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가을 억새/정일근

나뭇잎숨결 2020. 9. 20. 21:17

가을 억새

 

 

-정일근

 

 

때로는 이별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가스등 켜진 추억의 플랫홈에서

마지막 상행선 열차로 그대를 떠나보내며

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어둠이 묻어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터벅터벅 긴 골목길 돌아가는

그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 없는 시대의 이별이란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

작별의 축축한 별사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총

제 갈 길로 바쁘게 돌아서는 사람들

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겠는가.

이별 뒤의 뜨거운 재회를 기다리겠는가.

하산 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에

내 생애 가장 깨끗한 눈물 적시고 싶은 것이다

 

 

'시(詩)와 詩魂'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돌이 되면/서정주  (0) 2020.09.20
이별 1/이성복  (0) 2020.09.20
내 속의 가을/최영미  (0) 2020.09.20
정천한해情天恨海/한용운  (0) 2020.09.20
이별 이후/문정희  (0) 2020.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