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러셀역설, 홀로그래피, 그리고 스테판-바나흐

나뭇잎숨결 2020. 5. 20. 10:13

러셀역설, 홀로그래피, 그리고 스테판-바나흐

 

김상일(한신대)

 

1. 역설 사슬 만들기

 

러셀의 역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변형을 만들어 표현될 수 있다. 러셀의 역설은 이발사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발사가 규칙을 만들어 놓고 그 원칙 속에 자기 자신을 해당시킬 경우에 발생하였다. 이발사 자신을 머리를 깎아주는 부류에 두고 머리 깎이는 사람들을 그 부류의 요원으로 삼는다면 이발사 자신 즉 부류가 깎이는 요원으로 포함될 경우에 역설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이 역설은 ꡒ부류가 자기 자신을 요원으로 포함할ꡓ(Class contains itself as elements)1) 경우에 발생한다고 정의할 수 있다. 이발사가 자기 자신의 머리를 깎은 것이기 때문에 이를 ꡐ자기 언급ꡑ(self-reference)이라고 한다. 그리고 부류가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스스로 요원화되었기 때문에 ꡐ자기 부정ꡑ(self-annihilation)이라고 한다. 그래서 러셀의 역설 속에는 자기 언급과 자기 부정이 필수적으로 조건화되어져야 성립된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언급과 자기 부정은 곧 자기 조직하는 유기적인 상호 연관 관계를 만든다. 반대 일치 현상을 만든다는 뜻이다. 그래서 ꡐ자기 언급ꡑ과 ꡐ자기 부정ꡑ이란 두 말은 현대 과학이나 동양 철학에 러셀이 응용될 때에 매우 중요한 언어가 된다.

다른 한편 러셀의 역설은 문장의 예를 통해 다음과 같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거짓말쟁이 역설이란 아래의 두 문장과의 관계에서 발생한다.2)

 

"below sentence is False" is Above sentence … 문장 1

 

"above sentence is True" is Below sentence … 문장 2

 

여기서 ꡒ ꡓ안은 상대방의 문장을 언급하고 있으며 밖은 그 문장 자체를 언급하고 있다. 전자를 ꡐ대상 언어ꡑ(object language)라 하고 후자를 ꡐ메타 언어ꡑ(meta language)라 한다. 메타 언어는 항상 부류격이고 대상 언어는 요원격이기 때문에 역설은 바로 메타 언어가 대상 언어가 되고 그 반대인 경우에 생긴다고 할 수 있다. 메타는 전체적 성격을 그리고 대상은 메타에 대하여 요원적 성격을 갖게 된다.3) 그래서 러셀의 역설은 전체와 부분상의 문제이다. 편의상 몇 개의 기호를 다음과 같이 만들어 사용키로 한다.

 

Above sentence …… A

Below Sentence …… B

above sentence …… a

below sentence …… b

True …… T

False …… F

is …… =

 

문장 1과 2를 이 기호에 의하여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bF = A …… 문장 1

aT = B …… 문장 2

 

여기서 소문자와 대문자가 갖는 의미는 크다. 즉, 소문자는 대상 언어이고 대문자는 메타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발사의 경우 자기 언급이란 깎이는 대상 속에 깎는 주체가 대입될 경우이다. 위의 문장 1과 2에서 대문자는 문장 자체가 놓여 있는 지면상의 위치를 나타낸다. 여기서 자기 언급이란 곧 같은 알파벳으로서 대문자가 소문자를 혹은 그 반대를 언급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문장 1과 무장 2에서 대문자와 소문자를 서로 등호를 중심으로 하여 바꾸어 보기로 한다. 여기서는 문장 2의 대문자 B를 문장 1의 소문자 b와 서로 바꾼다.

 

aTF = A …… 문장 3

 

문장 3을 일상 언어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아진다.

 

ꡒ ꡐabove sentence is trueꡑ is false" is Above sentence

 

지금 여기서 자기 언급 현상과 자기 부정 현상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ꡒ ꡐ<위 문장이 참이다>는 거짓이다ꡑ가 위 문장이다ꡓ는 분명히 역설이며 모순율에 저촉된다. 위 문장--우리말로는 소문자와 대문자가 구별 안됨--은 스스로 참이면서 거짓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문장 3의 소문자 a에 문장 1의 대문자 A를 대입해 보면,

 

bFTF = A …… 문장 4

 

와 같아진다. 여기서는 자기 언급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위 문장이 아래 문장을 혹은 그 반대를 서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문장 4의 소문자 b에 문장 2의 대문자 B를 대입하면, 다음과 같다.

 

aTFTF = A …… 문장 5

 

또다시 자기 언급 현상이 나타나며 자기 부정 현상도 나타난다. 문장 5의 소문자 a에 문장 1의 대문자 A를 대입해 보자.

 

bFTFTF = A …… 문장 6

 

여기서 처음 시작할 때에 문장 2를 1에 대입하느냐 1에 2를 대입하느냐는 임의적이며 선택적이다. 그것에 상관없이 우리는 몇 가지 규칙성을 발견하게 된다. 자기 언급 현상이 번갈아가며 나타난다는 것과 TF의 개수가 홀수에서 짝수로 번갈아가며 나타난다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이런 규칙에 따라 다음 문장들을 예측할 수 있다.

 

 

문장의 피라미드

 

bF(aT) = A(B) …… 문장 1(문장 2)

aTF = A …… 문장 3

bFTF = A …… 문장 4

aTFTF = A …… 문장 5

bFTFTF = A …… 문장 6

aTFTFTF = A …… 문장 7

bFTFTFTF = A …… 문장 8

aTFTFTFTF = A …… 문장 9

bFTFTFTFTF = A …… 문장 10

aTFTFTFTFTF = A …… 문장 11

메타화 ← →대상화

 

왼쪽 끝은 a와 b가 반복되면서 나타난다. 이것은 자기 언급이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현상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위에서 대입 순서의 임의성이란 오른쪽 끝을 A에서 B로 바꾸는 것이며 왼쪽 끝의 시작을 b에서 하는 것의 차이, 그리고 TF 배열 순서의 차이뿐이지 결코 그 구조상의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시해도 상관없다. 우리는 위에서 보여 주는 바와 같은 피라미드 형식의 시리즈를 ꡐTF 시리즈ꡑ 혹은 ꡐTF 사슬ꡑ이라고 부르기로 하며, 다음 본문의 내용 중에서 이 말들은 매우 중요하게 씌어진다.

 

하나의 아름다운 문장의 피라미드가 만들어졌다. 이 피라미드 속에 담겨진 의미는 많다. 피라미드의 왼쪽 방향은 메타화라 할 수 있고 오른쪽 방향은 대상화라 할 수 있다. 즉, 왼쪽 방향으로 나아갈수록 점점 메타화가 증가하는 것을, 그리고 그 반대 방향일수록 대상화가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장 11은 그 전 과정의 문장을 그 속에 모두 포함하고 있다. 문장의 숫자가 증가할수록 점차로 TF 사슬의 고리 수는 증가한다. 고리 수 하나 하나를 러셀은 ꡐ논리 계형( logical type)ꡑ4)이라고 했다. 그리고 러셀은 피라미드의 위계적 층위만 혼돈되지 않으면 역설을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피라미드는 인간의 의식 구조인 동시에 모든 존재의 진화 구조이기도 하다.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생물의 진화 과정을 이 논리 계형을 통하여 설명하였고, 동물이나 인간의 학습이 모두 이 계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정신병 환자의 의식 구조란 다름 아닌 이 피라미드 구조의 혼돈이며, 베이트슨의 독특한 ꡐ이중 구속론ꡑ(double binding)도 바로 이의 산물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와츠라위크는 문장의 숫자 단위가 올라가는 것을 이용해 정신병 상담 치료에 응용하였다. 같은 문장의 단위 안에서 해결은 불가능하다고 보았으며 문장 단위의 계형을 상승시킴으로 정신 치료가 가능해진다고 본 것이 그의 지론이다.5) 현대 과학의 주요 이론들도 모두 이 피라미드 구조와 관계되어 있다. 이 피라미드는 같은 돌로 쌓여진 질서의 구조가 아니다. T와 F라는 정반대의 돌들, 그리고 자기 언급과 자기 부정이라는 매우 불안정한 돌들로서 피라미드가 만들어져 있다. 매우 혼돈스러운 구조인 것이다. 괴델의 불완전성 이론,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이론, 카오스 이론, 퍼지 이론들이 모두 이 피라미드와 관계되어 이해될 수 있다.6) 그러면 이제부터 이 문장의 피라미드를 탐험하는 여행을 떠나 보기로 한다. 필자는 피라미드의 역사와 그것이 동양 철학에서는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여행의 주요 과제로 삼고자 한다.

 

2. ꡐ뫼비우스띠ꡑ와 거짓말쟁이 역설

 

거짓말쟁이 역설이 성립되자면 두 가지 조건이 필수적으로 충족되어야 한다. 그것은 자기 언급과 자기 부정이다. 자기 언급이란 자기가 자기를 지칭하는 것이다. 사각형의 종이가 하나 있다고 할 때에 자기 언급이란 사각형의 한 쪽 끝을 다른 쪽 끝에 가져다 붙이는 것과 같다. 이런 행위가 사각형이라는 평면의 자기 언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자기 부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각형을 한 번 비틀어 자기의 방향을 반대로 바꾸는 것이다. 즉, 자기 부정을 하는 경우에는 화살표의 방향을 180도 반대로 하는 경우이다. 사각형에는 전후, 좌우, 상하의 3쌍의 대칭이 있는데 먼저 180도 비틀지 않고 마주 붙이면 그것이 원기둥이다. 비틀지 않을 경우에는 화살표의 방향을 같게 표시한다. 그러나 만약에 180도 회전시켜 즉 비틀어 마주 붙이면 어떤 현상이 생길까. 자기 언급과 자기 부정이 다 포함된 경우이다. 그러면 아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은 이상한 고리가 만들어지며 이를 ꡐ뫼비우스 띠ꡑ7)라고 한다. 비틀지 않고 --자기 부정 없이--그냥 붙이면 원기둥이고 비틀어서 마주 붙이면 뫼비우스 띠가 만들어진다. 우리는 여기서 거짓말쟁이라는 논리적인 문제를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는 도형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위에서 필자가 오랫동안 러셀의 역설을 얘기해 둔 것도 결국 역설이 갖는 자기 언급과 자기 부정을 통해서 어떻게 반대 일치 현상이 생기는가를 보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뫼비우스 띠 속에 거짓말쟁이 역설에서 본 바와 같은 TF 사슬이 발견되느냐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원기둥의 경우에는 면을 따라 가위로 2등분을 내면 두개의 고리로 완전히 나누어지지만 뫼비우스띠의 경우에는 그렇게 나뉘어지지 않고 서로 연결되는 뫼비우스 띠를 만든다. 아무리 많은 등분을 하여도 서로 연결되고 분리되지 않는다. 뫼비우스 띠는 원기둥과는 달리 앞뒤가 분리되지 않는 단곡면(單曲面)이다. 그리고 상하, 좌우, 전후 3차원의 대칭점들이 모두 만나 일치하고 있다. 대칭점들을 ꡐ참ꡑ과 ꡐ거짓ꡑ이라는 대칭으로 바꾼다면 하나의 사슬고리를 만든다. 위에서 소문자와 대문자를 바꾼다는 것은 다름 아닌 사각형의 종이의 경우에는 180도 비튼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림과 그 그림의 바탕은 전면과 후면이라는 관계이기 때문에 결국 소문자와 대문자를 바꾸는 행위는 곧 문장의 위치를 180도 회전시켜 일치시킨다는 말과 같다. 위상 수학과 논리학의 절묘한 만남인 것이다. 자기 언급, 자기 부정, 그리고 상호 연관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목격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문장과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를 평면의 띠 위에다 표현을 하면 다음과 같다.8)

 

 

 

위의 세 가지 경우에 거짓말쟁이 역설에 관계되는 것은 세 번째의 뫼비우스 띠의 경우이다. 세번째의 경우에는 ꡒ ꡐbelow sentence is Falseꡑis Truthꡓ is Below Sentence와 같아진다.(B = bFT) 이를 독백(monologue)이라고 한다. 자기 말을 자기가 하고 있는 격이다. 우리는 여기서 거짓말쟁이 역설을 기하학적으로 나타낼 경우에 뫼비우스 띠라는 위상 기하학적 도형과 그것이 완전히 일치하게 됨을 발견하게 된다. 뫼비우스의 띠는 자기가 자기를 만난 붙는( ) 자기 언급과 자기를 뒤집는( ) 거짓말쟁이 역설이 되기 위한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에는 전후, 좌우, 상하의 3차원이 모두 마주 붙는, 그래서 반대 일치의 현상을 보여 주고 있다.

 

포토그래피와 홀로그래피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진기가 만들어 내는 ꡐ포토그래피(photography)ꡑ의 원리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포토그래피 -혹은 ꡐ포토ꡑ- 의 경우에 먼저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 대상이 결정되었을 때에 빛이 그 대상에 비추어진다. 그리고 그 빛이 대상에 닿아 다시 반사되 나온 빛이 사진기의 렌즈에 반사된다. 그러면 셔터는 거리와 시간을 조절하여 사진기의 뒤에 있는 감광판에 찍혀진다. 처음 찍혀진 대상은 네거티브(negative)이다. 빛의 근원에서 나온 빛이 물체에 부딪혀 다시 감광판에 찍히는 매우 단순한 일대 일로 빛이 대응되는 방법으로 사진이 만들어진다. 광원에서 나오 빛이 대상물에 부딪혀 다시 사진기에 찍히는 방법이다. 대상의 모든 부분이 건판에 일대 일로 대응(one-to-one)하는 방법으로 사진이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문제는 사진기의 렌즈가 갖는 역할이다.9)

 

 

 

 

 

 

 

 

 

 

위의 (그림 1-1)에서 보는 바와 같이 렌즈는 대상 물체와 사진 필름 사이에 있으며, 빛을 조절하여 전달하는 역할만 한다.10) 일대 일로 대응시키는 일차원적인 전달 과정만 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렌즈가 갖는 철학적인 혹은 논리적인 성격에 관하여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상 피사체를 객체(object) 그리고 사진의 필름을 주체(subject)라고 할 때에 렌즈는 객체인가 아니면 주체인가. 즉, 렌즈는 양면성을 다 지니고 있다. 객체에서 볼 때에는 주체이고 주체에서 볼 때에는 객체이다. 소총의 가늠쇠와 같다. 렌즈의 이러한 역설적인 성격을 포토는 무시했다. 이제 홀로그래피는 렌즈의 이러한 역설적인 이중성을 응용하여 만들어진다. 홀로--홀로그래피의 약자--에서는 포토에서와는 달리 렌즈가 광원에서 나온 빛을 그냥 받아 필름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로 나누는 역할을 한다. 하나는 광원에서 나온 그대로 필름인 감광판에 가도록 만들고 다른 하나는 객체인 대상물에 가 닿았다가 감광판에 가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감광판에서는 렌즈에서 갈라졌던 두 빛이 모두 만나서 서로 간섭을 한다. 그래서 홀로는 일 대 일로 대응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 점이 포토와 홀로를 구별하는 주요한 시사점이 되고 있다.

 

포토와 홀로는 서로 다른 논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양자는 모두 같은 광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홀로는 포토와는 달리 한 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다. 홀로의 경우에는 분광 렌즈에 의하여 한 번 광원에서 나온 빛이 갈라져야 한다. 분광 렌즈에서 그대로 감광판으로 직진하는 빛을 ꡐ표준 광선(reference beam)ꡑ이라 하고 대상에 부딪혔다가 가는 광선을 작용 광선 혹은 ꡐ대상 광선(object beam)ꡑ이라고 한다.11) 포토는 빛이 ꡐ일대 일(one to one)ꡑ로 나아가지만, 홀로의 경우에는 ꡐ하나에서 둘을 거쳐 그리고 다시 하나 (one thru two to One)ꡑ로 나아간다. 홀로의 경우 빛이 이별했다가 다시 만나지게 된다. 처음 하나인 일을 ꡐoneꡑ 이라 하고 나중의 다시 만난 하나 됨을 ꡐOneꡑ으로 소문자와 대문자로 구별하기로 한다. 전자를 작은 만남 그리고 후자를 큰 만남이라고 하자. 작은 만남에서 헤어져 다시 큰 만남을 이루는 것과 같다.

 

여기서 렌즈의 역할이 포토의 경우와 홀로의 경우에 서로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된다. 포토의 경우에는 렌즈가 광원의 빛을 받아서 필름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홀로의 경우에는 렌즈는 광원에서 온 빛을 둘로 나누는 역할밖에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홀로그래피는 ꡐ렌즈 없는(lensless)ꡑ 사진 기술로 흔히 알려져 있다.12) 홀로의 경우에는 렌즈가 포커스를 맞추는 수고를 전혀 할 필요가 없다. 그러고 홀로그래피는 매우 특수한 필름을 사용해야만 만들어진다. 그래야만 두 광선의 간섭 효과를 제대로 만들어 낼 수가 있다. 왜 홀로의 경우에는 한 광선이 갈라졌다가 다시 하나로 되어야 하는지 이 점이 관심의 표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표준 광선과 대상 광선이 하는 역할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대상 광선은 실물 대상에 접촉한 것이고 표준 광선은 그렇지 않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두 광선은 처음에 모두 같은 광원에서 나왔었다. 포토의 경우에는 대상 광선만을 사용했었다. 표준 광선이 없었다. 표준 광선을 ꡐ순수 광선ꡑ 그리고 대상 광선을 ꡐ불순 광선ꡑ이라고 해도 좋다. 여기서 ꡐ불순ꡑ이란 말은 이미 대상에 집착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자를 플라톤의 ꡐ이데아적ꡑ인 것, 그리고 후자를 ꡐ사물적ꡑ인 것이라고 해도 좋다. 플라톤은 이 둘을 다시 하나로 다시 결합시키는 데에 실패했다. 그래서 서양 철학은 운명적으로 이원론의 오류에 빠진다. 그런데 동양의 노자는 순수한 도--이를 상도(常道)라 함-- 와 불순한 도--이를 가도(可道)라 함--로 나누었다. 그러나 노자는 ꡒ이 둘이 같은 데서 나와 이름이 다를 뿐이라(同出而 異名)ꡓ했으며, 결국 이를 분리시키지 않았다.(ꡔ道德經ꡕ 1장) 여기서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의 주요 차이점이 생긴다. 서양 철학은 ꡐ포토적ꡑ이고 동양 철학은 ꡐ홀로적ꡑ이라고 해도 좋다. 그래서 포토와 홀로는 철학의 주요 패러다임의 차이점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홀로에서 대상 광선과 표준 광선의 차이는 여러 가지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거짓말쟁이 역설이 발생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대상 언어와 메타 언어를 구별함으로서 이다. 그리고 대상 언어와 메타 언어가 서로 뒤바뀜으로 역설이 생긴다. 이러한 뒤바뀜을 빛의 간섭 효과로 볼 수 있다. 언어가 이와 같이 대상과 메타로 나뉘어지지 않고 그리고 뒤바뀌지 않으면 역설도 발생하지 않는다. 메타 언어가 대상 언어를 언급하는 것을 자기 언급이라고 할 때에, 홀로그래피에서 표준 광선이 대상 광선과 간섭하는 것을 일종의 자기 언급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표준 광선과 대상 광선은 본래에 하나의 근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두 광선의 간섭은 자기 언급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홀로그래피의 경우 감광판에서 빛의 간섭은 자기 언급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거짓말쟁이 역설과 홀로그래피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거짓말쟁이 역설을 충족시키기 위한 메타와 대상의 구별, 그리고 두 언어간의 자기 언급이 홀로그래피에서 이루어졌다. 그 결과로서 반대 일치와 상대성 그리고 유기체성이 따른다. 홀로그래피가 포토그래피와 다른 점은 홀로그래피의 경우에는 모든 부분이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 ꡐ부분적 전체ꡑ라는 현상이 생긴다. 이러한 부분이 전체라는 현상은 일종의 도깨비 현상이라 할 수 있으며, 그래서 아서 캐슬러는 홀로그래피 현상을 두고 ꡐ기계 속의 요정(the Ghost in the Machine)ꡑ이라고 했다. 이러한 모든 부분이 전체를 반영하는 것을 ꡐ비국소적(nonlocality)ꡑ이라고 한다. 그런 면에서 포토는 ꡐ국소적ꡑ이고 홀로는 ꡐ비국소적ꡑ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비국소적이게 되는 이유가 바로 홀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바로 나타났다. 즉, 표준과 대상광선으로 나누었다가 다시 결합시키는 one-two-One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러셀 역설이 순환적 해법을 찾을 때에 바로 이러한 비국소적 현상이 나타난다. 이러한 홀로의 비국소적인 현상은 칼 프리브람이 뇌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뇌의 일부가 손상당해도 뇌의 부분이 다시 전체의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발견함으로 뇌생리학에도 홀로그래피 이론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13) 데이비드 봄은 이러한 비국소적 성격을 ꡐ숨겨진 질서(implicate order)ꡑ라고 했다.14)

 

포토 논리와 홀론 논리

 

동조성 빛과 비동조성 빛의 차이는 마치 훈련된 병사가 질서 정연하게 행진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경우와 같다. 태양이나 촛불은 동조성이 약하기 때문에 홀로그래피를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했다. 홀로그래피를 만들기 위한 빛의 조건은 그래서 동조성이라고 했다. 포토와 홀로는 그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어서 철저하게 사로 다른 논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포토의 경우에는 렌즈가 피사체인 대상물과 감광판을 일대 일로 대응시키는 역할을 한다. 피사체와 감광판의 네거티브는 일대 일로 서로 대응한다. 피사체의 한 부분은 필름의 특정 부위에 국한되어 촬영된다. 하나가 또 다른 곳에 가서 각인될 수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이를 국소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ꡒA 이면서 동시에 A 아닐 수 없다ꡓ라는 모순율과 배중율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 눈에 들어오는 사진 그림은 눈에도 그대로 일 대 일로 서로 대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림을 인지하는 두뇌의 복잡한 과정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평면의 사진 건판이다.

그러나 홀로그래피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포토의 경우에는 한 장면을 일대 일 대응의 방법으로 국소적으로 촬영되지만 홀로의 경우에는 하나의 부분이 전체를 동시에 보여준다. . 뉴튼의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은 찾아 볼 수 없다. 우리 눈은 실상(real image)을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허상(virtual image)을 보고 있는 것이다. 허상을 실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광원과 실상 사이에 홀로그래피가 놓여져 있을 때에 광원에서 나온 빛이 홀로그래피까지 확산되었다가 다시 수렴되어진다. . 그래서 실상을 허상으로 보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포토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현상이다. 헤어져 다시 만나는 확산과 수렴이라는 상반된 현상이 일어남으로서 홀로그래피의 반대 일치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포토의 경우에는 한 부위가 절대적인 공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이 훼손되면 다시 재생시킬 수가 없으나 홀로그래피의 경우에는 특정 부위뿐만 아니라 어느 부분에 빛을 비추어도 피사체의 전체가 재생될 수 있다.

 

바나흐-타르스키 역설

 

요즘 공군에서는 조종사들이 비행착시(vertigo) 현상이라고 하여, 배면비행 연습을 하다가 바다에 비친 별빛을 보고 바다가 하늘인 줄 착각한 나머지 바다에 추락하는 예가 빈번하게 생긴다고 한다.15) 마찬가지로 이러한 착각 때문에 논리학에서도 거짓말쟁이 역설에 걸려 불행을 겪은 사람들이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필레타스라는 철학자가 이 역설 때문에 밤새 고민하다가 새벽에 그만 자살을 한 경우도 있었다. 칸토어 역시 정신 질환을 앓게 되었으며, 괴델은 오랫동안 두 가지 증명을 하려다가 위장병을 앓기도 했고 말년에는 자폐증까지 걸려 치료를 받았다. 비행 연습을 하는 조종사에 비유하자면, 괴델이 수행한 곡예비행은 다음과 같다. TF 사슬이란 마치 비행사가 배면비행을 하는 것과 같다.

 

다음의 <그림 1>에서 윗부분을 하늘이라고 하고 아랫부분을 땅이라고 하고 화살표를 비행 방향이라고 할 때, 그 곡예 방향은 실로 신출귀몰하다고 할 수 있다. 힐베르트 프로그램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천지를 왕래하는 곡예의 빈도가 높고 순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천부경>으로 다시 돌아와 생각해볼 때, <한공리 4>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는 수와 문자가 서로 대응한다. 그리고 수는 생성운환하면서 만왕만래 왕복하는 순환을 한다. 이러한 순환의 궁극적 목적은 ‘합’에서 ‘묘연’에 이르는 것이다. 합→생→운→성→환→묘연의 과정이 바로 괴델 증명의 상하 순환 과정이다. 합에서 묘연에 이르는 과정을 스테판 바나흐와 알프레드 타르스키가 위상기하학적으로 증명했기 때문에, 이를 바나흐-타르스키 역설이라고 한다. <그림 2>를 보면, 고정된 반지름을 갖는 하나의 구가 유한한 수의 부분으로 분해된 다음, 다시 원래의 구와 반지름이 똑같은 두 개의 구로 조립되는데, 이는 2차원이나 3

 

 

 

 

 

<그림 1> ‘불완전성 정리’의 증명(요시마사, 1993, 177)

 

차원 공간에서는 불가능하며, 4차원의 위상 공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새로 생긴 원래의 구와 반지름이 같은 두 개의 구는 묘연의 상태로서, 부분이 곧 전체인 홀로그래피의 상태이다. 묘연의 상태는 불교의 ‘무’와 같은 ‘일즉다 다즉인’의 상태이다. 부분이 전체이고 전체가 부분이라는 ‘한’을 바나흐-타르스키만큼 위상기하학적으로 증명한 예는 없다. 천지 왕래를 반복한 결과로 얻어진 묘연이라는 선물이다.

상향적 고공비행만을 하다가 추락한 수학자는 다름 아닌 힐베르트이다. 힐베르트는 수학에 대하여 초수학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

 

<그림 2> 바나흐-타르스키 역설의 도해(Aczel, 2002, 205)

 

다. 추락한 비행체의 문제되는 부분을 점검할 때 괴델이 사용한 도구는 다름 아닌 에피메니데스의 거짓말쟁이 역설이었다. 거짓말쟁이 역설에서 ‘참’이라는 말을 증명 가능으로, 그리고 ‘거짓’이라는 말을 증명 불능으로 나타낸다면, 괴델은 다음과 같은 명그 명제를 G라고 하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엄밀한 수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증명해냈던 것이다.

 

명제 G는 이 공리계 안에서는 증명해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G의 부정, 즉 G가 아니다

[~G]라는 명제도 증명해낼 수 없다.

 

이를 쉽게 말하자면, 메시아 역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메시아는 제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스스로는 증명할 수 없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듯이 말이다. 이를 자연수와 연관시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자연수에 관한 어떤 공리계일지라도 그 공리계에 모순이 없으면 그것이 무모순이라는 것을 그 공리계 안에서는 증명해낼 수 없다.

여기서 무모순이란, p도 성립하고 그 부정인 p 아닌 것[~p]도 성립할 경우 그런 명제 p는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나의 구구인상에서 보자면, 이는 결정불능인[1‧3‧5‧7‧9구]을 두고 하는 말이다. 힐베르트의 고공비행에서 나타난 역설에 대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비행사 괴델이 자기가 만든 비행체인 ‘괴델수’를 타고 공중에서 곡예를 한다고 하자. 하늘의 별을 자연수라고 하고, 호수에 비친 별들을 기호열이라고 하고, 바다에 비친 것을 초수학적 문장이라고 하자. 불교의 ‘월인천강(月印千江)’이란 말 그대로 하나의 달이 강에 천 개의 달로 비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늘 위의 하나의 달을 강물 속의 천 개의 달과 같다고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수행자가 착시 현상을 피할 수 있는가? 수행의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

 

바나흐-타르스키 역설과 위상기하학

 

바나흐-타르스키 역설에서 보는 위상기하학적 그림과 같이 하나이며 여럿이고 여럿이며 하나인 것이다. 이는 마치 실재의 파이프를 그림으로도 그리고, ‘PIPE’라고 영어로도 쓰고, ‘파이프’라는 한글로도 표현하는 것과 같다. ‘PIPE’는 실재의 파이프는 아니지만 엄연히 글로서의 파이프이다. 괴델로서는 ‘파이프’라는 말을 수로도 바꿀 수 있고 수를 다시 말로도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수로서, 논리적 기호로서, 그리고 말이나 글로서 표현될 수 있는 이 세 가지가 동음다의적(equivocal)으로 혼돈될 경우를 수학적으로 표현해낸 것이 다름 아닌 괴델 정리이다. 이 세 가지가 모두 같은 경우로서, 자기언급을 해버리면 어느 것이 실재이고 비실재인지 그 구별이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여기서 조종사의 추락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어느 것이 실재의 별이고 어느 것이 바다에 비친 것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괴델은 실로 삼국을 통일하고 천하를 평정한 한 무제와 같은 존재이다. 괴델 증명에 대하여 직관주의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환영을 한다. 왜냐하면 괴델이 힐베르트의 형식주의에 치명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힐베르트도 괴델을 찬양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만들어놓은 방법들, 즉 유한주의와 무모순의 원리 그리고 공리계 등을 괴델이 모두 사용하여 증명을 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괴델은 그런 것들을 일단 사용한 다음 폐기처분하고 만다는 사실을 힐베르트는 알아야 한다. 닭 쫓던 개 울 쳐다보는 심정이 힐베르트의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힐베르트 역시 괴델 정리를 앞에 두고 침묵할 도리밖에 없었다. 러셀의 논리주의 역시 괴델을 자기 편이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괴델이 괴델수를 만들 때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논리적 기호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효 역시 중국 현장 일파가 만들어놓은 4분설의 틀을 그대로 사용한다. 그러나 그도 괴델수 같은 것을 타고 인간의 의식 내부의 상하를 오르내린 다음 그 틀을 버리고 만다.

 

결국 칸토어 이후 제기된 역설은 해결되거나 극복될 수 있거나 증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괴델 정리를 좋아한 한 부류의 수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유물론적 수학자들이었다. 논리주의와 형식주의 그리고 언어분석에 의한 수학의 내용을 해명하려고 한 신실증주의자들의 수학을 모두 관념론적이라고 비판해온 유물론자들은 괴델 정리에 한번 무임승차해보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물론자들의 태도는 말 그대로 무임승차이다. 왜냐하면 이어달리기 선수에 비유할 때 괴델은 마지막 주자로서 결승점에 들어온 선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괴델은 논리주의와 형식주의 그리고 직관주의를 모두 구사하여 그의 창의적 증명을 해낸 마지막 주자일 뿐이다(Mostowski. 1955, 14). 그 이전의 주자들, 즉 직관주의‧논리주의‧형식주의의 주자들이 없었더라면 괴델의 등장도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금 괴델 정리의 기본 구상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체계의 형식에 자연수첨자(添字)로 붙인다. 이것에 따라 다시 표지(標識)를 붙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수학적인 문장을 자연수로 바꾼다. 여기서 체계의 각 형식에 이른바 ‘괴델수’가 부여되는데, 이를 괴델화(Goedelization)라고 한다. 괴델화한 곧 조종사가 공중 곡예를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괴델화 과정에서 대상언어는 메타언어가 되며 그 반대로도 된다. 사물이 글이 되고 글이 사물이 된다. 파이프가 ‘파이프’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듯이 말이다. 이는 마치 조종사가 자기 비행체를 한번 뒤집었다 다시 뒤집는 모험과도 같다. 대상언어[자연수]와 메타언어[문장]가 서로 맴돌이 하는 경우이다. 우리는 진나의 경우에서도 이러한 곡예를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진나가 동품과 이품에 유‧무‧구라는 세 개의 메타변수를 만들어 두 개의 품과 조합시킴으로써 구구인을 만든 것을 보았다. 여기서 어느 하나를 자연수 그리고 다른 하나를 초수학의 문장이라고 한다면, 결국 진나 프로그램과 힐베르트의 그것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힐베르트가 수학사상 최대의 영예라고 할 수 있는 불완전성 정리를 괴델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문장을 수로 바꾸고 다시 수를 문장으로 바꾸는 곡예를 부릴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수 위에 공리계라는 탑을 쌓아 올리면 수학이 추구하는 3대 목표인 완전성‧무모순성‧독자성이 보장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공리계라는 바벨탑은 괴델수에 의하여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실로 배면비행을 하다가 비행착시 현상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공포는 비행기 조종사들뿐만 아니라 수학자들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놀이터에서는 어린이들이 대부분 이러한 배면 현상을 이용하여 즐기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궤도기차를 타고 레일을 따라 돌면서 자기 몸이 뒤집어지는 것에 쾌감마저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배면비행의 쾌감은 그것이 놀이임을 아는 한에서만 즐길 수 있다. 그 현기증에서 오는 공포는 상상을 초월한다. 위에 소개한 5단계의 괴델 정리 증명 과정에서 필자들은 이미 그 현기증을 경험했을 것이다. 수학뿐만 아니라 그 어느 분야, 심지어 철학과 종교학에서도 하늘과 땅 사이에서 배면비행을 시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국 자살과 자멸에 이르든지 아니면 이단이라는 멍에를 짊어지든지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괴델은 힐베르트가 만들어놓은 항공 기법과 그가 만든 괴델수라는 비행기를 타고 배면비행을 수행할 수 있었다.

 

스테판-바나흐의 역설과 세포 분열의 원리

 

우리의 인체는 60조 개의 새포로 구성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인체도 그 근원은 단 1개의 수정란이다. 그리고 1개의 세포가 2개로 불어나는 체세포 분열 과정을 통해 점점 그 수가 늘어난다. 우리 몸의 거의 대부분에서 항상 새로운 세포가 생겨나고, 오래 된 세포는 이 새로운 세포로 대치된다. 세포가 계속 만들어지기 때문에 인간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포가 분열되는 과정 역시 스테판-바나흐의 역설과 같다는 것이다. 세포 분열은 대략 아래와 같은 6 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분열된다.

 

1. 간기: 핵 속의 DNA가 복제되어 그 양이 2배로 늘어난다.

 

 

 

 

2. 전기: 핵에 나선형의 염색체가 나타난다.

 

 

 

 

3. 중기: 핵막이 사라지고 중심체가 세포의 양극으로 이동하며, 염색체는 중앙에 고정된다.

 

 

 

4. 후기: 이등분된 염색체가 영극으로 끌려간다.

 

 

 

 

5. 말기: 양극으로 끌려간 염색체는 늘어나 실모양을 하고 있으며, 재생된 2개의 핵 속에 분산된다.

 

 

 

 

 

 

6. 세포질도: 이등분되어 1개의 세포가 2개의 세포로 나누어진다. 분열된 세포 각각에 들어 있는 DNA 양은 분열되기 전 세포의 DNA와 똑같아진다.

 

 

DNA 양이 2배로 되며, 이것이 2개의 세포로 나누어진다.

세포는 분열이라는 과정을 거쳐 제 3의 단계에서는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온다. 그리고 분열된 모든 개체는 분열되기 이전의 전체를 모두 나누어 갖는다.

 

암이 생기는 이유는 암세포는 어떤 발암인자의 작용으로 세포분열이 불규칙하게 일어나 생겨난 무질서한 세포이다. 암세포는 정상세포 보다 활발하게 분열하며, 주변 조직을 침범할 뿐만 아니라 혈관이나 림프관 등으로 전이된다(유키오, 2000, 17)

 

참고 문헌

안도 유키오저, 이종은 역, 인체의 신비, 서울: 고려원미디어,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