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미래』, 이광호 , 문학과지성사 , 2011.
"사랑의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사랑의 미래를 향해 떠날 수 있다. 어떤 희망도, 어떤 목적도, 어떤 대가도, 어떤 이름도 없이. ‘내’가 살아가야 할 세계가 어딘가에 남아 있고, 그 하늘의 늙은 그림자 아래서 ‘당신’이 늦은 아침밥을 먹고 있다면, ‘나’도 한 숟가락의 밥을 뜨고 다시 길을 나설 수 있다. 나는 당신을 기다리지 않겠지만, 내 걸음이 당신의 미래에 이르게 된다 해도 당신 놀라지 말아요."
-「에필로그-이제는 그대 흔적을 찾지 않고」에서
출판된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책이다. 나는 요즘 이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고맙게도 이광호선생님께서 책을 집으로 직접 보내주셔서 갖고 있는 책이다. 작가들의 친필 싸인이 들어간 책을 받을 때마다, 나는 어떤 사명감 비슷한 생각을 갖곤 한다. 행간까지 읽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행간까지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책의 내용뿐 아니라, 작가가 어떤 문장을 쓰고 있던 그 상황까지 읽어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어떤 시간 속에서 이 문장이 씌어졌을까? 이 문장은 체험일까? 추체험일까...등등...
문학을 한다는 것은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이광호 선생님의 또 다른 책 『익명의 사랑』 비평집의 제목처럼 구체적 대상이 아니어도 익명의 대상과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문학을 하기 어렵다. 하긴 하겠지만 그것은 단지 죽은 언어를 집어드는 것이지 문학이 말하고자 하는 살아 있는 삶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따라서 모든 문학작품이 씌어진 그 저간에는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작가가 말한 사랑을 둘러싼 40편의 공허와 1편의 기이한 위로가 담긴 에세이 『사랑의 미래』에서 나는 무엇을 읽어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 진부하고 상투적인 ‘사랑’에 대해 아직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게는 중요하다”라고 작가가 말하듯, 『사랑의 미래』는 현재진행형인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말할 수 밖에 없는 자의 더듬거림으로 읽혀졌다. 왜 사랑은 그의 실존이니까...
"사랑의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사랑의 미래를 향해 떠날 수 있다. 어떤 희망도, 어떤 목적도, 어떤 대가도, 어떤 이름도 없이. ‘내’가 살아가야 할 세계가 어딘가에 남아 있고, 그 하늘의 늙은 그림자 아래서 ‘당신’이 늦은 아침밥을 먹고 있다면, ‘나’도 한 숟가락의 밥을 뜨고 다시 길을 나설 수 있다. 나는 당신을 기다리지 않겠지만, 내 걸음이 당신의 미래에 이르게 된다 해도 당신 놀라지 말아요."
에필로그의 "나는 당신을 기다리지 않겠지만, 내 걸음이 당신의 미래에 이르게 된다 해도 당신 놀라지 말아요."라는 이 문장을 읽고 책을 덮는 순간, 작가에게 '사랑'이 어떤 운명인가를 끄덕임과 동시에 모든 인간의 운명을 보는 듯 했다. 나의 운명을 보는 듯 했다.
여기서 '사랑의 미래'는 사랑의 주체와 객체가 동시에 다다른 그 시간적 미래가 아니라, '너'라는 사랑의 대상이 있음으로 해서 '나'라는 주체가 살아낸 그 '실존의 시간'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당신과 내가 한 식탁에서 나란히 밥을 먹지 않을지라도(못할지라도) 당신이라는 사랑의 대상이 존재하는 한, 나의 삶은 분명 다른 의미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이 맞이하고 싶어했던 그 사랑의 미래가 어느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내가 살아내고 있다면, 나는 당신의 미래에 이미 이르게 되었음을 이 책은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닌가. 이 부재의 역설, 작가는 '부재의 현존'이라는 그 지점까지 바라보고 싶었던 것이라면 '사랑'은 분명 그의 운명일 것이 분명하다. "어떤 사랑의 이야기는 망각의 힘으로, 망각하려는 힘으로, 다시 쓰인다. 기억보다 더 오래된 세월을 향해." '사랑'을 '사랑'하는 자만 그의 운명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작가는 '사랑의 미래'라는 제목에서 암시하듯, 사랑의 '시간'에 대해 주목한다. 그 이유는 시간은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가장 근사치의 타진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사유와 상상력의 '불가능성'을 향해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랑이 '나'와 '당신'이 같은 것이 되는 사건이라고 한다면, '나'라는 동일성이 '당신'이라는 차이성과 등치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랑의 보편적인 경험은 '타자(당신)'와의 넘어설 수 없는 '거리'이다."
그 거리는 공간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시간적이다. 공간적인 거리가 신체의 '함께 있음'이라는 방식으로 해결될 가능성이 있다면, 시간적인 거리는 더 근본적이고 뼈아프다. '당신'과 '내'가 다른 시간에 있다는 것은, '함께 있음'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혹은 무의미하게 만든다. 역으로 '당신'과 '내'가 다른 시간에 있지만,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면, '함께 있음' 그 자체는 불가능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우리는 '함께 있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사랑에 관한 노래들이 많은 경우, '지나간 사랑'과 '도래할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모든 사랑은 실패한 것이거나, 다가올 어떤 것이다."
이 책은 2010년 7월부터 11월까지 ‘웹진문지’에 연재되었던 글들을 엮은 것이다. 저자를 흔들었던 날카로운 가시 같은 문장들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로 시적인 이미지와 간명한 서사, 에세이적인 사유를 교차하며 아직 오지 않은 어떤 것에 대한 갈망을 그려내고 있다.
그의 시간, 그녀의 시간, 이렇게 두 개의 시간으로 나누어 구성하였으며, 이를 통해 서로 엇갈리거나 마주 보거나 교차하면서 앞뒤를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의 사건을 보여주고 있다. 한 여자와 한 남자, 그들이 통과한 끝을 알 수 없는 계절들의 이미지를 통해 사랑의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랑의 미래를 향해 떠날 수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저자는 서울예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익명의 사랑』 『도시인의 탄생』 등 많은 책을 썼으며, '글 쓰는 자는 결국 자기 문장 안에서 소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의 장소를 만나고, 다른 계절로 떠나야 한다. 그 사람의 계절은 보다 더 짧거나 더 강렬하거나 더 느릴 수도 있다. 우리가 같은 문장에 머무를 수 없는 것처럼, 생을 통해 하나의 계절을 지킬 수는 없다. 계절이란 기억과 시간에 대한 단념의 이름이다.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이야기가 있다. 이건 그들이 통과한 계절들의 이미지, 그 끝을 알 수 없는 계절들의 돌이킬 수 없는 순환에 관한 것이다.
계절들이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리듬일 뿐이다. 그 몇 개의 계절들은 돌이킬 수도 돌이킬 필요도 없었다. 지난 계절의 지독했던 기침을 어느 날 문득 삼켜버린 것처럼, 그렇게 망각의 힘을 믿게 될 것이다. 계절에는 미래가 없다. 한번 가지에서 날아간 새들이 어디로 갔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저녁의 새들이 갑자기 침묵하는 순간처럼, 그 계절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너무 어리거나 너무 늙은 사랑이, 그렇게 지나갔다. 서로 엇갈리는 긴 시간보다 분명한 것은 그 기억조차 흐려지는 날이 온다는 것. 언어만이 그 계절들을 봉인한다. 어떤 사랑의 이야기는 망각의 힘으로, 망각하려는 힘으로, 다시 쓰인다. 기억보다 더 오래된 세월을 향해.
_「프롤로그-한때 새들을 날려 보냈던 계절들」에서
그들이 사랑한 시간이 얼마나 될까? 그들이 마주 앉아 연인의 턱 밑의 희미한 점이나 회색 니트 위의 작을 보풀마저 매혹과 안타까움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시절은 얼마나 될까? 연인의 떨리는 허리를 파고들며 지금 세상이 정지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고 나지막한 주문을 외우던 순간은 얼마나 될까? 아마도 가장 흐릿한 별빛이 지구에 간신히 도착하는 시간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짧은 순간일 것이다. 그래도 그런 이유로, 사랑의 순간이 너무나 짧다는 이유로, 지금 눈앞에 있는 연인의 왼쪽 손목을 어루만지는 일을 그만두어야 할까?
사랑의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사랑의 미래를 향해 떠날 수 있다. 어떤 희망도, 어떤 목적도, 어떤 대가도, 어떤 이름도 없이. ‘내’가 살아가야 할 세계가 어딘가에 남아 있고, 그 하늘의 늙은 그림자 아래서 ‘당신’이 늦은 아침밥을 먹고 있다면, ‘나’도 한 숟가락의 밥을 뜨고 다시 길을 나설 수 있다.
나는 당신을 기다리지 않겠지만, 내 걸음이 당신의 미래에 이르게 된다 해도 당신 놀라지 말아요.
-「에필로그-이제는 그대 흔적을 찾지 않고」에서
‘사랑’처럼 흔한 말이 또 있을까? 그리고 동시에, ‘사랑’처럼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말이 또 있을까? 여기, ‘사랑’을 이야기하는 한 권의 책이 있다. 너무 달콤하거나 너무 애달프지 않아서, 사랑을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을 ‘사는’ 이야기라서, 익숙하면서도 그렇기에 더더욱 새로운 한 권의 책이다.
저자는 현장 비평가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비평문에서도 그의 미문은 단연 돋보인다. 꾸며서 만든 문장이 아니라 깊이 있는 사유와 애정 어린 통찰로 빚어낸 군더더기 없이 정확한 문장은, 자칫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비평문에 이광호만의 색을 입힌다. 이런 그의 언어가 이번 책에서 ‘사랑’을 만난다. 더없이 아름다워서 강력한 ‘사랑의 언어’가 과장되지 않은 몸짓으로. 그 언어 속으로 가만가만 들어가는 ‘미래’로의 여정은, 여전히 너무 많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을 넘어서서 “어떤 느낌을 공유한 이름 없는 공동체”의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2010년 7월부터 그해 11월까지 <웹진문지>에 연재되었던 이 글들은 연재 당시에도 많은 독자들의 공감과 호응을 얻은 바 있다. 하지만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한 편 한 편 읽는 느낌과 그 흐름을 한 권의 책에서 쉼 없이 따라갈 때의 느낌은 사뭇 다를 것이다. 연재 5개월에 걸쳐 이어졌던 고른 호흡은 이 한 권의 책 속에서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41편의 글은 각각 시의 한 구절에서부터 출발하여 사랑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들을 그려낸다. 마치 한 편의 긴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편, 사랑의 매혹이 아니라 무기력감에 가까운 그 문장들은 두 개의 시간으로 나뉘어 흐른다. 하나는 ‘그’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시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각각의 시간으로 흘러가지 않고, 서로 엇갈리거나 마주 보거나 교차하면서 그 선후를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의 사건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글은 하나의 픽션일까? 하지만 마침내 독자들이 이 이미지들의 사건들에서 발생한 장면들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은,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사유의 궤적이다.
“시적인 이미지와 간명한 서사와 에세이적인 사유”의 교차. 이 한 권의 책에서 저자는 이 새로운 글쓰기를 완성시켰다. 이 글을 ‘허구적인 에세이’ 혹은 ‘픽션 에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주인공과 글쓰기 주체...의 얼굴과 이름이 모두 지워진다. “‘그’와 ‘그녀’는 복수의 ‘그들’이거나 혹은 ‘당신들’이거나 ‘내’ 안의 사람들이”라는 저자의 고백은 이 글을 ‘익명의 에세이’로 명명하는 쪽에 무게를 싣게 한다.
사랑을 익명성으로 이행으로 바라본 저자의 시각은 2009년 펴낸 그의 비평집 『익명의 사랑』에서도 이미 확인된 바 있다. 그 책의 머리말에서 “사랑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 속에 머무는 사건이”라고 말한 이광호는 “갈망의 지겨움과 공허 속에서 문득 명랑해진 사랑”이 “익명적인 힘들과 만”나는 모습을 이번 책에서 비로소 그려보이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집단적 주체화와 가장 먼 거리에 있는 비밀스런 2인 공동체를 생성”하는 사랑은 “사랑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지우는 데까지, 자기의 파괴와 혼돈으로 나아가려고 한다”는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그의 오래된 사유가 전혀 새로운 형식의 에세이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특히 이 책은 “1인칭의 고백과 2인칭의 대화와 3인칭의 묘사”의 공존 속에서, ‘그/그녀’였던 자신을 보았다가, 언젠가의 ‘그/그녀’를 만났다가, ‘그/그녀’들의 이야기를 지켜보게 되는 특별한 독서 경험을 독자들에게 선사한다는 점에서 이 가을에 더없이 어울리는 선물이 될 것이다.
“이건 그들이 통과한 계절들의 이미지, 그 끝을 알 수 없는 계절들의 돌이킬 수 없는 순환에 관한 것이다.”
떠들썩한 술자리에서 우연히 함께 빠져나온 남녀가 차를 잡기 위해 건널목 앞에 선다. 그때, 그가 불현듯 그녀의 손목을 잡고 건널목을 뛰어서 건넌다. 이후 그들은 함께 혹은 혼자서 계절들을 통과한다. 새로운 발견과 갑작스러운 기억과 일상의 흔적들 속에서 그렇게 ‘그’와 ‘그녀’는 ‘사랑’을 ‘산다.’
상대의 감촉, 목소리, 냄새, 식성…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어쩌면, 다시금 사랑을 일깨우기 위함이 아닌, 그 사랑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돌이킬 수도 돌이킬 필요도 없는 그 계절들이 남긴 어떤 리듬을 타고 다시, 다른 계절로 떠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 그리고 언어로써 그 계절들을 봉인하는 것. 그것이 ‘사랑의 미래’라고, 그러니 ‘익명의 그/그녀’에게 지금, 사랑의 미래가 시작되고 있다고, 이 책은 담담하게 사랑의 미래를 향해 가는 그들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는다.
이 책은 사랑을 이야기하는 다른 방법에 대한 작은 탐색이다. 이를테면, 사랑에 관한 1인칭의 고백과 2인칭의 대화와 3인칭의 묘사가 공존할 수 있을까, 시적인 이미지와 간명한 서사와 에세이적인 사유는 어떻게 교차할 수 있을까,와 같은 헛된 시도 말이다. 시적인 것과 소설적인 것과 에세이적인 것이 뒤섞인 글쓰기를 향한 무모한 동경은 오래되었다.
이것은 또한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사소란 사유의 궤적이다. 여기, 사랑을 둘러싼 문장들은 사랑의 매혹이 아니라 무기력감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저 진부하고 상투적인 ‘사랑’에 대해 아직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게는 중요하다. 어쩌면 여기에서 사랑을 둘러싼 40편의 공허와 1편의 기이한 위로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를 흔들었던 날카로운 가시 같은 문장들을 빌미로 이 이상한 글쓰기는 시작된다. 이 글을 ‘허구적인 에세이’ 혹은 ‘픽션 에세이’라고 불러도 되겠지만, 이야기의 주인공과 글쓰기 주체의 얼굴과 이름이 지워진다는 의미에서 ‘익명의 에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와 ‘그녀’는 복수의 ‘그들’이거나 혹은 ‘당신들’이거나 ‘내’ 안의 사람들이다.
‘사랑의 미래’는 사랑의 설레는 혹은 불안한 앞날을 마라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랑이 아직 오지 않았음을, 혹은 사랑이란 아직 오지 않은 어떤 것, 영원히 오지 않을 어떤 것에 대한 이상한 갈망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래서 여기 사랑의 언어는 갈망의 언어라기보다는갈망에 대한 갈망의 언어이다.
이 책의 1부는 ‘그’의 시간 속에 있고 2부는 ‘그녀’의 시간 속에 있다. 이 두 가지 층위의 시간은 서로 엇갈리거나 마주 보거나 교차한다. 그 시간 속에 얼룩처럼 뿌려진 이미지들은 모두 각각 최초의 장면이면서 최후의 장면이다. 사랑이란 그 선후를 알아낼 수 없는 이미지들의 사건이다. 사랑의 마지막 순간, 그 모든 장면의 순서에 대해 입을 다물게 된다.
극단의 공허는 최선의 위로만큼 표현되기 어렵다.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사랑이 하나의 관념으로 요약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래도 사랑이 다시 시작되는 일은 피할 수 없다고 말하기 위해, 이토록 어눌한 언어들이 필요하다는 것이 부끄럽다.
이 글들은 지난해 씌어졌다. 그 여름에서 가을 사이, 방어할 길이 없는 적막한 시간을 마주했고, 더 가난한 시간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어리석게도……
<웹진문지> 연재 때 따뜻한 관심을 보여준 익명의 독자들과 앞으로 이 책을 읽게 될 미지의 독자들에게 감사한다. 이 책이 어떤 느낌을 공유한 이름 없는 공동체의 계기가 된다면 글 쓰는 자의 더할 나위 없는 영예일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늦게 온 예감처럼 만날 수 있다면, 이 허술한 글쓰기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
2011년 10월
이광호
이광호(문학평론가)
고려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당선되었다. 저서로는 『위반의 시학』 『환멸의 신화』 『소설은 탈주를 꿈꾼다』 등이 있다. 현재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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