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정치적 담론에 대한 고찰
- 회페(O. H ffe)의 이론을 중심으로
김 석 수(서강대)
이 글은 회페의 이론을 중심으로 도덕적-정치적 담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정당한 지배의 세계를 제대로 확립하지 못했다. 우리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우리는 탈지배(무지배)나 전제적 지배를 벗어나 지배의 정당성을 확립해야 할 것이다. 회페는 바로 이와 같은 문제의식 속에서 어떻게 하면 정당한 지배가 가능할 것인가를 자신의 도덕적-정치적 담론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한다. 필자는 바로 회페의 이 도덕적-정치적 담론이 담고 있는 특징을 크게 다섯 가지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1) 그의 도덕적-정치적 담론에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는 것은 칸트로부터 수용한 정언명법이다. 그는 이 정언명법을 통하여 법과 도덕의 관계, 정치적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그는 가언명법에 바탕을 두고 지배의 효율성만을 중시하는 입장을 비판하고, 지배의 정당성에 바탕을 두고 지배의 효율성을 추구하고자 한다.
(2) 회페는 (1)의 논의에 입각하여 부당한 지배 논리가 내재되어 있는 신화적 형태의 법실증주의나 법도덕주의를 배격한다. 그는 이들 입장이 법과 도덕을 구별하지 못하고 완전히 분리시키거나 통일시켜버림으로써 이율배반적 상황에 빠져든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므로 회페는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에서 논의되는 법과 도덕의 관계를 수용하여 법과 도덕이 상호 견제하면서 조화될 수 있는 법적 도덕/도덕적 법을 중시한다.
(3) 회페는 (2)의 관점 아래서 개인의 차원을 넘어 정치적 차원에서 정의의 문제를 고찰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정치적 정의를 매우 중요시하게 된다. 정치는 정당성을 지니기 위해서 정의를 지향해야 하며, 정의는 현실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정치적 활동공간에서 확립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정의없는 정치는 맹목적이며, 정치없는 정의는 공허하다. 회페는 이와 같은 입장에서 탈지배(무지배)나 전제지배를 거부하고 정당한 지배를 주장하고 있다.
(4) 회페는 자신의 이와 같은 목적을 좀 더 확고히 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네시스 개념을 수용한다. 그는 이 프로네시스 개념을 통하여 정치적 현실의 사실세계와 정의의 도덕적 당위세계 사이를 매개짓고자 한다. 칸트의 반성적 판단력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네시스는 사실세계와 당위세계, 개별세계와 보편세계를 일방적으로 분리시키거나 통일시키지 않고 구별적 상태 속에서 상호 매개를 시켜준다.
(5) 회페는 이와 같은 판단력을 통하여 다원성과 담론의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천착해 들어간다. 그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집단간의 갈등이나 능력지상주의, 강자 중심주의를 벗어나 참된 인간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정치적 질서의 확립이 가장 우선적이라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적 정의의 확립을 위한 절차가 필요하다. 그는 이와 관련하여 유용성의 원리보다는 의사소통의 원리가, 의사소통의 원리보다는 규범성의 원리가 더 우선적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관용을 인간다움을 구현하는 데 가장 근원적인 요소임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런 주장이 규범성의 원리만 중요하고 나머지 두 원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다원화 사회에서 이 세 원리가 모두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칸트적 의미에서의 규제적 기능을 담당하는 규범성의 원리이다.
결론적으로 그의 도덕적-정치적 담론은 공리성과 정언명법, 법과 도덕을 배타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상보적으로 처리함으로써 '도덕의 정치적 현실화'와 '정치의 도덕적 정당화'라는 두 과제를 풀어보자는 데 주요 목적을 두고 있다.
1. 들어가는 말
오늘날 우리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내적 영역과 외적 영역의 경계가 대단히 혼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인류 역사의 비극은 언제나 어느 한쪽 영역의 활동이 절대화될 때 일어났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적 활동의 영역을 공적 활동의 영역으로 확장시키려고 하거나 아니면 공적 활동의 영역을 사적 활동의 영역으로 확장시키려고 하면 필히 갈등과 대립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경우를 지난 날 수없이 보아왔다. 아렌트(H. Arendt)가 지적하듯이 고·중세 시기에는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의 영역을 담당하는 자들이 활동적 삶(vita activa)을 담당하는 자들로 하여금 공적 활동의 영역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이로 인해 농민, 상민, 노예, 여성들은 공적인 정치적 담론의 장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반면에 근대 이후는 신흥상업계층, 이른바 시민계급이 혁명을 계기로 공적 담론의 영역을 관장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오늘날에는 기술적 활동을 담당하는 자들이 공적 활동의 영역을 주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그동안 우리의 공적인 정치적 담론의 공간이 한편에서는 종교의 이름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경제의 이름으로 침식당해왔다. 근대 이전의 제정일치 사회에서는 관조적 활동을 담당했던 종교집단이나 형이상학적 내지는 초월적 가치관을 추구했던 정신 계급들이 정치적 담론의 공간을 독차지했다면, 근대 이후의 제정분리 사회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로서 나타난 종교개혁의 주체들이나 시민혁명의 주체들이 정치적 담론의 공간을 독차지하고 있다. 그 어느 쪽에서도 정치적 담론의 정의로움이나 정당성이 퇴색되고 있다. 종교의 이름으로 정당화된 정치권력도, 경제의 이름으로 정당화된 정치의 권력도 모두 인권의 고유성을 유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오늘날 정치의 종교화나, 정치의 경제화를 극복하기 위해 이성의 사적 사용을 지양하고 이성의 공적 사용을 제창하고 있으며, 나아가 탈이성적 판단력의 정치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를 다시 정립해야 할 것이며, 나아가 공적 영역의 활동 질서를 기초짓는 정의의 원리, 법의 원리, 도덕의 원리에 대한 위상을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익히 알다시피 고대와 중세는 이들 원리가 초월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이들 원리의 초월적 본질성을 의심하기 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따르기에 급급하였다. 또한 이들 원리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계선상에 있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그 당시의 자연법론에서 아주 명백히 드러난다. 자연법은 이미 영원법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 영원법에 기초하고 있는 자연법의 토대 위에서만 실정법은 존재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 당시의 자연법은 그 자체가 이미 도덕법이다. 자연법과 도덕법은 동열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내면을 규제하는 도덕의 질서와 외면을 규제하는 법의 질서가 분리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율법은 그 자체가 형법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양심법과 현실 실정법이 상호 침투되어 있었다. 이러다 보니 교황의 권능이 황제의 세속적 권능을 규제하는 기능을 지니게 되었으며, 나아가 종교적 힘이 현실의 권력구조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은 긍정적 기능을 수행하기 보다는 부정적 기능을 수행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역사는 불가피하게 자연법의 근원적 주체인 신을 괄호에 넣게되고, 나아가 거대한 종교개혁과 시민혁명은 종교와 정치를 분리시키기 시작했으며, 또한 정의와 법과 도덕의 원리는 이성의 자기 권위 위에서 세워지게 되며, 따라서 모든 질서와 원리가 계약적 정신에 토대를 두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를 규제하는 그 어떤 원리도 우리의 권리를 진척시키는 기능을 할 때에만 존재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자연법(lex naturalis)은 자연권(jus naturale)으로 전환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서 페어드로쓰(A. Verdross)는 "합리주의적 반격"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런 합리주의적 반격으로서의 자연법의 속화 과정은 근대 초창기의 이성적 자연법론자들에 의해서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급기야는 법과 도덕의 완전한 분리가 선언되면서 법실증주의는 또 하나의 법신화주의를 배태시키게 되었다. 익히 알다시피 순수법학파인 켈젠(H. Kelsen)은 법의 이데올로기성을 타파하기 위해 '법의 윤리화'를 거부하고 '법의 논리화'를 추구하였다. 이와 같은 실증주의 사고는 오로지 논리적이거나 과학적인 사고만이 가치를 지닐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성의 이름으로 전개된 과학성, 논리성, 실용성, 합리성은 또 하나의 이성의 신화화를 창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세계성과 진실된 인간의 조건은 바로 이런 신화의 굴레에서 벗어날 때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신화와 계몽의 악순환적 구조를 탈피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리성과 정언명법의 대립, 법실증주의와 법도덕주의의 대립, 탈지배와 전체주의적 지배 사이의 대립, 이 모두를 지양해야 할 것이다. 회페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칸트의 실천이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이론을 수용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바탕으로 그는 법과 도덕, 정치와 도덕을 분리하거나 통합함으로써 발생하는 법도덕주의와 법실증주의, 탈지배와 전제적 지배의 이율배반을 넘어서고자 한다.
이 글은 이와 같은 문제를 아주 깊이 다루고 있는 회페의 정치적 정의론 내지는 그의 도덕적-정치적 담론을 고찰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삼고 있다.
2. 공리성과 정언명법
근대인은 한 마디로 합리성의 추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합리성의 추구는 공리성과 정언명법을 근간으로 하고 있었다. 이 공리성과 정언명법은 제각기 초합리적인 세계를 통해 나타나는 부정적인 점을 극복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었다. 전자는 합리성을 이해의 공정한 정립에 두고 있었다면, 후자는 합리성을 이성의 당위성에 두고 있었다. 이 두 입장은 결국 공리성과 정의의 우선 관계를 놓고 대립되는 면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입장 모두 이성적 활동 내에서의 합리성을 찾으려고 한 점에서 공통적인 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아도르노가 주장하듯이 합리성을 표방하는 계몽정신은 또 하나의 신화를 초래할 수 있다. 즉 신화를 넘어서려는 계몽의 합리적 태도가 이성 자신을 신화화할 수 있는 위험을 유발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은 면은 근대 정신에 전반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특히 공리성에서만 삶의 합리성을 찾으려고 하는 입장은 이성의 도구화 경향을 초래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정언명법을 중시하는 칸트의 입장은 이성의 자기 비판을 통한 자기 능력의 유한성 내에서의 합리성을 모색하였다. 그러므로 칸트는 사실적 이해 관계 보다는 당위적 태도를 중시하였다. 이 양자 사이의 갈등 관계를 조화시켜보려는 입장이 바로 롤즈와 회페의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칸트의 정언명법에 바탕을 두고, 즉 칸트의 도덕적 구성주의에 바탕을 두고 양자 사이의 조화를 모색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 사이의 이런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입장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롤즈는 공리주의적 입장을 좀 더 긍정적으로 살려내려고 한다면, 회페는 칸트적 입장을 더 강하게 나타내려고 한다. 그러므로 전자는 '형이상학 없는 정의관'을 확립하고자 했다면, 후자는 칸트적 의미에서의 '형이상학 있는 정의관'을 확립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입장 차이에 대한 분석은 현대 사회와 세계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계기를 제공해줄 수 있다.
회페에 따르면 정언명법과 공리성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논의한 사람은 칸트로 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칸트의 『실천이성비판』과 『도덕형이상학기초』에서 보편적인 일반 정언명법이 나타나고, 『도덕형이상학』에서 '개인적 실천과 관련된 덕'과 '제도적 실천에 관련된 법'에 적용되는 특수 정언명법이 나타나게 된다. 이처럼 칸트는 일반 정언명법과 특수 정언명법의 관계를 통하여 법과 도덕의 상호성을 확립하고자 하는데 반해서, 오늘날의 중요한 법이론가들과 사회이론가들은 도덕에의 의무지움 대신에 의무를 떼어냄을, 즉 법의 탈도덕화를 주장하는 경향이 강하다. 회페는 법을 순전히 도덕화하거나 법을 완전히 탈도덕화 하는 것을 거부하고 이 사이를 매개짓고자 하는 '도덕주의 없는 법적 도덕(eine Rechtsmoral ohne Moralismus)'을 주장하는 칸트의 입장을 따라 정의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회페는 자신의 이와 같은 목적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롤즈라고 본다. 물론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회페가 바라보는 롤즈는 칸트처럼 형이상학적 세계를 근거로하여 정의론을 세우고자 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롤즈는 자신의 정의론을 세움에 있어서 칸트와 같은 예지계의 위치를 갖는 존재론적 가정을 피하고자 한다. 즉 롤즈는 자신의 정의론을 합리적인 선택, 따라서 자기이익에서 도출하고자 한다. 이 자기이익은 경험적인 규정근거들의 총괄성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 원리들은 사실상 비형이상학적인 본성을 띠고 있다. 롤즈는 이 비형이상학적인 본성의 정립을 무지의 장막에서 찾고 있다. 결국 회페에 따르면 롤즈에게서 무지의 장막은 자기이익의 합리적 추구에 목적을 두고 있지 자기헌신적인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다.
롤즈는 우리가 사회의 기본적 구조를 위한 정의의 원칙을 원초적 동의의 차원에서 확립하고자 할 때, 이 원칙은 "그들 자신들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데 관계하게 되는 자유로운 이성적 개인들이 평등한 최초의 입장에서 그들 공동체의 기본 조건을 규정하는 것으로 수용하게 되는 원칙이다." 롤즈는 정의론 제 40절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대한 칸트적 해석>이라는 곳에서 자신의 '원초적 입장'이 칸트의 자율개념과 정언명법의 절차적 해석으로서 여겨질 수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칸트의 '원초적 계약'이라는 개념을 수용하여 자신의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또한 그는 자유와 평등의 기본원리가 보편적이기 위해서는 경험적인 우연성에 근거하고 있는 홉스나 로크의 이론도 거부한다. 그래서 그는 정의를 가능케 하기 위한 원초적 입장을 원시적 문화상태가 아닌 가설적 상태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롤즈가 주장하듯이, 칸트의 원초적 계약은 정언명법의 위치를 차지한다면, 자신의 원초적 입장은 가언명법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브래머(Karl Bremmer)는 롤즈가 칸트의 윤리학을 단순히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정의론을 구축하는데 빈약함을 보충하기 위해 경험적 존재에도 적용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목적론을 수용하고 있다고 본다. 나아가 그는 '칸트에게는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의지, 이성에서 정의의 원리를 확립하고 있는데 반해서, 롤즈는 영리성의 원리에 입각해서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고 본다. 윌리암스(H. Williams) 역시 브래머의 이런 입장에 동의하고 있다. 이들에 의하면 롤즈의 원초적 입장은 '무지의 장막'을 전제하지만, 이것은 칸트가 말하는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으로 말미암아 행위하는 선의지에 근거하고 있는 이성적인 의미가 아니라 합리적으로 자기 몫을 가져갈 수 있는 수학적(계산적) 이성에 근거하고 있다. 또한 존슨(O. A. Jonson)도 롤즈가 칸트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자율'과 '정언명법' 그리고 '이성적임'이라는 세 주제 아래서 다루고 있다. 그에 의하면 롤즈의 이론에는 이와 같은 것들이 자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롤즈의 이론에서 정의의 가능근거로서의 원초적 입장은 결국 무지의 장막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그러나 이 무지의 장막은 인간의 이기적 욕망의 상황을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욕망 자체를 합리적으로 모색하는 차원이기 때문에 칸트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동기의 순수성이 확보되지 않아 타율적으로 여겨진다. 하버마스도 롤즈가 주장하는 "중첩적 합의(overlapping consensus)"도 단지 유용성의 목록일 뿐이지 이론의 올바름에 대한 확증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아울러 롤즈의 정의론에서는 정당화될 수용가능성과 현실적 수용가능성 사이의 구별이 무너져 버렸다고 비판한다. 또한 존슨도 개별적인 특정한 목적과 보편적인 목적 사이의 차이에 근거해서 롤즈가 주장하는 정언명법과 가언명법 사이의 구별도 칸트가 주장하는 정언명법의 차원에 이르지 못하고 어디까지나 '영리의 규칙'과 '숙련의 훈계'사이의 구별 차원에 머물러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칸트에게는 정언명법과 가언명법의 구별이 목적의 상이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전제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존슨은 롤즈에게서 주장되는 '이성적임'이라는 것도 칸트적 의미에서의 도덕적 차원을 함축하고 있지 못하다고 본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 롤즈의 이성적임은 상호무관심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여전히 경제적 의미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롤즈의 이성적임은 도구성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회페도 존슨과 마찬가지로 롤즈의 정의론에는 칸트의 정언명법적 요소가 상당히 약화되고 있다고 본다. 그는 홉스보다는 롤즈가 칸트의 입장을 따라 계약에 있어서 상호승인적 기능을 강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 롤즈는 칸트적 전략을 통하여 홉스적인 계산적 성질이 위장되어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특히 롤즈가 칸트의 자율성이 근거하고 있는 정언적 특성을 수용하려고 하지만 그에게는 칸트처럼 형이상학적인 면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정의의 가능 근거로서의 원초적 입장이라는 것은 정언적이지 못하고 가언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다. 회페에 의하면 롤즈의 정의론은 '무지의 장막'을 끌어들여 정의의 보편적 원칙을 정당화할 때에는 정언적으로 추구되지만, 그 '무지의 장막' 뒤에는 사회공리적(혹은 개인공리적) 입장에서 사회적 재화가 추구되고 있다. 적어도 여기에는 규칙공리주의적 상황이 깔려있다. 즉 무지의 장막을 통하여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려는 합리적 선택의 주체인 자아는 칸트적 의미의 도덕적 주체에 이르지 못한다. 따라서 거기에는 칸트적 의미에서의 도덕적 성격이 결여되어 있다. 오히려 롤즈의 정의론에서는 첫 번째의 '자유의 원칙'은 이것을 보조하는 수단적 성격을 지니는 두 번째의 '차등의 원칙'에 의존적이다. 그래서 회페는 롤즈의 정의론이 칸트의 이론보다 경제적인 면에 더 많이 기울어져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롤즈의 정의론은 정의를 실천철학의 제일 덕목으로 생각하고 칸트의 정언명법을 절차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공리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하지만, 거기에는 칸트의 정언명법이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이 퇴색했으며, 물자체의 세계가 현실 정치 세계 속에 흡수되어버린다.
물론 롤즈를 이와 같이 해석하는 데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다월(S. L. Darwall) 같은 사람은 롤즈의 원초적 입장에 참여하는 주체는 이기적인 욕망의 주체가 아니라 자율적이라고 보며, 나아가 칸트의 정언명법적 정신이 토대가 되어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회페 역시 다월의 이런 해석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칸트가 보편성을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듯이 롤즈가 주장하는 무지의 장막도 바로 이 보편성에 일치한다. 즉 롤즈의 무지의 장막은 정언명법의 제일 형식으로서 뿐만 아니라 자연법칙의 제일 형식으로서 기능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무지의 장막은 합리적인 영리적 선택을 도덕적인 선택으로 변형시켜주는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해준다. 하지만 롤즈는 전자의 입장에서 후자의 입장으로 비약하는 입장을 원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회페에 의하면 롤즈는 서구의 국가들이 추구해온 지나친 일반화를 자제하며, 나아가 "도덕적 법을 유일하게 옳은 것으로 생각하는 문화적 자만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므로 롤즈는 정의를 초월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확립하는 독단화될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벗어나 현실적 정의관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의 무지의 장막은 모든 문화적, 사회적 구별을 지양하기 때문에 단순한 윤리적 상대주의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또한 그렇다고 초월적인 형이상학에 바탕을 두는 윤리적 절대주의로 치닫고 있지도 않다. 이런 의미에서 롤즈는 형이상학적 정의관이 아니라 현실적인 정치적 정의를 추구하고 있다. 그의 이런 정의관은 초합리성이나 비합리성을 거부하고 내재적이고 절차적인 합리성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롤즈는 도덕적 형이상학에 바탕을 둔 정의관이 아니라 현실의 정치적 상황에 바탕을 둔 정의관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회페가 볼 때 롤즈처럼 논지를 전개하다보면 칸트가 애써 쌓아올렸던 인간의 현실적 삶의 외적 관계와 관련된 법과 인간 개인의 내면적 의무와 관련된 도덕의 구별태의 위치에 있지 못하고 분리나 어느 한 쪽으로의 통합으로 이어져 정당한 정의가 외면되어 버릴 위험이 일어날 수 있게 된다. 회페는 롤즈의 이와 같은 문제는 그가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에서 논의하고 있는 <법론>에 대한 고찰을 거의 하지 않고 단지 칸트의 『도덕형이상학기초』나 다른 윤리적 저술들에만 관심을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롤즈가 정의의 정당성을 제대로 확립하기 위해서는 칸트의 <법의 형이상학적 정초>에 대해서 좀 더 세심한 고찰을 했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논문은 롤즈의 정의론에 대해 어느 해석이 더 정확한 해석인가를 문제삼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공리성과 정의의 상관관계를 통해 삶의 바람직한 조건을 탐색해보는 데 있다. 오늘날 우리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사실적인 좋음(good)의 추구가 당위적인 옳음(right)의 추구를 압도하는 면에 있다. 여기에 회페는 이 두 영역을 조화시켜야 함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점을 칸트에게서 찾고 있다. 그에 의하면 칸트의 정언명법에는 헤겔이 주장하는 것처럼 단순히 동어반복이거나 쉘러(M. Scheler)가 주장하는 것처럼 "공허하고 결실없는 형식주의"가 아니다. 칸트의 정언명법은 존재와 당위, 인간학적인 면과 규범적인 면이 모두 고려되어 있다. 그래서 회페에 따르면 '우리가 존재와 당위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경험적인 전제들에서 논증해서 안되며, 도덕적인 잘못된 추론을 피하기 위해서 규범적인 요소들에만 호소해서도 안된다.' 정의의 규범적 전망과 사실적 기능이 혼돈되어서는 안된다. 칸트의 윤리학에서도 정언명법을 주장함에 있어서 전혀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 역시 '거짓말에 관한 논쟁' 등에서 결과에 대한 고려를 중요시한다. 다만 결과에 대한 고려는 "도덕법칙을 정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용하기 위해서이다." 회페에 따르면 도덕적 원칙을 최대한 실현하기 위해서는 결과를 가장 현명하게 파악하는 자신의 능력의 개발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칸트와 공리주의 사이의 윤리적 기본 논쟁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도덕적 원칙의 적용 차원이 아니라 그 원칙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차원이다. 적어도 회페에 따르면 정의는 경험적 결과에 대한 고려로부터 정초되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으로 정초된다. 이것은 정의가 힘과의 관계나 실용적인 차원에서 논의될 문제가 아니고 무조건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회페는 이와 같은 문제 의식에서 윤리적-정치적 개념으로서의 정의는 초월적 개념인 자유에 의해서 정초지워져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회페는 "정의는 자유의 개념 속에서 사유될 수 있고 정치적 질서의 자유는 정치적 질서의 정의 속에서 실현된다"라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회페는 칸트를 따라 정의의 선험적 정초지움을 중요시한다. 따라서 롤즈의 정의론에는 선험적인 형식적 원칙이 확립되지 못하고 경험적인 내용적 원칙이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에 경쟁하는 원칙들 사이의 갈등 해결이 몹시 어렵다는 것이 회페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회페의 입장에서 볼 때 롤즈는 자신의 정의론을 게임이론(Spieltheorie)이나 결정이론(Entscheidungstheorie)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정의는 "자기 이익으로 향해져 있는 냉정한 정보와 계산의 진행에서 나오는 합리성"이 근본 바탕이 되고, 따라서 그것은 "경제적 영역에서 이익을 극대화하고 손실을 극소화하는" 형태를 띠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도덕적 전망이 고려되는 정의의 정당성이 배제될 우려가 있다. 그래서 회페는 "정의 원리의 선택은 결코 합리적인 영리적 선택이 아니고 도덕적, 이성적 선택"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럴 경우에만 너무 협소한 합리성 개념으로 경도되지 않고 인간성이 구현될 수 있게 된다. 인간성이 구현되는 전략은 공개적인 행위들이 진지하게 논의되는 의사소통적 과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정의의 도덕적 구속성이 규제적 기능을 갖도록 해야지 서술적(기술적) 기능을 갖도록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자연주의적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회페는 바로 이와 같은 입장에서 정의의 도덕적 이념과 공리성의 사실적 쾌락의 양을 동일시 하는 것을 금한다. 이것이 동일시될 때 우리는 정치-사회적 정의의 본질적 요소인 인권을 유린하고 말 것이다. 인권은 모든 정치적 권위의 지배의 잘못된 사용에 대한 방어벽을 형성한다. 결국 인권이 유린되는 사회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개인적 도덕성과 정치적 도덕성이 상호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의무론과 목적론이 상보적이어야 한다. 회페는 이 점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첫째로 주관을 넘어서는 삶의 세계는 오로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도덕성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 객관적인 도덕성에 기초해서만, 즉 정치-사회적 삶에 기초해서만 인간은 개인적 도덕성에 대한 능력을 갖게 된다.
둘째로 정치적, 사회적 구속성들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객관적일 뿐만 아니라 주관적인 내면화를 통해서 존재한다.
목적론적 윤리와 의무론적 윤리는 완전히 배타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상호 보완적이다. 최고의 도덕적 원칙을 정초하는데 있어서는 의무론적이어야 하고, 그 원칙들을 특정한 삶의 영역이나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목적론적이어야 한다.
이처럼 정의는 집단 이익으로 환원되는 공리주의적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정의는 사실적인 현실적 관계를 다루는 정치학이나 경제학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당위적인 규범적 전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회페가 볼 때 홉스(Hobbes) 이후 아펠(Apel), 하버마스(Habermas), 롤즈(Rawls), 겔렌(Gehlen), 쉘스키(Schelsky), 루만(Luhman)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이들의 정치적 정의나 제도에 관한 논의들은 도덕적 관점이나 윤리적 전망이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다. 즉 이들에게는 생존하기 위한 '자기보존의 삶'과 '살만한 값어치가 있는 삶' 사이의 구별이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못하다. 회페가 보기에 반성적인 제도이론은 규범적인 제도들, 즉 윤리 없이는 나오지 않는다. 정치적 정의는 법과 국가에 대한 도덕적 관점 위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정의는 집단적 혹은 개인적 자기 이익이나 영리를 넘어서는 고유한 사회적 태도로서 단순한 실용적 구속성의 차원을 넘어서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들'을 동반하는 윤리적 구속성의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정의는 강제권이 있게되는 사회적 관계를 위한 정언명법으로서, 그리고 법질서와 국가질서를 위한 정언명법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3. 법실증주의와 법도덕주의
앞서 논의되었던 공리성과 정언명법의 관계에서 전자는 너무 현상적인 사실적 상황에만 집착하고 있다면 후자는 너무 이상적인 당위적인 면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조건과 결과를 고려하는 계산적인 환경 속에서만 살아갈 수 없고, 그렇다고 이런 현실적 상황을 완전히 무시하고 오로지 동기만을 고려하는 환경 속에서만 살아갈 수 없다. 가언명법과 정언명법은 우리의 삶을 꾸려가는 데 각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이런 의미에서 롤즈나 회페는 양자를 종합하려고 하였다. 롤즈나 회페 모두 칸트의 입장을 통하여 공리주의의 난점을 넘어서고자 했다. 그러나 회페가 볼 때 롤즈는 칸트의 입장을 충분히 살려내지 못함으로 인해 공리주의적 결함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즉 그의 논의는 칸트의 정언명법이 지니고 있는 도덕성을 상실하고 있다. 이 점에서 회페는 칸트의 정언명법에서 도덕성의 근거지움과 적용의 조건을 구별함으로써 롤즈적인 이탈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이처럼 이들은 그들의 세부적인 논의에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공리성과 정의의 양자의 가치를 모두 살리려고 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기본적인 입장을 같이하고 있다. 이들의 이론에는 신화를 초래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경계하고자 하는 태도가 담겨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회페가 논의하는 법실증주의와 법도덕주의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그는 법과 도덕을 분리하고 법의 정당성 문제 보다는 법의 효력성을 더 중요시하는 법실증주의도, 법과 도덕을 통일시키고 도덕적 내면의 세계를 현실적인 집행력을 지닌 법의 세계로 확장하는 법도덕주의도 법과 도덕 사이의 구별성이 무너져 내려버린 신화적 형태를 띠고 있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분리적 태도나 통합적 태도는 불가피하게 이율배반과 신화에 봉착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이 법과 도덕 둘 사이를 구별짓는 법적 도덕(Rechtsmoral)을 대단히 중요시한다. 이 법적 도덕이 지향하는 정치적 정의는 윤리학이 개인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법의 윤리학, 국가의 윤리학으로 확장될 것을 요구한다. 다시 말하면 강제성을 지닌 정치적 권한이 도덕적 전망으로부터 논의되어야 할 것을 요구한다. 회페가 보기에 모든 정치-법이론은 규범적 반성을 동반하는 철학과 연계되어야 하며 정치적 담론과 도덕적 담론이 분열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조적 관계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은 도덕적-정치적 담론의 형식을 띠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정당한 지배가 아닌 부당한 지배가 팽배하고 만다.
회페의 이와 같은 문제 의식은 그의 법과 도덕의 역사에 대한 통찰에서 기인한다. 근대 이전에 지배적인 모습을 띠고 있었던 자연법론은 도덕의 위치에 있어야 할 것들이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됨으로 해서 종교를 통한 법의 이데올로기화 현상이 인간을 유린하는 경향이 있었다면, 근대 이후 이성을 통한 법과 도덕의 분리는 부당한 법의 지배가 인간을 유린하는 경향이 있었다. 법과 도덕의 구별성(사이성)이 죽어버림으로써 의지와 행위, 내면과 외면,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고유성이 침몰해버리는 비극이 초래되었다. 양심의 문제를 형벌의 대상으로 삼아 질서와 안정의 이름으로 악용함으로써 법의 정당성 문제와 법의 효력성 문제가 상호 경계를 넘나들면서 인권을 유린해왔다. 회페는 이 두 영역 사이의 경계를 인정함으로써, 나아가 이들 각 영역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인간 존엄성(Humanit t)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신화의 늪으로부터 구하고자 했다.
오늘날 우리 세계는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이와 같은 소중한 가치가 침몰되고 있다. 가정과 사회, 국가와 개인,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탈이데올로기적으로 정립되기 위해서는 법실증주의나 법도덕주의의 극단을 피해야 한다. 법과 도덕이 구별태 속에서 살아 움직일 때만이 정당한 지배가 가능하게 된다. 탈지배, 반지배, 무지배의 논리나 억압적, 구속적 지배는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할 수밖에 없다. 정당한 지배의 틀은 법적 도덕에서만 가능하다.
회페는 자신의 이와 같은 목적을 위해서 법실증주의와 법도덕주의의 문제점을 자세히 검토하고 있다. 이들 각 입장은 정치만 있거나 정의만 있지 정치적 정의가 없다. 전자의 경우 정의에 관한 물음이 학적인 의미에서도 학외적인 의미에서도 객관적으로 확보되지 못하고 있다. 즉 전자의 경우는 정의의 표상에 관한 객관적인 타당성의 범주가 없어 법윤리적 상대주의를 함축하게 된다. 후자는 현실적인 정치적 상황에 대한 고려가 없어 구체성을 결여한 독단성을 지닐 수 있다. 회페는 이와 같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기술하는 것(Beschreiben)과 규제하는 것(Vorschreiben) 사이를 구별하고 나아가 존재-당위의 오류를 피하고자 한다. 자연법은 실정법의 정당성과 부당성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데 근거가 되는 것으로서, 이것은 강제없는 도덕적 전망을 담고 있으며, '병기없는 법(ein Recht ohne Waffen)'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회페는 자연법칙(Naturgesetz)의 영역으로서의 이론의 영역과 자유의 법칙의 영역으로서의 실천의 영역을 구별하고 나아가 자연법(Naturrecht)을 후자에 귀속시키는 칸트의 입장을 수용하고 있다. 칸트에게서 실정법의 근거로서의 초실증적인 자연법의 자연은 경험적 세계의 자연과는 구별된다.
회페는 이와 같은 구별적 입장에 기초해서 켈젠의 입장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켈젠은 실정법의 정당성 보다 효력성에 몰두함으로 인해 정의에 대한 도덕적 전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회페가 볼 때 켈젠은 법과 도덕의 연관성을 추구하는 자연법에 대하여 그것이 지닐 수 있는 이데올로기성을 비판하고 순수법론을 제창함으로써 법도덕주의의 신화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데는 의의가 있지만, 법의 윤리성을 외면하고 법의 과학성에만 몰입함으로써 또 하나의 실증주의적 신화를 불러들이고 있다. 법과 도덕의 분리를 주장하는 실증주의나 통일을 주장하는 도덕주의로 인해 발생하는 이율배반은 칸트가 현상과 물자체를 구별하듯이, 이 둘 사이를 구별할 때에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법과 도덕의 분리는 상대적 의미에서 이해되어야지 절대적 의미에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법실증주의의 주장처럼 실정법이 정의의 도덕적 전망 없이 단적으로 정의될 수 있다는 주장보다는 실정법은 정의의 도덕적 전망 없이는 정의될 수는 없지만, 특정한 관점, 즉 법학설적 관점에서만 정의없이도 정당화 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약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 법도덕주의의 '법과 도덕의 통일'도 절대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법도덕주의(Rechtsmoralismus)가 법칙도덕주의(Gesetzesmoralismus)로 해석되어 마치 '안깊음(Untiefe)'을 '깊지 않음(nicht-tiefe)'과 동일시하듯이, '정의롭지 못한 법(ein ungerechtes Recht)'을 '법이 아님(Nicht-Recht)'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라드브루흐(G. Radbruch)가 주장하듯이 국가의 현실법이 내용적으로 정의롭지 못하다 할지라도 '법이 정의와 갖는 모순이 참을 수 없을 정도에 이르지 않는다면' 효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정의롭지 않은 법이 정당성의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고 해서 효력성 마저 무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법칙도덕주의는 이 점을 외면해버릴 수 있다. 법의 법다움과 관련된 정당성의 문제에서는 법과 도덕의 직접적 연관관계를 논의할 수 있지만, 법의 효력성의 문제에서는 이들 사이의 직접적 연관관계를 주장할 수 없다. 따라서 정당성과 효력성의 문제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럴 경우에만 우리는 현실적 삶과 이상적 삶의 조화를 모색할 수 있다. 법의 법다움을 외면한 법의 효력성에만 집착하는 법실증주의도, 법의 효력성을 외면하고 법의 법다움에만 집착하는 법도덕주의도 모두 신화적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는 우리의 삶의 도덕적 전망을 열어주는 이상적 가치를 無化시키며, 후자의 경우는 우리의 현실적 삶을 지탱시켜주는 현실적 가치를 無化시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법명령설과 법승인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법이 효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명령의 기능을 지녀야 하고 법이 법답기 위해서는 승인의 계기를 동반해야 한다. 그러나 홉스나 오스틴의 이론 속에는 승인의 계기와 명령의 계기, 정당성과 효력성의 계기가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므로 법의 정당성에 더 중요성을 두는 자연법은 법의 효력성에 더 중요성을 두는 실정법에 규제적인 이념이어야지 현실적인 구성적 기능을 수행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삶은 자신에 대한 의무만을 요구하는 덕윤리적 상황에서만 살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타인에 대한 의무만을 강요하는 법윤리적 상황에서만 살아갈 수도 없다. 자신에 대한 의무와 타인에 대한 의무가 상보성을 유지하면서, 각기 고유한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진행될 때 개인성과 사회성이 제대로 확립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 도덕성과 제도적 도덕성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서로 규제하는 관계여야지, 서로 분리되어 무관하게 되거나 서로 통합되어 구성해서는 안된다. 진정한 정치적 정의의 상황은 이와 같은 관계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다.
4 탈지배와 정당한 지배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어려운 점들 중의 하나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별에 있다. 이들 사이의 구별이 서지 않게 되면 삶의 부조리가 생겨나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상당히 심혈을 기울였던 사람이 바로 칸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칸트는 자신의 정치철학에서 이성의 사적 사용과 공적 사용의 구별을 명확히 하고자 했으며, 나아가 그의 법철학에서도 私法과 公法의 구별을 매우 중요시 했다. 이와 같은 구별의 정신은 아렌트와 회페에서 더욱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인간은 부단히 지배와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고자 노력해왔다. 그러나 지배의 정당한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자유도 해방도 있을 수 없고 오히려 불안이 가중될 수 있다. 회페는 그 단적인 예를 근대의 정치에서 발견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근대인은 한편에서는 기존의 법질서와 국가질서가 붕괴되는 것을 경험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신질서(예 : 홉스의 절대군주제)가 확립되면서 착취와 억압을 경험하게 되었다. 전자에서 정치적-종교적 시민전쟁이 나타나며, 후자에서 인간의 기본 권리에 대한 유린이 나타난다. 시민전쟁의 경험은 실정법에 바탕을 둔 강력한 국가권력으로 향하게 되며, 그에 반해 정치적 억압의 경험은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라는 이념으로 이끈다. 여기에 법-국가 실증주의와 무정부주의가 이율배반적 현상으로 나타난다. 더 이상 근대 이전처첨 사회적 원리에 대해서 종교적-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 시대의 이론은 정치적 무도덕주의나 권력의 냉소주의에 바탕을 두거나 아니면 사유재산을 추구하는 자유방임주의적 태도가 지배하게 된다. 이처럼 근대에는 절대주의와 무정부주의가 혼재한다. 그러니까 무조건적인 강력한 지배나 무조건적인 이탈의 자유가 극단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자연상태와 시민상태의 갈등이 일어나게 되고, 사회질서에 관한 승인설과 명령설의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는 진정한 자유도 진정한 안정도 확립될 수 없다. 절대적 지배의 논리나 무지배의 논리 모두 문제를 안고 있다. 인간 개인과 사회의 관계가 근대를 기점으로 상당히 대조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근대 이전에는 유기체적 사회관에 바탕을 두고 인간 개인을 사회에 예속되어 있는 일부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면, 근대 이후는 인간 개인을 사회에 우선하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고·중세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정치적 동물로 규정되며, 따라서 인간은 당연히 정치적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본성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인간은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정치적 지배를 자신의 삶의 조건에 우연적 요소가 아니라 본질적 요소로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근대 이후는 상황이 매우 다르다. 홉스가 주장했듯이 '인간의 인간에 대한 늑대(homo homini lupus)'로서 '만인대 만인의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mnes)'이라는 자연상태는 이미 근대 이전의 유기체적, 목적론적 자연관에서 나타나는 자연성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근대의 자연상태는 이미 기계론적, 원자론적 세계관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 개개인이 어떤 목적이나 질서 속에 본성적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것을 거부한다.
이상과 같은 역사적인 큰 흐름에서 볼 때 근대 이전에는 정태적 세계관이 주를 이루어 닫힌 사회를 형성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왜곡되는 면이 있었다면, 근대 이후에는 동태적 세계관이 주를 이룸으로써 열린 사회를 형성하기 하지만 공동체의 결집이 약화되는 면이 나타나게 되었다. 전자는 절대적 지배의 논리가, 후자는 무지배의 논리가 팽창되어 그 어느 쪽도 인간의 진정한 삶의 조건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했다. 회페가 보기에 지배를 위한 지배나 자유를 위한 자유는 바람직하지 못한 악순환일 뿐이다. 그래서 회페는 이 악순환을 벗어나기 위해서 인간의 삶의 진정한 조건으로서 '정당한 지배'의 확립을 요구하고 있다. 그는 이 점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인간 자유의 한계는 자유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 그 자체에서 온다. ...보편적 법칙의 척도에 의해 동시에 자유의 한계지움과 안전확보가 없다면, 강제와 결합되는 구속적인 법질서가 없다면 위험이 있게 된다.
이처럼 강권의 도입이 인간의 자유에 우선할 수는 없지만 자유의 보호를 위한 필요에서 보조적으로 요구될 수 있다. 그는 절대적 지배가 아니라 보조적 지배를 중요시하고 있다. 회페는 이와 같은 관점 아래서 정의과 법과 국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정하고 있다.
(1) 국가는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2) 정치적 정의는 법의 규범적인 비판적 척도를 형성한다.
(3) 정의로운 법은 인간 공동 삶의 합법적 형식이다.
회페에 의하면 정의가 개인적 도덕의 기준으로 이해되지 않고 법의 개념으로서 이해될 때에만, 그리고 정치적 정의가 그 자체로 국가에 있어서 현실화가 이루어질 때에만 법실증주의와 국가실증주의에 담겨있는 내용들이 제대로 유지될 수 있으며, 아울러 법과 국가를 지배자의 자의에 맡겨버리는 냉소주의적 결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자기보존의 삶에만 연연하는 이기적 삶으로 인한 통제불능의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정치적 정의가 확립되어 있지 않는 곳에는 어떠한 자유도, 안정도 확립될 수 없다.
회페가 볼 때 정의는 지배를 벗어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배를 이성적으로 확립하는 데 있다. 그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의 위험을 옆에 있는 동료들의 위험과 견주어서 통찰할 수 있으며, 나아가 이런 위험을 극복하는 제도적 수단과 방법을 인식하고 실현할 수 있으며, 또한 정의의 제도적 수단이나 원칙에 우리 스스로를 예속되도록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추구하는 정치철학은 독재나 무정부를 넘어서서 정당한 지배의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 "정치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평화의 상태와 법의 상태를 좀 더 정확히 규범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며, 아울러 이기주의/공리주의와 이성의 관점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것이다."
회페가 주장하는 정의는 무조건적인 도덕적 요구를 담고 있어서 자체적으로 올바른 최고의 원칙이어야지 이기적이거나 공리적인 입장이 반영되어 다른 것을 위해 올바른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도덕적 요구를 담고 있는 정의에 바탕을 둔 제도와 법이 정립될 때에만 우리는 야만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최고의 원칙으로서의 보편적 원칙들은 일차적으로 규제적인 기능을 수행해야 하고, 이차적으로는 특수한 법들에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의사소통의 절차에 따라 공개적인 의결동의를 통하여 확립되어야 한다.
결국 회페 역시 아렌트처럼 인간은 정치적인 공적 활동의 영역과 상관없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진정한 삶의 조건은 정치적 지배와의 관계 속에서만 논의될 수 있다. 그래서 회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노력들의 충분히 의미있는 목적은 지배없는 자유로운 상태(Herrschaftsfreiheit)가 아니라 정당한 지배(die gerechte Herrschaft)이다.
5. 프로네시스와 정치
흔히 오늘날을 정치철학에서 '판단력의 시대'라고들 주장하곤 한다. 그만큼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공동체와 개인을 모두 살리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의 우리 사회가 과거의 개인을 무시했던 극단적 전체주의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공동체를 외면하는 극단적 개인주의로 치닫을 수도 없다. 우리의 시대는 이 둘을 조화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 점에서 오늘날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 논쟁은 대단히 우리에게 관심꺼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글은 이것을 본격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다만 회페가 어떻게 위와 같은 문제를 접근하고 다루고 있는가를 분석함으로써 오늘의 우리 사회와 세계를 이해하고 분석하며 나아가 미래의 긍정적인 전망을 어느 정도 얻어보자는 데 있다.
아렌트가 정치철학에서 판단력의 중요성을 주장했듯이, 회페 역시 판단력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회페에 따르면 현재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의 대립을 넘어서 새로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가 대두하고 있다. 영미 쪽에서는 매킨타이어(MacIntyre), 누스바움(Nussbaum)이, 독일에서는 슈패만(Spaemann), 마르큐바트(Marquad), 뤼베(L bbe)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회페는 칸트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시각을 가져봄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과 칸트를 다시 결합시키려고 한다. 그는 칸트가 주장하는 보편적 원리들이 판단력을 위해서 어느 정도 열려질 수 있음을 타진하고 있다.
그러나 회페는 아렌트의 입장을 수용한 볼라트(Vollrath)가 칸트의 『판단력비판』 안에 정치윤리학이 들어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을 거부한다. 즉 그는 칸트의 제3비판서 안에는 정치윤리학을 위한 중심적인 테마가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는 칸트의 윤리적 저서 내에서 판단력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본다. 그는 칸트의 순수한 실천적 판단력은 개별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의 매개를 중시하면서도, 근원적으로는 도덕적인 보편성을 지향하고 있다고 본다. 칸트도 보편적인 도덕적 원리를 통하여 구체적인 도덕적 행위를 수행할 때는 비경험적인 계기들과 경험적인 계기들이 공동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칸트는 이런 공동의 역할 속에는 도덕적인 것이 놓여있지 않기 때문에 경험적 계기의 강화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도덕적 원리의 정당성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경험적 계기를 넘어서 선험적 계기를 요구하고, 구체적 도덕적 행위를 하기 위해서 그 원리를 적용할 때는 경험적 계기, 즉 판단력의 활동을 요구한다. 행위에 있어서는 판단력이 중요하며, 의지의 규정 근거에 있어서는 선험적인 계기가 중요하다.
회페는 순수실천이성의 판단력이 도덕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네시스(phronesis) 개념과 관련있다고 본다. 그는 이 프로네시스가 도덕적인 보편적 규정성의 원리와 실천적인 비규정성의 행위를 매개시켜 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이 개념은 회페 자신이 추구하는 정치적 정의의 도덕적-정치적 담론의 과정에 대단히 중요한 기반이 된다. 그가 추구하는 정치적 정의는 자연과학적인 인지적 계기와 규범과학적인 당위적 계기가 분리되거나 어느 한 쪽으로 통합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이와 같은 입장을 정치적 정의와 관련된 "실증화의 전략"과 "판단의 전략"의 상보성에서 찾고 있다.
오늘날 정치철학의 일반적 추세가 정의와 진리의 구별을 강조하는 상황이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롤즈도 정치적 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 이 둘 사이를 구별하고자 했으며, 아렌트나 리오타르 역시 양자 사이의 구별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회페 역시 자연과학적 진리 추구가 정치적 담론 체계를 잠식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처럼 사회가 동질적이고 정적인 상태로부터 점차 동적으로 다양하게 전개됨에 따라 정의의 실증화가 초래하는 패쇄성을 거부하고, 정치적, 법적 구조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진행적 상태를 포용할 수 있는 판단의 전략이 중요하게 되었다.
근대 이전에는 도덕적-정치적 판단력은 하나의 행위를 평가하는 비판적 기준으로서 정의의 원리들을 언제나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의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판단력을 도덕적 차원으로부터 분리시켜버렸으며, 나아가 칸트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네시스를 정언명법과는 대조적으로 도덕과는 상관 없는 하나의 기술로 파악하게 되었다. 다만 그는 이 판단력을 정언명법의 원리를 경험세계에 적용할 경우에만 의미를 갖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칸트는 경험 이전의 도덕형이상학을 기초짓고 체계화 하는 데 주된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윤리학과 관련하여 판단력에 더 깊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회페에 따르면 정치가 더 이상 정당성을 외면하지 않으려면 정치적 담론과 도덕적 담론이, 사실적 담론과 규범적 담론이 상호 매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매개에 있어서 판단력의 역할은 불가피하다. 그것이 바로 회페가 말하는 도덕적-정치적 판단력이고, 이것은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네시스에서 연유하고 있다. 그는 유용성 계산에 일방적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도덕적 전망이 열려있는 정치적 정의를 위하여 판단과 결정을 위한 의사소통의 과정에 있어서 요구되는 세 요소를 대략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첫 번째 요소는 실천적 (목적) 갈등들과 이론적 (수단) 갈등 둘 다에 대한 치료로서의 공감(합의)를 찾는 서로간의 견해들의 교환에 기초한다.
(2) 둘째로 이런 견해들의 교환에 참가하는 자들은 공감(합의) 형성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실천적 신념과 이론적 신념들 둘 다에 대한 변화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3) 셋째로 의사소통가능성의 조건으로, 그리고 우리 견해의 수정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주체들간의 자유로운 상호 인정의 계기가 요구된다.
이처럼 회페는 정의의 원리들과 이것을 수행하기 위한 절차들은 자유로운 상호 인정이라는 판단력의 계기를 동반해야 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회페는 자신의 이와 같은 생각을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네시스에서 착안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사리판단이 정확히 파악해낸 인간의 삶의 조건은 판단력을 통해서 수행된다. 인간의 행위적 삶은 사실파악에 머무는 이론적 합리성을 통하여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달리 행위할 수 있는 정치적 행위의 실천적 합리성을 통하여 확보된다. 이 실천적 합리성은 프로네시스를 통하여 발전된다.
그는 불변적인 본질세계를 탐구하는 이론적 지혜(sophia)와 개연성과 우연성이 지배하는 인간 행위를 탐구하는 실천적 지혜(phronesis)를 구분한다. 실천적 지혜는 "자신에게 유익하고 좋은 것에 관해서 잘 살필 수 있는" 능력으로서 자신의 유익성과 상관없이 독자적인 세계에 대해서 살피는 능력인 이론적 지혜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프로네시스가 추구하는 윤리적 올바름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현실 생활 세계 속에서 주어진다. 그러므로 프로네시스는 우리의 삶의 조건인 정치적 행위와 필히 관련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을 때, 이미 우리는 프로네시스를 통해서 살아가고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프로네시스가 추구하는 합리성은 단순한 자기 이익이 아니라 정치적 공동체의 공동선을 지향하는 합리성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실천적 지혜로서의 프로네시스는 이미 이론 이성의 합리성이 아니라 실천 이성의 보편적 합리성을 지향하고 있다. 개인선은 이미 공동선을 향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실천적 지혜는 사리판단(prohairesis)과 숙고판단(boule)의 상호 관계 속에서 수행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는 목표가 있고, 또 그 목표에 어떻게 도달할 것이냐와 반드시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표설정과 방법설정은 항시 인간의 행위와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행위와 관련된 실천적 지혜의 능력은 목표를 설정하는 사리판단과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방법을 선택하는 숙고판단의 작용을 동반한다. 사리판단과 숙고판단은 상호 보조적인 관계를 지니면서 실천적 지혜가 추구하는 개인선을 가능케 해준다. 그러나 단순한 개인선에 머물지 않고 공동선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들 판단들이 공동판단(sygnome)의 단계에 이르러야 한다. 아니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이미 이들 판단이 공동판단에로 향해 있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네시스 이론에는 모두가 각자 개인선을 추구하면서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궁극적으로 공동선을 추구하는 점이 제시되고 있다. 이것은 아렌트가 칸트의 반성적 판단력과 공통감을 통하여 개별성과 보편성을 매개짓고자 한 작업과 일맥상통하는 면을 지니고 있다. 결국 회페에게는 이 프로네시스가 칸트적 정의와 롤즈의 정의를 총체적으로 묶어내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프로네시스는 그의 정치적 정의의 밑바탕이 되고 있다.
6. 다원성과 담론
지금 우리의 세계는 개인들이나 집단들이 제각기 권리만 주장하고 책임이 외면되는 사태를 초래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개인주의의 팽배가 야기시키는 경쟁지상주의와 능력지상주의의 문제를 재고해보아야 하며, 나아가 다원주의 시대의 자유주의와 공동체의 문제, 담론의 가능성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재고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현 세계가 안고 있는 경제적 전체주의의 경향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회페는 현상의 다양한 세계 너머에 있는 보편 세계만을 중시하는 입장을 비판하고 있다. 오늘날 철학의 추세가 더 이상 현상 세계를 초월해있는 보편자 중심의 세계나 아니면 반대로 그러한 보편적 세계를 부정하고 현상의 다양성의 세계만을 유일 세계로 주장하는 개별자 중심의 세계도 거부하고 간주관적 보편성, 담론적 보편성, 합의적 보편성, 되어가는 보편성이 중요시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오늘날의 다원주의 사회가 상대주의로 빠지지 않으면서 또한 사회의 전체적 조화를 이루고자하는 점에서 바로 이러한 보편성이 대단히 중요하게 된다. 그러므로 다원성과 담론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담론 주체의 합의 공간과 이 합의 공간을 가능케 하는 주체의 고유성이 서로 상보적으로 긴장을 이루고 있는 것이 현대의 일반적 경향이다.
회페는 이와 같은 상황을 좀 더 깊이 고찰하기 위해서 가치일반에 대해서 분석한다. 그에 의하면 다원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집단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약자를 계속 약하게 만들고 강자를 계속 강하게 만드는 사회진화주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적이고 정당하게 의무를 부과하는 규칙이나 기준들이 요구된다. 그는 이것을 위해서 가치와 규범을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이것들은 (1) 도구적, 기능적 구속성들을 지닌 것, (2) 통례적인 것(관례와 습속에 따르는 것), (3) 실용적인 것, (4) 도덕적인 것이다. 이 네 가지 중에서 (1), (2), (3)은 (4)에 비해서 상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즉 그 자체로 선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 관련해서 선한 것이다. 만약에 앞의 세 가지 가치나 규범들이 절대적으로 더 높은 가치로 정립되거나 부각되면 (4)에 해당되는 보살핌, 배려, 도움과 같은 가치들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수단적이고 기능적인 가치들이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현대의 다원주의 사회가 위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이와 같은 문제점들에 대해서 먼저 새로운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회페에 따르면 "이 새로운 교육에서는 하위 단계의 가치나 규범들이 상위 단계의 가치나 규범들에 견주어서 상대화되어야 하며 도덕적 구속성이 절대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위의 (1), (2), (3)의 가치들은 (4)의 기본가치에 바탕을 두되, 기본가치가 부수적 가치에 압도되거나 부수적 가치가 기본가치에 압도되는 일방적 관계가 성립되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될 경우 인간 삶의 왜곡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관례나 관습 등에 의해서 절대적으로 구속되지 않는 삶만이, 어떤 특정한 가치나 규범이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지배하지 않는 삶만이 진정한 자유와 책임을 가능케 해준다.
이러한 상황이 제대로 확립되려면 우선 우리가 자기를 통제하는 도덕적 덕으로서의 신중함을 길러야 한다. 이 신중함으로서의 도덕적 덕은 올바른 목표나 목적을 인식할 수 있고 추구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개인과 사회의 삶의 기본적 바탕이 된다. 회페는 도덕적 덕으로서의 신중함은 "나의 강렬함의 표현이며, 행위를 너무 서두르지 않고, 결단 없이 머무르는 것이 아니며, 행위의 올바른 시점을 기대할 수 있고 행위의 올바른 척도를 평가하고 정립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러한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이나 제도적(법적-국가적) 질서가 없다면 지속적이고 안전한 생존도 불가능하며, 자기 발전이나 정의의 기준에 따라 개개인이나 집단의 행복을 가능케 해주는 함께 사는 인간적 삶도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들 사이의 평화와 정의가 제대로 확립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구속성이 필요하다. 회페는 이 점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평화와 정의를 확실히 하기 위한 기본 전제는 각자의 무제한적인 자유를 제한하는 동시에 각자에게 삶과 개인적 행위의 자유 공간에 기초해서 권리를 보장해주는 정치적 질서이다. 법과 헌법이 자의적 갈등을 해소시켜주는 평화의 상태에서만 사람들에 대해서 상호 인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 법과 헌법에 기초한 국가는 정치-사회의 기본 가치이다.
회페의 이와 같은 주장은 아렌트가 인간은 정치적 행위 공간 속에서 비로소 인간의 참된 조건을 확립하게 된다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회페 역시 인권은 정치적 인간성의 원리이며, 이 인권의 인정은 평화와 정치적 정의를 확실하게 해준다. 외적 공동 삶의 기초 규범 원리인 객관적 정의로서의 정치적 정의나 법이념은 개인적 주관적 삶의 원리인 덕과 상호 긴장 관계에 있으면서 보조적인 관계에 있다. 개인적 덕으로서의 정의는 현저한 불법 속에서 정치적 공동체를 도출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중요한 제한을 가하게 되며, 반대로 제도적 덕으로서의 정의는 개인의 작위적 삶의 태도에 대해서 제재를 가하게 된다.
회페는 이 양 덕목 사이의 조화를 창출하기 위해서 관용이라는 덕목을 대단히 중요시한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집단들간의 이질성과 경쟁성을 긍정적 발전으로 가져오기 위해서는 관용이 대단히 중요하다. 관용은 승인과 허락을 의미한다. 즉 각자가 다른 식으로 보고 행동하는 방식들에 대한 존경을 의미한다. "관용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인격적 태도로서 종교적으로나, 세계관, 윤리 정치의 문제들에 있어서 무관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확고한 신념을 갖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신념을 존경하는 것을 전제한다." 관용은 평화와 자유와 인간성에 의해서 규정되는 공동삶을 가능케 해주며, 다른 사람의 권리에 대한 멸시가 있는 곳에서는 사라지고 만다. 관용은 자기 극복을 근본 특징으로 삼고 있으며, 공격적인 특징을 최소화 한다. 또한 관용은 나를 강하게 하는 특징이며, 낯선 견해들을 외면하지 못한다. 높은 형태의 관용은 타인의 삶의 형식에 대해 살아있는 관심 속에 있으며, 이웃에 대한 사랑 속에 있다. 바로 이와 같은 관용은 현대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에 바탕이 된다. 이 관용을 통해서 비로소 정치·사회 질서가 바로 잡히며 경쟁하는 서로가 합법적으로 존경받게 된다. 여기에서는 서로 대립되는 견해들이 이성적으로 논의될 수 있다.
결국 회페에 따르면 현대의 다원주의 사회가 제대로 질서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타인의 괴로움을 함께하는 도움의 정신,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연대의 정신, 사회·정치적 부당한 위협들에 대한 불굴의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처럼 회페는 다른 모든 생명체보다 우선시 해야 하는 인간성의 구현을 위해 인간성의 정치적 이념을 중요시한다. 정치적 인간성의 이념은 언제 어디서나 공허한 사랑이나 우정이 아닌 현실적인 힘의 경쟁을 상호 인정의 토대 위에서 확립하고자 한다. 그는 정치와 인간성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인정을 인간성에 의존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즉 인간성의 관점에 의거하여 정치적 태도를 형성해야 한다. 우리가 정치적 관계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며 필연적인 것이다. 정치가 우리 인간에게서 인간적인 삶을 빼앗아 갈 수 없다. 정치적 상태는 우리에게 인간적인 삶을 위한 역할 공간을 허용하도록 형성되어야 한다. 정치적 인간성은 최소한 부정의, 부자유, 비인간성에 대해 부정하고 비판하는 기준이 (이 기준이 적극적 기준은 못된다 하더라도) 되어야 한다.
이처럼 정치적 인간성은 곧 인권을 지향하고 있다. 인권은 정치적 영역에서 비인간적 세계를 인간적 세계로 전환시켜놓는 정치적-사회적 정의의 본질적 요소이다. 인간은 한편으로 서로 의존하고 다른 한편으로 서로 위협하는 조건 속에 놓여있는 존재로서 갈등과 협동을 겪어가는 미결정적 존재이다. 이런 존재는 자신의 미결정성에 발생하는 모든 갈등을 질서짓는 인간적인 법과 국가를 요구하게 된다. 정치적 인간성은 바로 이와 같은 목적을 수행한다. 정치적 인간성은 인권을 충분조건은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필요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회페에 따르면 "인권은 모든 정치적 권위의 잘못된 사용에 대한 방어벽 역할을 한다."
회페는 이 중요한 인권을 세 종류, 즉 개인적인 인격적 자유권, 정치적 협동권, 사회-문화권으로 분류한다. 개인적 자유권은 자신의 신체와 생명을 손상입지 않기 위한 제1의 권리이며, 정치적 협동권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같이 사는 권리이며, 사회문화권은 인간적인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는 권리이다. 이처럼 정치적 인간성의 원리로서의 인권은 개인적 인간성의 차원을 넘어서서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서 세계적 차원을 고려하고 있다. 그는 모든 정치적 질서가 인간성을 띠고 있어야 한다라는 대전제 아래서 고도로 복잡한 산업사회에서 정치의 윤리적, 실용적 과제를 풀어가고자 한다. 그리고 회페는 이 과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정립되는 공개적인 의결동의의 절차를 "정치적 정의의 절차"라고 특징짓는다. 여기에서는 유용성 계산 원리보다 의사소통원리가 더 근원적이며, 궁극적으로는 이 의사소통원리보다 규범적인 원리가 더 근원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회페는 "도덕적-정치적 담론"을 대단히 중요시한다. 그는 이 담론을 "구체적인 정의에 대한 관심에서 견해들을 교환하는 의사소통과정"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도덕적-정치적 담론에는 어떤 특정 부류의 사람이나 집단만이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집단,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다. 또한 이 담론은 개인의 도덕적 차원과 사회의 정치적 차원이 분리되는 것을 원치않으며, 사실과 가치가 분리되어 논의되는 것을 원치않는다. 도덕성과 정치성이 상호 관련성을 갖고 상보적으로 논의되는 것을 요구한다. 나아가 이 담론은 정의의 구체적 적용의 단계 뿐만 아니라 정의의 근거지움에 대한 규범론적 고찰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이 담론은 앞서 논의된 기본 가치와 보조 가치 모두를 총체적으로 고찰할 것을 요구한다. 이 담론에서는 보편적인 기본 원리들과 구체적인 적용 원리들 사이의 상호성을 인정하며, 나아가 구체적인 적용원리들 사이의 조응관계도 탐문한다. 따라서 이 담론에서는 사회·정치적 생활 세계의 혁신에 의해서 제시되는 새로운 도전들을 고려하며, 진단과 치료의 특수성에 대한 고려를 통하여 원리들의 보편성과 삶의 개별성 사이의 간격을 메꾸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 담론은 통일성과 다원성이 정치적 정의의 판결의 전략이라는 차원에서 규범적 원리들과 함께 논의될 것을 요구하며, 원리를 구체적 현실에 적용하고, 구체적 현실을 원리에 근거짓는 판단력의 변화성과 융통성을 살려낼 것을 요구한다.
이처럼 회페가 주장하는 도덕적-정치적 담론은 근대성을 해체하고자 하는 포스트모던적 다원성을 거부하며, 어디까지나 다원성은 규범성과 영향을 주고받는 상황 속에서만 인정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경험과학과 규범과학의 독자성을 각기 인정하면서도 상호 연관성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도덕적-정치적 담론의 성공은 철학적 윤리학과 전문 특수 과학들 사이의 협동에 의존한다. 이러한 담론은 학제간의 도덕적 담론에 의존한다. 이런 의미에서 도덕적-정치적 담론은 정의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처럼 단지 도덕적 관심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그때 그때의 사회-정치적 문제들과 관련하여 그것에 대해 해결을 찾으려는 실천적 담론의 성격을 띠고 있다. 따라서 도덕적-정치적 담론은 초역사적으로 논의되는 이상적 담론이 아니며 시간의 제재를 받는 구체적인 담론이다. 이러한 담론은 패쇄화에 저항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으며, 여기-지금의 현실적 공존에 있어서 정의의 결과들과 발전을 공동체가 추구하는 것을 허락한다. 그러므로 이 담론은 진리를 추구한다는 사치스러운 이유만으로 존재가치를 지닐 수 없으며, 언제나 이론의 영역과 실천의 영역을 매개짓는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회페에 의하면 바로 이 매개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수사학이다. 수사학은 도식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으로 특수화된 전문지식과 정치적 정의 사이를 매개시켜 준다. 전문지식은 그 나름의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수사학을 붕괴시켜 정치적 정의를 실증주의에 예속되도록 해서는 안된다. 회페는 과학과 전문지식에 정치적 거부력이 아니라 합리적 거부력으로서의 소극적 역할만을 인정한다. 진정한 정치적 정의는 실증적 원리들, 과학적 합리성, 실험적 공간, 전문 지식 이 모두가 정치학과 협동관계에 있을 때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결국 회페는 다원주의 사회의 모든 갈등을 해결하는 근원적인 힘은 관용에 있다고 본다. "모든 형식에 있어서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근본규범"이며, 이것에 바탕을 두고 동질적 집단과 이질적 집단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관용이다. 회페에 의하면 관용은 어떤 인간도 잘못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롭다라는 통찰에 기초하며, 타인을 자유롭고 권리를 갖는 평등한 존재로 인정케 해준다. 이런 "관용은 자유와 인간성에 의해 규정된 공동삶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며",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짐승적 욕망을 극복하도록 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관용이야말로 "현대의 다원적 민주주의의 기본적 덕으로 존재한다."
7. 맺 음 말
이상에서 보았듯이 인간의 바람직한 삶의 조건은 도덕성을 외면해버린 정치나 법에서 성립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도덕성에 흡수되어버린 정치나 법에서 성립될 수도 없다. 어느 한쪽을 절대화하여 신화화하는 것은 인간의 삶의 조건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우리는 이 양극의 대립에서 비롯되는 이율배반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도덕주의적인 법과 정치를 벗어나야 하며, 또한 반대로 법주의적이고 정치주의적인 도덕을 벗어나야 한다. 회페의 주장처럼 도덕적 법, 법적-정치적 도덕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공리성과 정언명법이 대립으로 치닫아서도 안될 것이며, 법과 도덕이 분리되거나 통합되어 절대적 지배나 무정부로 흘러가서도 안될 것이다. 우리 인간의 삶의 조건은 개인적 덕과 제도적 덕이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탈지배가 아닌 정당한 지배가 확립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법과 도덕, 정치와 도덕을 무조건 분리적으로 바라보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완전히 통일된 것으로 바라보는 것을 금하고 이들 사이의 구별성을 살려내야 한다. 이들의 관계는 회페가 즐겨 사용하는 칸트적 용어로 표현한다면 규제적 관계여야지 구성적, 조작적 관계여서는 안된다. 즉 현실정치와 법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이념으로서의 자연법이나 도덕법은 규제하는 차원에 있어야지 구성하는 단계에까지 진입해서는안된다. 만약에 구성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면 그것은 법-정치 신화주의나 아니면 도덕신화주의 어느 한쪽으로 기울고 말 것이다. 회페는 신화주의는 이미 구속과 억압을 안겨다주기 때문에 절대로 반대한다. 그는 이 신화의 늪을 빠져나가는 길만이 인간의 존엄성, 인간다움이 구현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이와 같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정치적 행위 공간에서 반성적 판단력이 살아 움직이고, 프로네시스가 제 기능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차이성과 동일성, 다원성과 통일성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는 모든 의사소통이 원만하게 돌아가도록 해주는 관용의 정신이 요구된다고 보았다. 작금의 세계는 이와 같은 관용의 정신이 대단히 외면되고 있다. 타자에 대한 권리보다 자신의 책임을 중시하는 관용의 정신이 바탕이 될 때에만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개인과 국가,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진정으로 참된 관계가 확립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인간 삶의 바람직한 조건, 즉 다원성과 통일성이 조화되는 담론 공간은 바로 관용과 판단의 반성적 태도에 달려 있다. 더 이상 담론이 왜곡되지 않고, 세계가 타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대립적 태도를 지향하고 사이성의 순수성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회페의 이와 같은 주장은 롤즈의 절차적 합리성이나,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포스트모던적 불가공약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주장하듯이 그의 정당한 지배, 즉 정치적 정의는 '규범적 합리성'에 근거하고 있다. 회페는 이 '규범적 합리성'에 바탕을 둘 때에만 더 이상 인간은 자신 안에도 자기 외부에도 부조리한 신화를 만들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저 과거의 종교적 신화주의를 빠져나오듯이, 오늘의 과학적, 경제적 신화주의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건전한 종교가 절실했듯이, 건전한 과학, 건전한 경제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절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오늘의 우리 상황은 회페의 관용의 정신, 규범적 합리성, 정당한 지배를 대단히 필요로 하는 사회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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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f moral-political Discourses
- Centering around O. H ffe's Theory-
- Kim, Suk Soo -
This paper is dealing with the problem of moral-political discourses centering around H ffe's theory. We have hardly established just Herrschaft(die gerechte Herrschaft). If we cannot help living in society, we will have to establish not Ex-Herrschaft(Unherrschaft) or absolute-Herrschaft, but just Herrschaft. Hence H ffe will try to show the possibility of just Herrschaft by his moral-political discourses. I will deal with the characteristics of his moral-political discourses in five points of view.
(1) The most important foundation of his moral-political discourses is the categorical imperative which received from Kant. He will elucidate the relation of law and moral, establish the legitmacy of political Herrschaft by this categorical imperative. He criticizes those who make much of only the efficacy of Herrschaft, and he tries to make pursuits of it on the basis of the legitmacy of Herrschaft.
(2) H ffe refuses to accept Rechtspositivismus and Rechtsmoralismus of mythological form which haves the illegitmacy of Herrschaft. He criticizes the position of them, because they fall into the antinomy with separating or unifying law and moral. Therefore H ffe makes much of Rechtsmoral which in one hand harmonizes law with moral, in another hand competes with each other. He received this Rechtsmoral from Kant's Metaphysics of Morals(Metaphysik der Sitten).
(3) From this point of view, H ffe endeavors to investigate the problem of justice not in individual level, but in political one. Hence he thinks much of the political justice. Politics has to head for justice in order to get legitimacy, and justice has to be established in the realm of political activity to get actuality. Therefore politics without justice is blind, justice without politics vacant. In this position H ffe emphasizes on not Ex-Herrschaft(Unherrschaft) or absolute Herrachaft, but just Herrschaft.
(4) H ffe receives 'phronesis' from Aristoteles to make a little more firmness of this aim. He endeavors to mediate between a factual world as political actuality and a moral world as justice by 'phronesis'. Kant's 'reflective Urteilskraft' and Aristotels' 'phronesis' don't separate a factual world from a moral world, an individual world from an universal world, but rather mediate with each other in distinguished conditions.
(5) H ffe inquires into the problem of plurality and discourses more concretely by this Urteilskraft. He regards the establishment of humanistic-political order as the most prior thing in order to embody the genuine humanity which gets over conflicts among groups or the ability for ability principle. If we are to do so, the procedure for political justice is to be established. In relation to this he would give a priority to the principle of communication rather than the principle of utility, the principle of normativity rather than the principle of communication. In that sense he regards toleration as the most fundamental element in emboding humanity. However it is not to be understood that he makes much of only the principle of normativity, neither the principle of communication nor the principle of utility. Though these three principles is all important, the most important thing is the very principle of normativity which plays the role of Kant's regulative Idee.
In conclusion he doesn't deal with exclusively utility and categorical imperative, law and moral, but harmoniously. With doing so he will achieve the political actualization of moral and the moral legitimation of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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