씻음에 대하여
-김정한
아침 숲 속 안개
샘물에 얼굴을 씻으며, 씻겨져 내리는 귓가에
보이는 것에 대한 그대의 자그마한 비명 소리 듣는다.
땀흘리고 분노하고 사랑하는 것
그게 후줄그레 씻음의 행위라고, 나는 말했지만
그대는 믿지 않았다. 세상은 참 더러워요.
추해요. 치사해요.
아침 한기 온몸에 소름
바닥에 바위와 풀잎이 투명한 샘물에 얼굴을 씻으며
입김이 호호 냇물 위로 서리는 그 속에서
그러나 나는 오늘 다시 깨닫는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따스한 믿음을
결코 포기할 수 없음을
얼굴을 씻고 가슴을 씻고
가슴에 묻은 사랑의 소금끼를 씻고
다시 사랑하기 위하여, 빼앗겼던 것을 씻듯이
내 가슴에 묻었던 그대의 얇은 가슴마저 씻으면서
근육에 배인 아픔만큼은
씻어내릴 수 없음을 다시 깨닫는다.
그것은 정말 얼마나 벅차고 소중한가
추운 날 가난한 사람들의 입김이 그렇듯이
씻음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생각케 한다.
어떤 갈 길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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