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 단 1974년 5월호 (제 33호)
가브리엘 마르셀의 思想 ≪I≫
- 鄭 義 采 (가톨릭大學 敎授 · 神父)
차 례
1. 마르젤의 生涯
2. 마르셀 思想의 背景
3. 마르셀 哲學說 槪要
(1) 反省
(2) 問題와 神秘
(3) 肉化
(4) 人格의 開放性
(5) 存在 參與
(6) 絶對者의 부름
(7) 사랑, 信仰, 希望, 壁
4. 맺는 말
1. 마르셀의 生涯
가브리엘 마르셀은 1889년 12월 7일 빠리에서 출생하여 1973년 10월 8일 死亡한 현대 불란서의 代表的 哲學者이다. 4歲때 어머니를 여읜 그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항시 그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르셀은 자기가 眞理와 正確性에 유의하게 된 것은 姨母인 둘째 어머니의 영향이라고 한다. 둘째 어머니는 自由主義的이면서도 毅然한 倫理의 소유자였으며 마르셀 思想形成에 있어 중대한 영향을 미친 여인이었다. 마르셀은 兩親의 藝術的 倫理的 薰育에 의해 우수한 劇作家로서 뿐 아니라 音樂에도 깊은 造詣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엄격한 倫理精神의 소유자임과 동시에 예술과 윤리로써 조화를 이룬 인격자라 할 수 있다. 生母와 兄弟肺妹가 없이 孤獨한 가운데서 자라난 그는 사랑의 결핍을 절감하였으나 그것은 오히려 逆으로 사랑의 交易 안에 人間本然을 깊이 통찰하는 精神哲學을 수립케 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많은 여행으로 心中의 고독을 달랬다.
마르셀은 제 1 차 世界大戰 時 赤十字의 一員으로 參戰하여 人間不幸을 骨髓 까지 체험하였다. 그는 프랑소아 모리악의 영향으로 1929년 3월 24일 40세 때 가톨릭으로 改宗하였다. 그는 많은 著書를 남겼으며 多年間 빠리大學校의 교수로 있었다.
일반적으로 마르셀은 有神論的 實存 主義者로 알려져 있지만 그 자신은 자기를 실존주의자로 자처하지 않았으며 근년에는 자기가 실존주의자가 아니라고 공언까지 하였다.
2. 마르셀 思想의 背景
마르셀은 독일의 觀念論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칸트의 숭고한 人格性의 철학, 헤겔의 풍부한 精神哲學 등은 다같이 마르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또 마르셀은 독일 관념론의 영향하에 발전한 영국과 미국의 新헤겔主義者들을 연구한 바 있다. 그러나 차차 이들에게서 이탈하여 갔다. 마르셀은 독일의 관념론적 抽象哲學에서는 個體의 喪失을 보았으며 스피노자哲學에 있어서는 個人運命과 實存이 絶對 안에 상실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런 철학들과 격렬히 대립한다.
그 밖에도 마르셀은 실존철학의 한 根源을 이룬다는 쉘링의 積極哲學에 영향을 받았으며 베르그송의 生의 철학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마르셀은 배르그송 강의에 열심히 참석하였다. 唯物論的 機械論的문명,과학만능주의를 비판 극복하는 배르그송의 生의 躍進,자유 창조의 철학,획일적 형식주의적 靜的 道德宗敎觀을 떠난 個性에 차고 자유로운 사랑의 공간을 말하는 動的 道德的 宗敎論 등은 그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독일의 관념론적 정신철학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므로 배르그송의 자연주의적 생물학적 残滓는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마르셀은 베르그송의 知性론을 불완전한 것으로 보고 직관에만 의존하는 것을 부족하게 여겨 실존의 根源에서 理性을 살리려고 애쓴다.
마르셀은 사실 실존철학界에 있어서 하이데거나 야스퍼스보다 앞서가며 그 특유의 실존적 사상을 전개한 사람이다. 마르셀은 키에르케고오르를 읽기 전에 이미 자기의 근본사상을 수립하였다. 마르셀은 그의 철학의 주저가 되는「形而上學的 日誌」(Journal metaphysique)를 벌써 1914-1917년에 내었으며「存在와 所有」(Etre et Avoir)를 1918-1933년에 내었다.
마르셀은「形而上學的 日誌」의 출판 후 키에르케고오르의 저서들을 읽었다. 그는 키에르케고오르의 主體的 哲學,실존의 孤獨性, 實存의 深遠한 宗敎性, 倫理性을 찬미하며 單獨性을 사랑의 交易으로 극복한다. 마르셀은 또한 니이체의 예리한 실존의 孤高性도 높이 평가하며 그의 개인주의,특히 權力 意志의 사상을 사랑의 交易으로 극복한다. 마르셀은 「拒絶에서 祈禱에로」중에서 야스퍼스를 높이 평가한다.
하이데거와는 兩者 다 같이 존재(Etre,Sein)를 탐구하는 존재론을 펴고 있다. 마르셀은 神의 恩寵을 말하고 하이데거는 存在의 眞理의 빛을 말한다. 둘다 實存의 謙虛한 受動性을 말한다.
마르셀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Cogito, ergo sum)의 命題 이후 줄곧 內在ㅡ方으로 흐른 現代思潮가 거의 人間斷獨者 안에 密閉되다시피 하였을 때 다시 超越을 試圖하여 人問精神의 질식 상태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 넣으려는 시도를 감행한 철학자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시도는 內在와 超越을 인간實存面에서 連結 具現시키는 데 그 특이성을 나타낸다.
마르셀은 그의 思想展開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에서 神學的으로 쓰는 慣用語를 그의 철학적 思考에 그 고유의 풍요한 의미를 부여 하여 縱?無盡으로 驅使한다. 마르셀은 가톨릭으로 改宗하기 전에 벌써 그 철학의 基幹的 學說을 형성하였으며 일변 이런 그의 학설은 그로 하여금 가톨릭에 접근 가능케 하였다. 누구든지 그의 철학에 접하면 그리스도교 사상과 內的으로 깊이 連結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小論考에서 마르셀의 人間實存像을 그리스도교적 關心에서 考察해 보려한다. 그러기에 이 論文은 마르셀의 사상을 사랑, 信仰,希望, 聖이란 큰 줄거리에서 논해 본다.
3. 마르셀 哲學說 槪要
마르셀은 個人的 特性이 퍽이나 농후한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을 體系的으로 제시하거나 요약하는 것은 퍽 어려운 일이다. 그의 思想은 雜誌, 劇, 論說, 講義 등에 散在해 있으며 그 자신 自己 學說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먼저 그의 思想의 中植를 이루고 있는 몇몇 用語 說明을 할 필요가 있다. 사실 마르셀의 저서를 읽을 때 처음에는 言語分析을 하고 있지 않나 의문이 갈 정도로 여러 用語를 주의깊게 고찰한다. 그러나 마르셀은 言語分析에서 그치지 않고 그 뒤에 숨은 깊은 形而上 學的,超越的 意味를 탐구해 간다.
(1) 反省 (reflexion)
이 말은 마르셀 思想形成에 있어 기초적 용어이다· 마르셀은 그의 生에 있어서 독특한 의미를 가지며 形而上學的 意味를 함축하는 것으로 보이는 經驗에 대하여 反省함으로써 그의 哲學的 思考를 전개한다. 그러므로 그의 反省은 그의 精神的 旅程을 理解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 마르셀의 經驗은 어떤 개인만이 갖는 특수한 경험보다는 普通 누구나가 體驗하는 經驗, 즉 사랑, 誠實, 希望 같은 것이다. 反省으로 그는 交易 이나 普遍化를 志向한다. 反省을 그는 1次的 反省과 2次的 反省으로 구별한다. 이 구별은 아래에 설명할 ‘問題'와 ‘神秘’에서 더 자세히 나타난다.
(2) 問題와 神秘
‘問題'(probleme)는 純客觀的으로 고찰되는 것이며 묻는 바 主觀은 그 問題에 內包되지 않는다. 數學問題 같은 것은 그 좋은 예이다. 數學問題는 나의 主觀을 온전히 떠난 客觀的 立場에서 고찰된다. 數學問題는 나의 主觀을 必然 的으로 내포하지 않는다. 이런 問題는 그 問題로서 考察될 때 나 밖에서 그 객관성을 保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문제는 나 외의 다른 사람이나 더 나아가 機械한테서 풀어질 수도 있다. 이런 問題는 科學的 對象이다.
神秘(mystere)는 무엇인가. 신비는 宗敎的 혹은 神學的 意味에 있어서의 神秘 혹은 秘事가 아니다. 즉 인간의 自然知力 만으로서는 잘 알 수 없는 것을 神의 啓示로 인간이 알게 되는 意味의 神秘가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마르셀 特有의 뉴앙스를 갖는 哲學的 用語이다. 마르셀의 神秘는 묻는 바 主觀質問者가 그 물음 안에 內包되는 데 成立된다. 예컨대 "나는 무엇인가”와 같은質問의 경우이다. 이 물음이 나 없이는, 즉 나를 除外하고는 성립되지 않는다. 물론 이런 물음도 外部的, 客觀的인 問題로,밖에서 考察할 수도 있다. 예컨대 生理學者的 見地에서 내가 나를 考察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 나는 이 물음을 間題 (probleme)로 對象化하는 것이다. 그러나“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본래 生理學的 問題 以上의 내 自身에 關한,내 自身全體에 관한 질문인 것이다. 이 때 내 자신이 그 질문에 內包 되어 있다. 이 때 나는 내 存在全體를 고찰하는 것이다. 神秘는 나의 어떤 特殊現實이 아니고 내 全體의 現實이다. 나는 한 統一體로 고찰된다. '問題'(probleme)는 料量的 문제이며 내 앞에 (devant moi)있는데 反해 ‘神秘’ (mystere)는 내 안에 (en moi)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神秘는 經驗에 관하여 사용된다. 經驗反省에서 설명되는 것이다.
우리가 위에서 잠깐 말한 바와 같이 마르셀은 1次的 反省과 2次的 反省을 말한다. 그는 이 차이를 설명함으로써 神秘의 槪念을 더 명확히 알아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例로 들어 설명 한다면 사랑은 무엇보다도 먼저 直接的 經驗이며 實存的인 것이다. 요한과 마리아는 서로 사랑한다. 이 때 사랑은 직접 經驗的인 것이며 아직 反省이 없다. 마리아를 사랑하는 요한이 사랑의 本質에 대하여 명백히 반성하기 시작한다고 가정하여 본다. 이 때 요한은 밖에서 사랑을 考察 分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요한은 사랑하는 것에서 물러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은 사랑을 자기 밖에다 對象化한다. 이 때 사랑에 대한 그의 태도는 사랑하는 당사자의 것이 아니라 科學者의 態度인 것이다. 이 때 그는 對象을 非人格的으로 고찰하며 그 것을 合成要索로 分析하는 과학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 사랑의 불가사의성은 비인격적 객관적 과학의 날카로운 빛 안에서 잃어버려진다. 이런 경우 사랑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문제(probleme)로 취급되는 것이며 1次的 反省이 가해진 것이다. 따라서 마르셀에 있어서 ‘문제'와 1次的 反番 對象化는 같이 작용한다. 1차적 반성에 있어서는 先反省的 直接的 經驗의 具體的 一致性, 統一性이 파괴된다. 마르셀은 統ㅡ性, 全體性을 중시한다. 왜냐하면 그의 철학은 삶의 철학이머 삶은 분석에서가 아니라 ㅡ致性, 統ㅡ性 안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셀은 直接的 經驗과 합할 수 있는 다른 反省을 본다. 즉 2次的 反省을 말한다. 2차적 반성은 사랑의 人格的 一致 (communion)로 이루이진 具體的 一致性을 항상 保存하는 反省인 것이다. 이 반성은 經驗自體內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며 밖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위의 경우 요한은 人格的 ㅡ致와 存在에의 일치,그리고 存在에의 參與로서의 사랑의 形而 上學的 意味를 반성하는 것이다. 이 때 요한은 순전히 밖에서 보여지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으며 이런 經驗이 他人과 存在와의 交易에 있어서 인격인 내게 대해 내 안에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이 때 요한은 문제에 관심하는 것이 아니고 신비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따라서 2次的 反省과 神秘 槪念은 같이 作用한다.
마르셀은 이런 2차적 반성을 중요시 하며 인격을 集團의 한 멤버로 돌리거나 純全히 한 社會的 作用으로 還元시킴으로 그를 온전히 對象化하는 모든 社會的 政治的 勢力에 抗拒한다. 그러므로 그는 哲學에 있어서 實證主翁 뿐만 아니라 絶對的 觀念主義에 屈服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哲學과 특히 位格으로서의 人格의 具體的 經驗을 看過하거나 손상시키는 哲學은 그 어면 것이든 다 反對한다· 마르셀에 있어서 persona 의 槪念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3) 肉化 (incarnation)
인간 生의 根本的 條件은 어떤 狀況에 處해 있는 것이다. 마르셀에 있어서 狀況이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어떤 固有 狀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世界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生의 처음부터 世界 안에 있다. 즉 나는 세계에 있는 存在(etre-au-monde)이다. 거기서 나는 存在에 參與하며 存在에 개방되어 있다. 主客關係는 反省面에 나타나온다. 그러므로 첫 所與(datum primarium)는 自己 안에 密閉된 自我로서의 내 자신이 아니고 世界 안에 있는 내 자신이며 狀況에 現存하는 내자신이다.
空間的 時間的 綜合인 宇宙에의 나의 進入은 내 肉體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나는 이 세계 안에 肉化된 것으로서 現存한다. 여기서 잔깐 肉化란 용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다. 이 용어는 본래 宗敎的 神學的 用語로서 오랫동안 西歐 그리스도敎界에 通用 된 말이다. 즉 하느님의 아들 獨生聖子가 사람이 되신 것을 뜻하여 왔다. 天主聖子가 肉身을 取하여 사람이 되신 것을 뜻하는 특유의 내용을 갖는 말이었다. 이 말을 마르셀은 自己 哲學에 導入하여 들인다. 물론 現代 哲學家들이 적지 않게 宗敎的 慣用語를 철학에 이끌어들인 것도 사실이다. Incarnation을 우리네 哲學界에서는 ㅡ般的으로 肉化 라 번역하여 쓰기에 그대로 여기 使用 하기는 하지만 무언가 그 낱말이 표현해 주어야 할 내용을 충분히 나타내 주지 못하는 감이 있으며 자칫하면 肉으 로 化해 버렸다는 carnification의 뜻으로 誤解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오히려 取肉, 受肉 같은 말로 일단 생각해 볼만 한 用語가 아닐까 생각된다. 受肉이란 말은 이웃나라 日本에서는 神學界나 哲學界 ㅡ般이 다같이 쓰는 상 싶다. 이런 낱말의 論究는 여기서는 餘談이며 마르셀 哲學에서 이런 神學的 용어들이 끊임없이 驅使되는 것은 퍽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이 世界에 肉化된 것으로서 現存한다는 것은 내 肉身이 나와 다른 한 세계로부터 내가 메시지,즉 감각을 받는 道具로서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 肉身은 내가 萬年筆이나 雙眼鏡을 所有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意味에 있어서의 道具가 아니다. 내가“肉體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表現한다. 그러나 '가지다,라는 말로 내 肉身에 대한 나의 관계를 適切히 다 표현하였다고 할 수 는 없다. 그렇다고 "나는 내 肉身이다" 라는 表現도 물론 적절치 못하다. 나와 내 肉體의 同一性을 主張하는 것은 亂暴하고 不健全한 唯物論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나의 시체를 가리켜 나라고 하는 것과 같다. 나의 屍體는 내가 아니며 나일 수 없는 것이다. 내 肉身에 대한 나의 關係는 神秘로운 것이다. 이 關係는 sui generis 이며 獨特한 것이다. 마르셀은 精神과 肉身의 統ㅡ 的 結付를 생각한다. '傳統哲學에서 實體的 一致를 말한 것과 一脈相通한 면이 없지 않다. 나는 肉化를 통해 먼저 이 空間的 時間的 世界에서 存在에 參與한다.
(4)人格의 開放性
나는 단순히 物質的 의미에 있어서 存在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한 人格으로서 本質的으로 他인에게 開放되어 있다. 인간은 자기를 他에서 구별 함으로써 '나'를 구성한다. 他者 앞에, 他者에 대하여 自己를 提示함으로 '나' 를 구성한다. 그러므로 他者는 競爭相對 혹은 敵이라도 내 自身을 구성하는데 不可缺의 必要部分이다. 나(moi)는 결코 獨立할 수 있는 現實體가 아니다.
(5)存在 參與
다른 인간존재들에 대한 내 관계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타인이 나에게 '한 對象','그것'일 수 있다. 둘째는, 한 人問存在는 나에게 다만 ‘對象','그 것', ‘그 사람',‘그 女'일 뿐 아니라, ‘당신’,'너' (tu, du)가 되는 것이다.
이 때 他者는 내게 대해 단순히 知識 考察의 客觀的 對象만은 아니다. 이 他者는 나에게 있어서 한‘現存'(presence)이며, 問題가 아니고 神秘인 것이다. 앞으로도 現存이란 말이 꽤 자주 나올 것이다. 現存이란 말은 神의 現存 等 神秘神學 혹은 宗敎的 信心界에서 많이 그리고 폭넓게 使用된 관용어이다. 他者가 나에게 한 現存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相互主觀的 (intersubjectif)面에 있는 것이다. 이런 次元에 人格的 觀係가 이루어진다. 즉 사랑 應藷性 (disponibilite), 忠實性 等이 나타난다. 相互 主觀的 면에서 나는 人格的 ㅡ致와 交易에 의한 存在에의 參與를 의식적으로 실현하며 차지하는 것이다.
相互主觀的 面에서 存在에 대한 나의 欲求는 部分的으로 채워진다. 타인과의 一致,타인에 대한 忠誠 안에 나는 對象을 所有하는 관계를 超越하며 存在面에 있게 된다. 他者는 나에게 現存한다. 이로써 兩者는 存在에 參與하는 것이다. 이런 존재에의 參與는 사랑하는 것과 같은 어떤 行爲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存在에 대한 나의 欲求는絶對的이고 無條件的인 존재를 향하는 本性을 지닌다. 물론 이 때 有限的이고 條件的인 存在의 除外를 意味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絶對的인 自已委託과 絶對的인 성실성, 忠誠性을 갈망한다.
(6) 絶對者의 부름
나는 이 揭望을 처음에 인간關係面에서 가질 수 있다. 그러나 反省은 이런 渴望은 모든 存在와 價値의 基盤이며 그 분만이 永遠한 誠實性을 可能케 하는 '絶對的 당신(너)'(le Toi absolu)의 부름을 내포한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나는 主觀的 面에 나타나는 關係性 探究에서 개체적 超越的 絶對者를 發見하며 나는 神인 絶對的 당신에로 향하는 내 인격의 對向性을 意識한다. 나는 처음부터 存在에 開放되어 있다. 이 開放性 의식은 利己心의 超越에서 他人과의 ㅡ 致 안에 인격적 自我關係로 引導하며 더 나아가 흠숭과 기도 안에 神께로 인도해 간다. 相互主觀的 面에 發生하는 關係에 대한 反哲을 통해 나는 인격으로서의 내 存在 안에 그런 關係들의 形而上學的 意義를 보게 된다. 나는 실제로 자기超越을 통하여, 즉 현실的이고 의식的인 타인과 神과의 一致를 통하여 인간的 位格,즉 人格이 되는 것이다.
(7) 사랑,信仰, 希望,聖
우리는 이제 마르셀思想을 사랑, 신앙, 희망 그리고 聖스러움이란 견지에서 論하여 본다.
① 사랑
우리는 위에서 벌써 現存에 대해 말한 바 있지만 마르셀 철학의 핵심이라 할 수있는 사랑을 현존에서 다시 설명한다. 現存感은 벌써 사랑의 징후라 할수 있다. 현존은 空間的 ‘接近’ (proximite) 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둘 혹은 다수의 자유로운 마음의 結緣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他者가 내게 현존하는 것을 느낄 때 나를 內的으로 새롭게 한다. 그 現存은 啓示的이다. 여기서 마르셀은 계시란 종교적 용어를 自己哲學에로 이끌어 들인다. 나는 이런 현존이 없을 때보다 있을 때 더 완전하게 ‘存在' 하게 된다.
現存의 가장 순수한 형식은 愛,友情, 禮拜이다. 이 보다 작은 것으로서는 魅力(charme)이라는 것이 있다. 藝術作品도 매력을 지닌다. 인간의 경우 매력은 '당신’에서 發해 '나’에게 向하는 것을 직접 感知한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매력을 주기 위해서는 내가 바라보는 그 姿態에 존재가 充溢해 있어야 한다.
매력은 인간의 가장 형이상학적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분석하거나 설명하려고 하면 손상시킨다. 매력은 현존감을 발생시킨다. 매력은 啓示이며 현존이 이루어진 자에 무엇인가를 열어 나타내준다. 매력은 악세사리가 아니고 人格體의 深奧, 存在의 秘境에서 發하여 오는 것이다. 매력은 또한 ‘그'를 ‘당신', '너'로 변화시켜 간다. 여기에 마음의 交易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화의 辯證法을 통해 상호 존재의 문을 여는 것이다. 이런 마음의 交易이 杜?되면 夫婦之間이라 할지라도 實用主義的으로는 아내이며 남편일지 모르지만 同室에 살지라도 他者인 것이다.
부부의 일치는 ‘마음의 交易’ 의 ㅡ致, 存在的 ㅡ致여야 하며 創造的 ㅡ致여야 한다. 사랑의 結實인 결혼의 깊은 의미는 여기에 있다. ‘마음의 交易’과 ‘現存’에 있어서는 ‘나’와 '당신’의 구별조차 없어지는 거의 신비적인 순간이 체험된다.
이런 현존은 습관화 혹은 타성화되어 잃어버려질 수도 있다. 인간은 客體化 되기 쉬운 육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상대를 객관적 관찰의 대상으로 삼아 그 일치를 깨뜨릴 수 있다.
그러므로 兩者는 현존을 새롭게 해가야 한다. 이 작용을 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共現存'(CO-presence)을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다.
사랑의 조건과 과정을 더 논하여 본다. 사랑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먼저 상호의 ‘초청'(invocation), ‘부름'이 필요하다. Invocation 도 본래는 invocatio 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하며 종교적으로는 神을 간곡히 부르는 뜻을 지니고 있었지만 여기서 마르셀은 이 낱말을 自己사랑의 哲學에 이끌어들여 男女가 相互存在에 참여키 위해 마음에서부터, 그들 존재의 깊은 데서부터 부름을 發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두 사람이 사랑으로 결합되기 위해서는 ‘나와 같이' (sois-avec-moi)라는 부름이 相對에게 發해져야 한다. 이런 相互存在參與意志 가 두 사람 사이에 交換될 때 '나'는 적극적으로 또 자유로이 ‘당신'에게 나를 열어준다. ‘당신' 편에서 '당신'을 '나' 에게 열고 그것을 '나'에게 깨닫게 한다면 사랑의 신비적 ‘共存在’ (co-esse) 가 실현된다. 이런 사랑은 먼저 問答辨證法에서 출발하여 ‘당신'을 비추어 낸다. 내가 ‘당신'을 부르는 것은 내 안에 일종의 空?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에도 敵이 있다. 그것은 여러가지 모양으로 나타나는 오만이다. 自己로써 가득차 있는 오만한 사람은 存在的 招請을 할 수가 없다. 겸손한 자만 이 자기를 열어 '당신'을 초청하여 맞아들일 수 있다. 이와 같이 부름은 부름을 發하는 자가 겸손하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초청된 자에게는 應諾性(disponibilite)이 요구된다.
우리 인간이 ‘存在’에 통하려면 거기에 이르는 길을 가야 한다. 이런 '存在' 에로의 길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이 길은 우리가 받은 부름에 의해 決定 된다. 이렇게 우리를 ‘存在’에 이르게 하는 길을 초청의 ‘召命'(vocation) 이라 한다. Vocation도 종교적 의미로 쓰여지던 것이 마르셀 철학에 도입된다. 라틴어의 vocatio 는 가톨릭 교회 안에 그 오랜 전통과 함께 하느님의 부르심을 뜻하여 왔으며 특히 성직자나 수도자 召命에 쓰여졌다. 이러한 부르심을 聖召라 칭하였다. 물론 餘他의 信者身分에도 쓰여졌지만.
어떤 타자와 내가 사랑에 의한 마음의 통함을 共生코자 한다면 거기 한 召命이 있다. 이런 共生欲求는 '당신'과 '나’의 일치를 지향한다. 이런 일치는 ‘우리’에게 있어 적극적 가치를 갖는다. 이런 일치는 '우리’의 의식으로 발전해 간다. 이 ‘우리’라는 말은 의미심장한 말이다, 그것은 단순히 '나'의 延長 혹은 强化가 아니라 ‘特異한 現實'을 표시한다. 이런 豫備的 일치를 인정할 때 그 두 사람의 ‘나’는 상호 더 깊이 침투하여 간다. 이것을 실마리로 두 사람은 더 완전하고 더 항구적인 일치에로의 決意를 가질 수 있다. 여태까지 '나의 것’이었던 영역을 ‘당신’에게 열어 당신을 불러들인다. 그렇게 되면 ‘나의 것', '당신의 것’의 구별이 없어진다. 이런 구별의 소멸은 창조의 소극적 일면에 불과하다. ‘나의 것'과 '당신의 것’ 은 서로 호응하여 한 새로운 현실을 '창조’ 해낸다. 그것은 ‘우리의 것'이다.
이렇게 되면 明示的으로 혹은 암암리에 한 契約이 성립된다. 夫婦間의 계약이 그것이다. 이 계약은 자유로 맺어지는 것이기에 '神聖'한 것이다. 또 이 계약은 그 起源에 있어 또 그 본질에 있어 나의 자유로운 행위에서 이루어지므로 이 계약을 약화시키고 해소시킬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가장 강한 防波堤가 된다. 이 계약으로 인해 ‘나’ 와 ‘당신'은 영원한 맺음을 교환한다. 그리고 한 '現實', 한 ‘우리'가 생겨난다. 이런 우리는 이제 미지의 세계로 옮겨가는 것이다.
두 사람이 창조한 '우리'라는 현실은 '忠實'(fidelite)로 말미암아 유지된다. 충실은 ‘現存’을 계속케 하며 그 작용을 항구적인 것으로 만들며 그 은혜를 새롭게 한다. 따라서 충실은 두 사람이 교환한 최초의 계약을 발전시킴으로써 창조를 계속한다. 두사람이 창조한 ‘우리’는 끊임없는 建設로 인해 支持된다. 그러나 이 '우리'를 구성하는 두 요소의 各各은 두 의지를 갖고 있다. 하나는 利己的으로 '나'를 주장하는 의지이고 또 하나는 ‘마음의 交易’을 동경하는 의지이다. 그러므로 후자가 전자를 능가하여 평화와 기쁨 중에 이 ‘우리’를 발전시켜 가는 데는 어려운 희생이 요구된다. 이렇게 볼 때 ‘충실'이란 있는 상태를 지켜가는 것 뿐만이 아니고 그 이상 적극적인 창조가 수반되어야 한다. 즉 더 풍부한 '우리'를 형성해가야 한다.
충실과 서약은 금전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絶對자'에로의 요구와 연결되는 것이며 인간을 초월한 '存在’의 의지에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절대적 존재'와의 연결을 갖지 못하는 계약과 충실은 어떤 조건을 세우게 된다. 부부의 계약과 충실이 이런 조건으로 말미암아 성립될 때 그것은 참 뜻에 있어서의 '現存', 즉 '存在’에의 참여가 아닐 우려가 있다. 순전히 물질적 조건, 육체적 조건에 의한 계약과 충실이 어떻게 끝나는지를 생각하여 본다면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참 충실은 ‘絶對的 存在'와 연결되는 것이며 무조건성을 지향한다. 그러나 나는 내 안에 軟弱性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참된 충실에는 겸손한 기도가 있어야 한다. 이런 기도의 효과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存在'의 세계에 있어서 끊임 없이 創造를 계속 해가는 것이다.
또한 내 충실은 한 '證據'(timoigna-ge)가 된다. 사랑의 삶의 증거인 것이다. 이 증거란 말도 종교적 의미로 그 간 널리 애용되던 말이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신앙인들의 생활에 많이 쓰여진 말이다. 마르셀은 이 말도 자기의 사랑의 철학에 이끌어들여 십분 活用한다. 마르셀은 충실에 의한 創造를 '우리'의 중거로 드러낸다. 충실은 자유와 같이 의무를 넘는 저편 세계의 문제이다. 충실은 자기를 주며 自己를 열어간다. 이와 같은 魂의 內的 호흡은 때때로 떠나간 자를 다시 ‘우리’의 ‘存在’에로, ‘우리'의 '共現存’에로 되찾아 온다. 더 나아가 인간적 조건을 넘어 '絶對的 存在'에의 참여에 복귀시키는 것이다.
참된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거기는 의심도 부인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현세에 있어서는 종교적 신앙과 결부되어 있지 않으면 존재치 못한다. 神만이 절대이니까.
사랑은 신비이며 존재의 세계의 것이다. 本然의 사랑은 利己的인 자기에 대한 사랑에서 자기를 빼내야 하며 참된 ‘나’와 ‘우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創造'이며 苦를 同伴하는 것이다. 즉 사랑은 한 ‘改心’ (conversion) 이다. 물론 여기서 改心이란 말이 傳統西歐社會에서 종교생활의 기본개념인 것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즉 神에로의 改心이었다. 마르셀은 사랑으로 맺어진 夫婦愛에 깊은 뜻을 갖는 용어로 利己的 '나'를 초월해가는 개심이란 말을 쓰고 있다. 이렇게 하여 나는 내 ‘실존'(existence)에서 ‘存在'(gtre)로 건너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存在’ 하는 것이며 ‘存在’는 사랑 중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우리는 神은 "나는 있는 자 그로라"(Ego sum qui sum)의 말과 「요한 복음」의 "신은 사랑이니라” (Deus caritas est)가 같은 神에 대해 일러지는 것, 즉 사랑과 存在가 神 안에서는 完全ㅡ致가 되는 것을 생각케 한다.
물론 신에 있어서만 ‘사랑’과 '存在'는 ㅡ致한다. 우리는 다만 끊임없이 사랑에 살려고 노력함으로써 절대적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며 끊임없이 ‘存在’에 참여하려고 노력함으로써 ‘絶對的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르셀의 이른바 ‘實存에서 存在’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②信仰
信仰을 갖지 않은 사람 편에서 본다면 신앙이란 일종의 弱함을 말하는 것이며 스스로 存立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무엇엔가 기대려는 卑屈한 생활 태도이다.
신앙인은 신앙을 한 德으로 본다. 그 것은 신앙이란 신에 대한 겸허한 承認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2차적 반성에 의해 나 자신의 공허함과 더우기 내 존재 전체를 주고 나를 支持하는 聖스러운 존재를 인정하는 태도이다. 진정한 권위에 순종하는 것은 굴종이 아니다.
신앙은 신에 대한 나의 인격적 참여이다. 나는 신앙으로 신을 ‘그'로서 바라보거나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향해 '당신’이라고 부르며 신과의 ‘共現存'에 이르는 것이다. 신앙은 삶의 영역의 것이며 신비이다. 신앙도 所有의 영역으로 전락할 수 있다. 신앙을 存在의 영역에 보존하기 위해서는 어떤 창조적인 작용이 필요하다. 이 것은 신앙의 淨化를 의미하며 이런 淨化는 신으로부터 빛을 받고 더 깊이 그 빛을 침투시키는 데 성립된다.
신앙에는 또 무엇으로도 동요되지 않는 확고함이 있다. 그것은 理性證明이 주는 것이 아니고 산 증인이 제시하는 확고함이다. 여기에 신앙과 증인의 깊은 連結이 있다.
신앙인은 自己 自由行爲로 神의 부름에 응할 때 내게 현존하는 신을 증언하는 것이다.
신앙인의 가장 강한 증인의 확실성은 殉敎者 안에 나타난다. 이런 證言의 확실성은 사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움과 밀접히 연결된다(Μ.Ε. II참조).
③ 希 望
現今 많은 사람들이 희망에 대해 논한다. 아마도 이런 風潮는 世界 第1次 대전과 第2次 大戰의 비참한 결과를 骨髓까지 체험한 世代가 悲觀的 실존주의에 휩쓸려 들어갔던 데 反해 地球上에 未曾有의 豊饒社會를 출현시킨 다음 시대에, 또 위의 비참을 경험하지 않은 새 세대에 일어온 反動이라 해도 좋을상 싶다. 여하간 실존주의에 뒤이어 希望의 哲學이란 말이 새로 등장한 것도 사실이다. 그리스도敎는본래 終末論的 希望 인 부활이 그 본질적 要索이겠으나 現今에 이르러 이 점을 더욱 뚜렷이 前而에 浮貧시키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마르크스主義에서조차도 希望論을 편다. 그러기에 新마르크스主義者인 블로흐 (E. Bloch) 같은 사람은 그의 力作을「希望의 원리 (Das Prinzip Hoffnung) 라 하였다.
이런 과중에 巨星과 같이 나타난 마르셀은 이런 思想發祥과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아래에 그의 희망론을 간추려 본다. 사실 그의 希望論은 우리 時代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마르셀에 있어서 희망은 사랑이나 신앙과 마찬가지로 소유가 아니고 신비이다.
희망은 試練에서의 해방의 희구이며 구원을 의미할 수 있다. 또 暗黑(병, 이변,노예상태 등)에서의 탈출일 수도 있다. 이런 시련은 일종의 포로상태라 할 수 있다. 또 희망은 自己喪失 혹은 잃어버린 充全性(intigrite)을 의식하며 그 회복을 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試練, 暗黑 등등의 辯證法的 상태가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희망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사방으로 막힌 苦惱 안에 갇히게 하는 것이다. 이런 辯證法的 狀態는 희망이 마치 비탄의 절규에 대답하듯이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근본상태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또 비극성에 의하지 않은 희망의 역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解?을 기다리는 女人이나 연애에 초조해진 청년과 같은 경우이다. 이런 경우에는 영혼에 아직 보이지 않은 빛과 생겨나려는 光明, 현재의 암흑에서 탈출하려는 희망을 목적하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인간실존에 있어서 그 실존이 포로와 같이 보이는 部面이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인간實存 部分은 희망을 필요로 한다. 물론 이런 실존에는 사랑이나 信仰에서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타락해 갈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희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희망이란 그 독특한 움직임, 努力(ni-SUS)에 의해 처음에 집착했던 것으로 보이는 個個의 사물을 超越하려는 不退轉의 경향을 갖는 것이다. 즉 희망은 그 本性上, 有限的 個體的 사물을 초월하여 無限하며 永遠한 것에로 향하는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희망은 물질직 생명적 개념만으로써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희망은 유기체의 거의 완전한 파멸 후에도 존속하는 것을 우리는 가끔 경험한다. 희망을 물리학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不條理이며 전혀 모순된 것이다. 희망은 정신적 原理自體와 부합한다고 볼 것이다. 희망은그 자체 신비인 어떤 것이다.
‘失望’의 본질은 항상 인간 이성 판단에 의해 제출되는 어떤 運命(fatum) 앞에 항복하는 것이다. 굴복한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 내려진 宣?를 수락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런 선고, 혹은 불가피한 사실을 앞에 두고 패배하는 것이다. 자기 본연의 모습을 保持하는 것을 단념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수락할 때는 자기를 保持하는 것, 즉 자기의 充全性을 지키는 것이다. 예컨대 불치의 병을 알게 될 때 나는 내 존재를 지키려고 決意한다. 나는 전력을 다해 시기를 재촉하는 병에 대해 항거하며 불가피한 것을 자유로이 '受諾' 함으로 나를 內的으로 굳히며 내 자신에게 나의 現實性을 증명하며 동시에 내가 응시하는 운명(fatum)을 무한히 높일 수 있다. 스토이시슴(stoicism)의 위대한 힘은 확실히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스토이시즘은 자기 안에 밀폐된다. 스토이시즘은 자기를 견고하게 한다. 그러나 빛을 발할 수 없다. 스토이시슴은 ‘이 나' (moi je)의 가장 강한 표현이며 가장 고도의 昇華라고 할 수 있다. 스토이시슴에는 이웃이 없으며 자기와의 관계 외에는 관계를 갖지 않으며 자기에 대해서 밖에는 책임을 지지 않는 자처럼 행동한다. 즉 內向性을 갖는다.
희망에는 이와 같은 수락을 무한히 초월하는 優越性이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희망은 적극적 ‘非受諾'(non-accep-tation) 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희망이 어떻게 하면 積極性을 가질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수락을 거부하면서 위축되는 대신에 자기를 仲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비수락 안에 ‘인내'(patience)를 도입하면 우리는 희망에 아주 접근하게 된다. 그러므로 희망은 비수락성과 더불어 인내를 내포한다. 인내는 시련 중에서 어떤 이유를 갖게 한다.
인내란 他者에 대해 조잡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며 폭력으로써 타자의 리듬에 자기 리듬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인내란 成長 혹은 成熟의 過程에 신뢰하는 것이다. 즉 이런 과정을 內面에서 助長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내는 실망과 근본적으로 대립한다.
失望의 極은'絶望'이라 하겠다. 절망은 기분 나쁜 것의 반복만은 아니다. 절망은 현실적 반복을 앞질러 失望的인 것이 벌써 실현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그날 그날의 시련을 끝없이 소멸의 날까지 살아가야 한다는 견딜 수 없는확신을 앞질러 갖는데 성립된다. 절망은 일종의 마술과 같은 것이다. 절망은 나를 잠식하는 힘을 갖는다. 절망은 생명의 本體에까지 이른다.
절망의 불길한 영향은 생명이라는 불꽃(flamme)에 미치는 것이다. 생명력에는 정열이 있다. 情熱은 실존에 방해가 될 것을 溶解하며 氣化한다. 그러나 절망적 마술이 개입되면 자체 방해가 되는 要索에로 향하지 않고 오히려 自己自身을 공격하게 된다. 즉 絶望은 자기잠식인 것이다.
또 우리는 희망의 錯覺性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희망이란 결국 허구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이것은 희망의 形而上學의 이론을 그 根抵에서 뒤엎을 수도 있을 것이다. 즉 희망 안에 내포 된 信念의 가치를 의심케 하는 것이다.
희망이 어떤 幻想 혹은 影像(image) 을 향하는 것이라면 또 그런 것에 催眠된 것이라면 그것은 맞는 말이겠다. 그러나 그와는 反對로 희망이 想像(imagination)을 초월하고 幻想이나 순 想像을 避하면서 事實性 혹은 희망의 本性에서 희망을 고찰한다면 이런 위구는 해소될 것이다.
예컨대 어떤 병자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일 그가 어떤 일정한 기간 내에 快癒한다고 생각하였는데 그 豫定 기간에 낫지 않는다면 절망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이 때 판단이 작용할 수 있다. 이 판단의 固有의 역할은 예정의 시기가 지나 병이 낫지 않았다 할지라도 아직 희망의 여지가 있는지 여부를 판단할 것이다. 이 때 희망은 그 본질상 더 높은 차원에로 超越方法을 사용할 수 있다. 이 초과방법에 의해 思惟는 처음부터 의존하려고 하였던 表象이나 形式化된 생각을 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병자의 경우 다만 기간만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治癒의 관념 그 자체도 적어도 精神의 어떤 영역에 있어서 순화되고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병자는 “내가 낫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다 끝장이다”라고 울부짖는 경향이 있었다. 치유와 구제를 동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유되지 않아도 끝이 아니라는 것을 추상적으로 인정할 뿐 아니라 자기의 內心 깊은 데서부터 이해한다. 그의 內的 태도는 심각한 변화를 있으키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 病자는 그의 마음의 자유, 즉 休息 혹은 安定의 능력을 되찾게 된다.
이 見地에 설 때 信仰者와 非信仰者의 구별은 그 참뜻을 갖게 된다. 信仰자는 희망의 초월성을 충분히 발휘하는 것이다. 즉 信仰者란 그 초월의 길을, 어떤 넘을 수 없는 障碍에 부딪침없이 걷는 자이다. 이 장애란 말의 의미를 더 명확히 부언한다면 나는 내 희망에 어떤 조건을 붙이는 정도에 따라 계속 일어나는 失意를 극복하는 과정에다 限界를 부가하는 셈이 된다. 그때 나는 내 자신의 ㅡ部를 苦惱에 위탁한다. 실제 나는내가 기대했던 어떤 것(조건)에 있어 나의 기대가 배반된다면 나는 절망을 막을 도리가 없게 된다. 그러나 희망은 다행히도 모든 有限的인 것,조건적인 것을 초월해 가는 本性을 지닌다.
그러므로 어떠한 조건도 어떠한 限界도 두지 않고 절대적 信賴를 품고 있는 자는그로 말미암아 모든 失意를 초월하여 所有(l’avoir)의 철저한 不安定과 대립하는 存在(l'etre)의 安定 혹은 존재에 있어서의 안정을 갖게 된다.
이렇게 하여 희망의 存在論的 基準이 결정된다. 즉 그것은 절대적인 신앙과 끊어 놓을 수 없으며 모든 조건부에서 초월한다. 따라서 이런 희망은 어떠한 表象에서도 초월하는 '?對的 希望'인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절대적 희망이 가능한 唯一의 原動力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절대적 희망은 무한의 존재에 대한 '被造物’ 의 '答’인 것이다. 나는 당신의 무한한 好意에 의해 나를 ?無에서 이끌어 내주신 ‘?對的 당신'(le Toi absolu) 앞에 나를 잠글 때 절망하는 것을 영원히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셀은 절망이란 것을 背反으로 보며 여기에 떨어지는 것은 자신에게 滅亡의 宣告를 내리는 것으로 본다. 절망하는 것은 神이 나에게서 떠나는 것을 宣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르셀은 희망의 形而上學的 純粹性과 급기야는 宗敎的 純粹性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위에서 벌써 본 바와 같이 희망은 所有가 아니고 神秘인 것이다. 따라서 희망한다는 것은 ‘희망에 사는 것' (vivre en esperance) 이라고 해야 한다. 우리는 소유의 手下가 되면 될수록 소모적인 불안의 노예가 되며 단순히 희망한다는 힘 뿐만 아니라 신앙하는 힘도 잃어버리게 된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모든 類의 소유의 지고에서 완전히 해방된 존재만이 희망에 의한 생활의 神聖한 경쾌함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유를 철저히 배제하는 것은 유한한 실존의 매우 무모한 거부일 것이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희망에 젖을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를 덮고 있는 ‘소유’의 갑옷에 생긴 틈새, 찢어진 곳, 즉 우리들의 재산, 지식, 경험, 악습, 특히 우리들의 善德에 틈새가 있기 때문이다. 즉 이런 것들의 所有의 차원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틈새로 소유의 불안정에 시달리면서도 영혼이 희망이란 本然의 호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Homo Viator, Esquisse d'une phenomenologie et d'une metaphysique de I'esperance 참조).
그러므로 마르셀은 희망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희망이란 本質的으로 말해 어떤 交易體驗에 충분히 內的으로 참여한 영혼의 索地(disponibilite)이다. 이런 영혼은 意志와 知識에 대립하여 초월의 행위를 수행하며, 이 행위로 말미암아 비로소 위의 體驗 안에 擔保와 約束을 提供하는 산 永續性을 확인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I'esperance est essentieilement, pourrait-on dire, la disponibilite d'une assez intimement engagee dans une experience de communion pour accomplir l'acte transcendant a I'opposition du vouloir et du connaitre par lequel elle affirme la perennite vivante dont cette experience offre a la fois le gage et le premice. Homo Viator, p. 86).
마르셀의 위와 같은 희망開示는 인간실존 안에 存在論的으로 자리하고 있는 희망의 形而上學性을 드러내 절대자에로 향하는 희망의 本性을 제시할 뿐 아니라 깊은 신비적 修德的, 그리스찬 生마저 실감케 하는 바 있다. 여기서도 우리는 종교적인 것을 철학에 (마르셀이 기꺼이 쓰는 용어이지만) 肉化시킨 마르셀의 아름다운 內面性을 실감할 수 있다.
④ 聖
마르셀은 技術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技術萬能주의에 항거하여 ‘超-技術’ (meta-technique)의 개념을 이끌어들인다. 超-技術의 본래의 장소는 신비의 영역이며 동시에 은총의 영역이다. 이것은 결국 성스리움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성스러움의 말살은 본래적 人間像의 非人格化이며 그 荒廢化인 것이다.
인간에게는 가장 고차적이며 소중한 것으로서 聖스러움의 感情이 있다. 인간은 자연의 雄大性 앞에서 새로운 생명의 출생을 볼 때, 죽음 앞에 서게 될 때 聖스러움, 神聖함, 敬虔함의 느낌을 갖는다. 인간은 또 기억을 멀리 넘어가는 太古의 아득한 옛날로 거슬러가는 想念에서도 어떤 신비스러운 것, 성스러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오늘날 인간이 세계와 자기자신을 기술의 相 아래 보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그 근면한 활동에 의해 세계를 더욱 더 인간의 욕구를 완전히 채울 수 있도록 조직적으로 변형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하여, 즉 技術至上主義的으로 실제적인 人間中心주의가 展開된다. 인간은, 그 자체로서는 의미를 전적으로 상실한 세계에 유일한 원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하여 인간은 더욱 더 自己技術의 ?物 에 경탄케 된다. 기술로 모든 것을 이룩할 수 있다는 思考方式은 급기야는 가장 존엄스러운 인간 生命의 영역에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마르셀 은 인간 생명 살륙뿐 아니라 출생을 저해하는 피임도 격렬히 비난한다. 이런 행위는 자식을 얻는 행위의 가치와 거기 있는 초월적 성격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 출산 행위를 영위하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은 신의 모습으로서의 인간 존재를 取肉〔受肉〕시키는 모든 조건을 채우는 데 한정된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중히 여겨야 할 것은 신에게서 오는 선물인 생명에 인간은 봉사해야 한다. 마르셀은 생명의 전달에 성스러운 성격을 부여한다. 인간은 인간 생명 출산에 있어서 工業生産的 의미로서의 출산자가 아니라 인간을 넘는 무한의 과거로부터 생명을 인간이 미치지 못하는 未來로 운반하는 운반자, 仲介者의 역할을 한다. 인간 생명의 聖性은 그 靈的 근거에서 찾아야 한다. 가정에도 聖스러움이 깃들인다. 특히 父性은 生物學的 의미를 멀리 초월해가는데, 즉 어떤 사명과 끊을래도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성립된다. 이 使命感은 생명 자체에 대한 경건한 태도를 想定한다. 이런 경건성은 역시 생명의 源泉이며 原理인 神에서부터 설명될 것이다.
技術主義思考方式은 생명을 단순히 에너지의 한 樣態로 보며 그것을 마음대로 操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技術至上主義에 있어서는 생명이 어떤 고유의 가치를 갖지 못하며 마치 스위치를 눌러 抹殺할 수 있는 어떤 사물처럼 취급되는 기회가 많아졌다. 大量殺戮도 빈번하여 졌다. 아마도 殺人行爲에 일종의 平價切下 같은 것이 생긴 감마저 든다.
오늘날 거의 人間生 전역을 지배하는 數라는 因子도 聖스러운 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작용한다. 數의 영역은 문제의 영역이며 통계의 영역이다. 이것은 신비의 영역인 聖스러움과는 무관한 것이다.
전체주의 국가나 독재 체제는 거의 예외없이 技術主義로 강력한 사회 통제를 감행하며 거짓 성스러움을 조작해 낸다. 그리고는 강압과 공포로써 자체를 보호한다. 또 다른 편에서는 契約관계에 근거한 세계, 즉 자유로운 합의에 의한 세계이며 名實 兼備한 民主社會의 문제이다. 그 契約이란 것은 그 근저에 誓約, 즉 성스러움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에 의하면 계약도 점점 더 그 聖스러움의 성격을 잃어가며 서로가 이용하는 便法 내지는 그 그물을 빠져나가려는 官僚的 規則으로 타락하였다. 그러기에 인간성은 세계 도처에서 타락 내지 상실 파괴의 위기에 처해진다.
본연의 인간성을 회복하고 수호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聖스러움을 인간성에 되찾아와야 한다는 것이 마르겔의 持論이다. 이 경험적 세계에 나타나오는 성스러움은 그 根抵에 초월적 성격을 지닌다. 다시 말해 聖스러움은 神의 聖性에 근거하며 결국 종교적 의식과 결부된다.
결론적으로 말해 技術時代에 있어서 聖스러운 것은 일종의 改心(conversion)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改心이란 무엇보다도 技術主義的으로 나타난 世界에서 일굴을 돌리는 意識 움직임이다. 여기서 개심은 자유로이 회복된 인간 내면성이다. 물론 이런 內面性은 排他的으로 밀폐된 것이 아니라 他에 더 나아가 초월에 개방된 것이다(Le sacre a I'age technique, 1966. Le declin de la sagesse, 1954 참조).
4. 맺는 말
우리는 위에서 마르셀의 思想을 그리스도敎的 관심에서 간추려 고찰하여 보았다. 初代敎會에 있어서 많은 敎父들, 특히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造詣 깊은 희랍 철학을 십분 활용하여 그리스도敎 敎理를 정립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그 후 저 유명한 民族大移動의 혼란기를 거쳐온 유럽이 새로운 안정과 새로운 질서를 추구, 실현, 滿開시키던 시기에, 명쾌한 이론으로 자연과 인간과 형이상학의 세계를 정립한 아리 스토텔레스의 新思想에 바탕하여 그리스도敎 思想界에 새로운 차원을 열었으며 그 후 西歐文明에 큰 영향을 끼친 토마스 아퀴나스의 출현이 큰 의미를 가졌던 것이라면, 無神化, 唯物化, 技術化, 非人間化로 줄달음 치고 있는 이 세대에 마르셀과 같은 사상가의 출현은 자못 의미심장한 바 있다 하겠다. 물론 마르셀의 사상이 前記한 대(大)사상가들과 비견할 바는 못된다 하더라도 또 그 면모에 있어 판이한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 시대가 요청하는 어떤 빛을 던져준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르셀은 神을 거부하고 불안과 허무와 절망에 던져진 인간 실존에 안정과 신비와 존재 그리고 희망과 充익의 길을 제시하였다. 실존의 美名下에 出口없이 또 밑도 끝도 없이 內在迷路에 헤매이는 안타까운 인간에게 초월의 길을 열어 숨통을 티워준 감마저 든다. 그것도 공허한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實存 廣場에서 누구나가 매일 체험하는 경험, 즉 사랑, 믿음, 희망, 聖 등의 인간실존相에서 출발하여 그것들이 결국 그 본질적으로 요청하고 있는 초월의 길을 제시하며 또다시 초월자에서 인간실존에 생기와 활기를 되찾아 주는 것이다. 마르셀은 확실히 內在와 초월, 超越과 內在 사이를 거침없이 드나들며 양자가 內的으로 상호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것을 인간 실존면에서 윤택하게 묘사한다. 마르셀은 그 晩年作品에 이르러 聖의 개념으로 技術主義에 의해 廢墟化되 어가는 인간성을 守護하려 진력한 데 다시 한번 그의 老練性과 인간圓熟性을 실감케 한다. 물론 우리는 지금 마르셀 이후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 서구에서는 실존철학이 衰落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기에 그 후는 무엇이냐 하는 데 관심이 없을 수 없다. 철학계에 群雄割據의 감도 없지 않으나 역시 희망의 철학, 가톨릭 大學들이 現今 앞을 다투어 講座를 열고 있는 無神論의 문제, 불란서를 그 出處로 하여 지금 한창 先進各國에서 物議를 일으키고있는 構造主義, 그리고 無視 못할 세력으로 등장하여 傳統마르크스主殺 自體에까지도 큰 위협이 되고 있다는 新마르크스主義, 특히 近年 사망한 루카아치(G. Lukacs) 등의 문제는 앞으로의 세대, 특히 그리스도敎界가 당면해야 할 思想的 課題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G. Marc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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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mystere de I'itre I, II (M.E.), 1951.
Le declin de la sagesse (D.S.), 1925.
Le Sucre ? Vage technique (S.A.T.), 1966.
* 괄호 안은 略字
Roger Verneaux, Lefons sur I'existen-tialisme et ses formes principales. I.M. Bochenski, La philosophic contem-poraine en Europe, 1962.
Otto Friedrich Bollnow, Existenzphilo-sopkie, 1969.
Frederick Copleston, Contemporary Philosophy, 1957.
H. Van Straelen, OKano, Gabriel Marcel, 1957.
Enciclopedia Filosofica, Vol.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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