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마루야마 겐지, '물의 가족'

나뭇잎숨결 2018. 5. 31. 19:06

 

 

 

 

 

 

 

 

 

 
   

이 강하고 아름다운 문장에 완전히 압도당했었지요. 이 부분이 소설의 시작인데 곧 이어서, 펜을 쥔 채 책상에 엎드려 죽어 있는 남자를 발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기 자신의 죽은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에요. 읽는 순간 전율이! 이쯤의 문장이라면 언어가 그려내는 것을 영상이 따라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어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감각과 상상력이 더해지기 때문에, 감독이 해석해서 직접 보여주는 영상보다 훨씬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질 수도 있잖아요. 갑자기 “절대 영화화할 수 없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하던 소설가 두 사람이 생각나네요. 하긴 두 분 다 과작이시라….(단지, 신작을 애타게 기다린다는 뜻임^^)

 문학집배원 은희경

 

 

 

마루야마 겐지, <물의 가족>, 현대문학, 1994년

 

 

 

물기척이 심상치 않다. 야에코가 아닌가. 야에코는 나를 만나고 싶어 하고 있다. 나는 아주 늙어버렸다. 나는 고향의 그 누구한테서도 실망당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야에코는 쓱쓱 다가오고 있다. 그래도 나는 조금씩 회복해가고 있다. 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쿠사바 마을의 물이다. 야에코는 이제 나 따위를 상관해서는 안된다. 헤엄치는 자의 기척이 한층 짙어져 오고 있다. 야에코는 지금도 여전히 발랄하다. 그것은 모을 생각으로 모은 것이 아니다. 내 자전거는 녹나무 고목에 기대어져 있다. 나는 자전거를 달린다. 나의 온몸은 점점 가벼워져 간다. 그런데, 그것은 야에코가 아니다. (거북이다) 우리들은 오랫동안 서로 바라보고 있다. 나는 쿠사바 마을의 야경에 매혹당해 있다. 가족은 나를 포기한 것일까. 야에코조차도 나를 잊었을까? 세상은 아주 조용하고 정적에 싸여 있다. 이상한 일은 그뿐만이 아니다. 램프에서 나오는 빛이 여느 때보다 눈부시다. 펜을 쥔 오른손이 보인다.

 

 

 

아무래도 나는 죽어버렸는가보다.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 바다거북이는 나를 마중하러 왔었음에 틀림없다. '내'등에 고달픔이 달라붙어 있다. 야에코는 도대체 피곤이라는 것을 모른다. "다른 데서 살자."라고 나는 세 번 말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이방인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여기에 머물고 있다. 이제 나는 아무도 괴롭히지 않는다. 내가 선택을 잘못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벌써 경직되어 가고 있다. 참새 지저귐이 한층 더 바깥 광선을 강하게 한다. 해방된 나는 여기에 있다. 나는 끝난 것이 아니라, 시작된 것이다. 쿠사바 마을의 물이라고 하는 물은 온통 빛나고 있다. 나는 드디어 쿠사바 마을에 돌아왔다. 무엇 하나 변하지 않은 오 년 후의 모습이다. 나는 비가 되어 쿠사바 마을에 떨어진다. 겨우 한 방울의 비는 물망천을 향한다. 그렇게 해서 빗방울은 부서지고, 사방으로 흩어진다.

 

 

 

나는 살아있는 사람 위에 떨어졌다. 그러자, 봐라. 창백한 젊은 어머니의 얼굴 가득 웃음이 퍼진다. 그러나, 그 아이의 심장은 끄덕도 하지 않는다. 야에코는 낳을 작정으로 낳은 것이다. 야에코는 마음껏 울었다. 야에코는 정말 잘 해냈다. 이십오 년을 헛 산 것이 아니다. 모자(母子)를 태운 차는 길을 따라 달린다. 야에코는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야에코는 노래하면서 웃고 있다. 어머니도 지지 않는다. 야에코는 내가 가르쳐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잊었다라고는 말하지 못하게 하리라. 그래도 여전히 야에코는 노래를 계속한다. 야에코는 자기 자신과 자기 아이를 위해 노래한다. 이것은 마음을 설레게 하는 봄바람이다. 쿠사바 마을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야에코는 신중하게 브레이크 페달을 밟는다. 야에코는 또 먹기 시작한다.

 

 

 

야에코는 아귀산으로 향하고 있다. 할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는 진짜였다. 야에코는 아귀산의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고 있다. 야에코는 노래하고, 아기는 울음을 그친다. 살아남은 힘은 원시림 밖에도 넘치고 있다. 백마를 안심하게 만드는 것은, 조부다. 조부의 눈은 세 가지 것을 동시에 포착하고 있다. 그런데, 백마는 경계 신호를 발한다. 야에코는 대나무 광주리를 끌어안고 조부를 기다린다. 야에코는 거리낌이 없고, 자랑스러운 듯이 지껄인다. 셋은 햇빛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간다.야에코는 먹고 마시고 떠든다. 아귀산은 그 아이를 인정했다. 아무도 그 사실을 막지 못한다. 모두를 침착하게 만드는 것은 조부다. 태양의 빛도 운행도 또한 안정되어 가고 있다. 야에코는 앗하고 소리 지르고 눈을 뜬다. 그 물을 백마가 한 입 마신다. 그러나 어느 말의 눈에도 전율은 보이지 않는다. 조부는 또 바위위에 걸터앉아 느긋하게 자세를 취하고 있다. 조부는 항상 생이 발하는 광채를 지켜보고 있다. 예전에 조부는 나한테 이렇게 말했었다.

 

 

 

쿠사바 마을의 물이 따뜻해져간다. 조부는 어떤 바람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쿠사바 마을에 일몰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황혼의 평온함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말은 긴장해서 풀 뜯기를 그만둔다. 물러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밤은 물소리와 함께 깊어간다. 망자로서의 나는 운이 좋았다. 내가 죽은 것이 정말로 어젯밤일까? 흐르는 물소리가 희미하게 흐트러진다. 배는 온통 어둠의 색으로 칠해져 있다. 오 년 사이에 동생은 변했다. 동생의 성장은 현저하다. 나에게 동생을 탓할 자격 따위는 없다. 무엇보다 동생은 살아 있다. 동생 배는 어느 틈엔지 물망천을 빠져나왔다. 동생은 자기에게 어울리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 형만은 어머니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나는 형을 계속 괴롭혔다. 선생이라도 할 생각이야. 형을 괴롭힌 것은 나만은 아니었다. 형의 고충을 이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내가 쓴 것은 주로 물에 대해서였다. 야에코가 내게서 물을 빼앗아버렸다. 야에코의 목소리는 대나무숲에 빨려들어간다.

 

 

 

아마노나다의 물이 천천히 넘실거린다. 잠수복 속의 사나이는 간악한 무리는 아니다. 동생이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상대는 공포다. 동생은 아직 숙련된 경지에 달해 있지 않다. 그리고 나서 동생은 물욕에 몸을 내맡겨버린다. 쿠사바 마을의 물 또한 나를 잊어버렸다. 걱정인 것은 배 위에 있는 쓰레기들이다. 동생의 신호에 응해서 뚱보가 끈을 잡아당긴다. 여우골목의 여자들은 외지인을 위한 여자들이 아니다. 나는 변태성욕자조차도 되지 못했다. 그 사나이는 진짜 변태성욕자였을까? 그 녀석한테는 쨍쨍 내리쬐는 강한 햇살이 잘 어울렸다. 변태성욕자는 여름 소나기 가운데 서 있었다. 나는 그 녀석 정면에서 발을 멈추었다. 내 걱정은 쓸데없는 기우로 끝났다. 어처구니없는 하루였다. 동생은 어두운 바다 밑을 기어다니고 있다. 아버지 말이 맞았다. 동생은 여전히 바닷속에 있다.나도 이해할 수 있는 한숨이다.

 

 

 

새벽이 다가오고 하늘은 비 기운을 띤다.p100. 나 또한 구제받았다. 따뜻한 봄바람이 아마노나다를 건너간다. 물망천의 물이 나를 인도하고 있다. 나는 졸졸 흘러간다. 나는 흐르고, 여전히 흘러간다. 금붕어만이 살아남아 있다. 나는 잘 기억하고 있다. 물망천은 비탄에 잠길 때도 있다. 우리집은 지금 아주 조용하다. 오 년 뒤의 어머니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때부터 1천하고도 8백여일이 지났다. 양심적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의사는 이렇게 진찰했다. 어머니는 졸고 있다. 이윽고 어머니는 그리운 옛날의 꿈을 꾼다. 어머니와 백발과 주름, 그리고 낙담이 눈에 띤다. 할머니가 불단을 모신 별채에서 지내신 것은 겨우 3일간이었다. 어머니는 지금 아름다운 고향의 꿈을 꾸고 계신다. 어머니의 잠든 얼굴은 고통 때문에 일그러져 있다. 이윽고 바다 쪽에서 검은 구름이 밀려온다. 어머니는 늙은 야생 원숭이처럼 잠을 깬다. 황매화나무 가지 끝에서 청개구리가 떨어져 나간다.

 

 

 

어머니는 나를 생각해내고 야에코를 생각해낸다. 물고기가 몸에 부딪힐 때마다 야에코는 웃었다. 그때 야에코 소리가 멈췄다. 아주 일순간의 일이었다. 집에는 이제 돌아갈 수 없다고 나는 말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옷을 입은 채였지만 나는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유목처럼 표류했다. 그 새벽의 일은 결코 잊지 않고 있다. 나는 셔츠랑 바지가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정오까지 소나무숲에 틀어박혀 있었다. 나는 태양빛에 녹아버리고 싶었다. 태양은 집요하게 나를 따라붙는다. 이윽고 인동꽃 냄새가 다가온다. 피는 길 위에도 있었다. 녀석은 물레방아와 함께 돌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기도 전에 나는 토했다. 나는 아버지를 의심하고 있었다. 물망천 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경찰서의 차가 온통 다 쫓아왔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집을 나왔다 들어갔다했다. 아버지는 제일 먼저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떴다. 저녁식사가 끝날 때쯤, 경찰관이 왔다. 내가 있을 곳은 툇마루의 구석밖에 없었다. "집을 나가자."라고 내가 야에코에게 말했다. 나는 다시 한번 별채로 가다가 그만두었다. <나가겠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 가자키리 다리를 다 건넜을때 나는 떨었다. 어머니는 지금, 별채에서 연못의 금붕어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샛강의 물과 함께 흘러간다. 나날을 무위하게 보내는 망자, 그것이 '나'다. 망자는 창 밖의 폭풍우 소리를 듣는다. 폭우가 차례차례 대나무숲을 스쳐 지나갔다. 수면을 두껍게 뒤덮고 있는 것은 안개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에게 휘감긴 고뇌는 하나도 없다. 출어할 준비는 다 끝났다. 이윽고 아버지는 바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 바람을 감지한다. 아직 돛을 올릴 때가 아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답게 해주는것은 강과 바다이다. 아버지는 안개 속을 누비고 아마노나다 쪽으로 향한다. 그렇다. 아버지는 지금 바다로 돌아가고 있다. 아버지는 돛단배와 함께 해방되어 있다. 나는 아버지 뒤를 이었어야만했다. 아버지는 하늘의 계시에 따라 배를 움직이고 있다. 아버지에게 가족은 필요없는 존재였다. 우리집은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아버지는 다른 아버지들하고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아버지라고 하는 사람은 밥에 국을 부어 먹는다. 아버지는 바다에 나갔었다는 증거로 생선을 가지고 돌아온다.

 

 

 

아버지 혼자만이 여전히 아무 일이 없다. 아버지는 첫손자의 탄생을 알고있는 것일까. 바다 향기와 바다의 맥박이 아버지를 감싼다. 여기서는 아버지 혼자만이 별격이다. 아버지는 가슴을 펴고 안개를 마음껏 들이마신다. 안개는 엷어지고 아버지와 배 그림자가 짙어진다. 아버지 염두에는 어획의 좋고 나쁨은 없다. 아버지는 결코 바다로 도피하는 자가 아니다. 빛의 증폭이 바람을 조금씩 강하게 한다. 아버지는 다시 하구로 돌아오고 있다. 이윽고 신체와 아버지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곶의 그늘에 가려졌던 수면에도 햇빛이 비친다. 물당번 차례가 된 농부가 온다. 아버지는 드디어 끈을 잡아당겨 어망을 걷는다. 터무니없이 큰 물건이 걸린 것이다. 그 거북이다. 해방된 거북이는 돌아본다. 아버지는 돛을 내리고 배를 기슭에 댄다.

 

 

 

세월은 죽은 자에게마저도 쫓아온다. 나는 그러한 '나'를 조용하게 바라볼 수가 있다. 인간이란 그렇게 간단하게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또한 이 세상의 뜻있는 일부인 것이다. 나는 육체가 없는 상태에 피로감을 느낀다. 나는 천연색 꿈을 꼭 끌어안는다. 가족은 노송나무 지붕 오두막을 멀리서 둘러싼다. 형이 세 개의 병을 차례차례 오두막을 향해 던진다. 가족은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 기슭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망자의 꿈은 거기까지다. 대나무숲은 참새소리로 메워져 있다. 아귀산이 검은 구름을 모으고 있다. 학은 어색한 예비비행을 하다 날아오른다. 펄떡거리는 날개소리에는 힘이 넘쳐 흐른다. 학의 똥은 전화선에 달라붙어 있다. 그래도 형수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형수의 목소리는 점차 들뜨기 시작한다. 나는 오년 만에 내 방으로 돌아간다. 이곳은 지금도 내 방이다. 그라나 남아 있는 것은 체취뿐이다. 나는 나의 유류품을 찾아헤맨다. 나는 분명히 이 집의 식구였다.

 

 

이런 취급은 망자보다 더 가혹하다. 정말 기분 나쁜 여자다. 상대방은 형의 속셈을 빤히 들여다본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은 얼마나 형편없는 여자인가.형수는 이미 그럴 생각이다. 그러나 결국은 남자가 밀어붙인다. 속옷까지 바꿔입은 형수는 햇빛 속으로 나간다. 오랫동안 기다려왔어, 라고 형수는 생각한다. 형수는 둑길에 서서 마중오는 것을 기다린다. 잉어기치가 이 세상의 빛을 흐트려놓고 있다. 형수는 언제까지고 그쪽을 바라보고 있다. 건너편 기슭의 대나무숲이 파랗게 굽이치고 있다. 맹족죽 하나하나가 끊임없이 흔들린다. 형수의 교성이 온 집 안에 배어있다. 우리 가족은 형수의 술책에 걸려든 것이다. 욕망에 사로잡힌 형수는 아름답다. 그 변태성욕자는 이미 완전히 소멸되었다. 형수는 지금 그 살인현장에 서 있다. 갑자기 빛 가운데에서 차가 나타난다.

 

 

 

용이 돌풍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다. 두루미도 시로야마 공원쪽으로 도망쳐갔다. p200. 조부의 손은 용을 다루기 위해서 달려 있다. 거기에 있는 것은 여느 때의 조부가 아니다. 석양은 바햐흐로 핏빛이다. 조부도 아버지도 죽을 것을 잊고 있다. 나로 말하면 이 지경이다. 내 죄는 변태성욕자의 그것을 상회하고 있다. 아귀산은 자기자신의 그림자에 반쯤 숨겨져 있다. 용은 선의 화신을 지향하고 있는 게 아니다. 용은 바람소리를 목소리로 바꾸어서 조부에게 묻는다. 조부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바람은 그림자의 힘을 빌려서 더욱 난폭하게 불어제친다. 오늘의 연 놀이에는 특별한 뜻이 있다. 조부의 관심은 살아 있는 자한테만 기울어진다. 야에코의 행복은 해마다 깊어가고 있다. 조부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다. 조모의 임종때가 그랬었다. 조부에게는 얼굴에 나타날 만한 슬픔이란 없다. 그러나 오년 사이에 조부는 변했다. 우리 가족은 이분화되어 있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쿠사바 마을에 구애받는다.

 

 

 

말의 마음은 목초만큼 산란하지는 않다. 온 하늘이 석양으로 불타간다. 꾸불꾸불한 산길 또한 붉다. 아버지는 조수석에서 두 개의 짐꾸러미를 끌어내린다. 아버지는 힘껏 소리친다. 아버지는 발길을 돌려 이번에는 오두막으로 향한다. 아기 울음소리가 아버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자 곧 오두막이 열린다. 지상의 바람이 다시 하늘로 되돌아간다. 태양이 내일을 향해 떨어져간다. 용은 포기해버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조부는 완고하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용은 부정의 힘을 실에 모은다. 조부의 위기가 사라진것은 아니다. 그까짓 일로 뻗을 조부는 아니다. 패배한 하늘의 요괴는 암흑의 힘을 잃는다. 일어나는 조부의 모습이 점처럼 작게 보인다. 연은 강기슭을 씻는 물결에 분해된다. 어스름 달이 물망천에 녹아들고 있다. 강에도, 바다에도, 가족의 기척은 없다.

 

 

 

야생원숭이떼가 계곡의 강을 건너고 있다. 그들은 침묵한 채이다. 공포의 원인은 그들 안에 있다. 깨닫지 않으면 비극이 아니다. 계곡의 강을 건넌 원숭이는 벼랑에 매달린다. 누군가하고 닮았다. 나는 더러운 하수와 함께 개천에 고여있다. 나는 그들 가운데를 방황한다. 이 남자들을 취하게 한 것은 봄바람이다. 낯익은 얼굴이 여럿있다. 완전히 대취해버린 형은 반쯤 정신을 잃고 있다. 형의 위장은 알코올의 바다다. 형의 황홀한 표정이 일변한다. 형은 개울에 비친 달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형수는 남의 차를 타고 있다. 가자키리 다리 직전의 신호가 붉은색으로 변한다. 형의 얼굴은 원망하는 기색을 띠고 일그러져 있다. 그런데 형은 얼마있다 몰매를 맞는다. 실신한 형의 얼굴은 나를 닮았다. 그때 형은 갑자기 바다를 연상한다.

 

 

 

형은 비로소 자기만을 위해서 눈물을 흘린다. 이제 그만두겠어,라고 형은 중얼거린다. 또 닫힌 형의 눈에 보이는 것은 여름바다다. 다시 뜬 형의 눈에 비친 것은 여자다. 그 여자는 피투성이가된 얼굴에 익숙하다. 형은 축 늘어진채 꼼작하지 않는다. 복숭아꽃자수가 형의 눈을 찌른다. 여자 목소리가 형의 취기를 한꺼번에 깨게 한다. 형은 쿠사바 마을에서 제일 지친 사나이다. 여자는 언제까지고 가버릴 기척을 보이지 않는다. 봄 그 자체인 바람이 둘을 감싼다. 둘의 모습은 장식품 인형을 닮았다. 형은 화려한 손수건을 들여다본다. 그렇게해서 둘은 침묵과 부동을 유지한다. 번갯불이 여우골목의 정욕을 비추어낸다. 정전은 쿠사바 마을 전역에 미치고 있다. 여전히 형은 공터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형의 얼굴에 떨어진 것은 큰 빗방울이다.

 

 

 

참새와 봄비가 대나무숲을 빠져나간다. 봄은 황폐한 오두막 안에도 가득 차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절실히 느낀다. 바람도 없는데 대나무잎이 울리고 있다. 야생원생이떼다. 무리를 이끌고 있는 것은 귀가 하나뿐인 큰 원숭이다. 원숭이들은 일제히 지상을 떠난다. 나는 야새원숭이떼와 함께 이동하고 있다. 원숭이들은 대나무숲을 빠져나와 봄빛을 받는다. 큰 원숭이는 봄에 찾아오는 첫 번째 태풍이 찾아온 날부터 제정신을 잃었다. 부하원숭이들의 반응은 큰 원숭이만큼은 아니었다. 원숭이떼에게 들리는 것은 산이 부르는 소리뿐이다. 원숭이에게는 없다 해도 이 내게는 있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흘렀다.야생 원숭이떼는 신록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야에코는 머리 위의 벚꽃을 의식하고 있다. 야에코의 노래는 반복될 때마다 빛난다. 야에코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 야에코는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고 어머니가 되었다. 아기는 젖꼭지를 문 채 잠들어 있다.

 

 

 

야에코의 따뜻한 가슴 속을 내가 스쳐간다. 야에코는 자전거가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차가운 한 줄기 바람이 어머니와 아이를 휩싼다. 집으로 통하는 길이 야에코를 부르고 있다. 야에코한테는 무엇인가를 생각해내는 능력이 없다. 나에게는 이제 되돌아볼 일밖에 없다. 야에코는 현관문을 금방 열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야에코는 기다린다. 둘은 파국 직전에 동시에 입을 다문다. 형은 다시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잘못봤나."라고 형은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형은 근무처에 다시 한번 전화를 건다. 우리집은 형 부부의 소리로 메워져 있다. 염치 모르는 소리는 어머니의 귀에도 도달한다. 금붕어는 나른하고 복숭아꽃은 더 나른하다. 그때 현관문이 덜컹 열린다. 형수의 마디 굵은 손이 아기를 껴안는다. 야에코는 우유병이랑 종이기저귀등을 꺼낸다.

 

 

 

학은 쿠사바 마을과 함께 잠들려고 하고 있다. 학은 아직 내면의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나는 물색의 찬 밤공기와 함께 늪지를 방황한다. 나 또한 피리소리에 이끌려간다. 예전에 아버지는 나와 누이를 위해 피리를 불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피리의 힘을 믿고 있다.

 

 

아버지는 피리를 거친 입술에서 뗀다. 아버지는 평화라든가 안정 같은 것에 짓눌릴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의 용인은 쿠사바 마을 전체에 미친다. 아버지는 다음번 고기잡이를 생각하고 있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 자신에게는 그런 자각이 없다.

 

 

잘 죽은 내가 여기 있다. 형수 얼굴에 어머니의 웃음이 퍼진다. 형은 인스턴트 커피의 거품을 훌쩍인다. 형수는 이제 그따위 사나이를 만나서는 안 된다. 형수는 그 밖의 아무것도 바라서는 안 된다. 나는 쿠사바 마을을 떠나서는 안 되었었다. 우리집의 신성한 신생아가 눈을 뜬다. "어머니한테 보여드리면 어때?" 형수는 아기를 안고 계단을 내려간다. 누워있는 어머니의 몸은 이불보다도 납작하다.

 

 

 

나는 피리소리에 인도되어 쿠사바 마을을 방황한다. 오늘밤 피리에 담겨진 힘은 굉장하다. 모든 것은 쿠사바 마을의 물이 가져다주는 힘이다. 아무도 불행하지 않다.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나를 부르고 있다. 가지 않으면 안된다. 동생은 아직 버림받은 것은 아니다.

 

 

추적하는 배도 지지않고 쫓아온다. 동생은 바닷속에서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있다. 둘 다 겁을 내고 있다. 나이프는 쓰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동생은 아직 내 패거리가 된 게 아니다.

 

 

 

대피리소리가 나를 물망천 쪽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어버지의 피리소리를 어떤 물에도 용해된다. 이 봄 들어 처음인 뱃놀이의 환성이 터진다. 징, 큰북, 샤미센, 노랫소리, 장단 맞추는 소리. 배 가득히 담겨 있는 것은 봄의 정수이다. 어버지는 물러날 시기를 알고 있다. 놀잇배는 수놓은 등수는 삼백을 헤아린다. 아버지의 눈은 딸의 모습을 분명하게 포착했다.

 

 

야에코는 복숭아꽃이 되어서 춤춘다. 야에코는 일을 즐기고 있다. 소년의 가슴에는 한 마리 새가 그려져 있다. 야에코를 희롱하는 취한은 없다. 야에코는 봄의 선두에 서서 춤을 춘다. 그 힘은 동생에게도 확실하게 전달된다. 놀잇배는 방향을 바꾸려고 한다. 이제 소년이 나설 차례이다. 그 주흥에 손님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손님들은 그 자리에 굳어버린다. "거북이라니 봄부터 좋은 징조네." 소년을 간호하는 것은 야에코다. 거북이는 공허한 마음을 안고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쿠사바 마을의 들뜬 밤이 깊어간다.

 

 

 

피리의 명수가 집으로 돌아간다. 어머니다. 아버지는 목욕탕에 들어가 달을 바라본다. 놀잇배 소리는 어머니 귀에도 들려온다. 적막한 아귀산이 달빛을 빨아먹고 있다. 조부는 이제 용연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든세 살에 이르러 조부는 겨우 변했다. 그리고 큰 원숭이는 드디어 분화구 가장자리에 선다. 나는 대나무숲 속의 오두막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나는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오두막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다만 그 뿐이다. 나는 정말 나다운 생애를 보냈던 것이다. 나는 이제 곧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아귀산이 비구름을 착실하게 모으고 있다. 쿠사바 마을이 자랑하는 세 바퀴 큰 물레방아가 돌고 있다. 우리 가족, 그들은 오늘밤에도 살아 있다. 녹나무 고목이 드디어 숨이 끊어지려고 하고 있다. 녹나무가 사라진 공간은 수많은 별로 메워져 있다. 나는 높이높이 상승한다. 두 번 죽었다고도 할 수 있는 나는 여전히 상승한다. 나는 아마 구원받은 것 같다. 나한테 행방을 가르쳐주는 자는 없다.

 

 

물망천은 울면서 흘러간다.