편타당성을 갖는 법에 대한 규범적(規範的) 이론으로 이해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아직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헤겔의 법이념이 한편으로는 자연법 사상,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법실증주의 및 역사법학파와 어떠한 관계를 갖는가는 여전히 논쟁점으로 남아 있다. 현실 정치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법철학』에 접근하려는 시도는 많은 경우 "'철학적 법학'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대상으로 삼는 '법의 이념'은 무엇인가?"라는 헤겔에게는 근원적인 물음들을 그 정확한 의미와 함축된 전제들을 해명하지 않은 채 너무 쉽게 지나쳐 버리는 경향을 보인다.
둘째로 헤겔이 자신의 이론을 하나의 잘 근거 지워지고 정합성을 지닌 체계로 구축하기 위해 사용했던 『법철학』의 내적 구조논리와 서술방법이 아직 명확하게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1930년대의 Dulckeit와 Binder간의 일시적인 논쟁 그리고 1979년 헤겔의 법철학을 주제로 한 국제헤겔회의에서 발표된 몇 편의 논문을 제외하고는 이 문제점은 오랜 기간 전혀 인식되지 못했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기피되어 왔다.2) 그러나 구조논리와 서술
방법의 분석은 『법철학』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그리 중요치 않은 단순한 체계형식에 대한 문헌학적 관심의 문제만이 아니다. 『법철학』에 관한 문헌들을 둘러보면 이 저서가 얼마나 상이하게, 때로는 전혀 상반된 시각에서 해석되곤 하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이는 『법철학』에서 주제화되는 법개념의 여러 형태들, 즉 '추상법', '도덕성', '인륜성' 등이 각각 어떠한 체계적 지위를 갖는지, 그리고 그들이 동시에 서로 어떠한 연관을 갖고 있는지가 아직 확실히 파악되지 못했음을 말해 준다. 내용에 관한 해석의 차이는 궁극적으로 헤겔의 『법철학』에서 법의 원리가 어떻게 구조적으로 전개되고 있는가에 대한 견해의 차이, 즉 『법철학』의 구성논리와 방법론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방법론적 문제에 대한 해명은 우리에게 『법철학』의 올바른 이해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에 대한 내적 비판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
이 논문은 헤겔의 『법철학』의 구조논리를 분석함으로써 헤겔 내적 관점에서 서두에서의 원론적인 질문에 대해 일정 부분 해명하려는 시도이다. 물론 독립적인 하위체계이면서 동시에 전체 철학체계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어 있는 『법철학』의 구조논리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내용의 세밀한 분석 이외에도 『논리학』과 자연 및 정신에 관한 실제철학간의 관계, 더 나아가 각 실제철학들간의 체계적 연관에 대한 해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이 논문의 범위를 넘어서는 과제이다. 여기서는 단지 헤겔이 상호주관적 자유를 법개념의 존재근거로 설정하고 있다는 전제─이 전제는 물론 앞으로의 분석을 통해 정당화되어야 할 것이다─로부터 출발하여 『법철학』의 구조논리를 방법론적인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재구성해 보려고 한다. 이 시도가 『법철학』의 구조논리를 완벽하게 밝히기에는 미흡하겠지만, 최소한 이 문제와 얽혀 있는 난점을 보다 명확하게 제시하고 그에 대한 원인을 헤겔의 철학체계 내에서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법의 근거로서의 자유의 상호주관성이라는 개념적 원리에 비추어 볼 때 헤겔이 실제로 전개한 법이론의 내용이 지닌 부정합성은 특히 개인들간의 기초적인 법관계를 다루는 '추상법'에 관한 장에서 심각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의 비판적 고찰은 주로 『법철학』의 첫 번째 부분을 이루는 '추상법'에 관한 장에 집중될 것이다.
2. 기존의 연구 결과
자유의 상호주관성이 과연 그리고 어느 정도 헤겔의 『법철학』에서 근본적인 구성원리로 작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우선 『논리학』과 『법철학』간의 체계적 연관성과 관련하여 Hosle는 『법철학』은 뛰어난 상호주관성이론의 하나인 반면 『논리
학』은 이러한 상호주관성을 적절하게 포착할 수 있는 논리범주를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논리학』과 『법철학』간의 범주적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주관성이론의 틀 내에 머물고 있는 『논리학』을 상호주관성의 차원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정반대로 Theunissen은 『법철학』에서의 헤겔은 『논리학』에서 이미 확립한 상호주관적 자유의 이념을 불행히도 억눌렀고, 따라서 『법철학』이 『논리학』의 이념에 따라 수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한다.3)
이러한 논란은 『법철학』 자체의 해석에서도 반복된다. 이미 여러 사람들에 의해 헤겔의 법이론─좁은 의미로 이해된, 즉 추상법에 관한 장에서 서술된 법이론─이 '개인주의적'인 혹은 더 나아가 '점유개인주의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4) 심지어는 추상법에 관한 헤겔의 이론이 자유주의적 자연상태론에 대한 대용이론으로 간주되기도 한다.5) 이러한 문제점에 근거하여 Ilting과 Theunissen은 『법철학』을 규범적·실천적 법철학의 정초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법형태 속에서 서술된 '자유의식의 현상학' 혹은 근대적 법현실의 '서술을 통한 비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목할 만한 주장을 제기했다.6) 이러한 현상학적·부정이론적 해석은 법현실에 대해 『법철학』이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밝힘으로써, 『법철학』이 보수적인 법실증주의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비난으로부터 헤겔을 성공적으로 보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하던 『법철학』의 방법론적 문제점들을 드러내주는 데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러나 Ilting과 Theunissen의 주장은 헤겔의 『법철학』이 엄격한 논리성과 이에 기반을 둔 절대적인 규범적 타당성을 지니고 있음을 자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헤겔 자신의 이해를 논거로 끌어들이기에는 어려움이 크다.
이에 대해 Siep과 Fulda는 헤겔의 『법철학』이 이미 추상법에 관한 장에서부터 개인의 법적 권리능력에 대한 사회적 승인의 상태와 보편적인 상호주관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반론을 폈다. 더 나아가 이들은 『법철학』이 개인주의적 규정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러한 시초의 결함은 굳이 『정신현상학』의 특수한 논증방식을 이끌어들이지 않고도 『법철학』의 구성논리의 틀 안에서 사변적 『논리학』의 모델에 따라 체계정합적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보이려고 노력했다.7) 이러한 해석은 분명히 헤겔의 명시적인 자기해명에 더 잘 부합한다. 그러나 Siep과 Fulda는 또한 그들 편에서 Ilting과 Theunissen에 의해 제기된 방법론적 문제들을 과소평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내세운 몇 가지 중요한 논점들을 지나쳐 버리고 있다. Ilting과 Theunissen은 헤겔이 『법철학』에서 상호
주관적 자유를 개념적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들이 문제삼는 것은 헤겔이 그러한 전제에도 불구하고 법이론을 내용적으로 전개하는 있어서 상호주관성을 올바로 적용시키지 않았으며, 또 이렇게 시초 단계에서 상호주관성을 억누른 것이 ─『법철학』을 법에 관한 규범학의 정초로 이해하는 한─ 『법철학』 전체에 심각한 부정적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은 각기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는 만큼이나 또한 모두 일면적이고 불충분하다. 이제 앞으로의 고찰을 통해 이러한 해석의 차이가 실은 상호주관성의 문제와 관련해 『법철학』 자체 내에 구조적으로 놓여 있는 방법론적 모호성에 기인한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3. 상호주관성 문제에 대한 헤겔의 입장과 그 모호성
방법론적 문제를 해명하기 전에 먼저 자유와 법의 상호주관성 문제에 대해 헤겔 자신이 『법철학』에서 실제로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우선 헤겔의 『법철학』이 잘 질서지워진 공동체의 삶 속에서 개인의 상호주관적 자유가 실현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음을 입증하기란 어렵지 않다. 헤겔에 따르면 법의 개념은 '인륜성'의 단계에서 완성되는데, 이 인륜성은 상호주관적·긍정적 자유가 제도적으로 그리고 또 행위하는 개인의 의식 속에서 완전하게 현실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륜성의 영역에서는 타자와의 관계가 대칭적이고 상호적이며, 이러한 관계의 구속성이 법률이라는 보편적인 형식으로 정착된다. '추상법'과 '도덕성'의 영역에서는 아직 분리되어 있던 타자에 대한 권리와 타자를 향한 의무가 여기서는 하나의 관계 속에서 상응한다. 인륜성 속에서 개인은 "나의 실체적 및 특수한 이익이 개별자로서의 나와의 관계로서의 타자의 이익과 목적 안에 보존되고 포함되어 있고, 따라서 이 타자가 나에게 타자가 아니며 이러한 의식 속에서 내가 자유롭다는 의식"을 갖게 된다(R 268). 여기서 인간은 더 이상 고립된 개별자가 아니라 타자와의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구체적인 자유와 실체적인 개별성을 발견하는 "보편자의 구성원"이다(R 303 A.). 이러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속에서 처음에는 단지 즉자적으로만 존재하던 '자유의 개념'이 객관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실현된 "자유의 이념"으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R 142).
그런데 선행하는 논리범주를 이로부터 도출되는 논리범주에 의해 퇴행적으로 근거짓는 헤겔 『논리학』의 특이한 방법론을 상기한다면, 논증적 서술에서는 귀결로 등장하는 인륜성이 "실제로는" 오히려 선행하는 추상법과 도덕성을 자신의 계기로 산출하는 "첫 번째의 것"이며 "진정한 근거"라는 헤겔의 주장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R 254 A.). 이에 따르면 추상법과 도덕성은 인륜성에 의해서야 비로소 현실적일 수 있으며, 인륜성 없이는 실체성을 갖지 못하는 '추상'들에 불과하다. 이는 개인의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권리요구와 행위준칙이 구체적인 공동체 속에서 비로소 보편타당한 실정법의 형식과 제도적 안정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사적 법인의 형식적 권리와 도덕적 주체의 특수한 권리가 인륜성을 근거로 해서만 구속력 있는 법으로서의 타당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르면 인륜적 자유가 바로 법의 진정한 출발점이고 원리이며, 『법철학』은 이러한 의미에서의 법의 이념과 그 발전을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점은 『법철학』의 개념적 시초에서도 확인된다. 『법철학』의 서론에서 헤겔은 자유의지를 이미 즉자대자적인 보편의지로 발전시킨(R 8-28) 이후에 비로소 법을 "자유
의지의 현존재"로 정의하고 있다(R 29). 이때 즉자대자적 의지는 '개별성'의 규정을 가지는데, 이 '개별성'은 『논리학』에 따르면 보편성과 특수성의 구체적 통일을 의미하는 개념논리적 범주로서, 존재논리에 등장하는 '대자존재'이나 '일자(一者)'와는 판이한 것이다(R 7/A.). 이러한 개념논리적 개별성으로서의 의지는 더 이상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자유가 아니라 "이념으로서의 자유"를 자신의 대상으로 가진다(R 29). 바로 이런 강조된 의미에서의 자유의 이념이 법의 개념을 형성하는 것이고, 『법철학』의 내용은 이러한 법개념이 그의 내재적 발전을 통해 여러 객관적인 법형태를 구성해가는 과정을 서술하는 것이다. "법과 도덕성과 모든 인륜성의 원리"는 "자연성의 직접성과 개별성을 지양한 즉자대자적 의지"라고 헤겔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R 21 A.). 이상의 고찰에서 헤겔에 있어서 법 일반의 근원은 보편적인 자유의지이고, 추상법의 장에서 서술되고 있는 사적 개인의 법률적 법은 이러한 법개념으로부터 이끌려 나오는 하나의 특수한 형태라는 것이 밝혀진다.8)
헤겔에 의하면 "그 추상적 개념 속에 있는 즉자대자적으로 자유로운 의지"가 이제 '추상법'의 원리를 이룬다(R 34). 하나의 개념이 그 시초에 있어서는 아직 추상적이고, 따라서 "직접성, 즉 존재의 형식" 속에 있다는 것은 헤겔의 『논리학』으로부터 잘 알려져 있는 바이다. 그런데 문제는 헤겔이 직접성의 형식 속에 있는 보편적으로 자유로운 의지를 무매개적 개별의지와 동일화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직접성의 규정에 따르면 즉자대자적으로 자유로운 의지는 실재에 대해 부정적이며 오직 자기 자신과 추상적으로 관계하는 현실성 ─즉 한 주체가 지닌 내적으로 개별적인 의지이다." (ibid.)
이와 같이 존재의 규정과 현존재의 규정이 과연 직접적으로 동일시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아무튼 헤겔은 이러한 동일화를 통해 자유의지의 시초 형태에서 보편의지가 지닌 상호주관성을 제거해 버리고 추상법의 주체를 극히 유아론적으로 규정한다. 물론 헤겔은 의지의 이러한 직접적 형식 역시 즉자대자적 의지의 개념규정의 하나이고, 따라서 이미 내적으로 보편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때의 보편성이란 "형식적인 보편성, 자신의 개별성 안에서 자기의식적인, 그러나 그밖에는 내용이 없는 단순한 자기관계"를 뜻할 뿐이다(R 35). 그런데 이러한 무매개적 개별의지는 헤겔이 R 5에서 단지 부정적 자유만을 부여했던 '무규정적 의지'와 전혀 다르지 않다.9) 헤겔은 이러한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있는 개별의지의 추상적·형식적
보편성을 '인격성'으로, 그리고 이 인격성의 현존재적 담지자를 '인격자'로 설정한다(ibid.). 추상적인 인격성의 현존재로서의 인격자는 헤겔에 따르면 "배타적 개별성"(R 34), 즉 ─『논리학』의 범주를 빌자면─ 타자와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고 단지 대자적으로만 존재하는 '일자'이고, 그의 자유는 "추상적 의지 일반의 혹은 이에 따라 단지 자기 자신과만 관계하는 하나의 개별적인 인격자의 자유"이다(R 40).
헤겔이 『논리학』에서는 극히 부정적으로 다루었던 개념형태인 '일자'에게도 『법철학』에서는 하나의 독립적인 법영역을 부여하는 것은 그의 만년에야 비로소 명확해진 다음과 같은 통찰을 표현하고 있다. 즉 구체적 자유는 개별자의 사적 자유를 보편성으로 복귀시키는 것만큼이나 또한 그것을 인정하고 충족시키는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헤겔은 여기서 존재규정과 현존재규정을 동일화함으로써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오히려 파기하고 있다. 그는 개인에게 개념논리적 '개별성'이라는 진정한 규정을 되돌려주는 대신 그 자신이 인격성을 극히 개인주의적으로 규정하고 부정적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헤겔의 법이론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것이 이렇게 추상적 개별자로 규정된 인격자의 부정적 자유에 기초하여 구축된다는 데 있다.
"인격성은 법적 권리능력 일반을 포함하고 있으며 추상적인, 따라서 형식적인 법의 개념을 그리고 그 자체 추상적인 기초를 형성한다." (R 36)
이렇게 법적 인격성을 유아론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발생하는 내적 모순은 이 규정으로부터는 헤겔이 그의 법이론의 근거로 삼게 되는 "하나의 인격자가 되어라. 그리고 타인을 인격자로서 존중하여라"라는 "법의 명령"이 결코 도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ibid.). 정언명법의 형식으로 표현된 이 명령은 그 안에 이미 상호주관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주체를 배타적 개별자로 규정하는 헤겔의 특이한 규정을 전제한다면, '소유'와 '계약'과 '불법'의 형태로 전개되는 추상법에 관한 이론이 일관된 논리정합성을 가진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이 전제가 내용적으로 수긍할 만하고 방법론적으로 모순이 없는가에 있다.
이러한 전제는 첫째로 헤겔의 법이론이 그가 비판하는 초기시민사회적 자연법론보다도 오히려 더 개인주의적인 논증형태를 띠도록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헤겔은 그의 소유론에서 외적 사물에 대한 개별의지의 직접적 관계, 즉 타자의 동의가 필요 없는 주관적인 의지표명에서 소유권의 법적 근거를 찾는 점거론(Okkupationstheorie)을 옹호한다. 그런데 이는 모든 권리와 법은 그 개념상 법담지자들간의 상호승인을 전제로 하는 사회적 범주라는 피히테와 예나 시기의 헤겔 자신의 통찰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예나 시기의 헤겔은 승인이론에 기반하여 '점유'(자연상태에서의 감각적 사실)와 '소유'(사회상태에서의 승인된 권리)를 범주적으로 명확하게 구분했었다. 반면에 『법철학』에서는 흄이나 칸트의 계약주의 모델 이전의 록크적 자연권 모델로까지 후퇴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점유는 곧 구속력을 갖춘 법적 권리로서의 소유로 파악되고, 계약은 개별의지의 외화(外化)에 의해 이미 완성된 소유권을 자유의지에 더 적합한 비물질적 형태로 실현하는 것일 뿐이다. 그의 소유론은 ─적어도 주관적 의지의 운동을 기술하는 차원에서는─ 상호승인의 이념과 상호주관성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주관성의 배제는 '계약'과 '불법'으로 전개되는 추상법의 영역 내내 회복되지 못한다.
둘째로 이러한 상호주관성의 결여는 헤겔의 법이론을 보편적 이기주의에 기초하여 구
성되는 피히테의 법이론과 유사하게 권력이론의 성격을 갖도록 만든다. 여기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법은 기본적으로 "인격성과 여기서 비롯되는 것을 훼손하지 말라"는 "금지"의 규정만을 갖고(R 38), 권리는 타인에 대한 강압적 권한주장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법이 그 어떤 형태에서건 "자유의 규정이고 현존재"이지 자유의 제한이 아니라는 헤겔 자신의 법개념과 조화되지 않는다(R 30 A.).
셋째로 법주체에 대한 개인주의적 규정은 추상법에 관한 장에서뿐만 아니라 인륜성에 관한 장에서까지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예를 들어 시민사회의 모순을 극복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법(司法)'의 형식주의, 군주제만이 유일하게 정당성을 갖는다는 주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제연합의 불가능성과 전쟁의 인륜적 필연성에 대한 헤겔의 믿음은 사적 법인은 오직 자기 자신과만 관계하는 배타적 대자존재라는 부정적인 규정에 기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개인의 사적 권리는 헤겔의 법철학 체계에서 다른 종류의 권리, 즉 도덕성이나 인륜성에 기초한 권리와 충돌할 경우 후자에 종속되어 버리는 매우 허약한 지위를 갖고 있는데, 이는 헤겔 자신이 사적 권리를 그토록 결함 있는 것으로 규정한 개인적 자유 위에 구축하기 때문이다.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바와 같이 헤겔의 국가론이 지닌 실체주의적 혹은 전체주의적 경향은 개인에 대한 부정적 규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에 따르면 헤겔의 『법철학』이 보편의지의 상호주관적·긍정적 자유를 그 원리와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처음의 전제는 유지되기 힘든 것처럼 보인다. 헤겔의 법이론은 오히려 전(前)사회적인 개별적 법주체의 부정적 자유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헤겔의 법이론이 지닌 단지 한 측면, 그것도 논증의 표면에 나타나는 한 측면에 불과하다. "자유가 현존재를 갖게 되는 독특하고 참다운 기반", 즉 법의 진정한 토대는 실은 고립된 개인의 주관적 의지가 아니라 상호주관적인 "의지와 의지와의 관계"라고 헤겔은 말한다(R 71). 헤겔이 이미 추상법에 관한 이론에서 보편의지의 상호주관성을 개념적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은 해설과 강의기록에서 나타나는 헤겔의 언명(R 8 N., 38 N., 95 A. 등), 그리고 『법철학』은 개인들간의 상호승인의 과정을 이미 완결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 증명해 준다. 더 나아가 이에 대한 분명한 증거는 역설적이게도 바로 일견 극히 개인주의적인 헤겔의 소유론이다. 헤겔이 『법철학』에서 직접적 점유를 법적 소유와 동일시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예나 체계에 있어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처음부터 행위주체가 상호주관적으로 '승인받은 존재'라는 조건으로부터 출발하고, 따라서 개인의 주관적 행위가 이미 보편적인 법적 유효성을 지닌다고 전제한다는 점에 있다. 소유권을 근거짓기 위해 요구되는 상호주관성은 계약에 의해 비로소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 점유취득 속에서 "타자와의 선취된 관계"로 이미 즉자적으로 존재한다(R 51). 이러한 상호주관성이 이후에 계약이나 불법에 대항한 법수호를 통해 행위자의 의식 속에서 활성화되는 것이다. 추상법의 영역은 자연상태가 아니라 이미 법적 상태이고, 추상법은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보편의지의 현존재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법적 자유의 상호주관성은 『법철학』에서 이제 비로소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그 시초부터, 즉 추상법에 관한 장에서부터 구성원리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분석에서 헤겔의 법이론이 전체적으로 상호주관성의 문제에 대해 이중적이고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 『법철학』은 보편의지의 상호주관적·긍정적 자유를 법의 진정한 출발점이자 근거원리로 삼고 있으면서도 법이론을 내용적으로 전개할 때에는 상호주관성을 배제한 채 배타적 개별의지의 부정적 자유로부터 출발하고 있
는 것이다. 이러한 모호성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혹시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론을 해명함으로써 이러한 모호성이 해소될 수 있을까? 아니면 헤겔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방법론적인 문제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다음 장에서 『법철학』의 몇 가지 중요한 전제들을 살펴봄으로써 이 질문들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4. 『법철학』의 몇 가지 전제들에 대한 비판적 분석
『법철학』은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체계이지만, 그렇다고 자기완결적이거나 전혀 전제를 가지지 않는 체계는 아니다. 오히려 『법철학』은 그것을 해명하지 않고서는 『법철학』을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법철학』 내에서는 더 이상 혹은 아직 주제화되지 않는 많은 전제들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 우리의 논의에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전제들이다. ① 법개념의 발생론적 정당화, ② 법주체의 보편적인 승인상태, ③ 철학적 법학을 위해 유일하게 타당한 방법론으로서의 사변적 논리학이 그것이다.
1) 법개념의 체계적 발생
"철학적 법학"으로서의 『법철학』은 "법의 개념과 그의 실현을 대상으로 한다"(R 1). 그런데 이러한 '법의 개념'에 대해 헤겔은 "그 생성에 있어서는 법학의 영역 밖에 있고 그것의 연역은 여기서는 전제되어 있어서, 법개념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R 2).
법의 개념이 이미 주어져 있다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첫째로 법개념은 세계정신의 역사적 발전을 통해 객관세계 속에 이미 실현되어 있고, 따라서 철학적 법학의 과제는 오직 법현실 속의 이성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라고 헤겔은 믿었다. 『법철학』과 실제 역사와의 연관에 관해서는 다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하는 것에 머물겠다. 『법철학』은 『역사철학』에서 비로소 주제화되는 대상인 국가와 민족정신을 발생론적·개념적으로 마련한다는 면에서 서술순서에 따라서는 『역사철학』의 전단계를 형성하지만, 근거이론적·내용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역사철학』을 전제하고 있다. 『법철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근대 세계에서 비로소 현실화된, 그러나 그 원리에 있어서는 영원한 법의 개념이다.10)
법의 개념이 이미 주어져 있다는 말은 둘째로 『법철학』이 법개념의 체계적 발생을 선행하는 철학체계의 어느 부분에서 완결된 것으로 전제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헤겔은 그의 후기 체계에서 법개념을 『법철학』 이전의 어느 곳에서도 명시적으로 주제화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법개념이 체계론적으로 발생하는 부분이 어디인가를 단정할 수는 없다. 단, 예나 체계를 참고한다면 법개념의 발생장소는 '주관정신'의 철학 중 '승인하는 자기의식'에 관한 장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정은 후기 체계의 문맥을 살펴보더라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2) 승인받은 존재로서의 법적 인격자
객관정신의 영역에 속하는 『법철학』은 '승인을 위한 투쟁'이 주관정신의 영역에서 이미 종결된 것으로 간주하고, 따라서 "승인의 계기를 자기 안에 이미 내포하고 있고 전제한다"(R 71 A.). 이러한 전제가 자의적인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체계적으로 잘 근거지워져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수긍할 만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타자의 자유로운 승인을 얻지 못한 주관적인 권리주장은, 설사 그것이 강제나 권위의 힘을 빌어 사실적으로 관철될 때라도 한낱 힘에 불과한 것이지 아직 법적 권리는 아니다. 법적 권리는 그 개념에 있어서 항상 하나의 사회적인 관계이다. 헤겔에 의하면 행위주체가 이미 '보편적으로 승인받은 존재'라는 전제를 통해 『법철학』의 "즉자대자적인 정신"은 주관적 자기의식의 형태로 나타나는 "현상하는 정신"과 구별되는 것이다(R 35 A.).
그런데 『법철학』에서의 법적 인격자은 실제로 어떤 것으로 인정받은 존재로 등장하는가? 『법철학』에서 헤겔은 인격자가 이미 그의 법적 권리능력을 인정받은 존재라는 것에 대한 체계적 근거를 『정신현상학』에서의 승인이론과 『엔치클로페디』에서의 승인이론 양자에서 찾는다(R 35 A./ 57 A.). 여기서 문제는 ─최소한 헤겔이 『법철학』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범위 내에서는─ 이 두 가지 승인이론이 전혀 다른 귀결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헤겔이 추상법의 주체가 되는 '인격자'를 개념적으로 규정하면서 이 두 가지 형태의 승인이론을 그 차이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중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상호주관성의 문제에 대해 『법철학』이 보이는 모호성의 근원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우선 형식체계적인 면에서 본다면 『법철학』은 『엔치클로페디』의 승인이론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런데 『엔치클로페디』에서는 승인투쟁이 '보편적 자기의식'으로 결말을 맺게 된다(E 435). 이때의 '보편적 자기의식'이란 상호승인을 통하여 실현되고 또 이를 자각하고 있는 자립적인 개인의 주관성, 즉 상호주관적으로 보편성을 획득한 자기의식을 뜻한다.
"보편적 자기의식은 타자 자신 속에서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이때 각자는 자유로운 개별성으로서 절대적인 독립성을 갖지만, 그의 직접성 혹은 욕구의 부정을 통하여 타자와 구별되지 않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며, 자유로운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정받은 존재라고 알고 있고 또 그가 타자를 인정하고 자유로운 존재로 아는 한에서 자기 자신을 인정받은 존재로 아는 그러한 상호성으로서의 실재적인 보편성을 지닌다." (E 436)
헤겔에 의하면 이러한 '보편적 자기의식'이 바로 인륜성의 토대를 형성한다(E 436 A.). 철학적 법학의 목표가 법체계를 "실현된 자유의 왕국"이라고 증명하는 것이라면(R 4), '보편적 자기의식'은 이러한 시도에 아주 적합한 출발점을 제공해 준다. 더 나아가 '보편적 자기의식'을 전제할 때에만 비로소 헤겔이 왜 그의 법이론을 시작하면서 법적 권리능력을 서로 존중하라는 '법적 명령'을 별다른 근거를 대지 않고도 정언명법의 형식으로 설정할 수 있었는지가 설명된다. 또한 헤겔은 과거의 로마법에서는 한 개인의 법적 권리능력이 그의 특수한 사회적 지위에 매여 있었던 반면 근대의 사법(私法)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자유 및 이에 대한 자각적 의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데에서 자신의 법이론과 로마법의 차이를 찾는다(R 40 A.). 이러한 생각들에 비추어 본다면 철학적 법학의 출발점은 '보편적 자기의식'의 상호주관적·긍정적 자유, 그러한 보편적 자기의식으로
서 승인받은 존재이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헤겔이 자신의 『법철학』을 내용적으로 전개할 때 진정 이러한 전제로부터 출발했었다면, 그의 법이론에서 법주체는 더 이상 배타적 개별자가 아닌 보편적 개별자이었어야 할 것이고, 추상법의 규정도 개인주의가 아닌 인륜성에 기초한 내용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용적인 면에서 헤겔의 법이론은 『엔치클로페디』의 '보편적 자기의식'보다는 『정신현상학』의 '스토아적 자기의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 『정신현상학』에서는 승인투쟁의 결과로 발생하는 것이 '스토아적 의식'인데, 이 '스토아적 의식'은 "순수하게 공허한 일자"에 지나지 않고 또 그의 자유는 "추상적 자유"에 불과하다(Pha, 356/159). 『정신현상학』에 따르면 바로 이러한 추상적인 개별자의 현실적 현존재가 "인격자의 법적으로 승인받은 존재"이고, 그의 부정적 자유가 법적 상태의 원리를 이룬다(Pha, 546). 이때 '법적 인격성'은 "절대적으로 개별적이고 다른 모든 사람을 배제하며 소유를 가지는 것"이라고 규정된다(Pha, 412). 『법철학』에서의 법주체는 바로 이러한 정신현상학적 의미에서의 '인격자'이다. 『정신현상학』에서 '스토아적 자기의식'이 실은 '불행한 의식'임이 밝혀지듯이 『법철학』에서의 '법적 인격자'는 두 가지 극단적인 규정으로 분열된 존재이다. 법적 인격성이라는 측면에서 법적 인격자는 개인의 특수성과는 전혀 무관한 추상적 보편성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이 사람이라는 측면에서 그는 동시에 "직접적 개별자"이어서, 그의 특수성은 "아직 개념의 특수성이 아닌 자연적 의지의 특수성"에 머무른다(R 47/ 151 Z.). 그런데 형식적인 법으로서의 추상법은 각 개별자의 특수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는 '법적 인격성'의 추상적 보편성과만 관계할 뿐이다. 부정이론적으로 볼 때 추상법에 대한 헤겔의 서술은 매우 날카로운 비판을 함축하고 있다. 추상법에는 단지 상호주관성뿐만이 아니라 개인적 자유의 가능성의 조건이 되는 "주관성의 계기"마저도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R 141 Z.). '법적 인격자'는 타자와 무관한 개별자이다. 그러나 그는 법적 권리능력을 지닌 추상적인 인격성으로서만 인정받았을 뿐이다. 추상법에서는 누가 법적 인격자이고 또 그가 자신의 권리를 실제로 사용하는지는 전혀 문제가 안된다. 추상법의 주체는 그 담지자를 임의로 대체할 수 있는 내용 없는 가면에 불과하다. 이러한 추상성 때문에 '법적 인격자'라는 표현은 헤겔에게는 "경멸할 만한 것"이다(R 35 Z.). 그러나 헤겔은 법주체에 대한 규정을 로마법에 대한 정신현상학적 기술로부터 빌려 옴으로써 이제는 헤겔 자신의 법이론이 그가 비판했던 로마법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헤겔에 있어서 로마 시대의 법이란 다름 아닌 "단지 추상적이고, 엄청난 것으로 불어나는 자의를 한데 묶는 형식적인 법으로 모든 개인을 사적 개인으로 그리고 무차별적인 것으로 몰락시키는" 것이다(R 357). 로마법에 대한 헤겔의 신랄한 비판은 실은 헤겔 자신의 법이론에 대한 자기비판이 되었어야 한다. 왜냐하면 추상법에 관한 헤겔의 이론은 실은 로마법의 원리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체계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문제는 헤겔이 추상법에 관한 이론을 두 가지 상이한 승인모델에 그 차이점을 고려하지 않고서 동시에 연관시킨다는 것이고, 여기에 『법철학』이 상호주관성의 문제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게 되는 한 원인이 있다. 형식체계적인 면에서 헤겔은 추상법의 보편적 구속력을 근거짓기 위하여 『엔치클로페디』에서의 '보편적 자기의식'이 지닌 긍정적 상호주관성을 법의 토대로 삼는다. 그러나 법의 내용적 규정에 있어서는 그는 『정신현상학』의 '스토아적 자기의식'을 출발점으로 삼고 보편적으로 승인받은 존재를 자기의식의 공허한 자기관계, 즉 추상적 개별자의 부정적 자유의 한 계기로 전락시킨다. 『엔치클로페디』의 승인이론에 의하면 개인은 그의 직접적인 배타적 개별성을 지양하고 자신이 개별성 속에서 동시에 상호주관적으로 보편적인 존재임을 입증했을
때에 비로소 진정으로 승인받은 존재가 된다. 이에 따르면 법주체는 보편적 의지에 의해 매개되고 타자를 인정하며 타자에 의해 인정받은, 다시 말하면 상호주관적으로 계몽된 개별자이어야 한다. 그러나 추상법에 관한 헤겔의 이론에서는 승인받은 존재는 단지 자신의 원자적 개별성에 집착하는 사적 개인의 추상적인 법적 권리능력으로 그 의미가 축소된다. 이러한 의미축소를 통하여 보편적 승인이라는 전제는 개별인의 주관적인 의지행위를 상호주관적으로 유효한 법행위로 직접 효력을 부여하는 현상유지적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3) 『논리학』과 『법철학』의 연관
헤겔에 있어서 '논리적 이념'은 자연과 정신에 관한 구체적인 학문의 "원형자"이고 "내적 조형자"이다(L II, 265). 구체적 학문들을 고찰함에 있어서 본질적인 관심은 "단지 순수 사유의 형식들의 특수한 표현양식인 자연과 정신의 형태들 속에서 논리적 형식을 인식하는 것"에 있으므로, 이 구체적인 학문들은 단지 "응용논리학"에 지나지 않는다(L I, 84). 헤겔은 『법철학』 역시 "그 전체 및 부분들의 형성이 논리적 정신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평가받기를 원했다(R, 12 f.). 『법철학』은 사변적 『논리학』을 유일하게 타당하고 이미 확보된 학적 방법론으로 전제한다. 『논리학』은 『법철학』에게 형식적인 절차와 서술방식뿐만이 아니라 "내용분류를 규정하는 원리"까지도 제공한다. 이러한 전제는 『법철학』의 내용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왜냐하면 헤겔에 따르면 하나의 실정적 법규정에 대한 "즉자대자적으로 타당한 정당화"란 오직 논리적인 "개념으로부터의 전개"에 있기 때문이다(R 3 A.). 그러므로 『법철학』의 내용이 규범적 타당성을 지닌다는 것에 대한 보증은 오직 법개념의 서술의 엄격한 논리성에 있다.
그러나 헤겔의 『논리학』은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그렇다면 『법철학』의 구성원리를 이루는 논리학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법철학』의 구조논리를 해명한다면 헤겔의 법이론이 상호주관성을 억누르고 있는 이유를 정합적으로 설명해낼 수 있을까? 아니면 이를 통해 오히려 『법철학』이 방법론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음이 확인될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데 있어서의 근본적인 어려움은 『논리학』과 『법철학』간의 구조적 연관의 문제가 지닌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헤겔 자신이 이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주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법철학』에서 하나의 법형태부터 상위의 다른 법형태로의 이행이 논증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할 곳에 이르면 헤겔은 자주 자신의 『논리학』을 참조하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간결하고 막연한 참조지시에 머무르기 때문에 구체적인 논증절차를 밝혀준다기보다는 오히려 모호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헤겔의 『법철학』의 체계적 구성원리를 형성하는 논리적 형식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이제 다음 장에서 『법철학』의 구조논리를 해명함으로써 이 과제를 가능한 한 해결해 보려고 한다.
5. 『법철학』의 구조논리와 그 문제점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법철학』의 세 부분을 『논리학』의 세 부분과 병렬시킴으로써 『법철학』의 구조논리를 해명하려고 시도하였다. 이에 따르면 추상법에 관한 장은 '존재론', 도덕성에 관한 장은 '본질론', 인륜성에 관한 장은 '개념론'과 각각 상응한다.11) 이러
한 해석의 근거는 헤겔의 후기 체계에 있어서 『논리학』과 각각의 실제철학 사이에 반복적인 원환적 상응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헤겔 역시 추상법의 기본규정을 "직접성, 즉 존재의 형식 속에서의" 의지로(R 34 Z.), 도덕성의 기본규정을 "의지의 내적 반성과 그의 대자적 동일성"으로(R 105), 그리고 인륜성의 기본규정을 "의지의 개념과 특수의지인 그의 현존재의 통일"로 설정한다(R 143). 이러한 해석은 왜 추상법과 도덕성에 관한 장에서는 부정적 자유만이 나타나고 인륜성에 관한 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긍정적 자유가 나타나게 되는지를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더 깊은 세분화 없이 이 도식틀만을 고집한다면 『법철학』의 구조논리가 충분히 해명되지 않을 뿐더러 내용적으로 잘못된 해석으로 이끌 위험까지 안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해석은 헤겔 철학의 부분체계들간에는 원환적인 상응관계 외에도 동시에 직선적인 발전연관이 있음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철학의 한 범주는 그것의 체계적 위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더 많은 논리적 범주들에 의해 중첩적으로 규정된다. 이에 따라 전체 체계의 세 번째 부분을 이루는 '정신철학'은 근본적으로 '개념론'에 기반을 둔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의 운동형식은 '개념'의 운동형식과 마찬가지로 '이행'이나 '현상'과는 구분되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발전'인 것이다(E 161/ 442). 따라서 '주관정신'의 철학 내의 '정신학'의 단계에서부터는 정신의 운동이 고찰대상이 되는 정신 자신에게 의식된 자기규정이어야만 한다. 이러한 분석으로부터 『법철학』은 더 이상 '존재─본질─개념'이라는 직접적 규정들의 순서에 따라서가 아니라 '보편성─특수성─개별성'이라는 개념규정들의 순서에 따라 그 내용이 분류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헤겔 역시 추상법을 "인격성 자체의 자유의 보편적인 것"으로(R 119 N.), 도덕성을 "자신의 분리 혹은 특수한 실존 속에서의 이념"으로(R 33), 그리고 인륜성을 "보편의지와 특수의지의 동일성"으로 파악한다(R 155). 더 나아가 '정신철학'의 체계 내에서 객관정신에 관한 이론으로서의 『법철학』은 『논리학』에서의 '객관성'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이렇게 순수하게 형식체계적인 규정성에 따른다면, 결국 추상법에 관한 장은 객관성의 형태로 나타난 개념논리의 근거 위에서의 존재논리에, 도덕성에 관한 장은 객관성의 형태로 나타난 개념논리의 근거 위에서의 본질논리에, 인륜성에 관한 장은 객관성의 형태로 나타난 개념논리 자체에 각각 자신의 논리적 기반을 둔다. 그런데 이렇게 중첩적인 규정들이 헤겔의 『논리학』 중에서 어떤 논리적 형태와 정확히 일치하는지, 그리고 이러한 논리적 형태가 『법철학』에서 어떻게 내용적으로 전개되어야 하는지를 파악하기란 매우 어렵다.12) 하지만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법철학』에서 정신 혹은 의지가 갖는 규정들이 더 이상 직접적으로 발견되는 '현존재의 규정들'이 아니라 자유로운 "개념의 규정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E 381 Z.). 자유의지의 현존재는 이념적인 "정신적 현존재", 즉 의지가 자기규정으로부터 산출해 낸 "제 2의 자연"(R 4) ─이를 논리학적으로 말한다면 존재논리적인 '현존재'와 본질논리적인 '실존'이나 '현실성'과는 구별되는 개념논리적인 '객관적인 것'이다. 법은 자유의 현존재라고 헤겔이 말할 때의 '현존재'는 이렇게 개념논리적으로 매개된 의미에서의 '객관적인 것'을 뜻한다. 『법철학』의
주제는 "이념의 실체적 내용의 본질적인 발전"이라고 헤겔은 밝힌다(R 28). 자유이념의 발전의 매 단계들이 "그 각각의 고유한 규정 속에서의 자유의 현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고유한 권리"를 갖는 것이다(R 30 A.). 추상법이 비록 도덕성이나 인륜성이 갖는 더 높은 권리에 의해 제한되거나 수정될 수는 있지만 결코 파기될 수는 없는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자유의 이념에 기반을 두고 있는 '개념규정'이기 때문이다.
실제철학 속에서 논리적 형식을 찾아내는 데에는 중첩적 규정성 외에도 또 다른 난점이 있다. 그것은 '논리적인 것'이 실제철학에서는 그의 순수한 형식으로 나타나지 않고 각각 상이한 "구체적인 형태들" 속에서 표현되는데, 이 구체적인 형태의 경험적인 현존재는 학적 사유의 순수한 논리성만 가지고는 추론되지 않는다는 점이다(L II, 257). 바로 이점은 실제철학의 서술이 불가피하게 다차원성을 갖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논리적 사유가 『논리학』 내에서는 자기관계적이고 이런 의미에서 일차원적인 반면에, 『자연철학』에서는 이미 이차원적인 구조(개념규정─경험적 현상)를 갖게 되고, 『정신철학』에서는 최소한 삼차원적인 구조(개념규정─정신─경험적 현존재)를 갖는다. 더 나아가 정신은 자기 자신 속에서 스스로 발전하고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경험적 현존재 외에도 '의식'의 형태를 지닌 자기 자신 안의 현존재를 갖는다. 정신철학의 이러한 방법론적 특수성을 고려하면, 『법철학』에서의 헤겔의 논증이 실은 다차원적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헤겔은 『법철학』에서의 자유이념의 발전이 ① 개념규정의 차원, ② 주체 혹은 의지의 차원, ③ 사물의 차원이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서술되고 있음을 강의노트 여러 곳에서 시사하고 있다(R 104 N./ 105 N./ 151 N.). 이를 근거로 하여 『법철학』의 구조논리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이 더 상세하게 서술의 다섯 가지 차원을 구분해 볼 수 있다.13)
개념규정 | 개념의 정신적 형태 |
정신의 형태의 주관적 실존 |
사물적 현존재 | 정신적·법적 현존재 |
개념 | 즉자대자적으로 자유로운 의지 | 의식 | 대상 | 법 |
보편성 | 보편성의 형식 속에서의 자유의지 | 무매개적이고 배타적인 개별의지 (법적 인격자) | 소유 | 추상법 |
특수성 | 특수성의 형식 속에서의 자유의지 | 내적으로 반성하는 특수의지 (도덕적 주체) | 주관성 | 도덕성 |
개별성 | 구체적 개별성의 형식 속에서의 자유의지 | 실체적인 보편의지 (공동체의 구성원) | 공동체 | 인륜성 |
추상법은 근본적으로 자유개념의 추상적 보편성인 인격성과 관계하며, 자유의지의 첫 번째 현존재로서 소유 안에 그의 물적 존재를 갖는다. 하나의 개념이 그 시초에 있어서는 아직 추상적이며 직접성의 형식 속에 있다는 것은 헤겔의 논리적 방법에서 잘 알려진 바이다. 마찬가지로 개념규정 및 그의 정신적 형태(1열과 2열)와 법적인 현존재(5열)간의, 그리고 의식형태(3열)와 그의 사물적 현존재(4열)간의 논리적 연관을 이해하는 것 역시 어려움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직접성의 형식 속의 자유의지(2열)가 배타적인 개별적 주체의 무매개적 의지(3열)인 이유는 무엇인가?
자유의지의 시초적인 형태가 가지는 법이 추상적이고 형식적이며 의지의 특수성에 대
해 무관심하다는 주장은 『논리학』에 비추어 납득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형식주의에 추상법의 원리적 한계가 있는 것이다. 반면에 이 시초적 의지가 그 특수성에 있어서 "욕구, 욕망, 충동, 우연적인 자의 등"으로서 오직 이미 주어진 외적 세계에서만 그의 현존재를 찾을 수 있는 무매개적 의지라는 주장, 그리고 바로 이렇게 아직 순화되지 않은 개별적 의지의 특수성이 추상법의 영역에서 "의지의 의식 전체의 계기"가 되고 사적 권리의 구체적인 내용을 형성한다는 주장은 수긍할 수 없다(R 37). 왜냐하면 이러한 무매개적 의지는 외부세계를 주어진 것으로 발견하는 "자연적 의지"와 전혀 차이가 없는데(E 437), 이 '자연적 의지'는 헤겔에 따르면 주관정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어서 객관정신의 영역에서는 더 이상 등장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객관정신의 영역에서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본 '개념규정들'(1열)뿐만 아니라 행위하는 의지 자신의 입장에서 본 '의지규정들'(3열) 역시 앞서의 도표에서와는 달리 "정신적인 것"이어야 한다(R 8 N.). 더 나아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객관정신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개념론'의 기반 위에 서 있는데, 『논리학』에 의하면 '개념론'의 차원에서 '직접성'은 더 이상 무매개적인 개별적 현존재가 아니라 "보편적인 직접성"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L II, 312). 이러한 논리적 규정에 반하여 마치 자유의 단순한 개념으로부터 의지의 현존재적인 직접성이 논리적으로 추론되는 것처럼 주장하면서, 헤겔은 개념논리적 존재규정(추상적 보편성)을 특정한 현존재규정(무매개적 개별성)과 동일화한다. 결국 헤겔은 관찰대상이 되고 있는 자유의지가 그 자체 이미 개념논리적 구조를 갖고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존재논리적인 현존재의 논리에 따라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헤겔이 『법철학』에서 이렇게 체계정합성을 지니지 못한 논리적 퇴보를 감행하도록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우선 『법철학』의 중심과제는 법에 대한 순수하게 규범적인 학문을 정초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법현실을 개념적으로 포착하는 것에 있었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법적 인격자에 대한 헤겔의 기술은 근대적 법관계에서 개인이 처해 있는 실제적 상황과 상당히 일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어진 사실과의 일치가 철학적 법학이 추구하는 개념적 정당화가 될 수는 없다. 지금까지의 분석에서 드러난 방법론적 난점은 다음과 같은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즉 헤겔은 주관적인 의지의 규정(3열)을 개념규정(1열)에 의거해서가 아니라 정신현상학적인 의식의 도야과정의 모델에 의거하여 설정하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이 『법철학』의 내용분석을 통해 옳은 것으로 증명된다면, 우리는 『법철학』은 근본적으로는 법개념의 사변적 논리학이지만 일정한 면에서는 Ilting이 주장하듯이 또한 법의식의 현상학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14) 앞의 도표에서 1열의 개념규정의 순서 '보편─특수─개별'과 비교할 때 3열의 의식규정이 정반대로 '개별─특수─보편'의 순서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법철학』이 일정한 면에서 정신현상학적 서술방식을 채용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정신현상학』에 따르면 정신의 직접적 현존재는 오직 자기 자신과만 관계하며 자신의 현실성을 직접적인 감각적 대상 속에 갖는 개별적인 의식인 것이다(Pha, 38). 또한 헤겔은 『법철학』에서도 의식의 여러 형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적 자유의 근본규정을 이루는 단지 즉자적으로만 자유로운 직접적 의지는 "의식으로서의
유한성" 속에 있다(R 13). 그리고 도덕성 속에서는 법이 "의지하는 의식"과 관계하고, 따라서 "의식의 관점"이 표면에 등장하게 된다(R 140 A./ 108). 마지막으로 인륜성은 "자신의 보편성으로 고양된 특수한 자기의식" 속에서 구체적인 현실성을 획득하게 된다(R 258). 이밖에도 헤겔은 때때로 『법철학』 안에서도 관찰자인 '우리의 관점'과 행위자인 '의식 자체의 관점'간의 괴리가 있음을 지적한다(R 10/ 66 A.). 이러한 언명들은 『법철학』이 두 가지 상이한 대상의 차원에 관계하는 두 가지 상이한 서술방식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즉 『법철학』은 한편으로는 시초부터 이미 내적으로 매개되어진 것으로 현재하고 있고 그의 발전 속에서 "결코 포기되지 않는" 개념의 사변적·논리적 운동의 순서를,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이 자신의 발전의 각 단계에서 특수한 형태를 자신의 현존재로 삼되 그의 발전에 따라 계속 포기해 버리는 형태들의 정신현상학적 운동의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헤겔 역시 『법철학』에서의 자신의 논증이 다차원성을 띠고 있음을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역시 "개념의 형식 속에서 대자적으로 있는 개념"과 "개념이 자신을 현실화하면서 마련하는 형태"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R 33 A./ 1 A.).
그런데 이 두 가지 서술의 차원은 서로 어떠한 관계를 갖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헤겔 자신의 입장표명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헤겔은 이 두 가지 발전계열은 시간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R 32 A.). 철학적 법학에서 본질적이고 일차적인 것은 개념 자체의 "내재적 전진과 그 규정들의 산출"이다(R 30). 이러한 개념의 논리적 발전에 대해 주관적 의지의 형태로 나타나는 정신현상학적 계기는 부수적이고 이차적인 의미를 지닐 뿐이다. "단지 의지의 현상의 측면"만을 구성하는 "의식의 관계"는 객관정신의 영역에 속하는 『법철학』에서는 "더 이상 그 자체로 고찰되지는 않는다"(R 8). 여기서는 의지규정들을 "개념으로부터의 이성적 체계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R 19).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헤겔은 동시에 그 두 가지 진행계열이 사변적 고찰 속에서는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스스로를 산출하는 개념의 순서는 동시에 형태들의 순서이다. 학문 안에서는 개념의 발전 속에서의 규정들이 이렇게 고찰되어야 한다. … 보다 사변적인 의미에서는 한 개념의 현존재의 양식과 이 개념의 규정성은 같은 것이다." (R 32/A.)
『법철학』이 실제로 전개될 때 정신현상학적 서술방식은 헤겔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차적인 역할만 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추상법으로부터 도덕성으로의 이행은 의식적인 의지의 관점에서 논증되고 있다(R 104). 헤겔이 『법철학』의 여러 곳에서 '정신철학'의 발전논리에는 적당하지 않는 '이행'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자체가 『법철학』에서 정신현상학적 서술방식이 논리학적 서술방식만큼이나 방법론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방증이다.
근본적으로 법개념의 논리학이어야 할 『법철학』에서 도대체 정신현상학적인 계기가 등장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현상학적 서술방식이 첨가되는 것은 '정신철학'의 일부분인 『법철학』에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정신은 그 본성에 있어서 스스로를 자신의 구체적인 형태인 의식으로 분화하고, 이렇게 분화된 의식의 내재적 운동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자유로운 존재로 자각하는 즉자대자적 정신으로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는 '정신철학' 전체가 정신현상학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논리학적 서술방식과 정신현상학적 서술방식은 각각 『법철학』의 정당한 방법론이 될 수 있다. 문제는 헤겔이 『법철학』을 전개함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서술방식을 주의 깊게 체계적으로 구분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논리학적 진행과 정신현상학적 진행은 헤겔의 철학체계 속에서 분명히 모종의 상응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양자가 직접적으로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 서술방식은 실제로는 두 가지 상이한 차원의 고찰대상에 관계하는 것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논리적 형식을 따를 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누구보다도 체계적인 사유를 중요시하는 헤겔이 『법철학』에서는 두 가지 상이한 차원의 논증방식들을 마치 하나의 동일한 진행계열에 대한 두 가지 관점에 불과한 것처럼 취급하며 혼용하고 있는 것이다.
헤겔의 『법철학』은 자유의 변증법적 의미를 밝히고 법질서가 강제의 질서가 아닌 자유의 질서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상호주관적·긍정적 자유에 기초해야만 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논증함으로써, 법제도를 구성하기 위한 탁월한 규범적 원리를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의 『법철학』은 불행하게도 논리학적·개념적 서술과 정신현상학적·의식이론적 서술의 혼동이라는 방법론적 오류를 범함으로써 자신의 원리를 일관되게 전개시키는 데 실패했다. 이 두 가지 서술방식의 혼동은 첫째로 '철학의 권리'가 '법의 철학'에 의해 축출되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15) 헤겔이 사변적 논리학을 법철학에 적용시킨 것은 오직 프로이센 제국의 정치현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는 통속적인 비난은 그 직접적인 정치적 의미에서는 옳지 않지만, 『법철학』이 내포하고 있는 방법론적인 문제점의 일단을 집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론적인 문제점은 둘째로 헤겔 자신이 법개념의 존재근거이고 법형태의 발전의 원리로 제시한 자유의 상호주관성이 법이론을 구체적으로 전개하는 데 있어서는 은폐되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1) 이하 헤겔 저서에서의 인용은 인용문 뒤에 다음과 같이 축약한 저서명과 쪽수 혹은 절( )을 괄호에 넣어 기입한다.
E (『엔치클로페디』) = Enzyklopa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 (1830), Werke 8-10.
L I/II (『논리학 I/II』) = Wissenschaft der Logik I/II, Werke 5/6.
Pha (『정신현상학』) = Phanomenologie des Geistes, Werke 3.
R (『법철학』) =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Werke 7.
2) G. Dulckeit, Rechtsbegriff und Rechtsgestalt, Berlin 1936과 J. Binder, "Mein Absoluter Idealismus und Hegel", in: Zeitschrift fur die gesamte Staatswissenschaft Bd. 98, Heft 3, 1938 참조. 1979년 국제헤겔회의와 관련해서는 논문집 D. Henrich/R.-P. Horstmann (Hg.), Hegels Philosophie des Rechts, Stuttgart 1982 중에서 특히 H.F. Fulda, "Zum Theorietypus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 D. Henrich, "Logische Form und reale Totalitat"; K.-H. Ilting, "Rechtsphilosophie als Phanomenologie des Bewustseins der Freiheit"; L. Siep, "Intersubjektivitat, Recht und Staat in Hegels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M. Theunissen, "Die verdrangte Intersubjektivitat in Hegels Philosophie des Rechts" 등의 논문 참조. 그러나 이들의 논쟁은 비록 『법철학』의 논리를 해명하기 위한 중요한 출발점을 제공해 주기는 하지만, 문제점을 해결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관점의 다양성과 차이를 명확하게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더욱이 이 논쟁은 유감스럽게도 더 이상의 발전을 보지 못했다. 오직 Fulda, "Die Entwicklung des Begriffs in Hegels Rechtsphilosophie", in: E. Angehrn etc. (Hg.), Dialektischer Negativismus, Ffm. 1992만이 이 주제에 대해 보다 진전된 논의를 하고 있는 유일한 논문으로 보인다.
3) V. Hosle, Hegels System, Hamburg 1988, 123쪽 이하, 263쪽 이하와 M. Theunissen, Sein und Schein, Ffm. 1980, 472쪽 이하를 비교해 보라.
4) W. Euchner, "Freiheit, Eigentum und Herrschaft bei Hegel", in: Politische Vierteljahresschrift Bd. 11, Koln 1970; H. Schnadelbach, "Zum Verhaltnis von Logik und Gesellschaftstheorie bei Hegel", in: O. Negt (Hg.), Aktualitat und Folgen der Philosophie Hegels, Ffm. 1970; M. Riedel, "Natur und Freiheit in Hegels Rechtsphilosophie", in: Materialien zu Hegels Rechtsphilosophie Bd. 2, Ffm. 1975 등의 비판적인 해석을 보라. J. Ritter, Metaphysik und Politik, Ffm. 1977, 256쪽 이하는 헤겔의 법이론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점유개인주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5) 예를 들면 K.-H. Ilting, "Die Struktur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 in: Riedel(1975), Bd. 2, 53쪽; H. Ottmann, "Hegelsche Logik und Rechtsphilosophie", in: Henrich/Horstmann(1982), 385쪽 등을 보라.
6) Ilting(1982); Theunissen(1982).
7) Siep(1982); Fulda(1982). 앞에서 언급한 Dulckeit와 Binder의 논쟁점이 바로 『법철학』이 일차적으로 법개념의 논리학(Logik des Rechtsbegriffs)이냐 아니면 법의식의 현상학(Phanomenologie des Rechtsbewustseins)이냐 하는 것이었다.
8) 헤겔은 '법'이라는 개념을 때로는 주로 추상법의 영역에 한정되는 법률적인 법이라는 좁은 의미로, 때로는 추상법뿐만이 아니라 도덕성과 인륜성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이점에 대해 특히 R 33 Z. 참조.
9) 추상법의 기초를 이루는 직접적 의지와 R 5에서 서술한 무규정적 의지간의 상응관계에 대해 헤겔 자신이 R 34에 대한 강론에서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헤겔은 여기서 심각한 자기오해를 범하고 있다. 왜냐하면 R 5-7에서 서술한 의지의 "세 가지 계기"는 헤겔의 주장과는 달리 체계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법철학』의 세 영역을 나누는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계기가 가지는 체계론적 기능은 『논리학』에서 '사유의 세 가지 형식적인 면'─즉 오성적인 면, 변증법적인 면, 사변적인 면─이 지니는 기능과 일치한다고 보아야 하는데, 사유의 이러한 세 가지 면은 "논리학의 세 부분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논리적으로 실재적인 것, 즉 모든 개념과 모든 진리 자체의 계기들"인 것이다(E 168/A.). 이로부터 『법철학』의 세 부분과 R 5-7에서 서술된 자유의지의 세 가지 계기를 단순히 대응시키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 밝혀진다. 법적 형태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의지는 실은 이 세 가지 계기의 통일, 즉 '개념'으로서 이미 정초되어 있고, 단지 이렇게 내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개념이 각각의 영역에 있어서 상이한 규정성들을 가질 뿐이다.
10) 헤겔은 기존의 자연법을 다루는 방식들을 비판하고 있고 '자연법'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서도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지만, 이것이 자연법론이 지닌 근본 의도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법철학』은 역사적인 법현실에 관계하는 기술적 학문이면서 동시에 법현실을 비판할 수 있는 영원법의 규범적 학문이고자 한다. 『법철학』에 「자연법과 국가론 강요」라는 부제가 붙어 있음은 이 점에 있어서 매우 시사적이다.
11) 특히 L.B. Puntel, "Darstellung, Methode und Struktur", Hegel-Studien Beih. 10, Bonn 1973, 126쪽; E. Angehrn, Freiheit und System bei Hegel, Berlin 1977, 440쪽 등이 이렇게 해석한다.
12) 헤겔은 『법철학』에서 때때로 법개념의 발전과 특정한 판단형식간의 상응관계를 지적한다(R 85/ 88/ 95/ 114 N.). 필자는 『법철학』이 『논리학』 중에서 여러 판단형식들을 포함하고 있는 추리론을 기본모델로 하여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전거는 E 198 A., L II, 424 등에서 찾을 수 있다.
13) 이와 약간의 차이를 가진 Fulda(1992), 310쪽의 구분을 참조하라.
14) Fulda는 Ilting이 '법인'에 관한 헤겔의 규정을 문제삼고 있는 것에 대하여 개념규정(1열 및 2열)과 사물적 현존재(4열)간의 연관이 논리적인 정합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이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시도는 Ilting의 논증의 핵심을 간과하고 있다. Ilting에게 정말로 문제가 되는 점은 개념규정(1열 및 2열)과 의식형태(3열) 사이의 관계이다.
15) Fulda, Das Recht der Philosophie in Hegels Philosophie des Rechts, Ffm. 1968에 따르면 법철학은 현존하는 법현실에 대해 한편으로는 '철학의 권리'를 가지고 비판적으로 수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법의 철학'으로서 보수적으로 보호하는 이중적 역할을 한다.
헤겔의 칸트 인식론 비판
―‘오성’ 개념을 중심으로―
문성화(경상대)
[한글요약]
이 논문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고찰하고 있는 철학사적 의미 가운데, ‘오성’ 개념을 중심으로 한 칸트의 인식론을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동시에 그리고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은 헤겔이 자신의 ������철학사 강의������에서 다루고 있는 「칸트」 장이다. 우리는 헤겔의 ������철학사 강의������를 통해서, 헤겔이 자신의 체계를 정립하기 위하여 철학의 역사를 얼마나 철저하게 연구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자신의 철학적 체계의 ‘입문서’로 간주하였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 헤겔은 무엇을 했을 것이며, 우리는 거기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절대적 관념론 철학자인 헤겔로서는 정신―이성, 의식―을 철학의 원리로 삼은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경험을 배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험론적 견해를 사유의 출발점으로서 적극 수용한다. 철학의 역사도 바로 이와 같은 관점에서 출발하며, 헤겔에 있어서 참다운 지(知)의 출발점도 이와 동일하다. 이러한 관점이 대상의 영역에만 적용될 때, 우리는 그것을 인식론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헤겔은 이것을 대상의식의 관점에서 고찰하고 있다. 그런데 그 논의의 전개과정이, 철학사에 있어서 중요 철학자들이 행한, 자연에 대한 인식 주관의 발전․전개과정과 동일한 과정․방식이다.
이러한 인식과정을 최초로 행한 자들이 희랍의 자연철학자들이었으며, 다음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고 칸트가 헤겔에 앞서서 인간의 인식능력을 철저하게 검토하였다. 헤겔은 칸트의 뒤를 잇고 있는데, 「감성적 확실성」과 「지각」 그리고 「힘과 오성」 장에서 앞선 철학자들의 사상을 각각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특히 칸트에 관련해서 헤겔은, 칸트의 ‘오성’ 개념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대상의식에서 자기의식으로 이행하는 정신의 변증법적 발전계기를 다루고 있다.
주제분야: 철학사, 인식론, 관념론
주제어: 인식, 감성, 지각, 오성, 경험
1. 들어가는 말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지각」 장(章)에서, 지각에 의해 통일된 자연의 개별성과 보편성이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지각은 여전히 감성적 경험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어서, 보편성이 진정한 보편성으로 고양되기 위해서는―헤겔에 따르면―의식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을 제시하는 단계가 「힘과 오성」 장이며, 이것은 헤겔이 철학사적으로 칸트의 인식론에서 찾고 있는 것과 같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자연의 원리를 발견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개별적 자연물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지각작용에 의해서 자연물에 보편성을 부여하기는 하였지만, 여기에는 대상의 측면만 고려되었을 뿐, 주관의 작용은 그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정립된 보편성은 진정한 보편성이 될 수 없는 노릇이다. 또한 이와 더불어 ‘(대상)의식’은 아직 완전한 의식으로서 확립되지 못하였다.
물론 감성적 확실성의 주체도 지각의 주체도 엄밀하게는 ‘의식’이다. 그렇지만 이 때의 의식은 감성적 수용성의 상태에 있는 의식일 뿐이며, 스스로를 주체로서 확인하고 있는 인식의 주체는 아닌 것이다. 적어도 대상의식에서 인식, 즉 경험의 주체인 의식이 스스로의 적극적인 활동을 확인하는 단계는 의식이 ‘오성’으로서의 자신의 활동을 확인 할 때이다. 헤겔은 이 점을 칸트의 인식론에서 찾고 있다.
헤겔은 자기 시대의 독일에서 행해진 사상의 형식을 철학에서 혁명적 사건으로 규정하고, 독일에서의 정신의 진보를 칸트와 피히테, 셸링이 이룩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그는 철학의 과제를 사유와 존재의 통일로 설정하고, 철학은 이것을 근본 이념으로 삼아서 개념적으로 포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헤겔에 따르면, 이 과제의 형식적인 것을 수행한 철학자가 바로 칸트이며, 칸트는 이성의 추상적 절대성을 자기의식에서 찾았지만, 부정적인 측면에만 머무르고 만다.(Bd. 20, S. 314. 참조)1)
헤겔에 따르면, 칸트 철학의 핵심은 “사유가 스스로를 규정하는 구체적인 것으로서 파악한다”는 점에 있다. (Bd. 20, S. 331. 참조) 그러나 이것이 우선은 대상 인식의 측면에서 나타나는데, 칸트의 인식론에서는 「초월적 감성론」(die transzendentale Ästhetik)이 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초월적 감성론」의 주체인 ‘오성’은 객체로서의 대상인 타자와 관계를 맺고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를 인식의 주체로서 적극적으로 규정하지 못하는―헤겔적 의미에서―대상의식으로만 남을 뿐이다. 이 때문에 이러한 과정을 포함하는 인식작용이 헤겔에 의해서는 ‘유한한 인식’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Bd. 20, S. 333. 참조)
그러나 헤겔이 인정하고 있듯이, 칸트 철학에서 중요한 일반적 의미는 인식에 있어서 보편성과 필연성과 같은 제 규정을 ‘지각’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지각과는 다른 원천인 주관, 즉 ‘자아’에서 찾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칸트가 시도하는 것이 바로 “인식능력의 비판”(Kritik des Erkenntnisvermögens)이다. (Bd. 20, S. 333.) 그런데 문제는 헤겔이, 인식능력에 대한 비판은 인식작용 및 그 과정과 더불어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이미 인식이라고 고찰한 반면에, 칸트는―헤겔에 따르면―인식과 인식능력의 비판을 분리했다는 데에 있다. 이와 관련해서 헤겔은 다음과 비판한다:
“인식능력을 탐구한다는 것은 인식능력을 인식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인식을 행하기 이전에 인식능력을 인식해야만 한다고 하는 요구는, 마치 사람들이 물 속에 들어가기 이전에 수영을 하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Bd. 20, S. 334. 그리고 Bd. 8, S. 114.도 참조 할 것)
이에 따라서 보면, 결국 헤겔이 칸트의 오성 개념을 비판하는 것은 칸트의 인식론을 비판하는 것이 되고, 인식능력을 비판하는 것은 이성의 능력을 비판하는 것이며, 그 결과로서 헤겔은 인식에 있어서 주관과 객관 모두가 통일된, 인식의 참된 보편성과 필연성을 확립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힘과 오성」 장은 칸트의 인식론에서 인식 주체인 ‘오성’ 개념을 비판하면서, 헤겔 자신의 대상의식을 확립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헤겔이 그 뒤를 밟아가고 있으면서도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칸트의 인식론적 과정을 분석․고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2. 지금․여기와 시간․공간
자연의 원리로서 ‘존재’가 무엇인지를 고찰하는 데에서 출발한 서양철학의 역사는, 인간의 주체적인 측면이 배제된 채 천 년의 세월을 허송하던 중, 마침내 데카르트와 베이컨에 의해서 인간의 정신을 그 중심에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사상은 인간의 모든 지식의 근원을 문제삼으면서 ‘이성’과 ‘경험’으로 나누어지게 되었고, 결국 통일된 인식의 체계를 수립하는데 성공하지 못한다.
이렇게 분열된 인식의 근원은 칸트에 의해서 다음과 같이 종합되기에 이른다. 즉, 칸트는 인식의 출발점으로서 경험을 수용하면서, 감성적 직관이 어떻게 성립하는가를 ‘감성론’을 통해서 고찰하고, 여기에 오성의 활동으로서 개념이 결부되지 않는 한, 그 직관은 ‘맹목적인’(blind) 것으로만 남게 되어, 결국 인식이 성립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능력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밝혀 내었다. 그러나 칸트의 사상은 인식능력을 감성과 오성 그리고 이성으로 분리한 것 때문에, 인식의 최종 목표인 ‘절대 지’에는 이르지 못하였고, 이 점은 헤겔에 의해서 다시 비판되고 극복된다.2) 그렇다면 헤겔은 칸트를 어떻게 뛰어넘고 있는가?
헤겔에 따르면, 칸트 철학의 핵심은 사유와 존재의 통일이 주관성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헤겔도 “주체로서의 정신이 객체로서의 타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한에서 현상하는 정신이 바로 의식”(Bd. 4, S. 42.)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이 의식은 공간과 시간의 규정 하에 출현하는 타자가 없이는 인식의 주체로서 존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식은 경험으로부터 시작하고, 경험은 의식의 경험으로서 감성적 확실성에서 시작하며, 감성적 확실성은 타자를 규정하는 공간․시간이라는 조건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간과 시간은 그 자체가 감성적 확실성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감성적 확실성을 위한 조건이다. 감성적 인식의 대상은 공간과 시간의 규정 하에 현상한다(erscheinen). 따라서 헤겔이 ������철학사 강의������의 「칸트」 장(章)에서 “감성적인 것에는 하나의 보편적으로 감성적인 것 자체가 있는데, 이러한 소재에 있어서 타자는 공간과 시간의 규정이며, 이것들은 공허하다. 공간적인 것은 우리의 외부에 있다. …” 이것은 다른 소재에 의해서 가득 채워진다. “시간도 마찬가지로 공허하다.”(Bd. 20, S. 339.)고 칸트의 「초월적 감성론」(Die transzendentale Ästhetik)을 평가하는 것은 ������정신현상학������의 「감성적 확실성」에서 다루고 있는 “지금․여기”와 통한다. 지금과 여기는 모든 인식을 위한 필수 조건이고, 개별적 자연물이 정립될 수 있는 선험적 조건이며, 따라서 칸트에게서처럼 순수한 선험적 직관인 것이다. 즉, 이와 같은 조건은 대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상이 그것에 의해서 규정되기 때문에, 그것은 선험적이며, 따라서 순수한 직관의 형식인 것이다.
헤겔은 현상하는 대상에 대해 “이것이란 무엇인가?”(Was ist das Diese?)라는 구체적인 물음을 던지고, ‘이것’이 지니는 변증법적 존재양식을 시간․공간적인 측면에서 각각 “지금․여기란 무엇인가?”라고 물음으로써 대답하고 있다.(PhdG, S. 71 f.)3) 우리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을 ������철학사 강의������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즉, 지금과 여기라는 시간적, 공간적 형태로 현상하는 ‘이것’은 의식에 의해서 포착된 대상이며, 지금과 여기라는 “직관은 소위 직접적 의식이다. 그러므로 공간과 시간은 감성적인 것 자체의 보편자이다.”(Bd. 20, S. 340.) 이처럼 헤겔도, 칸트와 마찬가지로, 지금과 여기를 주관―의식―에 독립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직관이고, 사유이며, 의식”(Bd. 20, S. 340.)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그런데 헤겔에 따르면, ‘이것’이 지니는 시간적 존재양식으로서의 ‘지금’은 ‘밤’일수도 있고 ‘낮’일수도 있기 때문에, 지금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매개된 것, 즉 “부정적인 것 일반”(Negatives überhaupt)으로서 존재하게 된다.(PhdG, S. 72.)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도 또한 ‘나무’일수도 ‘집’일수도 있어서, ‘지금’처럼의 존재양식을 띠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과 ‘지금’ 그리고 ‘여기’, 이 모두가 이미 매개 된 것으로서, 사유에 의해서 규정된 것이라는 말이다. 매개된 지금과 여기는 한편으로 밤과 낮, 나무와 집을 모두 부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양자 모두를 긍정하기 때문에, 인식에 있어서 필연자이고 보편자, 즉 필연적 보편자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필연적 보편자’는 인간의 인식능력에 속하는 것으로서, 인식의 주관적 조건일 뿐이라고 하는 헤겔은, 칸트에 따라서, “필연성과 보편성은 외적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선험적(a priori)으로, 즉 이성 자체에, 스스로를 의식한 이성으로서의 이성 안에 있다. 그것은 사유에 속한다.”(Bd. 20, S. 335 f.)고 주장한다.
여기서 헤겔은 칸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즉, 헤겔은 한편으로 칸트가 공간과 시간을 ‘순수 직관’이라고 하는 점을 수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매개 된 것’ 또는 ‘부정적인 것 일반’으로서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그 까닭은 우선, 공간과 시간이 최초의 가장 단순하고 가장 직접적인 인식을 성립하게 하는 조건이긴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인식이 성립하지 않으며, 또한 그 자체가 곧 인식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인식은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서 출발하지만, 여기에 사유의 적극적인 활동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참된 개념적 인식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공간과 시간이 주관과 객관 사이의 참된 인식을 ‘매개’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헤겔은 칸트의 ‘감성론’을 다음과 같이 고찰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은 감성적 경험의 보편자이며, 그러나 선험적 직관이다. (…) 객관적인 것으로서 현상할 수 있는 것, 즉 공간과 시간은 결코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의식이 그 이전에 자기 자신 안에 공간과 시간을 가지고 있다. 공간과 시간이 비로소 의식으로 하여금 개별적인 것을 수행하고 정립하도록 가능하게 한다. (…) 공간과 시간은 외적 현상들의 필연적인 근거이다. (…) 요컨대 우리는 그것을 발견한다. (…) 공간과 시간은 사물들의 제 관계에 대한 보편적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직관이다.”(Bd. 20, S. 341.)
하지만 우리는, 직관이 경험적 인식을 위한 필연적인 근거라고 해서, 그것만으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인식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공간과 시간이 자체적으로는 보편자이지만, 그 안에 존재하는 인식의 대상은 주관의 자기 반성이 없이는 언제나 개별자로 머물러 버리기 때문이다.4) 이 때문에 헤겔은 「감성적 확실성」과 「지각」을 구별하는 것이며, 「칸트」에 있어서 “두 번째 인식 능력으로서 오성”을 고찰하는 데에서 ‘지각’을 엄밀하게 고찰하고 있다. (Bd. 20, S. 343 - 351. 참조)
3. 지각과 감성의 수용성
“‘…’ 모든 개인은 본디 자기 시대의 아들(ein Sohn seiner Zeit)이며, 그래서 철학도 역시 자신의 시대를 사상으로 포착하는 것이다(die Philosophie erfaßt ihre Zeit in Gedanken).” (Bd. 7, S. 26.)5)
이 말은 헤겔이 자기 자신과 철학에 대한 시대적 사명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낡은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나가는데 선도적인 역할 하고자 했던 헤겔은 스스로를 “미네르바의 부엉이”(die Eule der Minerva)6)에 비유한다. 그러기 위하여 헤겔은 자기 이전 시대까지의 철학의 역사를 총괄하여 개별적 사상가들의 정신을 추적하는데, 그 가운데 근대 사상가 가운데 헤겔이 가장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사상가가 바로 칸트이다.7)
헤겔은 칸트의 감성론과 오성론 그리고 이성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자신의 이성론을 그 위에 위치시킨다.8) 주지하다시피, 칸트의 이성론은 인식 이성의 능력으로서는 무제약자―물 자체, 절대자―를 결코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지만, 이에 반해서 헤겔의 이성론은―이성이 오성보다 우위의 능력을 가졌음에 틀림없다면―감성과 오성의 단계를 거쳐온 이성은 당연히 절대자를 인식해야 한다는 관점에 서 있다. 그래서 헤겔은 오성론을 다루기에 앞서 감성론을 더욱 엄밀하게 고찰하고, 감성적 확실성과 지각을 분리하여 고찰하는 것이며, 동시에 지각과 오성의 연관성을 칸트의 오성론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칸트는 다음과 같은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진리 인식에 관련하여 이성이 나아갈 수 있는 모든 회의주의와 독단주의를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경험론과 합리론을 자신의 체계 속에 통일한다: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그러나 비록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한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모든 인식이 경험에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 그러므로 경험, 그리고 모든 감각 인상과 상관없는 독립적인 인식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으며 ‘…’, 우리는 이러한 인식을 선험적(a priori)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그 원천이 후험적인(a posteriori), 즉 원천이 경험 중에 있는 경험적 인식과 구별한다.” (KrV, B 1 f.)9)
칸트는 경험론자들이 제시한, 모든 학문의 원리로서의 경험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완전한 인식이 성립할 수 없으며, 따라서 경험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인식은 진리일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칸트에 따르면, 경험이 발생하는 곳은 시간과 공간상에서인데, 경험의 대상은―경험의 선험적 조건인 시간, 공간과는 달리―후험적 조건 하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경험은 엄밀한 보편성도 제공하지 못하고 또 필연적인 확실성도 제공하지 못한다”(KrV, B 47.)는 것이다. 이렇게 경험의 결과가 참된 인식으로서 성립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칸트에 따르면, 인식에 앞서서 인식 능력에 대한 비판이 선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성에 의해서 제공되는 인식의 소재(질료) 그 자체는 한갓 개별자로 남을 뿐이지, 결코 보편자로 등장하지 못한다. 칸트가 인식의 능력을 직관과 오성 그리고 이성으로 구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견해는 헤겔이 ‘오성론’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이전에 「감성적 확실성」과 「지각」을 구별하여 “직접적 확실성은 스스로 진리의 구실을 할 수 없으니, 왜냐하면 그의 진리는 보편자이지만 그는 이것(das Diese)을 취하려고 하기 때문이다”(PhdG, S. 79.; 171 쪽.)고 하는 말과 일치한다.10) 다시 말해서, 의식(주관)의 적극적인 개입과 활동이 없이 경험만으로 참된 인식으로 성립하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헤겔은 ������철학사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딱딱함은 나의 감각이다. 내가 어떤 딱딱한 것을 감각한다는 직관은 딱딱한 것을 공간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주관성과 객관성을 분리하는 것이다. 내용은 공간 안에서 서로 외면적으로 있으며, 나의 외부에 있다.” (Bd. 20, S. 340.)
이것은, 직접적 감각은, 비록 나(주관)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인식에 있어서는 주관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여러 가지 감각기관과 그에 따른 감각에 있기는 하지만, 감각은 언제나 개별적으로 분리된 채로 존재할 뿐이지, 이 때의―오성, 이성과 연관성을 갖지 못하는―감성적 주관은 분리된 감각들을 통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겔은, 칸트에 따라서, “지각한다(perzipieren)는 것을 감각한다는 것, 표상한다는 것과 구별”(Bd. 20, S. 343.)한다. 즉 칸트는, “경험적 직관에 있어서의 다양성을 종합”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지각”이기 때문에, 이러한 지각이 감각이나 표상과는 다르다는 것이다.(KrV, B 160. 참조)11) 그렇다고 해서 칸트나 헤겔이 지각(Wahrnehmung)을 인식에 있어서의 완전한 경험으로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 까닭은 칸트와 헤겔 모두에게 있어서, 지각을 완전한 경험적 인식으로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오성의 적극적인 활동이 개입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칸트와 헤겔의 인식론적 체계에 있어서 ‘지각’은 ‘시간․공간’, ‘지금․여기’의 다음에 위치하지만, 그것이 완전한 경험도 완전한 사유활동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완전한 인식을 위해서는 오성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12) 그래서 칸트와 헤겔의 인식론에서 인식의 과정을 고찰하면, 우리는 이들 모두에게 ‘지각’이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감성적 확실성’도 경험이고 ‘지각’도 경험이지만, 이 양자가 동일한 경험은 아니며 또한 ‘경험’은 이 양자를 포괄하는 ‘유개념’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가 있다. 헤겔은 칸트의 오성론을 고찰하는 자리에서, 경험을 통해 지각되는 소재는 감정․직관에 속한다는 것을, 그리고 참된 개념은 개별성과 직접성에 따라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념은 제 범주에 의해서,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자연법칙과 보편적 제 규정, 유(Gattungen)에 의해서 결합된다. 이것들은 직접적인 지각이 아니다. 사람들은 하늘의 제 법칙을 직접적으로 지각하지는 못하고, 다만 천체의 위치 변화만을 지각할 뿐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지각된 것은 보편자로서 확정되며, 이것이 바로 경험이다. 그래서 경험에는 보편적 사상규정이 있다. 경험이라는 것은 어느 시대에서건 보편적으로 타당해야 한다.”(Bd. 20, S. 347. 강조는 필자의 것)
헤겔이 칸트의 사상을 이와 같이 이해하는 것은 칸트의 다음과 같은 견해와 직결된다:
“이제 우리는, 아래로부터 요컨대 경험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함으로써, 오성이 범주를 매개로 해서(vermittelst) 현상과 필연적 관련을 가진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자 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최초의 것은 현상이며, 이것이 의식과 결부하였을 때에는 지각이라고 부른다. (…) 그러나 모든 현상은 다양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여러 가지 지각이 심성 안에서 분산되어서 개별적으로 만나지기 때문에, 지각의 결합이 필요한데, 지각은 이 결합을 감각 기관 그 자체 중에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KrV, A 119 f. 강조는 필자의 것)
여기서는 칸트와 헤겔의 ‘의식’ 개념에 대한 견해가 서로 매우 유사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그것은 “나는 사유한다”(Ich denke)라는 활동성을 의식의 근거라고 하는 점에서만 일치를 보일 뿐이다. 하지만 칸트는 인식의 원천을 분리시킨 속에서 그때 그때의 대상과 주관을 결합시키는, 일종의 수단으로서만 의식을 강조할 뿐이다.13) 이에 반해 헤겔에게 있어서 의식은, 공간적 병렬성과 시간적 연속성 속에서 등장하는, 모든 대상과 관계하는 정신의 활동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의식은 정신이 활동 할 때를 말하며, 이 활동이 더욱 구체적으로는 ‘의식의 경험’인 것이다.
의식이 이렇게 경험을 행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확립하는, 경험의 형태가 바로 감성적 확실성이고 지각이며, 이들은 동시에 의식의 능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아직 대상 인식의 측면에서 완전한 인식을 성립시킨 것은 아니다. 여기에 주관(사유, 의식)의 적극적인 활동이 뒷받침되어야만 완전한 인식이 성립하는데, 이때 ‘오성’이 작용한다.
4. 의식의 경험과 경험적 인식
칸트 인식론에 있어서 오성의 활동은―비록 경험적 인식이기는 하지만―완전한 인식을 보증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한다’함은, 칸트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 내에서만 언제나 존재할 수 있는 현상적인 모든 대상에 대한 ‘경험적 표상’을 갖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칸트는 이 경험적 표상에 순수 오성 개념인 범주가 적용되는 한에서만, 경험적 인식이 성립한다고 말하고, 이 때의 경험적 인식을 ‘경험’이라고 칭한다. (KrV, B 147. 참조) 즉, 칸트에게서 경험은 경험적 인식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하여 칸트는 “경험은 오직 지각의 필연적 결합의 표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KrV, B 218.)는 원리를 제시하는데, 이와 관련된 그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경험은 경험적 인식, 즉 지각을 통해서 객관을 규정하는 인식이다. 그러므로 경험은 지각의 종합이며, 이 종합 자체는 지각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 있어서의 지각의 다양의 종합적 통일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종합적 통일은 감각기관의 객관을 인식하는데 본질적인 것, 즉 (단순히 직관이나 감각만은 아닌) 경험의 본질적인 것을 이루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경험은 지각을 통한 객관의 인식”인데, “지각을 필연적으로 결합시키는 표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KrV, B 218 f.)
각각의 감각기관에 의해서 감각된 대상의 여러 측면이 주관―의식―과 최초로 결합될 때 대상은 ‘지각’되는데, 이때 ‘지각된 것’은 아직은 인식된 것이 아니며, 따라서 경험적 인식이 성립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각된 것은, 경험적 인식의 측면에서 보면 여전히 개별자로 남아 있을 뿐이어서, 완전한 경험적 인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주관의 적극적인 활동―오성의 작용―이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칸트와 헤겔의 인식론에서, 한편으로, ‘경험’ 개념에 공통되는 사상이며, 이와 관련된 헤겔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의식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즉 자신의 지(知)와 자신의 대상에 대해서 행하는 이와 같은 변증법적 운동은, 바로 이 운동으로부터 의식에게 새롭고도 참다운 대상이 발생하는 한에서, 본래가 경험이라고 불린다.”(PhdG, S. 66.)
감각된 것 또는 지각된 것은, 의식의 측면에서 보면, 동일한 대상이면서도 동시에 동일한 대상이 아니다. 더군다나 경험된 것은 이전의 대상들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이것은 현상하는 대상이 수시로 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상을 대하는 주관의 태도가 변한다는 말이다. 이에 따라서 칸트가 경험적 인식의 객관성을 학적으로(wissenschaftlich) 보증하기는 하지만, 주관의 변화를 현상계에만 한정시킴으로써―헤겔처럼―‘의식의 경험’을 계속 수행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헤겔은 칸트의 경험적 인식을 다음과 같이만 이해 할 뿐이다:
“인식작용 자체는 양 계기―감각기관과 범주―의 진리이다. 인식된 것은 현상일 뿐이며, 인식작용은 주관에 속한다. 주관의 인식작용은 그러므로 현상만을 포괄하지, 그 자체(das Ansich)는 포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식작용은 사물을 직관작용과 감성의 제 법칙의 형식으로만 포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험은 감각된 것과 범주의 종합이다.” (Bd. 20, S. 350.)
경험적 표상에 범주를 적용시킨다는 것은 이미 인식의 활동이자 인식의 과정을 의미하며, 한 마디로 말해서 인식작용(Erkennen)이다. 칸트는 이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예를 들면, 물 자체가 그것이다―은 경험적 인식의 대상에서 제외한다. 따라서 이렇게 제외된 대상에 의식이 작용하더라도, 그것은 의식의 경험이라고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헤겔에 따르면, 칸트가 인식의 대상을 현상과 물 자체로 분리한 결과이기 때문에, 결국 인식에 있어서도 주관과 객관이 분리된 채로 있어서, 완전한 인식은 성립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헤겔이 제시하는 경험 개념을 ‘변증법적 경험 개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칸트의 견해를 좇아서 보더라도, 감성에 의해서 수용된 경험적 표상이 물 자체는 아니며, 경험적 인식의 성립을 위하여 경험적 표상에 범주를 적용시킨다는 것도 현상과는 다른 대상을 발생시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경험적 인식의 이러한 과정은, 공간․시간 속에 등장하는 물(Ding)과 공간․시간에 초월적인 물 자체(Ding an sich) 가운데에서, 의식을 매개로 하는 새로운 경험의 발생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식의 주관인 의식의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경험은 ‘변증법적 경험’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경험적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변증법적으로 사유하지만, 경험적 인식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반면에 헤겔은 경험적 인식에 있어서도, 의식이 인식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은 계속해서 이전 단계를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긍정하여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것(das Aufheben)이기 때문에, 그 과정은 변증법적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칸트는 인식의 요소와 과정 모두를 분리하여 고찰하는 반면에, 헤겔은 인식에 있어서 모든 것을 통일체로 간주하는 것이다.14)
5. 오성의 힘과 오성의 자발성
경험 개념을 둘러싼 칸트와 헤겔의 사상의 차이는 헤겔로 하여금 칸트 인식론의 결점을 극복하게 한다. 우선 헤겔은, 경험 개념과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우리로 하여금 자연의 개념을 최고의 방식으로 생각하게 하고, 이 개념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고 고양시킨 사람은 칸트이다”라고 하며,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의 공로를 인정한다. (Bd. 19, S. 172. 참조) 또한 모든 철학의 궁극 목표가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점에서 일치를 보이고 있는―아리스토텔레스를 포함하여―칸트와 헤겔이기에, 헤겔은 칸트의 “비판철학은 형이상학에서―또는 다른 제 과학과 일반 표상작용에서―사용된 오성 개념의 가치를 비판하는 데에서부터 먼저 시작하였다”(Bd. 8, § 41, S. 113.)고 그 가치를 인정한다.
하지만 헤겔은, 경험적 인식에만 국한되고만 칸트 이론철학의 한계를 지적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칸트철학은 이론적으로는 방법적으로 만들어진 계몽, 어떤 참된 것은 결코 아닌, 다만 현상만이 인식 될 수 있을 뿐인 계몽이다. 그의 철학이 지(知)를 의식과 자기 의식으로 이끌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의식은 이러한 관점에서는 주관적이고 유한한 인식작용으로 머물 뿐이다. ”(Bd. 20, S. 333.)15)
한 마디로 말하자면, 헤겔은 칸트 인식론의 한계가 오성 개념의 한계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칸트의 “오성은 결코 경험을 넘어서서는 안 되며, 만일 그렇지 않으면 인식능력 스스로는 다만 공상 이외에 아무것도 잉태할 수 없는 이론이성으로 되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한 학설은, 사변적 사유를 포기하는 학문적 측면을 정당화하는 것이다”16)라고, 헤겔에 의해서 혹평을 받기에 이른다.
이렇게 칸트 철학에서 하나의 한계를 보았기에, 헤겔은 그 한계를 뛰어넘고 자신의 ‘사변적 이성철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칸트의 한계가 동시에 헤겔에게 있어서는 발판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헤겔이 오성이라는 의식 속에서 (감성적) 내용이 나(자아)의 내용으로 된다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즉, 칸트에게서 지각의 “다양성의 통일은 나(자아)의 자발성(Spontaneität)에 의해서 정립”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자발성은 사유 일반이며, 다양성을 종합하는 것”이라는 점을 헤겔이 간파했고, 그 결과 “이것은 위대한 의식이며, 중요한 인식이다”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헤겔은 칸트를 뛰어 넘을 수 있었던 것이다. (Bd. 20, S. 344.)
주지하다시피, 칸트의 이론철학에서 감성과 오성은 각각 별도의 능력을 발휘한다. 거기서는 감성이 표상을 수용하는 능력을 발휘하건, 오성이 표상을 통해서 주어진 대상을 개념적으로 사유하건, 이 둘의 관계는 직접적이지 않다. 그런데도 이 양자는 결합해야만 인식이 성립한다. 이 결합을 위해서 등장하는 것이 자기 의식의 ‘순수 통각’이고 ‘판단’이며 보편적 사유 규정으로서 ‘제 범주’이다. 그리고 이들의 결합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이 ‘초월적 판단력’이고 ‘순수 오성의 도식주의’(Schematismus)이며 ‘초월적 상상력’(Einbildungkraft)이다.
헤겔은, 이러한 모든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론적 의식의 세 가지 방식인 직관과 오성 그리고 이성의 상호작용이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며, 그 결과로서 무한자가 대상으로 등장하는 것도 필연적 귀결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칸트의 인식론에서는 이성이 아무런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다. 헤겔은 그 까닭을 칸트에게서 “사유, 오성은 특수자로 머물러 버리고, 감성도 특수자로 머물러 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Bd. 20, S. 348.)17) 그래서 결국 칸트에게서 이성이 무한자를 스스로의 대상으로 상정하면서도18) 인식하지는 못하는 (변증법적) 모순에 빠지고 마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헤겔에게서 문제는, 의식이라는 주관이 스스로를 인식하고, 또한―칸트에게서처럼 ‘무한자’라는―스스로의 대상을 인식해야만, 의식은 참된 주체가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오성적 사유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또한 문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칸트의 한계가 ������정신현상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비판된다:
“그러나 이제 이 무조건적 일반자가 제 아무리 의식의 참된 대상으로 부각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의식의 대상으로 그칠 뿐이다. 따라서 의식은 아직도 자신의 개념을 개념으로서 포착하지 못했다는 것이 된다.” (PhdG, S. 93.; 192 쪽)
이때의 의식은 이성적 의식이 아니라, 대상과 분리된 오성적 의식이다. 이러한―칸트적 의미의―오성적 “의식은 자신에게 되돌아온 일체의 반성적 대상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지는 못한다”. (PhdG, S. 93.; 192 쪽) 그러나―헤겔적 의미의―이성적 의식은 “존재하는 대상에 본질적으로 관계하는 것으로 현상하는(erscheinend) 정신”(Bd. 4, S. 112.)이기 때문에, 궁극에 가서는―‘무한자’라는―자신의 대상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인식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헤겔은 이것을 어떻게 확정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긍정적인 것에서 부정적인 요소를 찾아내고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요소를 발견하여 참된 변증법적 발전을 도모하는, 헤겔의 ‘사변철학적 방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19) “헤겔의 방법이란 지(知)가 성립하는 매 순간마다―헤겔 자신, 혹은 엄밀히 말해서 사변적 철학자들인―우리(wir)가 지를 검증하는 것을 말한다. (…) 진리 검증의 척도인 우리는 지의 입장에서는 절대지로, 정신의 능력에서는 적극적(positiv) 역할을 하는 이성으로, 인류 가운데서는 철학자로 그리고 철학자들 가운데서는 헤겔 자신으로 등장한다.”20) 여기서 ‘우리’는, 대상과 관계하는 의식의 측면에서 보면, 감성과 오성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들을 초월하는 ‘이성’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성의 자발성’은 지각의 다양성을 통일하고 사유하기는 하지만, 그 결과가 진리인지 아닌지는 검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감성의 수용성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오성적 의식이 경험하는, 지각의 다양성에 대한 ‘통일’의 계기를 제공하는 것은 주관의 측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의 측면에 있는 것이 된다. 이 계기를 헤겔은 “힘(Kraft)이라고 명명되는 운동”(PhdG, S. 95.)이라고 칭한다.21) 이 힘은 본래가 객관에 존재하는데, 지각하는 의식이 어떤 객관을 “많은 특성을 지닌 사물”(das Ding von vielen Eigenschaften)(PhdG, S. 80.)로서 지각하고, 오성적 의식이 이 사물에 개념을 부여함으로써, 객관의 측면에 있던 힘은 주관으로 옮겨오게 되어 “오성의 힘”(die Kraft des Verstandes)(PhdG, S. 120.)으로서 등장한다. 그리고 객관의 세계는 오성에 의해서 “법칙의 영역”(Reich der Gesetze)(PhdG, S. 105.)으로 파악되며, 힘은 객관에도 주관에도 진리를 위한 계기로서 등장하게 된다.22)
객관의 실체를 이루고 있던 힘은 이렇게 하여 의식의 힘으로서 등장한다. 그러나 오성이 파악한 법칙은, 무조건적인 일반자와는 분리된 것이기 때문에, 고정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남는다. 하지만―헤겔적 의미의―의식의 힘은 대상과의 관계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즉 대상의 힘에 의해서 스스로의 존재를 자각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대상을 배제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위와 같은 오성의 한계를 파악하는 것도 의식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은 자신에게 전달된 대상의 힘을 통해서 “참된 세계로서의 초감성적 세계”(eine übersinnliche als die wahre Welt)로 자신이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PhdG, S. 101.) 즉, 초감성적 세계는 그 존재근거를 현상의 세계에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그것은 의식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대상을 사유하기 위하여, 먼저 자신의 능력을 반성하게 한다. 이렇게 보면, 헤겔에게서 초감성적 세계는 주체인 의식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대상으로 삼도록 하는 근거가 되는 셈이다. 원래 대상의 영역에 있던 초감성적 세계가 이처럼 의식―자아―의 세계로 떠밀려 들어올 때, 그 세계는 “전도된 세계”(die verkehrte Welt)(PhdG, S. 111 f.)가 된다. 이 세계는 주체를 참된 주체로서 각성시키기 시작하는 단초이다.
6. 나오는 말
철학이라는 학문을 염두에 두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면, 아마도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다’라는 대답이 첫 번째로 주어질 것이다. 그 까닭은 우선 인간과 여타의 생물을 구별하기 위해서일 것이며, 다음으로는 다른 모든 것이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규정되고 정의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성’이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이성이란 말인가? 우리는 헤겔에게도 이 물음을 당연히 던질 수 있다. 이에 대답하기 위해서―철학자로서는 당연하겠지만―헤겔은 철학의 역사를 검토해야 했을 것이다. 그 까닭을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철학사가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것은 연이어 나타나는 고귀한 정신들의 모습이며, 사유하는 이성의 영웅들이 도열해 있는 회랑(回廊)과도 같은 것이다. 이들 영웅은 이성의 힘으로 사물과 자연과 정신의, 더 나아가서는 신의 본질을 추구함으로써 이성적 인식이라고 하는 최고의 보물을 우리에게 마련해주고 있다.” (Bd. 18, S. 20.; 임석진 역, ������철학사 Ⅰ������, 서울 (지식산업사) 1996, 23 쪽. 강조는 필자의 것)
그렇기 때문에 헤겔 스스로가 ������헤겔의 학문의 체계 ― 제1부: 정신현상학������이라는 명칭으로서 서술하고 있는 책의 내용을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우리는 이 책의 서술과정이 ‘철학사’와 어느 정도로 부합하는가를 알게 된다. 이 책의 내용에 따라서 명명된 ������의식의 경험의 학������(Wissenschaft der Erfahrung des Bewußt- seins)은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의 다른 명칭이다. 이 책의 명칭이 ������정신현상학������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책에서 처음부터 등장하는 것은 ‘의식’이지 ‘정신’이 아니다―정신은 「자기의식」 장에 가서야 비로소 등장한다. 앞서 고찰한 것처럼, 헤겔은 ‘정신’이라는 개념을 처음부터 주관으로서 설정하고 객관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으로 취급하였다. 그 대신 그는 객관과 관계하는 정신을 ‘의식’이라고 명명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헤겔이 의식이라는 명칭을 통해서 밝히고자 한 것이, 처음부터 주관 자체가 아니라, 객관에 대한 의식의 태도와 방식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말하자면, 헤겔은 인식의 주관으로서 정신이 어떻게 현상하는가를 고찰한 것이었으며, 그것이 철학사적으로는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자신의 체계 내에 수용하여 밝힌 것이었다.
하지만 절대적 관념론 철학자이면서 변증법을 자신의 철학적 방법론으로 삼고 있는 헤겔로서는 ‘이성’의 능력이 ‘한낱’ 대상을 인식하는데 그치고 마는 것에는 도저히 만족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앎의 시작은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지만, 앎의 진리성이 검토되기 위해서는 주관의 측면도 함께 검증되어야 할 것이고, 동시에 이성 또한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헤겔이 (대상) 의식을 거쳐서 자기의식(Selbstbewußtsein)으로 나아가는 것은 당연한 순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와 헤겔의 고찰 순서에 따라서, 헤겔이 자기의식을 ‘철학사’와 어떻게 관련짓고 있는가 하는 점을 다음 과제로 남겨두게 되었다.
참고문헌
(“Bd.”로 표기된 헤겔 전집은 “G. W. F. Hegel Werke in zwanzig Bänden, Theorie―Werkausgabe Redaktion Eva Moldenhauer und Karl Markus Michel, Suhrkamp Verlag, Frankfurt a. M. 1970~1971”을 주 텍스트로 함)
G. W. F. Hegel, Bd. 4, Nürnberger Schriften
______________ Bd. 7,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______________ Bd. 8,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Ⅰ
______________ Bd. 18, Vorlesungen übe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Ⅰ; ������철학사 Ⅰ������, 임석진 역, 서울 (지식산업사) 1996
______________ Bd. 19, Vorlesungen übe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Ⅱ
______________ Bd. 20, Vorlesungen übe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Ⅲ
______________ Phänomenologie des Geistes, Vorrede, Felix Meiner Verlag, Hamburg, 1988; ������정신현상학������ Ⅰ, 임석진 譯, 분도출판사, 1983
______________ Die Vernunft in der Geschichte, hrsg. v. Johannes Hoffmeister, 6. Aufl., Hamburg 1955
______________ Wissenschaft der Logik Ⅰ, hrsg. v. F. Hogemann und W. Jaeschke, Felix Meiner Verlag, Hamburg, 1978
I.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Felix Meiner Verlag, Hamburg,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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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편저, ������과학사 개론������, 서울 (다산출판사) 1987
문성화, 「������정신현상학������과 철학의 역사 (Ⅰ)」, ������철학연구������ 제 67집, 대한철학회, 1998. 8
문성화, 「������정신현상학������과 철학의 역사 (Ⅲ)」, ������철학연구������ 제 75집, 대한철학회, 2000. 8
[Zusammenfassung]
Hegels Kritik der Kantischen Erkenntnistheorie
― in Bezug auf den Begriff 'Verstand' ―
Mun, Seong - Hwa (Gyeongsang National Univ.)
Ich bemühe mich in dieser Abhandlung um die Hegelsche Untersuchung zur Kantischen Erkenntnistheorie in Bezug auf den Begriff 'Verstand', und demgemäß bezieht sich meine Darlegung vor allem auf die Untersuchung 1. des Kapitels Kraft und Verstand in der Phänomenologie des Geistes, 2. des Kapitels Kant in der Vorlesungen übe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3. Kants Kritik der reinen Vernunft.
Man schätzt Kant und Hegel als großen Philosophen, da sie sich ihre eigenen philosophischen Systeme aufgrund früheren Gedankens entwickeln. Wenn wir von diesem Standpunkt ausgehen, können wir vorausnehmen, daß Hegel auch von der Philosophie Kants auf seine systematische Entwicklung ausgegangen ist.
Es ist unvermeidlich, daß Hegel als absoluter Idealist den Geist ― Vernunft, Bewußtsein ― zu dem Prinzip der Philosophie. Trotzdem schließt Hegel den Begriff 'Erfahrung' nicht aus, und umgekehrt nimmt er diesen Begriff als den Ausgangspunkt seiner Geistesphilosohie auf. Wenn solcher Gesichtspunkt auf die Sphäre des Objekts angewendet wird, können wir es wohl erkenntnistheoretisch nennen.
In der Phänomenologie des Geistes als System der Wissenschaft im Kapitel (Gegenstandes-) Bewußtsein und in der Vorlesungen übe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im Kapitel Kant verweist Hegel in die Richtung, die Kant mit seinen Begriffen 'Anschauung, Wahrnehmung, Verstand' gewiesen hatte. Da das geistige Vermögen des Menschen sich natürlich dialektisch entwickelt, kann und müß das (Gegenstandes-) Bewußtsein sich ― bzw. der Geist oder die Vernunft ― zum Selbstbewußtsein entwickeln. Nun die Kantische Erkenntnistheorie wird nach Hegel durch das Vermögen des Verstandes eingeschränkt. Daher entwickelt das Bewußtsein bei Kant sich nicht das wahre Subjekt des Erkennens.
Schlagwörter: Philosophiegeschichte, Erkenntnistheorie, Idealismus
[출처] 헤겔의 칸트 인식론 비판 -문성화(경상대) |작성자 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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