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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야르 드 샤르댕의 과학과 영성

나뭇잎숨결 2020. 5. 9. 20:37

떼야르 드 샤르댕의 과학과 영성

 

        - 심 광 섭

 

 

 

 

떼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 1881-1955)은 사계절 신학자이다. 그는 과학자(고생물학자)이며 신학자이자, 종교 사상가이며 신비주의자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로부터 최근 신학자에 이르는 자연 신학의 역사를 일별할 때, 자연과학, 철학, 신학을 넘나들고 아우르면서, 정열의 검투사와 같이 우주의 진화로부터 파악된 하느님을 인식하려는 인물은 샤르댕 밖에 없다. 나는 이 글에서 샤르댕의 과학과 신학/종교의 통합의 방법과 성과를 다루고, 이것이 그의 우주-그리스도 신비주의적 영성에 근거한 것임을 밝히려고 한다.

 

 

1. 진화의 하느님을 찾아서

 

어린 시절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샤르댕의 삶에는 신앙과 물질, 신학과 과학의 종합을 예고하는 흔적이 많다. 그의 어린 시절은 독실한 가톨릭 신앙(예수회)의 분위기에 젖은 가정에서 자라면서 딱딱한 돌이나 금속 조각을 수집하고 좋아했다. 그 이유는 절대적이며 영구하고 영원하며 동시에 만질 수 있고 구체적인 어떤 것에 대한 집착때문이었다. 금속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녹슬은 금속을 발견하고 울었다고 한다. 그는 영국과 이집트와 파리에서, 철학, 신학, 자연과학을 공부하였고, 무엇보다 유럽전쟁(1차대전)시 참호 안에서 기독교 신앙의 하느님과 진화의 하느님 사이의 내적 연관성이 홀연히 떠오르면서, 아시아 특히 중국에서의 지질학과 고생물학 탐사와 연구를 통해 이 통찰을 심화할 수 있었다. 중국 경험은 그에게 대지의 광활함과 인구의 어마어마함의 경험을 안겨 주었다. 전후에 쓴 여러 글과 아프리카의 마지막 여행에서 '진화의 하느님'을 확정할 수 있었다.

 

 이미 샤르댕이 초기에 쓴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글들의 제목과 핵심 문장에서 '진화의 하느님'이라는 주제를 연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있음을 추적할 수 있다. '지구를 통해 하느님과 연합하는 길이 존재한다'['우주적 생명'(1916)]. '우주의 전 표층과 깊이에는 첫째날 우리를 찰흙으로 빚어만든 하느님의 행위가 실제로 존재한다'['신비적 영역'(1917)]. 또 테야르는 '주님! 나는 신비한 성체(聖體)의 영향으로 경배드리기에 합당한 당신의 몸과 피가 된 우주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사제'(1918]라고 기도한다. '세계의 역사 전체는 실현된 성육신에서부터가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그리스도를 통해 앞으로 나아간 우주의 정보의 역사이다'['그리스도의 형상'(1918). '보편적 그리스도에 관하여'(1920)에서 샤르댕은 일종의 정의를 내린다:

 

 '나는 그리스도를 우주적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전 우주의 유기적 중심으로 이해한다'. 그리스도는 유기적 중심으로서, 궁극적으로 물리적이고 자연적 발전은 그리스도에 의존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지구와 인간의 중심일뿐 아니라 모든 별, 성운, 안드로메나, 천사 등, 인간이 원근에서 물리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모든 실재의 중심이 된다. 그럼으로 다음의 결론에 이른다. '그리스도의 인도력과 꼴지움이 인간 노동의 모든 단계마다 영향을 주고, 물질적인 결정론과 우주적 진화에도 영향을 준다. 우주의 낮은 운동을 우리는 전통적으로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주의 낮은 운동은 실제로 우주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관여때문이며, 그리스도는 모적성과 초자연적 생의 실재에 이르기까지 관통하여 계시다. 삼라만상은 모두 물리적으로 그리스도화 되었으며(christifiziert), 그것은 더욱 더 그리스도화 될 것이다. '범그리스도주의'(Pan-Christismus)는 위(僞)범신론이 아니다'('나의 우주'(1924).

 

 샤르댕은 진화론이 계시한 새로운 그리스도상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1933년에 쓴 '그리스도론과 진화'에서 '진화론으로 인하여 우리 종교가 우주적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어느정도 확실히 우주적 그리스도를 꽃피우게 된다면, 진화가 우리 하느님을 유지시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반대로 더욱 참되게 우주적 그리스도는 진화의 이념을 보존하기 위하여 적시에 등장한다고 말해야 한다'. 1942년 '진화자 그리스도'에서는 공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전문 신학자들을 향하여 '그리스도는 진화자이거나 이는 속죄 개념을 논리적으로 풀어 전개한 것'으로 보며, 새로운 십자가의 신학은 '성장과 동시에 속죄의 표징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십자가이며, 이 십자가는 미래에 세계가 자신을 못밖을 수 있는 유일한 십자가이다'. 1945년에 쓴 '기독교와 진화'에서는 진화를 계시의 발판으로 본다. '현대 우주론은 사변적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우주발생(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심리발생과 정신의 발생)의 형태를 받아들인다. 우주발생의 정점은 인격화된 인격성이다. 어떤 버팀목, 어떤 강화력, 어떤 각성의 힘이 우주적 종합을 이루는 물리적 극의 발견을 계시의 직관으로 보지 못하는자 누구인가? 다시 한번 9적어도 자연적 측면에 따라) 신앙의 우주적 그리스도를 과학의 오메가점과 일치할 수 없겠는가?' 역사적 그리스도와 우주적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하여 샤르댕은 '속죄자 그리스도를 일반적으로 확장하면 참된 그리스도-진화자가 되며(세계가 질어진 죄의 무게를 발전을 향한 길 위에 짊어지고 가는 그리스도), 역사적 그리스도가 보편적-자연적 그리스도에로 지향되며, 궁극적으로 우주발생이 그리스도 발생과 일치한다는 생각이 예수의 인간적 현실을 초인간적인 것에게서 소멸시키고 우주적인 것 안에서 흩뿌린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전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진화의 근본 법칙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주의 그리스도가 궁극적으로 세계의 정상에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오메가에서 우주의 운동이 멈춘다면, 반대로 그리스도-오메가는 구체적인 씨앗인 나사렛 예수의 탄생에서부터 경험적으로 우리의 경험을 위하여 정합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1953년 샤르댕이 세상을 떠나기 2년전 '진화의 하느님'에서 그는 지난 50년 동안 이 현상의 명증성이 그를 재촉해 왔다고 진술한다. '나는 인간의 지평 위로 부상하는, 부정할 수 없는 그러나 여전히 잘못 인식했던 우리가 진화의 하느님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샤르댕은 2년 동안 이 주제에 사로잡혔다. 사망하기 한달 전 1955년 3월 쓴 글 '기독교적인 것'에서 샤르댕은 기독교적인 것과 진화적인 것 사이의 만남을 내파적(implosiv) 만남으로 이해한다. 샤르댕에 의하면 우주는 위에서, 앞으로 중심화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중심화의 중심이다. 정신의 탄생은 그리스도의 탄생이며 이는 그리스도교적 현상이다. 샤르댕의 죽음 후에 그의 책상 위에서 예수의 사진이 발견되었다. 그 사진 앞면과 뒷면에는 예수의 마음과 함께 드리는 연도(litany)가 기록되어 있다(별지 참조). 앞면: 진화의 하느님. 그리스도적인 것, 초-그리스도, 예수: 세계의 마음/심장, 진화의 본질. 뒷면은 이렇게 끝난다: 지고의 보편적 에너지의 초점, 우주적 우주 탄생의 영역의 중심, 예수의 마음, 진화의 마음, 내 마음을 당신과 연합합니다.

 

 

2. 진화의 근본 법칙.

 

하느님이 진화 속에서 계시하시며, 이 계시가 미래의 하느님 상과 미래의 종교 이해에 큰 영향을 준다는 테야르의 확신이 매우 인상적으로 보일는지 모르지만, 어떤 진화의 원칙에 의거하여 이러한 확신에 도달할 수 있는지, 그 정당성이 확인되어야 할 것이다. 테야르는 우선 근대과학적 세계관 및 자연관이 객관적 세계, 균일한 세계, 수량화된 세계, 요컨대 質이 박탈된 세계. 엄격한 기계적 인과론의 지배를 받는 세계임을 비판한다. '지난 세기에 탄생된 물리학은 고정성(fixity)과 기하학(geometry)이라는 두 가지 사인 아래에서 가능했다. 물리학은 초창기에 세상을 수학으로 설명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세상을 닫힌 평형상태 속에 있는 고정된 원소들의 조직으로 보았다'. 그러나 자연의 현상에 대한 지식, 미소세계에 있어서의 양자성, 거대세계에 있어서의 상대성을 알고 난 결과 자연의 역사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보통 화학 원소들은 안전성과 그 수명이 무한하다. 그런데 방사성 물체가 발견되면서 그러한 환상이 깨졌다. 우리 인간 편에서 보자면 산과 천체는 고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거대한 '지속'의 흐름에서 볼 때 지각은 우리 발 밑에서 끊임없이 바뀌고 하늘은 우리를 별들의 회오리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 전까지 역사는 인간의 역사만 다루었다. 그것은 근대의 학문관이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고 이어 역사와 자연의 분리하여,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을 분리한 탓이다. 정신과학은 인간을 연구한다. 인간을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즉 영혼, 의식 및 정신이라고 이해한다. 반면 자연과학은 도구적인 사고라는 수단을 빌어 우리들을 에워싸고 있는 물질적인 세계를 연구한다. 자연과학은 인식하는 주체를 인식되는 객체와 날카롭게 구별하는데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은 두 개의 半圓으로서 하나를 이룬다. 인간도 하나의 자연존재이다. '지금까지 믿어온 것과 달리 사람은 세상의 중심이 아니다' 인간은 자연에서 생겨났고, 자연의 법칙들 밑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과학은 정신과학의 전제조건이다. '인간은 생명의 일부다. 특히 생명의 가장 특징적인, 가장 첨단적인, 그리고 가장 생기에 찬 부분이다'. 인간이 역사적인 존재인 이유는 자연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자연자체가 역사적이다. 그러나 자연에도 스스로의 역사가 일어나지만 자연은 역사를 경험으로 얻지 못한다. 자연은 역사이나 역사를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연은 스스로가 역사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 만이 의식과 경험을 통해 역사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 인간의 특징은 인간의 역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역사에 관하여 그 무엇인가를 파악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자기의 역사에 대하여 파악한 '그 무엇'이 진화론이다. 진화론은 상대성이론, 정신분석학과 더불어 우리 시대의 '큰 이론'(Mega-Theorie)에 속한다. 19세기에 진화론은 생물학과 인간학에 인식론적 혁명을 야기하였다. 20세기에 이 혁명의 파장은 생물학을 넘어 우주론/천체물리학과 행동과학 및 지식론(Th.S.Kuhn)에 이르기까지 확산되고 있다. 철학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화론과 화해한 분위기이다. 그러나 샤르댕에게 진화론은 하나의 이론과 가설 이상이다. '진화란 하나의 이론, 하나의 세계, 하나의 가설이 아니다. 그 이상이다. 모든 이론, 모든 가설, 모든 세계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이요 사실을 밝히는 빛이며 모든 선이 거기에서 나오는 만곡/곡선이다'. 샤르댕은 이 명제를 몇 개의 근본 법칙으로 입증해 나간다.

 

가) 중심화의 법칙: 첫째 근본 법칙은 중심화(Centreism)의 법칙이다. 이것은 만물이 중심을 향해 나아가고 수렴하는 실재 구조의 중요한 부분이다. 이 법칙에 따르면 만물은 궁극적으로 물질적, 정신적, 영적인 차원이 하나로 통합되는 전체성에 이른다는 것이다. 전체성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진행과정에 있으며, 중심화의 힘이 모든 만물의 영역에 두루 미친다. 이 과정의 궁극적 목표는 완전한 통일에 다다르는 것이다. 우주만물의 통합, 이것은 샤르댕에게 사변적 형이상학이 아니라 실재론적인 연합의 초물리학이다.  샤르댕에 따르면 우주의 기체/기본 물질은 어지러울 정도로 그 수가 많고, 어지러울 정도로 작으면서 끊임없이 더 작은 것을 향해 분해되지만, ''서로 모여 하나를 이룬다. ...  무언가가 그것들을 엮고 묶어준다. ... 원자들이 모이고 결합되어 하나의 물질이 되는 것은 신비다'. 이 하나됨은 획일성이 아니라 부분이 완전하고 유기적인 전체에 참여하는 통일성임은 물론이다. '전체는 그 구성요소의 합께 그 이상이다'. 전체는 부분의 총합 그 이상이며,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다. 생명은 물질의 종합이지만 거대한 복잡성의 효과를 띄고 나타난, 물질 이상의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다. 따라서 생명은 지상 물질의 우발적 이상 현상이 아며 물질과 생명이 명백하게 나뉘는 것도 아니다. '생물학은 방대한 복잡성의 물리학밖에 다른 것이 아니다'.

 

나) 내면화의 법칙: 우주 물질의 중심화가 인간에게서 최고점에 도달한 이유는 인간이 의식, 반성의식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테야르에 의하면 의식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존재에 다 들어 있다. 테야르는 물질의 '안'과 '밖'을 나누어, 물리화학자들은 지금까지 사물의 '바깥'만을 보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의식이 사람에게서 나타난다고 해서 가장 높은 형태의 생명에만 있다는 것은 한갓 선입관에 불과하다. 과학은 우주형성 문제에서 의식의 문제를 빼버렸지만, 그것은 우주로 뻗어 있고 공간과 시간으로 무한히 연장된다. 그럼으로 의식의 단계가 있다. 우주의 모든 입자에는 의식이 있다. 원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의식의 정도를 실험하고 측정할 수 없다고 의식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영혼과 물질의 분리는 있을 수 없다. 신은 각 영혼 안에서 전 세계를 사랑하시는 것이며, 각 영혼이 우주를 요약하는 그만큼 부분적으로 전 세계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이다. 의식이 복잡성의 증가에 따라 새로운 질의 실재가 발생한다: 미립자 -원자 - 분자 - 고분자 - 금강석  - 단백질 - 세포 - 유기체. 미립자로부터 바이러스와 생명체를 지나 인간에게서 의식이 최고조로 나타나는 현상을 '복잡성과 의식의 법칙'으로 명명한다.  물리학의 결정론을 무한히 작은 수로 설명하고 측량할 수 없는 공간의 만곡을 중력으로 설명하듯이 중심화의 결과인 복잡성은 자유의 현상을 설명한다.

 

다) 개별화의 법칙: 중심화는 구성요소의 획일화, 균질화, 혼합, 혹은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n보다 높은 차원에 있는 n+1은 n을 소멸시키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n을 강화하면서 새로운 차원으로 비약한다. 생명체의 진화는 연속된 과정을 넘어선, 새 질서(새것)의 시작, 전혀 새로운 것을 드러낸다. 이것이 조직된 복잡성인데 복잡성의 매 단계에서 관찰된 현상들은 그보다 낮은 수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 온도는 양자론이 지배하는 개별원자의 수준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설탕의 단 맛은 설탕을 구성하는 탄소, 수소, 산소 원자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생명의 창발적 특성(emergent, C.D.Broad)이다. 샤르댕은 창발적 특징을 생명체의 숫자, 크기, 시간을 들어 설명한다. 유기체는 그의 통일성을 꽃피우게 한 복잡성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기체가 복잡성을 산출한다. 이것은 보편적 경험의 사실이다. '세계는 거대한 하나의 '개체발생(ontogenese)'으로서, 그 과정에서 각 영혼의 발전은 현실 세계를 기초로 하고 그 도움으로 되는 것이며, 우주라는 오케스트라의 한 화음을 이룰 뿐이다'.

 

라) 인격화의 법칙: 인격화의 법칙은 우주물질이 중심화와 내면화를 넘어 극명하게 드러낸 모습을 인간에게서 찾는다. 인격은 중심과 구분되는 다른 사람, 개인이 아니라, 가장 깊이 자기 자신에게 도달한 자이다. 그러므로 인격은 인간에게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인격적인 것이 계속 발전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완성이다. 샤르댕의 말, '사람은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멋지게, 사람은 거대한 생물학적 종합을 따라 위로 올라가는 화살이다'에서 인격화의 법칙이 노리는 목표가 예감된다. 그 목표는 초인격(the hyper-personal), 곧 우주의 인격화에 있다. 인격화된 우주란, 수많은 개체들이 상처를 입지 않고 망가자지 않으면서 이룩된 하나이다.

 

마) 사랑의 법칙: 테야르에게 사랑이란 기쁨과 고통 등, 한갓 감성차원만이 아니라 굉장한 자연의 힘이며 진화의 뜻이다. 사랑은 하나가 되고자 하는 본능, 우주적 사랑이다. 우주 차원의 사랑이란 우주의 압력으로 개체를 전체로 몰아가는 열정이다.

 

바) 비가역성의 법칙: 테야르에 의하면 시공간에 사는 여러 무리들은 그들을 묶어주고 최고에 달하게 해주는 어떤 점에 이르기 마련이다. 이 점을 샤르댕은 '오메가 점'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오메가 점은 일련의 과정의 마지막이지만, 그 과정 '밖'이다. 그 이유는 분자는 원자의 합 이상이며, 세포는 분자들의 합 이상이고, 사회는 개인들의 합 이상이며, 수학은 계산과 정리 이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주의 종합으로서의 오메가 점은 일련의 우주과정 '밖'에 있다 할 것이다. 테야를는 오메가 점의 특성으로 자율, 현재성, 불가역성, 초월을 언급한다. 오메가 점의 자율이란 엔트로피의 증가로 우주가 죽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방사 에너지가 탄젠트 에너지를 새롭게함으로써 힘의 붕괴로부터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가령, 사람의 죽음이 동물의 죽음과 판연히 다른 것은 동물의 죽음은 방사가 탄젠트에 완전히 먹히지만, 사람은 거기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엔트로치를 넘어 오메가를 향해간다. 오메가의 현실성이란 새로운 실재, 새로운 존재론적 현실재의 창발적 출현을 의미한다. 오메가의 비가역성이란 모든 실재의 출현의 유일회성을 의미하며, 초월이란 오메가가 신간과 공간을 모으지만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있다는 뜻이다. 분자가 모여 세포를 이룰 때 세포에는 분자를 초월하는 무엇이 있듯이, 오메가는 오메가 이전의 집합물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무엇이 있다.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며, 부분의 합을 초월하는 무엇이 있다.

 

 이상 논의한 6개의 진화의 근본법칙을 함께 생각해 보면 우주가 하나의 방향을 갖고 발전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테야르는 이를 '정향진화'(orthogenesis)라고 칭한다. 정향진화는 샤르댕의 체계에 기본적인 개념. 변화는 전적으로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종과 계통의 모든 변화에는 목표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변화의 과정이 지향적이다. 방향감각을 산출하는 부분은 물질 안이다. 그래서 테야르는 '진화란 알고 보면 '얼'에너지 또는 '방사' 에너지의 끊임없는 증가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물질은 점점 복잡하고, 조직화되며, 의식화된다. 정향진화는 해석의 광범위한 범위라고 할 수 있다.

 정향진화의 정점인 오메가 점에 하느님의 문제가 등장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진화의 추진력이며, 진화를 모으는 분이시고, 진화의 보증인이며, 진화의 몸이기 때문이다. 진화의 정점인 오메가 점은 '만물을 충만케하고'(엡1;23), 그이 안에서 만물이 성립하는 (골1:17) 죽고 또 부활한 그리스도이다. 창조는 오래 전에 이미 끝난 것이 아니다. 창조는 더욱 놀랍게 진행중이며, 세계의 가장 고양된 영역에서 진행중이다.

 

 

3. 진화의 오메가 점이신 우주적 그리스도

 

어떻게 진화가 하느님의 계시이며, 어떻게 진화가 특정한 한 하느님을 계시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발전을 가능케하며, 유지케하고 발전이 지향하는 절대적 중심을 받아들이지 않는 비평적 의식의 사람에게 사실 테야르의 정향진화, 중심화의 진화는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만일 그와같은 절대적 중심이 없다면, 인격성과 사랑을 향한 우주 발전의 방향이란 온갖 소립자로 구성된 우주의 모든 요소들의 의식적이고 목적지향적인 활동성이거나 혹은 '오직 우연만이 모든 혁신의 근원이며, 생물권에서 일어나는 모든 창조의 근원'(Jacques Monod)이 될 것이다. 그리고 비유기체의 단계에서의 목적 지향적 발전이나 정신의 단계에서의 목적 지향적 발전에는 많은 물음이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테야르가 오메가 점이라고 말한 절대적 중심이 우주의 진화에 대하여 책임적인 답안이 될 수 있는가?

 중심화의 법칙에 따르면 절대 중심은 통합 지향적인 우주의 출발점이자 목표점이다. 절대 중심의 추진력만이 아니라 방향이 세계물질을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우주 물질에서 추진력과 방향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주 물질은 절대 중심의 산물이다. 절대 중심은 우주의 근원으로서 우주 물질에 앞서며 동시에 통합의 목표점으로서 우주 물질에게서 나온다. 절대 중심이 우주물질에 전달하는 방법은 긴밀한 내적 연합을 도모하는 집중화의 법칙과 획일화를 거부하는 개별화의 법칙으로써 으로써 암시되었다. 집중화와 개별화의 법칙에 따라 절대적 중심은 진화의 모든 중심의 중심으로서 현존한다.

 

 내면화와 인격화의 법칙에 다르면 절대중심은 최고로 내면화되며 자기 자신에 대한 충만한 의식일 뿐 아니라 자기 밖에서 존재하는 가능한 모든 사물에 대한 의식이기도 하다. 이 법칙은 제한없는 자발성과 창조성과 자유를 유도한다.

 

 개별화의 법칙에 따르면 절대 중심은 진화의 중심들에 현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화의 중심들과 철저하게 차이짓고 구분한다. 절대 중심과 개별적 중심들 사이의 통일성이 크면 클 수록 양자 사이의 상이성 또한 크며 각자의 자기존재됨과 자유도 크다 할 것이다.

 사랑의 법칙에 따르면 절대중심은 인격 안에 있는 사랑이다. 인격 안에 있는 사랑이란 최소한의 필연성없이 충만한 자유함으로 사랑의 모든 가능성을 실현한다. 인격 안에서의 사랑이란 자유 안에서의 사랑이요, 사랑 안에서의 자유이다. 이 사랑은 우주의 창조이며, 사랑을 자유롭게 거부하는 자에게 사랑하는 자를 놓아주는 행위와 속죄의 죽음에 이르는 사랑까지 포함된다.

 

 비가역성의 법칙에 따르면 절대중심은 유일한 절대자이며, 무제약자이며, 파괴불가능한자이며, 원생명체이며, 삼라만상의 근원이며, 모든 종교, 모든 철학, 모든 신비주의 경건한 자들의 하느님이다. 만일 오메가점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성을 피할 수 없다면, 앞서 현존할 수도 없으며, 무자비한 엔트로피를 피할 수 없으며, 비가역성에 대한 희망을 기초할 수도 없다. 하느님의 존재를 자연에 내재한 설계의 증거에 의해 유추되거나 뒷받침될 수 있으며 과학은 우리로 하여금 설계의 증거를 깨닫게 한다는 주장함으로써 신학과 과학의 화해와 통합을 평생의 과제로 삼은 테야르에게 진화의 근본법칙으로부터 추론한 절대중심을, 그 단어의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사태의 내적 필연성으로부터, 바울과 요한이 진술한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생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테야르가 어느 날 이렇게 자문자답한다. '어떤 이가 어느 날 다음 두 至福 중 어느 것이 더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우주에게 중심을 주어 구원키 위해서 신의 숭고한 통일성을 취할 것인가? 아니면 신을 경험하고 신에 접촉한 광대한 구체적 우주를 취할 것인가?'. 그는 달콤한 알쏭달쏭으로 답하는 것 같다. '일체는 나에게 전부이고, 또, 전부는 나에게 무이다. 모든 것이 나에게 신이고, 또, 모든 것이 나에게 티끌이다.' 오메가 점은 테야르의 질문 '지중해 세계 정도의 규모로 상상되고 사랑받은 복음의 그리스도가 놀랄만큼 커진 우리 우주를 포괄하고, 또 집약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메가점, 절대중심, 신의나라란 무엇인가? 성 바울과 성 요한이 밝힌바와 같이 '그것은 만물의 양적 충만과 질적 완성이다. 그것은 신비적 충만(pleroma)인 바, 거기서 실질적 유일자와 피조적 다수는 아무 혼란없이 전체 안에서 再合하는 것이다'.

 

 신학적 진술은 종교적 공동체의 신앙을 해명하는 것만이냐, 아니면 궁극적 실재를 비롯한 실재 일반에 대한 이성적이고 책임적인 담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신학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관계로만 제한될 수 없다. 테야르 신학은 무제약적 실재이며 만물을 충만으로 채우는 하느님과 모든 시공의 우주와의 관계와 관련됨을 테야르는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수여! 나의 형님이 되어 주지만 마시고, 나의 신이 되어주소서! 이제는, 당신을 보편적 인력과 반발력의 원리로서 세계의 정점에 올려놓는 놀라운 선택력에 힘입어, 당신은 내가 숭배하기 위해 도처에서 찾았던 거대하고 살아있는 힘으로서 내게 다가옵니다'.

 

 

4. 진화의 하느님에 대한 논의

 

진화론적 우주에서 보편적이며 우주적 그리스도를 찾으려는 테야르의 시도는 많은 과학자들에게 낮설고 이해가 안되는 일이며 따라서 반대와 거부에 부딛친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분자 생물학자 쟈크 모노(Jacques Monod)는 테야르의 시도를 '생물학적 철학'이라고 칭하면서, 그의 시도는 지적인 예리함과 명료함이 부족하다고 비평했다. 그러나 테야르의 시도를 긍정적으로 보는 생물학자들도 있으며, 몇 가지 낡은 문제점을 제외하고 테야르의 근본 취지를 인정하려는 학자들도 많다. 그러나 테야르의 시도는 신학적 혹은 철학적 문제이지 자연과학적으로는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은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테야르는 그동안 과학과 종교 사이에 건널 수 없을 것으로 생가되어 온 강을 건너고 다른 사람들도 편리하게 왕래할 수 있는 가교를 지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신학자들도 평균적으로 우주의 진화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읽으려는 신학자는 드물다. 가톨릭 신학자로서는 테야르의 친구이자 연구가인 앙리 드 루박(Henri de Lubac)을 제외하고, 칼 라너(Karl Rahner)가 암시적으로 그리스도론에서 테야르를 언급할 뿐이다. '우리는 테야르 이래 유행이 되어 있는 이론은 피하고 싶다. 우리가 이 결론에 가까워졌다고 하면 그것도 나쁜 것은 아니고, 의도적으로 피할 필요는 없다. 우리로서는 여기서 진화론적 세계관으로부터 현안이 된 문제를 다루는 신학자라면 누구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것만을 다루고자 한다.' 테야르에 대한 라너의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이야기 방식은 그에 대한 독일 가톨릭 신학자들의 머뭇거리는 태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누구라도 이야기 할 수 있는 점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창조'란 '하느님이 세계가 되는 과정에서의 한 부분적 계기로 생각할 수 있다. 하느님은 사실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긴 하지만 세계와 물질이 된 로고스에서 당신 자신을 표시하시는 것이다. 창조와 성육신을 마치 두 개의 완전한 별개의 것으로, 서로 동시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밖으로 향한' 행위처럼 하느님이 품은 분리된 두 개의 동기에서 초래하는 것처럼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런 것이 아니라 창조와 성육신은 설령 내적으로 개별화된 것이라도, 이 실재 세계에 있어서는 하느님의 하나의 자기 소외와 자기 표명의 과정에서 나타난 두 개의 계기이며, 두 개의 국면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이해는 그리스도교 신학사에서 아주 예로부터 '그리스도 중심주의'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즉, 하느님의 창조적 말씀은 세계를 창조함에 있어, 이 세계를 처음부터 당신 자신이 되어야 할 물질성(소재)으로서, 또는 당신 자신의 물질성을 둘러싼 세계로서 만드시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하느님이 성육신 없이도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즉 물질의 자기초월이 은총과 성육신에서의 궁극적인 정점에 달하지 않고 끝난다고 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본질적 자기 초월은 모두, 설령 초월하는 것이 운동에 본래 갖추어진 목표이기는 했어도, 더 저차의 단계에서는 얘기할 수도 요구할 수도 없고, 다만 은총에 의해서 주어지는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라너는 이 문장들에서 테야르의 진화의 하느님과 진화의 오에가점으로서의 보편적-우주적 그리스도 사상을 받아들인 듯 보인다.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을 연결하는 과제는 21세기 신학의 프로그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개신교 신학자 유르겐 몰트만의 경우도 동일하다. 그는 메시야적 차원의 그리스도론에서 한 장을 생태적 위기에 답변하는 그리스도론으로서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으로 쓰고 있다. '자연 세계의 치명적인 생태학적 재난을 차츰 의식하게 됨으로써 '역사'라고 하는 근대의 패러다임이 지닌 한계가 인식되고 있으며고대 우주적 그리스도론과 그것의 물질적 구원론의 지혜를 다시 질문하게 된다'. 몰트만은 테야르의 '진화자 그리스도'와 라너의 진화의 '자기 초월'의 문제와 논쟁 끝에 자신의 고유한 착상을 전개한다. 그는 두 사람 공히 진화의 모호성과 희생을 명료하게 다루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구원자 그리스도 없는 진화자 그리스도는 잔인하고 감정 없는 도태자 그리스도가 아닌가?'. '그리스도께서 양면성을 가진 진화와 함께 생각되어야 한다면, 그는 진화의 구원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테야르에 대한 몰트만의 비판은 그의 생애와 작품을 면밀하게 검토할 경우 유지하기 어려운 원칙적이고 인습적인 비판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몰트만의 다음의 주장이 테야르에게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자연과 인류의 진화의 여러 가지 과정들은 그리스도께서 희생자들 가운데에 희생물로서 인식될 때에만 창조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와 긍정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린자(Christus crucifixus)로서의 그리스도와 진화자 그리스도(Christus evolutor)는 테야르에게 양자택일이 아니라, 하나이며 동일한 분이다. 진화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며 진화의 목표는 우주적 부활절이다.

 

 

5. 우주적 진화론자 그리스도의 영성

 

하느님에게 접근하는 방식인 영성을 생(삶)에 대한 태도이라고 할 때, 각 시대마다 특색/이미지/동기부여를 갖는다: 그리스도의 재림, 순교자의 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립, 선교적 열정 등이다. 오늘날은 세계에 그리스도인은 과학 기술적이고 인문주의적인 노력으로 결성되는 세계를 통해 하느님에게 이르기를 원한다. 테야르는 '내 생애의 주요 관심사는 세계 안에서 보다 편리하게 하느님을 발견하는 일반적인 시도였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의 관심사는 물질과 세속 세계의 중요성을 발견함으로써 실현된다.

 

1) 물질의 중요성에 대하여: 그는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성육신 사상에서 극복하고 있다. 서양의 과학과 철학이 물질에 대한 정의가 하나도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물질의 충만한 넘쳐흐름을 감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질이란 것은 만져 볼 수 있는, 감각적인, '자연적인'(신학적인 의미에서) 것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며, 이러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 에너지들, 피조물들의 총체가 될 것이다'. <<신의 나라>>는 세계는 하느님의 몸이라는 사상으로 일관되어 있다. '물질은 한편으로는 우리 삶의 짐이요 쇠사슬, 고통, 그리고 죄이자 협박이다.' 그러나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을 먹어 살릴 빵이 없다면, 정신을 취하게 할 美의 술이 없다면, 정신을 强壯시킬 지상의 투쟁이 없다면', 그런 정신을 생각할 수 있는가? '예수는 그 수난의 성육신으로 우리로 하여금 물질의 정신적 능력을 발견케 했다.' 물질은 우리가 오를 경사면을 만들고, 우리를 비행시켜주는 바람이기도 하다(101f.). '어떤 영혼도 물질을 통하여 일정한 도정을 완주하지 않고는 신에 다다르지 못한다'(103).

 

샤르댕은 우주의 영적 본성에 관하여 말한다. 그가 말하는 궁극적 실재는 물질적이라기 보다 영적(심리적, psychic)이다. 그러나 물질을 무시하는 그 어떤 입장과 다르다. 물질은 물리적 우주의 성분일 뿐 아니라 영성의 성분이다.

 

 

물질 찬가:

 

<<우주찬가>>에서

'거친 물질이여, 불모한 흙덩이여, 굳은 바위여, 폭력에만 굴하고, 양식을 얻기 원하면 노동을 강제하는 자여, 너는 축복을 받아라!
힘에 충만한 물질이여, 저항할 수 없는 진화여, 항상 출생하는 실재여, 모든 순간에 우리의 정신적 범주를 분쇄하면서 언제든지 더 먼 곳으로 진리를 추구할 것을 강제하는 자여, 축복을 받아라!

'혼들이 조화를 연주하는 샘(물질 영의 자궁), 새로운 예루살렘이 출생하는 투명한 결정이여, 나는 너를 찬양한다. 창조적인 힘을 갖고 있는 신의 나라, 영에 의해서 동요되는 대양, 수육한 말씀에 의해서 반죽되고 생명이 주어진 점토, 나는 너를 찬양한다'(전집 IV, 58-59)

 

2) 세속세계의 중요성에 대하여: 속세와 수도원의 생활에 구별이 없다. 테야르가, 신도가 되면 비인간화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던 원인 신자들이 인간성을 향상시키지 않고 그것을 비켜가거나 그 밖에서 머물기 때문이다. '카톨릭 신자가 우리와 함께 일을 할 때, 우리는 언제나 그가 진실성 없이 건방지게 일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는 일에 관심을 가진 듯이 보이기는 하지만, 내심 그는, 그의 종교를 따르는 그 까닭으로 해서 인간 노력을 믿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이미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것이다. 기독교는 도망병과 가짜 동지를 만든다'. '신은 살아 계시고 성육신하시는 분으로, 우리로부터 멀리 손 닿을 수 없는 세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행동과 일 속에서 매 순간 우리를 기다린다. 그는 나의 펜, 나의 곡괭이, 나의 붓, 나의 바늘의 끝에 어떤 모습으로든지 존재한다. 내 마음, 나의 생각의 촉수에는 물론이고, 나의 깊은 의지가 지향하는 최후의 목표를 손에 넣는 일은, 나의 바쁜 거동, 몸짓, 득점을 마지막 善終때까지 밀어붙여서 된다.' 테야르의 초탈은 행동에 의한 초탈이다. 그리스도는 '물에 젖은 채 강에서 나오실 때, 그와 함께 세계를 들어올린다. 물에 잠김과 떠오름, 사물에의 참여와 승화, 소유와 포기, 건너감과 실려감, 이것이 물질을 구하기 위해 물질의 도전에 응답하는 이중적이고도 유일한 운동이다'. 그는 기독교 신비주의의 위대성을 '신의 현시'에서가 아니라 '세계에서의 신의 투영성'에서 발견한다. 하느님은 만물 위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 안에서, 만물을 통하여 사랑하신다.

 

 테야르의 신비주의는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매우 지적인 신비주의만이 아니라 종교와 사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신비주의이다. 그의 신비주의는 관조적이며 연합적인 것이 아니라 진보적으로 더욱 중심적인 경험의 연속에 가깝다. 신비주의에서 하느님의 지극한 경험은 단순성이 아니라 '종합하는 힘'(synthetic power)으로서의 경험이다. 그의 신비주의는 일치의 신비주의(mysticism od identification)가 아니라 통일의 신비주의(mysticism of unification)이다. 그의 신비주의는 전통적인 '하느님과의 연합'만도 아니고, '땅과의 연합'인 자연신비주의도 아니며, '땅을 통한 하느님과의 연합'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테야르 드 샤르댕의 생명사상/최정윤

 

1) 연구배경

함석헌의 생명사상은 신앙의 차원에서 기독교의 창조주 하나님을 생명의 근원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과학의 차원에서 진화론의 입장을 수용한다. 함석헌이 1930년대 중반에 쓴 것으로 알려진 “뜻으로 본 세계 역사”를 보면 이러한 함석헌의 진화론적 생명관이 잘 드러나 있다. 이후 함석헌은 1960년대 초 타임지를 통해 테야르 드 샤르댕의 “인간현상”이란 책을 접하고 자신의 생명관에 적절히 부합하고 과학적 성과의 뒷받침을 해줄 수 있는 사상적 동지와의 조우를 하게 된다. 따라서 함석헌의 생명사상은 샤르댕의 영향을 전폭적으로 받았다기보다는 이미 자신의 깊은 사유에서 나오는 종교적 성찰과 현대과학에 대한 이성적 고찰, 그리고 생명에 대한 탁월하고 세심한 감성적 접근이 빚어낸 그 자신의 생명사상에 부분적으로 샤르댕의 생명사상을 수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2) 샤르댕의 생애(1881.5~1955.4)

테야르 드 샤르댕은 1881년 5월 1일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귀족신분의 아버지와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볼테르의 조카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샤르댕은 경건한 가톨릭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자연, 특히 지질학과 천문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어린 시절에 이미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그는 예수회 수사학교에서 공부하고 1918년 예수회 교단의 회원이 되었다. 학생 때부터 암석에 대한 그의 흥미는 몹시 두드러졌다. 학창시절 내내 그의 관심은 자연과학에 집중되어 있었다.

영국으로 간 그는 앙리 베르그송(1859~1941)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프랑스로 돌아와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들것운반병으로 복무한 후, 소르본대학교에서 고생물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23년에서 1945년까지는 중국에 머물렀다. 샤르댕의 이교적 진화사상을 의심한 가톨릭교회 당국이 그의 저서 대부분을 출판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그의 저서는 그가 죽은 후에야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그가 ‘북경원인’ 해골을 발견한 프로젝트에 참가한 것은 중국에서 유랑생활을 할 때였다. 그는 미국에서 말년을 보냈고, 그곳에서 자신의 전체론적 생명사상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과학자들을 만났다. 그는 1955년 4월 10일 부활 주일에 74세의 나이로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3) 지적 배경

샤르댕의 지적 공로는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극복할 수 있는 ‘합일’의 방법의 연구에 있다. 이러한 이원론은 과학과 종교, 존재론과 현상학, 공간과 시간같은 모든 지식 분야에 나타난다. 그는 예수회 수사들로부터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원론 철학을 배웠지만, 이러한 이분법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가톨릭교회가 그의 철학서를 추방한 것은 그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 철학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샤르댕의 철학적 선배는 독일의 이상주의자 쇼펜하우어와 셸링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의 정신주의자와 이상주의자들이었다. 샤르댕은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론(엘랑 비탈)에 정통했고, 다윈과 라마르크의 자연도태 진화론을 자신의 철학에 통합시켰다. 그의 사상이 발전한 시기에는 양자물리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게오르그 라매트르 신부의 우주생성시의 최초폭발이론(빅뱅이론)이 막 형성되고 있었다.

 

4) 사상사적 의의

샤르댕은 과학자이자 사제였기 때문에 한 분야를 다른 분야의 용어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실재의 의미를 밝혀줄 수 있는 지식의 통합을 찾고자 했다 과학은 자연을 이해할 수 있게 했지만, 종교는 영성으로 통하는 길을 제공했다. 생물학과 사회학은 인간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들 각각의 진리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전체적인 지식을 얻고,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일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20세기 후반 샤르댕의 생명사상의 의의는 정신세계를 자연과학과 별개로 파악하지 않고 자연과학의 지식을 통해 정신세계의 입지를 확보하였다는 점에 있다. 생명의 내면을 탐구한 성과물을 가지고 인간의 정신세계와 인류의 미래까지 내다보는 혜안에 이르러, 물질과 정신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고 하나의 연결선상에서 파악하는 통섭적 생명사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 인식론

샤르댕은 연역적 사고를 인식론의 바탕으로 삼지 않았다. 연역법은 논리적 추론을 통해 실재를 설명하고자 하는 스콜라철학의 특징이다. 샤르댕에 있어서 우주를 이해하는 열쇠란, 진화론적 과정으로 우주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의 우주관은 정적 실재에 대한 존재론적 연구가 아니다. 베르그송의 영향으로 시간 차원을 도입하고 우주의 실재를 과정으로 인식함으로써, 모든 지식과 우주의 의미는 우주가 생성의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는 실재, 존재, 진리 그리고 오메가 포인트, 즉 우주의 완성은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우주를 과정으로서 파악하는 이러한 역동적 관점으로 인해 샤르댕은 일원론적이고 목적론적인 실재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모든 이분법을 해결하고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진화 그 자체다. 전체 우주, 물질, 생명, 인간존재, 정신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진화다, 그리하여 샤르댕의 질문은 우주가 나아가는 목표와 방향에 관한 것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인간존재의 의미는 전 우주역사를 이해함으로써 파악할 수 있다. 샤르댕은 과정에 대한 현상학적 관찰을 통해, 그리고 목적론적 최종점이라는 오메가 포인트를 언급함으로써 진화의 방향을 설명한다.

 

6) 방법론

샤르댕의 방법론은 진화의 모든 시간대에서 특정 법칙이 어떻게 작용해왔는가를 관찰하는 역행적 현상학 연구로 구성된다. 그의 연구는 과거의 영상을 비춤으로써 우주의 시작으로 되돌아간다. 이 영상은 우주의 기원에서 현재까지의 것으로, 진화의 형태와 방향을 보여줌으로써 미래의 경향을 예측할 수 있게 한다.

진화는 샤르댕이 “반복의 법칙” 이라고 부르는 변증법에 따라 일어난다. 그리고 변증법적 순간은 다음 세 가지 현상에 따라 순차적으로 나타난다. 몇 가지 요소가 수많은 여러 가지 새로운 조합으로 배열되는 ‘분기(divergence)’, 여러 요소들이 동일한 진화 층위로 합쳐지는 ‘수렴(convergence)’, 그들의 구성요소보다 복잡한 새로운 요소의 ‘출현(emergence)’이 곧 그것이다.

점점 복잡해지고 중심으로 모이는 법칙은 진화의 각 단계에 적용된다. 이때 각 특정 단계는 반복이 불가능하다. 진화는 정신을 향해, 복잡한 물질의 최대 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복잡화는 물질을 정신화하기 위한 조건이다. 복잡화, 중심을 둘러싼 물질의 자기조직화, 대뇌작용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다. 대뇌작용과 의식의 발전 사이, 의식과 사고 사이, 사고와 정신 사이에도 일정한 상관 관계가 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에너지는 외적으로는 필수적인 힘으로서, 내적으로는 친화감으로서 작용한다. 샤르댕이 말하는 에너지의 두 측면은 물리적인 ‘탄젠트형(tangential)’ 에너지와 심리적, 정신적인 ‘방사상형(radial)’ 에너지이다.

 

7) 우주의 역사: 진화 단계

우주의 기원은 그 물질화에 있다. 샤르댕은 우주에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고 가정한다. 우주에는 기원이자 중심이 있다. 이 중심은 추진력과 목표를 제공하고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지점이다. 이는 또한 힘이자 에너지다. 이 중심은 응축, 통합, 조직을 의미하는 창조과정을 통해 존재한다, 존재 자체는 창조를 의미하며, 창조하는 것은 존재의 역동적 측면이다. 존재와 창조는 별개의 두 순간이 아니다. 존재-창조-통합의 반대는 무존재-분리-분해와 증식이다.

샤르댕에 의하면 우주는 무에서 창조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우주가 무한의 상태, 무한의 분리되는 증식의 상태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상태는 잠재력과 창조되고자 하는 욕망(끌어당기는 힘)을 내재하고 있다. 창조 이전의 우주는 존재를 갈망하는 불안정한 무의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주의 재료는 정신인 동시에 물질이다. 이는 정신적 물질, 혹은 물질적 정신이다. 순수한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순수한 물질로 보이는 순간도 이미 정신적이다. 창조가능한 증식-무의 요소들이 응축될 수 있는 것은 정신(혹은 끌어당기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발전 단계ㅡ무기물질의 형성(지구탄생)에서 생명의 출현(생명탄생)으로, 사고하는 의식의 탄생(정신탄생)으로, 그리고 영(그리스도탄생)으로ㅡ를 관찰하는 것은, 진화의 맥락에 들어 있는 인간생활의 현상을 이해하는 일과 관련이 있으며, 인류의 미래를 예측하게 해준다. 인류는 사고하는 의식을 획득한 진화 상태에 도달했고, 이로써 인간은 자유의지를 획득했다. 즉, 지금부터 진화의 미래는 우리자신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미래를 만드는 자가 되었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진화가 인간 출현에 이르기까지 보여준 경향에 어울리는 행위를 선택하도록 유도한다. 그것은 복합성-중심성-합일의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이것을 선택한다면, 인류는 상호작용을 통해 각 개인의 인간성이 고양되고 성숙해지는, 모든 인간들이 사랑으로 합쳐진 상태를 향해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개인이 인간의 개념을 오해하고, 개인적 성장을 개인주의와 혼동하고, 자신을 진화의 최종지점이라고 착각함으로써 자기중심적 개인적 목표를 추구하고자 선택한다면, 인간은 분기, 증식, 단순성을 향하는 길을 따라가게 될 것이다. 이 길은 진화와는 반대되는 해체, 엔트로피, 죽음을 향해가는 길이다.

 

지구탄생(geogenesis)

지구탄생은 최초의 우주 물질화를 설명한다. 최초의 물질이 응축된 후에, 정기적인 다양화, 복잡화, 내부조직화 과정에 따라 서로 다른 화학적 성분을 지닌 원자들이 형성된다. 물질형성은 다양화, 확산, 복잡화를 통한 성장을 내포한다. 그러면 반복이 불가능한 조건 아래서 지구영역의 요소들이 이 세 개의 매개 변수를 따라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을 때, 진화는 새로운 차원을 선택하면서 계속 진행된다.

 

생명탄생(biogenesis)

생명의 발생은 물질이 큰 덩어리로 응집하거나 크기가 커져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복잡성의 성장 기능일 뿐이다. 생명탄생은 세포가 출현하여 생명영역(biosphere)의 시작을 표시하는 데서 출발한다. 반복의 법칙에 따라, 생명체는 우선 번식하여 지구를 뒤덮는다. 그 다음에는 점차 분화되고 복잡한 유기체로 갈라진다. 생명은 나무처럼 그 줄기에서 가지들이 뻗어가며 점점 복잡해지고 조직화된다.

개별 유기체들이 분지화(ramification) 과정 끝에 명확한 형태에 도달하면, 이들은 서로를 향해 사회화된 생활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살아있는 요소들이 궁극적 모습에 도달한 가지는 내적 외적 원인으로 소멸하거나 보다 복잡하고 조직화된 새로운 유기체로 가지를 친다. 어떤 분지화 현상에도 깊고 깊은 의식이 작용한다. 동물의 영역에서 진화는 대뇌작용의 정도와 신경계의 복잡함으로 표현된다. 뇌는 의식의 물질부분이 된다.

인류탄생(anthropogenesis)과 함께, 새로운 가지가 생명의 나무에서 돋아난다. 이 가지는 처음부터 이미 질적으로 다르다. 사고라는 새로운 능력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즉, 의식 그 자체가 별개의 존재가 된 것이다. 사고는 등급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가 변한 것이다. 반복의 법칙은 분명하다. 어떤 의식이라도 상태가 변하여 사고가 되는 과정이 없다면 영원히 성장할 수 없다.

 

정신탄생(noogenesis)

인간의 진화는 이제 더 이상 생물학적 해부학적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자발성, 사회화, 문화의 성장을 향해 나아간다. 인간에게는 유전적으로 개인 차원에 전달되는 생물학적 유산 외에 다른 집단적 본성이 부여되었다. 그것은 바로 문화로, 인간의 지식과 기억이 총체적으로 집적된 것이다. 정신탄생은 개별적 인간에서 전체적 인간 실재로의 변화와 개인의 익명성에서 개성화로의 변화를 나타낸다. 개성은 개인이 모든 경험, 모든 사고행위, 모든 지각, 모든 기억을 조직하고 통합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다른 모든 종과 마찬가지로 인류 역시 다음과 같은 세 번의 분기 단계를 통과한다. (1)개체화(분화) (2)인간의 개인화(의식의 증대) (3)수렴(합일화)의 단계이다. 수렴 단계에서, 행성의 유한한 공간 내에 있는 각각의 개별 존재는 숫자와 부피가 커지면서 새로운 합일과 새로운 사회적 배열의 필요성을 초래한다. 마지막 단계에는 이전의 단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합일을 구성하는 새로운 공동체가 등장한다.

조화롭지도 통일되지도 않은 대중의 형성은 사회적 위험성을 지닌다. 이러한 대중은 기계화하는 요소로 작용하는 전체주의적 사회정치체제 속에서 탈인격화된다. 이러한 체제 속에서 개인의 가치는 외부에서 부과된 대중프로그래밍에 종속된다. 이러한 전체주의는 반진화적이다. 이는 사회질서 확립을 위해 인간을 탈인격화시키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격화는 사회화를 추동한다. 이는 하나의 개인이 다른 개인과 접촉하도록 이끌며, 개인에게서 다른 사람을 만나고자 하는 욕망이 자발적으로 생기게 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성장과 사회화라는 두 과정은 상호의존적이다. 각각의 개성은 타인을 만남으로 해서 더욱 분명해지고 뚜렷해진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빠져들수록 더욱 완전해진다. 그리고 합일의 정도가 높을수록 개인의 성장도 커진다. 결합은 분화한다. 그리고 결합은 개성화한다.

 

그리스도탄생(Christogenesis): 오메가 포인트


결국 진화는 지구의 조화롭고 복잡한 인간화를 향한 움직임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중심화와 합일의 최고점인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는 각각의 모든 요소가 완전히 개성화하는 지점이다. 개별 존재는 보편화될 때 인간이 되며, 다른 사람과의 진실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사회화 과정을 통해 완전한 인간으로 진화한다.


진화는 영원한 과정이다. 그렇지 않다면 진화의 의미는 없다. 종말이 그저 소멸뿐이라면 진화는 정당화되기 힘들다. 더군다나 진화의 성향은 물질의 정신화를 향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또 진화의 성향은 개인주의적 개별화가 아닌, 모든 인간의 합일을 향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개성을 지향하기 때문에, 개인의 한계를 초월함은 물론이고 초인간적이어야 한다. 즉, 개인적이면서도 초월적인 개별적 개성이어야 하고, 완전한 사랑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사랑이야말로 사회화의 가장 멋진 표현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분명 완전하게 정신화된 물질이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인간의 내재적 원초적 요소임에 틀림없다.

우주의 궁극적 지점 혹은 최종 단계인 오메가 포인트는 그리스도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는 앞선 것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에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등장이 될 것이다. 샤르댕에 있어 시간이란 물질의 완전한 정신화 또는 새로운 우주적 차원의 인격의 등장을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8) 사랑을 향한 진화에 있어서의 악, 고통, 죽음, 불완전

악은 분열, 증식, 물질을 향한 성향을 말한다. 이는 진화와는 반대 성향이다. 연대하고 조직하는 대신 잔가지를 칠 위험은 진화의 여러 층위마다 존재한다. 합일과 증식이라는 이렇듯 두 반대 방향을 향한 잡아당김은 고통을 초래한다. 샤르댕은 개인주의, 분화, 증식을 향한 유혹과 합일, 성장에 저항하려는 유혹이 의식과 함께 증가한다고 믿는다. 증식은 진화의 악이므로 고난은 악을 경험하는 것이며 죄는 악의 도덕적 측면이라 할 수 있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악이란 소멸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 반진화적 존재는 모두 소멸을 향한 노정에 서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통은 불필요한 무용지물만은 아니다. 오히려 고통은 성장을 향한 동기부여의 역할을 한다. 고통은 인간이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 고통은 인간이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도록 만들고 신적 존재, 절대자 중심으로 사물과 인간을 대하도록 이끈다. 고통은 인간을 자극하고 영성화하고 정화한다.

고통의 희생자들이란 모든 진화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무기력하고 나약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인간의 성장, 영성화, 변화과정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가장 믿음직한 행위자다. 이들이 진화의 불완전성에 대해 보상하고 대가를 치르는 희생을 대신 짊어지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상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기 때문에 더 높은 형태의 사랑과 기쁨에 의존한다.

고통에는 엄청난 성장의 잠재 에너지가 있다. 이 에너지를 잘 통제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스스로 의식하고 그 의식을 세계와 사회와 인간 그리고 우주의 변화를 위한 더 큰 욕망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면 세상의 고통은 고양과 합일이라는 인간의식의 위대하고 독특한 행위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도덕적 악은 개인적 차원의 반진화로서, 성장과 합일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다. 이는 타인을 희생으로 삼는 개인적 이익의 추구에 불과하다. 진화의 관점과 용어로 말한다면, 악은 연대와 합일이 아니라 증식, 무, 소멸을 향해 나아간다. 도덕적 악은 인간이 진화의 과정에서 차지하는 최고의 위치를 착각하게 만들어 마치 인간존재가 진화의 목적 그 자체인 것처럼 행동하게 만든다.

고통은 진화의 세 측면에 각각 상응하고 대응하는 세 가지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다수화의 고통, 분화의 고통, 변용의 고통이 그것이다. 다수화의 고통은 내적으로는 인간 내부의 육체적 불완전함으로 인해 생겨나고, 외적으로는 다른 사람과의 합일이 불완전함으로 인해 초래된다. 분화의 고통은 엔트로피에 저항하려고 하는 노력에서 초래된다. 여기서 엔트로피란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엔트로피와는 달리 정신세계에서의 엔트로피로 개인주의, 이기심, 몰개성화 등을 말한다.

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성장의 대가이다. 변용의 고통은 죽음으로 대표된다. 인간의 인격조차도 변화의 과정 없이 계속 성장 할 수는 없다. 죽음은 궁극적 악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의 진화 상태, 불완전한 타인과의 합일 상태에서 타인과 신과의 영적 합일을 향한 우주적 역사에 무관심한 상태의 변화인 반면, 오메가 포인트는 초월적이고 역사적이고 우주적인 진화의 단계의 최종적 모습이다.

 

9) 나가는 글

우주의 진화는 결국 시간, 공간, 에너지의 궁극적 수렴점인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어떤 다른 합일도 가능하지 않은 궁극적 중심점에서 정신영역(noosphere)은 에너지에 의해 완전히 새롭게 구성될 것이다. 이 합일 지점에서 시간과 공간의 수렴이 일어나게 되고 그것이 곧 시간의 종말이 될 것이다. 시간, 공간, 에너지를 포함하는 오메가 포인트는 최고의 복잡성, 최고의 조직화, 완전한 중심성의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수렴으로 인해 오메가 포인트에서는 막대한 양의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영적 에너지가 방출하게 된다. 그 영적 에너지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란 나와 타자가 조화롭게 하나가 되려는 욕구이다. 일반적으로 과학에서 말하는 끌어당기는 힘. 곧 '중력'이란 사물의 바깥에서 본 현상을 말하고 이에 상응하는 사물의 안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 에너지야말로 생명의 진화를 가능케 하는 창조적 힘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샤르댕은 개체의 생명은 개체의 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명'으로 이어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는 그 자신의 불완전함을 사랑으로 극복하여 우주적 그리스도를 형성하여야 하는 것이다. 물질의 우연한 진화는 필연적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며 샤르댕이 생각하는 사랑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나'라는 참 모습을 살리면서 전체와 조화롭게 공존하는 그 정신은 오직 내가 그리스도적 자아와 완벽하게 합일되는 차원이라는 것이다.

즉, 나와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 됨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이 세계는 새 하늘 새 땅이 올 것이며 우리 자신도 지금과는 다른 존재로 화(化)하여 있다는 것이다.

‘시간의 종말’은 우주가 4차원의 세계에서 5차원의 세계 즉,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될 것이다. 복잡성과 조직화 그리고 중심성 이 세 법칙의 반복작용으로 인해 ‘시간의 종말’의 도래는 예측 가능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형태로 올 것인지는 예측할 수 없다. 함석헌의 용어를 빌리면 ‘엉뚱한 것’, ‘뚫려 비치는 것’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열역학 법칙에 의하면 우주는 관성, 증식, 높은 엔트로피 상태를 향하는 경향이 있으며, 진화의 각 변화단계에서 에너지 방출이 발생하지만 그래도 우주는 소멸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진화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우주는 한편으로는 증가하는 엔트로피를 향하는 성향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복잡화-중심성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우주는 엔트로피와 생명이라는 두 반대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생명과 의식을 향한 성향은 역행할 수 없다. 이러한 불역행성은 정신영역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정신영역에서 진화는 오메가 포인트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에 그리고 오메가 포인트는 영원하기 때문에 정신영역 또한 영원하다. 여기에서 영원이라는 단어는 우주가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 수렴의 과정을 거치면서 획득하는 전혀 새로운 차원을 일컫는다. 우주역사의 종말은 우주가 이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차원은 인간이 알고 있는 시간의 개념을 뛰어넘는 4차원을 넘어 5차원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샤르댕은 자신의 저서에서 그의 전체 신앙 체계와 철학적 개념을 다음과 같은 네 마디의 고백적인 언어로 진술한 바 있다. 샤르댕의 생명사상을 가장 축약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되어 이 글의 결어로 삼고자 한다.

“나는 진화가 영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믿는다.

나는 영이 인격을 지닌 신으로 구현될 것을 믿는다.

나는 최고의 인격이 우주적 그리스도임을 믿는다.

나는 우주가 진화과정에 있음을 믿는다.

 

 

우주 찬가 / 떼야르 드 샤르뎅

 

거친 땅과 단단한 바위들에 축복이 있을지어다.
거역할 수 없는 진화의 행진,
새로 태어난 생명에게조차 축복이 있을지어다.


정신의 울타리를 부수어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찾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하니,
우주의 물질과 계산할 수 없는 시간,
무한히 펼쳐진 하늘, 별들의 심연


주여!
지금 살아 있는 불이 된
세계 안의 당신 존재 앞에 엎드립니다.
오늘 마주칠 얼굴들, 일어난 사건들, 성취 아래
제가 기다리고 바라는 소망이오니


주여!
당신의 깊은 가슴으로 나를 안아 주옵소서!
나를 붙드사 새롭고 깨끗하게 하시고
불 가운데 놓으사


내 자아가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태워주소서
제 안에서 뛰노는 생명들과
제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것들 안에서
저는 당신의 은혜를 봅니다.


당신의 존재 안에 저를 참여하게 하신 당신!
저를 형상으로 빚으신 당신의 자취,
생명의 근원이 되는 힘 속에 녹아들도록
우리를 굳게 잡아주시는 당신!


생명을 지배하는 법칙,
약동하는 생명의 힘 안에서,
끊임없는 생명의 움직임 안에서,
저는 당신을 만나
당신의 경이로운 두 손에 입맞춤하나이다.

 

[참고문헌]
인터넷 네이버 지식인, 인명사전
인간현상(테야르 드 샤르댕 저, 양명수 역, 한길사, 1997년)
Teilhard de Chardin, The Phenomenon of Man (New York: Harper and Row, 1961)

 

인간현상 / 테야르 드 샤르댕

 

 

 




 

 

데카르트 이후 근대사상은 물질과 정신을 분리한 철학적 이원론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근대과학의 실험정신 역시 감각적으로 인식 가능한 관찰에 기초하였기 때문에 정신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유물론에 경도되었다. 그러자 과학적 세계관이 주도한 근대문명은 유물론적 철학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정신세계의 가치와 중요성을 상실한 유물론적 윤리로 역사와 사회를 오염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에 대한 반성이었을까?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과학은 새로운 모습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등장하여 근대 물리학의 기초를 재구성하고, 철학 또한 정신과 물질을 하나로 엮어 세계를 유기체적으로 사유하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앙리 베르그송, 사무엘 알렉산더, 로이드 모건, 알프레드 N. 화이트헤드가 등장한 것이다.

 

 

떼이야르 드 샤르댕(1881~1955)은 이러한 근대사상의 변곡점에서 태어나 종합적 사유를 체득한 과학자이자 신학자였다. 그는 가문의 전통을 따라 예수회에 가입하여 철학과 수학을 공부하였지만, 이집트에서는 물리학과 화학을 가르쳤다. 또한 신학수업을 마치고 30세가 되어 사제서품을 받았지만, 삶에서든 생각에서든 과거의 종교에 머물지 않았다. 고생물학적 관심을 갖고 화석을 연구하는 지질학 교수가 되어, 몽골과 중국, 인도와 자바에서 발굴탐사를 하면서도 우주의 운행방식과 목적에 관한 종교적인 사색을 지속했다. 그 과정에서 제자들로 구성된 발굴팀이 북경원인의 유골을 발견하여 과학자로서의 명망을 얻기도 했지만, 동시에 신학적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교회의 박해와 추방에 시달려야만 했다.

 

 

[인간현상]은 떼이야르의 사상이 무르익은 1938(57)부터 2년 동안 집필된 책이다. 철학적으로는 젊은 시절 깊은 영향을 받은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1905]의 목소리가, 과학적으로는 블라디미르 버나드스키의 정신세계(noosphere)” 이론이 이 책에 녹아 들어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종교와 과학 양 진영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진화론과 결합된 종교사상을 담고 있는 [인간현상]은 교황청의 서적 검열에 걸려 그가 죽고 나서야 출판되었고, 출판되고 나서도 과학계로부터 형이상학적 속임수로 가득 차 있다는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사는 동안 자기 시대를 맛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창조적인 사상은 얼마가지 않아 과학과 종교 진영 모두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신학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구성할 수 있는 사상적 무기를 얻게 되었다.

 

 

[인간현상]은 정신과 물질, 종교와 과학, 창조와 진화를 총체적으로 용해시킨 책이다. 유물론에 기초한 신다윈주의적 과학의 진화이론과 목적론에 근거한 정통 기독교신학의 창조론 사이의 대립구도를 깨뜨리고, 이 둘을 모두 수렴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실재를 구성하는 핵심요소를 정신(뜻과 얼)에서 찾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도입하고, 존재의 사실성만이 아니라 의미를 동시에 포착하려는 종합적 직관을 과학에 주문함으로써 만들어낸 길이다. 그러나 인간 현상은 우주의 운동에 대한 설명을 특정한 존재론에서 유추하는 방식에서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따라 출현하고 있는 것들의 어떤 경험법칙을 찾는 방식으로 독자의 동의를 구한다.

 

 

떼이야르는 진화를 생명에 국한시키지 않고, 물질 자체에 생명을 향한 목적을 지닌 기초적인 정신이 있다고 봤다. 지구를 구성한 무기물의 운동에 이미 진화의 시작이 있었고, 이 진화는 새로운 형질의 우연한 출현에 의해서가 아니라 목적이 있는 정향진화(正向進化)”로서 일정한 방향을 지닌다는 주장이다. 어디서 어디로 가는가? 무기물(“이른 생명”)에서 생명으로, 생명에서 반성적 의식인 생각으로, 생각에서 보다 큰 다음 생명인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서 우주사건은 펼쳐진다. 이것이 [인간현상]4부 구조를 구성하는 골격이다.

 

 

그렇다면 왜 진화를 인간현상으로 이름 짓고, 그것을 통해서 우주사건의 특징을 대변하려 했을까? 떼이야르는 정신과 물질이 종합된 우주의 바탕에 다가갈 수 있는 열쇄가 인간이고, 인간에게서 우주 바탕의 변화가 가장 활발히 일어난다고 봤다. 이것은 근대 계몽주의를 독선으로 빠뜨린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와는 전혀 다르다. 떼이야르는 우주가 그 동안 진화해온 까닭이 인간의 탄생에 있다고 보고, 인간을 생명 전체가 기울인 노력의 열매, 진화의 첨탑이요, “꽃봉오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정체된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과 인류의 분투에 대한 촉구를 동시에 겨냥한 말이다.

 

 

떼이야르는 [인간현상]에서 상승하는 우주운동에 관한 필연적인 법칙이나 종교적인 낙관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우주의 진화가 이제 진화 자체가 된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함으로써, 인류로 하여금 다음 생명오메가 포인트를 향해 나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래서 다음 생명을 다루는 4부는 과학적 논증보다는 종교적 비전으로, 논리적 연역보다는 직관적 지혜로 채워져 있다. 우주의 진화로 인해 등장한 반성적인 생각과 그것의 집단현실인 얼누리(noosphere),” 이 현재 우주의 본바탕에 이미 활동하고 있는 오메가 포인트를 향한 사랑과 생명의 열정으로 큰 사람이 등장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떼이야르가 [인간현상]에서 우주진화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유는 매우 거대하고 장엄하다. 그는 독자들로 하여금 과학을 읽으면서 종교를 연상하게 만든다. 과학과 종교가 서로를 튼튼하게 할 때 인류의 얼은 최고에 달하고 가장 활기찬 생명력을 띠게 될 것이라는 그의 확신은 문명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현대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인간현상]은 단지 고생물학적 관찰의 결과나 종교적 신념을 서술하지 않고, 인류의 참된 비상(飛上)을 호소한다. “주저하지 않고 (인류가 길러낸 생명과 평화의) 직관을 끝까지 밀고 가는 것.” 여기에 진화하는 우주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북경원인 발견자의 한 사람이며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의 주창자인 샤르댕 신부는 철학과 신학을 전공한 사제인 동시에 신학자였고 물리학과 지질학을 강의하는 자연과학자였다. 그의 생애는 문자 그대로 지구의 표면을 종회무진 왕래하면서 지층을 파헤쳐 인류의 기원과 진화의 비밀을 밝혀내는 데 바쳐졌다. 그는 일를 통해 우주 속에서 인류의 과거와 미래를 밝혀내고 세계진화에서 신의 존재를 찾으려 하였다.

 

샤르댕 신부는 188151일 프랑스 중부 오베르슈 지방의 사르스나에서 한 귀족가문의 11형제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18세에 예수회에 입회하여 사제교육을 받았으며 지질학과 고생물학에 대한 전문적 교육을 받았다. 1922년에 소르본느 대학에서 자연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다음 해에 황하유역 조사단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다. 이후 20여 년 동안 중국이 그의 제2의 고향이 된다. 1927~1928년 프랑스 체류 이후 이디오피아 지질조사, 주구점의 북경원인 발굴, 중앙아시아 탐험, 인도.버마 탐험 등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지질학과 고생물학 연구를 계속하였다. 1939년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인류기원에 관한 심포지엄에서 북경원인 연구결과를 발표한 후 중국으로 귀환하였다가 중.일전쟁으로 북경에 6년 동안 유폐되었다. 여기서 샤르댕 신부는 그의 필생의 연구제제인 진화와 인간이 미래에 관한 사색고 탐구를 계속하며 그 탐구의 결과인 [인간 현상]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1946년 프랑스로 귀국한 뒤 그는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웬너그렌 재단의 인류학 종신연구원으로 여생을 보냈다. 그는 남아프리카 조사연구 여행을 하는 등 정열적으로 연구활동을 하던중 1955410일 뉴욕에서 심장마비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 당시에는 소수의 전문연구자와 친구들 외에는 그의 이름과 사상을 알아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진화와 인류의 미래에 관한 그의 과학적 연구는 그를 교회당국으로부터 소외되도록 하였으며, 순수한 전공서적 외의 저술은 출간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의 유고는 그의 사후 즉시 각계의 세계적 저명인사들로 구성된 간행위원회에 의해 간행되며, 그 첫 권으로 195510[인간 현상]이 발간되었다. 이 책은 지질학, 고생물학 등 자연과학 분야와 철학, 신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격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샤르댕 신부는 [인간 현상]에서 우주의 생성부터 인간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진화의 주요한 과정을 명쾌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과학적 연구성과에서 출발하여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공정한 관찰자이면 누구든 받아들 일 수 있는 세계관과 인간관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는 과거의 진화의 발걸음으로 인류의 미래를 예측하고 그 발전을 투싷며 이러한 시야 속에 자리잡고 있는 기독교의 위치를 확인했다.

 

이 책에서 그는 '현상으로서'만이 인간을 취급하였으며, 이 책을 세계의 탐구해명이 아니고 그것을 위한 서론으로서 봐주기를 원하였다. 그는 "동물의 완성, 사고력을 가진 존재의 우위는 그 시선의 통찰력과 종합력으로 측정"되며 '본다'는 것은 생의 본질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이 책의 개요이고 결론이며 그의 사상의 핵심이다. 샤르댕 신부는 철두철미하게 과학자의 자격으로 과학의 성과로써 그 사상을 전개한다고 강조했다.

 

이 책에 나타난 그의 우주관의 특징은 지구의 과거의 걸음걸이를 배경으로 하고 그 진화의 속도를 미래로 연장 추정함으로써 인류의 미래상을 추론하는 데에 있다. 우주는 극히 완만한 소용돌이와 같이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정향적 운동중에 있다. 우주의 운동은 구심적 흐름이며 이 움직임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므로 우리가 그것을 포착하기는 힘든다. 그래서 '본다'는 것이 요구된다.

 

그는 우주의 소재인 물질의 진화 속에서 이미 정신적 에너지를 본다. 본질에서부터 정신에 이르기까지 유일한 우주진화의 완전한 기준은 인간이다. 이 진화는 단순한 것에서 복잡성 - 의식화의 무한대에의 증가로 일정 방향으로 전전한다. 샤르댕 신부는 인간의 우주적 배경으로서 이른바 무한대의 세계와 무한소의 세계에 다시 복잡성 - 의식화란 제3의 무한을 추가한다. 복잡성 - 의식화는 우주의 근본운동이다.

 

그는 생명의 출현에서 미생물과 분자, 세포 등이 서로 독립해서 출현하지만 사고력의발생으로 진화의 흐름이 향하고 있다고 하였다. 정신권의 전개에서 인류는 선사시대의 여서 서로 무관한 화석인류들의 분지가 어떤 축을 중심으로 꽃봉우리처럼 사회화를 이루며 진화한다. 원시사회에서는 방산 팽창하던 것이 현대에 이르러 그것은 수축, 압축되어 가는 단계에 있다. 미래의 세계종말에서는 인격사회으 인류의 일체화가 오메가점, 수렴의 극점인 그리스도 안에 만물이 일치한다고 하였다.

 

그의 이론은 우주의 생성 => 생명권의 전개 => 유인류의 분리 => 인간의 출현, 즉 사고력의 제일보 => 정신권의 성립, 즉 팽창의 단계에서 문명과 개체화 => 정신권의 성숙, 즉 압축의 단계에서 이격화적 일체화로 도식화할 수 있다. 세계종말에서 인류는 공동체의 건설을 그리스도의 포괄적 신비체 안에서 성취를 보게 된다.

 

 

이것이 샤르댕 신부가 자연과학과 사회학,심리학 등의 전 영역과 인간학의 전 범위를 종합함으로써 과학과 신앙, 우주와 신의 화해를 계기로 웅대한 우주관을 소묘한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그리스도교의 축원이기도 한 '때가 이르면 신은 그 계획을 시행하며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재결합하리라'는 것을 인간을 현상으로 과학적으로 다르면서 지시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유신진화론자, 테야르 드 샤르댕의 사상
(The ideas of Teilhard De Chardin)
G. J. Keane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1881~1955)‘ 신부는 진화론을 열렬히 받아들이고, 기독교를 진화론 안으로 집어넣으려고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1881년 프랑스 오베르뉴(Auvergne)에서 태어났고, 18세에 가톨릭 예수회(Catholic Society of Jesus)에 들어갔다. 그 후 3년간 카이로에서 물리학과 화학을 배웠고, 그 후 4년은 영국 해스팅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911년에 예수회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그는 도저히 해결될 것 같지 않은 고생물학에 대한 갈증이 생겼고, 성인이 되어서는 인간의 진화론적 조상을 찾기 위해 중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1929년 소위 북경원인(Peking Man, 베이징원인)을 발굴하는데 참여했다. 하지만 그의 생애 동안 전통적인 가톨릭과 진화론의 과학적 체계를 완전히 조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또한 대놓고 그의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 할 수도 없었다.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Wikipedia.org)

샤르댕은 결국 신비주의자가 되었고, 그의 생각은 그가 죽은 이후에야 책으로 나왔다.
 
또한 샤르댕은 필트다운인 사기 사건(Piltdown hoax)에도 연루되어 있었다. 대영박물관의 직원에 의해서 사람의 두개골(human skull)에 오랑우탄(orang-utan)의 턱뼈를 붙이고, 화학 처리를 통해 오래 된 것처럼 보이게 하고, 인간의 이빨과 비슷한 것으로 채워 넣었던 위조 사건이 결국 발각되었던 것이다. 이 사기 사건에서 샤르댕이 어떤 역할을 했었는지에 관한 분석은 저명한 진화론자였던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의 한 글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1]

굴드의 분석에 의하면, 샤르댕도 분명히 사기임을 알고 있었으며, 그가 뉴욕에서 죽기 몇 년 전이었던, 1953년에 이 사기사건이 폭로되자 굉장히 당혹해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샤르댕의 사상

샤르댕의 신비주의(mysticism)에 대한 열정과 함께 진화론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는 전통적인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양립할 수 없는 견해를 제안하게 했다. 그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70)가 열린지 단지 30년도 되지 않은 1899년에 사제단에 가입했다. 그 공의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신조를 발표했었다 :

”유일하시고 진리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무한하시고, 이해될 수 없으신, 무한히 지혜로우시며, 그의 뜻과 완전함 안에서, 홀로 하나이시고, 절대적으로 단순하시며, 변하지 않으시는 영적인 존재이십니다. 이 세상과는 본질적으로 구분되시고, 완전한 아름다움은 그 안에 그리고 그로부터 시작되며,  존재하거나 지각될 수 있는 모든 것 위에 계시는, 형언할 수 없는, 경배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선하시고, 전능하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그의 완전함을 스스로 늘려 가시거나 얻으시는 것이 아니라, 이를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서 입니다…영적세계와 물질세계, 즉 천사계와 지상계, 영과 육체를 가진 인류를 모두 무에서부터 창조하시고…”[2]

10년 간 사제로써 훈련을 받은 후에, 샤르댕은 1870년 선언됐던 가톨릭의 입장(진화론과 반대되는)에 대해서 친숙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도 불구하고, 샤르댕은 진화론이 사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교회가 창세기의 창조에 관한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비과학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교회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며, 세상에 뒤쳐져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신학도 현대적인 진화론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교회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3]


.조작된 필트다운인의 두개골.

.미술가에 의해서 그려졌던 필트다운인(Piltdown Man).

그러한 (진화론과 신학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그의 삶에 사명이 되어 버렸고, 결국 그의 완성품은 신비주의적 진화론적 신학(mystical evolutionary theology)이 되었다.

교회는 찰스 다윈의 시기까지 객관적인 창조론에 기초한 실체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우주는 실재하는 분명한 물질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샤르댕은 이것을 바꾸려고 했다! 그는 우주는 실재하는 물질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모든 것들은 '오메가(Omega)”라고 불리는 미래의 목적지로 진화되고 변화되어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우주에 통일성을 부여함에 틀림없는 것은 오직 영적 혹은 신비적 영역이며,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통일하는 힘이라고 했다. 샤르댕에 따르면, 하나님은 어느 정도 스스로 진화 과정에 개입하고 계시고, 그리스도의 힘으로 모든 것을 '오메가”라는 목적지로 이끌고 가신다는 것이다.

그는 창세기의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창조주로써 분명하게 묘사되고 있음을 인정했다. 샤르댕은 이렇게 쓰고 있었다 :

”어떻게 하나님이 통일시키는 것일까? 하나님은 부분적으로 물질에 스며드심으로써, 원소들이 되고, 그리고 물질의 중심부의 지켜보기 좋은 곳에서, 우리가 오늘날 진화라고 부르는 것을 조절하고 이끌고 계시는 것이다. 우주 생명력의 원리이신(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자신보다 아래 위치에 자리를 잡으시고(그 이후로 그 자리를 지키시며) 그가 스스로 투입된 곳을 순결하게 하시며, 일반적으로 의식을 증가시키기 위해 초월적인 생기를 불어넣으신다.”[4]

그의 견해는 가톨릭 내부는 물론 외부에서도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가 죽은 후 출간된 책 ‘인간현상(Phonomenon of Man)’은 샤르댕의 소위 과학적 논문들이 들어있다. 그 논문에는 그의 진화론적 ‘팩트’가 서술되어 있고, 어려운 질문들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넘어가고 있다.


진화론

그가 이야기한 지구의 시작은 순전히 우연한 사고였다.

”수억 년 전, 일반적인 별의 진화 과정의 하나로서, 믿기 힘든 놀라운 사고의 결과로 (다른 별과의 충돌? 내부적인 대변동?) 안정된 원자로 이루어진 물질의 일부가 태양의 표면에서 떨어져 나왔다. 다른 부분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지지 않은 채, 모항성(Mother star)으로부터 적당한 빛을 받을 수 있는 적절한 거리에서, 이 조각은 응축되고 회전을 하고, 모양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구 모양과 궤도 안에 미래의 인류를 가지는 한 천체가 생겨났다.”[5]

”지구는 아마도 우연히 생겨났을 것이다. 하지만 진화의 가장 일반적인 법칙 중 하나를 따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욱 희귀한 일들이 뒤따라 일어났는데, 어떤 것들이 자연적으로 유도되어 곧바로 사용되고 재구성되도록 만들어졌다.”[6]

샤르댕에게는 최초 세포(first cell)의 기원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

”역사 이래로 단지 한 번 세포가 자연적으로 발생되었다면, 그것은 분명 원형질의 원래 구조가 지구의 일반 화학과 딱 한번 밀접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7]

세포의 복제에 대해서도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

”처음 나타난 복제(번식)는 자연의 한 간단한 과정으로 나타났다. 처음에는 행복한 사고였거나, 생존의 수단이었지만, 신속히 변형돼서, 발전과 정복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었다.”[8]

사람의 의식(consciousness)의 진화에 대해서 그는 ‘정신탄생(noogenesis)”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그는 말했다 :

”...정신탄생(noogenesis), 즉 마음이 만들어지고, 처음으로 한 살아있는 생물체가 본능적으로 자신을 그 거울을 통해 인식했을 때, 전 세계는 전진하기 시작했다.”[9]

줄리안 헉슬리(Julian Huxley)의 촌철살인의 표현을 빌자면, ”스스로의 자각이 가능해지면서 인간은 진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10]

샤르댕에게 진화는 너무도 확실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창조”라는 단어는 그의 책 목차에도 없었다. 그는 썼다 :

”진화론은 이론인가? 시스템인가? 혹은 가설인가? 진화론은 그 이상이다. 진화론은 모든 이론과 모든 가설과 모든 시스템들이 굴복해야만 하는, 일반적인 상황이며, 생각할 줄 알고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이들은 이에 만족할 것이 틀림없다. 진화론은 모든 사실을 밝히는 빛이며, 모든 선들이 따라가야만 하는 곡선이다.”[11]


원죄

그렇다면 샤르댕의 관점에서 원죄(original sin)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는 아담, 하와, 사탄, 또는 원죄란 단어를 그의 책에 기록하지 않았다. 원죄가 없다면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필요가 없어진다. 그리고 구세주가 필요 없다면, 기독교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

샤르댕이 죽은 후에, 그는 가톨릭과 성공회 소속 진화론자들에게 추종의 대상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그의 아이디어가 시대를 앞서가는 것이었으며, 그의 가르침이 결국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의 혼란스러운 추정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객관적 진리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데에 방해가 되었으며, 신비주의는 항상 상식을 비상식으로 바꾸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샤르댕의 추정적 이론은 과학적이지 못했으며, 형이상학적이었다! 그의 이론의 타당성은 진화론이 역사적으로 사실인지 아닌지 여부에 달려 있으며, 오늘날 진화론의 신뢰도가 크게 줄어들면서, 그의 글들은 상상으로 가득한 적-그리스도적인 판타지가 되어버렸다. 그의 생애 동안 샤르댕은 그의 이론을 책으로 내는 것을 거부했으며, 그는 그의 상관에 순종적이었다는 것 역시 공정하게 말해져야만 한다.

(진화론이 사실인 줄로만 믿고, 기독교와 진화론을 조화시키려했던, 그래서 성경을 훼손하고 기독교 신앙을 왜곡시켰던, 샤르댕이 걸었던 길을 뒤따라가고 있는 유신진화론자들을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Footnote
As one Catholic theologian has pointed out: 'Teilhard’s fundamental error was to seek for something more elementary than being as the basis of his metaphysics. He thought he had found it in the concept of unification, but he was mistaken … Created being is composite and oriented towards an end distinct from itself, not in so far as it is being, but in so far as it is created.”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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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rther Rea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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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and notes
1. Gould, S.J., The Piltdown Conspiracy, Natural History magazine 89(8):8–28, August 1980,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2. Vatican Council 1, Enchiridion Symbolorum, Denzinger 18–20, 1782–3.
3. Refer Teilhard’s letter to Abbe Breuil (12 July, 1941): ' … isn’t this just the time for a Catholic to speak openly and as a Christian on lines determined by the best scientific thought of today? (Works so orientated are coming out from every quarter at this very moment!)”, p. 231, Letters From A Traveller (a collection of letters by Teilhard 1923–1955), Fontana Books, William Collins Sons & Co. Ltd, London, 1967.
4. Teilhard de Chardin, P., The Phenomenon of Man, p. 322, William Collins Sons & Co. Ltd, London, 1980.
5. Ref. 4 p. 73.
6. Ref. 4 p. 80.
7. Ref. 4 p. 162.
8. Ref. 4 p. 115.
9. Ref. 4 p. 201.
10. Ref. 4 p. 243.
11. Ref. 4 p. 241.
12. Duggan, G.H., SM, Teilhardism and the Faith, p. 33, The Merrier Press, 4 Bridge St, Cork,1968.

 

*기사 : <신간> 예수와 다윈의 동행 - 신재식(호남신학대 신학과 교수) (2013. 7. 31.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3/07/31/0903000000AKR20130731125700005.HTML

진화론을 믿는 크리스천 과학자가 있다고? (2009. 6. 19. 오마이뉴스)
[서평] 우종학 박사의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59342

'창조의 방법으로 진화를 사용하셨다” (2015. 2. 10. 기독신문)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90276

'아담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해석 (2015. 2. 2. 뉴스앤죠이)
 [서평] <아담의 진화: 성경은 인류 기원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가?>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8385

한신대, 과학과 신학의 '대화' 場 마련 (2014. 12. 6. 기독일보)
: 신희섭 교수, '뇌연구를 통한 마음의 이해' 주제로 뇌의 진화 과정 설명
http://www.christiandaily.co.kr/news/한신대-과학과-신학의-대화-場-마련-50058.html

유신 진화론은 복음을 어떻게 파괴하는가? (2016. 1. 9. 기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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